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이사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밝히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서 39장입니다. 이사야서는 일반적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연구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 단락으로 나누든, 두 단락으로 나누든, 이사야에는 변함없는 한 단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1장부터 39장까지의 본문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메시지는 ‘우상숭배와 불의에 빠진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주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반면에 40장부터 시작하는 후반부의 메시지는 그로부터 100년 이상 훌쩍 세월이 흐른 백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의 선포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39장과 40장 사이에는 긴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부터 39장까지 내용이 주전 8세기를 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40장 이후의 내용은 주전 6세기 전후를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서 39장은 앞부분에 해당하는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 중에서 특별히 36~39장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왕으로 인정받는 히스기야왕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미 열왕기하 18~20장과 역대하 29~32장에 히스기야왕과 관련된 내용이 전해지기에, 이사야서의 말씀은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내용은 이사야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의미를 빛내고 있습니다. 왜 이야기의 중복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이사야서에 다시 등장하는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사야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흥미로운 구조적 배치를 눈치채게 됩니다. 그것은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 심판의 예언과, 100년 이상 훌쩍 지난 바벨론 포로 사이의 중간을 잇는 이야기가 히스기야왕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왜 남유다가 멸망하게 되었는지, 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에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핵심 내용이 6절 말씀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9:6)
이어지는 40장부터 성경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훌쩍 시간을 넘겨 바벨론 포로 이후의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마치 이사야서는 ‘왜 유다가 바벨론 포로라는 대재앙을 맞이하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잿더미가 되었는가?’라는 거대한 역사적 질문에 대해, 결정적인 원인이 히스기야에게 있다는 말을 전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관점에 대해서 사실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아하스와 같은 희대의 악한 왕들도 있었습니다. 훗날 온 성읍을 우상과 무고한 피로 물들인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와 같은 악명 높은 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하필 하나님을 그토록 감동케 했던 ‘선한 왕 히스기야’의 짧은 장면을 유다 멸망의 입구이자 바벨론 포로 비극의 원인으로 올려놓았을까요? 이것이 오늘 설교 말씀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 궁금증을 마음에 두고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려고 합니다.
<유다 멸망의 원인이 되는 악한 왕은 히스기야 외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할 때 주로 어떤 왕들의 어떤 죄악을 고발하곤 하였을까요? 성경을 보면 대부분 눈에 띄게 악하고 우상숭배에 매몰되었던 ‘악한 왕(惡王)들의 명백한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악한 왕들의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북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 1세입니다. 솔로몬 이후 나라가 둘로 갈라졌을 때,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우상숭배의 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그에게 두려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왕상 14:10~11)
하나님은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든 ‘우상숭배의 구조적인 죄악’에 대해 가문을 뿌리째 뽑아 버리시는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둘째는 북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아합왕입니다. 아합은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며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의로운 나봇을 모함하여 돌로 쳐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에게 나타나 하나님 심판의 예언을 여러 번 전하였습니다.
셋째는 히스기야의 아들이자 유다 역사상 최고 악한 왕으로 꼽히는 므낫세입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철거했던 산당들을 다시 세운 왕입니다. 심지어 그는 여호와의 성전 안에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무고한 자의 피를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채웠다고 증언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들을 버려 그들의 원수의 손에 넘긴즉 그들이 모든 원수에게 노략거리와 겁탈거리가 되리니 이는… 나의 진노를 일으켰음이니라 하셨더라 (왕하 21:11~15)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왕하 24:3~4)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때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들의 악행이야말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사건의 마땅한 원인처럼 보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왜 하필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의 원인을 말하는 이사야 39장에서 악한 므낫세나 아합, 아하스, 여로보암이 아니라, 유다 역사상 가장 신실하고 하나님을 감동하게 했던 ‘선한 왕 히스기야’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선한 왕 히스기야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실수를 범한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누구입니까? 앗수르의 산헤립이 대군을 몰고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 옷을 찢으며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단 하룻밤 만에 적들을 물리쳤던 기적의 왕이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을 때 벽을 향해 눈물로 부르짖어 15년의 수명을 연장받았던 은혜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위대한 승리와 병 고침의 은혜가 지나간 바로 직후, 바벨론의 사절단이 찾아왔을 때 히스기야가 범한 작은 실수를 조명합니다.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사 39:2)
물론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낫게 해 주셨기에, 그는 바벨론의 사절단들 앞에서 자신을 고쳐 주신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주신 하나님을 증언하기보다는 자신의 궁궐에 있는 보물과 무기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일이기는 합니다. 당시 바벨론은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강국이었습니다. 바벨론은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병을 핑계 삼아 군사적인 동맹 맺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한 사절단들 앞에서 히스기야는 당연히 자신의 힘과 군사적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앗수르에게 맞설 만한 어느 정도의 재력과 무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군사적인 동맹을 맺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교한 ‘정치적인 계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제사도 여전히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방 신을 추가하여 섬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 더불어 거대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바벨론이라는 보험을 하나 더 들고자 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실용주의적인 결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와 선포합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9:5~6)
이 지점에서 우리는 놀랍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유다의 멸망이 단지 므낫세 같은 눈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악인들 때문에 온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사야서의 거대한 전환점에 히스기야의 실수를 배치해 놓은 신학적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벨론 포로의 책임이 누구의 예외도 없이 모두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왕들의 뚜렷한 범죄를 보면서 ‘저런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신실했던 히스기야조차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 제국의 힘을 탐닉하며 자만에 빠지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의 실수가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름의 선함과 신앙의 경력, 공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인 재앙과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끊어 낼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히스기야처럼 우리 역시 재앙과 심판의 한 원인을 제공할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므낫세나 아합 같은 눈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악인들을 손가락질하면서 “저런 사람들이 문제야, 저런 불신의 죄악 때문에 이 사회와 가정이 무너지는 거야”라고 쉽게 정죄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나름대로 주일 성수하고 새벽마다 기도하며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어리석은 손가락질을 거두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를 보아라! 앗수르의 수만 대군을 기도로 물리치고 죽을병에서 눈물로 15년 수명을 연장받았던 위대한 기적의 왕조차도, 평안이 찾아온 아침에 자신의 보물 창고를 자랑하며 세속적인 동맹에 무너지고 말았다. 가장 선했던 인간조차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아느냐? 그런데도 네가 조그만 선행과 선함을 가지고 타인의 악함을 손가락질할 수 있겠느냐?” 이처럼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것은 악한 이들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재앙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똑같은 신앙적 착각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그들이 드리던 재물에 섞은 비극적인 사건을 아뢰었습니다. 사람들은 내심 불쌍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을 당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2~3)
이어서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또 다른 대형 참사를 언급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5)
우리는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이 남들보다 더 악해서 재앙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비극과 재앙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벌을 받았다”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자기 의(義)에 빠진 인간의 지독한 영적 오만입니다.
주님은 망대가 무너진 재앙 앞에서 자신은 의롭다고 착각하며 손가락질하는 무리를 향해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므낫세 같은 악한 왕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다 역사상 가장 신실했던 히스기야의 자만과 불신앙 역시 바벨론 포로라는 대재앙을 불러오는 무서운 원인이요, 단초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는 선하다, 나는 예외다”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악한 자들만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나의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신앙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 성경은 히스기야의 민낯과 실로암 망대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은혜받은 뒤에 안일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실수를 보면서 한 가지 더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에 유다의 재앙의 원인으로 히스기야가 지목된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히스기야가 선지자의 엄중한 심판 선언을 들은 직후 그가 내뱉은 대답 가운데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선언했습니까?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사 39:6~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부모 또는 지도자로서 “당신의 죄와 안일함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이방 나라의 노예로 끌려가 평생 수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하나님의 선포를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땅에 엎드려 “하나님, 차라리 나를 벌하시고 내 자식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출애굽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부패했을 때를 기억해 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범죄한 백성들을 모두 다 쓸어 내고, 모세 한 사람만을 통해서 새로운 위대한 민족을 이루어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생각해 본다면, 모세 개인에게는 영광이 아닐 수 없고 모세 가문에게도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1~32)
모세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책, 거룩한 명부에서 자기의 이름이 긁혀 나가 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음 세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자기 목숨과 영혼을 걸고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의 대답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사 39:8)
얼마나 안타까운 대답입니까? “어쨌든 내 시대에는 전쟁이 안 일어나고, 내 생전에는 평화가 유지된다니 다행입니다.” 지금 히스기야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자기 자식들과 다음 세대가 겪어야 할 비극과 바벨론의 멍에는 외면한 채, “당장 나 하나, 내 시대만 무사하고 평안하다면 그만”이라는 지독한 이기심과 세대적 무책임(Intergenerational Indifference)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앗수르의 폭풍을 기도로 이겨 내고 죽을병에서는 눈물로 기적을 경험한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련이 다 지나가고 평안이 찾아오자, 자기 시대의 안일에 안주하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바벨론에 넘겨 버리는 영적 방관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실용주의가 아니라 겸손한 통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무분별한 전쟁과 왕실의 방탕함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탄식하고 있었을 때, 궁중에서는 이런 말이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루이 15세가 말했다고도 하고, 그의 부인이 말했다고도 하는 말입니다. “나 이후에 대홍수가 밀려오든 무슨 상관인가!(Après moi, le déluge)” 당장 내가 누리는 사치와 평안만 유지된다면 나의 다음 세대에 어떤 파멸적 재앙과 대홍수가 밀려오든 상관없다는 지독한 이기심이 드러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책임이 남긴 참혹한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불과 한 세대 뒤에 그의 손자인 루이 16세와 그의 신하들, 그리고 많은 백성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단두대 위에 서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선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까? 성경은 여기서 참으로 신비로운 구속사적인 반전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히스기야의 아들이자 유다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했던 왕 므낫세를 기억하십니까? 성전을 우상으로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무고한 피로 가득 채워 남유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악한 왕입니다.
열왕기하의 기록만 보면 므낫세는 멸망받아 마땅한 절망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역대하 33장은 감격스러운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증언해 줍니다. 므낫세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바벨론 군대에 사로잡혀 쇠사슬과 갈고리에 꿰여 끌려갔을 때, 비참한 수모와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대하 33:12~13)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므낫세는 유다를 파멸로 몰아넣은 희대의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비참함 속에서 자신의 완악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통회할 때, 하나님은 악한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선한 왕 히스기야의 ‘자만과 실용주의’는 심판의 단초가 되었지만, 므낫세의 ‘겸손한 통회’는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성도 여러분, 쌓아 올린 의로움이나 신앙적인 공로로는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누구도 구원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소망은 인간이 이루는 불완전한 선함이 아닙니다. 아무리 깊은 죄악 속에 있던 므낫세라 할지라도 겸손히 무릎을 꿇을 때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자비와 은혜입니다. 내 의로움의 착각을 버리고, 오직 나를 위해 완전한 대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을 온전히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날마다 그 자비하심 아래 겸손하게 살아가는 우리 소망의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Why Hezekiah’s Mistake?
Isaiah 39:4–8
Today’s Scripture is from Isaiah 39. Some of you may be familiar with this passage since we are reading from Isaiah in our early morning prayer these days. Although generally Isaiah is studied by dividing the book into three sections, it can also be divided into largely two parts.
Following the latter grouping, chapters 1-39 compose the first part. Its core message is “God’s grave judgement upon Judah for abandoning God’s holiness and falling into idol worship and injustice, and God’s fearful warning against the surrounding nations.”
The message of the second section, which starts from chapter 40, is “God’s proclamation of His great consolation, salvation, and restoration toward His people living in despair in Babylonian exile.”
Accordingly, while the background of Isaiah 1-39 is the 8th century BC, the second section is set in the 6th century BC.
Isaiah 39, our passage for today, therefore composes the last part of the first section, that is, God’s message of judgement upon Judah. In particular, chapters 35-39 tell the story of Hezekiah who was deemed a good king before God. Since 2 Kings 18-20 and 2 Chronicles 29-32 deal with Hezekiah in detail, Isaiah’s description of him overlaps with other books in the Bible.
Nevertheless, Isaiah 35-39 take up a very important place in Isaiah and has great significance.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why the story of Hezekiah is repeated in Isaiah and grasp its meaning.
Reading Isaiah carefully, we notice an interesting structural arrangement: the story of King Hezekiah serves as a bridge between God’s prophetic judgment against Judah and its later situation of Baylonian exile.
Hezekiah’s story is placed to explain why Judah fell and why the people of Judah were taken into Babylonian exile. Isaiah 39:6 serves as a pivotal verse:
“The time will surely come when everything in your palace, and all that your predecessors have stored up until this day, will be carried off to Babylon. Nothing will be left, says the Lord.” (Isaiah 39:6 NIV)
And from chapter 40 onward the Bible abruptly leaps forward decades to a time after the Babylonian exile without any explanation.
Thus it seems Isaiah is suggesting that the decisive clue and answer to the massive historical question—“Why did Judah face the catastrophic Babylonian exile? Why did Jerusalem, the city of God, fall into ruin?”—was this small mistake by King Hezekiah.
Indeed, this perspective is puzzling to us. There were notoriously evil kings like Ahaz and later Manasseh, who drenched the city with idolatry and innocent blood. So why does Scripture single out this brief scene of the godly King Hezekiah as the entry point and cause of Judah’s downfall and the tragic Babylonian exile?
What is the Bible trying to show us here?
With this question in mind, I pose another question.
When the Old Testament speaks of the downfall of Judah and Israel and God’s wrath and judgment, what sins of which kings does it typically accuse?
Looking at Scripture, it was mostly because of the blatant sins of conspicuously evil, idolatrous kings. We can point to some representative wicked kings in the Bible.
First is Jeroboam I, the first king of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When Israel split into two kingdoms after Solomon, Jeroboam set up golden calves at Dan and Bethel to prevent the people from going to the temple in Jerusalem, opening the way to idolatry. God pronounced this fearful judgment on him through the prophet Ahijah:
“Because of this, I am going to bring disaster on the house of Jeroboam. I will cut off from Jeroboam every last male in Israel—slave or free. I will burn up the house of Jeroboam as one burns dung, until it is all gone. […] The Lord has spoken!” (1 Kings 14:10-11 NIV)
God pronounced judgment to root out the family of Jeroboam for the structural sin of idolatry that turned the people away from Him.
Second is Ahab, the most notorious king in the history of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hab not only made Baal and Asherah worship national by marrying the foreigner Jezebel, but in his greed stole the vineyard of the righteous Naboth by falsely accusing him and stoning him to death. At this, the prophet Elijah appeared to pronounce God’s judgment.
Third is Manasseh, Hezekiah’s son and the worst king in Judah’s history. Manasseh rebuilt the high places his father had torn down, set up Asherah poles and altars to the sun, moon, and stars in the Lord’s temple. The Bible testifies that he filled Jerusalem with innocent blood from end to end. So God declared:
“Manasseh king of Judah has committed these detestable sins. He has done more evil than the Amorites who preceded him and has led Judah into sin with his idols. Therefore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 I will forsake the remnant of my inheritance and give them into the hands of enemies. They will be looted and plundered by all their enemies; […] they have done evil in my eyes and have aroused my anger […].” (2 Kings 21:11-15 NIV)
“Surely these things happened to Judah […] because of the sins of Manasseh and all he had done, including the shedding of innocent blood. For he had filled Jerusalem with innocent blood, and the Lord was not willing to forgive.” (2 Kings 24:3-4 NIV)
When we read these accounts, we can accept them. The wicked acts of such evil kings seem the obvious cause of Jerusalem’s fall and the Babylonian exile. We readily assent.
But as we read Isaiah, we pause to think.
Why does the prophet Isaiah place the name not of wicked Manasseh or Ahaz but of King Hezekiah, the most faithful king in Judah’s history who pleased God, in Isaiah 39, the entry point to the great tragedy of Judah’s Babylonian exile?
Who was Hezekiah? He was the miraculous king who, when Sennacherib of Assyria besieged Jerusalem, tore his clothes, went to the temple to pray, and through God’s angel routed the enemy in a single night. He was the man of grace who, when struck by a fatal illness, cried out with tears and was granted fifteen more years of life.
Yet the Bible spotlights a small mistake Hezekiah made immediately after those great victories and healing, when the Babylonian delegation arrived.
“Hezekiah received the envoys gladly and showed them what was in his storehouses—the silver, the gold, the spices, the fine olive oil—his entire armory and everything found among his treasures. There was nothing in his palace or in all his kingdom that Hezekiah did not show them.” (Isaiah 39:2 NIV)
Of course, this was not a small error before God.
It was an extremely grave mistake. Having been healed by God, Hezekiah should have glorified and testified to the God who restored him before the Babylonian envoys. Regrettably, however, he did not do so. Instead of testifying to the God who healed and extended his life, he showed them the treasures and armaments of his palace.
Why did he do that?
Considering the political and military context of the time, his action is somewhat understandable. Babylon was an emerging power, and upon hearing that Hezekiah had recovered, the Babylonians likely came under the pretense of visitation seeking a military alliance. This was why they had come to Jerusalem. Naturally, Hezekiah would have wanted to display his strength and military capability before them.
Hezekiah likely intended to show the Babylonian envoys that he possessed sufficient silver, gold, and military might to stand against Assyria. By doing so, he wanted to secure a military alliance. This was a realistic and calculated political maneuver.
He did not abandon God. He continued temple sacrifices. And he did not worship foreign gods. It was rather a pragmatic act of unbelief, thinking to get another “insurance policy” with the great worldly power Babylon alongside God. Then Isaiah came and proclaimed:
“Then Isaiah said to Hezekiah, ‘Hear the word of the Lord Almighty: The time will surely come when everything in your palace, and all that your predecessors have stored up until this day, will be carried off to Babylon. Nothing will be left, says the Lord.’” (Isaiah 39:5-6 NIV)
At this point we are astonished because Scripture delivers a tremendous message to us.
The Bible asks: do you think Judah’s ruin came only because of visibly dreadful evildoers like Manasseh? No, it did not.
The theological reason Scripture places Hezekiah’s mistake at the pivotal turning point of Isaiah is clear: it is to show that before God’s judgment no good king or no godly righteous person can be an exception.
We point fingers at the clear crimes of evil kings and say, “That is why the nation fell.” But God shows that even the most faithful Hezekiah was weak enough at a decisive moment to forget grace, crave the power of worldly empires, and fall into pride. Thus any moral goodness or religious achievement humans accumulate cannot by itself rescue them from disaster.
Beloved, the warning Hezekiah’s mistake gives us is this: our own goodness, our religious résumé and merits cannot cut off historical catastrophe and God’s judgment. Rather, they are a contributing cause to that very judgment.
We are quick to condemn visible monsters like Manasseh or Ahab, saying, “Those people are the problem; their unbelief and sins destroy society and families.”
And you reassure yourself that since you keep the Sabbath, come to church to pray each morning, and live devoutly, God’s judgment and catastrophe are far from you.
But Scripture tells us to stop that foolish finger-pointing.
Look at Hezekiah! The miraculous king who routed Sennacherib’s 185,000 troops by prayer and received fifteen more years of life through tears when death struck. Even this great king boasted of his treasuries and fell to a secular alliance on the morning of peace. Can you see how even the best of humans fall so easily? So how can you point at others’ wickedness with that meager goodness of yours? This is what Scripture is asking.
If this world is destroyed, we must remember it is because of my sin, not merely the sins of wicked people. If this nation suffers disaster, understand it is due to my failures and sins, not merely because of the faults of foolish others.
In Jesus’ day people fell into the same religious mistake. In Luke 13, some told Jesus about Pilate mingling the blood of Galileans with sacrifices.
People assumed those dying Galileans were worse sinners than others. But Jesus replied:
“Jesus answered, ‘Do you think that these Galileans were worse sinners than all the other Galileans because they suffered this way?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Luke 13:2-3 NIV)
Then the Lord mentions another great disaster that happened in Jerusalem.
“Or those eighteen who died when the tower in Siloam fell on them—do you think they were more guilty than all the others living in Jerusalem?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Luke 13:4-5 NIV)
We must remember this solemn warning of Jesus: the eighteen killed by the collapse of the Siloam tower were not punished because they were worse sinners than others. Pointing at others’ tragedies as proof of their greater sin is a terrible spiritual arrogance of self-righteous people.
To the self-righteous people who finger-pointed when the tower collapsed and caused a great disaster, Jesus declared,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Luke 13:5 NIV)
Thus, although it seems to us that Israel fell because of wicked kings like Manasseh, before God even the pride and unbelief of Judah’s most faithful king Hezekiah became a terrible contributing cause to the catastrophe of the Babylonian exile.
Therefore none of us can confidently declare before God, “I am good, I am an exception.” By stating Hezekiah’s failure and the Siloam tower incident, the Bible exposes how foolish and dangerous it is to point only at evildoers to confirm our moral superiority.
Seeing Hezekiah’s mistake, one more distressing fact stands out: his shocking response immediately after hearing the prophet’s solemn declaration of judgement.
What did Isaiah declare?
“The time will surely come when everything in your palace, and all that your predecessors have stored up until this day, will be carried off to Babylon. Nothing will be left, says the Lord. And some of your descendants, your own flesh and blood who will be born to you, will be taken away, and they will become eunuchs in the palace of the king of Babylon.” (Isaiah 39:6-7 NIV)
Dear friends, if as a parent or leader you heard God’s proclamation that “because of your sin and complacency your children will be taken as slaves to a foreign land and suffer lifelong shame,” what would you do?
Wouldn’t you fall prostrate weeping and cry, “Lord, punish me instead and show mercy to my children”?
Think about when Israel corrupted themselves at the base of Mount Sinai by making the golden calf. God told Moses He would wipe out the sinful nation and raise a great nation through Moses alone.
From a political and human standpoint, this was Moses’ unique chance for personal and familial glory. Yet how did Moses pray? With a torn heart he pleaded:
“Oh, what a great sin these people have committed! They have made themselves gods of gold. But now, please forgive their sin—but if not, then blot me out of the book you have written.” (Exodus 32:31-32 NIV)
Moses interceded for the next generation, staking his own life and soul, as he was willing even to have his own name erased from God’s book of life, that eternal, holy book, to secure forgiveness for them.
But Hezekiah did not do that. Read his shocking reply recorded in verse 8:
“‘The word of the Lord you have spoken is good,’ Hezekiah replied. For he thought, ‘There will be peace and security in my lifetime.’” (Isaiah 39:8 NIV)
What a tragic answer! He is thinking, “At least there will be no war in my days, and I shall have peace while I live.”
How can we describe Hezekiah’s state? He is sunk in a terrible selfishness and intergenerational indifference—ignoring the awful tragedy and Babylonian yoke his children and the next generation will suffer while thinking only, “As long as I, my generation, am safe and at peace.”
Hezekiah was a man of grace who overcame the crisis of Assyrian attack through prayer and experienced a miraculous recovery from a deadly illness. But when the trials passed and peace came, he complacently rested in the security of his era and became a spiritual bystander who sold the future of the next generation to Babylon.
A tragically similar scene in world history comes to mind: the story of France’s Louis XV in the eighteenth century.
When France was spiraling toward financial catastrophe because of Louis XV’s ruinous wars and royal decadence and the French people were suffering, it is said these words were on everyone’s lips in the palace: “Après moi, le deluge (After me, the flood).” These words reflect an utter selfishness that cares only for the present luxury and peace, having no regard whatsoever for the catastrophic deluge befalling future generations. The terrible cost of this recklessness was paid within a generation by his grandson Louis XVI, his ministers, and the French people on the bloody guillotine called the French Revolution.
So then, beloved, if even human goodness cannot secure salvation, where shall we find hope?
Scripture gives a marvelous and mysterious redemptive reversal. Do you remember Manasseh, Hezekiah’s son and the most atrocious king in Judah’s history?
Manasseh defiled the temple with idols and filled Jerusalem with innocent blood, providing the decisive cause for Judah’s fall. In 2 Kings he seems nothing more than a symbol of deserved destruction.
Yet 2 Chronicles 33 testifies to the most moving paradox of grace in the entire Bible. When Manasseh was taken captive by the Babylonian army, bound with cords and placed in irons, something happened at that very nadir of despair and humiliation:
“In his distress he sought the favor of the Lord his God and humbled himself greatly before the God of his ancestors. And when he prayed to him, the Lord was moved by his entreaty and listened to his plea; so he brought him back to Jerusalem and to his kingdom. Then Manasseh knew that the Lord is God.” (2 Chronicles 33:12-13 NIV)
Beloved, how is this possible? Even the notorious king who plunged Judah into ruin, when he recognized his hardness and humbly fell before God in repentance amid his misery, God did not ignore his cry but showed mercy.
Hezekiah’s pride and pragmatic unbelief became a trigger of judgment, yet the humble repentance of the notorious Manasseh opened the door of God’s boundless mercy. Salvation and mercy in Scripture do not depend on the magnitude of human goodness. No matter how righteous a person may be, pride can topple them; yet no matter how deep the sin, if one turns and seeks the Lord’s mercy, God’s great hand receives them.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of Somang Church, none of us can guarantee salvation before God by our accrued righteousness or religious merits. Therefore let us put away spiritual pride that boasts of our small goodness and piety.
Our hope must not rest on imperfect human goodness but on God’s incomparable mercy and grace that embrace even the sinful Manasseh when he humbly kneels.
Let go of the delusion of your own righteousness and cling wholly to the grace of the Cross upon which Christ accomplished His perfect redemption for you. Thus may you become blessed members of Somang Church who live humbly under the Lord’s mercy each day.
이사야 39:4~8
4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5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이사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밝히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서 39장입니다. 이사야서는 일반적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연구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 단락으로 나누든, 두 단락으로 나누든, 이사야에는 변함없는 한 단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1장부터 39장까지의 본문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메시지는 ‘우상숭배와 불의에 빠진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주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반면에 40장부터 시작하는 후반부의 메시지는 그로부터 100년 이상 훌쩍 세월이 흐른 백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의 선포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39장과 40장 사이에는 긴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부터 39장까지 내용이 주전 8세기를 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40장 이후의 내용은 주전 6세기 전후를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서 39장은 앞부분에 해당하는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 중에서 특별히 36~39장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왕으로 인정받는 히스기야왕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미 열왕기하 18~20장과 역대하 29~32장에 히스기야왕과 관련된 내용이 전해지기에, 이사야서의 말씀은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내용은 이사야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의미를 빛내고 있습니다. 왜 이야기의 중복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이사야서에 다시 등장하는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사야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흥미로운 구조적 배치를 눈치채게 됩니다. 그것은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 심판의 예언과, 100년 이상 훌쩍 지난 바벨론 포로 사이의 중간을 잇는 이야기가 히스기야왕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왜 남유다가 멸망하게 되었는지, 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에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핵심 내용이 6절 말씀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9:6)
이어지는 40장부터 성경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훌쩍 시간을 넘겨 바벨론 포로 이후의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마치 이사야서는 ‘왜 유다가 바벨론 포로라는 대재앙을 맞이하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잿더미가 되었는가?’라는 거대한 역사적 질문에 대해, 결정적인 원인이 히스기야에게 있다는 말을 전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관점에 대해서 사실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아하스와 같은 희대의 악한 왕들도 있었습니다. 훗날 온 성읍을 우상과 무고한 피로 물들인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와 같은 악명 높은 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하필 하나님을 그토록 감동케 했던 ‘선한 왕 히스기야’의 짧은 장면을 유다 멸망의 입구이자 바벨론 포로 비극의 원인으로 올려놓았을까요? 이것이 오늘 설교 말씀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 궁금증을 마음에 두고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려고 합니다.
<유다 멸망의 원인이 되는 악한 왕은 히스기야 외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할 때 주로 어떤 왕들의 어떤 죄악을 고발하곤 하였을까요? 성경을 보면 대부분 눈에 띄게 악하고 우상숭배에 매몰되었던 ‘악한 왕(惡王)들의 명백한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악한 왕들의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북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 1세입니다. 솔로몬 이후 나라가 둘로 갈라졌을 때,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우상숭배의 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그에게 두려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왕상 14:10~11)
하나님은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든 ‘우상숭배의 구조적인 죄악’에 대해 가문을 뿌리째 뽑아 버리시는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둘째는 북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아합왕입니다. 아합은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며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의로운 나봇을 모함하여 돌로 쳐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에게 나타나 하나님 심판의 예언을 여러 번 전하였습니다.
셋째는 히스기야의 아들이자 유다 역사상 최고 악한 왕으로 꼽히는 므낫세입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철거했던 산당들을 다시 세운 왕입니다. 심지어 그는 여호와의 성전 안에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무고한 자의 피를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채웠다고 증언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들을 버려 그들의 원수의 손에 넘긴즉 그들이 모든 원수에게 노략거리와 겁탈거리가 되리니 이는… 나의 진노를 일으켰음이니라 하셨더라 (왕하 21:11~15)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왕하 24:3~4)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때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들의 악행이야말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사건의 마땅한 원인처럼 보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왜 하필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의 원인을 말하는 이사야 39장에서 악한 므낫세나 아합, 아하스, 여로보암이 아니라, 유다 역사상 가장 신실하고 하나님을 감동하게 했던 ‘선한 왕 히스기야’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선한 왕 히스기야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실수를 범한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누구입니까? 앗수르의 산헤립이 대군을 몰고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 옷을 찢으며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단 하룻밤 만에 적들을 물리쳤던 기적의 왕이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을 때 벽을 향해 눈물로 부르짖어 15년의 수명을 연장받았던 은혜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위대한 승리와 병 고침의 은혜가 지나간 바로 직후, 바벨론의 사절단이 찾아왔을 때 히스기야가 범한 작은 실수를 조명합니다.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사 39:2)
물론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낫게 해 주셨기에, 그는 바벨론의 사절단들 앞에서 자신을 고쳐 주신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주신 하나님을 증언하기보다는 자신의 궁궐에 있는 보물과 무기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일이기는 합니다. 당시 바벨론은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강국이었습니다. 바벨론은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병을 핑계 삼아 군사적인 동맹 맺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한 사절단들 앞에서 히스기야는 당연히 자신의 힘과 군사적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앗수르에게 맞설 만한 어느 정도의 재력과 무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군사적인 동맹을 맺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교한 ‘정치적인 계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제사도 여전히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방 신을 추가하여 섬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 더불어 거대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바벨론이라는 보험을 하나 더 들고자 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실용주의적인 결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와 선포합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9:5~6)
이 지점에서 우리는 놀랍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유다의 멸망이 단지 므낫세 같은 눈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악인들 때문에 온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사야서의 거대한 전환점에 히스기야의 실수를 배치해 놓은 신학적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벨론 포로의 책임이 누구의 예외도 없이 모두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왕들의 뚜렷한 범죄를 보면서 ‘저런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신실했던 히스기야조차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 제국의 힘을 탐닉하며 자만에 빠지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의 실수가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름의 선함과 신앙의 경력, 공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인 재앙과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끊어 낼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히스기야처럼 우리 역시 재앙과 심판의 한 원인을 제공할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므낫세나 아합 같은 눈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악인들을 손가락질하면서 “저런 사람들이 문제야, 저런 불신의 죄악 때문에 이 사회와 가정이 무너지는 거야”라고 쉽게 정죄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나름대로 주일 성수하고 새벽마다 기도하며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어리석은 손가락질을 거두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를 보아라! 앗수르의 수만 대군을 기도로 물리치고 죽을병에서 눈물로 15년 수명을 연장받았던 위대한 기적의 왕조차도, 평안이 찾아온 아침에 자신의 보물 창고를 자랑하며 세속적인 동맹에 무너지고 말았다. 가장 선했던 인간조차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아느냐? 그런데도 네가 조그만 선행과 선함을 가지고 타인의 악함을 손가락질할 수 있겠느냐?” 이처럼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것은 악한 이들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재앙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똑같은 신앙적 착각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그들이 드리던 재물에 섞은 비극적인 사건을 아뢰었습니다. 사람들은 내심 불쌍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을 당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2~3)
이어서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또 다른 대형 참사를 언급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5)
우리는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이 남들보다 더 악해서 재앙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비극과 재앙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벌을 받았다”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자기 의(義)에 빠진 인간의 지독한 영적 오만입니다.
주님은 망대가 무너진 재앙 앞에서 자신은 의롭다고 착각하며 손가락질하는 무리를 향해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므낫세 같은 악한 왕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다 역사상 가장 신실했던 히스기야의 자만과 불신앙 역시 바벨론 포로라는 대재앙을 불러오는 무서운 원인이요, 단초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는 선하다, 나는 예외다”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악한 자들만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나의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신앙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 성경은 히스기야의 민낯과 실로암 망대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은혜받은 뒤에 안일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실수를 보면서 한 가지 더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에 유다의 재앙의 원인으로 히스기야가 지목된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히스기야가 선지자의 엄중한 심판 선언을 들은 직후 그가 내뱉은 대답 가운데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선언했습니까?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사 39:6~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부모 또는 지도자로서 “당신의 죄와 안일함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이방 나라의 노예로 끌려가 평생 수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하나님의 선포를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땅에 엎드려 “하나님, 차라리 나를 벌하시고 내 자식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출애굽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부패했을 때를 기억해 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범죄한 백성들을 모두 다 쓸어 내고, 모세 한 사람만을 통해서 새로운 위대한 민족을 이루어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생각해 본다면, 모세 개인에게는 영광이 아닐 수 없고 모세 가문에게도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1~32)
모세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책, 거룩한 명부에서 자기의 이름이 긁혀 나가 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음 세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자기 목숨과 영혼을 걸고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의 대답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사 39:8)
얼마나 안타까운 대답입니까? “어쨌든 내 시대에는 전쟁이 안 일어나고, 내 생전에는 평화가 유지된다니 다행입니다.” 지금 히스기야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자기 자식들과 다음 세대가 겪어야 할 비극과 바벨론의 멍에는 외면한 채, “당장 나 하나, 내 시대만 무사하고 평안하다면 그만”이라는 지독한 이기심과 세대적 무책임(Intergenerational Indifference)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앗수르의 폭풍을 기도로 이겨 내고 죽을병에서는 눈물로 기적을 경험한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련이 다 지나가고 평안이 찾아오자, 자기 시대의 안일에 안주하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바벨론에 넘겨 버리는 영적 방관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실용주의가 아니라 겸손한 통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무분별한 전쟁과 왕실의 방탕함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탄식하고 있었을 때, 궁중에서는 이런 말이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루이 15세가 말했다고도 하고, 그의 부인이 말했다고도 하는 말입니다. “나 이후에 대홍수가 밀려오든 무슨 상관인가!(Après moi, le déluge)” 당장 내가 누리는 사치와 평안만 유지된다면 나의 다음 세대에 어떤 파멸적 재앙과 대홍수가 밀려오든 상관없다는 지독한 이기심이 드러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책임이 남긴 참혹한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불과 한 세대 뒤에 그의 손자인 루이 16세와 그의 신하들, 그리고 많은 백성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단두대 위에 서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선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까? 성경은 여기서 참으로 신비로운 구속사적인 반전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히스기야의 아들이자 유다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했던 왕 므낫세를 기억하십니까? 성전을 우상으로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무고한 피로 가득 채워 남유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악한 왕입니다.
열왕기하의 기록만 보면 므낫세는 멸망받아 마땅한 절망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역대하 33장은 감격스러운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증언해 줍니다. 므낫세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바벨론 군대에 사로잡혀 쇠사슬과 갈고리에 꿰여 끌려갔을 때, 비참한 수모와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대하 33:12~13)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므낫세는 유다를 파멸로 몰아넣은 희대의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비참함 속에서 자신의 완악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통회할 때, 하나님은 악한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선한 왕 히스기야의 ‘자만과 실용주의’는 심판의 단초가 되었지만, 므낫세의 ‘겸손한 통회’는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성도 여러분, 쌓아 올린 의로움이나 신앙적인 공로로는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누구도 구원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소망은 인간이 이루는 불완전한 선함이 아닙니다. 아무리 깊은 죄악 속에 있던 므낫세라 할지라도 겸손히 무릎을 꿇을 때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자비와 은혜입니다. 내 의로움의 착각을 버리고, 오직 나를 위해 완전한 대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을 온전히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날마다 그 자비하심 아래 겸손하게 살아가는 우리 소망의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왜 하필 히스기야의 실수인가? (사 39:4~8)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63, 270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힘들 때는 기도가 잘 되는데, 막상 일이 잘 풀리고 편안해지면 오히려 기도가 뜸해지는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눠주세요. ‘평안할 때’ 신앙을 잘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교의 요약>
앗수르의 대군을 기도로 물리치고 죽을병에서 생명을 연장받았던 은혜의 왕 히스기야는, 삶이 평안해지자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하나님을 증언하기보다 자신의 보물과 무기를 자랑합니다. 이에 이사야는 훗날 그 소유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심판을 선포합니다. 성경이 므낫세 같은 악명 높은 왕이 아니라 굳이 ‘선한 왕’ 히스기야의 이 실수를 유다 멸망의 입구에 배치한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흔히 악인을 손가락질하며 나의 선함에 안도하지만, 예수님도 갈릴리 사람들과 실로암 망대 사건을 통해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히스기야의 반응이었습니다. 심판 선언을 들은 그는 다음 세대를 위해 목숨 걸고 중보했던 모세와 달리,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라며 자기 시대의 안일함에 만족했습니다. 이는 다음 세대의 고통을 외면한 무책임한 태도였습니다.
히스기야의 두 실수—평안할 때 자기를 자랑한 것과, 자기 시대만 무사하면 된다고 여긴 것—는 결국 하나로 이어집니다. 신앙의 초점이 ‘하나님’에서 ‘나’로 옮겨가는 순간, 우리의 시야도 다음 세대와 이웃을 향한 책임에서 나 자신의 안위로 좁아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라운 은혜의 역설도 보여줍니다. 유다 최악의 악왕 므낫세조차 바벨론 포로의 비참함 속에서 크게 겸손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대하 33:12-13). 구원과 자비는 인간의 선함의 크기가 아니라, 겸손히 돌이켜 자비를 구하는 자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작은 선함을 자랑하는 교만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을 붙들고 겸손히 살아가야 합니다.
<나누기>
1.히스기야는 심판의 경고를 듣고도 “내 생전에는 평안하다니 다행”이라며 다음 세대의 아픔을 외면했습니다. 반대로 모세는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중보했습니다. 나는 자녀 세대,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책임과 기도를 감당하고 있습니까?
2.”구원과 자비는 인간의 선함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이번 주 나의 삶과 신앙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평안할 때 오히려 내 자랑을 앞세웠던 히스기야의 연약함이 우리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타인을 손가락질하며 나의 선함에 안도했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그 어떤 공로도 주님 앞에 무력함을 인정하오니, 부르짖는 자를 받아주신 그 십자가의 자비만을 붙들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