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님, 나의 사랑, 나의 자랑

요한복음 21:15~17

김지철 목사

2026.08.16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바울, 그리고 베드로 등이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성경책을 읽으면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2016년 미국의 한 기독교 웹사이트에서 예수님을 제외한 성경 인물들을 대상으로 비공식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거기에서 1위는 요셉도, 바울도 아니고, 베드로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가 가장 완벽했기 때문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나 자신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다혈질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제자보다 용감하게 예수님을 따른 제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주 실수하고 때로는 처절하게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곧바로 예수님에게 책망받던 인물이었습니다(마 16:16). 그는 물 위를 용감하게 걷다가도 물속으로 빠지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생명까지도 드린다고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베드로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한 특징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님과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많은 서사들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관해서 많이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예수님과 함께 나눈 사건들이 있었는가?’ ‘성공과 실패를 예수님과 함께 살아 냈던 경험들이 있는가?’ ‘내 이야기에 예수님을 잠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새롭게 쓰도록 나 자신을 맡긴 경험이 있는가?’ 이것이 신앙의 깊이와 넓이, 높이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런 사건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베드로는 실패의 자리인 숯불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밤에 베드로는 큰 소리를 외치면서 장담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내 목숨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뒤에 대제사장의 뜰 앞에서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어떤 성경 변역본에 보면 “나는 저 사람을 향해서 부인하면서 저주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거부와 부인의 장소를 요한복음 18장에서는 숯불이라고 지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만 부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까지 상실합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동자가 자기를 돌이켜 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인지를 깨달으면서 통곡했습니다. 그에게는 “나는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제자”라고 믿었던 자신의 자화상이 하나하나, 산산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신 장면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바닷가에도 18장의 사건처럼 숯불이 있었습니다. 18장에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자리에 숯불이 있었고, 21장에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자리에 숯불이 피워져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숯불은 부인의 자리였고, 두 번째 숯불은 회복의 자리였습니다.

첫 번째 숯불은 밤이었고, 두 번째 숯불은 아침이었습니다. 첫 번째 숯불에서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두 번째 숯불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 식탁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요 21:12)

 

요샛말로 말하면 “이리 와, 나하고 같이 밥 먹자”라는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너무 감격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앞에 다 흩어지고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가장 먼저 “이리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숯불도 베드로가 잡아 온 고기를 굽기 위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그를 먹이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시기 전에 베드로를 먹이셨습니다.

저는 이 장면 속에서 복음의 역사를 다시 기억해 봅니다. 복음은 항상 명령보다 식탁이 먼저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을 이웃에게 나눠 주는 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에 내 마음은 굉장히 옹졸하고 이기적입니다. 항상 사명은 은혜가 더 앞서 있습니다.

 

<사랑의 질문은 베드로를 다시 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15절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라는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식사를 나누면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따뜻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

 

예수님은 베드로를 게바라고 부르지 않고 옛날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아마 다시 시작하자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나를 배반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다시 실패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느냐?”라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대할 때 능력을 보면서 대하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잘할 것인가를 보면서 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 신뢰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있는지를 먼저 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때로는 업적 때문에, 때로는 상대방의 능력 때문에 사람을 만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관계성’입니다. ‘이 사람은 신뢰할 만한가?’ ‘이 사람은 사랑할 만한가?’ ‘그 사람이 나를 향해서 어떻게 했는가?’ 관계성이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인한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대하신 방법은 트라우마같이 자기 안에 갇힌 억눌림에서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자신감을 가졌는지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과 신뢰가 있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에는 사랑과 신뢰가 있어야 진정한 관계가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근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은 그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반의 상처 속에 갇힌 마음을 사랑 앞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부름 앞에 베드로는 섰습니다. 과거 같았으면 큰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데요.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그러나 이제 그는 그렇게 장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

 

이 고백은 2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내 모습 그대로를 아십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얼마나 빨리 무너지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내 속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것, 예수님만을 소중한 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주님을 향한 신뢰로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다른 이들 앞에 과시하고 증명하려던 태도에서부터 예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실패를 통해서 자신을 덜 믿고, 예수님을 더 믿게 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란 이와 같습니다. 나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나설 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오히려 “나는 다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 성숙하는 모습입니다. 예수 믿는 나 자신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부족하고 넘어져도 내가 신뢰할 분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흔들릴 때마다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아시며, 그 속에서도 우리의 작은 사랑을 기다리고 계신 분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위기는 언제 다가오는 것일까요? 예배는 습관적으로 드리는데,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건이 없을 때 옵니다. 찬송은 부르지만, 그 찬송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자꾸만 결핍될 때 그렇습니다. 교회 일은 많이 하는데, 내 속에 참된 기쁨이 생기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물으십니다. “정말 내가 너의 사랑이냐? 내가 너의 기쁨, 너의 자랑이냐? 다른 어떤 것보다 내가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이냐?”

 

<회복된 사랑은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베드로의 대답마다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 17)

 

내 양을 치라 (요 21:1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입니다. 교회는 늘 예수님의 것입니다. 목회자나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영적 지도자의 잘못된 생각에 있습니다. 성도는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를 위해서 충성하고 사랑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양’은 예수님이 생명을 내어 주고 사신 주님의 귀한 양입니다.

예수님은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사람들을 맡기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패한 사람이 다른 실패한 사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 곁에 다가가 그들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상처받은 사람이 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사람을 공격하고 찌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주님 앞에 나왔다면, 주님의 말씀과 은총,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의 상처가 먼저 치유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가 축복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끌어안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은혜로 다루어진 상처는 긍휼이 되어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베드로에게는 자기 자랑은 하나씩 무너지고, 예수님의 자랑이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본래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도 그는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그것 또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자기 방식의 분노가 있었지만, 진정한 예수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에 칼을 쥐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주님의 양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열정을 깨뜨리지 않고 베드로의 열정을 정화하셨습니다. 칼을 드는 열정에서 양을 돌보는 따뜻한 열정으로, 사랑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때로 거룩한 분노도 필요합니다. 약한 사람이 짓밟힐 때 아파하며 교회가 복음의 중심에서 벗어날 때, 탄식하는 열정과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열정입니다. 그런데 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나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와 사회를 향해 분노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나는가?’ ‘그래서 사람이 회복되는가?’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가?’

복음서에 등장한 베드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읽어 보면 베드로의 생애 속에 이웃이 안 나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자기가 높아지려는 마음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주위에 사람들이 생깁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 사람들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인생길을 가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이용하는 수단으로 삼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복음서의 베드로와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누구를 사랑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옛날 독일에서 공부할 때가 떠오릅니다. 논문이 뜻대로 진척되지 않고,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든 것이 막막했습니다. 불확실성의 미래 앞에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제 미래는 어떻게 전개되겠습니까?” 그때 마치 환청처럼 제 마음 깊이 다가온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평생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한마디였습니다.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저는 이 말씀을 받고서 제가 가졌던 걱정과 근심들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흔들리고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이 다시 제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이것저것 근심하는 거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 물음들을 통해 다시 주님 앞에 돌아가려 합니다. ‘주님을 다시 사랑하는가?’ ‘주님만으로 만족하는가?’ ‘내 속에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권이 있는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인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신앙 경력을 묻지 않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애썼는지 성과를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오래 믿고 헌신했는지를 물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묻고 계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내 삶 전체에 예수님 한 분으로 내가 만족할 수 있는가? 우리는 베드로처럼 큰소리도 칠 수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고백할 뿐입니다. “주님, 주님이 저를 아시잖아요. 그러나 내 사랑이 자꾸 흔들립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첫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고백이 내 삶 속에 확인되고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면, 예배가 의무의 자리가 아닌 사랑스러운 분과의 만남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습관적으로 불렀던 찬송이 내 영혼의 고백처럼 울려 나옵니다. 한때 예수님을 부끄러워했던 입술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을 자랑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직업과 역할이 다 다를 것입니다. 가정주부로, 공부하는 사람으로, 직장인으로, 기업인으로, 문화예술인으로, 어떤 사람은 정치인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상관이 없습니다. 젊은 분들도, 나이든 어른 분들도 다 괜찮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한,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은 다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이 맡기신 일을 내가 감당하면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이것은 인생을 내 마음과 욕심대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 내 삶의 뿌리가 되면, 즉 내가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건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남녀노소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겸손히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일까? 확인된다면 너무 주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너무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오히려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펴며 하나님께서 내 속에 말씀하시는 대로 내가 행하겠다고 고백합시다. 일도, 사람 만나는 것도 두려움 없이 한 발짝, 한 발짝 가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때마다 확인해야 할 것은 내가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지 돌이켜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사랑해요. 예수님 내가 사랑해요. 성령님 도와주세요.” 그 마음이 확인되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자율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 믿는 것은 책임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사랑할 줄 알면서 과감하게 자기 인생을 도전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Jesus, My Love, My Pride

 

John 21:15–17

Rev. Kim Ji-Cheol

 

The Bible features countless characters: Abraham, Joseph, Moses, David, Paul, Peter… Who do you like most? In 2016, a Christian website in the United States held an unofficial poll of Bible characters (excluding Jesus), and Peter came in first. Why? Probably not because he was the most perfect, but because he resembled us the most.

 

Peter followed Jesus more bravely than anyone, yet he often made mistakes and fell apart miserably. He confess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but was immediately reprimanded; he walked on the water and then began to sink. He loudly declared his love for Jesus, but at a decisive moment he was overcome by fear.

 

What is faith? It is not merely knowing a lot about Jesus. It is living through life’s joys and sorrows, successes and failures, together with Jesus. It is not briefly inviting Jesus into my story, but entrusting myself so that Jesus’ story rewrites my life.

 

  1. Two charcoal fires: Jesus meets Peter again at the place of failure

 

On the night Jesus was arrested, Peter vowed, “I will lay down my life for you.” But a few hours later, in the high priest’s courtyard by a charcoal fire, he denied Jesus three times. οὐκ εἰμί — “I am not.”

 

He denied not only Jesus but even his identity as a disciple. The rooster crowed, and Jesus turned and looked at him. Peter went outside and wept bitterly. The self-image of “I am the most faithful disciple” was shattered.

 

The risen Jesus came to that very Peter. And by the Sea of Galilee in John 21 there was another charcoal fire. Both chapters 18 and 21 use the same word, ἀνθρακιά, “charcoal fire.”

 

The first charcoal fire was the place of denial; the second charcoal fire was the place of restoration. The first fire was at night; the second was in the morning. At the first charcoal fire Peter kept his distance and watched Jesus from afar, but at the second charcoal fire Jesus had set a table and was waiting.

 

“Come and have breakfast.” (John 21:12 NIV)

 

Jesus did not rebuke the failed Peter first. He fed him first. Before commanding Peter to feed the sheep, Jesus fed Peter. The gospel places the table before the command, grace before the mission.

 

  1. The question of love revived Peter

 

After they had eaten, Jesus asked,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He did not ask, “Why did you betray me?” or “Can you promise you will never fail again?” For Jesus what mattered more was not ability but relationship. Love came before mission.

 

When Peter heard Jesus’ question the third time he was hurt. But that pain was not meant to destroy him; it was meant to draw the heart trapped in the wound of denial back toward love. Now Peter no longer makes grand promises. He says, “Lord, you know all things; you know that I love you.” σὺ πάντα οἶδας — “Lord, you know all things.”

 

Previously he had said, “Lord, I will lay down my life for you.” Now he confesses, “You know me.” He has moved from self-assurance to trust in the Lord, from someone trying to prove himself to someone who entrusts himself. Through failure Peter learned to believe himself less, but to believe Jesus more deeply.

 

Growing in faith does not mean becoming a person who will never waver. It means knowing whom to return to whenever you waver. The Lord knows our weakness and fear, and even the small love that seeks Him in the midst of them. So today He still asks, “Am I your love? Am I your joy? Am I your pride?”

 

  1. Restored love flows out to people

 

Whenever Peter confessed his love, Jesus said, “Feed my sheep.” The important phrase is “my sheep.” The church is not the possession of pastors, nor are the congregation resources for success. All are the Lord’s sheep for whom Jesus gave his life.

 

To the failed Peter, Jesus entrusted people. A person who has failed embraces other failing people; one who is wounded stands by the wounded. Unhealed wounds wound others, but wounds handled with grace become compassion that embraces people. Now Peter’s self-boasting is gone and his boasting of Jesus begins.

 

Closing

 

While studying in Germany my thesis did not progress as I wished and the future looked bleak. For a long time I asked God, “God, how will you use me? What will my future be?” Then a word came deep into my heart: “You are only for me.”

 

I wanted an answer about the future, but God first asked about my love: “Do you really love me?”

 

Today the Lord still asks about love before our faith résumé or achievements. We cannot boast loudly like Peter. We can only confess: “Lord, you know. My love is small and wavering, but you know I cannot live without you.”

 

The joy of faith does not lie in me holding onto the Lord to the end. It is that even when I let go, the Lord does not let go of me.

 

Augustine said, “Love, and do what you will.” If you love the Lord, your place in life becomes your place of mission. Whether at home or at work, whether young or old, it does not matter. Love the Lord and love the people he has entrusted to you.

 

Jesus is our love. Jesus is our joy. Jesus is our pride.

 

May you be blessed people who love the Lord freely and fully and boast in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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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5~17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바울, 그리고 베드로 등이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성경책을 읽으면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2016년 미국의 한 기독교 웹사이트에서 예수님을 제외한 성경 인물들을 대상으로 비공식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거기에서 1위는 요셉도, 바울도 아니고, 베드로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가 가장 완벽했기 때문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나 자신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다혈질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제자보다 용감하게 예수님을 따른 제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주 실수하고 때로는 처절하게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곧바로 예수님에게 책망받던 인물이었습니다(마 16:16). 그는 물 위를 용감하게 걷다가도 물속으로 빠지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생명까지도 드린다고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베드로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한 특징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님과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많은 서사들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관해서 많이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예수님과 함께 나눈 사건들이 있었는가?’ ‘성공과 실패를 예수님과 함께 살아 냈던 경험들이 있는가?’ ‘내 이야기에 예수님을 잠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새롭게 쓰도록 나 자신을 맡긴 경험이 있는가?’ 이것이 신앙의 깊이와 넓이, 높이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런 사건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베드로는 실패의 자리인 숯불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밤에 베드로는 큰 소리를 외치면서 장담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내 목숨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뒤에 대제사장의 뜰 앞에서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어떤 성경 변역본에 보면 “나는 저 사람을 향해서 부인하면서 저주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거부와 부인의 장소를 요한복음 18장에서는 숯불이라고 지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만 부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까지 상실합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동자가 자기를 돌이켜 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인지를 깨달으면서 통곡했습니다. 그에게는 “나는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제자”라고 믿었던 자신의 자화상이 하나하나, 산산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신 장면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바닷가에도 18장의 사건처럼 숯불이 있었습니다. 18장에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자리에 숯불이 있었고, 21장에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자리에 숯불이 피워져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숯불은 부인의 자리였고, 두 번째 숯불은 회복의 자리였습니다.

첫 번째 숯불은 밤이었고, 두 번째 숯불은 아침이었습니다. 첫 번째 숯불에서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두 번째 숯불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 식탁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요 21:12)

 

요샛말로 말하면 “이리 와, 나하고 같이 밥 먹자”라는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너무 감격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앞에 다 흩어지고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가장 먼저 “이리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숯불도 베드로가 잡아 온 고기를 굽기 위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그를 먹이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시기 전에 베드로를 먹이셨습니다.

저는 이 장면 속에서 복음의 역사를 다시 기억해 봅니다. 복음은 항상 명령보다 식탁이 먼저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을 이웃에게 나눠 주는 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에 내 마음은 굉장히 옹졸하고 이기적입니다. 항상 사명은 은혜가 더 앞서 있습니다.

 

<사랑의 질문은 베드로를 다시 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15절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라는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식사를 나누면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따뜻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

 

예수님은 베드로를 게바라고 부르지 않고 옛날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아마 다시 시작하자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나를 배반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다시 실패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느냐?”라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대할 때 능력을 보면서 대하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잘할 것인가를 보면서 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 신뢰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있는지를 먼저 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때로는 업적 때문에, 때로는 상대방의 능력 때문에 사람을 만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관계성’입니다. ‘이 사람은 신뢰할 만한가?’ ‘이 사람은 사랑할 만한가?’ ‘그 사람이 나를 향해서 어떻게 했는가?’ 관계성이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인한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대하신 방법은 트라우마같이 자기 안에 갇힌 억눌림에서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자신감을 가졌는지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과 신뢰가 있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에는 사랑과 신뢰가 있어야 진정한 관계가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근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은 그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반의 상처 속에 갇힌 마음을 사랑 앞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부름 앞에 베드로는 섰습니다. 과거 같았으면 큰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데요.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그러나 이제 그는 그렇게 장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

 

이 고백은 2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내 모습 그대로를 아십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얼마나 빨리 무너지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내 속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것, 예수님만을 소중한 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주님을 향한 신뢰로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다른 이들 앞에 과시하고 증명하려던 태도에서부터 예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실패를 통해서 자신을 덜 믿고, 예수님을 더 믿게 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란 이와 같습니다. 나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나설 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오히려 “나는 다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 성숙하는 모습입니다. 예수 믿는 나 자신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부족하고 넘어져도 내가 신뢰할 분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흔들릴 때마다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아시며, 그 속에서도 우리의 작은 사랑을 기다리고 계신 분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위기는 언제 다가오는 것일까요? 예배는 습관적으로 드리는데,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건이 없을 때 옵니다. 찬송은 부르지만, 그 찬송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자꾸만 결핍될 때 그렇습니다. 교회 일은 많이 하는데, 내 속에 참된 기쁨이 생기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물으십니다. “정말 내가 너의 사랑이냐? 내가 너의 기쁨, 너의 자랑이냐? 다른 어떤 것보다 내가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이냐?”

 

<회복된 사랑은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베드로의 대답마다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 17)

 

내 양을 치라 (요 21:1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입니다. 교회는 늘 예수님의 것입니다. 목회자나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영적 지도자의 잘못된 생각에 있습니다. 성도는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를 위해서 충성하고 사랑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양’은 예수님이 생명을 내어 주고 사신 주님의 귀한 양입니다.

예수님은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사람들을 맡기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패한 사람이 다른 실패한 사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 곁에 다가가 그들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상처받은 사람이 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사람을 공격하고 찌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주님 앞에 나왔다면, 주님의 말씀과 은총,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의 상처가 먼저 치유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가 축복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끌어안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은혜로 다루어진 상처는 긍휼이 되어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베드로에게는 자기 자랑은 하나씩 무너지고, 예수님의 자랑이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본래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도 그는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그것 또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자기 방식의 분노가 있었지만, 진정한 예수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에 칼을 쥐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주님의 양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열정을 깨뜨리지 않고 베드로의 열정을 정화하셨습니다. 칼을 드는 열정에서 양을 돌보는 따뜻한 열정으로, 사랑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때로 거룩한 분노도 필요합니다. 약한 사람이 짓밟힐 때 아파하며 교회가 복음의 중심에서 벗어날 때, 탄식하는 열정과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열정입니다. 그런데 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나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와 사회를 향해 분노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나는가?’ ‘그래서 사람이 회복되는가?’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가?’

복음서에 등장한 베드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읽어 보면 베드로의 생애 속에 이웃이 안 나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자기가 높아지려는 마음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주위에 사람들이 생깁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 사람들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인생길을 가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이용하는 수단으로 삼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복음서의 베드로와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누구를 사랑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옛날 독일에서 공부할 때가 떠오릅니다. 논문이 뜻대로 진척되지 않고,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든 것이 막막했습니다. 불확실성의 미래 앞에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제 미래는 어떻게 전개되겠습니까?” 그때 마치 환청처럼 제 마음 깊이 다가온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평생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한마디였습니다.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저는 이 말씀을 받고서 제가 가졌던 걱정과 근심들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흔들리고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이 다시 제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너는 오직 나를 위하여.” 이것저것 근심하는 거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 물음들을 통해 다시 주님 앞에 돌아가려 합니다. ‘주님을 다시 사랑하는가?’ ‘주님만으로 만족하는가?’ ‘내 속에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권이 있는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인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신앙 경력을 묻지 않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애썼는지 성과를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오래 믿고 헌신했는지를 물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묻고 계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내 삶 전체에 예수님 한 분으로 내가 만족할 수 있는가? 우리는 베드로처럼 큰소리도 칠 수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고백할 뿐입니다. “주님, 주님이 저를 아시잖아요. 그러나 내 사랑이 자꾸 흔들립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첫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고백이 내 삶 속에 확인되고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면, 예배가 의무의 자리가 아닌 사랑스러운 분과의 만남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습관적으로 불렀던 찬송이 내 영혼의 고백처럼 울려 나옵니다. 한때 예수님을 부끄러워했던 입술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을 자랑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직업과 역할이 다 다를 것입니다. 가정주부로, 공부하는 사람으로, 직장인으로, 기업인으로, 문화예술인으로, 어떤 사람은 정치인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상관이 없습니다. 젊은 분들도, 나이든 어른 분들도 다 괜찮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한,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은 다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이 맡기신 일을 내가 감당하면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이것은 인생을 내 마음과 욕심대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 내 삶의 뿌리가 되면, 즉 내가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건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남녀노소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겸손히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일까? 확인된다면 너무 주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너무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오히려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펴며 하나님께서 내 속에 말씀하시는 대로 내가 행하겠다고 고백합시다. 일도, 사람 만나는 것도 두려움 없이 한 발짝, 한 발짝 가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때마다 확인해야 할 것은 내가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지 돌이켜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사랑해요. 예수님 내가 사랑해요. 성령님 도와주세요.” 그 마음이 확인되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자율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 믿는 것은 책임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사랑할 줄 알면서 과감하게 자기 인생을 도전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 나의 사랑, 나의 자랑” (요 21:15-17)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12, 30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베드로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장담이 무너진 뒤, “주님이 나를 아십니다”라는 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에게도 자기 확신이 무너지고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된 경험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설교의 요약>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베드로는 유독 많은 사람의 마음을 끕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가장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예수님을 따랐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무너졌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했던 그는 정작 대제사장의 뜰 숯불 곁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놀랍게도 요한복음 21장 바닷가에도 숯불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숯불이 부인의 자리, 밤의 자리였다면, 두 번째 숯불은 회복의 자리, 아침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책망하기 전에 먼저 조반을 차려 먹이셨습니다. 

 식사 후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능력이나 다짐이 아니라 관계와 사랑을 먼저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장담하지 않고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확신에서 주님을 향한 신뢰로 바뀐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실패한 사람이 다른 실패한 사람을 품고,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 곁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은혜로 다루어진 상처는 긍휼이 되어 사람을 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신앙 경력과 성과보다 먼저 우리의 사랑을 물으십니다. 신앙의 기쁨은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붙들었다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놓쳤을 때에도 주님이 우리를 놓지 않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나누기>

 

1.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능력이나 각오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오늘 주님이 나에게 똑같이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2.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사람을 찌르지만, 은혜로 다루어진 상처는 긍휼이 되어 사람을 품는다”는 말씀처럼, 나의 아픔이나 실패가 누군가를 품는 힘이 된 적이 있는지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베드로처럼 무너지고 실패했던 우리를 책망하기보다 먼저 먹이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내 사랑이 작고 흔들리지만 내가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주님이 아십니다”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놓쳤을 때에도 우리를 놓지 않으신 주님을 의지하며, 날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사랑이요 자랑이 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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