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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시편 132:1~7

김경진 목사

2026.05.24

<다윗은 늘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왕들의 이름 중에 다윗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실 때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이 말씀은 다윗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했을 때도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왕상 9:4)

 

여기서도 기준은 다윗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 전체를 하나의 모범으로 보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등장할 때마다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행하여” 혹은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라는 표현으로 다윗을 기준으로 삼고 평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왕이며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과 같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다윗도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간음의 죄와 우리아를 죽게 만든 살인의 죄도 지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정말 끔찍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의 신뢰를 받을 수 있던 것은, 그가 늘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책망하였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그토록 신뢰하고 기뻐하셨는지를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또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하였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였는지를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132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던 이들은 다윗을 기억하며 먼저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시 132:1)

 

여기에서 ‘겸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עָנָה[anah])’는 다윗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입니다.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될 수 있는데 ‘낮추다’, ‘괴롭게 하다’, ‘혹독하게 대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때로 하나님으로부터 혹독함을 받기도 했고, 스스로 혹독하게 대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괴롭게 하심’, ‘낮추심’, ‘아나(עָנָה[anah])’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사울의 추격을 받고 죽음의 공포를 이겨 가며 생존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훗날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기억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아나, עָנָה[anah])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아나, עָנָה[anah])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시 119:75)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낮추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된 후에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겪을 때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모든 것이 잘되고 성공하고 있을 때 자신을 낮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겸손함을 보였는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시 132:2~5)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에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합니다. 자신은 왕위에 올라 좋은 궁궐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법궤는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법궤를 예루살렘성 안으로 모시고 올 것을 계획합니다.

사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의 상징이지만, 오래전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형식적인 신앙으로 인해 블레셋에게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사사 시대 말기,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그들은 법궤를 마치 승리를 보장하는 마술 성물처럼 전쟁터 에벤에셀로 메고 나갑니다. 승리를 예견하며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 없이 법궤의 능력만을 이용하려 했던 그들은 결국 대패합니다. 심지어 법궤마저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방 땅으로 간 법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블레셋이 법궤를 자신들의 다곤 신전에 두자, 다곤 신상이 무너지고 그 지역에 독한 종기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블레셋 사람들은 수레에 법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옮깁니다. 이렇게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스스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돌아온 하나님의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약 70년간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사울은 그가 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찾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대상 10:13~14)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국가의 중심에 모시는 일’을 첫 번째 과제로 삼습니다. 이것을 시편 기도자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며 이것이 다윗의 겸손이었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간절히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하나님의 처소를 예비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도 낮아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얼마든지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마음껏 나라를 이끌 수 있을 만큼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역대기에서 이런 다윗의 생각이 잘 드러납니다. 다윗은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모든 지도자들을 모아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 올 계획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대상 13:3~4)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고자 한 이유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말씀에 순종하며 나라를 통치하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한 왕의 나름의 통치 기술로 볼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며 종교를 앞세운 통치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인 시편은 그의 진심이 정말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가 법궤를 옮겨 온 것이 단순한 정치적인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주님께 맹세하고, 야곱의 전능하신 분께 서약하기를 “내가 내 집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도 오르지 아니하며 눈을 붙이고, 깊은 잠에 빠지지도 아니할 것이며, 눈꺼풀에 얕은 잠도 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계실 장막을 마련할 때까지, 야곱의 전능하신 분이 계실 곳을 찾아낼 때까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시 132:2~5, 새번역)

 

그는 진심으로 주님의 장막을 찾기 원했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앞에서 얼마나 간절하고 열정적으로 살기 원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리고 결국은 법궤를 모셔 오는 가슴 벅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시 132:6)

 

기도자는 방치된 채 나무 밭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와 장막을 모셔 오는 이야기를 간단하면서도 극적인 표현으로 전해 줍니다. 사무엘상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와 장막을 모셔 올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알려 줍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삼하 6:14~15)

 

법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자신이 입고 있던 왕의 옷을 벗어 던지고 베 에봇을 입고 나아가 춤을 춥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권위적인 옷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고 아내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기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겸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다시 생각해 봅니다. 왜 그토록 다윗은 하나님의 장막과 법궤를 모셔 오기를 원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왕과 달랐습니다. 사울왕은 종교적 형식은 있었지만 하나님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대는 자기 생각과 세상의 방법대로 나라를 다스린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깨닫습니다. ‘이 나라가 살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와야 한다.’ 이것이 다윗이 눈을 붙이지도 잠들지도 않고 간절히 하나님의 처소를 예비하고자 했던 이유였습니다(시 132:4).

 

<다윗과 같이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십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의 상징이 법궤였다면, 신약과 교회 시대에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드러납니다. 다윗이 그토록 모시기 원하던 하나님의 임재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는 자들의 심령’이라는 진정한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을 모시는 ‘성령강림’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흥미로운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시 132:6)

 

다윗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궤가 저 멀리 변방 시골구석에 방치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한 다른 많은 이들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문을 듣고도 그들은 수십 년간 성궤를 찾지 않았습니다. 귀찮았거나 삶이 바빴을 수도 있습니다. 굳이 성궤가 없어도 눈앞의 삶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의 역사, 초대교회를 뒤집어 놓았던 성령의 권능에 대해 수없이 듣고 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 봅니다. 성경이 전하는 성령의 놀라운 이야기를 그저 전설 같은 소문으로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작 내 삶의 자리에는 성령의 능력이 실종된 채, 무덤덤하게 거친 세상을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울의 시대처럼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한 번도 묻지 않고 내 뜻대로 인생을 경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성령님을 찾고 있는지 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내 뜻대로 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유롭고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울도 그러했고,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과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 앞에서 하나님께 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며 다시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구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던 것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으스대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시 132:4~5)

 

다윗은 “여호와의 처소를 발견하기까지 잠들지 아니하겠노라. 전능자의 성막을 찾기까지 나는 졸지 아니하겠노라.”라고 결단합니다. 이런 다윗의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나는 잠들지 아니하겠노라. 주님 성령을 선물로 받기까지 나는 졸지 아니하리라.” 이런 결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소문만 듣고 있을 뿐입니다. ‘성령님이 어딘가에 계신다고 하더라. 성령의 임재가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 소문만 듣고 그 현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미약한 신자일 뿐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에 우리 모두 주님의 성령을 간절히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구하는 것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는 것이자, 나를 드리는 것이며,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나 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 안에 살기를 원하며 그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진심어린 간구가 있을 때 약속대로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약속을 믿고 용기를 내어 마침내 성령을 받으면 우리 삶에 무엇이 달라질까요? 다윗은 무엇을 기대하며 그토록 간절하게 법궤를 모셔 왔을까요? 그 해답이 시편 132편 8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신약 시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시 132:8)

 

주님은 다윗의 초청에 아주 가볍게 응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132:14)

 

다윗은 하나님을 초청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서 이곳을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건도 없이 바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내가 영원히 쉴 곳이 여기다”라고 하시며 “내가 여기 거주하려는 이유는 내가 이것을 원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초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일어나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성령을 초청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초청에 응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초청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응답하시며 우리 안에 머무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심만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성령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모시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특별히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1~13)

 

다윗은 구하였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하지 않았기에 받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구하면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이 소문으로만 듣고 마는 절기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강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간구하는 진정한 성령강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소식을 소문으로만 두지 말고 결단하며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헛되고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도우실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홀로 서려고 애쓰고 버티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성궤와 장막을 모신 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내용이 시편 132편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시 132:15~16)

 

다윗의 기도에 “이제 내가 여기 머물러 있으리라” 응답하신 하나님이 다윗에게 축복하십니다.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의 축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다윗과 백성들이 그 구원의 즐거움 가운데 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법궤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은 이 땅에서의 삶을 행복하고 만족하게 만들며,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임재는 어떠합니까? 2천 년 전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의 불길이 임하였을 때, 소문으로만 듣던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실제가 되셨습니다. 먼저 성령을 받은 이들은 구원의 옷을 입고 즐거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담대히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떡으로 빈민을 만족하게 하시는 역사가 재현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충만해지자 자기 재산을 아끼지 않고 나누어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행 4:34). 이 땅에서의 풍성한 나눔, 선함의 번짐이 일어났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성령이 실제로 임하실 때, 이같이 영육 간의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에 성령의 단비가 내릴 때, 아름다운 밭이 되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7b~39)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 갑니까?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경은 자세하게 알려 줍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가 성경 속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성령을 소문으로만 남겨 두시겠습니까? ‘어딘가에 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라며 그저 생각만으로 담아 두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근에 나온 “소문의 낙원”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선교사의 자녀가 지어 부른 노래로, 기독교적인 가치가 듬뿍 담긴 듯 보이는 노래입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소문의 낙원,

지치고 병든 나그네여

우 외톨이 나그네여

당신의 불치병은

그곳에 존재할 수 없어요.

(악동뮤지션, “소문의 낙원가사 )

 

여러분, 이것이 소문으로만 들리는 이야기라면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소문의 낙원이 그저 소문으로만 남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여러분의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처소를 발견하기까지, 전능자의 성막을 찾기까지, 주님의 성령을 받기까지 나는 졸지 않으리라. 결단하며 주님께 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Until We Discover the Tabernacle of the Almighty

 

Psalm 132:1-7

 

Among the many kings named in the Bible, was there anyone more pleasing to God than David? Probably not.

 

When God chose David, He spoke these remarkable words: “The Lord does not look at the things people look at. People look at the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1 Samuel 16:7 NIV) This shows that God, who knew David’s past, present, and future, accepted him. These words did not just describe David’s condition at the time God chose him, but also foresaw what David would become in the future.

 

Even after David’s death, when Solomon completed the temple, the Lord said: “As for you, if you walk before me faithfully with integrity of heart and uprightness, as David your father did, and do all I command and observe my decrees and laws,” (1 Kings 9:4 NIV)

 

From these words too, we see that God regarded David’s whole life as a model. Each time a king rose in Israel, God evaluated him “as his father David had done” or “unlike David his father.” This shows the extent to which God continually thought of David.

 

Even Solomon, the wise king who reigned during Israel’s greatest prosperity, did not receive the same evaluation as his father David.

 

Of course, David made many mistakes and sinned. He committed adultery with Uriah’s wife and committed the sin of murder by arranging Uriah’s death. As a man, he was a great sinner; yet God trusted him because he continually desired to dwell in God’s presence. When Nathan the prophet confronted him with the Lord’s message of rebuke, David immediately repented and went before the Lord. This was what set him apart from other kings. He always humbled himself before God and sought His will.

 

Today’s passage explains why God trusted and delighted in David so. It also shows how faithful David was before the Lord and how deeply he loved God.

 

Psalm 132 is a song of ascents, a prayer sung on the way up to the temple. As worshipers made their way up to the temple, they remembered David. They recalled how thirsty he was for God’s presence and dwelling.

 

First, those ascending to the temple petition God to remember all of David’s humility: “Lord, remember David and all his self-denial.” (Psalm 132:1 NIV)

 

The Hebrew word used here for “self-denial” is “anah (עָנָה),” a word that threads through David’s life. It means to “to humble, to afflict, or to treat harshly.”

 

David was a man who experienced God’s humbling and affliction—anah. He endured Saul’s pursuit, living under the constant shadow of death. David remembered those times:

 

“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anah, עָנָה) so that I might learn your decrees.” (Psalm 119:71 NIV)

“I know, Lord, that your laws are righteous, and that in faithfulness you have afflicted (anah, עָנָה) me.” (Psalm 119:75 NIV)

 

Having experienced God’s humbling, David remained in that place of humility even after he became king. While it is easy to become lowly and humble in times of suffering, it is hard to remain humble in prosperity and success. But this steadfast humility was David’s greatness.

 

Even as king, David could still abase himself. He remained a man humbled (anah, עָנָה) before God.

 

Psalm 132 goes on to show how David demonstrated this humility:

 

“He swore an oath to the Lord, he made a vow to the Mighty One of Jacob: ‘I will not enter my house or go to my bed, I will allow no sleep to my eyes or slumber to my eyelids, till I find a place for the Lord, a dwelling for the Mighty One of Jacob.’” (Psalm 132:2–5 NIV)

 

After ascending the throne, David remembered one important fact: though he dwelt in a fine palace, the ark—the symbol of God’s presence and existence—was neglected somewhere else. So he resolved to bring that ark to Jerusalem.

 

The ark was the sign of God’s presence and existence. Yet long ago it was taken by the Philistines because of Israel’s unbelief and empty faith. During the last days of Israel’s judges, the sons of Eli the priest had fallen into spiritual corruption. When Israel was defeated by the Philistines, the Israel army carried the ark to Ebenezer, the battlefield, as if it were a talisman guaranteeing victory. But lacking reverence for God, Israel only wanted the ark’s power and eventually suffered a crushing defeat—losing even the ark.

But the ark that went into foreign hands later returned to Israel by God’s sovereign work. When the Philistines placed the ark in Dagon’s temple, the statue of Dagon fell and a severe plague of tumors struck the region. Terrified, the Philistines loaded the ark on a cart and sent it to Beth Shemesh. In this way the ark returned to Israel by God’s power. Yet after its return it lay largely neglected for about seventy years in the house of Abinadab of Kiriath‑Jearim.

 

King Saul did not seek the ark—the symbol of God’s presence—during his reign. Instead, he sought out a medium. This was why God rejected Saul.

 

“Saul died because he was unfaithful to the Lord; he did not keep the word of the Lord and even consulted a medium for guidance, and did not inquire of the Lord. So the Lord put him to death and turned the kingdom over to David son of Jesse.” (1 Chronicles 10:13–14 NIV)

 

But when David became king of Israel, his first task was to place God’s presence at the center of the nation. This is what the psalmist is singing about now in Psalm 132. The psalm states that this was David’s humility.

 

Even after success and accession to the throne, David remained a man who could humble himself. He was able to examine himself before God. He could have exercised royal authority as he pleased. He could have led the nation any way he wanted. But David did not do that. He always wanted to ask God, to obey His authority, and to govern the nation under God’s rule.

 

There is a passage that clearly reveals David’s such mindset. In 1 Chronicles 13, he gathers all his commanders and explains his plan to bring the ark. He says:

 

“‘Let us bring the ark of our God back to us, for we did not inquire of it during the reign of Saul.’ The whole assembly agreed to do this, because it seemed right to all the people.” (1 Chronicles 13:3–4 NIV)

 

David wanted to bring the ark because he desired to seek the Lord. In other words, he wanted to humble himself before God’s presence and existence and live in obedience to His word.

 

One might interpret this as a political strategy: using religion to rule. Such a political interpretation is possible. But Psalm 132, our passage for today, reveals where David’s heart truly lay. He was not moving the ark merely as a political act.

 

“He swore an oath to the Lord, he made a vow to the Mighty One of Jacob: ‘I will not enter my house or go to my bed, I will allow no sleep to my eyes or slumber to my eyelids, till I find a place for the Lord, a dwelling for the Mighty One of Jacob.’” (Psalm 132:2–5 NIV)

 

David truly longed to find the Lord’s tabernacle. This shows how desperately David wanted to dwell in God’s presence and existence. The story continues: after searching and searching, he finally brings the ark home—a stirring account.

 

“We heard it in Ephrathah, we came upon it in the fields of Jaar:” (Psalm 132:6 NIV) The psalmist recounts simply but dramatically how the ark and tabernacle, neglected in a grove, were sought out and at last brought back.

 

Scripture elsewhere shows how eager David was to bring the ark. In 2 Samuel 6, it says:

 

“Wearing a linen ephod, David was dancing before the Lord with all his might, while he and all Israel were bringing up the ark of the Lord with shouts and the sound of trumpets.” (2 Samuel 6:14–15 NIV)

 

When the ark entered the city of David, he cast off his royal robe, put on a linen ephod, and danced before the Lord. Royal garments meant nothing in God’s presence. Michal mocked him for it, but David did not care. He danced before God as a worshiper.

 

This scene again reveals his humility.

 

Let’s think about it again. Why did David so earnestly want the tabernacle of the Lord, the ark of the Lord? He could have ruled by his own strength. But he did not. The era of Saul was different: religious forms remained, but the king did not seek God’s will and governed by his own thoughts and the ways of the world—a spiritual darkness. David realized as soon as he became king that the nation’s survival depended not on himself, but on the true King and His rule over it. To accomplish that, he had to bring back the lost presence of God, the ark, to Jerusalem, the center of the nation. This is why he vowed he would not sleep until a dwelling for the Lord was prepared (Psalm 132:4).

 

Beloved, today is Pentecost Sunday. How does today’s Scripture speak to you? If in the Old Testament the ark symbolized God’s presence, in the New Testament and in the age of the Church God’s presence is revealed in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hrough the Spirit we experience God’s presence and existence.

 

The very presence of God that David longed for was perfectly fulfilled in the age of the New Testament by the coming of the Holy Spirit, the permanent residence of the Spirit of God in the true temple, that is, in the hearts of those who confess Jesus Christ as Lord.

 

Verse 6 of today’s passage gives a striking confession:

 

“We heard it in Ephrathah, we came upon it in the fields of Jaar:” (Psalm 132:6 NIV)

 

David and the people heard a rumor that the ark of God lay neglected in a remote rural place. Many, including King Saul, knew of that rumor but did nothing for decades—because it was inconvenient, life was busy, and they thought life went on without the ark.

 

How about us today? We know the “rumor” of the Holy Spirit well. We have heard countless times about what happened in Mark’s upper room and how the Spirit’s power shook the early church.

 

But let’s be honest. Haven’t these astounding biblical testimonies of the Spirit become merely a “rumor” or “legend” to us? Are we not hearing of the presence of the Spirit only as a “rumor”? Isn’t the Spirit’s power absent in our daily lives as we live indifferently?

 

As in the age of Saul, are we not managing our lives by our own will without ever asking the Spirit who dwells within us? Are we truly seeking the Holy Spirit?

 

The reason we don’t seek the Spirit is because we want to do things our way. We believe living as we please is freedom and will make us happier. Saul did this; many Israelite kings did it; and so did the people. And many Christians today, including us, are the same.

 

But David was different. He longed to live before God’s presence, to bring the ark and live by asking God’s will. So even when he had failed miserably, he could come straight to God, repent, and be restored.

 

To seek the Spirit is to abase ourselves, just as David humbled himself before God. It is not to boast “I can do it,” but to yield ourselves to God’s guidance.

 

David made a solemn resolve: “I will allow no sleep to my eyes or slumber to my eyelids, till I find a place for the Lord, a dwelling for the Mighty One of Jacob.” (Psalm 132:4–5 NIV)

 

Do we have this heart? Are we as desperate as this? “I will not sleep until I find the Lord’s dwelling. I will not slumber until I discover the Mighty One’s tabernacle.” Do we have such a yearning?

 

“I will not sleep until I receive the Holy Spirit that God has promised. I will not slumber until I receive the Spirit as a gift.” Do we have such a resolution?

 

All we are doing is listening to rumors. “They say the Spirit is somewhere. Someone has received the Spirit.” But all this is just hearsay. If we do not experience the presence of the Holy Spirit ourselves, then we are still just weak believers.

 

On this Pentecost, may we all earnestly seek the Holy Spirit. To seek the Spirit is to humble ourselves, to offer and surrender ourselves, and to decide to live by His power.

 

If we trust this promise, courageously ask for the Spirit, and finally receive Him, what will change in our lives? What did David expect when he so eagerly brought the ark? The answer is given in Psalm 132:8 and in the succeeding verses, and it was borne out in the lives of the early church who received the Spirit on Pentecost.

 

This is what David said to God: “Arise, Lord, and come to your resting place, you and the ark of your might.”(Psalm 132:8 NIV)

 

And the Lord answered David’s invitation: “This is my resting place for ever and ever; here I will sit enthroned, for I have desired it.” (Psalm 132:14 NIV) David invited God, and God responded. God promised to dwell there.

 

So we too can say: “Arise, Lord, and dwell in us through Your Spirit.” When we invite God’s presence, the Holy Spirit, He will answer us. And He will abide in us.

 

Is this difficult? Not if our heart is sincere. We fail to receive the Spirit because we do not seek the Spirit sincerely. This is what the Lord said, as He taught us about prayer:

 

“Which of you fathers, if your son asks for a fish, will give him a snake instead? Or if he asks for an egg, will give him a scorpion? 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 (Luke 11:11–13 NIV)

 

David asked and received. We do not receive because we do not ask. May this Pentecost not be a Pentecost we only hear about as a rumor. May it be a true Pentecost in which we earnestly wait for and plead for the Holy Spirit.

 

What happens then? After David brought the ark and tabernacle home, God’s blessing is recorded at the end of Psalm 132:

 

“I will bless her with abundant provisions; her poor I will satisfy with food. I will clothe her priests with salvation, and her faithful people will ever sing for joy.” (Psalm 132:15–16 NIV)

 

God, who answered David’s prayer for His presence and promised to dwell there, blessed David. God says He will bless the city with abundant provision and satisfy the poor with food. God gives blessings on earth. His blessings go further.

 

He says He will “clothe her priests with salvation, and her faithful people will ever sing for joy.” God promises that He will clothe them with salvation and allow David and his people to live in the joy of salvation.

 

God’s presence makes life on earth blessed and satisfied and ultimately brings salvation—this was promised through David.

 

What about the Holy Spirit’s presence?

 

When the Holy Spirit descended like fire on the believers gathered in Mark’s upper room on Pentecost 2,000 years ago, the God they had only heard about became a reality in their lives. First, those who received the Spirit were clothed in salvation and shouted for joy. The disciples who had locked the doors in fear of death ran into the streets to proclaim the gospel boldly. And the work of satisfying the poor with bread was reproduced. Filled with the Spirit, they selflessly shared all things so that “there were no needy persons among them” (Acts 4:34 NIV), leading to abundant sharing and satisfaction on earth.

 

When the Spirit, once only a rumor, comes to us in reality, the same great reversal—spiritual and physical—occurs. When the Spirit descends on us like sweet rain on a parched desert, our lives become beautiful fields and overflow with living water.

 

The Lord already said in John 7:

 

“‘Let anyone who is thirsty come to me and drink. Whoever believes in me, as Scripture has said, river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them.’ By this he meant the Spirit, whom those who believed in him were later to receive.” (John 7:37–39 NIV)

 

How does the Spirit mold us?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flesh have their minds set on what the flesh desires; but those who live in accordance with the Spirit have their minds set on what the Spirit desires.” (Romans 8:5 NIV)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forbeara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Galatians 5:22–23 NIV)

 

What more needs to be said? Will you leave the Spirit as mere rumor even after reading these words? Will you just hear about the Spirit as an event that happens somewhere else?

 

There is a song called “Paradise of Rumors.” Written and sung by AKMU, a group made up of two missionary children, the song is steeped in Christian values. The following lyrics are part of the song:

 

Oh, weary and ailing traveler

Ooh, lonely wanderеr

Your incurable sickness cannot

Exist therе in that place

(taken from “Paradise of Rumors”)

 

May this “paradise of rumors” not remain only a rumor but become your reality.

 

May we have David’s heart—that earnest longing for the Lord, his pledge not to sleep or slumber until he welcomed the Lord. Until we find the Lord’s dwelling, until we discover the Mighty One’s tabernacle, until we receive the Lord’s Spirit, may we not slumber. May we resolve to seek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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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2:1~7

1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2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6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7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다윗은 늘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왕들의 이름 중에 다윗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실 때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이 말씀은 다윗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했을 때도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왕상 9:4)

 

여기서도 기준은 다윗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 전체를 하나의 모범으로 보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등장할 때마다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행하여” 혹은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라는 표현으로 다윗을 기준으로 삼고 평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왕이며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과 같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다윗도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간음의 죄와 우리아를 죽게 만든 살인의 죄도 지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정말 끔찍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의 신뢰를 받을 수 있던 것은, 그가 늘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책망하였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그토록 신뢰하고 기뻐하셨는지를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또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하였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였는지를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132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던 이들은 다윗을 기억하며 먼저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시 132:1)

 

여기에서 ‘겸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עָנָה[anah])’는 다윗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입니다.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될 수 있는데 ‘낮추다’, ‘괴롭게 하다’, ‘혹독하게 대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때로 하나님으로부터 혹독함을 받기도 했고, 스스로 혹독하게 대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괴롭게 하심’, ‘낮추심’, ‘아나(עָנָה[anah])’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사울의 추격을 받고 죽음의 공포를 이겨 가며 생존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훗날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기억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아나, עָנָה[anah])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아나, עָנָה[anah])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시 119:75)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낮추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된 후에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겪을 때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모든 것이 잘되고 성공하고 있을 때 자신을 낮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겸손함을 보였는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시 132:2~5)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에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합니다. 자신은 왕위에 올라 좋은 궁궐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법궤는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법궤를 예루살렘성 안으로 모시고 올 것을 계획합니다.

사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의 상징이지만, 오래전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형식적인 신앙으로 인해 블레셋에게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사사 시대 말기,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그들은 법궤를 마치 승리를 보장하는 마술 성물처럼 전쟁터 에벤에셀로 메고 나갑니다. 승리를 예견하며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 없이 법궤의 능력만을 이용하려 했던 그들은 결국 대패합니다. 심지어 법궤마저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방 땅으로 간 법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블레셋이 법궤를 자신들의 다곤 신전에 두자, 다곤 신상이 무너지고 그 지역에 독한 종기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블레셋 사람들은 수레에 법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옮깁니다. 이렇게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스스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돌아온 하나님의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약 70년간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사울은 그가 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찾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대상 10:13~14)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국가의 중심에 모시는 일’을 첫 번째 과제로 삼습니다. 이것을 시편 기도자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며 이것이 다윗의 겸손이었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간절히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하나님의 처소를 예비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도 낮아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얼마든지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마음껏 나라를 이끌 수 있을 만큼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역대기에서 이런 다윗의 생각이 잘 드러납니다. 다윗은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모든 지도자들을 모아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 올 계획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대상 13:3~4)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고자 한 이유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말씀에 순종하며 나라를 통치하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한 왕의 나름의 통치 기술로 볼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며 종교를 앞세운 통치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인 시편은 그의 진심이 정말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가 법궤를 옮겨 온 것이 단순한 정치적인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주님께 맹세하고, 야곱의 전능하신 분께 서약하기를 “내가 내 집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도 오르지 아니하며 눈을 붙이고, 깊은 잠에 빠지지도 아니할 것이며, 눈꺼풀에 얕은 잠도 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계실 장막을 마련할 때까지, 야곱의 전능하신 분이 계실 곳을 찾아낼 때까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시 132:2~5, 새번역)

 

그는 진심으로 주님의 장막을 찾기 원했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앞에서 얼마나 간절하고 열정적으로 살기 원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리고 결국은 법궤를 모셔 오는 가슴 벅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시 132:6)

 

기도자는 방치된 채 나무 밭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와 장막을 모셔 오는 이야기를 간단하면서도 극적인 표현으로 전해 줍니다. 사무엘상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와 장막을 모셔 올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알려 줍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삼하 6:14~15)

 

법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자신이 입고 있던 왕의 옷을 벗어 던지고 베 에봇을 입고 나아가 춤을 춥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권위적인 옷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고 아내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기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겸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다시 생각해 봅니다. 왜 그토록 다윗은 하나님의 장막과 법궤를 모셔 오기를 원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왕과 달랐습니다. 사울왕은 종교적 형식은 있었지만 하나님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대는 자기 생각과 세상의 방법대로 나라를 다스린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깨닫습니다. ‘이 나라가 살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와야 한다.’ 이것이 다윗이 눈을 붙이지도 잠들지도 않고 간절히 하나님의 처소를 예비하고자 했던 이유였습니다(시 132:4).

 

<다윗과 같이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십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의 상징이 법궤였다면, 신약과 교회 시대에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드러납니다. 다윗이 그토록 모시기 원하던 하나님의 임재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는 자들의 심령’이라는 진정한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을 모시는 ‘성령강림’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흥미로운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시 132:6)

 

다윗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궤가 저 멀리 변방 시골구석에 방치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한 다른 많은 이들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문을 듣고도 그들은 수십 년간 성궤를 찾지 않았습니다. 귀찮았거나 삶이 바빴을 수도 있습니다. 굳이 성궤가 없어도 눈앞의 삶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의 역사, 초대교회를 뒤집어 놓았던 성령의 권능에 대해 수없이 듣고 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 봅니다. 성경이 전하는 성령의 놀라운 이야기를 그저 전설 같은 소문으로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작 내 삶의 자리에는 성령의 능력이 실종된 채, 무덤덤하게 거친 세상을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울의 시대처럼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한 번도 묻지 않고 내 뜻대로 인생을 경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성령님을 찾고 있는지 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내 뜻대로 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유롭고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울도 그러했고,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과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 앞에서 하나님께 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며 다시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구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던 것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으스대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시 132:4~5)

 

다윗은 “여호와의 처소를 발견하기까지 잠들지 아니하겠노라. 전능자의 성막을 찾기까지 나는 졸지 아니하겠노라.”라고 결단합니다. 이런 다윗의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나는 잠들지 아니하겠노라. 주님 성령을 선물로 받기까지 나는 졸지 아니하리라.” 이런 결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소문만 듣고 있을 뿐입니다. ‘성령님이 어딘가에 계신다고 하더라. 성령의 임재가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 소문만 듣고 그 현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미약한 신자일 뿐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에 우리 모두 주님의 성령을 간절히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구하는 것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는 것이자, 나를 드리는 것이며,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나 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 안에 살기를 원하며 그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진심어린 간구가 있을 때 약속대로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약속을 믿고 용기를 내어 마침내 성령을 받으면 우리 삶에 무엇이 달라질까요? 다윗은 무엇을 기대하며 그토록 간절하게 법궤를 모셔 왔을까요? 그 해답이 시편 132편 8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신약 시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시 132:8)

 

주님은 다윗의 초청에 아주 가볍게 응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132:14)

 

다윗은 하나님을 초청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서 이곳을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건도 없이 바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내가 영원히 쉴 곳이 여기다”라고 하시며 “내가 여기 거주하려는 이유는 내가 이것을 원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초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일어나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성령을 초청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초청에 응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초청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응답하시며 우리 안에 머무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심만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성령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모시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특별히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1~13)

 

다윗은 구하였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하지 않았기에 받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구하면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이 소문으로만 듣고 마는 절기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강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간구하는 진정한 성령강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소식을 소문으로만 두지 말고 결단하며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헛되고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도우실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홀로 서려고 애쓰고 버티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성궤와 장막을 모신 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내용이 시편 132편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시 132:15~16)

 

다윗의 기도에 “이제 내가 여기 머물러 있으리라” 응답하신 하나님이 다윗에게 축복하십니다.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의 축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다윗과 백성들이 그 구원의 즐거움 가운데 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법궤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은 이 땅에서의 삶을 행복하고 만족하게 만들며,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임재는 어떠합니까? 2천 년 전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의 불길이 임하였을 때, 소문으로만 듣던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실제가 되셨습니다. 먼저 성령을 받은 이들은 구원의 옷을 입고 즐거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담대히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떡으로 빈민을 만족하게 하시는 역사가 재현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충만해지자 자기 재산을 아끼지 않고 나누어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행 4:34). 이 땅에서의 풍성한 나눔, 선함의 번짐이 일어났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성령이 실제로 임하실 때, 이같이 영육 간의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에 성령의 단비가 내릴 때, 아름다운 밭이 되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7b~39)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 갑니까?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경은 자세하게 알려 줍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가 성경 속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성령을 소문으로만 남겨 두시겠습니까? ‘어딘가에 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라며 그저 생각만으로 담아 두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근에 나온 “소문의 낙원”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선교사의 자녀가 지어 부른 노래로, 기독교적인 가치가 듬뿍 담긴 듯 보이는 노래입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소문의 낙원,

지치고 병든 나그네여

우 외톨이 나그네여

당신의 불치병은

그곳에 존재할 수 없어요.

(악동뮤지션, “소문의 낙원가사 )

 

여러분, 이것이 소문으로만 들리는 이야기라면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소문의 낙원이 그저 소문으로만 남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여러분의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처소를 발견하기까지, 전능자의 성막을 찾기까지, 주님의 성령을 받기까지 나는 졸지 않으리라. 결단하며 주님께 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시132:1~7)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82, 183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생생하게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왕 중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은 없었습니다. 간음과 살인이라는 큰 죄를 지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시편 132편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원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시132:1). ‘겸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는 ‘낮추다, 괴롭게 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는 고난 속에서 낮아졌고, 왕이 된 후에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공의 때에도 자신을 낮출 수 있었던 것,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법궤가 약 70년간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사울 왕은 법궤를 찾지 않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나라가 살길은 하나님이 진짜 왕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되는 길뿐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맹세합니다.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시 132:4-5). 법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왕의 옷을 벗어 던지고 베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왕의 옷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법궤였다면, 신약 시대에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소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물어봅니다. 성령의 임재가 그저 소문으로만 들리는 이야기는 아닌지요? 사울의 시대처럼,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묻지 않고 내 뜻대로 인생을 경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다윗은 구하였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하지 않기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한다는 것은 다윗처럼 우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으스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처소를 발견하기까지, 전능자의 성막을 찾기까지, 주님의 성령을 받기까지, 나는 졸지 않으리라.’ 이 결단으로 주님을 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내 삶에서 성령을 실제로 구하고 경험한 적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2.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오늘 다윗의 갈망을 통해 우리의 무덤덤한 영적 주소를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성령님의 권능을 소문으로만 들었던 우리의 영적 게으름을 회개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 없이는 잠들지 않겠다던 다윗의 간절함으로 성령을 찾아 나서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소문으로만 듣던 참된 평안과 예배의 기쁨이 다윗의 춤처럼 터져 나오게 하시고, 영육 간의 결핍이 떠나가며, 원수 마귀를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권세가 우리 삶의 자리에 실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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