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광복기념주일을 맞이하며, 버려진 땅과 백성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봅니다.>
오늘은 광복절 8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오늘은 말씀 속에서 버려진 땅, 버려진 백성이라 여겨졌던 우리 민족에게 큰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참 많은 경험을 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경험에 경험을 쌓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삶의 노하우를 갖곤 합니다. 사람이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저런 상황에선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것은 지혜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 살아가는 데 탄탄한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적어도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서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처신하고 판단해야 지혜로운 거다’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신앙 가족들에게 한번 여쭙겠습니다. 우리가 갖게 된 생각이 과연 절대적일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 내 삶의 궤적 속에서 만들어 낸 기반이 어디까지 믿을 만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할 줄을 세계사적으로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세월 속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버려진 땅이라 여겨진 예루살렘에 살던 많은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셨던 행보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과 생각이 완전히 뒤집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과 촌,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을 면면이 살펴보면, 그들은 병들고 가난하고 약하고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단어의 뜻은 그냥 측은히 여기는 개념이 아닙니다. 찢어지는 가슴으로 통곡하는 듯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 사랑으로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사람들의 면면은 처참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목자를 잃어버린 양이 겪었을 경험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목자를 잃어버린 양은 무엇을 경험할까요? 두 개의 단어가 나오는데, 첫 번째 단어는 ‘고생했다’이고, 두 번째 단어는 ‘기진했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고생했다’라는 단어의 뜻은 강한 턱을 가진 짐승에게 물린 상황을 뜻합니다. 날 살려 달라고 발버둥 치지만, 강한 턱을 가진 짐승이 절대로 놓아줄 리 없습니다. ‘고생’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런 형국을 말합니다. ‘기진했다’라는 단어는 강한 턱을 가진 짐승에게 물리고 뒤흔들려서 내동댕이쳐진 상태입니다. 이쯤 되면 거반 죽은 인생, 이젠 다 끝났구나 싶은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만 보게 되는 때가 하나님께서 추수하실 때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 9:37)
“이야, 추수할 게 많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데, 논이나 과수원에 가서 ‘추수할 게 많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상태입니까? 논의 곡식이 영글고 길러 놓았던 많은 작물과 과일들이 이제 거둘 만하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추수할 게 많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기준, 나의 생각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누가복음에서도 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 6:20~23a)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가 가난하지만 사실 너희는 복된 존재야.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기 때문이야. 지금 주리고 배고프다고? 그게 복된 거다.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게 하실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통탄하고 가슴 아파하며 한숨 쉬어지는 인생이라고? 그런데 그게 복된 거다. 하나님이 웃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살아가며 주님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고 상종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얻는다고? 그때 기뻐하고 즐거워해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받을 상급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단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논지는 우리가 쉽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행복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어깨가 덩실덩실해지고, 나도 모르게 노래도 나오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어렵고, 가슴이 무너진다고? 그런 때가 복된 거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마른 눈으로는 이 세상이 똑똑하게 잘 보지만, 하나님이 잘 안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젖은 눈으로는 이 세상이 참 흐릿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분명하게 보일 때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골방에 들어가 가슴 치며 더 이상 희망도 어떤 방도도 보이지 않을 때가 하나님과 진짜로 가까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가 힘들어하는 때를 가리켜 추수할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추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2030 젊은 세대들이 무너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도 어렵고 가늠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좋은 날인가 싶으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무너졌나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잘살고 나만 뒤처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은 요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께서 강함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똑똑하게 보게 하실 것입니다.
찬양 한 곡을 묵상합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우리의 현재를 뒤바꾸자는 찬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나의 약함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된다는 찬양이 아닙니다. 지금 나는 가난한데, 느닷없이 로또에 당첨되어 부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인데, 어느 날 갑자기 눈이 활짝 떠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찬양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겠다는 찬양입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여러분, 주님이 죽으신 덕분에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서, 때로는 우리의 약함을 통과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그토록 싫은 가난을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더듬어가며 길을 가는 모습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네 삶의 복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픈 분이 계십니까? 가난한 분, 눈물 흘리는 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건강한 자를 위해서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사람을 위해서 의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병든 우리, 약한 우리, 아무것도 아닌 우리, 지치고 눈물 흘리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사랑이시니까 사랑이 이루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실 것이니, “우와!”, “이야!” 하고 세상을 살아 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세상, 아무것도 감탄할 수 없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고마워요. 감사해요.” 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 9:38)
우리 하나님은 거름 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잡초 뽑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추수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비록 연약한 인생길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바라보며 사는 인생들을 향해 추수할 게 많다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찾는지 아십니까? 추수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놀라워하고 감사하며 살아 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을 찾으십니다. 그것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루살렘 속에서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유대 땅을 떠나야 합니다. 사마리아 버려진 땅을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 끝까지 나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준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저는 전에 한동안 저희 학교에서 대외 협력 일을 했습니다. 이 부서는 교회들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면서, 학교에 꼭 필요한 기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가 어렵습니다. 사실 신학대학교에 의대가 있겠습니까? 공대가 있겠습니까? 학교 재정에 직접적인 보탬이 되는 학과도 없고, 졸업생들도 목회자, 선교사들이며 돈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 다니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 이름이 ‘이상억’인데, 그때는 ‘이삼억’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이삼억만 주세요’ 하며 돌아다닐 때가 많았습니다. 늘 머릿속에는 ‘돈, 돈, 돈’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제가 학교의 살림을 맡은 부서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학교 한 해 예산과 다달이 나가는 지출을 맞춰 보면 매달 적자가 크게 났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저희 학교는 국가가 지정한 ‘재정 건전 대학’이었는데, 이는 등록금 의존율이 낮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등록금 외의 수입을 스스로 채워야 하다 보니, 도리어 여기저기에 손을 벌려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졸업생이 찾아왔습니다. “교수님, 제가 은행 총재가 됐어요.” 그분의 말에 제 눈이 반짝였습니다. 품에서 두툼한 봉투 두 개를 꺼내는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큰돈을 기부하려나 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제가 연탄은행 총재가 됐어요.” 실망했습니다. 품에서 꺼낸 봉투 안을 들여다보니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 만 원짜리 지폐들이 나왔습니다. 다 세어 보니 113만 5천 원이었습니다. 예전 우리가 연보할 적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꼬깃꼬깃 돈을 모아 두었다가 다리미질로 예쁘게 펴서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다려진 돈들이었습니다. 그걸 꺼내서 주신 것입니다.
이분이 누군가 하면, 작년에 동네가 다 허물어지고 재개발된 단지와 관련이 있는 분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서울 하늘 아래 아직도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60년대의 풍경을 가진 달동네였습니다.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흔히 ‘백사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 졸업생은 그 척박한 마을에서 어르신들에게 밥과 연탄을 나눠 주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분은 연탄은행 운영과 함께 연탄교회도 시무하시는 목사님인데, 오래간만에 학교 간다고 했더니 어르신들이 돈을 모아 줬다고 합니다. 천 원도 주고, 오천 원도 주고, 어떤 분은 만 원도 주셨다고 합니다. 그 돈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돈을 보고 제가 말하기를, “아, 이걸 왜 들고 오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쌀이나 사지 왜 들고 왔어요?” 그런데 양손에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투 두 개도 같이 들고 온 것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근데 양손에 든 거 그거 뭐예요?” 그러자 그 졸업생인 목사님 말씀이, “할머니 할아버지 중에 돈 못 내는 분들이 먹으려고 아껴 두었던 초코파이, 새우깡을 모아서 주셨어요.” 저는 깜짝 놀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이걸 왜 들고 왔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간식인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제 뒤통수를 세게 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너, 신학교 교수의 사명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 하나님 나라 구현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이 매일 ‘돈, 돈, 돈’ 하는데 말이다. 신학교는 네가 먹여 살리는 곳이 아니다. 내 학교 내가 먹여 살릴 거야. 하나님의 사람들 내가 먹여 살릴 거야.” 제가 먹여 살리는 거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꾸짖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사람이라고 하는데, 누가 날 도울까? 이 사람이 도울까, 저 사람이 도울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병들고 앞을 보지 못하는 나를 지키십니다. 그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삽니다.
광복이 81주년입니다. 여든한 살이나 먹었습니다. 이 나라가 그 어려운 시기를 다 버텨 온 것입니다. 빛을 회복한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이끌어 주셨는데, 하물며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다 지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니 당당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저 지금 아픕니다. 가난하고 힘이 드는데요….” 나의 약함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괜찮아. 그게 복된 거야. 네가 날 쳐다보고 있잖아. 내가 너 지킬 거야. 내가 너와 함께할 거야.”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다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잘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살아가며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와! 하나님 고마워요. 하나님 감사해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살아 내시는 여러분이 다 되길 바랍니다.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Rev. Sang-Uk Lee
Matthew 9:35-38, Luke 6:20-23a
What does it mean to be God’s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s of the earth? As we celebrate Korea’s 81st Liberation Day, what can we learn from today’s Scripture about becoming witnesses of the gospel? God granted freedom and restoration to Korea, a once destitute and abandoned land like Samaria. What is God’s will in allowing us such blessings? May we find answers to these questions through today’s Scripture.
Dear friends, we experience many things in life, and through them we accumulate wisdom, judgement, and standards. But are such thoughts and wisdom absolute and truly trustworthy? This is something we must reconsider. Who would have imagined Korea would gain freedom against the fierce currents of world history? Our liberation was a miracle of God. In the same way, God sent Jesus, the Messiah, to an utterly destitute land Jerusalem to save mankind. When we think of Jesus’ work on earth, we cannot but acknowledge that God overturns our thoughts, standards, and wisdom.
In today’s passage from Matthew 9, Jesus travelled through the towns and villages and preached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people who flocked to Him were sick, poor, weak, and abandoned. The Bible states that when Jesus saw them, He had compassion on them. Here to have compassion means not just to feel sorry for someone. It is to feel one’s heart being torn and to love a person with a deep mourning. This is how our Lord loved and viewed the people who were miserable in very way.
The text describes the desperate condition of the people as “sheep without a shepherd.” The NIV says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The Greek word for “harassed” means to suffer by being bitten by an animal’s strong jaws. The Greek for “helpless” means to be thrown down and tossed about by an animal with strong jaws. Hence a person who is harassed and helpless may be as good as dead. These were the people who came to Jesus.
But what does Jesus say about such people? He says, “The harvest is plentiful.” These words are beyond our common sense. When we say the harvest is plentiful we think of ripe fruit and abundant crops in the fields and orchards. But this is how Jesus viewed the hopeless and broken people that came to Him. He saw them as a plentiful harvest. This completely reverses our way of thinking and standards.
Jesus says something similar in Luke 6. He says,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Blessed are you who hunger now, for you will be satisfied. Blessed are you who weep now, for you will laugh.” Jesus overturns our thoughts. Dear friends, don’t our eyes see God more clearly through tears? Don’t we feel that God is near us when we are broken and utterly alone? This is what Jesus means when He calls the harassed and helpless people a plentiful harvest. In Jesus’ eyes, the time of harvest is when we are suffering.
As we heard in the corporate prayer earlier, the 20s-30s generation faces great hardship. The economy is bad and we are living in unpredictable times. Many of us feel left behind as others make a lot of money. Our lives are broken and destitute. But, dear friends, may we remember that God gives us strength when we are weak. He will satisfy us when we are poor. He will give us sight when we confess, “Lord, I am blind.”
Let’s sing a hymn together:
Let the weak say, “I am strong”
Let the poor say, “I am rich”
Let the blind say, “I can see”
It’s what the Lord has done in me
Hosanna, hosanna
To the Lamb that was slain
Hosanna, hosanna
Jesus died and rose again
Dear friends, may we remember that our Lord died for us. He died to give us the hope of resurrection. Our weakness, poverty, and blindness are conditions of blessing. This is what the Bible teaches us. Are you sick, poor, and sad? Jesus came for people like you. Those who are healthy don’t need a doctor. Our Messiah Jesus came to earth for us who are sick, weak, miserable, weary, and weeping. So dear friends, when we are down and out, we must confess our love and gratitude to Him. His love will surely do it. So we can be strong in this world even when we are in the most miserable state.
Jesus also says to His disciples, “Ask the Lord of the harvest, therefore, to send out workers into his harvest field.” God, who sees that the harvest is plentiful, seeks out harvesters. He seeks out disciples who will say to Him, “I love you. I will live for You.” This is the life of a witness. To become a witness, you must not remain in Jerusalem. You must leave Judea and go to the abandoned land of Samaria. You must go to the ends of the world and preach the blessed news, the gospel of the Kingdom. To do this we must set aside our knowledge and standards,
At the seminary where I teach, I am also tasked with external relations and donations. Our school’s finances are not so good. We don’t teach profitable disciplines such as medicine and engineering. Many of our graduates are poor pastors and missionaries. So in my capacity as external relations director, I have to raise money for the school. I go around asking people and various organizations for donations. One day, a graduate visited me. He said he was the president of a coal bank. As he handed me a fat envelope, my heart skipped a beat. But when I opened it, I was disappointed. It was full of 1,000 won, 5,000 won, and 10,000 won notes. In total it was a little over 1 million won. The notes were ironed, like the ones our ancestors of faith offered. The graduate who gave it to me was a pastor in a very poor neighborhood in Nowongu. The reason he was the “president of a coal bank” was because he gave out coal briquettes to the elderly in that impoverished area. It was these people who had donated the money. Those who couldn’t give money gave snacks like Saewookkang and Choco Pie instead. At that moment, I felt God striking me on the head. It was as if He was saying, “You, a professor of theology, what is your mission? Isn’t it to preach the gospel of Christ? To build the Kingdom of God? Then what are you doing going around begging for money? It is not you who will provide. I will provide. I will provide for my people, this seminary.” I was so sorry I said, “Lord, forgive me.” This is how we are. Even as God’s servants, we seek the help of other people and other organizations.
Dear friends, God will help us. God will save us. We live thanks to God who satisfies the needy, strengthens the weak, and gives sight to the blind.
Korea is celebrating its 81st Liberation Day. What a miracle! We endured all those hard times. Light was restored to this land. It was God’s protection. God who protects and guides this nation will guide you too.
So be strong and confident, my friends. You may say, “Lord, I am weak, poor, and struggling now.” But God says, “It’s okay. That is a blessing. You look to Me and you trust in me. I will keep you. I will be with you.” May we all hear this voice of God.
Until the day I preach to you again, may you be strong. God will protect you and guide you. So let us say “I love You, Lord. You will do it. Thank you, Lord.”
마태복음 9:35~38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6:20~23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광복기념주일을 맞이하며, 버려진 땅과 백성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봅니다.>
오늘은 광복절 8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오늘은 말씀 속에서 버려진 땅, 버려진 백성이라 여겨졌던 우리 민족에게 큰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참 많은 경험을 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경험에 경험을 쌓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삶의 노하우를 갖곤 합니다. 사람이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저런 상황에선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것은 지혜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 살아가는 데 탄탄한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적어도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서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처신하고 판단해야 지혜로운 거다’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신앙 가족들에게 한번 여쭙겠습니다. 우리가 갖게 된 생각이 과연 절대적일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 내 삶의 궤적 속에서 만들어 낸 기반이 어디까지 믿을 만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할 줄을 세계사적으로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세월 속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버려진 땅이라 여겨진 예루살렘에 살던 많은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셨던 행보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과 생각이 완전히 뒤집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과 촌,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을 면면이 살펴보면, 그들은 병들고 가난하고 약하고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단어의 뜻은 그냥 측은히 여기는 개념이 아닙니다. 찢어지는 가슴으로 통곡하는 듯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 사랑으로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사람들의 면면은 처참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목자를 잃어버린 양이 겪었을 경험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목자를 잃어버린 양은 무엇을 경험할까요? 두 개의 단어가 나오는데, 첫 번째 단어는 ‘고생했다’이고, 두 번째 단어는 ‘기진했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고생했다’라는 단어의 뜻은 강한 턱을 가진 짐승에게 물린 상황을 뜻합니다. 날 살려 달라고 발버둥 치지만, 강한 턱을 가진 짐승이 절대로 놓아줄 리 없습니다. ‘고생’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런 형국을 말합니다. ‘기진했다’라는 단어는 강한 턱을 가진 짐승에게 물리고 뒤흔들려서 내동댕이쳐진 상태입니다. 이쯤 되면 거반 죽은 인생, 이젠 다 끝났구나 싶은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만 보게 되는 때가 하나님께서 추수하실 때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 9:37)
“이야, 추수할 게 많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데, 논이나 과수원에 가서 ‘추수할 게 많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상태입니까? 논의 곡식이 영글고 길러 놓았던 많은 작물과 과일들이 이제 거둘 만하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추수할 게 많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기준, 나의 생각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누가복음에서도 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 6:20~23a)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가 가난하지만 사실 너희는 복된 존재야.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기 때문이야. 지금 주리고 배고프다고? 그게 복된 거다.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게 하실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통탄하고 가슴 아파하며 한숨 쉬어지는 인생이라고? 그런데 그게 복된 거다. 하나님이 웃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살아가며 주님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고 상종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얻는다고? 그때 기뻐하고 즐거워해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받을 상급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단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논지는 우리가 쉽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행복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어깨가 덩실덩실해지고, 나도 모르게 노래도 나오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어렵고, 가슴이 무너진다고? 그런 때가 복된 거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마른 눈으로는 이 세상이 똑똑하게 잘 보지만, 하나님이 잘 안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젖은 눈으로는 이 세상이 참 흐릿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분명하게 보일 때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골방에 들어가 가슴 치며 더 이상 희망도 어떤 방도도 보이지 않을 때가 하나님과 진짜로 가까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가 힘들어하는 때를 가리켜 추수할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추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2030 젊은 세대들이 무너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도 어렵고 가늠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좋은 날인가 싶으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무너졌나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잘살고 나만 뒤처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은 요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께서 강함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똑똑하게 보게 하실 것입니다.
찬양 한 곡을 묵상합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우리의 현재를 뒤바꾸자는 찬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나의 약함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된다는 찬양이 아닙니다. 지금 나는 가난한데, 느닷없이 로또에 당첨되어 부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인데, 어느 날 갑자기 눈이 활짝 떠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찬양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겠다는 찬양입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여러분, 주님이 죽으신 덕분에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서, 때로는 우리의 약함을 통과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그토록 싫은 가난을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더듬어가며 길을 가는 모습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네 삶의 복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픈 분이 계십니까? 가난한 분, 눈물 흘리는 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건강한 자를 위해서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사람을 위해서 의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병든 우리, 약한 우리, 아무것도 아닌 우리, 지치고 눈물 흘리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사랑이시니까 사랑이 이루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실 것이니, “우와!”, “이야!” 하고 세상을 살아 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세상, 아무것도 감탄할 수 없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고마워요. 감사해요.” 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 9:38)
우리 하나님은 거름 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잡초 뽑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추수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비록 연약한 인생길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바라보며 사는 인생들을 향해 추수할 게 많다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찾는지 아십니까? 추수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놀라워하고 감사하며 살아 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을 찾으십니다. 그것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루살렘 속에서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유대 땅을 떠나야 합니다. 사마리아 버려진 땅을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 끝까지 나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준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저는 전에 한동안 저희 학교에서 대외 협력 일을 했습니다. 이 부서는 교회들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면서, 학교에 꼭 필요한 기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가 어렵습니다. 사실 신학대학교에 의대가 있겠습니까? 공대가 있겠습니까? 학교 재정에 직접적인 보탬이 되는 학과도 없고, 졸업생들도 목회자, 선교사들이며 돈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 다니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 이름이 ‘이상억’인데, 그때는 ‘이삼억’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이삼억만 주세요’ 하며 돌아다닐 때가 많았습니다. 늘 머릿속에는 ‘돈, 돈, 돈’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제가 학교의 살림을 맡은 부서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학교 한 해 예산과 다달이 나가는 지출을 맞춰 보면 매달 적자가 크게 났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저희 학교는 국가가 지정한 ‘재정 건전 대학’이었는데, 이는 등록금 의존율이 낮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등록금 외의 수입을 스스로 채워야 하다 보니, 도리어 여기저기에 손을 벌려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졸업생이 찾아왔습니다. “교수님, 제가 은행 총재가 됐어요.” 그분의 말에 제 눈이 반짝였습니다. 품에서 두툼한 봉투 두 개를 꺼내는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큰돈을 기부하려나 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제가 연탄은행 총재가 됐어요.” 실망했습니다. 품에서 꺼낸 봉투 안을 들여다보니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 만 원짜리 지폐들이 나왔습니다. 다 세어 보니 113만 5천 원이었습니다. 예전 우리가 연보할 적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꼬깃꼬깃 돈을 모아 두었다가 다리미질로 예쁘게 펴서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다려진 돈들이었습니다. 그걸 꺼내서 주신 것입니다.
이분이 누군가 하면, 작년에 동네가 다 허물어지고 재개발된 단지와 관련이 있는 분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서울 하늘 아래 아직도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60년대의 풍경을 가진 달동네였습니다.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흔히 ‘백사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 졸업생은 그 척박한 마을에서 어르신들에게 밥과 연탄을 나눠 주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분은 연탄은행 운영과 함께 연탄교회도 시무하시는 목사님인데, 오래간만에 학교 간다고 했더니 어르신들이 돈을 모아 줬다고 합니다. 천 원도 주고, 오천 원도 주고, 어떤 분은 만 원도 주셨다고 합니다. 그 돈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돈을 보고 제가 말하기를, “아, 이걸 왜 들고 오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쌀이나 사지 왜 들고 왔어요?” 그런데 양손에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투 두 개도 같이 들고 온 것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근데 양손에 든 거 그거 뭐예요?” 그러자 그 졸업생인 목사님 말씀이, “할머니 할아버지 중에 돈 못 내는 분들이 먹으려고 아껴 두었던 초코파이, 새우깡을 모아서 주셨어요.” 저는 깜짝 놀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이걸 왜 들고 왔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간식인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제 뒤통수를 세게 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너, 신학교 교수의 사명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 하나님 나라 구현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이 매일 ‘돈, 돈, 돈’ 하는데 말이다. 신학교는 네가 먹여 살리는 곳이 아니다. 내 학교 내가 먹여 살릴 거야. 하나님의 사람들 내가 먹여 살릴 거야.” 제가 먹여 살리는 거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꾸짖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사람이라고 하는데, 누가 날 도울까? 이 사람이 도울까, 저 사람이 도울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병들고 앞을 보지 못하는 나를 지키십니다. 그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삽니다.
광복이 81주년입니다. 여든한 살이나 먹었습니다. 이 나라가 그 어려운 시기를 다 버텨 온 것입니다. 빛을 회복한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이끌어 주셨는데, 하물며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다 지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니 당당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저 지금 아픕니다. 가난하고 힘이 드는데요….” 나의 약함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괜찮아. 그게 복된 거야. 네가 날 쳐다보고 있잖아. 내가 너 지킬 거야. 내가 너와 함께할 거야.”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다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잘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살아가며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와! 하나님 고마워요. 하나님 감사해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살아 내시는 여러분이 다 되길 바랍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 9:35-38, 눅 6:20-23상)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82, 438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세상은 강함과 가진 것, 앞서감을 복이라 부르지만, 주님은 약한 자리, 가난한 자리를 긍휼히 보십니다.
나는 평소 어떤 기준으로 ‘복’을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설교의 요약>
우리는 세상의 시선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강한 것을 우러르고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만,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시선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모든 곳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셨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고생’과 ‘기진’은 강한 짐승에게 물려 뒤흔들려 내동댕이쳐진 상태를 뜻하는데, 주님은 그런 연약한 이들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이 이 지치고 흩어진 무리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고 하시며, 세상이 버려진 존재로 보는 이들을 풍성한 추수의 밭으로 보셨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상처와 실패가 우리 눈에는 그저 실패이지만, 주님의 시선에는 추수할 열매이며 은혜가 흘러 들어올 통로입니다.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에서도 이 시선은 분명해집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결핍 자체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붙들 수 없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빈손의 자리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복된 자리라는 선언입니다. 쥐고 있는 채워진 손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지만, 빈손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자기 의로움을 자랑했지만, 주님이 받으신 예배는 눈을 들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가슴을 치던 세리의 예배였습니다. 우리는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약한 우리를 주님이 불쌍히 여기셨기에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자랑을 내려놓고 약한 채로, 빈손을 들고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고백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누기>
1. 예수님은 지치고 기진한 무리를 “실패자”가 아니라 “추수할 밭”으로 보셨습니다. 나의 삶에서 실패나 연약함이라 여겼던 부분을, 주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본다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2.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결핍 자체가 아니라 빈손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리가 복되다는 뜻입니다. 나에게는 지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빈손의 자리’가 있다면 함께 나눠 주세요.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강함이 아니라 약함 가운데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손에 쥔 것을 자랑하라 하지만, 오늘 우리는 빈손을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은혜가 흘러 들어올 통로로 삼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도 자랑을 내려놓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는 예배자가 되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의 그 사랑의 시선 안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