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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아도 좋을 본문처럼 보입니다. >
오늘 본문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어려운 본문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자주 실수하는 사람이 오늘 본문을 들고 와서는 “노아도 술에 취해 실수한 적이 있다.”라고 하며 기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 말씀이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은 일반적으로, 또 언뜻 보아서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본문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들어 있는지 도리어 궁금해지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본문의 흐름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사실, 노아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 바로 전인 17절에서 끝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7장과 8장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물로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단행하셨습니다. 이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홍수의 심판이 끝나자 뭍으로 나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이어 9장에 도달하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후손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무지개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멋지게 등장합니다.
이렇게 멋지게 이어지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그만 뒤틀리고 맙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실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노아의 족보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오늘 본문만 뺀다면, 노아의 이야기는 아주 완벽하고 멋진 이야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노아는 그야말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조상이며, 흠 없는 영웅이요, 신비로운 인물로 남았을 것입니다.
내용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에 대한 이미지를 상당히 손상시킵니다. 노아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노아가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새 언약을 맺은 후 한 일이라고는 단 하나,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하체를 드러냈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굳이 이런 사건을 우리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요?
본 사건이 일어난 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홍수 사건 이후에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를 겪을 때의 나이가 600세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가 950세였습니다. 그러니 성경대로라면, 그는 홍수 후에 새로운 땅에서 약 350년을 살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가 350여 년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류의 씨앗으로서 한 일이 성경에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 오늘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이용한 이들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한 사건을 성경은 어떻게 정리하고 있습니까? 노아가 어느 날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이 봅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이 사실을 형제인 셈과 야벳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그의 겉옷을 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부끄러운 하체를 가려드립니다. 노아가 깨어나 모든 사실을 알고는 함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인간이 인간을 향해 내리는 저주입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하며 “함의 자손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될 것이다.”라는 뜻밖의 선언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이 본문이 과연 필요한 본문인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노아가 이만한 일로 아들 함에게 이처럼 큰 저주를 내려도 될까요? 도대체 함이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부모님의 수치를 가려주지 않아서요? 아니면 밖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말했기 때문에요? 그것이 그렇게도 큰 죄입니까? 형제들의 종이 될 만큼 큰 죄악입니까? 이와 같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본문이 빠지면 자연스럽게 노아가 하나님과 무지개 앞에서 약속하는 위대한 장면으로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만약 성경을 편집했거나 기록했다면, 노아가 벌거벗고 잠든 구차한 이야기, 그리고 아들 함을 향해 퍼부은 이해할 수 없는 저주의 내용은 다루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 해석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 본문이 상당 기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본문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과거에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종을 부릴 수 있는 명분을 주는 본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은 흑인과 백인, 황색인종의 구별을 유추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서구인들, 유럽인들은 중세시대를 거치며 저주받은 함의 자손을 아프리카의 검은 인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백인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1960년대까지도 이와 같은 주장은 미국이나 서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해석은 서구인들의 자의적이며 정치적인,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해석임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함의 자손은 가나안 족속이므로, 이후 출애굽 과정에 등장하는 여부스 족속, 아모리 족속, 히위 족속과 같은 종족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아프리카 인종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벌써 모순입니다.
<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하나님께 선택된 인재였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본문이 성경에 남아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도대체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이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9)
노아는 모든 인류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마지막으로 남을 수 있던 인류의 미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유일하게 남긴 인류의 씨앗 말입니다.
혹시 얼마 후에 지구의 멸망이 올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주선을 타고 몇 사람이라도 탈출하게 하여 인류를 보전하는 계획이 세워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인류가 죽어도 살아남아야 할 사람을 뽑는다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하겠습니까? 인류의 과학을 위해서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을 뽑아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류의 예술을 위해서 피카소 같은 사람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최고의 의술을 가진 의사를 뽑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노아는 바로 이러한 선발 과정에서 하나님이 직접 뽑으신 인재였습니다. 인간이 뽑은 사람이 아닙니다. 또 성경은 그가 분명히 ‘의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대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큼 경건한 의인이었고, 인류의 새로운 씨앗이 될 만큼 건강하고 좋은 DNA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가 120여 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족들도 도왔겠지만, 그 가족들이 노아만큼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홍수가 나고, 노아와 식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을 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노아의 가족들은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를 보았겠습니까? 위대한 아버지, 신앙의 아버지, 범접할 수 없는 영성을 가진 아버지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장면도 상상해 보십시오. 무지개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멋진 모습 말입니다. 노아를 바라보는 아들들의 마음에는 존경심과 경외심이 넘쳤을 것입니다.
< 의인 노아도 불완전한 인간 중 하나였습니다. >
그런 노아가 홍수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저 같으면, 홀로 남겨진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서, 아담으로부터 있던 인류의 역사와 홍수 이야기를 자세히 적어 후손에게 나눠 주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후손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는지’, ‘경외하며 섬길 수 있는지’를 가족들에게 적어 남기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가 출애굽 한 모든 과정을 모세오경으로 기록해 나눠 주었던 것처럼, 노아삼경이든 사경이든 오경이든, 무엇이든 만들어 전달하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일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전해주지 않습니다. 노아가 새 인류의 조상으로서 행한 350여 년 동안의 삶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는 농사를 시작했고, 어느 날 포도주를 실컷 마시고는 하체를 드러낸 채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라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는 이제 포도주에 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그가 왜 포도주를 그토록 많이 마셨을까요? 행복해서 마셨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홍수를 겪으며 수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주검들을 본 충격이 오랫동안 그의 삶을 짓눌렀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지면서 점차 육신이 쇠약해진 탓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와 같은 위대한 인물, 의인이며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자 당대에 완전한 자였던 노아에게도 실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바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완전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여전히 실수하는 존재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한 공동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를 출발시키셨지만, 그에게도 실수가 있고, 그는 역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새로운 조상으로 살아가야 하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알아야 했던 첫 번째 사실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술에 취한 노아의 이야기에는 두 가지 매우 흥미로운 전제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노아가 평상시 맨정신으로 있을 때는 결코 실수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노아는 끝까지 그 완전함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한편, 노아는 포도주를 마신 후에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해 실수를 범하는 사람이 됩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한 일이 아니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결국 노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의인이었고 당대의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류의 씨앗으로 뽑으셔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 노아는 분명히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을 놓았을 때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도 결국 사람이다. 인간은 그와 같은 존재며, 아무리 마음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조차 언제든 불완전해질 수 있다. 결국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종종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술김에 잘못한 것이라며 변명하는 것을 보는데, 노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완전하고 의로운 자였지만, 술 때문에 완전한 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도 역시 인간이며,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드린 두 아들은 주인의 정신을 지닌 자들입니다. >
저의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아버님이 연로해 가시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매우 존경했던 훌륭한 분들이 노인이 되어 가면서 몸이 쇠약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나이 들면서 어떻게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가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존엄이란 무엇일까?’라고 묻고 싶을 만큼, 존경하던 분들이 실수하는 모습, 불완전한 모습, 마치 아기처럼 의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대에 완전한 자요 의인인 노아도 그러했듯이, 우리 모두는 ‘어떤 상황에서’ ‘언젠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실수하는 인간, 허물 많은 인간, 죄 속에 빠져 있는 인간,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중요한 건 ‘인간에게 실수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새로운 인류의 시작점인 노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매우 높고 놀라운 가치이기도 합니다. 함이 먼저 그 상황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9:23~24)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 말하는 모습으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덮는 아주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레위기 18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8:7)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노아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하체’라는 표현은 보다 복합적인 의미일 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노아는 깨어나 이 모든 사실을 알았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다른 형제에게 알린 함에게 형제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저주했습니다. 반면 겉옷을 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드린 셈과 야벳에게는 종을 부리며 살 것이라는 복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사실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들을 저주하는 아버지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누구의 종이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도 가리지 않고 다른 형제에게 알리는 아들은 종이 되어도 마땅한, 즉 ‘종의 정신’, ‘종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라고. 반면 “다른 이의 실수를 보지 않고 겉옷으로 덮어주는 이는 종을 부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종을 부릴 수 있는 주인의 정신’, 즉 ‘리더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이 땅에 세워야 하는 노아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하는 또 다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겉옷’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실수는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수를 보았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방식이며 그릇된 방식인가를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떠벌려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겉옷을 벗어 추한 모습을 덮어줄 수도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을 준비하여 세상의 허물을 덮읍시다. >
여러분, 누가 세상의 지도자가 됩니까? 어떤 민족이 세상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까? 어느 나라가 세상의 주인처럼 온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종으로 부릴 수 있는 리더의 정신은 다른 이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을 때입니다. 그래야 그곳에서부터 리더십이 나옵니다.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도 때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덮어주는 배려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실수가 발견될 때, 그때를 기회라 여겨 그것을 흠잡아 사람을 겁박하는 태도는 저급한 인간의 태도요, 종의 태도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결점이나 추한 모습을 덮을 때, 멋지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추함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심지어 교회에도, 사회에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남에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겉옷 하나를 준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남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우리가 준비한 겉옷으로 덮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바로 이러한 우리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는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자신의 피로 정결케 하셨고,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하시어 모든 허물을 가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겉옷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참 흥미롭게도 첫 번째 인간과 두 번째 새로운 시조로서의 인간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유비가 엿보입니다. 첫 번째 인간인 아담도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가죽옷을 입혀 그의 허물을 가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또 다른 인류의 시초, 노아에게도 수치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또 다른 방법을 통해 그의 수치가 가려졌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고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부끄러움, 허물, 죄악, 이것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 부끄러움은 가려져야만 합니다. 가려질 때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겉옷’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고 아름답게 하신 주님을 따라, 그 주님의 모범을 따라, 나아가 셈과 야벳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겉옷 하나는 준비합시다. 그 겉옷을 들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가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Let’s Prepare a Garment!
Genesis 9:20-27
Today’s scripture about Noah getting drunk and lying naked in his tent makes us wonder why such a story is written in the Bible. It is odd even when we consider the context of Noah’s story. Noah’s tale is a grand one, with the one exception of today’s passage.From Genesis chapter 5 to 9, righteous Noah obeys God’s command and builds an ark, God judges the world with a flood, Noah sacrifices to God after the flood, and God establishes a covenant with Noah with a rainbow. Suddenly, however, thisbeautiful story becomes tainted by Noah’s behavior inGenesis 9:20-27. If it had not been for this passage, Noah would have been remembered as the perfect hero of mankind. So, why does the Bible record such an embarrassing story?
The great flood happened when Noah was 600 years old and he died at the age of 950. So, it appears that Noah was quite old—between the age of 600 and 950—when he got drunk and lay naked. His second son, Ham, saw this and told his brothers, Shem and Japheth, who covered their father. When Noah woke up and found out what had happened, he cursed Ham and blessed Shem and Japheth, saying that Ham will become a slave to his brothers. This curse against Ham is, in fact, man’s first curse against man in the Bible. We cannot but wonder again. Is this passage really needed? And isn’t the curse too much? Did Ham really deserve it? Wouldn’t it have been better if the story had been edited?
Yet, the Bible does not leave this embarrassing story out. Then, what is God’s message? What does God want us to learn from Noah’s story? We cannot but ask these questions with a humble heart.
Clearly, Noah was a righteous man in God’s eyes: “[…] Noah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among the people of his time, and he walked faithfully with God.” (Genesis 6:9) As the only person who would be saved among mankind, he was its future. He was handpicked by God, not by men, from among all the people on earth. God picked this one, righteous man to become the new seed of mankind. I would imagine he was also very healthy, possessing the right genes to become the father of a new mankind.
And, indeed, he met God’s expectations. Despite the jeers of people, he started to build a massive ark on the mountain. According to other records, he built the ark for 120 years. I wonder if his family had the same, consistent faith as Noah. Perhaps they thought their father had dementia. But, at last, the unimaginable happened. The world was flooded, and only Noah and his family survived. What would have gone on inside the heads of Noah’s children as they watched from the ark the whole world being destroyed by the fierce waters? In their eyes, Noah would have been a great father, the greatest man of faith there ever lived. And when they saw him talking to God under the rainbow, their hearts would have burst with pride and awe. Noah would have been greatly respected by his sons.
But what did Noah do after the flood? If it were me, I would have recorded, in detail, what happened before, during, and after the flood. As the only man left among the whole of mankind, I would have left a detailed record to my descendants about how to serve and worship God and how only my family survived—just as Moses recorded what happened during the exodus from Egypt. However, the Bible doesn’t tell us any of that. It is silent about Noah’s life after the flood except for today’s passage. In the 350 years after the flood, he planted a vineyard, got really drunk one day, and fell asleep in his tent naked.
This would have been quite a shock to Ham, Shem, and Japheth. It would have felt like a hero’s demise. Noah is described as an intoxicated man. Why did he drink so much wine? Was it because he suffered a trauma from the flood? Did the fact that he couldn’t save many people during the flood haunt him? Did nightmarish scenes of dead bodies floating in the water torment him? Or perhaps he was getting frail with age. Whatever the reason, he got drunk and lay naked. This embarrassing story does not go well with Noah who was chosen to be the beginning of a new mankind.
However, the Bible does not hide the fact that even sucha great man as Noah—the most righteous and blameless man in his time who became the father of all mankind—made mistakes. The message of today’s passage is this: “No man is perfect.” Man is just man who makes mistakes. No man can ever be perfect. No community can ever be perfect, either. This was the first lesson that Noah and his sons had to learn as they started to live in a new era as ancestors to a new mankind.
I think there are two interesting intentions of this story about Noah getting drunk. First, it tells us that when Noah wasn’t drunk, when he was his usual self, he never made mistakes or embarrassed himself. In other words, he was, as the Bible describes, a blameless man. It almost appears he keeps his reputation to the end. Second, however, after having too much wine, he loses control and makes a mistake. Since it’s a mistake under influence, it is understandable on the one hand, but, on the other, it is deeply regrettable.
Therefore, this is the message of Noah’s story: “Noah was clearly a great man who was righteous and blameless. God handpicked him as the father of all generations to come. But when he drank wine and lost control of himself, he made a mistake. This is man. No matter how perfect and upright he may be, he can always fall by various factors.”Thus, man is imperfect. Noah was a blameless man, but because of wine, he became imperfect. He, too, was human. When he was his usual self, he did not sin. He was righteous. But he was human. He made mistakes. He had weaknesses.
I remember how my father languished before he passed away. I also saw how other great men that I respected became weak with age. It was painful to watch. It made me think about the meaning of human dignity.Many respected men act like babies, becoming frail and dependent in their old age. It’s sad, but it’s human reality. Just as Noah, a blameless man in his time, made mistakes, we are all imperfect beings.We are erring men.
The important thing, however, is how we respond to such human mistakes. Ham saw his naked father first: “Ham, the father of Canaan, saw his father naked and told his two brothers outside.” (Genesis 9:22) While Ham told his brothers, Shem and Japheth cautiously covered their father with a garment: “But Shem and Japheth took a garment and laid it across their shoulders; then they walked in backward and covered their father’s naked body. Their faces were turned the other way so that they would not see their father naked.” (Genesis 9:23)
When Noah discovered what had happened, he cursed Ham and blessed Shem and Japheth. He says to Ham that he will become his brothers’ slaves, while, to Shem and Japheth, he says they will be blessed because they covered him. This is hard to understand.How could a father curse his son? How could a father make one son a slave to another? It almost appears as if Noah is stoking up conflict among his sons.
Then how should we interpret this passage? Why don’t we try to understand it like this? A son who revealshis father’s shame and tells other siblings about it is a person who has an attitude and mindset of a slave. So, it is fitting for such a person to become a slave. On the other hand, however, a son who disregards a mistake and tries to cover it with a garment deserves to be a master over a slave. Such a person has a mindof a master, a leader’s spirit.
There is another lesson that Noah’s sons had to learn from their father’s mistake as they built a new community on earth: Prepare a garment. Mistakes can happen anytime, anywhere. Man is free to choose how he will respond to them. He can gossip about it, or he can cover it up with his cloak.
Who is fit to lead? Which people is worthy to lead the world? Leaders cover over the mistakes and sins of others. That is the spirit of a leader. Leadership comes from such an attitude. Sometimes, it is necessary to reveal an embarrassing mistake. However, a considerate person who covers over other people’s mistakes will be rulers in this world. A person who takes advantage of mistakes and threatens people with such errors is like a lowly slave. Beauty is manifested when ugly mistakes and errors are covered.
Ugly mistakes are found everywhere—in our home, society, and even church. We may spot them and tell others about it. But God is telling us through today’s scripture that we must prepare a garment to cover them. We must not see the embarrassing mistakes of others, but walk backward and cover them with our garment. Only then can we build a truly beautiful community.
It was precisely because of our ugly mistakes that God sent us Jesus Christ—to cover all our sins and save us. Christ cleansed us with his blood, clothed us with his garment, and covered all our sins. Thus, our garment is Jesus Christ.
Dear Church, countless people in this world are dying because of their sins and mistakes. Many are living embarrassing lives. Our work is to prepare a garment. This is the mission that Our Lord has given us. Following in the steps of Our Lord who made us beautiful by covering our sins and Shem and Japheth who covered their father’s mistake, let’s prepare a garment. With this garment, let’s reach out to those who have lost their way in sin and cover them. This is what God wants from us.
창세기 9: 20 ~ 27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오늘 본문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아도 좋을 본문처럼 보입니다. >
오늘 본문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어려운 본문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자주 실수하는 사람이 오늘 본문을 들고 와서는 “노아도 술에 취해 실수한 적이 있다.”라고 하며 기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 말씀이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은 일반적으로, 또 언뜻 보아서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본문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들어 있는지 도리어 궁금해지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본문의 흐름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사실, 노아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 바로 전인 17절에서 끝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7장과 8장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물로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단행하셨습니다. 이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홍수의 심판이 끝나자 뭍으로 나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이어 9장에 도달하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후손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무지개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멋지게 등장합니다.
이렇게 멋지게 이어지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그만 뒤틀리고 맙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실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노아의 족보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오늘 본문만 뺀다면, 노아의 이야기는 아주 완벽하고 멋진 이야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노아는 그야말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조상이며, 흠 없는 영웅이요, 신비로운 인물로 남았을 것입니다.
내용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에 대한 이미지를 상당히 손상시킵니다. 노아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노아가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새 언약을 맺은 후 한 일이라고는 단 하나,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하체를 드러냈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굳이 이런 사건을 우리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요?
본 사건이 일어난 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홍수 사건 이후에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를 겪을 때의 나이가 600세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가 950세였습니다. 그러니 성경대로라면, 그는 홍수 후에 새로운 땅에서 약 350년을 살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가 350여 년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류의 씨앗으로서 한 일이 성경에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 오늘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이용한 이들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한 사건을 성경은 어떻게 정리하고 있습니까? 노아가 어느 날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이 봅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이 사실을 형제인 셈과 야벳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그의 겉옷을 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부끄러운 하체를 가려드립니다. 노아가 깨어나 모든 사실을 알고는 함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인간이 인간을 향해 내리는 저주입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하며 “함의 자손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될 것이다.”라는 뜻밖의 선언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이 본문이 과연 필요한 본문인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노아가 이만한 일로 아들 함에게 이처럼 큰 저주를 내려도 될까요? 도대체 함이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부모님의 수치를 가려주지 않아서요? 아니면 밖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말했기 때문에요? 그것이 그렇게도 큰 죄입니까? 형제들의 종이 될 만큼 큰 죄악입니까? 이와 같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본문이 빠지면 자연스럽게 노아가 하나님과 무지개 앞에서 약속하는 위대한 장면으로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만약 성경을 편집했거나 기록했다면, 노아가 벌거벗고 잠든 구차한 이야기, 그리고 아들 함을 향해 퍼부은 이해할 수 없는 저주의 내용은 다루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 해석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 본문이 상당 기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본문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과거에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종을 부릴 수 있는 명분을 주는 본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은 흑인과 백인, 황색인종의 구별을 유추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서구인들, 유럽인들은 중세시대를 거치며 저주받은 함의 자손을 아프리카의 검은 인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백인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1960년대까지도 이와 같은 주장은 미국이나 서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해석은 서구인들의 자의적이며 정치적인,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해석임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함의 자손은 가나안 족속이므로, 이후 출애굽 과정에 등장하는 여부스 족속, 아모리 족속, 히위 족속과 같은 종족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아프리카 인종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벌써 모순입니다.
<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하나님께 선택된 인재였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본문이 성경에 남아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도대체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이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9)
노아는 모든 인류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마지막으로 남을 수 있던 인류의 미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유일하게 남긴 인류의 씨앗 말입니다.
혹시 얼마 후에 지구의 멸망이 올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주선을 타고 몇 사람이라도 탈출하게 하여 인류를 보전하는 계획이 세워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인류가 죽어도 살아남아야 할 사람을 뽑는다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하겠습니까? 인류의 과학을 위해서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을 뽑아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류의 예술을 위해서 피카소 같은 사람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최고의 의술을 가진 의사를 뽑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노아는 바로 이러한 선발 과정에서 하나님이 직접 뽑으신 인재였습니다. 인간이 뽑은 사람이 아닙니다. 또 성경은 그가 분명히 ‘의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대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큼 경건한 의인이었고, 인류의 새로운 씨앗이 될 만큼 건강하고 좋은 DNA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가 120여 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족들도 도왔겠지만, 그 가족들이 노아만큼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홍수가 나고, 노아와 식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을 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노아의 가족들은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를 보았겠습니까? 위대한 아버지, 신앙의 아버지, 범접할 수 없는 영성을 가진 아버지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장면도 상상해 보십시오. 무지개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멋진 모습 말입니다. 노아를 바라보는 아들들의 마음에는 존경심과 경외심이 넘쳤을 것입니다.
< 의인 노아도 불완전한 인간 중 하나였습니다. >
그런 노아가 홍수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저 같으면, 홀로 남겨진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서, 아담으로부터 있던 인류의 역사와 홍수 이야기를 자세히 적어 후손에게 나눠 주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후손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는지’, ‘경외하며 섬길 수 있는지’를 가족들에게 적어 남기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가 출애굽 한 모든 과정을 모세오경으로 기록해 나눠 주었던 것처럼, 노아삼경이든 사경이든 오경이든, 무엇이든 만들어 전달하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일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전해주지 않습니다. 노아가 새 인류의 조상으로서 행한 350여 년 동안의 삶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는 농사를 시작했고, 어느 날 포도주를 실컷 마시고는 하체를 드러낸 채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라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는 이제 포도주에 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그가 왜 포도주를 그토록 많이 마셨을까요? 행복해서 마셨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홍수를 겪으며 수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주검들을 본 충격이 오랫동안 그의 삶을 짓눌렀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지면서 점차 육신이 쇠약해진 탓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와 같은 위대한 인물, 의인이며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자 당대에 완전한 자였던 노아에게도 실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바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완전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여전히 실수하는 존재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한 공동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를 출발시키셨지만, 그에게도 실수가 있고, 그는 역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새로운 조상으로 살아가야 하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알아야 했던 첫 번째 사실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술에 취한 노아의 이야기에는 두 가지 매우 흥미로운 전제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노아가 평상시 맨정신으로 있을 때는 결코 실수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노아는 끝까지 그 완전함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한편, 노아는 포도주를 마신 후에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해 실수를 범하는 사람이 됩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한 일이 아니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결국 노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의인이었고 당대의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류의 씨앗으로 뽑으셔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 노아는 분명히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을 놓았을 때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도 결국 사람이다. 인간은 그와 같은 존재며, 아무리 마음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조차 언제든 불완전해질 수 있다. 결국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종종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술김에 잘못한 것이라며 변명하는 것을 보는데, 노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완전하고 의로운 자였지만, 술 때문에 완전한 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도 역시 인간이며,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드린 두 아들은 주인의 정신을 지닌 자들입니다. >
저의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아버님이 연로해 가시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매우 존경했던 훌륭한 분들이 노인이 되어 가면서 몸이 쇠약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나이 들면서 어떻게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가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존엄이란 무엇일까?’라고 묻고 싶을 만큼, 존경하던 분들이 실수하는 모습, 불완전한 모습, 마치 아기처럼 의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대에 완전한 자요 의인인 노아도 그러했듯이, 우리 모두는 ‘어떤 상황에서’ ‘언젠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실수하는 인간, 허물 많은 인간, 죄 속에 빠져 있는 인간,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중요한 건 ‘인간에게 실수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새로운 인류의 시작점인 노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매우 높고 놀라운 가치이기도 합니다. 함이 먼저 그 상황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9:23~24)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 말하는 모습으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덮는 아주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레위기 18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8:7)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노아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하체’라는 표현은 보다 복합적인 의미일 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노아는 깨어나 이 모든 사실을 알았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다른 형제에게 알린 함에게 형제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저주했습니다. 반면 겉옷을 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드린 셈과 야벳에게는 종을 부리며 살 것이라는 복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사실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들을 저주하는 아버지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누구의 종이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도 가리지 않고 다른 형제에게 알리는 아들은 종이 되어도 마땅한, 즉 ‘종의 정신’, ‘종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라고. 반면 “다른 이의 실수를 보지 않고 겉옷으로 덮어주는 이는 종을 부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종을 부릴 수 있는 주인의 정신’, 즉 ‘리더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이 땅에 세워야 하는 노아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하는 또 다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겉옷’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실수는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수를 보았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방식이며 그릇된 방식인가를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떠벌려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겉옷을 벗어 추한 모습을 덮어줄 수도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을 준비하여 세상의 허물을 덮읍시다. >
여러분, 누가 세상의 지도자가 됩니까? 어떤 민족이 세상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까? 어느 나라가 세상의 주인처럼 온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종으로 부릴 수 있는 리더의 정신은 다른 이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을 때입니다. 그래야 그곳에서부터 리더십이 나옵니다.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도 때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덮어주는 배려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실수가 발견될 때, 그때를 기회라 여겨 그것을 흠잡아 사람을 겁박하는 태도는 저급한 인간의 태도요, 종의 태도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결점이나 추한 모습을 덮을 때, 멋지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추함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심지어 교회에도, 사회에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남에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겉옷 하나를 준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남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우리가 준비한 겉옷으로 덮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바로 이러한 우리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는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자신의 피로 정결케 하셨고,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하시어 모든 허물을 가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겉옷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참 흥미롭게도 첫 번째 인간과 두 번째 새로운 시조로서의 인간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유비가 엿보입니다. 첫 번째 인간인 아담도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가죽옷을 입혀 그의 허물을 가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또 다른 인류의 시초, 노아에게도 수치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또 다른 방법을 통해 그의 수치가 가려졌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고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부끄러움, 허물, 죄악, 이것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 부끄러움은 가려져야만 합니다. 가려질 때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겉옷’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고 아름답게 하신 주님을 따라, 그 주님의 모범을 따라, 나아가 셈과 야벳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겉옷 하나는 준비합시다. 그 겉옷을 들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가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2019년 8월 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겉옷 하나는 준비합시다.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9장, 22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9:20-2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8월 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일반적으로 그다지 가치가 없어 보이는 본문입니다. 흐름과 내용상 보아도 오히려 노아에 대한 이미지를 상당히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한 사건이며,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하였지만 함에 대해서는 저주하는 내용입니다. 과연 이 본문이 필요한 본문인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갖게 됩니다.
설교의 요약
노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이었습니다(창6:9). 노아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유일하게 남기신 인류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만큼 경건한 의인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홍수 이전에 그는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홍수로부터 가족들의 생명을 구한 위대한 아버지, 신앙의 아버지, 범접할 수 없는 영성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홍수 이후에 노아의 삶은 어떻습니까? 농사를 시작했고, 어느 날 포도주를 실컷 마시고는 하체를 드러낸 채 벌거벗고 잠이 들었습니다. 왜 포도주를 그렇게 많이 마셨을까?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 실수를 한 노아의 모습은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노아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인, 완전한 자)에게도 실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인간은 여전히 완전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공동체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실수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냐?”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 셈과 야벳에게 말하였습니다(창9:22). 하지만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 쳐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주었습니다(창9:23). 결국 노아는 함을 저주하였고, 셈과 야벳은 축복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가려드리지 않고 다른 형제에게 알리는 아들은 종(종의 정신)이 되어도 마땅하고, 다른 이의 실수를 보지 않고 겉옷으로 덮어주는 아들은 종을 부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리더의 정신).”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겉옷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실수는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을 떠벌리며 말할 수도 있고, 겉옷을 벗어 추한 모습을 덮어줄 수도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지도자가 됩니까? 실수가 발견될 때, 그때가 기회라고 여겨서 그것을 흠잡아서 사람을 겁박하는 태도는 저급한 인간의 태도, 종의 태도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결점이나 추한 모습을 덮을 때 멋지게 드러납니다. 남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준비한 겉옷으로 덮을 수 있을 때 진정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으시는 구원의 역사를 감행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허물을 덮으시고 아름답게 하신 주님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 겉옷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나누기
1. 누군가에게 용서 받았거나, 용서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어떤 상황이었는지 함께 나눠보세요.
2.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상황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허물(실수)를 덮어주셨습니다.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기도해 보세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시고, 허물을 덮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로 허물 덮는 옷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주님의 귀한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