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함의 번짐을 위한 노력이 맹목적인 열정이 되어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026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선함의 번짐’이라는 주제어를 함께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선함의 번짐을 서로 격려하며 함께해 왔습니다. 선함의 번짐은 특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임을 우리가 확인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선함이 실천될 때 그것은 단순히 착한 일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몸의 전체 구조를 영적으로 재배열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선함의 번짐은 교회의 관계망 속에서 따뜻한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누군가가 자기 몫을 떼어 기쁨으로 드릴 때, 또 누군가가 시간을 내어 즐겁게 섬길 때, 그 움직임은 공동체의 공기를 바꾸고 사람들의 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선함의 상향 평준화’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 흐름이 모여서 줄기를 이룰 때, 교회는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서게 되는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선함의 번짐을 마음으로 다짐하고 실천하면서 2026년 상반기를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의 첫 주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선함의 번짐’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더 선함의 번짐을 잘 만들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 S. 루이스가 쓴 『네 가지 사랑』(The Four Loves, 196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책에서 한 말 가운데 매우 자극적이면서도 공감이 가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은 그것이 신이 되는 순간 악마가 된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사랑은 그 절정에서 스스로에게 신적인 권위를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목소리는 마치 하나님 자신의 뜻인 양 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가를 따지지 말라 하고,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다른 모든 요청을 짓밟으려고 하고, 사랑을 위해 진심으로 행한 것이라면, 그 어떤 행동도 정당하며 심지어 칭찬받을 만하다고 슬며시 속삭인다. … 그러면 그 사랑은 신이 되고, 이내 악마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를 파괴하고,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고 만다. 신이 되도록 허용된 자연스러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랑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증오의 복잡한 형태가 되어 버릴 수 있다.”
한번 곱씹어 볼 만한 문장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해 본다면, 사랑을 위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옳다는 논리는 악마로 변질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나친 단계로 올라가면, 자칫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악마화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도 그러합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자부심과 열정이 극한 상황으로 올라가면, 내가 나가는 집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나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매국노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증오하고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신이 되는 순간 악마가 된다는 말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선함의 번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선함의 번짐을 위해 함께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선한 일이다. 이렇게 해야만 선함이 번져 간다”라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악마를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선함의 번짐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혹시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하고 때로는 정죄하고 못마땅해하며 비난하곤 합니다. 선함으로 시작했는데 결과는 분쟁이나 비난으로 마감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시작은 선함이지만, 악함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선함이 넘쳤던 빌립보 교회 안에서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깊은 갈등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빌립보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만큼 관계가 아름답고 따뜻했던 교회도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 여정에서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자 위로의 원천이었던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교회입니다. 유럽 대륙에 최초로 세운 기념비적인 교회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굶주릴 때 먹을 것과 쓸 것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고립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위로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에 대한 사랑이 깊었고, 선함과 나눔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던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를 세웠지만, 그의 모든 사역을 끊임없이 도왔던 유일한 교회가 어찌 보면 빌립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지고 완벽해 보이는 빌립보 교회 안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의 두 기둥이자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동역하고 있던 두 명의 핵심 여성 리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마음을 합하지 못하고 깊은 갈등의 늪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좋은 사람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도 선한 일로 인해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실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러한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보곤 합니다. 선함 자체가 신이 되려고 할 때,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면, 바울이 편지 말미에서 두 여인의 이름을 심각하게 호명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2)
이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러 온 나쁜 사람들이나 이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위대한 동역자이자, 빌립보 교회의 기둥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여전도회 회장 또는 권사회 회장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교회를 사랑했고, 모두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의 이름이 모두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까지 칭찬하였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3)
그들은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선한 일을 하고 있던 주님의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둘이 나뉘어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인데도 서로 분열해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하게 분열해 있었는지, 수백 킬로 떨어진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의 귀에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영원한 기록에도 그들의 이름이 박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깊어지는 사랑과 선함에는 성숙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왜 싸웠을까요?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악해서였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두 사람 다 교회를 너무나도 사랑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일을 잘해 보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오디아의 기획안도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아주 좋은 계획이었을 것이고, 순두게의 아이디어도 영혼을 위한 아주 좋은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악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을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해서 그 결과까지 항상 선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분별이 없는 선의는 때로 도리어 상대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그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우리도 교회 여러 부서나 구역에서, 또는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가정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같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 좋은 뜻, 선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돌아보면 상처만 남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 안에서,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 안에서, 또한 교회 교사들 사이에서나 여러 자리 안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비극적인 결말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들의 이름을 책망하기 이전에, 편지를 시작하는 1장에서 기도의 형식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그 뜨거운 사랑과 선함이 제발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원한다”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빌 1:9~10a, 새번역)
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이 더 커진다’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또한 ‘사랑이 더욱 성숙해진다’라는 뜻은 어떤 뜻일까요? 만약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커진다고 하면, 그 사랑은 어떻게 해서 커졌다고 판가름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아이에게 도시락을 싸 주는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도시락에 더 많은 반찬을 넣어 주면 사랑이 커졌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도시락에 반찬이 줄어들면 사랑이 줄어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전에 먹던 것보다 훨씬 더 좋고 값비싼 반찬을 넣어 주면 사랑이 더 커졌다,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커짐과 작아짐을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커지는 것과 성숙은 그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표현될 수 있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인지를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정도가 깊어진다”라는 것은 양이 늘어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지식으로 인해 지혜로 보완되고 수정되어서 실천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이 더 성숙해졌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가장 적합하게 채워 갈 때, 우리는 사랑이 성숙해져 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함의 실천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에게 뜨거운 사랑과 선함이 있는 것을 내가 안다. 하지만 그 사랑과 선함이 이제는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해지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열정도 냉소적인 세상의 방법도 선함의 번짐을 이루지 못합니다.>
맹인 안내견이 받는 훈련 중에 가장 어렵고 중요한 훈련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능적인 거역(Intelligent Disobedience)’ 훈련입니다. 시각장애인인 주인이 길을 가다가 “앞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면 착한 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반응하면 맹인 안내견이 될 수 없습니다. 앞에 공사 중인 구덩이가 있거나 달려오는 차가 있다면 안내견은 주인의 명령보다는 자리에 멈춰 서서 주인의 몸을 막아서야 합니다. 주인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내견에게 매우 중요한 훈련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도 ‘앞으로 가!’라고 할 때 그대로 순종하는 열정과 주인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구덩이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자리에 섰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가라는 명령에 따라 그저 전진만 한다면 그들은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총명과 분별이 이런 것입니다. 열심이 아무리 뜨거워도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고 무조건 돌진하는 것은 나와 공동체를 구덩이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 또는 무조건 열정을 내어 마구 뿜어 대는 것은 어떤 것도 대책 없는 사랑일 뿐입니다. 진짜 선함은 공동체에 선함이 아름답게 번져 갈 수 있도록 평화를 깨지 않습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바르게 설 수 있고, 걸어갈 줄도, 뛰어갈 줄도 아는 걸음이 지혜의 발걸음입니다.
10절 말씀처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 의견이 아무리 좋아도, 공동체의 하나 됨을 해친다면 그것은 차선일 뿐이며 최선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극히 좋은 것으로 택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손해를 봐야 하고 내 주장을 접어야 하더라도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평화를 선택하는 것이 진짜 지혜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언급한 것 중에 ‘고슴도치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온몸에 날카로운 가시를 지닌 고슴도치 몇 마리가 추위를 이기지 못해서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기 위해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갑니다. 하지만 거리를 좁히면 좁힐수록 상대방의 날카로운 가시가 서로의 살을 찔러 아픔을 줍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한 고슴도치들은 결국 서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바람이 밀려오자 그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다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다가서면 가시에 찔려서 아프고, 떨어지면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은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고슴도치들은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반복합니다. 결국은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찾아냅니다. 이것이 고슴도치 딜레마입니다.
우리가 종종 선한 일을 하면서 불화를 겪는 일이 이런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은 고슴도치의 딜레마와 매우 닮아 보입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따뜻한 온기를 갈망하고, 복음 전파라는 선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공동체 안으로 모여듭니다. 영적인 거리가 가까워지고 함께 사역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우리 자아 속에 숨어 있던 날카로운 이기심의 가시, 고집의 가시, 자신의 스타일과 의로움의 가시가 튀어나옵니다. 결국 그 가시가 동역자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 버립니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다가 결국은 “나 이제 봉사하지 않을 거야”, “교회 일 그만둘 거야”라고 말하면서 마음의 거리를 멀리하고 영적으로 냉랭해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쇼펜하우어는 인간 사회 안에서 상처받지 않도록 일정한 ‘격식과 거리 두기’라는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거리 두기는 소극적인 방식입니다. 실제로 선함이나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게 되면 결국은 부정적인 결과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스스로 물러나게 함으로 자신은 보호할지 모르지만, 공동체 안에 선함의 번짐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모든 분이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 공동체는 어떻게 선함을 만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듯해 보이는 세상의 지식은 결국은 우리 공동체를 살려 내지 못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가는 참된 지식은 선함의 번짐을 이루는 첫걸음입니다.>
바울은 지하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러한 세상의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영적인 해결책을 선포합니다. 가시를 피하려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가시 돋친 존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지혜 안에서 어떻게 진정한 영적인 연대와 ‘선함의 번짐’을 이룰 수 있는지, 그 본질적인 해결의 길을 오늘 본문의 기도 속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 화해하라고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한쪽의 손을 들어 주면서 시시비비를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열정과 선함의 에너지가 찌르는 가시가 되지 않고, 온 세상을 살리는 아름다운 선함의 번짐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장 9절 말씀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9)
바울이 말하는 첫 번째는 ‘지식’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이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적 정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깊은 친밀함 속에서 흘러나오는 온전한 실천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깨달아 아는 것을 지식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지식을 빌립보서 2장과 4장에서는 ‘마음’이라고 달리 표현합니다. 우선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2)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마음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2장에서 그 마음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어떻게 선함을 실천할 것인가? 어떻게 선함을 바르게 번져 가게 할 것인가? 선함의 방식은 거리 두기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 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던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선함의 번짐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선함의 번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며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사도 바울은 다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1~4)
<상대를 헤아리는 영적 총명과 허물없는 진실함이 온전한 선함의 번짐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모든 총명’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 영적 감각이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상대방의 형편과 아픔을 민감하게 헤아릴 줄 아는 영적 관찰력과 통찰력을 뜻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영적 감성 지능(EQ) 혹은 영적 공감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주장이 성경적으로 아무리 옳아 보일지라도, 지금 내 앞에 있는 동역자가 나의 거친 말투 때문에 상처받고 있지는 않은지, 공동체의 연약한 지체들이 시험에 들지는 않았는지 분별해 내는 예리한 영적 센스가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선함의 번짐을 이루어가는 데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허물없는 진실함’입니다.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 1:10b)
바울은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실함’을 뜻하는 헬라어는 ‘태양 빛에 비추어 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도자기의 상태를 구별할 때 밝은 빛에 내어놓고 구멍이나 흠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과 같습니다. 즉, 겉과 속이 같고 동기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어 하거나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숨은 동기가 섞이면, 그 선함은 순수함을 잃고 ‘허물’이 됩니다. 진짜 선함의 번짐은 허물이 없는 진실함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진실함과 다른 지체를 실족하게 하지 않는지 깊이 살피는 조심성으로 해 나갈 때, 그곳에 아름다운 의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026년 상반기 동안 ‘선함의 번짐’이라는 귀한 은혜의 통로를 따라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반기라는 새로운 믿음의 지평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반기에는 우리의 선함이 한 단계 더 성숙해지면 좋겠습니다. 분별력 없는 맹목적인 열정으로 서로에게 가시가 되는 멈춤 없는 돌진을 이제 잠시 내려놓읍시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참된 지식을 더합시다. 지체의 아픔과 영적인 상황을 민감하게 살피는 영적인 총명의 옷으로 갈아입읍시다. 나를 드러내지 않는 순수한 진실함으로 섬기며 걸어갑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함이 독선과 폭력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진정한 지혜의 걸음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 지혜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갈 때, 우리 교회가 속한 모든 공동체와 가정 속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Spreading Goodness: Taking Wise Steps
Philippians 1:9-11
Dear friends, at the start of 2026 we decided to pursue the theme “The Spread of Goodness.” During the past few months, we encouraged each other to spread goodness. We confirmed that spreading goodness is an essential virtue of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When goodness is practiced within the church, it does not merely add one more good work, but spiritually restructures the whole body of Christ.
The spread of goodness creates a kind and gentle atmosphere in church relationships. When someone gladly gives or makes time to serve joyfully, such actions change the atmosphere of the community and refreshes people’s perceptions. Earlier this year, we defined this as “the upward leveling of goodness.” When this flow becomes a current, the church comes to possess a vitality that builds itself up in love.
We have spent the first half of this year trying to practice goodness within the church with a resolve to spread goodness. And now, the second half of 2026 has begun.
Today, I want to reexamine this year’s theme “The Spread of Goodness.” I want us to think about how we can better spread goodness.
The Four Loves is a book by C. S. Lewis. In it Lewis writes a poignant but relatable sentence: “Love, having become a god, becomes a demon.”
He also writes:
“Every human love, at its height, has a tendency to claim for itself a divine authority. Its voice tends to sound as if it were the will of God Himself. It tells us not to count the cost, it demands of us a total commitment, it attempts to over-ride all other claims and insinuates that any action which is sincerely done ‘for love’s sake’ is thereby lawful and even meritorious.” (Lewis, The Four Loves)
“[…] Then they become gods: then they become demons. Then they will destroy us, and also destroy themselves. For natural loves that are allowed to become gods do not remain loves. They are still called so, but can become in fact complicated forms of hatred.” (Lewis, The Four Loves)
To put it simply, the logic that anything done for love is right can become demonic. The moment one says that everything is justified because it was done for love, that goodness can become violence and may have entered the stage of demonization.
A mother loves her child. But that love, at its height, may no longer be love and become violence and a demon.
Patriotism is the same. When my pride and passion in loving my country become extreme, others who don’t take part in my rallies begin to look like shameless people with no love for the nation, and those who do not share my views begin to look like traitors. We come to hate and condemn those who are not like us. The moment love becomes a god, it becomes a demon.
The spread of goodness is the same. We strive together to spread goodness. But the moment the spread of goodness becomes a god, we may face a demon. “This is a good thing. We must do this to spread goodness…” The moment we hold a powerful conviction like that, we may face a demon.
Yes. We can work with passion to spread goodness. But when we spot someone who is not like me, we become frustrated and sometimes condemn, disapprove, and criticize him/her. It started with goodness, but ends in conflict and condemnation. It started with goodness, but concludes with evil.
Today’s passage is from Philippians. You may know about the church at Philippi well. As far as we know, there was no other church whose relationship with the Apostle Paul was as beautiful and warm as the Philippian church.
The church at Philippi was the strongest supporter and source of comfort in Paul’s missionary journeys. It was the first, monumental church that Paul established in the European continent during his second missionary journey.
When Paul was preaching the gospel and went hungry, the church at Philippi sent food and supplies; when he was imprisoned and isolated, they risked danger to send Epaphroditus to comfort him. They truly loved Paul and had a great passion for good works and sharing.
But even this admirable, seemingly perfect Philippian church had problems. Two key female leaders who had partnered with Paul in the gospel—Euodia and Syntyche—could not agree with one another and had fallen into a deep conflict.
The quarrel between Euodia and Syntyche was, in short, a war among good people.
Can good people wage war? Can they fight because of good deeds? Actually, yes. We often see such things in the church.
When the pursuit of goodness becomes a god, the likelihood of such fights increases.
So in Philippians 4:2, near the end of his letter, Paul solemnly calls out the names of the two women:
“I plead with Euodia and I plead with Syntyche to be of the same mind in the Lord.” (Philippians 4:2 NIV)
They were not evil people or heretics trying to destroy the church. They were great coworkers who labored with Paul for the gospel, pillars of the Philippian church—the women’s group leader or the head deaconess, in today’s terms. Both loved the church and both had good intentions.
Paul even says their names are written in the book of life:
“Yes, and I ask you, my true companion, help these women since they have contended at my side in the cause of the gospel, along with Clement and the rest of my co-workers, whose names are in the book of life.” (Philippians 4:3 NIV)
Yet they were divided. Good people, but divided.
Their division was so severe that the rumor reached Paul in a Roman prison hundreds of kilometers away. You could say that because of this division their names got recorded in the eternal Book, the Bible.
Here we must ask an important question: why did these two women fight? Was one evil and the other good? No.
Both loved the church deeply. Both had “good intentions” to do God’s work well. Euodia’s plan would have been for the “good” of the church, and Syntyche’s idea, too, would have been for the “good” of souls.
Tragically, however, the tragedy began right there. They did not fight because either was evil, but because each refused to concede on the “goodness” she believed in.
“From my experience, this is loving the church!” “No, my way is the goodness God wants!” Insisting on being right turned them into thorns that pierced one another and split the community.
Having “good intentions” does not guarantee that the outcomes will always be good. Good will that lacks understanding and discernment of the counterpart can sometimes inflict the deepest wounds. Euodia and Syntyche fell into precisely this trap: their intentions were good, but their lack of wisdom hurt each other.
What about us? Are we, by any chance, acting like Euodia and Syntyche in our church departments, in our small groups, or even within the family we love most? We clearly begin with good motives and a loving heart—so why do we often end up leaving only wounds?
Paul seems to have anticipated this tragic outcome. So before rebuking the two women at the letter’s end, he uses the form of prayer at the start of the letter to teach them what they need. He writes that he dearly hopes their passion for love and goodness will abound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so that you may be able to discern what is best […].” (Philippians 1:9–10a NIV)
Brothers and sisters, what must we do to make love abound more and more? How does love become more mature?
How can a mother’s love for her child increase? Let’s say she packs her child’s lunch. Would she love her child more if she packed more food? If she packed better, more expensive food? Would her love be more mature if she delivered the lunch herself right before lunchtime?
The growth and maturity of love—aren’t they expressed by loving wisely?
It is important to know what the child wants. Then we must try to express our love in the best way that is most appropriate for the child. Discernment is critical. Love deepens when it is complemented, corrected, and practiced with knowledge and wisdom. Then we can say that love has become more mature.
The same principle also applies to the practice of goodness.
Paul does not say the Philippians have no love. Nor does he scold them for lacking goodness. He acknowledges that they have fervent love and goodness; but he urges them to now add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to their love and goodness.
Here “knowledge” means knowing the heart and standards of God; and “insight” means spiritual insight that perceives the situation and the other person’s heart. In other words, love without the wisdom that considers God’s heart and love without the insight that considers others’ souls—no matter how passionate—can become “my righteousness” and turn into violence against others.
Among the hardest and most important trainings for guide dogs for the blind is “intelligent disobedience.” A dog that faithfully obeys its visually impaired owner may seem good, but what if the owner commands “Forward!” and there is a construction pit or a car ahead? The dog must reject the command, stop immediately, or physically block the owner—for the owner cannot see.
Euodia and Syntyche had a passion and love for God that can be compared to the blind owner’s command “Forward!” But before them lay an unseen spiritual pit. This is precisely why Paul stressed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No matter how fervent our zeal, if we do not stop at a certain moment to seek God’s will, that unconditional charge can plunge us and the community into a pit.
Enduring blindly or unleashing my passion is merely thoughtless goodness. For true goodness to spread beautifully in the community, we need to take “wise steps”—that is, we must be able to stop and reflect on the Word of God to see if my zeal is hurting the peace of the community.
As verse 10 says, we must discern what is “best.” Even if my view seems good, if it breaks the unity of the community, it is only second-best, not the best. Even if I suffer a little or withdraw my claim, choosing the peace of Christ’s body, the church, is true wisdom.
The spread of goodness matures precisely through such knowledge and insight.
You may have heard of the “Hedgehog’s Dilemma” mentioned by the German philosopher Arthur Schopenhauer.
On a cold winter day, several hedgehogs with sharp spines gathered because they could not withstand the cold. They drew near to warm their bodies with each other’s heat. But the closer they came, the more their sharp quills pierced one another’s flesh and caused deep pain. Unable to endure the pain, the hedgehogs eventually had to move far apart. When the fierce winter wind came again, they could not bear the cold and began to creep together once more. In this paradox—nearness brings painful pricks, distance brings freezing—hedgehogs, through trial and error, finally found an appropriate minimum distance that allowed them to share warmth without wounding one another. This is the Hedgehog’s Dilemma.
The conflicts we often experience while doing good resemble this exactly. Many of the disputes and divisions in the church mirror the Hedgehog’s Dilemma. Yearning for the warm heat of the Lord’s love and carrying out the good mission of gospel proclamation, we gather within the community. As spiritual closeness grows and we spend more time serving together, the sharp quills of hidden selfishness, stubbornness, personal style, and self-righteousness spring out and pierce the hearts of coworkers mercilessly. After piercing and hurting each other, many end up saying, “I won’t serve anymore!” or “I’m quitting church work!”—putting emotional distance between themselves and growing spiritually cold.
How then can we overcome this Hedgehog’s Dilemma? Schopenhauer proposed a social solution of maintaining certain formalities and distance to avoid being hurt.
But that method is passive and produces the negative result of preventing the giving and receiving of goodness and love. It is the world’s way. This may enable us to protect ourselves by retreating, using self-interest to avoid pain, but in doing so the spread of goodness often stops.
From a dungeon, Paul proclaims to the Philippians a spiritual solution of a completely different dimension that is not of the world. In his prayer of today’s passage, he doesn’t tell the Philippians to distance themselves from each other to avoid being hurt, but teaches them the fundamental solution to reaching true spiritual unity and spreading goodness through the blood of Christ and wisdom.
First, Paul does not simply scold Euodia and Syntyche in the midst of their conflict to stop fighting and reconcile. He does not take sides to settle the dispute. Paul introduces the first step they must take so that their zeal and energy for goodness will not become destructive quills but a life-giving spread of goodness to the whole world. Let’s look at verse 9: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 (Philippians 1:9 NIV)
First, Paul prays for knowledge. The knowledge mentioned in Scripture is not merely intellectual information that we know in our heads. It is a whole, practical knowledge that flows from a deep, personal fellowship and intimacy with God. In other words, it is a state of deeply understanding and perceiving God’s will and Christ’s heart and not holding to my own thoughts.
That is why Paul describes this knowledge as having the same “mind” in the Lord in Philippians 2 and 4.
He first tells the two women to have the same mind:
“I plead with Euodia and I plead with Syntyche to be of the same mind in the Lord.” (Philippians 4:2 NIV)
So what mind must they have? Paul teaches them in Philippians 2: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used to his own advantage; rather, he made himself nothing by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 And 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 he humbled himself by becoming obedient to death— even death on a cross!” (Philippians 2:6–8 NIV)
This is the mind and knowledge that those who want to spread goodness must possess. Paul restates this knowledge as follows:
“Therefore if you have any encouragement from being united with Christ, if any comfort from his love, if any common sharing in the Spirit, if any tenderness and compassion, then make my joy complete by being like-minded, having the same love, being one in spirit and of one mind. Do nothing out of selfish ambition or vain conceit. Rather, in humility value others above yourselves, not looking to your own interests but each of you to the interests of the others.” (Philippians 2:1–4 NIV)
A humble heart and the attitude of esteeming others above oneself are the true knowledge they must have.
Paul also speaks of “depth of insight.” This refers to a moral or spiritual sense or the spiritual observation and insight that sensitively consider other people’s circumstances and pain in concrete situations. Today we might call it emotional intelligence (EQ) or spiritual empathy. No matter how biblically sound my argument may seem, keen spiritual sense is needed to discern whether my coworker is hurt by my rough tone or whether the weak members of the community are being put to the test.
One more attitude essential to the spread of goodness is this: we must be pure and blameless.
“[…] and may be pure and blameless for the day of Christ.” (Philippians 1:10b NIV)
Paul teaches the saints in Philippi to be pure and blameless for the day of Christ. Here the original Greek for “pure” is “ειλικρινής (eilikrinis),” which means “without spot or shame even when exposed to sunlight.” Applied to a person, it signifies one who is the same on the inside and outside and whose motive is pure.
If, in doing good, we have a hidden motive to make a name for ourselves or to prove our righteousness, that goodness loses its purity and becomes a blemish.
The true spread of goodness begins with a pure sincerity that wants nothing in return and is completed by carefully examining whether my actions might have caused another member to stumble.
Finally, Paul shows us the ultimate goal to which our wise steps should lead us. Let’s look at verse 11: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Philippians 1:11 NIV)
Beloved, how can we move beyond conflicts like those witnessed between Euodia and Syntyche, remove our hedgehog quills, and accomplish the true spread of goodness? Paul declares it is possible only “through Jesus Christ.”
Brothers and sisters, during the first half of 2026 we pursued “The Spread of Goodness.” Now, we are facing a new horizon in our faith journey, that is, the second half of the year. May our goodness mature one step more in the second half. Let us lay down our relentless charges that pierce others with blind, undiscerning zeal. Let us add true knowledge that discerns the heart of God. Let us also have spiritual insight that allows us to sensitively consider the pains and conditions of our members. Let us walk in pure sincerity that does not seek to exalt ourselves. May our goodness not become self-righteousness or violence, but truly wise steps that follow the heart of Christ.
When we keep taking these wise steps without stopping, all the communities and homes belonging to our church will be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the Lord delights in.
빌립보서 1:9~11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선함의 번짐을 위한 노력이 맹목적인 열정이 되어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026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선함의 번짐’이라는 주제어를 함께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선함의 번짐을 서로 격려하며 함께해 왔습니다. 선함의 번짐은 특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임을 우리가 확인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선함이 실천될 때 그것은 단순히 착한 일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몸의 전체 구조를 영적으로 재배열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선함의 번짐은 교회의 관계망 속에서 따뜻한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누군가가 자기 몫을 떼어 기쁨으로 드릴 때, 또 누군가가 시간을 내어 즐겁게 섬길 때, 그 움직임은 공동체의 공기를 바꾸고 사람들의 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선함의 상향 평준화’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 흐름이 모여서 줄기를 이룰 때, 교회는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서게 되는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선함의 번짐을 마음으로 다짐하고 실천하면서 2026년 상반기를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의 첫 주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선함의 번짐’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더 선함의 번짐을 잘 만들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 S. 루이스가 쓴 『네 가지 사랑』(The Four Loves, 196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책에서 한 말 가운데 매우 자극적이면서도 공감이 가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은 그것이 신이 되는 순간 악마가 된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사랑은 그 절정에서 스스로에게 신적인 권위를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목소리는 마치 하나님 자신의 뜻인 양 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가를 따지지 말라 하고,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다른 모든 요청을 짓밟으려고 하고, 사랑을 위해 진심으로 행한 것이라면, 그 어떤 행동도 정당하며 심지어 칭찬받을 만하다고 슬며시 속삭인다. … 그러면 그 사랑은 신이 되고, 이내 악마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를 파괴하고,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고 만다. 신이 되도록 허용된 자연스러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랑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증오의 복잡한 형태가 되어 버릴 수 있다.”
한번 곱씹어 볼 만한 문장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해 본다면, 사랑을 위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옳다는 논리는 악마로 변질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나친 단계로 올라가면, 자칫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악마화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도 그러합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자부심과 열정이 극한 상황으로 올라가면, 내가 나가는 집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나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매국노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증오하고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신이 되는 순간 악마가 된다는 말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선함의 번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선함의 번짐을 위해 함께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선한 일이다. 이렇게 해야만 선함이 번져 간다”라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악마를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선함의 번짐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혹시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하고 때로는 정죄하고 못마땅해하며 비난하곤 합니다. 선함으로 시작했는데 결과는 분쟁이나 비난으로 마감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시작은 선함이지만, 악함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선함이 넘쳤던 빌립보 교회 안에서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깊은 갈등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빌립보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만큼 관계가 아름답고 따뜻했던 교회도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 여정에서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자 위로의 원천이었던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교회입니다. 유럽 대륙에 최초로 세운 기념비적인 교회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굶주릴 때 먹을 것과 쓸 것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고립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위로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에 대한 사랑이 깊었고, 선함과 나눔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던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를 세웠지만, 그의 모든 사역을 끊임없이 도왔던 유일한 교회가 어찌 보면 빌립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지고 완벽해 보이는 빌립보 교회 안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의 두 기둥이자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동역하고 있던 두 명의 핵심 여성 리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마음을 합하지 못하고 깊은 갈등의 늪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좋은 사람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도 선한 일로 인해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실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러한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보곤 합니다. 선함 자체가 신이 되려고 할 때,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면, 바울이 편지 말미에서 두 여인의 이름을 심각하게 호명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2)
이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러 온 나쁜 사람들이나 이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위대한 동역자이자, 빌립보 교회의 기둥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여전도회 회장 또는 권사회 회장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교회를 사랑했고, 모두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의 이름이 모두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까지 칭찬하였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3)
그들은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선한 일을 하고 있던 주님의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둘이 나뉘어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인데도 서로 분열해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하게 분열해 있었는지, 수백 킬로 떨어진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의 귀에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영원한 기록에도 그들의 이름이 박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깊어지는 사랑과 선함에는 성숙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왜 싸웠을까요?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악해서였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두 사람 다 교회를 너무나도 사랑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일을 잘해 보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오디아의 기획안도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아주 좋은 계획이었을 것이고, 순두게의 아이디어도 영혼을 위한 아주 좋은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악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을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해서 그 결과까지 항상 선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분별이 없는 선의는 때로 도리어 상대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그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우리도 교회 여러 부서나 구역에서, 또는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가정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같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 좋은 뜻, 선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돌아보면 상처만 남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 안에서,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 안에서, 또한 교회 교사들 사이에서나 여러 자리 안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비극적인 결말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들의 이름을 책망하기 이전에, 편지를 시작하는 1장에서 기도의 형식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그 뜨거운 사랑과 선함이 제발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원한다”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빌 1:9~10a, 새번역)
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이 더 커진다’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또한 ‘사랑이 더욱 성숙해진다’라는 뜻은 어떤 뜻일까요? 만약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커진다고 하면, 그 사랑은 어떻게 해서 커졌다고 판가름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아이에게 도시락을 싸 주는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도시락에 더 많은 반찬을 넣어 주면 사랑이 커졌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도시락에 반찬이 줄어들면 사랑이 줄어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전에 먹던 것보다 훨씬 더 좋고 값비싼 반찬을 넣어 주면 사랑이 더 커졌다,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커짐과 작아짐을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커지는 것과 성숙은 그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표현될 수 있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인지를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정도가 깊어진다”라는 것은 양이 늘어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지식으로 인해 지혜로 보완되고 수정되어서 실천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이 더 성숙해졌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가장 적합하게 채워 갈 때, 우리는 사랑이 성숙해져 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함의 실천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에게 뜨거운 사랑과 선함이 있는 것을 내가 안다. 하지만 그 사랑과 선함이 이제는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해지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열정도 냉소적인 세상의 방법도 선함의 번짐을 이루지 못합니다.>
맹인 안내견이 받는 훈련 중에 가장 어렵고 중요한 훈련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능적인 거역(Intelligent Disobedience)’ 훈련입니다. 시각장애인인 주인이 길을 가다가 “앞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면 착한 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반응하면 맹인 안내견이 될 수 없습니다. 앞에 공사 중인 구덩이가 있거나 달려오는 차가 있다면 안내견은 주인의 명령보다는 자리에 멈춰 서서 주인의 몸을 막아서야 합니다. 주인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내견에게 매우 중요한 훈련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도 ‘앞으로 가!’라고 할 때 그대로 순종하는 열정과 주인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구덩이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자리에 섰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가라는 명령에 따라 그저 전진만 한다면 그들은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총명과 분별이 이런 것입니다. 열심이 아무리 뜨거워도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고 무조건 돌진하는 것은 나와 공동체를 구덩이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 또는 무조건 열정을 내어 마구 뿜어 대는 것은 어떤 것도 대책 없는 사랑일 뿐입니다. 진짜 선함은 공동체에 선함이 아름답게 번져 갈 수 있도록 평화를 깨지 않습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바르게 설 수 있고, 걸어갈 줄도, 뛰어갈 줄도 아는 걸음이 지혜의 발걸음입니다.
10절 말씀처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 의견이 아무리 좋아도, 공동체의 하나 됨을 해친다면 그것은 차선일 뿐이며 최선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극히 좋은 것으로 택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손해를 봐야 하고 내 주장을 접어야 하더라도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평화를 선택하는 것이 진짜 지혜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언급한 것 중에 ‘고슴도치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온몸에 날카로운 가시를 지닌 고슴도치 몇 마리가 추위를 이기지 못해서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기 위해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갑니다. 하지만 거리를 좁히면 좁힐수록 상대방의 날카로운 가시가 서로의 살을 찔러 아픔을 줍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한 고슴도치들은 결국 서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바람이 밀려오자 그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다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다가서면 가시에 찔려서 아프고, 떨어지면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은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고슴도치들은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반복합니다. 결국은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찾아냅니다. 이것이 고슴도치 딜레마입니다.
우리가 종종 선한 일을 하면서 불화를 겪는 일이 이런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은 고슴도치의 딜레마와 매우 닮아 보입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따뜻한 온기를 갈망하고, 복음 전파라는 선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공동체 안으로 모여듭니다. 영적인 거리가 가까워지고 함께 사역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우리 자아 속에 숨어 있던 날카로운 이기심의 가시, 고집의 가시, 자신의 스타일과 의로움의 가시가 튀어나옵니다. 결국 그 가시가 동역자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 버립니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다가 결국은 “나 이제 봉사하지 않을 거야”, “교회 일 그만둘 거야”라고 말하면서 마음의 거리를 멀리하고 영적으로 냉랭해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쇼펜하우어는 인간 사회 안에서 상처받지 않도록 일정한 ‘격식과 거리 두기’라는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거리 두기는 소극적인 방식입니다. 실제로 선함이나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게 되면 결국은 부정적인 결과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스스로 물러나게 함으로 자신은 보호할지 모르지만, 공동체 안에 선함의 번짐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모든 분이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 공동체는 어떻게 선함을 만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듯해 보이는 세상의 지식은 결국은 우리 공동체를 살려 내지 못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가는 참된 지식은 선함의 번짐을 이루는 첫걸음입니다.>
바울은 지하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러한 세상의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영적인 해결책을 선포합니다. 가시를 피하려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가시 돋친 존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지혜 안에서 어떻게 진정한 영적인 연대와 ‘선함의 번짐’을 이룰 수 있는지, 그 본질적인 해결의 길을 오늘 본문의 기도 속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 화해하라고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한쪽의 손을 들어 주면서 시시비비를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열정과 선함의 에너지가 찌르는 가시가 되지 않고, 온 세상을 살리는 아름다운 선함의 번짐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장 9절 말씀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9)
바울이 말하는 첫 번째는 ‘지식’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이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적 정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깊은 친밀함 속에서 흘러나오는 온전한 실천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깨달아 아는 것을 지식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지식을 빌립보서 2장과 4장에서는 ‘마음’이라고 달리 표현합니다. 우선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2)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마음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2장에서 그 마음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어떻게 선함을 실천할 것인가? 어떻게 선함을 바르게 번져 가게 할 것인가? 선함의 방식은 거리 두기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 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던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선함의 번짐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선함의 번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며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사도 바울은 다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1~4)
<상대를 헤아리는 영적 총명과 허물없는 진실함이 온전한 선함의 번짐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모든 총명’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 영적 감각이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상대방의 형편과 아픔을 민감하게 헤아릴 줄 아는 영적 관찰력과 통찰력을 뜻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영적 감성 지능(EQ) 혹은 영적 공감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주장이 성경적으로 아무리 옳아 보일지라도, 지금 내 앞에 있는 동역자가 나의 거친 말투 때문에 상처받고 있지는 않은지, 공동체의 연약한 지체들이 시험에 들지는 않았는지 분별해 내는 예리한 영적 센스가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선함의 번짐을 이루어가는 데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허물없는 진실함’입니다.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 1:10b)
바울은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실함’을 뜻하는 헬라어는 ‘태양 빛에 비추어 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도자기의 상태를 구별할 때 밝은 빛에 내어놓고 구멍이나 흠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과 같습니다. 즉, 겉과 속이 같고 동기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어 하거나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숨은 동기가 섞이면, 그 선함은 순수함을 잃고 ‘허물’이 됩니다. 진짜 선함의 번짐은 허물이 없는 진실함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진실함과 다른 지체를 실족하게 하지 않는지 깊이 살피는 조심성으로 해 나갈 때, 그곳에 아름다운 의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026년 상반기 동안 ‘선함의 번짐’이라는 귀한 은혜의 통로를 따라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반기라는 새로운 믿음의 지평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반기에는 우리의 선함이 한 단계 더 성숙해지면 좋겠습니다. 분별력 없는 맹목적인 열정으로 서로에게 가시가 되는 멈춤 없는 돌진을 이제 잠시 내려놓읍시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참된 지식을 더합시다. 지체의 아픔과 영적인 상황을 민감하게 살피는 영적인 총명의 옷으로 갈아입읍시다. 나를 드러내지 않는 순수한 진실함으로 섬기며 걸어갑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함이 독선과 폭력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진정한 지혜의 걸음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 지혜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갈 때, 우리 교회가 속한 모든 공동체와 가정 속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선함의 번짐, 지혜의 걸음으로” (빌 1:9~11)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484, 218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 오히려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관계에 금이 갔던 경험이 있다면 나눌 수 있는만큼 나누어 주세요.
<설교의 요약>
우리는 2026년 상반기 동안 ‘선함의 번짐’을 함께 붙잡고 서로를 격려해 왔습니다. 그런데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뜨거운 경고를 던집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신의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 오히려 악마적인 폭력으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도, 나라를 향한 애국심도, 심지어 교회를 향한 선한 열심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는 이 위험이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가장 신실한 동역자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성 리더가 서로 마음을 합하지 못해 깊은 갈등에 빠진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악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믿는 ‘선함’이 너무나 확고했기에 서로 양보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분별없는 선의는 오히려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구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자기를 비우는 겸손을 아는 것이며, 총명은 상대방의 아픔을 헤아리는 영적 분별력입니다. 마치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안내견이 때로는 주인의 명령을 거역해야 하듯, 우리의 열심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 멈추어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의 딜레마’처럼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공동체 안에서, 세상은 거리 두기를 해법으로 제시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자기 비움을 해법으로 제시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의 결단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히는 열매이며, 그 열매의 목적은 나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입니다.
<나누기>
1. C. S. 루이스는 “사랑은 그것이 신이 되는 순간 악마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신념이나 열심 중에, 혹시 절대화되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은 없는지 나누어 봅시다.
2. 유오디아와 순두게처럼 나도 누군가와 ‘서로 다른 선함’을 주장하다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다면, 그때 내게 부족했던 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지식과 총명(분별력)이었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선한 의도만 앞세운 채 분별과 지혜 없이 달려가다 서로에게 가시가 되었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의 뜨거운 열정에 주님의 마음을 아는 참된 지식과, 형제의 아픔을 헤아리는 영적 총명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드러내려는 고집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우리의 모든 걸음이 독선과 폭력이 아닌 진정한 지혜의 걸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삶과 공동체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