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며 집의 문은 열었지만, 마음의 문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난 한 사건, 긴장감이 넘치는 한 잔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려면 본문 앞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전반부에는 매우 흥미로운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한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만으로 고쳐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가셔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과부를 만나시고, 그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화제가 될 만한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절망의 장례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바뀌는 엄청난 기적을 목격한 백성들은 경외감을 느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눅 7:16)
이 소문은 자연스럽게 온 지역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눅 7:17)
이런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리새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정중하게 식사 초대를 합니다.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눅 7:36a)
시몬은 당시 갈릴리와 유대 사회에서 율법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던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 시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이라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했다는 부분에서 잠시 멈추어 놀라움과 의아함을 먼저 가졌을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린다며 예수님을 비난했고, 안식일을 어긴다며 날을 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예수님을 초대한 것일까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존경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구원을 얻고자 갈망하는 구도자였기 때문일까요? 안타깝게도 성경의 정황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몬의 속내는 그의 독백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눅 7:39)
시몬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신앙적 초청이 아니라, 선지자를 검증하려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떠드니, 자기 집의 식탁에 앉혀 놓고 그가 누구인지 직접 살펴보려는 일종의 호기심이었습니다. 동시에 백성들의 주목을 받는 화제의 인물을 자기 집에 초대함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높은 사회적 위상을 과시하려는 종교적인 명예욕도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몬의 의도와 오만한 태도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손님맞이의 의도된 결례’입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예수님은 시몬의 결례를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눅 7:44~46)
당시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환대’의 관습은 단순한 에티켓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정하는 거룩한 의무였고, 주인의 품격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법이었습니다. 비포장 흙먼지 길을 걸어온 손님에게 문간에서 물 대야를 주며 발을 씻게 하는 것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상식이었습니다. 평화의 입맞춤을 건네며 환영의 인사를 전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건조한 기후에 지친 손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한 방울 떨어뜨려 주는 것은 당연한 환대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은 이 세 가지 중 단 하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바빠서 잊어버린 실수가 아닙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의도적인 냉대’였습니다. 아마도 주변에 앉아 있는 동료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았을 것입니다. 청년 예수를 내 집에 불러들여 ‘밥 한 끼는 대접하지만, 정식 랍비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기를 죽이고 선을 긋는 교만한 거리 두기였습니다. 겉으로는 품위 있는 만찬이었지만, 그 식탁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무례함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몬은 교만한 시선으로 지켜보았지만, 여인은 눈물로 쏟아부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예수님을 무례하게 대하는 시몬의 잔치 자리에 한 불청객이 등장합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7)
모두가 손가락질하던 죄 많은 여인이 안뜰로 들어와서 울며 주님의 뒤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엄격한 바리새인 집의 잔칫상에 온 동네가 다 아는 부정한 여인이 어떻게 대낮에 아무 제지도 없이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당시 가옥의 구조와 문화를 알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몬과 같은 부유한 유지들의 집에는 넓은 안뜰(Courtyard)이 있었습니다. 그 안뜰이 문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유명 랍비가 식사에 초대받으면, 이웃 주민들은 안뜰 담벼락에 와서 대화를 엿듣거나 잔치를 구경하는 것이 관습상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집주인 시몬의 안뜰 문은 동네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이 열려 있다고 해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온 동네에서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힌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정결 예식을 목숨처럼 여기는 바리새인들의 모임에 발을 내디딘다는 것은, 발각되는 즉시 모욕을 당하거나 쫓겨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그 여인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먼저 한번 살펴봐야 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주인 시몬의 반응입니다. 그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답게 당장 호통치며 끌어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몬은 이 여인을 내쫓지 않고 가만히 지켜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교만한 시험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어? 저기 죄 많은 여자가 예수께 다가가네?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시몬은 예수님의 ‘신통력’을 시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신령한 눈을 가진 예언자라면, 저 여자가 온 동네가 손가락질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그 정체를 알아채고 호통을 치는지, 아니면 누구인지도 모르고 손길을 받아 내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겠다.’
그는 영혼의 비참함이나 회개의 눈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이 여인은 예수가 진짜 선지자인지를 가려내기 위한 ‘시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리새인 시몬은 죄인인 여인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며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시몬의 싸늘한 시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당시 식사 자리는 비스듬히 눕고 발을 식탁 바깥쪽으로 뻗는 구조였습니다. 여인은 주님의 얼굴 앞으로 나아갈 염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탁 뒤편으로 나와 있는 주님의 거친 발뒤꿈치 곁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참았던 눈물을 흘립니다. 물이 없어 피눈물로 주님의 흙먼지 묻은 발을 적십니다. 수건이 없어서 여인의 가장 소중한 면류관인 머리털을 풀어 발을 닦아 냅니다. 그 발에 하염없이 입을 맞추며 품에 안고 온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기 시작합니다.
한쪽에서는 선지자의 신통력을 시험해 보겠다며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는 바리새인의 메마른 시선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체면도, 목숨도, 전 재산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죄인의 처절한 눈물이 있습니다.
<시몬의 지식은 정죄했고, 여인의 앎은 생명을 구했으며, 예수님의 앎은 모든 것을 품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원문으로 찬찬히 읽어 가다 보면 아주 흥미로운 한 단어가 반복해서 고개를 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알다’라는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γνοῦσα) (눅 7:37)
여인은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어떤 수모를 당할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 세상이 자신을 손가락질해도 내 모든 빚을 탕감해 주실 유일한 구주가 저 식탁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앎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주님의 발아래로 달려가게 만드는 생명의 앎, 진정한 앎이었습니다.
반면에 시몬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ἐγίνωσκεν) (눅 7:39)
시몬도 율법을 알았고, 여인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앎’은 사람을 정죄하고 밀쳐 내며 시험하는 차가운 칼날 같은 앎이었습니다. 알기는 많이 알고 있지만, 사랑은 전혀 없는 메마른 지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진짜로 알고 계시는 한 분이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죄인인 것을 모르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혼의 깊은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눈물의 의미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동시에 거룩한 척 점잖게 비스듬히 누워서 속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의 비열한 속마음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며 무례하게 굴던 시몬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주님은 시몬의 앞에서 직접 망신을 주거나 그를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눅 7:40)
삭개오를 나무 아래에서 부르셨듯이, 주님은 오만한 바리새인 시몬조차 돌이켜 살려 내야 할 ‘한 영혼’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는데, 빚 준 사람이 둘 다 갚을 길이 없어 탕감해 주었다. 둘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많이 탕감받은 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네 판단이 옳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여백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돌려 여인을 향해 시몬의 심장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시몬아, 너는 이 여자를 보느냐? 너는 지금까지 네 잘난 도덕의 안경을 쓰고 저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만 보았지? 그러나 이제 나의 눈으로 저 여인을 다시 한번 보아라. 나는 네 집에 들어올 때 물 한 모금 대접받지 못했지만, 저 여인은 아픈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입 맞추지도 않았지만, 저 여인은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너는 흔한 감람유 한 방울 붓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가장 귀한 향유를 모두 내 발에 쏟아부었다.
시몬아, 너는 흠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탕감받을 빚이 오십 데나리온에 불과하다고 여기는구나. 그래서 너의 예배에는 감격이 없고 식탁에는 사랑이 메말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여인은 자기가 갚을 길 없는 절망적인 죄인임을 알았고, 값없이 사해 준 나의 은혜를 맛보았기에 저토록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시몬을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의에 도취해 영적으로 마비되어 있던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 주고자 하셨습니다. “너의 메마른 우월감의 자리에서 내려와 저 여인처럼 은혜의 빚진 자의 자리로 내려오라”라는 눈물의 초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깨달은 여인의 믿음에 평안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온 동네가 손가락질하던 한 여인을 온전히 대면하십니다. 주님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서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를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만큼 안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앎으로, 지식으로 사람의 허물을 파헤쳐서 정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앎으로, 전지하심으로 상처 입은 여인을 덮어 주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눅 7:48)
성도 여러분, 이것은 여인이 눈물을 쏟고 옥합을 바쳤기 때문에 주어진 ‘보상’이 아닙니다. 여인은 이미 자신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알았기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향유를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눈물과 옥합 향유는 구원을 얻어 내기 위한 조건이나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탕감받은 압도적인 은혜에서 나온 거룩한 ‘감사의 열매’였습니다.
식탁에 앉은 자들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수군거릴 때, 주님은 여인에게 눈을 맞추며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눅 7:50)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여인이 눈물로 발을 씻기고 값비싼 향유를 부었으니, “네 지극한 정성과 헌신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신 이 여인의 ‘믿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붙잡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나아가면 죄의 용서가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만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바리새인의 손에는 ‘자기 의’가 들려 있었습니다. ‘나는 금식했고, 십일조를 냈으며, 저 여인과 다르게 살았다’라는 종교적 훈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주님의 은혜를 담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동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파산한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파산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발 앞으로 나와 주님께 빈손을 내민 것입니다. 주님은 그 빈손을 보셨습니다. 여인이 깨뜨린 향유 옥합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거저 살려 주신 은혜를 믿는 데서 터져 나온 ‘자연스러운 열매’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고, 그분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라고 샬롬을 선포하십니다. “너를 옭아매던 정죄의 사슬은 이제 끊어졌다. 너는 내 피로 값 주고 산 존귀한 딸이니, 참된 평안을 품고 당당히 걸어가라!”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말씀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처음 시몬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 여인은 두려움에 떨던 죄인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옥합을 깨뜨리고 나설 때 그는 온전히 사함받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 시몬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여인과 같이 내가 가지고 있는 향유 옥합을 모두 주님께 가지고 와야 한다’라는 말씀일까요? 물론 모두 이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과연 너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십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 이 질문이 나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눅 7:49)
한 여인은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나의 죄가 사해지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아는 앎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새로운 삶과 평안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나아가 향유를 붓고 눈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이신지, 나에게 어떤 존재이신지’라는 질문의 답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해하기는 했지만, 정말 그가 누구이신지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자기 집에까지 초대해서 거만하게 시험하고자 했고 알아보고자 노력까지 했지만, 진정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끝까지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여러분께서 꼭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눅 7:48,50)
주님 안에 죄 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한 여인은 그것을 알았고, 바리새인은 몰랐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귀한 소망의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Go In Peace
Luke 7:40-43, 47-50
Today’s passage depicts a suspenseful story at a feast, an incident that happened in the house of Simon the Pharisee. To understand this story well, we must first look at what happens before it.
In the first section of Luke 7 which immediately precedes today’s passage, a few interesting incidents are listed. Jesus heals the servant of a centurion in Capernaum with a word. Then, moving to the town of Nain, He encounters a widow whose son had just died, and heals him. This series of events surely caused a sensation.
Having witnessed extraordinary miracles, including one that turned a funeral procession into a feast of life, the people were in awe and shouted:
“A great prophet has appeared among us,” (Luke 7:16 NIV)
Naturally, news of these miracles spread throughout all the regions. The Bible states:
“This news about Jesus spread throughout Judea and the surrounding country.” (Luke 7:17 NIV)
Not long after, a Pharisee invited Jesus to his house in a dignified manner. The Pharisee’s name was Simon.
“When one of the Pharisees invited Jesus to have dinner with him,” (Luke 7:36a)
Simon was a leader of the Pharisees, a man who guarded the legitimacy of the Law in Jewish society and lived an impeccable life, religiously and morally. Anyone with considerable knowledge about the context of Jesus’ time would be astounded and puzzled upon hearing that such a man had invited Jesus. Indeed, the Pharisees at the time were Jesus’ stark opponents who clashed with Him on every issue. They condemned Jesus for hanging out with sinners and criticized Him for breaking the Sabbath laws. Yet one of these Pharisees had invited Jesus to his home.
Why then did Simon invite Jesus? Was it because he truly respected Him? Or did he want to know the Way in order to reach salvation?
Unfortunately, the circumstances in the Bible suggest otherwise. Simon’s true feelings are revealed plainly in verse 39, in his inner monologue.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o is touching him and what kind of woman she is—that she is a sinner.” (Luke 7:39 NIV)
Simon’s motive was clear: he was not inviting Jesus out of a faith that longed for grace but to test the prophet.
The whole town was calling Him a great prophet, and Simon’s curiosity led him to seat Jesus at his table to examine Him personally. At the same time, by seating a prominent person who attracted public attention in his home, he hoped to display his high social status to the townspeople, which reflects a religious pride.
Simon’s intent and arrogant attitude are exposed from the moment he receives Jesus. In short, he deliberately breached the customs of hospitality. At the end of the story Jesus points out Simon’s discourtesy:
“I came into your house. You did not give me any water for my feet… You did not give me a kiss… You did not put oil on my head…” (Luke 7:44–47 NIV)
Dear brothers and sisters, in first-century Jewish society the customs of welcoming a guest were not mere etiquette. They were holy obligations prescribed by the Law and rites that showed the host’s dignity. Offering a basin of water at the doorway so a guest could wash the dust off his feet after walking along unpaved, dusty roads was basic common sense. Greeting with a kiss of peace and dropping a bit of olive oil on a weary guest’s head in the dry climate were natural expressions of hospitality.
But Simon the Pharisee failed to perform any of these three. It was not a careless oversight because he was busy; it was a carefully calculated, intentional coldness.
Conscious of his fellow Pharisees’ eyes, he kept the guest in his house for a meal but made it clear he did not intend to recognize Jesus as a proper rabbi—an arrogant distancing meant to belittle Him. Outwardly the meal appeared dignified, but the atmosphere at the table was icy, full of rudeness and pride.
It was that very moment. An unexpected guest suddenly appeared at the feast of Simon who was treating Jesus rudely.
Verse 37 reads, “A woman in that town who lived a sinful life learned that Jesus was eating at the Pharisee’s house, so she came there with an alabaster jar of perfume.” (Luke 7:37 NIV)
The woman, known throughout the town as sinful, entered the courtyard, weeping, and came behind the Lord.
One question arises at this point.
How could a disreputable woman, known by the whole town, enter in broad daylight into the house of a strict Pharisee who kept the Law meticulously, without being stopped?
The house structures and culture of the time help us understand. Wealthy people of standing like Simon had wide open courtyards, and when a well-known rabbi was invited to eat, neighbors would customarily stand leaning against the courtyard wall to eavesdrop on the conversation or observe the meal. In other words, Simon’s courtyard gate was open to the townspeople.
However, an open gate did not mean anyone could enter freely. This woman bore a public stigma of shame. To step into a gathering of Pharisees who treated purity rites as a matter of life and death was risky—she could easily be humiliated or thrown out the moment she was discovered. Yet she entered.
In this scene, there is someone whom we must first notice. We must first observe the response of the host, Simon. He recognized immediately who the woman was.
So, as a Pharisee, shouldn’t he have rebuked her and thrown her out at once? But Simon did not drive her away; he watched quietly. Why?
It was not because she aroused his pity. In Simon’s mind a proud test was already formulating. “Oh? That sinful woman is coming up to Jesus, eh? Let’s see what He does.” Simon wanted to test Jesus’ miraculous power. “If you really are a prophet with God’s spiritual insight, then surely You will see through the woman coming now and know that she is the town’s despised sinner. I will watch with my own eyes to see whether You notice her and rebuke her, or whether You accept her touch without knowing who she is.” Doesn’t verse 39 nakedly expose Simon’s inner motives? He had no interest in the soul’s desperation or in tears of repentance. To him the woman was merely a tool to test whether Jesus was truly a prophet.
But the woman paid no attention to Simon’s cold test. The reclining arrangement for meals meant guests lay on their sides, extending their feet outside the table toward the back. Too embarrassed to come before the Lord’s face, the woman came behind Him, to where His rough heels protruded behind the table, and kneeled there.
Then her pent-up tears broke out. With no water available she wetted the Lord’s dusty feet with her tears; with no towel she let down the precious crown of her hair and wiped His feet. She kept kissing those feet and began to pour out the jar of perfume she had brought.
On one side, there was the Pharisee’s dry gaze, intoxicated with moral superiority, testing the prophet’s power with a cold standard. On the other, there was the sinner’s desperate tears, pouring out everything at the Lord’s feet, caring not for reputation, life, or possessions.
If you read the original text carefully, one very interesting word repeatedly appears. It is the word “to know.” (T/N: translated in the NIV also as “to learn”)
Verse 37: “A woman in that town who lived a sinful life learned that Jesus was eating at the Pharisee’s house,” (Luke 7:37a NIV)
The woman knew where Jesus was. She knew well the shame she would likely suffer if she entered the house. Yet she also knew that the only Savior who could cancel all her debts sat at that table. Her knowledge was not mere information; it was a living knowledge that drove her to run to the Lord’s feet.
On the contrary, look at Simon in verse 39: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o is touching him and what kind of woman she is—that she is a sinner.” (Luke 7:39 NIV)
Simon also knew; he knew the Law and the woman’s past. But his knowledge was a cold blade that condemned and pushed people away. He knew much, but his knowledge was barren void of any love.
Finally, there is One who truly knows all things: our Lord Jesus Christ.
Did Jesus not know that the woman was a sinner? Of course He knew. He knew not only her sins but the wounds deep in her soul and the meaning of her regretful tears that others could not see. At the same time, He knew fully the vile heart of Simon who pretended to be holy but secretly tested Jesus.
So how did the all-knowing Lord treat Simon, who tested and treated Him rudely? Jesus did not shame or condemn Simon to his face. Instead He gently called him by name. “Simon, I have something to tell you.” (Luke 7:40 NIV) Just as He called Zacchaeus down from the tree (Luke 19:5 NIV), our Lord treated even the proud Pharisee Simon as a soul to be turned and saved.
Then He told a simple parable: “A certain moneylender had two debtors; one owed five hundred denarii, and the other fifty. When they could not pay, he canceled the debts for both.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re?” Simon answered, “The one who had the larger debt canceled.” Jesus said, “You have judged correctly,” thereby opening a gracious space for Simon to realize the truth for himself.
Then at last He turned to the woman and asked a question that pierced Simon’s heart.
“Simon, do you see this woman?” “Simon, you have been looking at that woman through the spectacles of your proud morality, seeing only an unclean prostitute. Now look at her through My eyes. When I came to your house you did not offer Me even a cup of water, yet she wet My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You did not give Me a kiss, but she has not stopped kissing My feet. 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even a drop of olive oil, but she anointed My feet with her most precious perfume.”
“Simon, you imagine yourself to be a blameless, righteous person and deceive yourself into thinking your debt is only fifty denarii. That is why your worship is without wonder and your table has been drained of love. But this woman knew she was a hopeless debtor who could not repay; she has tasted My freely given grace of forgiveness, and so she pours out unrestrainable love.”
The Lord’s intent was not to humiliate Simon, but to shake up a spiritually paralyzed soul drunk on self-righteousness. It was a tearful invitation: “Come down from your barren place of superiority and come to the place of one who is indebted to grace, as this woman has.”
Then the Lord faced the woman whom the whole town had shunned.
He did not mention a single word about her shameful past before those seated at the table. The Pharisees dug up others’ faults with knowing and knowledge to condemn, but the Lord, by His knowing and omniscience, covered the wounded woman.
Then in verse 48 He declared:
“Then Jesus said to her, ‘Your sins are forgiven.’” (Luke 7:48 NIV)
Beloved, this was not a “reward” for her tears and pouring of perfume. She wept uncontrollably and broke the jar because she already knew the Lord who forgave her unconditionally. Her tears and the perfume were not merits to earn salvation but a holy fruit of thanksgiving born from the overwhelming grace of forgiveness she had already received.
When those at the table murmured, “Who is this who even forgives sins?”, the Lord looked at the woman and spoke the final word: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Luke 7:50 NIV) These words call for deep reflection.
If she washed Jesus’ feet with tears and poured out costly perfume, would it not have been fitting to say, “Your extreme devotion and sacrifice have saved you”? Yet the Lord does not mention her acts at all; He declares that “your faith” has saved you.
What was the substance of the woman’s “faith” as the Lord saw it? It was her empty hands that clung only to the grace of Jesus, knowing she was completely helpless.
By contrast, Simon the Pharisee’s hands were full of his own self-righteousness. His hands held on to religious medals—“I fast, I tithe, I do not live like that woman”—and so there was simply no room for Lord’s grace.
But this woman knew she was a sinner who was completely bankrupt before God. From that place of bankruptcy she crawled to Jesus’ feet and held out empty hands.
The Lord saw those empty hands.
The jar she broke was not a condition for salvation but the natural fruit of faith that believed the grace which had freely rescued a sinner like her. Just as an apple tree does not strive to bear apples but, being an apple tree, bears apples as its fruit, a forgiven soul can pour out extravagant perfume of love because it has been forgiven.
The woman knew who Jesus was and that only He could save her. This was her faith.
To this very woman, the Lord declares, “Go in peace” — shalom.
“The chains of condemnation that bound you are broken. You are a precious daughter bought with My blood; go in dignity and with true peace!”
When she came in through Simon’s door she was a trembling sinner, but when she left after encountering Jesus and breaking the alabaster jar, she walked out a person wholly forgiven and free.
Beloved, what is the central message this story intends to convey? What is our Lord’s deep intent in this passage? Is it simply that we must not be like Simon the Pharisee, or that we should live like this woman? Of course, these are a part of the message. But the most important question of this passage is this: Who is Jesus to us? Who is Jesus to you?
At the end of the passage the onlookers murmur, “Who is this who even forgives sins?” (Luke 7:49 NIV). The woman had faith that if she just came to Jesus her sins and transgressions would be forgiven, that her life would be changed, that she would find peace and that all her problems would be solved. In fact, the moment she came and looked at Him she knew he had forgiven her, that He had given her new life and peace. That is why she could come to His feet, pour out the perfume, and receive Him with tears.
So the question is: Who is Jesus? And who is He to me? Simon the Pharisee was curious about who Jesus was, but he failed to truly know who Jesus is. He even arrogantly tested Jesus and tried to discern by inviting Him to his house, but in the end he did not truly know who Jesus is. He did not know that Jesus is the One who forgives sins, the One who pardons faults. To the end, he failed to truly know the Lord.
Who is Jesus? Today the Lord asks us this question. I offer the Lord’s final words in today’s passage as our closing words:
“Your sins are forgiven…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Luke 7:48, 50 NIV)
In the Lord there is the grace of forgiveness. There is the solution to every problem. There is true peace. May we at Somang Church go to the Lord with this faith.
누가복음 7:40~43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누가복음 7:47~50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며 집의 문은 열었지만, 마음의 문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난 한 사건, 긴장감이 넘치는 한 잔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려면 본문 앞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전반부에는 매우 흥미로운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한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만으로 고쳐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가셔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과부를 만나시고, 그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화제가 될 만한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절망의 장례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바뀌는 엄청난 기적을 목격한 백성들은 경외감을 느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눅 7:16)
이 소문은 자연스럽게 온 지역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눅 7:17)
이런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리새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정중하게 식사 초대를 합니다.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눅 7:36a)
시몬은 당시 갈릴리와 유대 사회에서 율법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던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 시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이라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했다는 부분에서 잠시 멈추어 놀라움과 의아함을 먼저 가졌을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린다며 예수님을 비난했고, 안식일을 어긴다며 날을 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예수님을 초대한 것일까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존경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구원을 얻고자 갈망하는 구도자였기 때문일까요? 안타깝게도 성경의 정황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몬의 속내는 그의 독백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눅 7:39)
시몬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신앙적 초청이 아니라, 선지자를 검증하려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떠드니, 자기 집의 식탁에 앉혀 놓고 그가 누구인지 직접 살펴보려는 일종의 호기심이었습니다. 동시에 백성들의 주목을 받는 화제의 인물을 자기 집에 초대함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높은 사회적 위상을 과시하려는 종교적인 명예욕도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몬의 의도와 오만한 태도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손님맞이의 의도된 결례’입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예수님은 시몬의 결례를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눅 7:44~46)
당시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환대’의 관습은 단순한 에티켓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정하는 거룩한 의무였고, 주인의 품격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법이었습니다. 비포장 흙먼지 길을 걸어온 손님에게 문간에서 물 대야를 주며 발을 씻게 하는 것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상식이었습니다. 평화의 입맞춤을 건네며 환영의 인사를 전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건조한 기후에 지친 손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한 방울 떨어뜨려 주는 것은 당연한 환대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은 이 세 가지 중 단 하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바빠서 잊어버린 실수가 아닙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의도적인 냉대’였습니다. 아마도 주변에 앉아 있는 동료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았을 것입니다. 청년 예수를 내 집에 불러들여 ‘밥 한 끼는 대접하지만, 정식 랍비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기를 죽이고 선을 긋는 교만한 거리 두기였습니다. 겉으로는 품위 있는 만찬이었지만, 그 식탁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무례함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몬은 교만한 시선으로 지켜보았지만, 여인은 눈물로 쏟아부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예수님을 무례하게 대하는 시몬의 잔치 자리에 한 불청객이 등장합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7)
모두가 손가락질하던 죄 많은 여인이 안뜰로 들어와서 울며 주님의 뒤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엄격한 바리새인 집의 잔칫상에 온 동네가 다 아는 부정한 여인이 어떻게 대낮에 아무 제지도 없이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당시 가옥의 구조와 문화를 알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몬과 같은 부유한 유지들의 집에는 넓은 안뜰(Courtyard)이 있었습니다. 그 안뜰이 문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유명 랍비가 식사에 초대받으면, 이웃 주민들은 안뜰 담벼락에 와서 대화를 엿듣거나 잔치를 구경하는 것이 관습상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집주인 시몬의 안뜰 문은 동네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이 열려 있다고 해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온 동네에서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힌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정결 예식을 목숨처럼 여기는 바리새인들의 모임에 발을 내디딘다는 것은, 발각되는 즉시 모욕을 당하거나 쫓겨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그 여인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먼저 한번 살펴봐야 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주인 시몬의 반응입니다. 그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답게 당장 호통치며 끌어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몬은 이 여인을 내쫓지 않고 가만히 지켜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교만한 시험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어? 저기 죄 많은 여자가 예수께 다가가네?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시몬은 예수님의 ‘신통력’을 시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신령한 눈을 가진 예언자라면, 저 여자가 온 동네가 손가락질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그 정체를 알아채고 호통을 치는지, 아니면 누구인지도 모르고 손길을 받아 내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겠다.’
그는 영혼의 비참함이나 회개의 눈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이 여인은 예수가 진짜 선지자인지를 가려내기 위한 ‘시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리새인 시몬은 죄인인 여인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며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시몬의 싸늘한 시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당시 식사 자리는 비스듬히 눕고 발을 식탁 바깥쪽으로 뻗는 구조였습니다. 여인은 주님의 얼굴 앞으로 나아갈 염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탁 뒤편으로 나와 있는 주님의 거친 발뒤꿈치 곁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참았던 눈물을 흘립니다. 물이 없어 피눈물로 주님의 흙먼지 묻은 발을 적십니다. 수건이 없어서 여인의 가장 소중한 면류관인 머리털을 풀어 발을 닦아 냅니다. 그 발에 하염없이 입을 맞추며 품에 안고 온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기 시작합니다.
한쪽에서는 선지자의 신통력을 시험해 보겠다며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는 바리새인의 메마른 시선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체면도, 목숨도, 전 재산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죄인의 처절한 눈물이 있습니다.
<시몬의 지식은 정죄했고, 여인의 앎은 생명을 구했으며, 예수님의 앎은 모든 것을 품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원문으로 찬찬히 읽어 가다 보면 아주 흥미로운 한 단어가 반복해서 고개를 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알다’라는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γνοῦσα) (눅 7:37)
여인은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어떤 수모를 당할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 세상이 자신을 손가락질해도 내 모든 빚을 탕감해 주실 유일한 구주가 저 식탁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앎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주님의 발아래로 달려가게 만드는 생명의 앎, 진정한 앎이었습니다.
반면에 시몬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ἐγίνωσκεν) (눅 7:39)
시몬도 율법을 알았고, 여인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앎’은 사람을 정죄하고 밀쳐 내며 시험하는 차가운 칼날 같은 앎이었습니다. 알기는 많이 알고 있지만, 사랑은 전혀 없는 메마른 지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진짜로 알고 계시는 한 분이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죄인인 것을 모르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혼의 깊은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눈물의 의미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동시에 거룩한 척 점잖게 비스듬히 누워서 속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의 비열한 속마음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며 무례하게 굴던 시몬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주님은 시몬의 앞에서 직접 망신을 주거나 그를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눅 7:40)
삭개오를 나무 아래에서 부르셨듯이, 주님은 오만한 바리새인 시몬조차 돌이켜 살려 내야 할 ‘한 영혼’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는데, 빚 준 사람이 둘 다 갚을 길이 없어 탕감해 주었다. 둘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많이 탕감받은 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네 판단이 옳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여백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돌려 여인을 향해 시몬의 심장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시몬아, 너는 이 여자를 보느냐? 너는 지금까지 네 잘난 도덕의 안경을 쓰고 저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만 보았지? 그러나 이제 나의 눈으로 저 여인을 다시 한번 보아라. 나는 네 집에 들어올 때 물 한 모금 대접받지 못했지만, 저 여인은 아픈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입 맞추지도 않았지만, 저 여인은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너는 흔한 감람유 한 방울 붓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가장 귀한 향유를 모두 내 발에 쏟아부었다.
시몬아, 너는 흠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탕감받을 빚이 오십 데나리온에 불과하다고 여기는구나. 그래서 너의 예배에는 감격이 없고 식탁에는 사랑이 메말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여인은 자기가 갚을 길 없는 절망적인 죄인임을 알았고, 값없이 사해 준 나의 은혜를 맛보았기에 저토록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시몬을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의에 도취해 영적으로 마비되어 있던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 주고자 하셨습니다. “너의 메마른 우월감의 자리에서 내려와 저 여인처럼 은혜의 빚진 자의 자리로 내려오라”라는 눈물의 초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깨달은 여인의 믿음에 평안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온 동네가 손가락질하던 한 여인을 온전히 대면하십니다. 주님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서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를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만큼 안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앎으로, 지식으로 사람의 허물을 파헤쳐서 정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앎으로, 전지하심으로 상처 입은 여인을 덮어 주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눅 7:48)
성도 여러분, 이것은 여인이 눈물을 쏟고 옥합을 바쳤기 때문에 주어진 ‘보상’이 아닙니다. 여인은 이미 자신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알았기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향유를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눈물과 옥합 향유는 구원을 얻어 내기 위한 조건이나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탕감받은 압도적인 은혜에서 나온 거룩한 ‘감사의 열매’였습니다.
식탁에 앉은 자들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수군거릴 때, 주님은 여인에게 눈을 맞추며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눅 7:50)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여인이 눈물로 발을 씻기고 값비싼 향유를 부었으니, “네 지극한 정성과 헌신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신 이 여인의 ‘믿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붙잡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나아가면 죄의 용서가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만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바리새인의 손에는 ‘자기 의’가 들려 있었습니다. ‘나는 금식했고, 십일조를 냈으며, 저 여인과 다르게 살았다’라는 종교적 훈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주님의 은혜를 담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동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파산한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파산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발 앞으로 나와 주님께 빈손을 내민 것입니다. 주님은 그 빈손을 보셨습니다. 여인이 깨뜨린 향유 옥합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거저 살려 주신 은혜를 믿는 데서 터져 나온 ‘자연스러운 열매’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고, 그분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라고 샬롬을 선포하십니다. “너를 옭아매던 정죄의 사슬은 이제 끊어졌다. 너는 내 피로 값 주고 산 존귀한 딸이니, 참된 평안을 품고 당당히 걸어가라!”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말씀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처음 시몬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 여인은 두려움에 떨던 죄인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옥합을 깨뜨리고 나설 때 그는 온전히 사함받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 시몬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여인과 같이 내가 가지고 있는 향유 옥합을 모두 주님께 가지고 와야 한다’라는 말씀일까요? 물론 모두 이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과연 너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십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 이 질문이 나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눅 7:49)
한 여인은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나의 죄가 사해지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아는 앎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새로운 삶과 평안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나아가 향유를 붓고 눈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이신지, 나에게 어떤 존재이신지’라는 질문의 답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해하기는 했지만, 정말 그가 누구이신지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자기 집에까지 초대해서 거만하게 시험하고자 했고 알아보고자 노력까지 했지만, 진정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끝까지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여러분께서 꼭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눅 7:48,50)
주님 안에 죄 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한 여인은 그것을 알았고, 바리새인은 몰랐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귀한 소망의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평안히 가라” (눅 7:40-43,47-50)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54, 412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살면서 누군가에게 정중히 초대받았는데, 막상 가보니 환대받지 못하고 어색하거나 서운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지만, 그 초대는 존경이 아닌 검증이었습니다. 온 동네가 “큰 선지자”라 떠드는 예수님을 시험해보려는 호기심과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과시하려는 명예욕이 그 속내였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입맞춤도, 감람유도 내어주지 않는 ‘의도된 결례’로 예수님을 냉대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온 동네가 손가락질하던 죄 많은 여인이 들어와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십니다. 시몬은 속으로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며 예수님을 시험하지만, 여인은 자신이 어떤 수모를 당할지 알면서도 오직 주님만이 자신을 살려주실 분임을 알았기에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시몬의 앎은 사람을 정죄하는 차가운 칼날이었지만, 여인의 앎은 주님의 발아래로 달려가게 하는 생명의 앎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망신 주지 않으시고, 빚 탕감의 비유를 통해 그가 스스로 깨닫도록 이끄시며 물으십니다. “시몬아, 너는 이 여자를 보느냐?” 그리고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지 않으신 채 선언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여인의 헌신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이미 값없이 주어진 은혜에서 터져 나온 감사의 열매였습니다. 주님이 보신 여인의 믿음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오직 은혜만을 붙잡은 ‘빈손’이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손에는 종교적 훈장이 가득 들려 있어 은혜를 담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선포하시고, 여인은 온전히 사함받은 자유인이 되어 걸어 나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우리는 자기 의에 취해 감사의 눈물을 잃어버린 시몬의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가난한 빈손으로 은혜를 구하는 여인의 자리에 엎드려 있습니까?
<나누기>
1. 여인은 향유 옥합, 즉 자신의 전 재산이자 자존심이었을 것을 아낌없이 깨뜨려 주님께 드렸습니다. 내 삶에서 주님께 아직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한 ‘나의 옥합’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2. 여인은 두려움에 떨던 죄인으로 들어왔다가, 온전히 사함받은 자유인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내 삶에서 여전히 죄책감이나 불안에 얽매여 있는 부분이 있다면 나누고, 서로를 위해 “평안히 가라”는 은혜를 구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흠 없는 종교인의 자리에 앉아 정작 나를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는 잊고 살았던 우리의 위선과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판단하던 차가운 시선을 내려놓고,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의 긍휼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번 한 주간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신 그 참된 평안을 품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