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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하시의 항변

열왕기하 5: 20 ~ 27

김경진 목사

2019.09.29

[엘리사를 향한 게하시의 독백]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습니까? 아무리 되짚고, 되짚어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과 제 관계가 고작 이 정도였습니까? 이것밖에는 아니었습니까?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이 엘리야를 따르셨듯이, 저도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선생님이 엘리야 선생님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셨듯이,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따랐고, 충성스럽게 모셨습니다. 선생님도 저를 특별하게 대우해 주셨지요. 언젠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고치실 때, 지팡이를 가져가라고 저에게 특별하게 부탁도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아버님처럼 따랐고, 선생님도 저를 아들처럼 대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저를 내치실 만큼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입니까? 그냥 내치신 것도 아니고 문둥병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 하게 하셨습니다. 압니다. 저에게 조금 잘못이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팔았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을 팔아서 나아만 장군에게 옷 두 벌과 은 두 달란트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그렇게도 큰 죄입니까? 당신의 수제자를 문둥병에 걸리게 할 만큼 큰 죄입니까?

왜냐고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느냐고요? 왜 앞에서 거짓말을 했느냐고요? 정말 모르십니까? 우리 형편을 한번 보십시오. 여기서 공부하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백여 명이 넘는 학생이 이곳에서 함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배고프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고생하며 살고 있는지, 선생님은 모르십니까? 그런데 왜 선생님은 당연히 받아도 되는 그 예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아만 장군에게 나아갔습니다. 선생님이 못하시겠다면 저라도 악역을 감당해야지요. 그래서 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양심 없는 짓을 했습니까? 선생님의 이름을 팔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많은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제 새로운 수련생을 위해 필요한 옷 두 벌과 은 한 달란트를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뭘 그렇게도 잘못한 것입니까? 제가 저의 이익을 구하려고 그런 일을 했습니까? 제가 입을 옷을 구했습니까? 제가 은 한 달란트를 달라고 하자 나아만 장군이 저에게 억지로 한 달란트를 더 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하 두 사람을 시켜서 저의 집까지 그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한 달란트만 요구했는데, 그가 한 달란트를 더 준 것입니다. 그래서 두 달란트가 되었을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도 그렇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사례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는 이미 나병에서 나으면 사례를 하려고 많은 예물을 준비해 왔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엄청난 은혜를 입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간다면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그것이라도 내어서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뭐 그렇게 나쁘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 대로 그 돈으로 수련생들이 먹을 것과 쓸 물건을 마련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은 두 달란트 정도면 한동안 우리 수련생들이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게 할 만한 재물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저는 처음에 선생님께서 저를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을 때, ‘다른 훈련생들에게 일침을 주시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곧 고쳐 주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저를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평생 문둥병에 걸려 살게 하셨습니다. 대대로 가문을 이어서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어찌 그렇게 하실 수 있단 말씀입니까? 어찌 그 잘못 하나로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까? 저의 안위를 위해서 한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엘리사님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대답 좀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저를, 그리고 그 일을 성서에 적으셔서, 제 이름이 대대로 비난받는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치 욕심을 내어 자기 것을 챙긴 사람인 것처럼 오해받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것이 제가 충심으로 엘리사님을 모시고 따른 결과입니까? 제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서 제 인생을 바치려 한 결과와 보상이 이것입니까? 엘리사님,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저에게 답을 좀 주십시오!

< 게하시의 항변이 정당한 것처럼 들립니다. >

만약 제가 게하시였다면, 저도 이렇게 항의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보다 더 극렬하게 저항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수련생들이 굶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나아만 장군이 주는 선물을 받지 않으면 다입니까? 엘리사 자신도 제대로 먹을 게 없으면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모처럼 온 기회를 날려 버려도 되는 것입니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재물을 훔쳐 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런 거절을 한단 말입니까? 게하시처럼 수련생들의 생활을 책임져 가며,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게하시가 그토록 큰 잘못을 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큰 것을 취했다면 모르겠습니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달라고 했다면 모르겠습니다. 부정이니 착복이니 하는 말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그가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갔다면 모르겠습니다. 나만 살겠다고, 나만 잘 살겠다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면 모르겠습니다. 가다가 붙잡혀 왔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수련생이 있는 장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받은 것을 들고 돌아왔다는 것은 수련생들을 위해 그 돈과 물건을 사용할 의사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을 만나러 갈 때의 모습만 봐도 수련생들을 위한 그의 마음이 보인다고도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교회만 봐도 그렇습니다.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교회나 기도원에서 그 정도쯤 요구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물론 일부 몰지각한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저는 여전히 게하시를 변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조금 받은 게하시가 잘못이라면, 오늘날 현대의 목회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기도원과 교회 단체들은 그보다 더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게하시만 그렇게 당해야 합니까? 임직을 할 때 돈을 내야 한다는 교회들도 있다던데, 돈을 써야만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되는 교회도 있다던데, 심방을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교회들도 있다던데…. 심지어 물도 파는 교회도 있다는데…. 특별한 물이어서 병도 낫게 한다며, 이 물만 마시면 장수하고 무병하다고, 선지자가 특별히 기도해서 얻은 물이라고 선전하며 판매한다고 합니다. 물값도 매기지 않고 비싸게 살수록 효과가 좋다고 말하는 장사꾼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왜 게하시는 그토록 하나님의 징벌을 심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 엘리사가 알려 주고자 한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

오늘 이야기에는 한 가지 단순하고 명백한 원칙이 숨겨져 있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 곧 시리아 사람에게 알려 주려고 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는 없는 하늘나라의 가치였습니다. 시리아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삶의 원리,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있는 원리. 그 가치는 바로 값으로 계산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임을 경험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은혜는 그런 것입니다. 값을 치르면, 그것은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게하시가 바로 그것을 망쳐 놓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현장에서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에게 대가를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이방 신과 다름없는 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대가를 위해 능력을 사용하는 초라하고 저급한 신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물론 대가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경비도 필요합니다. 사역을 이어 가기 위한 비용도 필요합니다. 감사의 예물도 중대한 신앙의 덕목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공짜로 주어지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훼손된다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를 망가뜨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 55:1)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의 은총을 주셨다는 사실을 밝히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엄청납니다. 자신의 외아들의 목숨과 바꿀 만큼, 하나님이 내어놓으신 희생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알려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만 게하시의 일 때문에, 나아만에게 알려 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게하시의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시킨 죄’, 이것이 바로 게하시의 죄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돈으로 바꾼 죄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바꾼 죄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거룩한 분노를 발하게 하며, 형벌을 내릴 수밖에 없게 한 게하시의 잘못입니다.
현대 교회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곳에서 게하시의 실수가 반복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값을 지불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왜 값을 매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헌금을 거둔다고 합니다만, 그 때문에 도리어 정작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은혜를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면죄부통을 만들고 면죄부를 사서 통에 넣으면 죽은 가족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거두었습니다. 고행을 장려하면서 고행을 하면 마치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선전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런 행태를 반복할수록 공짜로 주어지는, 즉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전달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세와 종교개혁시대를 연구한 어느 교회사가는, 중세 교회를 진단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세 시대에 살던 교인들이 갈급했던 것은 구원의 확실성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미사를 드리고, 면죄부에 기부하고, 고해성사를 하고, 고행하고, 자선을 베풀도록 강요받았지만, 정작 구원을 보장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회에 머물러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갈급한 마음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끝까지 구원의 확실성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중세 교회는 교회의 건물을 크게 짓고 위용을 자랑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 교인들이 주일에 수없이 교회에 나와 움직이게 하고, 봉사하게 하고, 일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상에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늘나라의 질서, 이 세상이 갖지 못한 그 귀한 질서를 이 세상에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 성도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자입니다. >

엘리사가 나병을 앓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요단강에서 씻게 하고 고쳐 주었을 때, 엘리사는 시리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치유의 은혜였습니다.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고질적인 병이었습니다. 그 병이 치료되었는데,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 바로 그것을 엘리사는 이방인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아만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시리아에 돌아가서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시리아 땅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이 갖지 못한 하늘의 질서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이 세상이 갖지 못한 하늘의 지혜를, 하늘의 방식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편지요, 하나님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하고 계신 일, 하시기로 작정하신 일들, 그 놀라운 약속을 알리고 선포하기 위해 소명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값을 계산하는 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값을 계산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하는 일에 관심이 높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값을 올려서 값비싼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법을 배웁니다. 세상의 원리, 세상의 원칙은 그러합니다. 이방 나라 나아만 장군이 살던, 그 시리아 땅에 있던 원칙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갖지 못한 삶의 원리를 자랑합니다. 그 원리를 자랑해야 합니다. 희생하고, 나누고, 사랑하고, 베풀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또 사랑하고, 베풀고, 조건 없이 나누어 주고…. 교회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직무는 우리 교회를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키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일 많은 성도를 자랑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저것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고,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세워 가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널리 알리기 위해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녀인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조건 없는 봉사, 대가 없는 섬김을 연습해야 합니다. 보상 없이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망가뜨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고귀한 질서를 드러내고 가르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소망교회 모든 성도가 거저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전하는 귀한 도구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보다 정확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원리와 질서를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한 귀한 도구로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 땅에 실현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시다. >

지난주 교단 총회를 마치고,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도님들을 뵙게 됩니다.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세상이 갖지 못한 것을 나누어 주어야 했는데,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여러분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교회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의 부끄러움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우리부터 다시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부터 다시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저부터 다시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도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찾아보며, 점검하며, 나아가겠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것이 있지 않은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가리고 있는 어떤 것이 있지는 않은지, 하나씩 하나씩 저를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겠습니다.
다음 주일이면 소망교회 창립주일을 맞이합니다. 참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다시 한번 교회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한 주일간 함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번 깊이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성도인 내 삶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지…. 희생하고, 나누고, 사랑하고, 봉사하고, 베풀고, 끊임없이 인내하고, 또 나누어 주고, 또 베풀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지, 우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나를 통해서 볼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런 날,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그 나라의 법을 드러내지 못한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을 돌아봅니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게 전달되는 모습으로 다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함께해 주십시오. 저도 가겠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거룩하고, 아름답고, 흠이 없는 교회,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 가십시다.

Gehazi’s Protest
2 Kings5:20-27

[Gehazi’s Soliloquy: Protest Against Elisha]

‘What have I done wrong? What on earth have I done wrong? Master, it seems you’ve got it wrong. I simply cannot understand. Is our relationship so insignificant that you should treat me this way? Am I so worthless to you? I have been so true and faithful to you. I followed you just as you did Elijah. I have served you well. And you gave me special treatment. Didn’t you tell me to take your staff to the Shunammite woman when her son died? You treated me like your son.’

‘But how has it come to this? Have I committed such a deadly crime that you should punish me so?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 treatment? You didn’t just cast me off. You cursed me with leprosy!’

‘Yes, I know that there is a fault in me. I used your name to gain something. I received two talents and two sets of clothing with your name. But is that such a big crime that I should get leprosy?’

‘Why did I do it? Are you asking me why? Do you really not know? Look around you. Look at all your servants and novices. There are more than a hundred. You know how hard it is for them. We barely have enough to eat!’

‘Why didn’t you receive anything from Naaman for your service? We deserve it, you know. I went and asked Naaman for compensation because you couldn’t. Does that make me a shameless person?’

‘Yes, I asked in your name, but I didn’t ask for much. Only one talent. It was Naaman who gave me two. And you know what? I did it for your servants and your students. Not for my own gain. I didn’t ask for clothing for myself but for the two young men who recently joined us to be prophets. So, what on earth have I done wrong?’

‘Furthermore, it’s only fitting that Naaman give us something in return. Don’t you know that he had prepared immeasurable treasure to give us if we cured him? He would have felt uncomfortable if he hadn’t given us anything. What’s so bad about trying to provide for our servants and trainees? With two talents, we wouldn’t have to worry about food for a while.’

‘At first, when you cursed me with leprosy, I thought you were trying to teach us a lesson. I thought that you would cure me afterward. But, you didn’t. You left me to rot. You abandoned me for life. I will be a leper for life. How could you do such a thing to me? Were my actions so sinful that you should punish me so?’

‘Speak, Master Elisha!Say something! Is this the fate I deserve for serving you with all my heart?’

[End of Soliloquy]

Dear Church, what do you think about this soliloquy of Gehazi? I think I would have protested against Elisha like him. Perhaps even more.What was so wrong about Gehazi receiving something in return for Elisha’s services, when it could provide for the servants and trainees? Was Elisha right to turn a blind eye to the situation of his company? Why did he have to reject the presents that Naaman offered him? No matter how hard Itry, I find it difficult to find fault with Gehazi’s actions.

What was so wrong about Gehazi’s actions? He didn’t even ask for much. He didn’t ask for himself either. It wasn’t not exactly “embezzlement,” either, to borrow modern-day terms. He didn’t run away with the money. Where could such novices go to anyway? It seems Gehazi came back with the money in order to provide for the servants and other novices.

Churches and ministers today act similarly. They often ask for money or other compensation for their spiritual services. And in some extreme cases, they ask for much more than what Gehazi had asked for. Of course, I am referring to the few, senseless churches and prayer houses.Furthermore, I am told that, in some churches today, pastors and elders must pay a certain amount of moneyto be ordained and appointed. If Gehazi’s action of taking some money for spiritual services is so wrong, shouldn’t such practices of churches today be condemned even more? Why is it just Gehazi that gets punished?

Then why exactly was Gehazi punished by God for his actions? There is a simple but clear principle to be found in today’s passage.

The values that Elisha wanted to convey to Naaman, the Syrian general, were the values of the Kingdom of Heaven that cannot be found in this world. These values did not exist in Syria. These principles only existed in Israel. They were none other than the grace of God which can never be calculated in material terms. In other words, Elisha wanted Naaman to experience that God’s grace was a free gift.

Indeed, God’s grace is gratuitous. It is not given in exchange for something. This is the principle of God’s Kingdom. This is grace. If we have to pay for it, it would not be grace. But, Gehazi ruined all that. By receiving something in return, he made God like all the other “gods,” at the very scene of God’s amazing grace. He turned God into a vulgar, good-for-nothing“god” who used his power for gain.

Compensation is important. To manage a church or a community, we need expenses. We need material for ministry. Offerings of thanksgiving are important. But if these, in any way, undermine God’s free, indescribable grace, then that would destroy the most important truth of the Christian faith.

God tells us in the Bible, “Come, all you who are thirsty,come to the waters;and you who have no money,come, buy and eat!Come, buy wine and milkwithout money and without cost.” (Isaiah 55:1)

God wants to make it clear that He gave us the grace of salvation as a free gift. He makes it clear to us that we are saved by grace. Of course, God had to pay an enormous price. He sacrificed His only Son.But when He gave us that salvation, it was without charge.

God wanted to teach us the principles of His Kingdom which are not like the world’s. But because of Gehazi’s actions, these Kingdom values became tainted. This was the mistake that Gehazi made.

Furthermore, if you read the Bible closely, you will find that the two talents of silver that Gehazi received was not a small sum at all. In 1 Kings, King Omri bought the hill of Samaria from Shemer for two talents of silver and built a city on it. In today’s scripture, too, we are told that two servants had to carry the two talents of silver, which means that it was a considerable amount of wealth.

Gehazi’s sin lies in distorting God’s character. He corrupted God’s glory by putting a price on it. He turned God’s values into worldly ones. This sin had to be punished for God could not stand it.

I am deeply saddened and appalled by the fact that many churches today are making the same mistake as Gehazi. Some churches today “sell” blessings, asking people to show their respect and gratitude to God in material ways.

Why do they put a price tag on God’s free gift of grace? Why ask something in return for God’s grace? They claim that the offerings given would be used well for God’s work, but their actions only ruin His way. They defile grace, reducing it to a disgusting image.

This was what the medieval churches did. They made people buy indulgences, saying that their deceased family would go to heaven if they bought them and put them in the indulgence chest. In fact, they made a lot of money doing this. They promoted suffering, claiming that it would lead Christians to grace. However, the medieval churches failed to deliver the message of God’s free grace. Carter Lindberg, a scholar on the Middle Ages and the Reformation, wrote that the medieval Church forced masses, indulgences, and confessions upon the laity,but failed to give them any assurance on salvation, which was the very thing that medieval Christians craved.

The medieval church did not tellChristians about the free gift and grace of salvation. Instead, it taught them that they must continually do something to “earn”their salvation. The medieval church succeeded in building elegant, grandchurches and making Christians serve busily, but failed miserably in correctly delivering the message of grace and salvation.

What about Korean churches today? Are we doing a good job of delivering the message of grace that God gives abundantly and freely? Are we displaying the precious values and principles of the Kingdom of God that the world does not possess?

When Elisha cured Naaman’s leprosy by telling him to wash in the Jordan River, it was done in an unimaginable way by Syrian standards. Elisha cured the Syrian general’s incurable and chronic sickness by the grace of healing. Yet, this religious leader of Israel did not ask for anything in return. Nothing at all. Thanks to this, Naaman came to know and fear God and resolved to become God’s servant. He promised to serve God even after returning to Syria. God’s name would be lifted upeven in Syria.

What about Korean churches today? Do we experience heavenly values that the world does not possess?

Dear Church, we are all God’s servants, His letter, and His aroma. We have been called to praise God who has saved us by the blood of Christ. We have been called to declare the amazing things that He has done, is doing, and will do for us.

The world is interested in calculating a price. In this world, we are taught to increase our self-worth by maximizing our income. We are used to the ways and principles of the world. Syria, the gentile country where Naaman lived, also followed these ways.

However, we are different. We pride ourselves in the principles that the world does not possess. We share, love, give generously, and sacrifice ourselves. Churches exist to become a pathway of God’s free grace.

We do not come to church to learn how to become rich. Our mission is not to build the greatest and most influential church in the world. A Christian’s mission is not to build a church that boasts a large congregation. His mission is not to build an influential community that goes on many outreaches and overseas missions.

Churches exist to testify and make known God’s free grace. Communities of Christ exist for this reason. We, children of God, exist for this purpose.

Therefore, a Christian must practice conveying God’s love which is given freely. We must practice service without compensation. We must not undermine or ruin the value of God’s endless love which is given to us without asking for anything in return. We must show the world the noble and precious principles of God’s Kingdom.

My hope is that everyone at SomangChurch will become a precious tool that shows God’s amazing, free grace. To be more precise, my hope is that God will use you to show and prove the principles and order of His Kingdom.

After last week’s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PCK Tonghap), I felt ashamed to see you. We should have shown the world that we are different. We should have shared with the world what it does not possess. But we failed, for which I am deeply ashamed. But, who can we blame? We must first reflect on ourselves. We must look back on our own church first. Somang Church has many weaknesses, too. Let’s reflect on them and fix them, one by one. Next week, we celebrate the 42nd anniversary of our church. I hope it will be an opportunity for us to reflect upon ourselves in order to become church true to its mission.

A church that shows the principles and laws of God’s Kingdom…

A church that clearly delivers the message of God’s free grace…

Are we truly serving as a pathway for God’s grace? Are we passing on to the world the free gift of God’s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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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5: 20 ~ 27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엘리사를 향한 게하시의 독백]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습니까? 아무리 되짚고, 되짚어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과 제 관계가 고작 이 정도였습니까? 이것밖에는 아니었습니까?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이 엘리야를 따르셨듯이, 저도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선생님이 엘리야 선생님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셨듯이,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따랐고, 충성스럽게 모셨습니다. 선생님도 저를 특별하게 대우해 주셨지요. 언젠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고치실 때, 지팡이를 가져가라고 저에게 특별하게 부탁도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아버님처럼 따랐고, 선생님도 저를 아들처럼 대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저를 내치실 만큼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입니까? 그냥 내치신 것도 아니고 문둥병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 하게 하셨습니다. 압니다. 저에게 조금 잘못이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팔았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을 팔아서 나아만 장군에게 옷 두 벌과 은 두 달란트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그렇게도 큰 죄입니까? 당신의 수제자를 문둥병에 걸리게 할 만큼 큰 죄입니까?

왜냐고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느냐고요? 왜 앞에서 거짓말을 했느냐고요? 정말 모르십니까? 우리 형편을 한번 보십시오. 여기서 공부하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백여 명이 넘는 학생이 이곳에서 함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배고프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고생하며 살고 있는지, 선생님은 모르십니까? 그런데 왜 선생님은 당연히 받아도 되는 그 예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아만 장군에게 나아갔습니다. 선생님이 못하시겠다면 저라도 악역을 감당해야지요. 그래서 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양심 없는 짓을 했습니까? 선생님의 이름을 팔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많은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제 새로운 수련생을 위해 필요한 옷 두 벌과 은 한 달란트를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뭘 그렇게도 잘못한 것입니까? 제가 저의 이익을 구하려고 그런 일을 했습니까? 제가 입을 옷을 구했습니까? 제가 은 한 달란트를 달라고 하자 나아만 장군이 저에게 억지로 한 달란트를 더 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하 두 사람을 시켜서 저의 집까지 그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한 달란트만 요구했는데, 그가 한 달란트를 더 준 것입니다. 그래서 두 달란트가 되었을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도 그렇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사례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는 이미 나병에서 나으면 사례를 하려고 많은 예물을 준비해 왔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엄청난 은혜를 입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간다면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그것이라도 내어서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뭐 그렇게 나쁘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 대로 그 돈으로 수련생들이 먹을 것과 쓸 물건을 마련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은 두 달란트 정도면 한동안 우리 수련생들이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게 할 만한 재물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저는 처음에 선생님께서 저를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을 때, ‘다른 훈련생들에게 일침을 주시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곧 고쳐 주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저를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평생 문둥병에 걸려 살게 하셨습니다. 대대로 가문을 이어서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어찌 그렇게 하실 수 있단 말씀입니까? 어찌 그 잘못 하나로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까? 저의 안위를 위해서 한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엘리사님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대답 좀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저를, 그리고 그 일을 성서에 적으셔서, 제 이름이 대대로 비난받는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치 욕심을 내어 자기 것을 챙긴 사람인 것처럼 오해받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것이 제가 충심으로 엘리사님을 모시고 따른 결과입니까? 제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서 제 인생을 바치려 한 결과와 보상이 이것입니까? 엘리사님,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저에게 답을 좀 주십시오!

< 게하시의 항변이 정당한 것처럼 들립니다. >

만약 제가 게하시였다면, 저도 이렇게 항의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보다 더 극렬하게 저항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수련생들이 굶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나아만 장군이 주는 선물을 받지 않으면 다입니까? 엘리사 자신도 제대로 먹을 게 없으면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모처럼 온 기회를 날려 버려도 되는 것입니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재물을 훔쳐 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런 거절을 한단 말입니까? 게하시처럼 수련생들의 생활을 책임져 가며,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게하시가 그토록 큰 잘못을 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큰 것을 취했다면 모르겠습니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달라고 했다면 모르겠습니다. 부정이니 착복이니 하는 말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그가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갔다면 모르겠습니다. 나만 살겠다고, 나만 잘 살겠다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면 모르겠습니다. 가다가 붙잡혀 왔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수련생이 있는 장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받은 것을 들고 돌아왔다는 것은 수련생들을 위해 그 돈과 물건을 사용할 의사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을 만나러 갈 때의 모습만 봐도 수련생들을 위한 그의 마음이 보인다고도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교회만 봐도 그렇습니다.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교회나 기도원에서 그 정도쯤 요구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물론 일부 몰지각한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저는 여전히 게하시를 변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조금 받은 게하시가 잘못이라면, 오늘날 현대의 목회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기도원과 교회 단체들은 그보다 더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게하시만 그렇게 당해야 합니까? 임직을 할 때 돈을 내야 한다는 교회들도 있다던데, 돈을 써야만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되는 교회도 있다던데, 심방을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교회들도 있다던데…. 심지어 물도 파는 교회도 있다는데…. 특별한 물이어서 병도 낫게 한다며, 이 물만 마시면 장수하고 무병하다고, 선지자가 특별히 기도해서 얻은 물이라고 선전하며 판매한다고 합니다. 물값도 매기지 않고 비싸게 살수록 효과가 좋다고 말하는 장사꾼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왜 게하시는 그토록 하나님의 징벌을 심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 엘리사가 알려 주고자 한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

오늘 이야기에는 한 가지 단순하고 명백한 원칙이 숨겨져 있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 곧 시리아 사람에게 알려 주려고 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는 없는 하늘나라의 가치였습니다. 시리아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삶의 원리,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있는 원리. 그 가치는 바로 값으로 계산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임을 경험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은혜는 그런 것입니다. 값을 치르면, 그것은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게하시가 바로 그것을 망쳐 놓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현장에서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에게 대가를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이방 신과 다름없는 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대가를 위해 능력을 사용하는 초라하고 저급한 신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물론 대가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경비도 필요합니다. 사역을 이어 가기 위한 비용도 필요합니다. 감사의 예물도 중대한 신앙의 덕목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공짜로 주어지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훼손된다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를 망가뜨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 55:1)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의 은총을 주셨다는 사실을 밝히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엄청납니다. 자신의 외아들의 목숨과 바꿀 만큼, 하나님이 내어놓으신 희생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알려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만 게하시의 일 때문에, 나아만에게 알려 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게하시의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시킨 죄’, 이것이 바로 게하시의 죄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돈으로 바꾼 죄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바꾼 죄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거룩한 분노를 발하게 하며, 형벌을 내릴 수밖에 없게 한 게하시의 잘못입니다.
현대 교회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곳에서 게하시의 실수가 반복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값을 지불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왜 값을 매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헌금을 거둔다고 합니다만, 그 때문에 도리어 정작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은혜를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면죄부통을 만들고 면죄부를 사서 통에 넣으면 죽은 가족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거두었습니다. 고행을 장려하면서 고행을 하면 마치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선전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런 행태를 반복할수록 공짜로 주어지는, 즉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전달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세와 종교개혁시대를 연구한 어느 교회사가는, 중세 교회를 진단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세 시대에 살던 교인들이 갈급했던 것은 구원의 확실성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미사를 드리고, 면죄부에 기부하고, 고해성사를 하고, 고행하고, 자선을 베풀도록 강요받았지만, 정작 구원을 보장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회에 머물러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갈급한 마음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끝까지 구원의 확실성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중세 교회는 교회의 건물을 크게 짓고 위용을 자랑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 교인들이 주일에 수없이 교회에 나와 움직이게 하고, 봉사하게 하고, 일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상에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늘나라의 질서, 이 세상이 갖지 못한 그 귀한 질서를 이 세상에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 성도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자입니다. >

엘리사가 나병을 앓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요단강에서 씻게 하고 고쳐 주었을 때, 엘리사는 시리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치유의 은혜였습니다.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고질적인 병이었습니다. 그 병이 치료되었는데,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 바로 그것을 엘리사는 이방인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아만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시리아에 돌아가서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시리아 땅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이 갖지 못한 하늘의 질서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이 세상이 갖지 못한 하늘의 지혜를, 하늘의 방식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편지요, 하나님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하고 계신 일, 하시기로 작정하신 일들, 그 놀라운 약속을 알리고 선포하기 위해 소명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값을 계산하는 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값을 계산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하는 일에 관심이 높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값을 올려서 값비싼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법을 배웁니다. 세상의 원리, 세상의 원칙은 그러합니다. 이방 나라 나아만 장군이 살던, 그 시리아 땅에 있던 원칙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갖지 못한 삶의 원리를 자랑합니다. 그 원리를 자랑해야 합니다. 희생하고, 나누고, 사랑하고, 베풀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또 사랑하고, 베풀고, 조건 없이 나누어 주고…. 교회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직무는 우리 교회를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키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일 많은 성도를 자랑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저것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고,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세워 가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널리 알리기 위해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녀인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조건 없는 봉사, 대가 없는 섬김을 연습해야 합니다. 보상 없이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망가뜨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고귀한 질서를 드러내고 가르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소망교회 모든 성도가 거저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전하는 귀한 도구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보다 정확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원리와 질서를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한 귀한 도구로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 땅에 실현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시다. >

지난주 교단 총회를 마치고,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도님들을 뵙게 됩니다.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세상이 갖지 못한 것을 나누어 주어야 했는데,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여러분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교회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의 부끄러움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우리부터 다시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부터 다시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저부터 다시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도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찾아보며, 점검하며, 나아가겠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것이 있지 않은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가리고 있는 어떤 것이 있지는 않은지, 하나씩 하나씩 저를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겠습니다.
다음 주일이면 소망교회 창립주일을 맞이합니다. 참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다시 한번 교회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한 주일간 함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번 깊이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성도인 내 삶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지…. 희생하고, 나누고, 사랑하고, 봉사하고, 베풀고, 끊임없이 인내하고, 또 나누어 주고, 또 베풀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지, 우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나를 통해서 볼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런 날,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그 나라의 법을 드러내지 못한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을 돌아봅니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게 전달되는 모습으로 다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함께해 주십시오. 저도 가겠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거룩하고, 아름답고, 흠이 없는 교회,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 가십시다.

2019년 9월 2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게하시의 항변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82장, 9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왕하5:20-2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2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에게 옷 두벌과 은 두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게하시는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릴 만큼 큰 죄를 범한 것일까요? 어쩌면 게하시는 억울하다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게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을까요?

설교의 요약

엘리사가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에게 알려주려고 하였던 가치는 바로, 이 세상에 없는 하늘나라의 가치였습니다. 시리아에는 없는 삶의 원리,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원리였습니다. 그 가치는 바로 값으로 계산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입니다.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은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값을 치르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현장에서 대가를 요구함으로 하나님을 이방신과 다름없는 신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론 대가도, 경비도, 비용도, 감사의 예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짜로 주어지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훼손된다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를 망가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의 은총을 주셨다는 사실을 밝히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알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게하시의 그 일 때문에 나아만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하나님의 모습이 훼손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게하시의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시킨 죄 바로 이것이 게하시의 죄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돈으로 바꾼 죄, 세상의 가치로 바꾼 죄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곳에서 게하시의 실수가 반복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값을 달아 지불하라고 말합니까? 중세교회가 그랬습니다. 중세교회는 값없이 얻는 구원, 은혜로 얻는 구원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에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편지요, 하나님의 향기입니다. 우리 소망의 모든 성도들은 “거저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전달하는 귀한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원리와 질서를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누기

1. 아무런 대가 없이 도움을 받거나, 베풀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어떤 마음이었는지 나눠보세요.

2. 게하시의 실수(죄)는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러한 실수(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원리와 질서를 따라 살아가도록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죄인 된 우리를 십자가의 공로로 깨끗케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대가 없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고 사랑하여 주셨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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