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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원지기의 믿음
<죄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해야 할 사랑과 책임을 외면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번영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번영 대신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은 건강을 원합니다. 그러나 건강 대신에 질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모든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나라든, 사회든, 경제든, 개인이든, 우리가 바라는 것과 현실이 다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죄가 원인이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깊은 죄, 생각지도 못한 죄, 문화화되고 체질화되고, 관습화가 되어 죄인 줄도 모르고 벌이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죄 중에 살면서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사회, 나라, 개인, 모두가 다 죄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 20:13~16)
살인하지 말라 하셨으니 살인하지 않아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셨으니 간음하지 않아야 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하셨으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고, 양심이 말합니다. 본인도 잘 압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또 하나의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높은 차원의 윤리이자 생활 규범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도와줘야 할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죄가 되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가 어떻게 될지를 먼저 묻기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높은 차원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0)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보았습니다. 당연히 도와줘야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다가 내가 어떻게 될까?’ 자기에게 어떤 피해가 올지 생각해 보니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거룩한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위하여 올라가는 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반차를 따라 올라가는 중입니다. 모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날, 거룩하고 깨끗하게 올라가야 합니다. 이 불쌍한 사람을 돕다가 만일에 이 자가 죽어 버리면 시체를 만진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시체를 만지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은 이 사람을 돕다가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두 사람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순간,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될지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아직 강도가 잠복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사람을 도와줍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먼저 생각한 이타적인 사람입니다. 자기도 강도 만날 수 있는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도와줘야 할 때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것, 희생해야 할 사람이 희생하지 않는 것이 다 죄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용서와 사랑으로 그 은혜를 다시 흘려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더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이 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천만 불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런 돈을 빚졌는데 갚을 길이 없습니다. 무능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써 보았지만, 갚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러자 돈을 빌려준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저 사람을 이대로 두면 빚진 죄인으로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는 큰마음을 써서 빚진 자를 불러 “자네, 그 빚을 갚기 어려운 것 같은데, 내가 큰마음으로 탕감해 주겠네.”라며 자비를 베풉니다. 빚을 탕감받은 자는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일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는 수차례 감사하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갑니다. 가는 길에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딱 붙들고 돈을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꼭 갚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사정합니다. 그러나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그를 감옥에다 처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사람이 소식을 듣고 섭섭해서 자기가 탕감해 준 자를 불러오게 합니다. “이 사람아, 내가 네게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는데, 만 달란트 탕감받은 기쁨을 가지고 백 데나리온을 탕감할 수 없더냐?” 오늘의 돈으로 환산해 보면 만 달란트는 천만 불이고, 백 데나리온은 이십 불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돈입니다. 만 달란트 탕감받은 감격과 감사가 있다면 백 데나리온은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해야 하고, 사랑받았으니 사랑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옛날에 프린스턴에서 공부했는데, 제가 모르는 분들이 장학금을 보내 주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왔습니다. 지금은 저도 두 사람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두 사람에게 장학금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한테 고맙다고 편지를 합니다. 내가 회답했습니다. “편지할 거 없습니다. 나 또한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은혜받았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용서받았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받았으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은혜를 배반한 죄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 없는 현실을 정죄하기보다, 그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려는 과원지기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과원지기가 수고했으니, 당연히 열매를 맺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무화과나무에는 3년이라는 유예기간이 있었습니다.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계속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제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눅 13:7)
주인은 “어찌하여 땅만 버리겠느냐?” 하며 열매가 없는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과원지기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눅 13:8)
“주인이여, 열매가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무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과원지기인 내게 잘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1년 동안 더 수고하겠습니다. 거름과 물을 주고 가꾸어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다시 1년 동안 내가 수고하겠습니다. 그러니 참아 주세요.” 이 말이 무엇입니까? 열매 없는 책임을 직접 지겠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책임은 나무가 지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가 ‘열매 없는 책임’을 직접 지려는 마음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제 사무실을 찾아오셨습니다. 가정 안에서 깊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계셨고,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 놓으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그 상황이 있기 직전에 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으셨습니까?” 그러자 아주머니도 잠시 생각하시더니, 자신도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서로를 더욱 자극하는 말을 했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저도 참 말을 심하게 했네요” 하며 멋쩍게 웃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상처와 억울함만 먼저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런 문제 속에서는 때로 나 역시 누군가를 힘들게 만드는 말과 태도를 보였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모든 문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도 함께 돌아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영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뒤, 초등학교 선생님인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던 긴 편지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집사님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자녀가 강아지와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강아지에게 거친 말을 내뱉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하고 물었는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디에서 배우는 것일까요? 아이들의 태도와 행동은 누구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일까요? 우리는 쉽게 책임을 남에게 돌리려 합니다. 아닙니다.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화내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모든 일에 나의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은 책임지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이 잘못되더라도 그것이 나의 책임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14년 동안 목회했을 때, 다섯 자녀를 잘 키운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 다섯 중 셋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자녀를 훌륭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부러워하며 권사님을 붙들고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기에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고 신앙도 좋은지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저는 소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저는 공부를 많이 해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만 봐도 참 고마웠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기보다, 옆에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할 때 곁에서 뜨개질도 하고, 목마를까 봐 물도 떠다 주고, 편안히 공부할 수 있도록 지켜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잘 크고 공부도 잘한 걸 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 아이들을 누가 키운 것입니까? 우리는 종종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말하면서, 공부할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혼자서만 공부할 환경을 만들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할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또 어떤 가정을 보니,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참 잘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양육했는지 들어보니 아주 간단했습니다. 아이들은 장난이 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때로는 꾸중도 하고 잔소리도 하며 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특별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주일에는 절대로 때리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주일에는 행복해했습니다. 주일은 마음껏 떠들어도 꾸중을 듣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좋은 날, 교회 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길러 갔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과원지기처럼 사랑의 마음으로 책임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과원지기는 깨끗한 마음으로 책임을 지려 합니다. 주인은 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나무의 잘못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모름지기 다음 해에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습니다. 하나는 병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적인 것입니다. 생리적인 것은 날 때부터 병자인 것입니다. 그것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리적인 것은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삶의 병든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모든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결과로 인한 것, 즉 병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원지기처럼 책임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지고 말하고, 책임지고 생각하고, 책임지고 행동하며 대신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해야 자유한 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열매 없는 현실을 비판하지 말고, 조용히 책임을 지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딘가에 잘못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내가 수고하겠습니다. 내가 참겠습니다. 내가 희생하겠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으로 사회와 현실, 가족에 대해 항상 책임지는 신앙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받은 우리가 책임을 집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니 베풉시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합시다.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인내 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받고 이제 우리가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The Faith of the Vineyard Keeper
Luke 13:6-9
Everyone wants prosperity, but instead hardships come. People want health, but instead illness comes. This is the world we live in. Therefore, dear friends, we must think deeply. What is the reason behind all this? What is the reason for all the problems we see in this country, society, economy, and our individual lives? The Bible gives us the answer: sin. Sin is the reason. There are serious sins, sins we commit unconsciously, and sins that have become part of our culture, habit, and custom. We sin, unaware that we are sinning. We are steeped in sin, yet remain utterly numb to it. All have fallen slaves to sin—society, nation, homes, and individuals. All the problems we see are because of sin. Dear friends, we must not forget this.
Then what is sin? There are two kinds of sin.
First, sin is to do what we ought not to do. There are things we must never do. When we do such things, we sin. What are those things? The Bible commands, “You shall not murder.” Then we must not murder. The Bible commands,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Then we must not commit adultery. We steal when the Bible tells us not to steal. We must not bear false witness, but we do. These are sin. Doing what we must not do—whether in our thoughts, or through our actions and speech—this is sin. The Bible, our conscience, tell us. And even we ourselves know only too well. We know that we must not do it, but we are doing it. We do things that we shouldn’t do. We say things that we ought not to say. We commit acts that must never be done. These are sin.
But there is something else we don’t know. There is another kind of sin, a second kind that Jesus talked about. This has to do with ethics of a higher dimension and rules for living. Sin is failing to do what we ought to do. So sin is: first, doing what we ought not to do; and second, not doing what we ought to do. Dear friends, we miss this point. We have failed to love whom we ought to love. We have not forgiven whom we ought to forgive. This is sin. We failed to do what we ought to do; we did not help whom we ought to help. This is becoming a serious sin. Jesus preached about this sin of a higher level.
For example, Jesus taught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A man was going up to the temple of Jerusalem, but met a band of thieves and was on the verge of death. A priest passing by saw him. Of course he should help him. But the priest thought, from his point of view, ‘Helping him might cause trouble for me.’ From a victim mentality, he thought helping the man would cause damage to himself. So he cannot help. Why? Because he is a priest, a holy priest. He is on his way to Jerusalem to offer sacrifices to God, to fulfill his monthly obligation. This is a special occasion that requires holiness and cleanliness. What will happen if he touches this dying man? If he dies, he will end up touching a corpse and become unclean. Then he would not be able to worship before God. He would fail to fulfill his special duty. This was what he thought. In other words, he worried about what would happen to himself if he helped the dying man. So he avoided him and passed by. This was what the Levite did as well. Both were the same. This is sin.
But the Good Samaritan was different. The moment he saw the poor man, he thought, ‘What will happen to him if I don’t help him? He will die.’ So he helps him even though the thieves might still be lurking around. Let me say this again. The Good Samaritan helped, thinking selflessly about what would happen to the poor man if he didn’t help him. From this selflessness, he risked the danger of facing bandits and helped the dying man. This was the parable that our Lord preached. Then what is Jesus trying to say here? What is sin? It is to fail to do what we ought to do, to not help when help should be given, to not love whom we ought to love, to not sacrifice when we ought to sacrifice. All this is sin.
Let me give another example of Jesus’ teaching. There was a servant who owed his master ten thousand talents, the equivalent of 10 million dollars today. This was gold. He could not possibly pay back his master. He made various efforts, but this incompetent servant could not pay it back and years went by. But the master had mercy on him. Knowing that the servant did not have the ability to pay him back and that he would only live in misery for the rest of his life if things were left as they are, the master called the servant and canceled his entire debt. The debt was totally erased. How grateful the servant must have been! He was freed from a debt that could not possibly be repaid even if he worked his entire life. How thankful! It was an unfathomable, unforgettable grace. The servant would have been deeply grateful. But on his way home, he met a fellow servant who owed him 100 denarii. He demanded payment. The fellow servant begged for more time. But the servant whose debt was canceled put his fellow servant in jail. Hearing this, the disappointed master summoned him. “You evil man! I canceled your debt of ten thousand talents. But you, even in your gratefulness and joy, couldn’t even overlook a debt of 100 denarii!” In today’s monetary terms, 10,000 talents are the equivalent of 10 million dollars, and 100 denarii 20 dollars. The two are utterly incomparable. The first servant should have canceled the second servant’s debt with joy and gratitude. He simply should have.
Dear friends, you have been forgiven. So you must forgive. You have been loved. So you must love. Since you have received grace, you must repay that grace. A man who does not know grace is not a man. A Christian who has experienced grace must live a life worthy of that grace.
Way back, I studied in Princeton. I was able to go there because people whose names I don’t even know gave me a scholarship. How grateful I was! With that infinite gratitude, I finished my studies and returned to Korea. Even now, I continue to give scholarships to two students. Why? It is because if we have received grace, we must repay it. I continue to support two students. They write me thank you letters. I write back: “You don’t need to write to me. Just don’t forget the grace you have received.” Dear friends, if you have received grace, you must extend grace. If you have been forgiven, you must forgive. If you have been loved, you must love. This is only fitting. If you don’t do this, it is sin. It is a serious sin. It is the sin of betraying grace. We must not forget that this becomes an unforgivable sin.
In today’s Scripture, we see Jesus teaching the Parable of the Fig Tree. It is only fitting that a fig tree bears fruit. The vineyard keeper labored and nurtured the tree for three years. This period of three years is important. It shows that the master of the vineyard waited. There was a grace period of three years. The tree was continuously given a chance. But for three years it bore no fruit. Finally the master said, “Cut it down! Why should it use up the soil?”
But the essence of this story is this: the vineyard keeper came to the master and said, “Sir, let it alone for one more year. It is true it is fruitless. But perhaps it is not the tree’s fault but mine. I have done something wrong. So I will nurture and fertilize it for one more year. I will labor. So have patience.” What does this mean? The vineyard keeper is taking responsibility for the barren tree. Who will take responsibility for the infertility? The vineyard keeper had a heart that took responsibility. It was love.
A long time ago, I received a letter from a deacon who attended one of my revivals. She was a schoolteacher. Her long letter moved me. One morning, as she was doing the dishes, she heard her child saying something to the dog. As the child was playing with the dog, the child said to it, “If you don’t listen to me, I’ll kill you.” The mother was shocked. She then repented deeply and wrote a letter of repentance to me. Dear friends, don’t forget that your children do only as you do. Who taught them the words that come out of their mouths and the actions they do? It is you. You are the reason behind it. You must not forget this.
But we shift the responsibility. But no. The responsibility lies within us. Who is the one who angers, frustrates, worries, and ruins others? We must take responsibility. Love is to take responsibility. Even if the other person has wronged, we must take responsibility because we often are the cause. That is love.
I ministered in Incheon for 14 years. There was an elder surnamed Yeom. Elder Yeom had five children of which three had graduated from Seoul National University. One became a professor after obtaining a Ph.D. Elder Yeom had raised his children well. Everyone envied him. So they asked his wife, a senior deaconess, how she raised them. What was the secret behind their good grades and admirable faith? The senior deaconess, who did not even graduate elementary school, just said, “I have never studied. Since I was not able to study, I was just thankful that my children studied. So I never told them to study. I just sat next to them knitting and occasionally giving them a cup of water when they were thirsty. Seeing them do so sell, I am just grateful to God.” Dear friends, who raises your children? We must not forget it is God. But we continuously badger them to study while we ourselves watch TV. How can your children study if you do this? We should create an atmosphere conducive to study.
I have also seen children with excellent faith. I wondered how they were raised. It was very simple. You know how naughty children can be. So parents scold, spank, and punish them. But in the family of these faithful children, the mother had a special rule. She did not scold or spank them on Sundays. So the children were happy on Sundays. They could be as noisy as they pleased because their mother didn’t scold them. So the Lord’s Day was a happy day for them. Going to church was an activity they looked forward to. This makes people come to Christ. Dear friends, think deeply about what you are doing.
In today’s passage, the vineyard keeper takes responsibility with a truly pure heart. The owner condemns the tree for bearing no fruit, but the vineyard keeper does not blame the tree. He says, “This is my fault. I will take responsibility.” He commits to care for it. I am sure that after one year the tree would surely have born fruit.
Dear friends, remember this. People face two kinds of sickness: one that is physiological and one that is pathological. The first kind refers to sickness that you are born with and cannot cure. But the latter, the pathological sickness, is something you can cure. So then what should be the view of Christians? For Christians, everything is pathological. Something wrong must have happened to have caused such a result. We should remember this. And we should take responsibility. We must have a heart that takes responsibility. Responsibility means bearing the cost: speaking responsibly, thinking responsibly, acting responsibly, taking the blame for others when we can. That is the gospel lived out.
Since we have received grace, we extend it. Because we have been forgiven, we forgive. We have been loved, so we love. This is the life of a Christian. Only then do we know true freedom and enjoy the blessings of the free. So don’t criticize the fruitless reality from the outside. Quietly take responsibility. Be that man/woman of faith. Something must have gone wrong. So say, “I will labor. I will endure. I will sacrifice. And I will make sure it bears fruit.”
With this heart, we must become people of faith who take responsibility for our society, reality, and family. And we must extend grace for we have received it. We must forgive for we have been forgiven. We must now love for we have been loved. We live in God’s great and amazing patience. So we too should be patient, following God’s heart. And we must bear fruit.
누가복음 13:6~9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죄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해야 할 사랑과 책임을 외면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번영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번영 대신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은 건강을 원합니다. 그러나 건강 대신에 질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모든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나라든, 사회든, 경제든, 개인이든, 우리가 바라는 것과 현실이 다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죄가 원인이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깊은 죄, 생각지도 못한 죄, 문화화되고 체질화되고, 관습화가 되어 죄인 줄도 모르고 벌이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죄 중에 살면서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사회, 나라, 개인, 모두가 다 죄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 20:13~16)
살인하지 말라 하셨으니 살인하지 않아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셨으니 간음하지 않아야 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하셨으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고, 양심이 말합니다. 본인도 잘 압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또 하나의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높은 차원의 윤리이자 생활 규범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도와줘야 할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죄가 되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가 어떻게 될지를 먼저 묻기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높은 차원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0)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보았습니다. 당연히 도와줘야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다가 내가 어떻게 될까?’ 자기에게 어떤 피해가 올지 생각해 보니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거룩한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위하여 올라가는 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반차를 따라 올라가는 중입니다. 모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날, 거룩하고 깨끗하게 올라가야 합니다. 이 불쌍한 사람을 돕다가 만일에 이 자가 죽어 버리면 시체를 만진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시체를 만지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은 이 사람을 돕다가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두 사람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순간,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될지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아직 강도가 잠복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사람을 도와줍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먼저 생각한 이타적인 사람입니다. 자기도 강도 만날 수 있는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도와줘야 할 때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것, 희생해야 할 사람이 희생하지 않는 것이 다 죄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용서와 사랑으로 그 은혜를 다시 흘려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더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이 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천만 불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런 돈을 빚졌는데 갚을 길이 없습니다. 무능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써 보았지만, 갚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러자 돈을 빌려준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저 사람을 이대로 두면 빚진 죄인으로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는 큰마음을 써서 빚진 자를 불러 “자네, 그 빚을 갚기 어려운 것 같은데, 내가 큰마음으로 탕감해 주겠네.”라며 자비를 베풉니다. 빚을 탕감받은 자는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일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는 수차례 감사하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갑니다. 가는 길에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딱 붙들고 돈을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꼭 갚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사정합니다. 그러나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그를 감옥에다 처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사람이 소식을 듣고 섭섭해서 자기가 탕감해 준 자를 불러오게 합니다. “이 사람아, 내가 네게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는데, 만 달란트 탕감받은 기쁨을 가지고 백 데나리온을 탕감할 수 없더냐?” 오늘의 돈으로 환산해 보면 만 달란트는 천만 불이고, 백 데나리온은 이십 불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돈입니다. 만 달란트 탕감받은 감격과 감사가 있다면 백 데나리온은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해야 하고, 사랑받았으니 사랑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옛날에 프린스턴에서 공부했는데, 제가 모르는 분들이 장학금을 보내 주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왔습니다. 지금은 저도 두 사람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두 사람에게 장학금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한테 고맙다고 편지를 합니다. 내가 회답했습니다. “편지할 거 없습니다. 나 또한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은혜받았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용서받았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받았으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은혜를 배반한 죄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 없는 현실을 정죄하기보다, 그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려는 과원지기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과원지기가 수고했으니, 당연히 열매를 맺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무화과나무에는 3년이라는 유예기간이 있었습니다.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계속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제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눅 13:7)
주인은 “어찌하여 땅만 버리겠느냐?” 하며 열매가 없는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과원지기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눅 13:8)
“주인이여, 열매가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무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과원지기인 내게 잘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1년 동안 더 수고하겠습니다. 거름과 물을 주고 가꾸어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다시 1년 동안 내가 수고하겠습니다. 그러니 참아 주세요.” 이 말이 무엇입니까? 열매 없는 책임을 직접 지겠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책임은 나무가 지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가 ‘열매 없는 책임’을 직접 지려는 마음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제 사무실을 찾아오셨습니다. 가정 안에서 깊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계셨고,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 놓으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그 상황이 있기 직전에 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으셨습니까?” 그러자 아주머니도 잠시 생각하시더니, 자신도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서로를 더욱 자극하는 말을 했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저도 참 말을 심하게 했네요” 하며 멋쩍게 웃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상처와 억울함만 먼저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런 문제 속에서는 때로 나 역시 누군가를 힘들게 만드는 말과 태도를 보였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모든 문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도 함께 돌아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영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뒤, 초등학교 선생님인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던 긴 편지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집사님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자녀가 강아지와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강아지에게 거친 말을 내뱉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하고 물었는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디에서 배우는 것일까요? 아이들의 태도와 행동은 누구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일까요? 우리는 쉽게 책임을 남에게 돌리려 합니다. 아닙니다.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화내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모든 일에 나의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은 책임지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이 잘못되더라도 그것이 나의 책임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14년 동안 목회했을 때, 다섯 자녀를 잘 키운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 다섯 중 셋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자녀를 훌륭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부러워하며 권사님을 붙들고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기에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고 신앙도 좋은지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저는 소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저는 공부를 많이 해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만 봐도 참 고마웠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기보다, 옆에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할 때 곁에서 뜨개질도 하고, 목마를까 봐 물도 떠다 주고, 편안히 공부할 수 있도록 지켜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잘 크고 공부도 잘한 걸 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 아이들을 누가 키운 것입니까? 우리는 종종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말하면서, 공부할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혼자서만 공부할 환경을 만들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할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또 어떤 가정을 보니,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참 잘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양육했는지 들어보니 아주 간단했습니다. 아이들은 장난이 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때로는 꾸중도 하고 잔소리도 하며 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특별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주일에는 절대로 때리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주일에는 행복해했습니다. 주일은 마음껏 떠들어도 꾸중을 듣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좋은 날, 교회 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길러 갔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과원지기처럼 사랑의 마음으로 책임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과원지기는 깨끗한 마음으로 책임을 지려 합니다. 주인은 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나무의 잘못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모름지기 다음 해에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습니다. 하나는 병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적인 것입니다. 생리적인 것은 날 때부터 병자인 것입니다. 그것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리적인 것은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삶의 병든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모든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결과로 인한 것, 즉 병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원지기처럼 책임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지고 말하고, 책임지고 생각하고, 책임지고 행동하며 대신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해야 자유한 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열매 없는 현실을 비판하지 말고, 조용히 책임을 지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딘가에 잘못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내가 수고하겠습니다. 내가 참겠습니다. 내가 희생하겠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으로 사회와 현실, 가족에 대해 항상 책임지는 신앙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받은 우리가 책임을 집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니 베풉시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합시다.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인내 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받고 이제 우리가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한 과원지기의 믿음” (눅13:6~9)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9, 582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내 주변의 어떤 문제나 상황에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죄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다른 죄를 말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지나쳤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돕다가 내게 어떤 손해가 올까를 먼저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저 사람을 돕지 않으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지 않았기에 결국 살인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한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용서받았으면 용서해야 하고, 사랑받았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의 열매를 맺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늘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찍어버리라고 명했습니다. 당연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과원지기가 나섭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이것이 과원지기의 믿음입니다. 주인은 이 나무에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달랐습니다. 열매 없는 책임이 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책임지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내가 한 번 더 수고하겠습니다. 내가 희생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테레사 수녀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한 일은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의 말을 옆에서 들어준 것뿐입니다.” 비판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내가 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것이 과원지기의 믿음입니다.
자녀의 문제, 이웃의 문제, 이 나라의 문제 앞에서 비판하고 책망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지는 않은가? 과원지기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 제가 한 번 더 수고하겠습니다.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열매를 기다리겠습니다.” 책임 있는 신앙, 책임 있는 기도,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할 것입니다.
<나누기>
1.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다”는 과원지기의 마음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나누어 봅시다.
2. 지금 내 삶에서 책임지고 한 번 더 수고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열매 없는 현실 앞에서 남을 비판하고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과원지기처럼 그 책임을 내가 지고 한 번 더 수고하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제가 수고하겠습니다.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