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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로 다양한 사회적 용어와 개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배당 밖은 완연한 봄입니다. 교회 주차장에 차는 없지만, 그곳이 어린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뛰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오늘도 각자의 위치에서 성령님과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계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과분한 선물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또 자녀와 부모 사이에 이런 고백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 저는 여러분과 ‘거룩한 거리 두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란 말이 회자가 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리 두기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익숙한 것에서 거리를 두는 것, 두 번째는 악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세 번째는 불안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불안에서 시작되는 힘든 노동과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쉼과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거리를 두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보니, 여기저기에서 “다른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특별히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보다는 ‘물리적 거리 두기’라고 표현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표현이 자칫 ‘사회적으로 연대하고 사랑을 나누며 서로 연결되는 모든 것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라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물리적인 거리를 두지만, 사회적으로는 연대하고 사랑하며 연결된다는 뜻에서 ‘물리적 거리 두기’라는 용어를 쓰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최근 스탠퍼드대학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 혹은 물리적 거리 두기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며 또 다른 표현을 사용했는데, 바로 ‘떨어져서 친목하기’입니다. 즉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인 생활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며, ‘Social Distancing’이란 말 대신 ‘Distant Socializing’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현재 외국에서는 각자 격리된 공간에서 일하고 운동하고 밥을 먹으며 지내고 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심심하고 힘드니까 나름의 방식으로 socializing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상으로 연결해 서로 같은 시간에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서로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고 합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다양한 연구와 시도가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도 가까워질 수 있을지, 심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리 두기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반대의 관점에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까워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지, 또 어떤 방식으로 가까워져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우리가 가까워져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다양한 대답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토론하셔도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가 가까이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아마 서로 이야기를 나누셨을 것 같은데, 그 모든 대답을 포함하는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 내용ㅇㄹ 전하고 있습니다. 시편 73편 말씀입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7~28)
예배자는 본 시편을 읽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나에게 복이다.” 이 사실을 예배자는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야고보서 4:8 중)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까이하는 것,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자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합니다. 신앙인들의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인간과 끊임없이 가까워지기를 원하시며, 이미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아담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가까이에서 아담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배필도 지어 주셨습니다. 그토록 아담을 자상하게 살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
한편 인간과 하나님이 멀어지게 된 데는 인간의 죄악이 존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아담과 하와, 즉 인간과 함께 거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본래 계획을 놓을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계획이 인간의 죄악으로 좌절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늘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셨고,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가까이 오심의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습니다.
저 멀고 먼 곳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도저히 그분을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세계이지만 이 세계 안으로 직접 들어오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도저히 담길 수 없는 인간이란 그릇에, 이 세계에 담기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와 계시는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오신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문 앞까지 와 계심을 성경은 알려 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멀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찾아오시며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성육신까지 하시어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문밖에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문, 그 한 뼘의 거리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와 계십니다. 이미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가까운 이 거리는 우리로부터 시작된 게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몇백억, 몇천억 광년의 거리를 달려오셨습니다. 숫자로도 셀 수 없는 거리를 달려오신 것입니다. 부피로도 담을 수 없는 예수님이 이 지구 안으로, 인간의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손해를 봐야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엄청난 고행을 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길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조금 전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우리 곁에 가까이 와 계십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이 성령님을 통해 가까이 와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사다리를 올려놓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들 우리가 얼마나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사다리를 놓고 올라간들 얼마나 올라갈 수 있으며, 로켓을 타고 올라간들 얼마나 많은 거리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몇백억 광년을 우리가 갈 수나 있을까요? 우리는 도저히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 낯선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가까이 와 계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가 늘 가까이 계시는 그 주님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 장소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 장소는 바로 ‘낯선 곳’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익숙한 곳으로부터 떠나길 원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익숙한 곳으로부터 떠나 낯선 곳으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낯선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 바로 앞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익숙한 것들, 편안한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 이르면, 우리의 눈이 달라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나를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나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나를 주시하고 계시는, 나에게 달려오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그 사실을 잘 알려 줍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어머니 리브가와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향합니다.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떠난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길 떠나다 돌 하나를 베개 삼아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야곱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집에 있기를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외딴곳에 있습니다. 벌판과 같은 광야에서, 두려움에 떨며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누워 있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낯선 곳이었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꿈을 꿉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봅니다. 그는 그곳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세기 28:16)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시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이곳에만 계셨다가 이곳에서 야곱을 만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태어난 순간부터 야곱이 자라는 모든 과정에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단지 야곱이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광야, 이 낯선 곳에서 그가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여기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 눈이 열려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미 가까이 계셨던 하나님을 이제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는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낯선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환경도 그렇고, 교육 환경도 그렇고, 예배드리는 환경도 그렇습니다. 친교와 사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낯선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경제 문제, 사업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저 잘 돌아가던 기업들, 가게들, 안정된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낯선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당황스럽고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낯선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낯선 현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이 낯선 곳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낯선 곳을 직면하고 마주 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낯선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익숙한 곳에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하나님이 더욱 선명히 드러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던 장면은 조금 더 진전된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그저 광야였습니다. 그곳에서 쳇바퀴 돌듯이 양들을 먹이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 광야 길에서 어느 날, 그가 낯선 광경을 마주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처음으로 보는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낯선 곳을 향해 다가갑니다. 그때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 낯선 곳, 불붙는 떨기나무 아래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끌어당기고 계십니다. 낯선 곳으로 끌어당기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서 있으라.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낯선 곳을 향해 갈 때도 낯선 곳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낯선 곳은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낯선 곳이 궁극적 목적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온 모세에게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낯선 광경입니다. 낯선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낯선 명령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뜻깊게 느껴집니다. 불붙는 떨기나무 아래서 모세가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는 신을 벗습니다. 맨발로 땅에 서는 순간, 하나님의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땅을 타고, 바람을 타고 모세의 발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뜨거운 땅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열기로, 또 몸으로 체험했을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광경에서, 낯선 요구 아래에서 모세는 낯선 경험을 합니다. 바로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광야에서 신발을 벗어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신발을 벗었고, 뜨거운 열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낯선 현실이 펼쳐지고 있으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 안에 안주하려고 하지도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 낯선 광경을 마주할 때, 낯선 현실이 우리 앞에 다가올 때, 도리어 그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 나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 예수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뢰한다는 뜻입니다. >
그렇다면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우리 앞까지 와 계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중)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중)
죄로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보혈로 가깝게 당겨 놓으신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해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로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께로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들고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선행을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까? 전도를 많이 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까? 예배 출석을 정규적으로 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까? 헌금하거나 사회에 공헌하거나 목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거나 권사가 되거나 직분자가 됨으로써,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을 수 있지만,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의 직접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께 나의 문을 연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던 내용과 연관되는 내용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거리를 두자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삶 속에는 불안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관점에서 본다면, 애굽의 파라오의 질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아니 우리 안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동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불안을 종식할 수는 없습니다.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불안 때문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요, 주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힘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놓을 때,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언제쯤 예배당 문이 열려 온 교우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을까?’라고 많은 분이 질문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조바심이 나고, ‘어느 날 열 수 있을까? 언제쯤 열어야 우리 교인들이 안전하게 모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그 날까지 기다려 보자. 모든 것이 안정될 수 있을 만한 날, 모두가 기쁨으로 올 수 있는 날까지 기다리자. 기도하자. 그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기다려 보자. 기도해 보자.’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하려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길 기다리는 그 기다림, 기도로써 기다리는 것, 그것이 진정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낯선 시간에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바꾸고,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기도로써, 기다림으로써 우리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삶을 통해 우리 안에 충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Toward Holiness
Psalms 73:23-28
Spring has come. I see children riding their bikes in our churchyard. I miss you all and wish to see youin person soon, but I also know that you will be worshipping beautifully in each of your homes in holiness.
I talked about “holy distancing” last week. As we practice “social distancing” theses days, I said “holy distancing” is what we need. I am encouraged by news that many of you arepracticing it these days.
Meanwhile, WHO has advised people to use the term “physical distancing” instead of “social distancing,” which seems to be a very sound piece of advice.The change was proposeddue to concerns that “social distancing”may denote “social isolation.”Now is a time when social coalition is vital. To stop the spread of the virus physical distance is needed, but we must not forget the importance of connecting, helpingothers, and uniting.
Stanford University proposed using “distant socializing” instead of “social distancing.” It means we must build even closer relationships while we are physically apart. From this perspective, we might call our present form of worship “distant worshipping.”
Last week, I asked the question “What must we distance ourselves from in terms of faith?” Today, Iask the complete opposite one: “What must we draw near to?”
You probably immediately thought of this answer: God. Yes. God wants us to draw near to Him:
“Those who are far from you will perish;you destroy all who are unfaithful to you.But as for me, it is good to be near God.I have made the Sovereign Lordmy refuge;I will tell of all your deeds.” (Psalms 73:27-28)
“Come near to God and he will come near to you. Wash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 (James 4:8)
The Bible continuously commands us to draw near to God. From the very beginning, God was with us. He wanted to be near us. God visited us continuously to be near us. But it was man’s sin that drove him away from God. After eating the frui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Adam and Eve were expelled from the Garden of Eden. God’s will to enjoy a close relationship with man and live with him forever was frustrated by man’s sin.
Still, God seeks us. He visits us. He calls us. He descended from heaven to meet us. And He listens to our prayers.
The apex of God’s drawing near is incarnation. Christ became man, suffered, and died. Incarnation is the very proof that God is with us. God stands at our door knocking. The Lord is truly near:
“Here I am!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one hears my voice and opens the door, I will come in and eat with that person, and they with me.” (Revelation 3: 20)
This closeness between us and God is not the result of our efforts but His drawing near. God traveled thousands of light years, a distance words fail to express, to narrow the gap between Him and us. And now He stands knocking at our door.
We do not have to make enormous sacrifices to draw near to Him. Tremendous effort is not required, either. We don’t have to give up everything for this closeness. He is already so near that all we have to do is hold out our hand.
God in heaven came to earth in the form of man, Jesus Christ, and died on the cross for us. He was then raised. After His resurrection, God sent us His Spirit to dwell among us. Therefore, God is near.
Then how can we draw near to our God who is already so near?
First, it is in the “unfamiliar place” that we experience His presence. This is related to last week’s sermon on distancing yourself from the familiar.
In a familiar place, it is hard to meet the Lord who knocks at our door. It is because we are surrounded by comfortable things that give us stability. But when we reach an unfamiliar place, we discover God and hear Him calling.
Jacob’s life is a good example. After running away from home, he finds a stone to rest his head on. Miserable and alone, he is no longer in his familiar surroundings. He, who liked to stay home and cook, is now in the dark wilderness—an utterly unfamiliar place.
But, there, he has a dream. He sees angels ascending and descending a ladderreaching heaven. This is his confession: “When Jacob awoke from his sleep, he thought, ‘Surely the Lordis in this place, and I was not aware of it.’” (Genesis 28:16)God was always with Jacob. But, in that unfamiliar place, Jacob drew near to Him.
Dear brothers and sisters, we are now experiencing an unprecedented, unfamiliar reality—at home, at school, at church, and in relationships. Most of all, the economy and businesses are going through unprecedented times. We are truly in a foreign place. But we must confront this unfamiliar reality. Because God is in the unfamiliar. Now is the time to meet God. This unfamiliar place is the very place to meet Him.
Moses also encountered God in an unfamiliar place. After fleeing Egypt, Moses lived in the desert for 40 yearstending sheep. It was the same old same old. But one day he spots an uncanny sight: a burning bush that didn’t burn up. Seeing this unfamiliar sight, he walks toward it. There, God calls. There, in that unfamiliar place, under the burning bush, Moses meets God:
“‘Do not come any closer,’ God said. ‘Take off your sandals, for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 ground.’” (Exodus 3: 5)
How precious these words are! The unfamiliar place is not our destination, but a pathway that leads us to God. God forbids Moses to come any closer and tells him to take off his sandals. This is a meaningful command. Mosesfollows it.Barefoot, he would haveexperiencedGod’s presence with his whole body, as even his soles felt the heat radiating from the tree.
Therefore, brothers and sisters, do not be afraid of the unfamiliar surroundings that lie ahead of you. Do not become complacent, either. I pray that you will meet our Lord who is already near us, knocking at our door and calling our name in the unfamiliar. God desires to draw near us.
Then who is our God that we encounter in this unfamiliar place? How can we describe Him? When God called Moses, He said, “And now the cry of the Israelites has reached me, and I have seen the way the Egyptians are oppressing them. So now, go. I am sending you to Pharaoh to bring my people the Israelites out of Egypt.” (Exodus 3:9-10)
The God who called Moses under an uncanny burning bush is a God of deliverance and freedom. He is a God who has compassion on His people, a God who saves. When Jesus came to earth, He came to do God’s will like Moses. Although He was without sin, He came to solve our transgressions. He came to save us, slaves to the power of death. Jesus takes us closer to God. Therefore, in the unfamiliar place, we must meet Jesus, the One who became flesh for us.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John 14:6)He also declared,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go hungry, and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John 6: 35)
Dear brothers and sisters, what does it mean to draw near to Jesus? It doesn’t mean to offer Him things. It doesn’t mean to do good deeds,evangelize actively, not miss church, give a large sum of offering, contribute to society, or become a church leader or a pastor.
Drawing near to Him is related to what I said last week. I encouraged you to distance yourself from an anxiety that pervades all areas of life. According to Brueggemann, living in anxiety is to live in Pharaoh’s system. We labor continuously to survive, to get rid of this anxiety. But work will never erase the unease that exists deep within us. It will not give us rest.
Approaching Jesus means to receive Him in our heart. By welcoming Him, we eat and drink with Him and allow Him to guide our heart. Through this, we experience true rest and peace that He creates within us.
We may be rich or poor, healthy or sick. We may hold a high position or a low one. We may be respected or ignored, a prince or a pauper. But none of these can take away the peace He creates within us.
The Bible says:
“Who shall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Shall trouble or hardship or persecution or famine or nakedness or danger or sword? As it is written: ‘For your sake we face death all day long;we are considered as sheep to be slaughtered.’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 (Romans 8:35-39)
Just as the coronavirus affects everyone, God’s grace is given to all without discrimination. His grace is given to all who draw near to Christ and seek holiness. I pray that we will meet the Lord who waits for us in the unfamiliar. I hope that we will receive true peace and rest from Him. Our perfect Lord is more than enough, more than able to give us rest and peace.
시편 73: 23 ~ 28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 코로나19로 다양한 사회적 용어와 개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배당 밖은 완연한 봄입니다. 교회 주차장에 차는 없지만, 그곳이 어린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뛰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오늘도 각자의 위치에서 성령님과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계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과분한 선물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또 자녀와 부모 사이에 이런 고백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 저는 여러분과 ‘거룩한 거리 두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란 말이 회자가 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리 두기란 어떤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익숙한 것에서 거리를 두는 것, 두 번째는 악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세 번째는 불안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불안에서 시작되는 힘든 노동과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쉼과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거리를 두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보니, 여기저기에서 “다른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특별히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보다는 ‘물리적 거리 두기’라고 표현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표현이 자칫 ‘사회적으로 연대하고 사랑을 나누며 서로 연결되는 모든 것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라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물리적인 거리를 두지만, 사회적으로는 연대하고 사랑하며 연결된다는 뜻에서 ‘물리적 거리 두기’라는 용어를 쓰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최근 스탠퍼드대학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 혹은 물리적 거리 두기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며 또 다른 표현을 사용했는데, 바로 ‘떨어져서 친목하기’입니다. 즉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인 생활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며, ‘Social Distancing’이란 말 대신 ‘Distant Socializing’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현재 외국에서는 각자 격리된 공간에서 일하고 운동하고 밥을 먹으며 지내고 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심심하고 힘드니까 나름의 방식으로 socializing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상으로 연결해 서로 같은 시간에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서로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고 합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다양한 연구와 시도가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도 가까워질 수 있을지, 심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리 두기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반대의 관점에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까워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지, 또 어떤 방식으로 가까워져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우리가 가까워져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다양한 대답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토론하셔도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가 가까이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아마 서로 이야기를 나누셨을 것 같은데, 그 모든 대답을 포함하는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 내용ㅇㄹ 전하고 있습니다. 시편 73편 말씀입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7~28)
예배자는 본 시편을 읽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나에게 복이다.” 이 사실을 예배자는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야고보서 4:8 중)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까이하는 것,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자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합니다. 신앙인들의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인간과 끊임없이 가까워지기를 원하시며, 이미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아담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셨다’라는 말씀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가까이에서 아담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배필도 지어 주셨습니다. 그토록 아담을 자상하게 살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
한편 인간과 하나님이 멀어지게 된 데는 인간의 죄악이 존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아담과 하와, 즉 인간과 함께 거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본래 계획을 놓을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계획이 인간의 죄악으로 좌절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늘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셨고,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가까이 오심의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습니다.
저 멀고 먼 곳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도저히 그분을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세계이지만 이 세계 안으로 직접 들어오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도저히 담길 수 없는 인간이란 그릇에, 이 세계에 담기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와 계시는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오신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문 앞까지 와 계심을 성경은 알려 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멀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찾아오시며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성육신까지 하시어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문밖에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문, 그 한 뼘의 거리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와 계십니다. 이미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가까운 이 거리는 우리로부터 시작된 게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몇백억, 몇천억 광년의 거리를 달려오셨습니다. 숫자로도 셀 수 없는 거리를 달려오신 것입니다. 부피로도 담을 수 없는 예수님이 이 지구 안으로, 인간의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손해를 봐야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엄청난 고행을 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길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조금 전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우리 곁에 가까이 와 계십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이 성령님을 통해 가까이 와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사다리를 올려놓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들 우리가 얼마나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사다리를 놓고 올라간들 얼마나 올라갈 수 있으며, 로켓을 타고 올라간들 얼마나 많은 거리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몇백억 광년을 우리가 갈 수나 있을까요? 우리는 도저히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 낯선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가까이 와 계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가 늘 가까이 계시는 그 주님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 장소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 장소는 바로 ‘낯선 곳’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익숙한 곳으로부터 떠나길 원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익숙한 곳으로부터 떠나 낯선 곳으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낯선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 바로 앞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익숙한 것들, 편안한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 이르면, 우리의 눈이 달라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나를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나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나를 주시하고 계시는, 나에게 달려오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그 사실을 잘 알려 줍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어머니 리브가와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향합니다.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떠난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길 떠나다 돌 하나를 베개 삼아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야곱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집에 있기를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외딴곳에 있습니다. 벌판과 같은 광야에서, 두려움에 떨며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누워 있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낯선 곳이었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꿈을 꿉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봅니다. 그는 그곳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세기 28:16)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시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이곳에만 계셨다가 이곳에서 야곱을 만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태어난 순간부터 야곱이 자라는 모든 과정에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단지 야곱이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광야, 이 낯선 곳에서 그가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여기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 눈이 열려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미 가까이 계셨던 하나님을 이제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는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낯선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환경도 그렇고, 교육 환경도 그렇고, 예배드리는 환경도 그렇습니다. 친교와 사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낯선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경제 문제, 사업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저 잘 돌아가던 기업들, 가게들, 안정된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낯선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당황스럽고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낯선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낯선 현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이 낯선 곳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낯선 곳을 직면하고 마주 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낯선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익숙한 곳에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하나님이 더욱 선명히 드러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던 장면은 조금 더 진전된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그저 광야였습니다. 그곳에서 쳇바퀴 돌듯이 양들을 먹이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 광야 길에서 어느 날, 그가 낯선 광경을 마주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처음으로 보는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낯선 곳을 향해 다가갑니다. 그때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 낯선 곳, 불붙는 떨기나무 아래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끌어당기고 계십니다. 낯선 곳으로 끌어당기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서 있으라.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낯선 곳을 향해 갈 때도 낯선 곳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낯선 곳은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낯선 곳이 궁극적 목적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온 모세에게 더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낯선 광경입니다. 낯선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낯선 명령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뜻깊게 느껴집니다. 불붙는 떨기나무 아래서 모세가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는 신을 벗습니다. 맨발로 땅에 서는 순간, 하나님의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땅을 타고, 바람을 타고 모세의 발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뜨거운 땅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열기로, 또 몸으로 체험했을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광경에서, 낯선 요구 아래에서 모세는 낯선 경험을 합니다. 바로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광야에서 신발을 벗어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신발을 벗었고, 뜨거운 열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낯선 현실이 펼쳐지고 있으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 안에 안주하려고 하지도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 낯선 광경을 마주할 때, 낯선 현실이 우리 앞에 다가올 때, 도리어 그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 나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 예수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뢰한다는 뜻입니다. >
그렇다면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우리 앞까지 와 계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중)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중)
죄로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보혈로 가깝게 당겨 놓으신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해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로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께로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들고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선행을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까? 전도를 많이 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까? 예배 출석을 정규적으로 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까? 헌금하거나 사회에 공헌하거나 목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거나 권사가 되거나 직분자가 됨으로써,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을 수 있지만,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의 직접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께 나의 문을 연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던 내용과 연관되는 내용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거리를 두자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삶 속에는 불안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관점에서 본다면, 애굽의 파라오의 질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아니 우리 안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동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불안을 종식할 수는 없습니다.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불안 때문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요, 주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힘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놓을 때,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언제쯤 예배당 문이 열려 온 교우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을까?’라고 많은 분이 질문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조바심이 나고, ‘어느 날 열 수 있을까? 언제쯤 열어야 우리 교인들이 안전하게 모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그 날까지 기다려 보자. 모든 것이 안정될 수 있을 만한 날, 모두가 기쁨으로 올 수 있는 날까지 기다리자. 기도하자. 그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기다려 보자. 기도해 보자.’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하려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길 기다리는 그 기다림, 기도로써 기다리는 것, 그것이 진정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낯선 시간에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바꾸고,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기도로써, 기다림으로써 우리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삶을 통해 우리 안에 충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2020년 3월 2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거룩으로 나아가기” (시 73:23-28)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39장, 43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시 73:23-2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지난주에 우리가 신앙 안에서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익숙한 것, 악, 불안으로부터 거리두기)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하십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7-28).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과 가까이 계셨고, 가까이 계시기를 원하셨고, 또 가까이 계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이 멀어지게 된 것은 인간의 죄악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가까이 머물며 친밀하게 또한 영원히 살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늘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와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까이 나갈 수 있을까요? ‘낯선 곳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익숙한 곳에서는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야곱도, 모세도 낯선 곳에서 그들을 부르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즈음 우리는 우리가 전에는 겪어 보지 못했던, 참으로 낯선 현실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환경도 그렇고, 입시, 수업의 문제, 예배를 드리는 모습, 교육의 문제, 친교와 사귐의 문제, 특히 무엇보다도 경제의 문제, 사업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낯선 곳에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낯선 곳을 직면하고 대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를 이끌었던 하나님도 모세가 직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우리가 낯선 곳으로 가까이 갈 때에 낯선 곳은 목표가 아니라 우리를 이끌어 주는 매개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곳을 목적지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곳을 매개체로 삼아 우리와 더욱 깊이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낯선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낯선 곳을 통해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내 마음 속 깊이 모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분이 나의 마음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낯선 곳을 살아가시는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내가 지금 처한 ‘낯선 곳’은 어디입니까?
2. 가기 싫은 이 ‘낯선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계신가요?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마무리 기도
이미 우리의 문 앞까지 와 계시는 주님,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이 낯설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