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들이 왜 술에 취한 듯한 상태가 되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입니다. 제목을 기억하실 필요는 없지만, 설교의 내용을 깊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지는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이 앗수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 서 있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남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들의 외교적인 전술과 전통에 갇혀서 심판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간절히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보다는 거절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유치한 말이라고 폄하했고, 어린아이들에게나 전할 말이라고 무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전한 말씀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사 28:12a, 새번역)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이어서 유치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 28:12b, 새번역)
그들이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배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학적 고급 지식이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가 전하는 말이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말을 짜맞추는 것이라고 폄하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들은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를 외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치 ‘blah, blah, blah’ 혹은 ‘이러쿵저러쿵’, ‘어쩌고저쩌고하는구나’라는 말을 외치거나 ‘가나다라’, ‘가갸 거겨’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말씀합니다.
유다 사람이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린다. (사 28:7a, 새번역)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술에 취한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가 결과적으로 앗수르의 군사들을 불러 모으는 전쟁의 신호가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지난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을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왜 그들이 술에 취했는가?’라는 관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아가 술에 취한 결과로 ‘어떤 심판을 받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거절하는 능동이 결국 눈을 감기는 수동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먼저 지난 주일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 29:9~10)
지난 주일에 잠깐 보았듯이, 이 말씀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라는 말씀은 능동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맹인과 술 취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는 ‘능동형’입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능동형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들의 눈을 감기십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세상에 취했습니다. 능동태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영적인 눈을 아예 감겨 버리는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여기서는 수동태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거절할 때가 있습니다. 능동형입니다. “나는 아직 믿지 않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 blah, blah, blah, 어쩌고저쩌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말들은 능동형입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감겨 버리십니다. 수동형입니다. 내가 원하는 때 언제든지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말씀을 거절하는 사태가 계속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완악한 대로 내버려두시는 심판을 단행하실 것입니다. 들을 수 있을 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대로 심판을 들을 수 없게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이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밀봉된 두루마리의 글처럼 될 것이다. 너희가 그 두루마리를 유식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을 좀 읽어 주시오” 하고 내주면, 그는 “두루마리가 밀봉되어 있어서 못 읽겠소” 하고 말할 것이다. (사 29:11, 새번역)
하나님께서 눈을 감기게 하시자, 모든 계시가 밀봉된 두루마리 책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암호처럼 알아볼 수 없는 말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글씨가 바뀐 것이 아니라, 눈이 열리지 않아서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글자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사람, 무식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너희가 그 두루마리를 무식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을 좀 읽어 주시오” 하면, 그는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사 29:12, 새번역)
성경을 읽는데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한국말인데도 말씀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자는 영을 부으시면 우리는 수동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열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무식한 사람,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이 나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이사야서 28~29장의 이야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필 그들이 지금 술에 취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위기가 당장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이라는 군사적인 위기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려 해도 쉽지 않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의 상황에 그들은 하필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거부하다가 결국 영적인 눈이 감겨진 상태였습니다. 맹인이 된 상태인데, 나라는 위기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영적 위기이고, 세상적으로도 위기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깨어 있지를 못합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국가적인 재앙과 전쟁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은 닫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은 그들이 듣지 않았던 데 있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능동적으로 듣지 않았던 데에서부터 출발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대신 인간의 동맹과 애굽을 의지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술에 취한 것입니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마음이 떠난 형식적인 예배와 사람의 계명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본격적으로 왜 이들이 술에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리까지 나가게 되었을까요? 그들도 경건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며 절기마다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성경은 말씀 사이사이에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29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아리엘아, 아리엘아,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아, “해마다 절기들은 돌아오련만, 내가 너 아리엘을 포위하고 치겠다. ‘나의 번제단’이라고 불리던 너를 칠 터이니, 네가 슬퍼하고 통곡할 것이다.” (사 29:1~2, 새번역)
‘아리엘’은 ‘예루살렘’과 동시에 성전의 ‘번제단’을 의미합니다. 그 ‘아리엘’을 향한 흥미로운 내용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해마다 절기들은 돌아오련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면 너희는 늘 같은 제사를 드리고 있다만, 나의 번제단이라고 불리던 그 제단을 이제 내가 치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번제단을 치려고 하십니까? 그들의 제사가 잘못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해마다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제사를 드리고 있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고 있었고, 그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번제단은 이제 심판의 자리가 됩니다. 이러한 관점이 오늘 본문 13절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사 29:13a)
유다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사만 잘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형식만 남겨진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 진정한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b)
유다 백성들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계명만 지키느라 정작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여기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먼 훗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 말씀이 어떤 경우인지를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7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외식을 경고하셨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5장의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때에’라는 부사로 시작됩니다. 어느 때일까요? 바로 앞 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자를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려고 합니다. 14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손을 대는 사람들마다 모두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마 14:35b~36)
그리고 ‘그때에’라는 말로 다음 장인 15장이 이어집니다. 앞의 내용에 이어 뒤의 내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병자들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나음을 얻고 있던 때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모습에 대해 물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마 15:2)
마가복음은 같은 내용을 전하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 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 (막 7:3~4, 새번역)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막 7:1~2)
마태복음이 전하는 내용의 흐름 속에서 흥미로운 점은 ‘손’이라는 이미지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모든 병이 나았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손을 씻는 종교적인 의례에 집착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장로들의 규례에는 손을 씻고 먹어야 하는데,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라고 책망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대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대는 자들마다 모두 나음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장면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겠습니까?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판가름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서라도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결국 손을 대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기적의 현장이 진정한 예배의 자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막 7:5)
그때 예수님께서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6~7)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8~9)
사람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다는 준엄한 말씀입니다.
<욕망을 정당화하는 고르반을 버리고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고르반에 대해 다루시며 하나의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 (막 7:10~13, 새번역)
고르반(קָרְבָּן)은 원래 레위기에 나오는 단어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물건이나 재산을 “고르반!”이라고 선언하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구별된 성물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용도로 쓸 수 없게 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구전 전통을 따라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을 향해서 “이것은 고르반이 되었다”라고 선포하면, 설령 그 재산이 아직 성전에 바쳐지지 않고 자기 손에 있을지라도 ‘타인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성별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연히 부모를 위해서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부모가 부양을 요구할 때, “이 재산은 고르반(하나님께 드릴 예물)이 되어서 부모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부모님께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핑계를 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고르반을 취소하면 그 재물은 다시 그들의 재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방법은 부모 공경의 의무(십계명의 제5계명)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를 잘 모셔야 함에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이유로 재산이 없다며 부모 공경을 외면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꼬집으셨습니다. 고르반은 외견상으로는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하나님께 서원하는 지극히 경건한 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내는 부모에게 들어갈 부양비를 아까워하는 탐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이 만든 구전 전통의 편법으로 무력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영적 도둑질이었고, 더 나아가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엄청난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7~8)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했고, 수백 년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폭로하셨던 ‘그들이 영적으로 술에 취해 비틀거렸던 진짜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독주에 취해 휘청거렸던 이유는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통’이라는 독주, ‘내 욕망을 포장해 주는 종교적 핑계’라는 독주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았고, 해마다 절기를 지켰으며, 입술로는 누구보다도 뜨겁게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찬양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내 재산을 지키고 나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고르반이라는 종교적인 전통을 방패막이로 삼았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헌신자였지만, 속으로는 부모의 것을 훔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영적 도둑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나의 욕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영적인 만취 상태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정작 인생의 진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앗수르의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감겨 버리시는 수동태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까요? 왜 주님의 말씀이 밀봉된 것처럼 이해가 안 되고 다가오지 않을까요?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봅시다. 우리의 예배가 정말 진실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영적인 잠에서 스스로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능동의 삶이 지속된다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고, 송이꿀보다 달던 말씀이 암호처럼 딱딱해지는 수동형의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나음을 입었던 수많은 병자들의 정결한 손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 아니겠습니까? 장로들의 전통과 인간의 규례로 손을 씻었느냐 안 씻었느냐를 따지며 형제들을 정죄하고, 내 이익을 챙기려 했던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손이 되면 안 됩니다. 영적인 비참함과 무능함을 인정하며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붙잡기 위해 간절히 뻗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간절한 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이자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눈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들을 귀가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을 보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전통과 위선의 독주를 과감히 버리고 입술만의 공경이 아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진정한 예배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소망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그러한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Why They Were Drunk
Isaiah 29:9-14
Dear friends, do you remember the title of last week’s sermon? It was “Tsav Letsav, Qav Leqav.” You don’t have to memorize it. But I do hope that you remember the contents of what I preached last week.
Last week, we saw that even though Ariel, that is, Jerusalem where God’s temple lies, was facing a massive crisis due to Assyria, its political and religious leaders did not depend on God but on diplomatic schemes and spiraled toward judgment by being trapped in their religious traditions.
God spoke to them through Isaiah in ways they could understand, but they rejected His words. They scoffed at the message, calling it childish and condescending. What was God’s word to them?
“to whom he said, ‘This is the resting place, let the weary rest’; and, ‘This is the place of repose’—” (Isaiah 28:12 NIV)
Did they reject it because they knew this word so well? The Bible states, “but they would not listen.”
There was another reason they would not listen to Isaiah.
The God they knew and were taught was the God of Israel. They never imagined that God would judge them through Assyria. Reversely, their “sophisticated” theological knowledge prevented them from receiving God’s word.
Accordingly, they rejected God’s word, saying that Isaiah’s message was pieced together by taking bits from here and there. Furthermore, whenever the prophet delivered God’s message, they rejected it outright, saying, “tsav letsav, qav leqav,” which means “blah, blah,” “ga-ga,” or “nursery talk.”
In describing their rejection and incomprehension of God’s word, the Bible uses the image of drunkards:
“And these also stagger from wine and reel from beer.” (Isaiah 28:7a NIV)
Last week, we learned about God’s wrath that falls upon those who reject God’s work, those who are drunk like these. We learned, in particular, that their words “tsav letsav, qav leqav” later became a war signal gathering the Assyrian army.
If last week we looked at the unbelief of Judah who rejected and refused God’s word, today I want to look at how they came to be drunk. I also want to look at the judgment that came upon them as a result of their drunkenness.
Let us revisit the passage we read last Sunday. Shall we read it together?
“Be stunned and amazed, blind yourselves and be sightless; be drunk, but not from wine, stagger, but not from beer. The Lord has brought over you a deep sleep: He has sealed your eyes (the prophets); he has covered your heads (the seers).” (Isaiah 29:9–10 NIV)
I did not finish explaining this last Sunday, but this passage shows how God’s judgment works through a shift from active voice to passive voice.
“Blind yourselves and be sightless” is in the active voice. “Be drunk” and “stagger” are also active. In other words, the attitude of the people rejecting God’s word—living like blind, drunken men—is active. But when they reject God’s words with that attitude, His judgment comes. What does God do? “He has sealed your eyes.” From the standpoint of the people of Israel this is passive. God takes the initiative and closes their eyes.
At first the people themselves rejected God’s word and become intoxicated with the world—active voice. Then God hands down a judgment that closes their spiritual eyes as they had desired—passive voice.
We often reject God’s word of our own accord. We do this actively. “I don’t believe yet. I can’t accept that. It’s only blah, blah.” We sometimes respond like this as we hear God’s word. This is active. We choose to act like this; it is not difficult for us.
But when we do that, God executes judgment. God closes our eyes. Our eyes are closed by Him—passive.
It is a misconception that we can wake up whenever we want. If rejection of the word continues, judgment comes in which God leaves the heart hardened as it is. This is the judgment that follows when one does not receive the word while one is able to hear.
What happens then?
“For you this whole vision is nothing but words sealed in a scroll. And if you give the scroll to someone who can read, and say, ‘Read this, please,’ they will answer, ‘I can’t; it is sealed.’” (Isaiah 29:11 NIV)
Once God closes our eyes, every revelation becomes like the words on a sealed scroll. God’s word becomes a cipher, unintelligible speech. It is not that the letters changed; our eyes are not opened, so we cannot make them out. We hear God’s word but do not perceive it.
What is the result? We become ignorant people who cannot read.
“Or if you give the scroll to someone who cannot read, and say, ‘Read this, please,’ they will answer, ‘I don’t know how to read.’” (Isaiah 29:12 NIV)
The Bible is an amazing book. God’s word is truly amazing.
When God pours out a spirit of deep sleep, we become passive. We cannot open the scroll by our own strength. We become people ignorant of the word, people who don’t know how to read.
Even though the Scriptures are in Korean and we have the ability to read Korean, the Korean Bible does not touch our hearts. That is God’s judgment.
Reading Isaiah chapters 28 and 29, one saddening question stands out: why are they drunk at this very moment? Judah is facing a grave crisis. The military threat of Assyria’s invasion is imminent. Jerusalem is in peril. Yet precisely at that time they are drunk. They have rejected God’s word and, as a result, their spiritual eyes have become closed. They have become blind.
When God’s word ought to come in and save Judah—when Judah needed to hear God’s word clearly in the face of national disaster and the threat of war—their eyes were closed, their hearts were shut, and their ears were covered. That was God’s judgment.
Instead of seeking God in a crisis, Judah’s leaders are intoxicated with political calculations, trusting human alliances and leaning on Egypt. They cannot see God. They do not seek God. They are lost. They are truly drunk.
Now, let’s look more closely at why they became drunk in the first place.
How did they come to the point of rejecting God’s word? They were religious people; they knew God’s name; they offered sacrifices to God. Why did they end up here?
The Scripture states the reasons in various places leading up to that point. This is how Isaiah 29 begins:
“What sorrow awaits Ariel, the City of David. Year after year you celebrate your feasts. Yet I will bring disaster upon you, and there will be much weeping and sorrow. For Jerusalem will become what her name Ariel means— an altar covered with blood.” (Isaiah 29:1–2 NLT)
“Ariel” here refers to Jerusalem. Notice something striking in the text.
“Year after year you celebrate your feasts.” What does this mean? This means that Jerusalem continued to offer sacrifices every year at every religious festival. Yet God says, “Yet I will bring disaster upon you.” He says that he will make Jerusalem an altar covered with blood.
Why does God say He will strike Jerusalem’s altar?
It implies their sacrifices are defective. They have been offering sacrifices every year, but they were not true sacrifices. They were only formal ones.
Thus that altar becomes the place of judgment. They are worshiping, but the worship is not truly offered to God.
This point becomes clearer in verse 13 of today’s passage.
“The Lord says: ‘These people come near to me with their mouth and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Isaiah 29:13a NIV)
The people of Judah and their leaders draw near to God with their mouths and praise Him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Him.
They offered only formal worship. They did not intend to inquire what God’s will is. They thought that as long as the ritual was performed correctly, that was enough. But worship reduced to form without seeking God’s will does not please God. In fact, it is not true worship.
Isaiah adds:
“Their worship of me is based on merely human rules they have been taught.” (Isaiah 29:13b NIV)
Through Isaiah, God says Judah kept merely human commands while performing sacrifices, and so they did not come to know God’s heart or His will.
Jesus later quoted this passage. Matthew and Mark record that reference.
First, Matthew chapter 15.
The story begins with the adverb “Then.” When is “then”? In the preceding chapter, Jesus had been healing the sick at Gennesaret. Many people brought the sick to Him, trying even to touch the fringe of His garment. All who touched it were healed, as the end of chapter 14 reports:
“People brought their sick to him and begged him to let the sick just touch the edge of his cloak, and all who touched it were healed.” (Matthew 14:35b–36 NIV)
It was “then”—when the sick were touching the fringe of Jesus’ garment and being healed—that the Lord’s disciples were seen eating bread without washing their hands. So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who had come from Jerusalem asked Jesus:
“Why do your disciples break the tradition of the elders? They don’t wash their hands before they eat!” (Matthew 15:2 NIV)
Mark tells the same story with the following additional explanation:
“(The Pharisees and all the Jews do not eat unless they give their hands a ceremonial washing, holding to the tradition of the elders. When they come from the marketplace they do not eat unless they wash. And they observe many other traditions, such as the washing of cups, pitchers and kettles.)” (Mark 7:3–4 NIV)
The Pharisees who followed the above traditions saw the disciples eating with unwashed hands:
“The Pharisees and some of the teachers of the law who had come from Jerusalem gathered around Jesus and saw some of his disciples eating food with hands that were defiled, that is, unwashed.” (Mark 7:1–2 NIV)
Notice in Matthew’s flow the recurring image of hands. First, sick people touched the edge of Jesus’ cloak and were healed; immediately after comes the incident of the disciples eating without washing their hands.
How could we describe the hands of the disciples? They were not the hands of the sick. Rather, these hands had likely touched Jesus’ garment countless times. In this sense, they were indeed clean, pure hands that had touched the cloak’s edge of the Son of God. Yet the Pharisees objected when they saw those disciples eat without ritual washing.
“So the Pharisees and teachers of the law asked Jesus, ‘Why don’t your disciples live according to the tradition of the elders instead of eating their food with defiled hands?’” (Mark 7:5 NIV)
Jesus then quoted Isaiah about hypocrites:
“He replied, ‘Isaiah was right when he prophesied about you hypocrites; as it is written: 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y worship me in vain; their teachings are merely human rules.’” (Mark 7:6–7 NIV)
He went on:
“‘You have let go of the commands of God and are holding on to human traditions.’ And he continued, ‘You have a fine way of setting aside the commands of God in order to observe your own traditions!’” (Mark 7:8–9 NIV)
Jesus then addressed the practice known as Corban that was common at that time.
“For Moses said,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and, ‘Anyone who curses their father or mother is to be put to death.’ But you say that if anyone declares that what might have been used to help their father or mother is Corban (that is, devoted to God)—then you no longer let them do anything for their father or mother. Thus you nullify the word of God by your tradition that you have handed down. And you do many things like that.” (Mark 7:10–13 NIV)
Corban (Hebrew: קָרְבָּן) originally appears in Levitical texts and means an offering or gift dedicated to God. If someone declared an object or property “Corban,” it became sacred and set apart to God and could not be used for other purposes.
According to the oral tradition of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if a person declared his property “Corban,” that property became unavailable for others’ use even if it remained in his possession and was not actually offered at the temple.
As a result, people used this as an excuse to evade the duty to support their parents (the fifth commandment of the Ten Commandments): “This property is Corban—dedicated to God—so I cannot give it to my father or mother.”
In short, Jesus is criticizing those who failed to honor their parents by claiming their resources were “given to God.” Outwardly it looked like a pious vow—dedicating one’s prized possessions to God.
But inwardly it was stinginess and greed: they didn’t want to support their parents financially. Since this action used man-made, oral traditions to nullify the absolute law of God,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it was, in spiritual terms, a theft against one’s parents and constituted the sin of failing to honor one’s parents. Yet their traditions enabled such actions and even allowed them to later reclaim their property by canceling the Corban.
Therefore the Lord said:
“You hypocrites! Isaiah was right when he prophesied about you: ‘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Matthew 15:7-8 NIV)
Beloved saints, the real reason Judah was spiritually drunk and staggered is now revealed to us through Isaiah’s warning and Jesus’ thunderous rebuke centuries later.
It was not because they were drunk on wine. It was because they were intoxicated with human tradition, the strong drink that used religious excuses to cover their greed.
They were not ignorant of God’s word. They knew it only too well. They observed festivals yearly and were second to none in honoring and praising God with their lips.
Yet what were they like in reality? They exerted strenuous efforts not to keep God’s commands but to guard their wealth and to satisfy their greed, using the tradition of Corban as a religious shield. Outwardly they were holy, but inwardly they were spiritual thieves who appropriated God’s name while stealing from their parents.
When people begin to justify their desires in God’s name, they fall into a state of spiritual drunkenness. The moment we, as agents, actively reject God’s word and place our thoughts and calculations above God’s will, spiritual paralysis sets in.
What was the result? When the real crisis of life came—when the Assyrian army was at the gates and catastrophe shook their whole lives—the leaders of Judah became blind and saw nothing. God’s judgment came upon them, making them passive and covering their eyes.
Because they would not listen when they could have listened, because they mocked and mutilated the word to suit themselves—“tsav letsav, qav leqav (blah blah blah)”—the voice of God’s salvation became closed like a “sealed scroll” when they desperately needed it. Holding the Scriptures in their hands, they became illiterate and lost their way—this terrifying judgement was of their own making.
Dear brothers and sisters, why do God’s words not reach us? Why do they seem sealed, incomprehensible, and irrelevant?
Let’s examine our lives. Let’s examine ourselves to see if our worship is genuine.
We have to abandon the illusion that we can wake from spiritual sleep whenever we want. If we continue our active rejection of God’s word, at some point a passive judgment will come in which we cannot hear the word of God and the once-sweet words become hard as cipher. Spiritual blindness arrives.
Remember the pure hands of the sick who were healed when they touched the edge of Jesus’ cloak. These hands were not the “religious hands” of the Pharisees who sought only their own interests and judged others on whether they had washed their hands according to the elders’ rituals and human regulations; the hands of the sick were “desperate hands” that clung only to the grace of Jesus, acknowledging their spiritual powerlessness and desperation. These “desperate hands” is what we need.
Beloved friends, listen to the voice of the Lord while your ears are still open and your eyes still see faintly: “This is the resting place, let the weary rest.” Do not reject this clear and simple gospel of love, intended to save us, with theological pride or diplomatic calculations of the world.
Boldly cast away the intoxicating traditions and hypocrisy of men, and become true worshipers who fear God with all your heart—not lip service only. Then, in times of crisis, may we not suffer the judgment that closes our eyes but instead enjoy the amazing grace of salvation where God’s word is a lamp to our feet and a light to our path.
이사야 29:9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들이 왜 술에 취한 듯한 상태가 되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입니다. 제목을 기억하실 필요는 없지만, 설교의 내용을 깊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지는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이 앗수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 서 있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남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들의 외교적인 전술과 전통에 갇혀서 심판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간절히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보다는 거절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유치한 말이라고 폄하했고, 어린아이들에게나 전할 말이라고 무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전한 말씀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사 28:12a, 새번역)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이어서 유치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 28:12b, 새번역)
그들이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배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학적 고급 지식이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가 전하는 말이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말을 짜맞추는 것이라고 폄하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들은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를 외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치 ‘blah, blah, blah’ 혹은 ‘이러쿵저러쿵’, ‘어쩌고저쩌고하는구나’라는 말을 외치거나 ‘가나다라’, ‘가갸 거겨’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말씀합니다.
유다 사람이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린다. (사 28:7a, 새번역)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술에 취한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가 결과적으로 앗수르의 군사들을 불러 모으는 전쟁의 신호가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지난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을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왜 그들이 술에 취했는가?’라는 관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아가 술에 취한 결과로 ‘어떤 심판을 받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거절하는 능동이 결국 눈을 감기는 수동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먼저 지난 주일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 29:9~10)
지난 주일에 잠깐 보았듯이, 이 말씀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라는 말씀은 능동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맹인과 술 취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는 ‘능동형’입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능동형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들의 눈을 감기십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세상에 취했습니다. 능동태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영적인 눈을 아예 감겨 버리는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여기서는 수동태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거절할 때가 있습니다. 능동형입니다. “나는 아직 믿지 않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 blah, blah, blah, 어쩌고저쩌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말들은 능동형입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감겨 버리십니다. 수동형입니다. 내가 원하는 때 언제든지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말씀을 거절하는 사태가 계속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완악한 대로 내버려두시는 심판을 단행하실 것입니다. 들을 수 있을 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대로 심판을 들을 수 없게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이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밀봉된 두루마리의 글처럼 될 것이다. 너희가 그 두루마리를 유식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을 좀 읽어 주시오” 하고 내주면, 그는 “두루마리가 밀봉되어 있어서 못 읽겠소” 하고 말할 것이다. (사 29:11, 새번역)
하나님께서 눈을 감기게 하시자, 모든 계시가 밀봉된 두루마리 책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암호처럼 알아볼 수 없는 말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글씨가 바뀐 것이 아니라, 눈이 열리지 않아서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글자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사람, 무식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너희가 그 두루마리를 무식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을 좀 읽어 주시오” 하면, 그는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사 29:12, 새번역)
성경을 읽는데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한국말인데도 말씀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자는 영을 부으시면 우리는 수동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열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무식한 사람,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이 나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이사야서 28~29장의 이야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필 그들이 지금 술에 취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위기가 당장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이라는 군사적인 위기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려 해도 쉽지 않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의 상황에 그들은 하필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거부하다가 결국 영적인 눈이 감겨진 상태였습니다. 맹인이 된 상태인데, 나라는 위기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영적 위기이고, 세상적으로도 위기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깨어 있지를 못합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국가적인 재앙과 전쟁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은 닫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은 그들이 듣지 않았던 데 있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능동적으로 듣지 않았던 데에서부터 출발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대신 인간의 동맹과 애굽을 의지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술에 취한 것입니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마음이 떠난 형식적인 예배와 사람의 계명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본격적으로 왜 이들이 술에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리까지 나가게 되었을까요? 그들도 경건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며 절기마다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성경은 말씀 사이사이에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29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아리엘아, 아리엘아,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아, “해마다 절기들은 돌아오련만, 내가 너 아리엘을 포위하고 치겠다. ‘나의 번제단’이라고 불리던 너를 칠 터이니, 네가 슬퍼하고 통곡할 것이다.” (사 29:1~2, 새번역)
‘아리엘’은 ‘예루살렘’과 동시에 성전의 ‘번제단’을 의미합니다. 그 ‘아리엘’을 향한 흥미로운 내용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해마다 절기들은 돌아오련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면 너희는 늘 같은 제사를 드리고 있다만, 나의 번제단이라고 불리던 그 제단을 이제 내가 치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번제단을 치려고 하십니까? 그들의 제사가 잘못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해마다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제사를 드리고 있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고 있었고, 그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번제단은 이제 심판의 자리가 됩니다. 이러한 관점이 오늘 본문 13절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사 29:13a)
유다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사만 잘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형식만 남겨진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 진정한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b)
유다 백성들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계명만 지키느라 정작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여기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먼 훗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 말씀이 어떤 경우인지를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7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외식을 경고하셨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5장의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때에’라는 부사로 시작됩니다. 어느 때일까요? 바로 앞 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자를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려고 합니다. 14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손을 대는 사람들마다 모두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마 14:35b~36)
그리고 ‘그때에’라는 말로 다음 장인 15장이 이어집니다. 앞의 내용에 이어 뒤의 내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병자들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나음을 얻고 있던 때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모습에 대해 물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마 15:2)
마가복음은 같은 내용을 전하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 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 (막 7:3~4, 새번역)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막 7:1~2)
마태복음이 전하는 내용의 흐름 속에서 흥미로운 점은 ‘손’이라는 이미지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모든 병이 나았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손을 씻는 종교적인 의례에 집착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장로들의 규례에는 손을 씻고 먹어야 하는데,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라고 책망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대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대는 자들마다 모두 나음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장면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겠습니까?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판가름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서라도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결국 손을 대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기적의 현장이 진정한 예배의 자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막 7:5)
그때 예수님께서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6~7)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8~9)
사람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다는 준엄한 말씀입니다.
<욕망을 정당화하는 고르반을 버리고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고르반에 대해 다루시며 하나의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 (막 7:10~13, 새번역)
고르반(קָרְבָּן)은 원래 레위기에 나오는 단어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물건이나 재산을 “고르반!”이라고 선언하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구별된 성물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용도로 쓸 수 없게 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구전 전통을 따라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을 향해서 “이것은 고르반이 되었다”라고 선포하면, 설령 그 재산이 아직 성전에 바쳐지지 않고 자기 손에 있을지라도 ‘타인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성별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연히 부모를 위해서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부모가 부양을 요구할 때, “이 재산은 고르반(하나님께 드릴 예물)이 되어서 부모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부모님께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핑계를 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고르반을 취소하면 그 재물은 다시 그들의 재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방법은 부모 공경의 의무(십계명의 제5계명)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를 잘 모셔야 함에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이유로 재산이 없다며 부모 공경을 외면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꼬집으셨습니다. 고르반은 외견상으로는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하나님께 서원하는 지극히 경건한 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내는 부모에게 들어갈 부양비를 아까워하는 탐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이 만든 구전 전통의 편법으로 무력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영적 도둑질이었고, 더 나아가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엄청난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7~8)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했고, 수백 년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폭로하셨던 ‘그들이 영적으로 술에 취해 비틀거렸던 진짜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독주에 취해 휘청거렸던 이유는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통’이라는 독주, ‘내 욕망을 포장해 주는 종교적 핑계’라는 독주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았고, 해마다 절기를 지켰으며, 입술로는 누구보다도 뜨겁게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찬양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내 재산을 지키고 나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고르반이라는 종교적인 전통을 방패막이로 삼았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헌신자였지만, 속으로는 부모의 것을 훔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영적 도둑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나의 욕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영적인 만취 상태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정작 인생의 진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앗수르의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감겨 버리시는 수동태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까요? 왜 주님의 말씀이 밀봉된 것처럼 이해가 안 되고 다가오지 않을까요?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봅시다. 우리의 예배가 정말 진실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영적인 잠에서 스스로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능동의 삶이 지속된다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고, 송이꿀보다 달던 말씀이 암호처럼 딱딱해지는 수동형의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나음을 입었던 수많은 병자들의 정결한 손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 아니겠습니까? 장로들의 전통과 인간의 규례로 손을 씻었느냐 안 씻었느냐를 따지며 형제들을 정죄하고, 내 이익을 챙기려 했던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손이 되면 안 됩니다. 영적인 비참함과 무능함을 인정하며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붙잡기 위해 간절히 뻗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간절한 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이자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눈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들을 귀가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을 보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전통과 위선의 독주를 과감히 버리고 입술만의 공경이 아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진정한 예배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소망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그러한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그들이 술에 취한 이유” (사29:9~14)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63, 217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지난 주일에 우리는 남유다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조롱했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왜 그렇게 영적으로 술에 취한 상태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 9~10절에는 능동태와 수동태의 변화가 흥미롭게 나타납니다. “너희는 맹인이 되라”는 능동태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감기셨다”는 수동태입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만, 그것이 계속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적인 눈을 아예 감겨 버리시는 심판이 임합니다. 그 결과 모든 계시가 밀봉된 두루마리처럼 닫혀 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 술에 취하게 되었을까요? 13절이 그 진짜 이유를 보여줍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그들은 해마다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렸지만, 형식만 남은 예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고르반’이라는 종교적 전통을 만들어, 부모께 드려야 할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선언함으로써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헌신자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탐심을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적으로 술에 취해 비틀거렸던 진짜 이유였습니다. 포도주에 취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전통’이라는 독주, ‘내 욕망을 포장해 주는 종교적 핑계’라는 독주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정작 인생의 진짜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손에 쥐고도 까막눈이 되어 길을 잃어버리는 무서운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진실한지 돌아보십시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나음을 입었던 병자들의 정결한 손을 기억하십시오. 손을 씻었느냐 따지며 형제를 정죄하던 바리새인의 종교적인 손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은혜만을 붙잡기 위해 뻗었던 그 간절한 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직 들을 귀가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인간의 전통과 위선의 독주를 과감히 쏟아버리고, 입술만의 공경이 아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짜 예배자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능동적 거절이 결국 수동적 영적 마비로 이어진다는 말씀이 어떻게 다가왔는지 나누어 봅시다.
2. 마음을 다한 예배가 되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종교적 핑계로 포장하는 위선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입술만의 공경이 아니라 온 맘 다해 주님을 경외하며, 일상의 작은 계명에도 순종하는 진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직 들을 귀가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속히 영적 잠에서 깨어나 오직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간절히 붙잡는 정결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