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현대인들은 죽음을 극복한 듯하지만, 사실 죽음의 공포를 덮어 두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과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현대인들은 죽음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아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사는 듯 보입니다. 마치 죽음이라는 인류의 숙명을 완전히 극복해 낸 것 같은 표정입니다. 과연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우리 안에 이런 분위기가 있는 것은 우리를 진정한 삶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현대의 장례 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온 마을이 죽음의 음산함과 통곡 소리를 함께 나누며 죽음의 실체를 마주했습니다. 집에서 시신을 모셨고, 마을 중앙을 통과하여 관이 나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죽음은 깔끔하게 단장된 병원 지하 시신 안치실과 정중한 조명이 갖춰진 장례식장 뒤편으로 멀찌감치 물러나 있는 듯 보입니다. 짙은 죽음의 악취와 비참함은 완벽하게 세척되었고, 우리는 잘 정돈된 장례 절차를 통해 죽음을 차분하고 깔끔하게 처리합니다. 죽음이 내 삶의 문턱까지 바짝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겨를조차 없이, 그렇게 세상은 죽음의 실체를 우리의 눈에서 성공적으로 지워 버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세속적 철학들과 관조적인 담론들이 현대인들에게 무감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죽음은 그저 자연의 이치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니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담담한 조언들은, 그것을 들을 때 마치 우리가 죽음을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물론 이러한 세속적인 관조는 결과적으로 현대 사회의 자살률을 높이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인들은 죽음 앞에서 정말 당당해진 것입니까?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은 그의 저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For the Life of the World)』에서 오늘날 현대 문화가 보여 주는 이 어색한 의연함의 정체를 정밀하게 파헤칩니다. 슈메만은 현대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죽음의 미화’이자 ‘거짓된 평화’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가진 진짜 비극성과 공포를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포장하고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세상에서의 죽음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나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깨어짐으로 찾아온 가장 비자연적이고, 가장 침노적이며, 가장 참혹한 영적 대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현대 문화는 인간의 죽음을 단지 생물학적 필연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정중한 장례식과 그럴듯한 철학적 언어로 죽음의 독침을 은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앞에서 보이는 당당함은 용기가 아니라, 사실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는 영적 마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깔끔해진 장례식장 조명 아래에서, 그리고 ‘어차피 누구나 가는 길’이라는 덤덤한 철학적 위로 속에서, 현대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죽음의 진짜 공포를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떨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죽음을 앞두게 될 때 외면해 왔던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 이야기는 담담하게 들려옵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나의 죽음을 직면하게 될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세상은 평소에 죽음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남의 일로 여기며 의연한 척, 당당한 척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나 막상 나 자신이 의사로부터 불치병 판정을 받거나, 차가운 병실에서 가족의 호흡이 사그라드는 죽음의 현장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인간이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혼란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두려움의 실체가 얼마나 참혹한지, 우리는 죽음의 곁을 지켜 온 이들의 기록 속에서 가감 없이 목격합니다.
현대 임종학의 문을 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책 『죽음과 죽어감』(1969)에서 죽어감의 단계를 다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다섯 단계라는 유명한 이론입니다. 오늘날 그의 연구는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연구를 위해 그는 1967년부터 시카고 대학 빌링스 병원에서 죽어 가는 이들의 곁에 앉아 그들의 말을 받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병원에서 죽음은 입에 올리지 않는 금기였고, 환자들은 홀로 죽어 갔으며, 의사들은 그들을 외면했고, 진통제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을 깨고 그가 마주한 인간의 얼굴은 절대로 의연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선고를 받는 순간 사람은 벽 뒤로 숨기도 하고, 분노를 터뜨리며, 마침내 누군지도 모를 존재에게 흥정하기도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병이 나를 찾아왔는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 평소 그토록 이성적이고 차분했던 사람들조차 죽음 앞에서는 무너졌습니다. 여러분에게 만약 그런 선고가 주어진다면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휴스턴에 있는 앤더슨 병원의 종신 교수로 주로 암 환자들을 돌보셨던 명의 김의신 박사님도 비슷한 증언을 하셨습니다. 언젠가 저희 교회에 오셔서 의료 사역에서 경험한 신앙 이야기를 전하셨는데, 참으로 안타까웠던 여러 사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큰 회사를 경영하며 많은 부를 소유하신 분들을 치료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자기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몇몇 분들은 지독한 패닉 상태에 빠져 주위 사람들에게 비명을 지르고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자기 병을 고쳐 주기만 하면 자기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던 분이니 더욱 죽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분도 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 인간은 불치의 병 앞에서, 죽음이 예견되는 현장에서 이토록 당황하고 불안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이 단순히 ‘생물학적 호흡의 멈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내가 평생 구축해 온 사랑하는 가족과의 관계, 나의 성취, 내 존재의 모든 터전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전적인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 너머에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그 막막함이 극심한 공포를 자아내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아무리 의연한 척 당당한 척 포장할지라도, 막상 죽음의 그늘이 내 육체와 가정을 덮칠 때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비로소 절감하게 됩니다.
<세상의 학문과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마주하기보다 잘 포장해 왔습니다.>
이렇게 어떤 첨단 과학으로도 장례 문화의 화려한 포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끔찍한 죽음의 문제 앞에, 세상의 종교와 철학은 지금까지 어떤 대답을 제시해 왔습니까? 인류 역사는 거대한 공포를 마주할 때마다 나름의 신학적 철학적 정당화를 시도하며 죽음의 독침을 무디게 하고자 부단히 애써 왔습니다. 먼저 동양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Confucianism)를 살펴봅니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편 제11장에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 계로(季路)의 대화가 나옵니다. 계로가 감히 죽음에 대하여 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未知生, 焉知死?”(미지생, 언지사)라며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 이렇듯 유교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직면하기보다는 현세의 윤리와 삶에 집중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또한 불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연속선’의 한 부분입니다. 인간은 멈추지 않는 쳇바퀴인 윤회 속에서 자신이 지은 행동(업)에 따라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반복 자체를 ‘고통’이라고 보았고, 그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세속 철학 사조와 물질주의는 죽음을 단지 ‘생물학적 소멸(Extinction)’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0)의 말입니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enoeceus)》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악(惡)인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대의 세속적 존재론 역시 죽음을 자연에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니 그저 수용하라고 냉소적인 위로를 건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세상의 대답입니다. 유교는 죽음을 회피하고, 불교는 죽음에서 빠져나오려 열반에 이르고자 하며, 세속 철학은 죽음을 체념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대답 속에서 죽음은 그저 자연스러운 이치이거나, 비워 내야 할 집착, 또는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마침표일 뿐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덮어 둘 수 없는 영적인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속의 회피와 체념을 넘어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인 로마서 6장 23절은 인류가 마주한 죽음의 실상을 명확하고 엄중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도바울은 여기서 아주 독특하고 정교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삯’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당시 로마 군인들이 한 달 동안 땀 흘려 복무한 대가로 손에 쥐는 ‘정당한 봉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한계도, 어쩌다 찾아오는 우연도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결과로 주인에게 정당하게 지불받게 된 ‘대가’입니다.
성경의 첫 자리인 창세기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그곳에 두셨을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에덴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이 들어올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죽음이라는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단순한 ‘존재의 소멸’이나 ‘호흡의 멈춤’이 아닙니다. 죽음의 참된 본질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Separation)’입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으면 아주 쉽게 들리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매우 어렵기도 한 말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길을 가다가 나뭇가지 하나가 꺾여 나간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본체인 나무에서 꺾여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푸른 잎을 머금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쁜 꽃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뭇가지가 정말 살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생명의 줄기로부터 단절된 순간, 그 나뭇가지는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 피어 있는 꽃은 생명의 증거가 아니라 죽음이 진행되고 있는 마지막 잔상일 뿐입니다.
우주 공간을 비행하는 우주 비행사를 상상해 봅시다. 어떤 우주인이 사고로 우주선 모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산소를 공급받던 생명줄이 끊어진 상황입니다. 그 우주인은 당장 몇 분 동안은 호흡할 수 있고, 손발을 움직일 수 있으며, 눈을 뜨고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산소의 양에 따라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1년 혹은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는 양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줄이 끊어진 순간, 그는 지금 숨을 쉬고 있어도 정직하게 ‘이미 죽은 운명’입니다. 산소를 공급하는 모체와 단절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남은 산소의 양이 얼마쯤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가 지금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일터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기에 ‘나는 살아 있다’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 영혼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면, 우리는 꺾인 나뭇가지와 산소줄이 끊어진 우주인처럼 숨은 쉬고 있으나 이미 죽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선포한 바와 같이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죽어 가는 자가 아닙니다. 죽을 자도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영혼의 생명선이 끊어졌기에, 내면에 가득 찬 허무와 공포를 메우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 쾌락의 독주를 마셔 보지만, 단절의 깊은 절망은 절대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우리의 삶의 맨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마지막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거대한 영적인 현실입니다.
<사망의 선고를 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생명줄이 끊어져 사망이라는 엄중한 삯을 받고 탄식하는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습니까? 꺾인 나뭇가지처럼 살았으니 실상은 죽어버린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해야 다시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오직 단 하나 확실한 대답을 선포합니다. 생명을 얻는 길은 세상의 철학적 체념이나 자기 수행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잇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 23절 후반 절은 그러므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b)
앞 절의 사망이 우리가 죄를 지어 받은 정당한 급료인 ‘삯(opsōnion)’이었다면, 여기서 선포되는 영생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도 없이 거저 받은 하나님의 ‘은사(charisma)’입니다. 곧,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당신의 음성으로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혜나 윤리를 가르쳐 주러 오신 스승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생명(Zōē)’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할 참혹한 죄의 삯인 사망을 대신 지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완전히 찢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허무시고, 끊어졌던 생명의 줄을 당신의 피로 다시 연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지 참혹한 형벌의 틀이 아니라, 죽어 버린 인류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다시 흘러 들어오게 만드는 위대한 생명의 통로입니다.
알렉산더 슈메만은 그의 책에서 복음의 핵심을 정곡을 찔러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단지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표를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 이미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예배는 단지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과 다시 연결되어 교제하는 ‘생명의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성도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바짝 잇대어지는 ‘거룩한 신비(Mysterious Union)’를 경험합니다. 끊어졌던 산소줄이 다시 우주선의 모체에 결합되듯, 꺾여 있던 나뭇가지가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지듯, 우리가 예수께 접붙여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요 15:5).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성도는 참 생명이신 주님께 성례와 말씀으로 날마다 잇대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11절 이후에서 구원의 진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증언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1~12)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18세기 위대한 전도자 존 웨슬리(John Wesley)가 대서양을 건너던 심먼즈호 위에서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배가 산산조각 날 듯 요동치고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를 때, 한구석에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너무나도 평온하게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폭풍이 지난 뒤 웨슬리가 한 모라비안에게 두렵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여인들과 아이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일이 웨슬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조지아에 도착한 뒤 웨슬리는 모라비안 지도자 스팡엔베르크(August Gottlieb Spangenberg)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조언을 구하자, 스팡엔베르크는 “하나님의 영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합니까?”,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음을 압니까?”라고 연이어 물었습니다. 웨슬리는 이 질문들에 확신 있게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이 흔들림은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에서 그는 마침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웨슬리가 경험한 회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데 관심을 가지느라 가장 중요한 회심의 내용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죽음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이고, 그러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관념적인 지식이나 머릿속의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내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나를 온전히 던지는 실존적 결단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믿음의 행위를 성례와 말씀을 통해 드러내도록 해 왔습니다. 특별히 세례와 성찬, 그리고 말씀을 통해 드러내 왔습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내 옛사람이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어 무덤에 묻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남을 고백하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또한 ‘성찬’은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받는 순간, 성도는 생명의 모체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잇대어져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또한 교회는 날마다 때마다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영의 양식을 먹으며 생명을 드러내 왔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우리를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더는 죽음의 그늘에서 방황하지 맙시다. 세상의 어설픈 위로에 속지 맙시다. 오늘 내 삶의 주인을 바꾸고,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붙잡읍시다. 세례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일의 성찬과 말씀을 사모함으로 먹으며 주님과 날마다 잇대어 살아갑시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끊어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라는 소식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 소망교회 모든 성도에게 가득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이 복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이 소망교회의 고백이 되도록 합시다. 기쁨으로 즐겁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이 주신 생명을 늘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귀한 소망의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Death: What Does the Bible Say?
Romans 6:23
Do modern people living in the world today fear death? On the surface they live confidently and so fearlessly that it appears they are not afraid of it at all. From their expression, it appears they have completely overcome man’s inevitable fate, death.
But have we really solved the problem of death?
The reason for this kind of ambience—that is, a feeling that we have conquered death—is partly because of the modern funeral culture which detaches us from the reality of life. In the past, when a person died, the whole village was forced to face the reality of death as they mourned, wailed, and felt death’s pallor together. The body of the deceased was prepared at a home and the coffin passed through the town’s center.
Today, death is completely “segregated” in the clean, sanitized morgues in hospital basements and in the softly lit backrooms of funeral houses. The terrible stench and misery of death are completely erased, and through well-arranged funeral proceedings we dispose of death with “calm and composure.” The world erases the true nature of death from our sight so successfully that we don’t even have the chance to feel that death is right at our doorstep.
On top of this, secular philosophies and contemplative narratives numb us to death by treating it as if it is not a big deal.
Advice on death—such as “Death is just a law of nature, a destiny man cannot avoid; so accept it humbly”—delude us into thinking that we can reconcile with death.
Of course, such a secular, detached contemplation is having tragic consequences—high suicide rates in modern society.
Then, have modern people become truly courageous before death?
The theologian Alexander Schmemann, in his book For the Life of the World, probes precisely the true nature of the awkward composure that modern culture displays today.
Schmemann diagnoses modern society’s way of facing death as a beautification of death and a false peace. He says that modern people seem confident before death not because they have overcome it but simply because they don’t have the courage to confront its true tragedy and terror and therefore have hidden and wrapped it in a fancy cloak called civilization.
According to Schmemann, in the world originally created by God, death was never “natural” or a “fate to be humbly accepted.” Death was the most unnatural, the most invasive, and the most horrific spiritual catastrophe brought about by the breaking of fellowship with God. But modern culture, having left God, defines human death merely as a biological inevitability and hides death’s poisoned sting with polite funerals and plausible philosophical language.
Therefore, the composure we show before death is not courage but rather a spiritual paralysis of closing our eyes before the vast cliff called death. Under the neat lighting of funeral homes and within the detached philosophical consolation that “it is the path everyone takes,” modern people tremble inside, burying the unresolved, true fear of death deep in their hearts.
Think for a moment. We can calmly listen to stories of other people’s deaths. But what about when I actually face my own death?
The world usually treats death as someone else’s scene in a movie and acts composed and confident. But when one actually receives a diagnosis of an incurable disease from a doctor or experiences the scene of death where a dying person’s breath fades in a cold hospital room, the bewilderment and confusion felt are beyond words.
We witness, without mitigation, how dreadful this fear truly is in the records of those who have kept vigil beside death.
There is a scholar who opened the door to modern thanatology, Elisabeth Kübler-Ross. In her book On Death and Dying (1969), she is famous for presenting the five stages of dying as denial, anger, bargaining, depression, and acceptance. Although her research has received various criticisms today, for this work she began in 1967 to sit beside the dying at Billings Hospital of the University of Chicago and record their words. Until then, death in hospitals was a taboo not spoken of, patients died alone, doctors turned away, and even painkillers were not sufficiently given. But human faces she encountered when breaking that silence were never composed.
At the moment of diagnosis, people hide behind the wall of denial, anger erupts, and finally they begin to bargain with someone they do not even know. “Why me? What sin did I commit to deserve this disease? I still have work to do, please let me live a little longer.” Even those who are ordinarily rational and calm collapse before death.
Dr. Eui-shin Kim, a distinguished professor at Anderson Hospital in Houston who mainly cared for cancer patients, gave a similar testimony. He once came to our church and shared stories of faith from his medical ministry. As he spoke with me he recounted many truly heartbreaking cases.
He said he had treated several super rich individuals who, upon realizing in the hospital that death was imminent, fell into severe panic, screamed at those around them, and struggled desperately because they couldn’t overcome the fear of death. One man even promised to give him half his fortune if he could cure him. He had everything, so accepting death was even harder for him. Of course, even that man could not conquer cancer and passed away. This is our reality.
So why do humans become so bewildered, anxious, and distressed before incurable diseases and in situations where death is imminent?
It is because death is not simply the cessation of biological breathing. Death is the total destruction in which the relationships with beloved family, my achievements, and the foundations of my being that I have built all my life collapse in an instant. Furthermore, because we do not know what lies beyond death, that vast uncertainty produces intense terror.
No matter how composed or confident we pretend to be in daily life, when the shadow of death falls on my body and my household, a person finally realizes how insignificant and fragile they are.
So, what answers have the world’s religions and philosophies offered to this terrible problem of death that cannot be solved by human power, advanced medicine, or dignified funeral culture?
Throughout history, humanity has attempted, whenever facing this enormous fear, to blunt death’s poisoned sting by offering theological and philosophical justifications of various kinds.
First, let us look at Confucianism, a representative Eastern thought. In Analects, Book 11 (Xianjin), there is a conversation between Confucius and his disciple Jilu. When Jilu dared to ask Confucius about death, Confucius answered thus: “未知生, 焉知死?” (“If you do not yet know life, how can you know death?”). Thus Confucianism, rather than confronting the world beyond death, focuses on ethics and life in this world and thereby quietly seeks to avoid the problem of death.
In Buddhism, death is not an end but a continuation into the next chapter. Humans are reborn and die repeatedly according to the actions (karma) they have committed in the endless wheel of samsara. Buddhism regards this cycle of birth, aging, sickness, and death itself as suffering and sees breaking the chain of this reincarnation as nirvana.
Meanwhile, modern secular philosophies and materialism define death simply as biological extinction.
The ancient hedonist philosopher Epicurus (341–270 BC) wrote in his “Letter to Menoeceus”: “Death, therefore, the most awful of evils, is nothing to us, seeing that, when we are, death is not come, and when death is come, we are not.” Modern secular ontology likewise offers the cynical consolation that death is an unavoidable fate to be accepted.
Beloved, these are the world’s answers: Confucianism avoids death, Buddhism seeks escape from death by attaining nirvana, and secular philosophy advises resignation to death. In their answers, death is merely a natural order, an attachment to be emptied, or an unavoidable biological full stop.
So then, beyond secular avoidance and resignation, what does the Bible declare about death?
Today’s text, Romans 6:23, proclaims clearly and solemnly the reality of death that humanity faces: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Romans 6:23 NIV)
“The wages of sin is death…”
Here the apostle Paul uses a very particular and precise word: the original Greek word for “wages” was the word Roman soldiers used for the rightful pay they received for a month’s hard service.
Thus, the death the Bible speaks of is not humanity’s natural biological limit or an occurrence by chance, but the just “payment” that man received from God, his Master, for his rebellion and sin against Him.
Let’s look at the first book of the Bible, Genesis. When God created the Garden of Eden and placed humans there, death did not exist. Eden was the place of perfect communion with God, the Source of life. But God warned Adam and Eve about the possibility of death: “But you must not ea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or when you eat from it you will certainly die.” (Genesis 2:17 NIV) Adam and Eve ate the fruit of that tree and received death as the wage.
Theologically, then, the essence of death, according to the Bible, is not mere annihilation of existence or the cessation of breath but the complete separation from the Source of life, God.
Shall I give you an example? You may have seen a twig broken off from a tree while walking. The fallen twig may still bear green leaves and even a flower, and passersby might say, “It’s still alive.” But is that twig truly alive? No. The moment it is severed from the trunk of life, it is already dead. And the currently blooming flower is not proof of life but the dying remnant of death’s progress.
Imagine an astronaut in space. What if, due to an accident, he drifts away from his spacecraft and loses the lifeline that supplies oxygen? He may still breathe for a few minutes, move limbs, open eyes, and appear vividly alive. But from the moment his lifeline is severed, he is as good as dead even though he may be breathing. It is because separation from the oxygen-supplying craft is death.
The Bible reveals this very truth to us.
Because we open our eyes, breathe, and move busily at work, we deceive ourselves into thinking “I am alive.” But if my soul is severed from God, the Source of life, if sin blocks my soul from God, then in the Bible’s view we are like a broken twig or an astronaut with a severed lifeline—breathing yet already dead.
Therefore, as the apostle Paul declared in Ephesians 2:1, we were “dead in transgressions and sins.” Not dying, not destined to die, but already dead because of sin. Thus, the man who lives cut off from God desperately struggles to fill the massive inner void and terror resulting from the severed lifeline of his soul. He drinks deeply of the intoxicants of the world—money, honor, and pleasure—but the deep despair of that separation can never be filled. Therefore, death is not the final event waiting at the end of our lives but the vast spiritual reality of humanity having left God.
So, beloved members of Somang Church, is there any hope for a life that groans under the severe wage of death because the lifeline with God has been cut?
How can our souls, alive like broken twigs yet actually dead, again receive the sap of life?
The Bible proclaims one clear answer: the only way to obtain life is not through philosophical resignation or ascetic practices but to be reattached to Jesus Christ, the Source of life.
Therefore the latter half of our text, Romans 6:23, declares the climax of this gospel: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Romans 6:23b NIV)
If the death in the previous clause is the rightful wage (opsōnion) we received for sin, the eternal life proclaimed here is God’s undeserved gift (charisma)—the unconditional gift of love given freely without our merit.
Jesus came to this earth and declared in His own voice who He is.
In John 14:6 the Lord proclaims,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John 14:6 NIV) Also in John 11, He revealed the great mystery of life when Martha and Mary were weeping over their brother’s death: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The 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they die; and whoever lives by believing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John 11:25–26 NIV)
Indeed! Jesus Christ is not merely a teacher who came to give us ethical wisdom or a better way of living. He Himself is life (Zōē) itself.
To bear the dreadful wage of sin, death, in our stead, Jesus’ body was torn apart on the Cross. He tore down the barrier of sin that stood between God and humanity and with His blood reconnected the broken lifeline.
Therefore, the Cross is not merely an instrument of horrific punishment but the great channel through which God’s eternal life flows back into the dead souls of humanity.
The theologian Alexander Schmemann, in his book For the Life of the World, cuts to the heart of this gospel.
Schmemann says that Christian salvation is not simply a ticket to go to heaven after death. Salvation is our participation in God’s life that has already penetrated this world through Christ’s resurrection.
According to Schmemann, worship is not merely man offering a religious rite to God. Worship is the feast of life in which, through Jesus Christ who broke the power of death by the Cross and resurrection, we are again perfectly connected and in communion with the Father’s life. Thus worship gives life to the world.
In the place of worship, the believer experiences a “mysterious union” as he is intimately joined to Christ, the Source of life.
Just as a severed oxygen line is reattached to a spacecraft, and a broken twig is grafted to the true vine, we are joined to Jesus, the true Vine, when we worship (John 15:5).
Beloved saints, the apostle John summarizes this great truth of salvation in one sentence in 1 John 5:11–12: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Whoever has the Son has life; whoever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 John 5:11–12 NIV)
Is Jesus Christ, the Son of God, in you? Do you confess Jesus, who bled for you on the Cross and rose again, as Lord? If so, you already possess eternal life. You are a blessed being who has begun eternal communion with God in Christ, the true Life, having left the world in which you were breathing but spiritually dead.
When the great 18th-century evangelist John Wesley met a violent storm while crossing the Atlantic on the Simmersen, he witnessed something extraordinary. As the ship thrashed and many screamed in terror of death, a group of people, including children and the elderly, was calmly singing hymns in a corner. They were the Moravians. After the storm subsided, Wesley asked one of them if he had not been afraid. The man replied that even the women and children were not afraid of death. This left a deep impression on Wesley.
After arriving in Georgia, Wesley sought advice from the Moravian leader August Gottlieb Spangenberg who asked him in succession: “Does the Spirit of God testify that you are a child of God? Do you know Jesus Christ? Do you know that He has saved you?” Wesley could not answer these questions with assurance, and this uncertainty followed him for a long time. Two years later, on May 24, 1738, at Aldersgate in London, he finally experienced a conversion in which his heart was “strangely warmed.”
Beloved, what was the nature of the conversion that Wesley experienced? We sometimes focus on the heart’s warming and miss the essence of true conversion.
What is true conversion? It is honestly facing my own death and receiving Jesus as the true Lord of my life, who bled on the Cross for me and broke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beginning of faith.
Therefore, the biblical notion of faith is not an abstract piece of knowledge or mere intellectual assent. Faith is an existential decision to surrender the sovereignty of my life to God and to cast myself wholly upon Christ, the Source of life.
The church has made this act of faith and decision visible through baptism.
Baptism is the public declaration before the world and God that my old self died with Christ on the Cross, was buried, and has been reborn to a new life with the risen Christ.
The church has also manifested that life through the Eucharist.
As Alexander Schmemann emphasized, the Eucharist is not merely a static ritual that recalls the past event of the Last Supper. At the moment a believer receives the bread and the cup, they are joined to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the Source of life, and receive the life of heaven. A holy mystery occurs in which God’s sacred sap flows into our souls, which had been like broken twigs.
The church also manifests life daily by reading and hearing the Word as spiritual food. Even now, the Lord invites us, who are trembling before death, into life through the Word.
“Very truly I tell you,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judged but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John 5:24 NIV)
Therefore, beloved, let us no longer wander in the shadow of death.
Do not be deceived by the world’s shallow consolations. Change the Lord of your life today and cling to the hem of Jesus Christ, the true life. Remember the grace of baptism and live daily joined to the Lord by longing for the Sunday Eucharist and the Word. This is faith and the life of a believer.
What is the gospel?
The gospel is the news that we, who were cut off from God and doomed to die because of sin, have received forgiveness of sins through the atonement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and have had our life-relationship with God restored so that we may enjoy eternal life.
May this gospel remove our fear of death and empower us to live boldly in this world. May this wondrous gospel be the confession of every saint of Somang Church.
로마서 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현대인들은 죽음을 극복한 듯하지만, 사실 죽음의 공포를 덮어 두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과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현대인들은 죽음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아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사는 듯 보입니다. 마치 죽음이라는 인류의 숙명을 완전히 극복해 낸 것 같은 표정입니다. 과연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우리 안에 이런 분위기가 있는 것은 우리를 진정한 삶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현대의 장례 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온 마을이 죽음의 음산함과 통곡 소리를 함께 나누며 죽음의 실체를 마주했습니다. 집에서 시신을 모셨고, 마을 중앙을 통과하여 관이 나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죽음은 깔끔하게 단장된 병원 지하 시신 안치실과 정중한 조명이 갖춰진 장례식장 뒤편으로 멀찌감치 물러나 있는 듯 보입니다. 짙은 죽음의 악취와 비참함은 완벽하게 세척되었고, 우리는 잘 정돈된 장례 절차를 통해 죽음을 차분하고 깔끔하게 처리합니다. 죽음이 내 삶의 문턱까지 바짝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겨를조차 없이, 그렇게 세상은 죽음의 실체를 우리의 눈에서 성공적으로 지워 버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세속적 철학들과 관조적인 담론들이 현대인들에게 무감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죽음은 그저 자연의 이치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니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담담한 조언들은, 그것을 들을 때 마치 우리가 죽음을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물론 이러한 세속적인 관조는 결과적으로 현대 사회의 자살률을 높이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인들은 죽음 앞에서 정말 당당해진 것입니까?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은 그의 저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For the Life of the World)』에서 오늘날 현대 문화가 보여 주는 이 어색한 의연함의 정체를 정밀하게 파헤칩니다. 슈메만은 현대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죽음의 미화’이자 ‘거짓된 평화’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가진 진짜 비극성과 공포를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포장하고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세상에서의 죽음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나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깨어짐으로 찾아온 가장 비자연적이고, 가장 침노적이며, 가장 참혹한 영적 대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현대 문화는 인간의 죽음을 단지 생물학적 필연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정중한 장례식과 그럴듯한 철학적 언어로 죽음의 독침을 은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앞에서 보이는 당당함은 용기가 아니라, 사실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는 영적 마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깔끔해진 장례식장 조명 아래에서, 그리고 ‘어차피 누구나 가는 길’이라는 덤덤한 철학적 위로 속에서, 현대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죽음의 진짜 공포를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떨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죽음을 앞두게 될 때 외면해 왔던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 이야기는 담담하게 들려옵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나의 죽음을 직면하게 될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세상은 평소에 죽음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남의 일로 여기며 의연한 척, 당당한 척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나 막상 나 자신이 의사로부터 불치병 판정을 받거나, 차가운 병실에서 가족의 호흡이 사그라드는 죽음의 현장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인간이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혼란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두려움의 실체가 얼마나 참혹한지, 우리는 죽음의 곁을 지켜 온 이들의 기록 속에서 가감 없이 목격합니다.
현대 임종학의 문을 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책 『죽음과 죽어감』(1969)에서 죽어감의 단계를 다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다섯 단계라는 유명한 이론입니다. 오늘날 그의 연구는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연구를 위해 그는 1967년부터 시카고 대학 빌링스 병원에서 죽어 가는 이들의 곁에 앉아 그들의 말을 받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병원에서 죽음은 입에 올리지 않는 금기였고, 환자들은 홀로 죽어 갔으며, 의사들은 그들을 외면했고, 진통제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을 깨고 그가 마주한 인간의 얼굴은 절대로 의연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선고를 받는 순간 사람은 벽 뒤로 숨기도 하고, 분노를 터뜨리며, 마침내 누군지도 모를 존재에게 흥정하기도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병이 나를 찾아왔는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 평소 그토록 이성적이고 차분했던 사람들조차 죽음 앞에서는 무너졌습니다. 여러분에게 만약 그런 선고가 주어진다면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휴스턴에 있는 앤더슨 병원의 종신 교수로 주로 암 환자들을 돌보셨던 명의 김의신 박사님도 비슷한 증언을 하셨습니다. 언젠가 저희 교회에 오셔서 의료 사역에서 경험한 신앙 이야기를 전하셨는데, 참으로 안타까웠던 여러 사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큰 회사를 경영하며 많은 부를 소유하신 분들을 치료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자기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몇몇 분들은 지독한 패닉 상태에 빠져 주위 사람들에게 비명을 지르고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자기 병을 고쳐 주기만 하면 자기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던 분이니 더욱 죽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분도 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 인간은 불치의 병 앞에서, 죽음이 예견되는 현장에서 이토록 당황하고 불안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이 단순히 ‘생물학적 호흡의 멈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내가 평생 구축해 온 사랑하는 가족과의 관계, 나의 성취, 내 존재의 모든 터전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전적인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 너머에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그 막막함이 극심한 공포를 자아내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아무리 의연한 척 당당한 척 포장할지라도, 막상 죽음의 그늘이 내 육체와 가정을 덮칠 때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비로소 절감하게 됩니다.
<세상의 학문과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마주하기보다 잘 포장해 왔습니다.>
이렇게 어떤 첨단 과학으로도 장례 문화의 화려한 포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끔찍한 죽음의 문제 앞에, 세상의 종교와 철학은 지금까지 어떤 대답을 제시해 왔습니까? 인류 역사는 거대한 공포를 마주할 때마다 나름의 신학적 철학적 정당화를 시도하며 죽음의 독침을 무디게 하고자 부단히 애써 왔습니다. 먼저 동양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Confucianism)를 살펴봅니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편 제11장에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 계로(季路)의 대화가 나옵니다. 계로가 감히 죽음에 대하여 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未知生, 焉知死?”(미지생, 언지사)라며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 이렇듯 유교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직면하기보다는 현세의 윤리와 삶에 집중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또한 불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연속선’의 한 부분입니다. 인간은 멈추지 않는 쳇바퀴인 윤회 속에서 자신이 지은 행동(업)에 따라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반복 자체를 ‘고통’이라고 보았고, 그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세속 철학 사조와 물질주의는 죽음을 단지 ‘생물학적 소멸(Extinction)’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0)의 말입니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enoeceus)》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악(惡)인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대의 세속적 존재론 역시 죽음을 자연에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니 그저 수용하라고 냉소적인 위로를 건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세상의 대답입니다. 유교는 죽음을 회피하고, 불교는 죽음에서 빠져나오려 열반에 이르고자 하며, 세속 철학은 죽음을 체념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대답 속에서 죽음은 그저 자연스러운 이치이거나, 비워 내야 할 집착, 또는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마침표일 뿐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덮어 둘 수 없는 영적인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속의 회피와 체념을 넘어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인 로마서 6장 23절은 인류가 마주한 죽음의 실상을 명확하고 엄중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도바울은 여기서 아주 독특하고 정교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삯’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당시 로마 군인들이 한 달 동안 땀 흘려 복무한 대가로 손에 쥐는 ‘정당한 봉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한계도, 어쩌다 찾아오는 우연도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결과로 주인에게 정당하게 지불받게 된 ‘대가’입니다.
성경의 첫 자리인 창세기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그곳에 두셨을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에덴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이 들어올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죽음이라는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단순한 ‘존재의 소멸’이나 ‘호흡의 멈춤’이 아닙니다. 죽음의 참된 본질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Separation)’입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으면 아주 쉽게 들리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매우 어렵기도 한 말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길을 가다가 나뭇가지 하나가 꺾여 나간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본체인 나무에서 꺾여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푸른 잎을 머금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쁜 꽃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뭇가지가 정말 살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생명의 줄기로부터 단절된 순간, 그 나뭇가지는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 피어 있는 꽃은 생명의 증거가 아니라 죽음이 진행되고 있는 마지막 잔상일 뿐입니다.
우주 공간을 비행하는 우주 비행사를 상상해 봅시다. 어떤 우주인이 사고로 우주선 모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산소를 공급받던 생명줄이 끊어진 상황입니다. 그 우주인은 당장 몇 분 동안은 호흡할 수 있고, 손발을 움직일 수 있으며, 눈을 뜨고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산소의 양에 따라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1년 혹은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는 양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줄이 끊어진 순간, 그는 지금 숨을 쉬고 있어도 정직하게 ‘이미 죽은 운명’입니다. 산소를 공급하는 모체와 단절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남은 산소의 양이 얼마쯤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가 지금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일터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기에 ‘나는 살아 있다’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 영혼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면, 우리는 꺾인 나뭇가지와 산소줄이 끊어진 우주인처럼 숨은 쉬고 있으나 이미 죽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선포한 바와 같이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죽어 가는 자가 아닙니다. 죽을 자도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영혼의 생명선이 끊어졌기에, 내면에 가득 찬 허무와 공포를 메우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 쾌락의 독주를 마셔 보지만, 단절의 깊은 절망은 절대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우리의 삶의 맨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마지막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거대한 영적인 현실입니다.
<사망의 선고를 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생명줄이 끊어져 사망이라는 엄중한 삯을 받고 탄식하는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습니까? 꺾인 나뭇가지처럼 살았으니 실상은 죽어버린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해야 다시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오직 단 하나 확실한 대답을 선포합니다. 생명을 얻는 길은 세상의 철학적 체념이나 자기 수행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잇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 23절 후반 절은 그러므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b)
앞 절의 사망이 우리가 죄를 지어 받은 정당한 급료인 ‘삯(opsōnion)’이었다면, 여기서 선포되는 영생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도 없이 거저 받은 하나님의 ‘은사(charisma)’입니다. 곧,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당신의 음성으로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혜나 윤리를 가르쳐 주러 오신 스승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생명(Zōē)’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할 참혹한 죄의 삯인 사망을 대신 지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완전히 찢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허무시고, 끊어졌던 생명의 줄을 당신의 피로 다시 연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지 참혹한 형벌의 틀이 아니라, 죽어 버린 인류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다시 흘러 들어오게 만드는 위대한 생명의 통로입니다.
알렉산더 슈메만은 그의 책에서 복음의 핵심을 정곡을 찔러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단지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표를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 이미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예배는 단지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과 다시 연결되어 교제하는 ‘생명의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성도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바짝 잇대어지는 ‘거룩한 신비(Mysterious Union)’를 경험합니다. 끊어졌던 산소줄이 다시 우주선의 모체에 결합되듯, 꺾여 있던 나뭇가지가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지듯, 우리가 예수께 접붙여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요 15:5).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성도는 참 생명이신 주님께 성례와 말씀으로 날마다 잇대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11절 이후에서 구원의 진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증언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1~12)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18세기 위대한 전도자 존 웨슬리(John Wesley)가 대서양을 건너던 심먼즈호 위에서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배가 산산조각 날 듯 요동치고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를 때, 한구석에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너무나도 평온하게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폭풍이 지난 뒤 웨슬리가 한 모라비안에게 두렵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여인들과 아이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일이 웨슬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조지아에 도착한 뒤 웨슬리는 모라비안 지도자 스팡엔베르크(August Gottlieb Spangenberg)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조언을 구하자, 스팡엔베르크는 “하나님의 영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합니까?”,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음을 압니까?”라고 연이어 물었습니다. 웨슬리는 이 질문들에 확신 있게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이 흔들림은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에서 그는 마침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웨슬리가 경험한 회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데 관심을 가지느라 가장 중요한 회심의 내용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죽음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이고, 그러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관념적인 지식이나 머릿속의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내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나를 온전히 던지는 실존적 결단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믿음의 행위를 성례와 말씀을 통해 드러내도록 해 왔습니다. 특별히 세례와 성찬, 그리고 말씀을 통해 드러내 왔습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내 옛사람이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어 무덤에 묻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남을 고백하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또한 ‘성찬’은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받는 순간, 성도는 생명의 모체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잇대어져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또한 교회는 날마다 때마다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영의 양식을 먹으며 생명을 드러내 왔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우리를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더는 죽음의 그늘에서 방황하지 맙시다. 세상의 어설픈 위로에 속지 맙시다. 오늘 내 삶의 주인을 바꾸고,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붙잡읍시다. 세례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일의 성찬과 말씀을 사모함으로 먹으며 주님과 날마다 잇대어 살아갑시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끊어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라는 소식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 소망교회 모든 성도에게 가득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이 복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이 소망교회의 고백이 되도록 합시다. 기쁨으로 즐겁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이 주신 생명을 늘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귀한 소망의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죽음, 성경은 무엇이라 답하는가 (롬 6:23)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87, 305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현대 사회는 죽음을 잘 정돈된 장례 문화 뒤로 숨기며 “당당한 척” 살아가게 만듭니다. 나는 평소 죽음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설교의 요약>
현대인들은 겉으로는 죽음 앞에 당당해 보이지만, 이는 정돈된 장례 문화와 세속 철학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입니다. 유교는 죽음을 회피하고,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나려 하며, 세속 철학은 죽음을 그저 담담히 수용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학자 슈메만이 지적했듯, 이러한 당당함은 죽음의 진짜 공포를 직면할 용기가 없어 그것을 미화하고 은폐한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죽음 앞에 선 사람들, 재벌부터 평범한 이들까지 누구도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이 죽음의 실체를 정확히 짚어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여기서 죽음은 생물학적 소멸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꺾이는 순간 겉보기엔 살아있어도 실상 이미 죽은 것처럼,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숨을 쉬어도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에베소서가 말하듯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후반절은 놀라운 반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음이 우리가 죄로 받은 정당한 삯이었다면, 영생은 우리가 자격 없이 거저 받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죄의 삯인 사망을 대신 지시고, 끊어졌던 생명의 줄을 당신의 피로 다시 이어주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스승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이 생명은 관념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으로 우리 삶에 임합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을 고백하며, 성찬과 말씀을 통해 날마다 그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그늘에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로 인해 끊어졌던 우리가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회복하였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며 우리가 당당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근거입니다.
<나누기>
1. 성경은 죽음을 단순한 ‘호흡의 멈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이라고 말합니다. 이 정의가 여러분이 평소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어떻게 다른가요?
2. 사망이 우리가 받은 정당한 ‘삯’이라면, 영생은 자격 없이 거저 받은 ‘은사(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값없이 받은 자로서 나는 어떤 삶의 태도로 응답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사망의 그늘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방황하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죽음이 절벽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는 소망의 문임을 믿고, 세례와 성찬과 말씀으로 날마다 참 생명이신 주님께 잇대어 살게 하옵소서. 부활의 주님만을 의지하며 당당하고 기쁘게 영생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