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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날, 고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부활의 환호로 설교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말로 화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바로 이 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속한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절망 속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거짓과 술수, 불의와 폭력,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을 당하며 절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은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우리를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만들고, 고난과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살아갈 용기를 줍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쇠해지고 병들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것으로 끝이라고 이해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인생의 삶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살다가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고 다르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부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세례와 입교를 받으신 분들은 이 부활의 신앙을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부활절 아침, 우리가 부활절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는 부활을 증명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부활에 대해서 설득할 이유를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부활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긴 말씀으로 부활을 증명하거나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보여 주셨던 행적 하나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부활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가지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로 사람들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을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장사되신 지 사흘째 되던 날,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마가복음은 이렇게 세 사람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향유가 들려 있었고 죽으신 예수님의 몸에 발라 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덤을 덮고 있었던 돌을 어떻게 치울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아무도 돌을 굴려 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터인데’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올라갔죠. 그런데 이미 그 큰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에는 비어 있는 예수님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무덤에서 만난 흰옷을 입은 한 청년, 마태복음은 천사라고 칭하는 청년은 여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막 16:6~7)
이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에 예수님은 이미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말씀하셨던 대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셨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지내시던 중에 자신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때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셨던 바가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시는 것입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효과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기를 원하셨다면, 예수님은 바로 무덤 앞에 앉아 계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살아나신 모습 그대로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못과 창 자국을 보여 주셔야 했겠죠. 로마 병정들이 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셨다면 세상은 발칵 뒤집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 사건을 가장 명료하게 효과적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셨더라면,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는 것보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가야바의 법정이나 성전 앞 또는 빌라도의 궁전 앞에 서서 자신의 못 자국을 보여 주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놀라며 부활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십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갈릴리로 향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도 그늘진 땅을 찾아 나서십니다.>
우선 갈릴리라고 하는 곳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갈릴리는 갈릴리 호수 주변의 지역을 칭하는 명칭입니다. 혹은 긴네렛(민 34:11), 게네사렛(눅 5:1), 디베랴(요 6:1, 21:1)라는 표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역에서 정착할 때, 아셀과 납달리가 유업으로 받았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솔로몬 왕이 히람 왕에게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갈릴리 지역의 성읍 20개를 선물로 주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로 이 갈릴리 지역에는 이방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후에, 앗수르는 그곳의 유대인들을 다른 지역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그리고 갈릴리에는 페니키아인들과 같은 외부인들이 사는 마을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시간이 지나서 유대인들이 하나둘 들어와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고 이주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사는 마을이 형성되고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 갈릴리와 관련된 이런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 9:1~2)
갈릴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순결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땅도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와 더불어서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 배척받는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통성도 유지할 수 없는 땅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처럼 그 땅 갈릴리는 고통과 멸시당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땅이고 그늘진 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자라나셨고 공적인 생애를 이루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자라시고 사역을 하심으로 이방의 땅 갈릴리는 영화롭게 됩니다. 그늘진 땅이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머무셨던 이유는 버려진 땅, 척박했던 땅, 그늘과 같은 그 땅을 빛으로 만들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고 나병 환자들과 중풍병자들,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열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야이로의 딸과 혈류증을 앓던 여인도 고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던 장소도 갈릴리의 어느 들판이었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도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그늘진 땅에서 신음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그러셨던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그들을 찾아 갈릴리로 나서십니다. 왜 갈릴리입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부활하신 후에도 주님은 결코 달라지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내가 부활했으니까 권위를 얻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정벌하거나 로마로 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군주들을 멸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겸손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셨던 그 자리로 예수님은 다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그리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의 영광이나 어떤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을 여전히 갈릴리로 부르셔서 거기서부터 예수님처럼 다시 살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 있는 땅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진정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거에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낫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병에서 나음을 얻었고 고통과 절망에서 헤어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으로 다시 가십니다. 그들을 살리시고 고쳐 주셨던 그곳에 가셔서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갈릴리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두 번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긍휼과 자비보다 더 큰 선물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십니다. 바로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고통, 죽음에서 해방되었음을 그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과거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면서 그들의 삶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셨고, 삶을 조금 더 편하게 해 주시며 새로운 힘을 얻기까지 도와주셨죠.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오심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진정 보여 주고자 하셨던 것은 영생의 소망과 기쁨,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보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언젠가 너의 병을 고쳐 주었고 귀신을 쫓아내어 주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내가 이전에 주었던 것은 잠시 이 세상을 위하는 것일 뿐이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주고자 한다.” 바로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향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한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기 위함이었지요.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은 실패하고 갈릴리로 돌아간 베드로와 다른 여러 제자들을 다시 부르십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다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르시며 사랑의 고백을 다시 세 번 하게 하시고, “내 양을 치라”는 새로운 소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라고 불러 주셨던 첫 번째 부르심 이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나의 부활을 증언하라”고 제자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복음을 전파하라”는 새로운 소명를 주십니다. 능력으로 다시 살리시며 부활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초청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내가 주님의 은혜를 입고 병 고침과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그 자리, 처음 소명을 받았던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가 귀하고 크지만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선물이 있음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부활과 영생이라는 이 선물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거나 외로움에서 벗어날 때가 있죠.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나는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 그도 역시 또 다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죠. 예수님께서 때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 가지 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의 선물’이요, ‘부활의 소망’입니다. 죽어도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죽어서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내가 너와 만났던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그리고 그 자리에서 너희가 부활한 나를 다시 보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그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갈릴리로 함께 달려가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Let’s Meet in Galilee
Mark 16:1-8
Jesus has risen. He has truly risen.
At the heart of the Christian faith is resurrection. If Christ was not raised from the dead, our faith would be futile. (1 Corinthians15:17) If only for this life we have hope in Christ, we are of all people most to be pitied. (1 Corinthians 15:19)
The news of Jesus’resurrection has become a ray of hope to the world in hopelessness. It has become hope for those trapped by a fear of death, those groaning, and those despairing under deceit, schemes, unrighteousness, and violence.
The news of Christ’s resurrection, therefore, makes us bold even before death and gives us hope to live even in suffering and despair. His resurrection opens up a new path of life for man.
Contrary to the general notion that man’s life ends upon death after he has been born and has lived his life, our Lord shows us that man’s life continues through resurrection, even after death. Therefore, His resurrectionleads us to hope for the eternal kingdom beyond death.
Furthermore, His resurrection shows us that the truth lives and shines forever, even if all kinds of evil, unrighteousness, violence, and deceit exist in the world and seem to destroy justice and truth.
Therefore, our faith in resurrection, that is, a “resurrection faith,” makes us confident even before death and allows us to endure and to hope even in times of injustice.
Those who have receivedbaptism and confirmation today are accepting this resurrection faith as their faith. You are professing your belief in the fact that death is not the end and that there will surely be a resurrection; deciding to live with that faith in this world; and resolving to live with the faith that the truth will ultimately prevail.
Early in the morning of the third day of Jesus’ burial, some went to His grave: Mary Magdelene,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alome… They were carrying spices to anoint Jesus’ body. All they were thinking was this:
“Who will roll the stone away from the entrance of the tomb?”(Mark 16:3)
All that these women wanted was that someone would roll away the stone from Jesus’ grave—because they wanted to apply spices on His dead body.
To their surprise, however, the stone had already been removed—for adifferent reason. The man in a white robe at the tomb said to them:
“‘Don’t be alarmed,’ he said. ‘You are looking for Jesus the Nazarene, who was crucified. He has risen! He is not here. See the place where they laid him. But go, tell his disciples and Peter, He is going ahead of you in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just as he told you.’”(Mark 16:6-7)
When the women arrived at the tomb, Jesus was not there. The angel instead tells them Jesus has gone into Galilee, just as He said he would. Before the Passion, Jesus told His disciples beforehand what would happen to Him, including His plans to go into Galilee ahead of them:
“‘You will all fall away,’ Jesus told them, ‘for it is written: I will strike the shepherd, and the sheep will be scattered. But after I have risen, I will go ahead of you into Galilee.’”(Mark 14:27-28)
True to His word, He went to Galilee after He was raised.
Then why did Jesus want to go to Galilee after His resurrection?
If He wanted to prove His resurrection, it would have been more effective to meet the disciples at the empty grave, the very site of His death. Moreover, He would have done a proper job of turning the world on its head if He had shown Himself to the Roman soldiers who came to the grave to check on the news that the stone had been rolled away.
If Jesus had been thinking of the most effective andsurest way to promoteHis resurrection to the world, it would have been most appropriate to appear to people inside the grave or at its entrance, showing them His nail-pierced hands and wounds on His side. Or, what if He had gone to Pilate’s palace? Or to a gathering of Pharisees or to the house of the chief priest?
But our Lord made an unusual choice. He said He would go into Galilee. Why did our risen Lord go there?
First let’s consider the significance of Galilee as a region in the Bible. “Galilee” is the geographical name that normally refers to the region in and around the Sea of Galilee. The Sea of Galilee is also called Kinnereth (Numbers 34:11), Lake Kinnereth (Luke 5:1), or Lake Tiberias (John 6:1, 21:1)in the Bible.
According to the Old Testament, the region of Galilee was allotted to Asher and Naphtali when the Israelites settled in Canaan. But it is recorded that Solomon later gave 20 cities of Galilee to King Hiram for helping him build the Temple and his palace.
Later, after Assyria defeated the Kingdom of Israel, Assyria exiled the Jews living in Galilee to another region. Since then, Galilee wasinhabited by outsiders such as Phoenicians. After a long time, the Jews came to live there again, making it a region where Jews and foreigners mixed naturally. Accordingly, the Bible categorizesGalilee as a “foreign land.”
The Book of Isaiah writes this prophecy:
“Nevertheless, there will be no more gloom for those who were in distress. In the past he humbled the land of Zebulun and the land of Naphtali, but in the future he will honor Galilee of the Gentiles, by the way of the sea, along the Jordan-The people walking in darkness have seen a great light; on those living in the land of the shadow of death a light has dawned.”(Isaiah 9:1-2)
In a word, Galilee was not a pure land. Neither was it a geographical center of Israel. Galilee, along with Samaria, was a region scorned by the Jews, a land with no legitimacy. As Isaiah prophesied, it was a place inhabited by the suffering and the scorned.
But Jesus not only grew up there, but most of His public ministry took place there. As the place of Jesus’ childhood and ministry, Galilee of the Gentiles was glorified; light shone upon the land of the shadow of death. This is why Jesus did His ministry there.
It was in Galilee that He called Hisdisciples; healed lepers, paralytics, and a man with a shriveled hand;appointed the Twelve; and healed Jairus’ daughter and the woman who had an issue of blood for 12 years. It was also in a field somewhere in Galilee that He fed the five thousand; and he calmed the Sea of Galilee.
Like a beacon of light shining uponpeople suffering in a land of darkness, Jesus drew near to the people of Galilee and solved their problems.
What is more, our Lord returns to them even after being raisedfrom the dead. He says He will go into Galilee. Why Galilee? It is because our Lord seeks to draw near to the suffering, to those living in the shadows, and to a land of pain. This was no different even after His resurrection. Jesus is unchanging.
Our risen Lord didn’t go knocking on the doors of the Pharisees in Jerusalem with a knife in His hand to get His revenge. Neither did He visit the homes of the people who mocked Him to show them His nail-pierced hands and feet. It seems He did not feel the need to prove His resurrection. He returned to the land of shadows, as He had always done.
He again raised up the suffering, touchedpeople in pain, and healed the sick. Our risen Lord carried on His work in that very place He had first given them hope.
But now, He does not merelylead them out of pain, sickness, and despair. Through His resurrection, He proclaims that they have been set free from eternal pain and death.
He does not merely lengthen their lives a little, but shows them eternal life and gifts it to them.
As our Lord goes into Galilee, He tells His disciples to come there. What is Galilee to the disciples? It is where Jesus first called them.
In John 21 Jesus calls Peter again, who had failed Him andreturned to Galilee. It is at Lake Tiberias, another name for the Sea of Galilee, that Jesus calls him. Jesus makes Peter confess his love for Him three times, just as he had denied Him thrice. Then our Lord gives him a new calling: “Feed my sheep.”
Galilee, therefore, continues to be the place of our Lord’s calling. It was so at thebeginning, and continues to be, even after His resurrection. It continues to be the place of Jesus’compassion and miracles. It was so at first, and continues to be, even after His resurrection.
We cannot meet our risen Lord at His empty grave. We cannot have a true encounter with our risen Lord by studying the components of the stone that was rolled away or His holy shrouds.
Our risen Lord says, “Let’s meet in Galilee.”
We have to meet our risen Lord again at the very place where we received His grace, where we were healed,where we prayed in earnest,where our prayers were answered, and where we first received our calling.
Our risen Lord does not just solve our small problems, lengthensour life a little, and heals our sicknesses. He is our resurrected Lord who gives us eternal life, who gives us hope beyond death, who judges and rectifies all injustice, deceit, and evil. We must meet the risen Lord again.
Therefore, our risen Lord tells us not to stay at the empty grave. He tells us to go to Galilee instead. We can never encounterour risen Lord at the empty grave. We will meet Him in Galilee, on the way to Galilee.
Let’s return to that place. Our risen Lord stands waiting there. On this Easter Sunday, let us all go into Galilee.
마가복음 16:1~8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날, 고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부활의 환호로 설교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말로 화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바로 이 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속한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절망 속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거짓과 술수, 불의와 폭력,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을 당하며 절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은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우리를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만들고, 고난과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살아갈 용기를 줍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쇠해지고 병들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것으로 끝이라고 이해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인생의 삶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살다가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고 다르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부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세례와 입교를 받으신 분들은 이 부활의 신앙을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부활절 아침, 우리가 부활절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는 부활을 증명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부활에 대해서 설득할 이유를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부활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긴 말씀으로 부활을 증명하거나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보여 주셨던 행적 하나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부활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가지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로 사람들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을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장사되신 지 사흘째 되던 날,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마가복음은 이렇게 세 사람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향유가 들려 있었고 죽으신 예수님의 몸에 발라 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덤을 덮고 있었던 돌을 어떻게 치울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아무도 돌을 굴려 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터인데’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올라갔죠. 그런데 이미 그 큰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에는 비어 있는 예수님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무덤에서 만난 흰옷을 입은 한 청년, 마태복음은 천사라고 칭하는 청년은 여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막 16:6~7)
이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에 예수님은 이미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말씀하셨던 대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셨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지내시던 중에 자신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때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셨던 바가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시는 것입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효과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기를 원하셨다면, 예수님은 바로 무덤 앞에 앉아 계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살아나신 모습 그대로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못과 창 자국을 보여 주셔야 했겠죠. 로마 병정들이 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셨다면 세상은 발칵 뒤집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 사건을 가장 명료하게 효과적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셨더라면,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는 것보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가야바의 법정이나 성전 앞 또는 빌라도의 궁전 앞에 서서 자신의 못 자국을 보여 주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놀라며 부활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십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갈릴리로 향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도 그늘진 땅을 찾아 나서십니다.>
우선 갈릴리라고 하는 곳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갈릴리는 갈릴리 호수 주변의 지역을 칭하는 명칭입니다. 혹은 긴네렛(민 34:11), 게네사렛(눅 5:1), 디베랴(요 6:1, 21:1)라는 표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역에서 정착할 때, 아셀과 납달리가 유업으로 받았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솔로몬 왕이 히람 왕에게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갈릴리 지역의 성읍 20개를 선물로 주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로 이 갈릴리 지역에는 이방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후에, 앗수르는 그곳의 유대인들을 다른 지역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그리고 갈릴리에는 페니키아인들과 같은 외부인들이 사는 마을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시간이 지나서 유대인들이 하나둘 들어와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고 이주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사는 마을이 형성되고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 갈릴리와 관련된 이런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 9:1~2)
갈릴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순결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땅도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와 더불어서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 배척받는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통성도 유지할 수 없는 땅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처럼 그 땅 갈릴리는 고통과 멸시당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땅이고 그늘진 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자라나셨고 공적인 생애를 이루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자라시고 사역을 하심으로 이방의 땅 갈릴리는 영화롭게 됩니다. 그늘진 땅이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머무셨던 이유는 버려진 땅, 척박했던 땅, 그늘과 같은 그 땅을 빛으로 만들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고 나병 환자들과 중풍병자들,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열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야이로의 딸과 혈류증을 앓던 여인도 고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던 장소도 갈릴리의 어느 들판이었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도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그늘진 땅에서 신음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그러셨던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그들을 찾아 갈릴리로 나서십니다. 왜 갈릴리입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부활하신 후에도 주님은 결코 달라지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내가 부활했으니까 권위를 얻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정벌하거나 로마로 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군주들을 멸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겸손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셨던 그 자리로 예수님은 다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그리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의 영광이나 어떤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을 여전히 갈릴리로 부르셔서 거기서부터 예수님처럼 다시 살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 있는 땅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진정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거에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낫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병에서 나음을 얻었고 고통과 절망에서 헤어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으로 다시 가십니다. 그들을 살리시고 고쳐 주셨던 그곳에 가셔서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갈릴리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두 번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긍휼과 자비보다 더 큰 선물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십니다. 바로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고통, 죽음에서 해방되었음을 그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과거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면서 그들의 삶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셨고, 삶을 조금 더 편하게 해 주시며 새로운 힘을 얻기까지 도와주셨죠.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오심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진정 보여 주고자 하셨던 것은 영생의 소망과 기쁨,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보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언젠가 너의 병을 고쳐 주었고 귀신을 쫓아내어 주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내가 이전에 주었던 것은 잠시 이 세상을 위하는 것일 뿐이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주고자 한다.” 바로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향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한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기 위함이었지요.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은 실패하고 갈릴리로 돌아간 베드로와 다른 여러 제자들을 다시 부르십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다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르시며 사랑의 고백을 다시 세 번 하게 하시고, “내 양을 치라”는 새로운 소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라고 불러 주셨던 첫 번째 부르심 이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나의 부활을 증언하라”고 제자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복음을 전파하라”는 새로운 소명를 주십니다. 능력으로 다시 살리시며 부활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초청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내가 주님의 은혜를 입고 병 고침과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그 자리, 처음 소명을 받았던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가 귀하고 크지만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선물이 있음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부활과 영생이라는 이 선물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거나 외로움에서 벗어날 때가 있죠.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나는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 그도 역시 또 다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죠. 예수님께서 때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 가지 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의 선물’이요, ‘부활의 소망’입니다. 죽어도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죽어서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내가 너와 만났던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그리고 그 자리에서 너희가 부활한 나를 다시 보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그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갈릴리로 함께 달려가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3월 31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갈릴리에서 만나자” (막 16장 1~8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59장, 165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막 16장 1~8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3월 3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요약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지 사흘째 되던 날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올라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단지 무덤의 돌문을 누군가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 하지만 예수님은 그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그가 말씀하셨던 대로, 갈릴리로 가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셨는데, 그 때 갈릴리로 가실 계획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사건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방법을 생각하셨다면 다른 방법을 택하셔야 했습니다. 돌이 굴려진 그 무덤 안이나 혹은 바로 그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시며, 그들에게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는 것이 가장 적절하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활하신 후 빌라도의 궁으로 가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선택을 하십니다. 갈릴리로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손마른 사람도 고치시고, 열두제자도 세우시고,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곳도 갈릴리의 어느 들판이었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도 갈릴리의 호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늘진 땅 갈릴리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춰 주시듯이 그렇게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를 입었던 바로 그 자리, 병 고침을 받았던 그 자리, 간절히 기도하고 응답받았던 그 자리, 처음 소명을 받았던 그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에서는 결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갈릴리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 모두 갈릴리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간의 삶의 여정을 새롭게 열어 보여 줍니다.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 우리가 주님께 은혜를 입었던 자리, 병 고침을 받았던 자리, 기도 응답을 받았던 자리가 어디인가요? 처음 소명을 받았던 그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주님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를 찬양합니다. 거룩한 부활의 날,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빈 무덤에 머물지 말고, 갈릴리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던 그 자리, 은총을 입었던 바로 그 자리, 소명을 받았던 그 자리로 돌아가, 그 곳에서 진정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