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에브라임과 유다의 지도자들은 술에 취한 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오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 구절 중에서도 난해 본문으로 꼽히는 본문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서 28장 앞부분을 먼저 살펴보려 합니다. 이사야서 28장은 ‘술 취한 자들’, ‘술에 빠진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사 28:1a)
누구를 향한 말씀일까요?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 즉 북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이들이 교만하고 술에 취했다고 표현합니다. ‘술에 취했다’라는 말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의미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지도자들은 강한 외국과의 동맹을 통해 앗수르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려고 하셨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외교와 군사력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하고 술 취해 있습니다. 그러한 에브라임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사 28:3)
앗수르에게 멸망할 운명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이웃인 남유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유다 사람이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린다. (사 28:7a, 새번역)
에브라임, 북이스라엘이 술에 취하여 잘못 판단하여 나라가 망하고 앗수르에 의해 짓밟힐 처지가 되었다면, 남유다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아직 심판의 길에서는 조금 멀리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술에 취해서 제대로 판결도 예언도 하지 못하고 있는 아주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예언자가 독한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포도주 항아리에 빠졌다.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리니, 환상을 제대로 못 보며, 판결을 올바로 하지 못한다. (사 28:7b, 새번역)
남유다도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독한 술에 취해서 환상도 보지 못하고 판결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바른길,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기에 온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이 남유다의 상황입니다.
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에브라임도 예루살렘도 왜 이렇게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아졌을까요? 술의 생산량이 많아졌기 때문일까요? 다음 장인 29장에서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 29:9~10)
포도주를 마셔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술 취한 이유는 주님께서 깊게 잠들게 하는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사야의 말씀을 어린아이에게나 가르칠 유치한 소리라며 조롱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오늘의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사 28:9)
누구일까요? 바로 위에 나오는 남유다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입니다. 술 취해 있는 사람들, 잠들게 하는 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려는 이사야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사 28:9)
이 말씀을 새번역은 이사야의 목소리로 이렇게 전합니다.
제사장들이 나에게 빈정거린다. “저 자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 저 자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젖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젖을 먹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사 28:9, 새번역)
유다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치하다고 평가합니다. 너무 쉬워서 어린아이들에게나 가르쳐야 할 내용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사 28:10)
이 부분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게 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말씀입니다. 이 개역개정의 말씀은 성경 원어의 말씀을 나름 정성껏 번역한 말입니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시적인 언어 같기도 하고, 의성어 또는 줄임말 같기도 합니다. 이러하기에 이 단어들을 어떻게든 뜻이 통하도록 고심하면서 번역한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의 말씀입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사 28:10)
이 말씀을 한글 그대로 앞뒤를 연결해서 해석한다면 이런 뜻이 될 것 같습니다. “이사야야, 네가 누군데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냐? 차라리 갓 젖 뗀 아이들에게나 가서 가르쳐라. 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유치한지 아느냐? 앗수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이 이방 나라인 앗수르를 돕는다는 말이냐? 그리고 우리가 서로 동맹을 맺은 것 때문에 우리가 교만하고 심판을 당한다고?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도리어 이것은 나라의 운명을 지킬 묘수이며 지혜가 아니겠느냐?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일이냐? 너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말을 짜맞추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계의 경계를 더하고 교훈의 교훈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또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저 자는 우리에게, 한 자 한 자,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 가르치려고 한다. (사 28:10, 새번역)
<그들이 무시했던 이사야의 말씀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의 초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조금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히브리어 문장이 예사롭지 않은 의성어 조합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여러분은 이 문장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어떤 주석가는 이 문장은 의미 없는 반복이며, 영어로는 “blah, blah, blah” 같은 표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를 들어 ‘블라 블라’라는 말을 가지고 ‘불이 났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로 짜 맞추는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그저 무시하는 말투로 “이러쿵저러쿵 어쩌고저쩌고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주석가는 어린아이가 알파벳이나 말을 배울 때 의성어를 그대로 따라 하는 소리를 적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가갸 거겨’ 혹은 ‘기역 니은 디귿’, 또는 ‘하늘 천 따 지’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이사야의 말이 너무나 신앙의 초보를 다루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의 말은 너무나도 유치해. 네가 말하는 말은 ‘가나다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만, 이 해석들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한 말들은 무시할 만한 말이며 어린아이나 들을 법한 말이다’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하나로 묶어서 경계를 만든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폄하하고 무시하는 말,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속에 그 말씀의 진수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 28:12, 새번역)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전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평안을 누리자”라고 초청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1~13)
이사야서의 오늘 본문 말씀은 아마도 이 예레미야 말씀의 축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가 내게 나온다면 너희는 참된 평안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주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블라 블라’라고 말하며 외면했습니다. “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 더한다”라고 말하며 불평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영적으로 잠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실은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전율이 오고, 감사와 감격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이 그 말씀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온 것 같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는 것 같으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오늘은 설교가 조금 들어오네’, ‘오늘은 늘 듣던 소리네’ 혹은 ‘새롭지도 않아. 늘 같은 이야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면 그나마 양반일 수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제사장과 선지자처럼 속으로 ‘블라 블라’, ‘가갸 거겨’를 되뇐다면 어떻겠습니까? 과연 설교가 들리겠습니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들으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의 복음은 어떤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사 28:12, 새번역)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왜 복음이 안 들릴까요? 왜 우리에게는 술 취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까? 자기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포도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할 것이다. 독한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비틀거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잠드는 영을 보내셔서, 너희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셨다. (사 29:9b~10a, 새번역)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에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들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례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007년 워싱턴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한 재미있는 사회 실험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기자 진 웨인가튼(Gene Weingarten)이라는 사람이 기획한 사회 실험입니다. 그해 4월 워싱턴 포스트 매거진에 “Pearls Before Breakfast(아침 식사 앞의 진주)”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내용입니다.
2007년 1월 12일 금요일 오전 7시 51분, 워싱턴 DC 지하철 랑팡 플라자역(L’Enfant Plaza Station)에서 출근 러시아워 시간에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연주자는 당시 39세였던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습니다. 이 실험 사흘 전에는 그가 보스턴 심포니홀에서 공연하였는데, 100달러인 자리도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세계 최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그러나 실험 당일의 복장은 청바지와 검정 긴 소매 셔츠, 그리고 야구 모자였습니다. 또한 1713년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 구매가 35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악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조슈아 벨은 바흐의 두 곡을 포함한 클래식 6곡을 약 43분간 연주했습니다. 그동안 1,097명이 앞을 지나쳤습니다. 멈춰 서서 진지하게 들은 사람은 7명, 그냥 지나치며 돈을 던진 사람은 27명, 벨을 알아본 사람은 단 1명이었습니다. 총수입은 32달러 17센트였습니다. 그중에서도 20달러는 벨을 알아본 사람이 낸 돈이었습니다. 박수를 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후 이 실험을 기록한 진 웨인가튼의 기사는 2008년 퓰리처상 특집 기사 부문(Pulitzer Prize for Feature Writing)을 수상했습니다. 웨인가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가장 값진 악기로 연주하는데, 잠시 멈출 시간조차 없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귀찮은 말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복음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명연주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복음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블라 블라’ 또는 ‘가갸 거겨’로 듣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사 28:11)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씨와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을 가르치실 것이다. (사 28:11, 새번역)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 말씀은 먼저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조금 더 나아가는데,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바로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던 말 그대로 반복하시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사 28:12b~13)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이라고 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지금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블라 블라’일 수도 있고 ‘이러쿵저러쿵’일 수도 있고 ‘여기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짜맞추는 것’ 등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블라 블라’, ‘가갸 거겨’라고 말씀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포로로 잡혀갈 위기에 처하여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블라 블라’, ‘이러쿵저러쿵’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뒤로 넘어지고 부러지며 걸려 붙잡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너희 말을 듣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리저리 핑계를 댄다면, 하나님께서도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말씀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관점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반 셀름스(A. Van Selms)라는 분의 주장입니다. 그는 이 본문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앗수르어(아카드어)로 변환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말씀 속에서 “그러므로 내가 다른 방언으로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서 이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사 28:11). 그래서 그는 이 표현이 앗수르어로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추적하였고 이렇게 풀어냈습니다. “나가라, 그를 나가게 하라, 나가라, 그를 나가게 하라. 기다려라, 그를 기다리게 하라, 기다려라, 그를 기다리게 하라” 이것은 전투 명령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사야를 향해서 “애들 장난 같은 소리한다. 블라 블라, 가갸 거겨”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조롱 섞어 내뱉었던 발음들이 훗날 자신을 잔인하게 짓밟은 앗수르의 무서운 군대 명령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내뱉은 불신과 자만의 언어는 결국 뒤로 돌아와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흘려버린 말은 우리를 붙잡는 심판의 언어로 되돌아옵니다. 여기서 내가 뿌린 영적인 태도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법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성경 번역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새번역 성경은 앞에 나오는 내용과는 사뭇 다르게 뒷부분을 의성어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그래서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서 다치게 하시고, 덫에 걸려서 잡히게 하려 하신 것이다. (사 28:13, 새번역)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말했던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는 무슨 뜻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뒤바꾸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언어로 말씀하셨다면, 무슨 말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올까요? 조금은 힘든 상상이지만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언가 말을 하셨을 겁니다. 내가 말한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의 속뜻은 무엇입니까? 각자 다 다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도 세상 속에서 수많은 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소리에 반응하시겠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평안이 있다. 여기에 안식이 있다. 나에게 오라”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 여러분의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온전히 반응하며 진정한 축복을 누리는 소망의 모든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Tsav Letsav, Qav Leqav
Isaiah 28:9-13
Today’s message is based on a complex passage that is not easy to understand. Reading today’s Scripture, many of you may have thought, ‘What on earth does this mean?’
Isaiah 28, from which today’s passage is taken, starts with the expressions “drunkards” and “those who are overcome with wine”:
“Woe to the crown of pride, to the drunkards of Ephraim,” (Isaiah 28:1a NKJV)
Who are these words directed at? They are aimed at the proud crown of Ephraim, that is, the political leaders of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Isaiah criticizes them for being proud and drunk.
That they are drunk means that they are not in their right minds. The reason Isaiah describes them as such is as follows:
The rulers of Ephraim, the Kingdom of Israel, tried to prevent an attack from Assyria by forging alliances with other strong nations. But God’s will was different. God wanted to use Assyria to judge Israel so that His people would repent and return to Him. Isaiah proclaimed that very message of God to the people but they wouldn’t listen and attempted to forge their own destiny with diplomacy and military power. They were proud.
Concerning such Ephraim, God clearly says: “The crown of pride, the drunkards of Ephraim, will be trampled underfoot;” (Isaiah 28:3 NKJV) This is a prophecy of destruction against Assyria.
The story then turns to their neighbor, the Southern Kingdom of Judah:
“And these also stagger from wine and reel from beer.” (Isaiah 28:7a NIV)
If Ephraim,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is on the verge of being destroyed and trampled by the Assyrians for their drunkenness and misrule, Judah is also drunk. Though Judah may seem a little farther from immediate judgment, its priests and judges are in a pitiful state—drunk, unable to rule properly, and incapable of proclaiming the word of God:
“Priests and prophets stagger from beer and are befuddled with wine; they reel from beer, they stagger when seeing visions, they stumble when rendering decisions.” (Isaiah 28:7b NIV)
Judah, too, is not of sound mind. Drunk on strong drink, they cannot see visions or judge rightly. Those who are wronged increase, and people do not know the right path to take; so the whole society is in confusion. This is Judah’s condition.
How did they come to this? Why have they become intoxicated? Why have both Ephraim and Jerusalem become filled with so many drunkards?
In the next chapter, Isaiah chapter 29, the Lord explains the reason:
“Be stunned and amazed, blind yourselves and be sightless; be drunk, but not from wine, stagger, but not from beer. The Lord has brought over you a deep sleep: He has sealed your eyes (the prophets); he has covered your heads (the seers).” (Isaiah 29:9–10 NIV)
It was not because of the wine. The reason they are drunk is that the Lord has poured out on them a spirit that makes them sleep deeply.
This is another form of God’s judgment. They cannot see. They cannot know. It is truly a tragic reality.
Now, our passage for today begins in such a situation.
Verse 9 starts with a question in quotation marks. Who is asking this question? It is the priests and prophets of Judah just mentioned above. The drunkards who have lost their senses and sight ask Isaiah, the one trying to deliver God’s message:
“Who is it he is trying to teach? To whom is he explaining his message? To children weaned from their milk, to those just taken from the breast?” (Isaiah 28:9 NIV)
The New Living Translation renders this verse in Isaiah’s voice:
“‘Who does the Lord think we are?’ they ask. ‘Why does he speak to us like this? Are we little children, just recently weaned?’” (Isaiah 28:9 NLT)
The priests and prophets of Judah belittle Isaiah’s message as childish—so simple that only infants should hear it.
Then the priests and prophets continue:
“For precept must be upon precept,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line upon line, Here a little, there a little.” (Isaiah 28:10 NKJV)
Here we hesitate. What does this mean? How befuddling.
The above translation is a rather faithful rendering of the original Hebrew.
“Kiy tsav latsav, tsav latsav, kav lakav, kav lakav, ze’eyr sham, ze’eyr sham.” (transliteration of the Hebrew verse)
Since the Hebrew is thought to be a mix of poetic language, onomatopoeia, and abbreviation, the NKJV tried to reflect all this as best it could in translating the meaning.
“For precept must be upon precept,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line upon line, Here a little, there a little.” (Isaiah 28:10 NKJV)
If we understand these words in English literally and connect the context, it would read like this:
“Isaiah, who do you think you are to try to teach us? Go teach those newly weaned children. Do you know how childish your words are? God will judge us through Assyria? Is that possible? Is that something one should say? The Lord is our God—why would that God side with a foreign nation, Assyria? And you say that we will be judged for our alliances, that this is pride. How can that be called pride? It is wisdom, an artifice to preserve the fate of the nation! How can that be called pride before God?”
“You take a little from here, a little from there, and patch your words together! You add warning to warning, precept to precept. You take bits from here and there and piece them together.”
Considering this meaning, the New Living Translation renders it like this:
“He tells us everything over and over— one line at a time, one line at a time, a little here, and a little there!” (Isaiah 28:10 NLT)
Now, there are other interpretations of this verse. They are based on the observation that this sentence in Hebrew is composed of unique onomatopoeic words:
“Kiy tsav latsav, tsav latsav, kav lakav, kav lakav, ze’eyr sham, ze’eyr sham.”
What does that sound suggest to you?
One commentator says this is meaningless repetition—like “blah, blah, blah.” So forcing a precise translation to make sense of the “blah blah blah” is wrong.
It’s better read as a dismissive tone: “this and that, blah blah, so on and so forth.”
Another commentator says the phrase imitates the babbling sounds of a child learning letters or speech—like “a, b, c, d” or nursery rhymes. According to this interpretation, the prophets are reducing the words of Isaiah to teachings for spiritual beginners.
There are many other interpretations, but most arrive at the same conclusion: Isaiah’s message is treated as dismissible—something for children to hear. It is seen as nothing more than bits taken from here and there to make precepts.
So then, what was the word of God they dismissed? What was Isaiah proclaiming?
The essence of that word appears in today’s passage:
“to whom he said, ‘This is the resting place, let the weary rest’; and, ‘This is the place of repose’— but they would not listen.” (Isaiah 28:12 NIV)
The message God wanted to give through Isaiah was peace. He wanted them to come to God and find rest and peace. But they would not listen.
Jeremiah says something similar: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declares the Lord, ‘plans to prosper you and not to harm you, plans to give you hope and a future. Then you will call on me and come and pray to me, and I will listen to you.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ek me with all your heart.’” (Jeremiah 29:11–13 NIV)
Wouldn’t Isaiah’s words in today’s passage be a summary of this promise in Jerimiah? Come to me and you will find true rest and peace.
But they did not listen.
They said Isaiah was just saying “blah blah,” babbling to them as if they were children, and speaking nursery rhymes to them. They would not listen.
They complained that Isaiah was piling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They would not listen.
This is truly tragic. Yet, if we think carefully, we too are like them.
When God’s word is given to us, how do we respond? How wonderful it would be if we responded with trembling, gratitude, and deep conviction!
But don’t’ we sometimes feel the word is just the same old thing—bits taken from here and there,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Oh, the sermon is kind of good today.” Or “It’s the same old sermon—nothing new.”
That may be the mild case. At least you pretend to listen. But what if, while the sermon is preached, you inwardly go “blah blah,” “he’s babbling,” “stop reciting nursery rhymes”? Will that word reach you? Of course not.
So what was the gospel of God that they would not hear — the gospel we too sometimes will not hear?
“to whom he said, ‘This is the resting place, let the weary rest’; and, ‘This is the place of repose’— but they would not listen.” (Isaiah 28:12 NIV)
But what happened? They would not listen. Is this not our condition?
Why does the gospel not get through? Why, like those drunken priests and prophets, do we fail to hear God’s word correctly? Why do we fall into pride, convinced our own thinking is right?
“be drunk, but not from wine, stagger, but not from beer. The Lord has brought over you a deep sleep:” (Isaiah 29:9b–10a NIV)
Because our souls are asleep. Because we are in a deep sleep.
Do you know how frightening this spiritual deep sleep is?
In 2007 there was a striking social experiment at a Washington, D.C. subway station, reported by Gene Weingarten in The Washington Post magazine under the title “Pearls Before Breakfast.”
On Friday morning, January 12, 2007, at 7:51 a.m., at L’Enfant Plaza Station during rush hour, world-class violinist Joshua Bell, 39 years old at the time, played his violin. Three days earlier he had performed at the Symphony Hall in Boston and tickets to his concert—$100 for the best seats—were sold out. At L’Enfant Plaza Station he performed incognito in jeans, a dark shirt, and a baseball cap.
He played a 1713 Stradivarius (worth about $3.5 million) and performed six classical pieces, including two by Bach, for about 43 minutes. During his performance, 1,097 people passed by. Seven stopped and listened seriously; 27 tossed money and moved on; only one recognized him. Total collected: $32.17. No one applauded at the end.
Weingarten’s feature later won the 2008 Pulitzer Prize for Feature Writing. He asked, “If we can’t take the time out of our lives to stay a moment and listen to one of the best musicians on Earth play some of the best music ever written; if the surge of modern life so overpowers us that we are deaf and blind to something like that—then what else are we missing?”
Every Sunday and every day the Lord’s word is proclaimed from pulpits and streamed online. Today the Word is on YouTube and church websites. Is it an annoying “blah blah,” or is it the gospel?
So what will happen to those who will not hear God’s word, who treat God’s word as “blah blah” or baby babble?
“For with stammering lips and another tongue He will speak to this people,” (Isaiah 28:11 NKJV)
God says He will speak to such people with stammering lips and another tongue.
The NIV translates this as such:
“Very well then, with foreign lips and strange tongues God will speak to this people,” (Isaiah 28:11 NIV)
The first meaning may be that God will hand them over to foreign nations so they become captives and live under foreign instruction. It can be seen as a prediction of Assyrian and later Babylonian exile.
But these words go further. An interesting interpretation is possible.
This is because immediately after these words God repeats in their own style what they have been saying.
“Yet they would not hear. But the word of the Lord was to them, ‘Precept upon precept,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line upon line, Here a little, there a little,’ That they might go and fall backward, and be broken and snared and caught.” (Isaiah 28:12b–13 NIV)
God now echoes their own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here a little, there a little.”
I have already explained what that phrase spoken by the priests and prophets conveys. But what would it mean if God speaks it?
God will give them “blah blah,” “ga-ga,” “nursery talk.” When we cry out, when we are on the verge of captivity, when we plead for help, God will respond with “blah blah, ga-ga.”
Then what will happen? They will go on their way and fall backward, be broken, be caught in a snare, and be taken captive.
But there is another, more interesting interpretation. A. Van Selms argued that in Isaiah 28:13 God is converting the taunting phrase of prophets and priests into the Assyrian (Akkadian) language.
According to Van Selms, this is what God is saying through the conversion:
“Go out! Let him go out! Go out! Let him go out! Wait! Let him wait! Wait! Let him wait!”
Beloved, what does this mean? The leaders of Israel mocked Isaiah, saying “it’s just blah, blah, ga-ga, nursery rhymes.” But those scoffing, repetitive sounds they uttered later returned to them in terrifying commands of the Assyrian army that would crush them.
When we dismiss God’s word as “childish” and let it slide as “blah blah,” that language of our unbelief and pride will eventually come back to us as words of judgement that cause our lives to stagger, to fall backward, and to be trapped by the snares of the world. This is God’s fearful principle: we reap the spiritual attitude we sow.
No modern Bible translation adopts this exact rendering, but to keep the possibility open the Common English Bible leaves that part in onomatopoeia:
“So the LORD’s word will be for them: ‘tsav letsav, tsav letsav; qav leqav, qav leqav,’ a little of this, a little of that. So that they will go and stagger backward, they will be broken, snared, and captured.” (Isaiah 28:13 CEV)
Imagine. The sacrilegious words uttered from our lips before the word of God—what would they mean if converted to another language? If converted to the language of the cosmos? If God translated our words that way, what had we actually said?
It may sound far-fetched, but it forces us to deeply reflect on our attitude toward God’s word.
“Tsav letsav, qav leqav.” What does this mean?
Beloved members of Somang Church, this week you will hear many sounds of the world. But may you hear the simple words of the Lord as He knocks on the door of your heart each morning. May you open your ears to the gospel that speaks to you: “This is the resting place, let the weary rest.” However childish and antiquated these words may sound, no matter how much world may mock them, may you be wise people of God who steadfastly hold onto these words of God as the only true “blessed news” and enjoy true peace.
이사야 28:9~13
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에브라임과 유다의 지도자들은 술에 취한 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오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 구절 중에서도 난해 본문으로 꼽히는 본문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서 28장 앞부분을 먼저 살펴보려 합니다. 이사야서 28장은 ‘술 취한 자들’, ‘술에 빠진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사 28:1a)
누구를 향한 말씀일까요?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 즉 북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이들이 교만하고 술에 취했다고 표현합니다. ‘술에 취했다’라는 말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의미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지도자들은 강한 외국과의 동맹을 통해 앗수르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려고 하셨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외교와 군사력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하고 술 취해 있습니다. 그러한 에브라임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사 28:3)
앗수르에게 멸망할 운명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이웃인 남유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유다 사람이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린다. (사 28:7a, 새번역)
에브라임, 북이스라엘이 술에 취하여 잘못 판단하여 나라가 망하고 앗수르에 의해 짓밟힐 처지가 되었다면, 남유다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아직 심판의 길에서는 조금 멀리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술에 취해서 제대로 판결도 예언도 하지 못하고 있는 아주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예언자가 독한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포도주 항아리에 빠졌다.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리니, 환상을 제대로 못 보며, 판결을 올바로 하지 못한다. (사 28:7b, 새번역)
남유다도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독한 술에 취해서 환상도 보지 못하고 판결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바른길,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기에 온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이 남유다의 상황입니다.
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에브라임도 예루살렘도 왜 이렇게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아졌을까요? 술의 생산량이 많아졌기 때문일까요? 다음 장인 29장에서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 29:9~10)
포도주를 마셔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술 취한 이유는 주님께서 깊게 잠들게 하는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사야의 말씀을 어린아이에게나 가르칠 유치한 소리라며 조롱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오늘의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사 28:9)
누구일까요? 바로 위에 나오는 남유다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입니다. 술 취해 있는 사람들, 잠들게 하는 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려는 이사야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사 28:9)
이 말씀을 새번역은 이사야의 목소리로 이렇게 전합니다.
제사장들이 나에게 빈정거린다. “저 자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 저 자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젖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젖을 먹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사 28:9, 새번역)
유다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치하다고 평가합니다. 너무 쉬워서 어린아이들에게나 가르쳐야 할 내용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사 28:10)
이 부분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게 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말씀입니다. 이 개역개정의 말씀은 성경 원어의 말씀을 나름 정성껏 번역한 말입니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시적인 언어 같기도 하고, 의성어 또는 줄임말 같기도 합니다. 이러하기에 이 단어들을 어떻게든 뜻이 통하도록 고심하면서 번역한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의 말씀입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사 28:10)
이 말씀을 한글 그대로 앞뒤를 연결해서 해석한다면 이런 뜻이 될 것 같습니다. “이사야야, 네가 누군데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냐? 차라리 갓 젖 뗀 아이들에게나 가서 가르쳐라. 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유치한지 아느냐? 앗수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이 이방 나라인 앗수르를 돕는다는 말이냐? 그리고 우리가 서로 동맹을 맺은 것 때문에 우리가 교만하고 심판을 당한다고?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도리어 이것은 나라의 운명을 지킬 묘수이며 지혜가 아니겠느냐?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일이냐? 너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말을 짜맞추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계의 경계를 더하고 교훈의 교훈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또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저 자는 우리에게, 한 자 한 자,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 가르치려고 한다. (사 28:10, 새번역)
<그들이 무시했던 이사야의 말씀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의 초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조금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히브리어 문장이 예사롭지 않은 의성어 조합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여러분은 이 문장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어떤 주석가는 이 문장은 의미 없는 반복이며, 영어로는 “blah, blah, blah” 같은 표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를 들어 ‘블라 블라’라는 말을 가지고 ‘불이 났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로 짜 맞추는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그저 무시하는 말투로 “이러쿵저러쿵 어쩌고저쩌고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주석가는 어린아이가 알파벳이나 말을 배울 때 의성어를 그대로 따라 하는 소리를 적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가갸 거겨’ 혹은 ‘기역 니은 디귿’, 또는 ‘하늘 천 따 지’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이사야의 말이 너무나 신앙의 초보를 다루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의 말은 너무나도 유치해. 네가 말하는 말은 ‘가나다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만, 이 해석들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한 말들은 무시할 만한 말이며 어린아이나 들을 법한 말이다’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하나로 묶어서 경계를 만든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폄하하고 무시하는 말,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속에 그 말씀의 진수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 28:12, 새번역)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전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평안을 누리자”라고 초청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1~13)
이사야서의 오늘 본문 말씀은 아마도 이 예레미야 말씀의 축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가 내게 나온다면 너희는 참된 평안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주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블라 블라’라고 말하며 외면했습니다. “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 더한다”라고 말하며 불평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영적으로 잠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실은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전율이 오고, 감사와 감격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이 그 말씀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온 것 같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는 것 같으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오늘은 설교가 조금 들어오네’, ‘오늘은 늘 듣던 소리네’ 혹은 ‘새롭지도 않아. 늘 같은 이야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면 그나마 양반일 수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제사장과 선지자처럼 속으로 ‘블라 블라’, ‘가갸 거겨’를 되뇐다면 어떻겠습니까? 과연 설교가 들리겠습니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들으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의 복음은 어떤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사 28:12, 새번역)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왜 복음이 안 들릴까요? 왜 우리에게는 술 취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까? 자기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포도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할 것이다. 독한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비틀거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잠드는 영을 보내셔서, 너희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셨다. (사 29:9b~10a, 새번역)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에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들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례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007년 워싱턴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한 재미있는 사회 실험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기자 진 웨인가튼(Gene Weingarten)이라는 사람이 기획한 사회 실험입니다. 그해 4월 워싱턴 포스트 매거진에 “Pearls Before Breakfast(아침 식사 앞의 진주)”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내용입니다.
2007년 1월 12일 금요일 오전 7시 51분, 워싱턴 DC 지하철 랑팡 플라자역(L’Enfant Plaza Station)에서 출근 러시아워 시간에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연주자는 당시 39세였던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습니다. 이 실험 사흘 전에는 그가 보스턴 심포니홀에서 공연하였는데, 100달러인 자리도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세계 최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그러나 실험 당일의 복장은 청바지와 검정 긴 소매 셔츠, 그리고 야구 모자였습니다. 또한 1713년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 구매가 35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악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조슈아 벨은 바흐의 두 곡을 포함한 클래식 6곡을 약 43분간 연주했습니다. 그동안 1,097명이 앞을 지나쳤습니다. 멈춰 서서 진지하게 들은 사람은 7명, 그냥 지나치며 돈을 던진 사람은 27명, 벨을 알아본 사람은 단 1명이었습니다. 총수입은 32달러 17센트였습니다. 그중에서도 20달러는 벨을 알아본 사람이 낸 돈이었습니다. 박수를 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후 이 실험을 기록한 진 웨인가튼의 기사는 2008년 퓰리처상 특집 기사 부문(Pulitzer Prize for Feature Writing)을 수상했습니다. 웨인가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가장 값진 악기로 연주하는데, 잠시 멈출 시간조차 없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귀찮은 말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복음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명연주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복음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블라 블라’ 또는 ‘가갸 거겨’로 듣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사 28:11)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씨와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을 가르치실 것이다. (사 28:11, 새번역)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 말씀은 먼저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조금 더 나아가는데,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바로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던 말 그대로 반복하시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사 28:12b~13)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이라고 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지금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블라 블라’일 수도 있고 ‘이러쿵저러쿵’일 수도 있고 ‘여기저기서 조금 가져다가 짜맞추는 것’ 등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블라 블라’, ‘가갸 거겨’라고 말씀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포로로 잡혀갈 위기에 처하여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블라 블라’, ‘이러쿵저러쿵’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뒤로 넘어지고 부러지며 걸려 붙잡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너희 말을 듣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리저리 핑계를 댄다면, 하나님께서도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말씀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관점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반 셀름스(A. Van Selms)라는 분의 주장입니다. 그는 이 본문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앗수르어(아카드어)로 변환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말씀 속에서 “그러므로 내가 다른 방언으로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서 이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사 28:11). 그래서 그는 이 표현이 앗수르어로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추적하였고 이렇게 풀어냈습니다. “나가라, 그를 나가게 하라, 나가라, 그를 나가게 하라. 기다려라, 그를 기다리게 하라, 기다려라, 그를 기다리게 하라” 이것은 전투 명령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사야를 향해서 “애들 장난 같은 소리한다. 블라 블라, 가갸 거겨”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조롱 섞어 내뱉었던 발음들이 훗날 자신을 잔인하게 짓밟은 앗수르의 무서운 군대 명령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내뱉은 불신과 자만의 언어는 결국 뒤로 돌아와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흘려버린 말은 우리를 붙잡는 심판의 언어로 되돌아옵니다. 여기서 내가 뿌린 영적인 태도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법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성경 번역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새번역 성경은 앞에 나오는 내용과는 사뭇 다르게 뒷부분을 의성어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그래서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서 다치게 하시고, 덫에 걸려서 잡히게 하려 하신 것이다. (사 28:13, 새번역)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말했던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는 무슨 뜻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뒤바꾸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언어로 말씀하셨다면, 무슨 말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올까요? 조금은 힘든 상상이지만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언가 말을 하셨을 겁니다. 내가 말한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의 속뜻은 무엇입니까? 각자 다 다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도 세상 속에서 수많은 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소리에 반응하시겠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평안이 있다. 여기에 안식이 있다. 나에게 오라”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 여러분의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온전히 반응하며 진정한 축복을 누리는 소망의 모든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사28:9~13)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419, 205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누군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이사야서 28장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지도자들을 향해 “술 취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을 막으려고 외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하나님은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외교와 군사력으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 했습니다. 남유다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술 취한 상태가 된 것은 스스로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술 취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저 자가 누구를 가르치는가? 젖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라고 말합니다. 이는 의미 없는 반복의 의성어로 “블라블라, 가갸거겨”처럼 이사야의 말을 무시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토록 무시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 이것이었습니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사 28:12, 새번역).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전하고자 하신 것은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2007년 워싱턴 지하철역에서 세계 최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43분간 연주했지만, 1,097명 중 멈춰서 들은 사람은 단 7명이었습니다. 출근길에 바빠서, 귀찮아서, 무심코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주일마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귀찮은 잔소리로, 늘 듣던 블라블라로 들리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흘려버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조롱 섞어 내뱉었던 그 말들을 훗날 자신들을 짓밟을 앗수르 군대의 무서운 명령어로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밀쳐내며 블라블라로 흘려버릴 때, 그 불신과 자만의 언어는 결국 우리 인생을 넘어뜨리고 세상의 덫에 걸리게 만드는 심판의 언어로 되돌아옵니다. 내가 뿌린 영적 태도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아침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하시는 단순한 말씀에 귀를 여십시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자들아, 내게로 와서 편히 쉬어라.”하시는 이 복음에 귀를 여십시오. 이 복음을 인생의 진짜 복된 소식으로 붙잡고 참된 평안을 누리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면 솔직하게 나누어 봅시다.
2.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라는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매주 선포되는 생명의 말씀을 잔소리나 소음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얄팍한 계산과 조롱 섞인 자만을 내려놓고, “내게 와서 쉬어라”하시는 주님의 단순한 복음 앞에 온전히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번 한 주간,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우리가 모두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