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겸손을 잃어버린 세상

빌립보서 2:1~5

김경진 목사

2025.03.16

<투쟁과 다툼이 만연한 사회에서 온유와 겸손은 도리에 맞지 않는 덕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온유’와 ‘겸손’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를 하나의 모자람의 범주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온유를 ‘화를 낼 줄 모름’으로 정의합니다. 그것은 비난받을 만한 태도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적절한 시간 동안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칭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오히려 모자람 쪽에 더 치우치는 듯합니다…. 적절한 경우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바보로 여겨지고… 그러한 사람은 지각이나 고통 감각이 없는 듯하며, 분노에 대한 무감각으로 인해 자신을 방어할 마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4권 5장, 1~3)

그래도 온유는 모자람의 영역으로 이야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겸손’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겸손은 덕이 아니라 악덕에 속했습니다. 진짜 사람, 남자라면 힘이 세고 지배적이며 자신의 우월감에 대하여 자랑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하지 말라”라고 가르칩니다. 겸손하면 결국 남에게 짓밟힐 뿐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자의 지혜입니다. 이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기와 초대교회의 주변 환경과 문화였습니다.
왜 그리스의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당시의 상황이 전쟁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장 위대하고 추앙받던 사람들은 영웅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보아도 모든 것을 정복하는 신화적 초영웅에 대한 칭송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은 분노할 줄 알고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할 줄 아는 당당한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런 영웅들이 당시대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이후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런 생각과 태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미국에 있었던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중학생 아이들에게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성령의 열매 중 온유에 대해서 수업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들이었기에 온유는 그들에게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얻고 싶지만, 너희들에게는 참 쉽지 않지?” 그랬더니 아이들이 “아니요. 전혀 갖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습니다. “왜?”라고 물으니 아이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약해 보이잖아요.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오늘 현대 문화도 영웅주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겸손은 힘들다’라는 어떤 방송 프로그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놓고 겸손을 비하하는 듯한 제목이었습니다. ‘당당해야 한다. 자신감 넘치는 것이 좋다’라는 현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그 문화가 더욱 뚜렷하게 보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것을 모자람으로, 온유를 능력 없음으로, 겸손함을 존재감 없으므로 치부해 버리는 문화가 오늘의 문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리마다 다투는 소리가 가득하고 서로 분노를 부추기며 투쟁을 역설합니다. 전쟁의 전선에 설 것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자리에 나와서 한번 영웅이 되어 보라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겁하고 능력 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비난합니다.
전쟁의 자리에서 온유는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모자람이겠죠. 이 투쟁의 자리에서 겸손은 악덕에 해당할 것입니다. 성난 사람들처럼 비난을 쏟아 내고 더 큰 분노를 만들어야만 투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서 전투를 하는 군인들에게 온유한 군인, 겸손한 군인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겸손이 사라진 사회는 전쟁 사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잃어버린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겸손과 온유를 모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정확히 말하면 겸손과 온유를 내다 버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온유와 겸손에 있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온유와 겸손이 악덕으로 이해된 데에는 이 땅의 문화가 여전히 전쟁과 투쟁의 문화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화가 남겨진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함에 대해서 수없이 말씀하시며 이것이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29)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세상의 관점과는 달리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을 역설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 안에 진정한 쉼과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 그 안에 안식과 평안과 쉼과 해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미 온유와 겸손이 중요한 개념으로 인정받지 않던 시대에 예수님이 하신 이 일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전쟁과 투쟁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이 땅을 다른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이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있는 세상을 우리가 이 땅에 만들어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끝없이 정복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라, 꿈꾸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우리의 욕망으로 작동합니다. 내가 욕망하던 그 나라, 그 시스템을 만들면 행복이 올 것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전쟁도 불사합니다. 그 투쟁이 역사가 기록되던 이래로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고 희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온유와 겸손을 배움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 갈 때만 진정한 행복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을 우리 가정에 한번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요? 어떤 적절한 시간과 상황 속에서 가족에게 분노를 느끼며 그것을 표출하는 것이 칭찬받을 만하다면, 이 원리를 여러분의 가정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할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멋진 가정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말 속에는 이미 파멸되는 사회가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정복적인 권한이 팽배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온유와 겸손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서로를 향하여 비난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회나 정치로 확대하면 분노를 적절하게 느끼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것이 진실일까요?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세상의 사람들 여러 사람들은 이미 사회 속에서 서로 분노를 부추기며 투쟁을 선동합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함에도 끊임없이 분노를 양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이렇게 해야만 세상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도저히 겸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여러분,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열등함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해서 불만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밑으로 내려와서 낮은 자리에 처할 수 있겠습니까?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결코 겸손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 조금만 자신을 낮게 본다고 생각하면 분노하고 좌절하며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더 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겸손함’이란 ‘성숙한 정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기의 만족감과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더 높은 생각의 경지입니다.
또 겸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결코 겸손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며 다른 일을 낮게 여기고 무시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기는 어렵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겸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늘 쉽게 분노하고 불평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늘 불안해하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또한 감사가 없고 원망과 불만이 그들을 따라다닙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온유와 겸손은 더 강한 정신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실천할 수 있는 덕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말씀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랑과 칭찬을 받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 안에 서로 하나 되게 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문제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빌 2:1, 새번역)

말씀의 내용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거나, 성령 안에서 교제를 갖거나 동정심 혹은 자비로 일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작게는 가정에서, 좀 더 넓게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더 넓게는 세상을 위해 교회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준을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2~3)

여기서 사용하는 ‘겸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타페이노프로쉬네(ταπεινοφροσύνη[tapeinophrosune], Humility, lowliness of mind)’입니다. ‘낮은’이라는 뜻인 ‘타페이노스(ταπεινὸς[tapeinos], lowly)’와 ‘마음’이라는 뜻인 ‘프랜(φρήν[phren], mind, understanding)’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즉, 겸손은 ‘마음을 낮은 데 둔다’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이 말씀에 겸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 수 있다. 나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자칫 열등감과 혼동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겸손은 열등감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분명해집니다.
겸손은 나에게도 모든 것이 다 있고 충분합니다. 나의 생각도 옳으며 나도 판단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더 좋은 말,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겸손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열린 자세로 살아가는 것, 나만 옳다고 하는 닫힌 자세가 아니라 열린 마음과 귀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살아가는 태도가 겸손한 삶의 모습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의 상황을 다시 봅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겸손의 덕목이 실종된 게 아닐지 생각합니다. 남을 존중하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뜻을 반영하고 배우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생각이 정의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저주하고 분노하며 비난합니다. 겸손히 사라진 세상입니다. 특별히 한국 사회가 그러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우리 사회가 그러합니다.
우리는 현재 국가적, 민족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국회의 입법 파행과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부터 시작된 국가의 위기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매우 위중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좌와 우가 맹렬하게 싸우고 서로 간의 이념을 그치지 않는 전쟁 같은 상황입니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요?
항간에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어떻게든지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우리 국민을 한마음으로 묶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서로 갈라진 틈을 메울 수 있습니까? 바로 겸손함이 아닐까요? 겸손히 서로가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호령하고 가르치려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한마음과 한뜻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 한편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을 이어 갑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빌 2:2)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관점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일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미움이어서는 안 됩니다. 증오, 정치적인 욕망, 자기를 드러내고자 함, 다툼이나 허용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세상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겸손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빌 2:2)

이 말씀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됩니다. 또한 ‘뜻’이라는 단어도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한마음 한뜻이 돼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과 같이 나라가 서로 분열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한마음 한뜻을 가질 수 있을까요? 승패가 갈라져야 하나요? 어떻게 한마음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중간에서 절충하라는 말씀입니까? 한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그리스도인이 한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느 편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 현안에 어떤 한 선택을 결정해서 한마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렵고 복잡할수록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세상을 보고 계실지 생각하며, 그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마음을 설명합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모습,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는 과정, 그리고 또다시 낮은 자리에 처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종,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죽음에까지 순종하는 길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도 비워 내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주는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한마음이 되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마음을 품고 하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잊고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 그분의 고난과 자기 비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습, 그 길을 따라가는 절기입니다. 기독교가 십자군을 만들고 힘으로 일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이어졌죠. 그 기간이 그리스도 교회 성장의 시기, 부흥의 시기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시기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시기는 로마의 박해 아래에서도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는 이들이 있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놓고 순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였던 사람들, 온유하고 겸손하게 세상 권력에 맞서며 저항 없이 죽어 갔던 그 사람들이 있던 시기입니다. 곧 초대교회 시기가 하나님이 기뻐하신 시기, 기독교 부흥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세상이 어려운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변혁, 세상을 바꿔 낼 수 있는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이 민족과 우리 가정을 살릴 것입니다. 나의 삶을 바꿀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 나라를 바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리로 우리 모두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의 자리에서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주님의 종들, 그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정말 주님의 품 안에 올려 드리는 귀한 주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이 땅에서 진정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A World Without Humility

Philippians 2:1-4

The Greek philosopher Aristotle makes some interesting claims about gentlenessand humility in his work Nicomachean Ethics.He treatsgentleness as a defect. Gentleness is definedas deficiency in anger. Accordingly, it deserves criticism.

Aristotle writes, “He then who is angry on the right occasions and with the right persons, and also in the right manner, and at the right season, and for the right length of time, is praised. […] But he seems to err rather on the side of deficiency; […] Those who are not angered by what ought to anger them seem to be foolish, […] for such a man seems to feel nothing and to be pained by nothing, and, as he is never angered, to lack spirit to defend himself.” (Nicomachean Ethics, book II, chapter 5)

While Aristotle considered gentleness a deficiency, he loathed humility. Humility was not a virtue; it was generally considered a vice. A true man must be strong and domineering, having an attitude that boasts of his superiority. He is never gentle or humble. Therefore, Aristotle advises against humility. If you are humble, you will only be trampled by others.

This was the culture of Jesus’ time and that which surrounded the early church. The culture of the time was combative. The men considered great and admired were war heroes. For example, Homer’s Odyssey is filled with praise about legendary heroes who conquer everything. The ideal Greek herobecame angry, boasted, and showed off.

Even after thousands of years, however, this thought and attitude seem to persist in our world today. A pastor I knew in the United States was teaching gentleness as a fruit of the Spirit to middle schoolers in Sunday school. Since they were teenagers going throughpuberty, he thought it would be hard for them to be gentle even if they desired it. So he commented, “We want gentleness, a fruit of the Spirit, but it’s not easy being gentle, is it?” But to his surprise, they answered, “Nope. We don’t want gentleness at all.” He asked why. They answered, “It makes you look weak.”

Aculture of heroism pervades ourmodernsociety. It is even more evident in Korea’s reality today. Our culture believes thatholding your anger back is a defect. Gentleness is considered powerlessness; and if you are humble, you have no presence.

The streets are filled with angry voices and people are inciting anger and struggle. They say you must stand on the frontlines of war. Those who don’t are cowards, thoughtless, and powerless. In this “war,” gentleness is meaningless. It is merely a defect. In this struggle, humility is a vice. You can win in the struggle only by criticizing others, expressing your anger, and creating more anger.

A world without humility and gentleness continues even now. A world ignorant of humility and gentleness persists. This is the world we are living in.

Then how should Christians live in such a world? What standards must we live by?

Interestingly, our Lord spoke countless times about gentleness and humility, teaching us that they are the keys to solving everything: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Matthew 11:28-29)

Unlike the Greek philosophers and the views of the world, Jesus stressed the importance of gentleness and humility, stressing that true rest is found in them. He taught they were the keys to resolving all problems. Learning how to be gentle and humble was the path to true rest, peace, and relief.

Humans have an endless desire to conquer and to do as they want. They want to build their ideal kingdom, their ideal world. They believe this will lead to happiness. To this end, they readilystart wars and conflicts. But those wars have only created countless victims in past millennia.

On the contrary, Jesus teaches that true happiness is possible through gentleness and humility. If we follow the path of our Lord, we will find true rest.

Think about it. Can we build a happy family by being angry at the right time, at the right person, and in the right circumstance? Or will we have a happy home by treating our familywith gentleness and humility? The latter, I believe, is the answer. Then do you think it would be right to say that in a bigger unit, such as in society and politics, feeling and expressing our anger is the way to build a happy society and country? Of course not.

Then why is it that we encourage anger and incitestruggle in our society? This will not lead to true happiness. Yet,people urge us to shout angrily and fight for“justice” by struggling,with the aim of finally bringing happiness to the world. But no, this path will never lead to happiness.

There are those who can never be humble. First, peoplewith a sense of inferiority. Dear Church, have you ever seen someone who feels inferior to show humility? Humility is to willingly become lowly in heart—an impossible task for someone with a sense of inferiority. Therefore, humility is the virtue of a man with a healthy mind.

People suffering from a sense of inferiority cannot bear it when someone looks down upon them, becoming angry and frustrated. Accordingly,they would rather die than abase themselves. They try to look stronger than they actually are so as not to be ignored by others. They try not to show their weakness.

Second, the proud can never be humble. Pride may be another symptom of inferiority; it can never go hand in hand with humility. It is impossible for the man who esteems himself, boasts of his abilities, and looks down on others to humble himself. The proud cannot be humble.

The proud are easily angered, complain, and are constantly unhappy. They are never content even with possessions. They are ungrateful,bitter, and dissatisfied. Only the humble man can be content, thankful, and forgiving. He can love and share. He can build a truly healthy community.

Now let’s return to today’s Scripture. Philippians is Paul’s advice to the saints in Philippi. The church in Philippi, in particular, was loved and praised by Paul; yet there was envy and jealousy within it, preventing the saints from becoming one. So,Paul, concerned about this matter, startswith these words:“Therefore if you have any encouragement from being united with Christ, if any comfort from his love, if any common sharing in the Spirit, if any tenderness and compassion,”(Philippians 2:1)

Paul is saying he will write about how Christians should act when working for God: “then make my joy complete by being like-minded, having the same love, being one in spirit and of one mind. Do nothing out of selfish ambition or vain conceit. Rather, in humility value others above yourselves,”(Philippians 2:2-3)

Here the Greek word for “humility” is“ταπεινοφροσύνη (tapeinophrosune),” which means“humility or lowliness of mind.”It is a compound of “ταπεινὸς (tapeinos, lowly)” and “φρήν(phren, mind, understanding).”Thus, it means “to place one’s mind in a lowly position.”

What does it mean to be humble, or to put one’s mind in a lowly place? I once preached about this before, but today I want to focus on a different aspect in today’s text.

First, the meaning of “to place one’s mind in a lowly place” may be explained by the words “value others above yourselves.”Thismeans to think, speak, and act as if others are better than I am.

You may confuse this with a sense of inferiority, but the two are different: what Paul encourages is to value others with a sense of strong self-esteem. Therefore, to value others above oneselfincludeshaving self-esteem.

To value others above oneself is to think that I havesomething to learn from others. It means to acknowledge my defects, to be willing to learn, and to have an open attitude. This is humility. This is the meaning of putting one’s heart in a lowly position.

Let’s reexamine the confusion in Korea today. Our world seems to have lostthe virtue of humility, that is, the virtue of valuing others above oneself. Respect for others seems to be non-existent. People are unwilling to accept others’ opinions and thoughts, refusing to learn from them. Only I am right; my idea is justice; and what I say is right. People speak, argue, and profess their ideas from a self-centered view. In doing so, they express their anger and criticism and even judge others.

It is a world void of humility. We see this in our homes, churches, and society.

As a nation and a people, we are now going through an extremely difficult time. We are going through a crisisalmost like a civil war.

The currentnational crisis, which started from a disfunction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the president’s martial law declaration, is so severe that we cannot even foresee the immediate future.

How can we overcome this difficult situation? How can we reach national unity when Koreans are so divided? We must become humble. We must become lowly in mind. We must come down from our commanding, imposing, and assertive positions. Only then will this country have hope.

Paul goes on to say, “having the same love.” A critical perspective of those who do the work of God is love. People who do God’s work must do it for love. Not for hatred or for political ambition or to show off. They must not fight either. We must be united only by love—love for our country, love for our people, love for the world, and love for the church. We must listen to others and become humble.

There is another way that the Bible teaches us. Look at these words: “being like-minded, having the same love, being one in spirit and of one mind.” Here the word “mind”is repeated. What it means is that we should become of one mind.

Dear brothers and sisters, how can this divided nation be of one mind? Should we become leftists? Rightists? What does it mean to be of one mind? Does it mean we must becomecentrists and compromise? The following verse explains the meaning of “being of one mind”: “In your relationships with one another, have the same mindset as Christ Jesus.” (Philippians 2:5)

The Bible teaches Christians to be of one mind. But this does not mean beinglike-minded in terms of political beliefs or opinions on current issues, such as being a leftist or a rightist. It means to be of one mind by having the same mindset as Christ. That is, to become one with Christ’s mind.

The more confusing and complicated this world becomes the more we must return to the basics. In doing so, the first thing we must consider is where is Christ’s heart? What is Jesus thinking? What would be the mind of our Lord as He looks upon this world today? We must become one with that mind of Christ. The verses leading up to 2:11 explain the heart and mind of Jesus.

It tells us about Jesus who denied Himself completely, who not only denied Himself but put on the appearance of a servant and became human, who not only became human but further humbled Himself by accepting and obeying His calling, who becomeobedient to death on the Cross, and who went the path of obedience by giving His life on the Cross. This is the mind of Christ.

What then does it mean for us to have Christ’s mind? Of course, we too must deny ourselves. We must become humble. We too must be obedient to death. But the essence of these words is that Jesus lived with a heart obedient to God’s will. Jesus lived with a heart obedient to God and with a mind that sought God’s will. He was obedient to God’s will to the end, surrendered His life completely, and gave His life on the Cross.

To seek God’s will—this is the mind of Christ. Therefore, to be of one mind means that all Christiansmust be of one mind by having Christ’s mind that seeks God’s will. The Bible teaches us that all Christians must be like-minded with a mind that seeks that will of God.

We are celebrating Lent. In this season, we remember Jesus who came to earth in a human body, His passion, and His self-denial. We desire to become more like Him, to follow Him. There was a time, quite a long period, when the church pursued the Crusade and worked throughstrength. But that period was by no means a period of growth or revival of the church of Christ. It was neither, I believe, a time that God was pleased with.

Rather, I believe, that the period God was pleasedwith was when Christians,under Roman persecution, gave their lives in faith for the work God, becomingmartyrs for preaching the Gospel of Christ on earth. Christians in those times defied the power of this world in humility and meekness and through death. They died powerlessly without resisting. I believe that period, the early church, was the period God was pleased with. It was also the time of the church’s revival.

When I say this, you may be wondering, ‘What are you suggesting? What must we do when this nation is in such turmoil?’ Dear Church, let us approach God. There is a most powerful weapon we can wield. A great power that can change and transform the world. We have that weapon.

It is that which goes beyond action: prayer that trusts God. This prayer will save our people. This prayer will save us, our families. It will change our lives. It will change this nation.

Dear Church, may we pray. May we all go to the place of obedience where we seek and fully obey His will. May we humble ourselves in that lowly position that Jesus showed us, as servants obedient to God’s will. By doing so, may we become God’s precious people who wholeheartedly entrust this nation and this people to God in prayer. Then we will find true hope in this land. Let’s pray.

btn_switch

빌립보서 2:1~5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투쟁과 다툼이 만연한 사회에서 온유와 겸손은 도리에 맞지 않는 덕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온유’와 ‘겸손’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를 하나의 모자람의 범주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온유를 ‘화를 낼 줄 모름’으로 정의합니다. 그것은 비난받을 만한 태도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적절한 시간 동안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칭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오히려 모자람 쪽에 더 치우치는 듯합니다…. 적절한 경우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바보로 여겨지고… 그러한 사람은 지각이나 고통 감각이 없는 듯하며, 분노에 대한 무감각으로 인해 자신을 방어할 마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4권 5장, 1~3)

그래도 온유는 모자람의 영역으로 이야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겸손’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겸손은 덕이 아니라 악덕에 속했습니다. 진짜 사람, 남자라면 힘이 세고 지배적이며 자신의 우월감에 대하여 자랑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하지 말라”라고 가르칩니다. 겸손하면 결국 남에게 짓밟힐 뿐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자의 지혜입니다. 이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기와 초대교회의 주변 환경과 문화였습니다.
왜 그리스의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당시의 상황이 전쟁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장 위대하고 추앙받던 사람들은 영웅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보아도 모든 것을 정복하는 신화적 초영웅에 대한 칭송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은 분노할 줄 알고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할 줄 아는 당당한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런 영웅들이 당시대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이후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런 생각과 태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미국에 있었던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중학생 아이들에게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성령의 열매 중 온유에 대해서 수업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들이었기에 온유는 그들에게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얻고 싶지만, 너희들에게는 참 쉽지 않지?” 그랬더니 아이들이 “아니요. 전혀 갖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습니다. “왜?”라고 물으니 아이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약해 보이잖아요.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오늘 현대 문화도 영웅주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겸손은 힘들다’라는 어떤 방송 프로그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놓고 겸손을 비하하는 듯한 제목이었습니다. ‘당당해야 한다. 자신감 넘치는 것이 좋다’라는 현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그 문화가 더욱 뚜렷하게 보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것을 모자람으로, 온유를 능력 없음으로, 겸손함을 존재감 없으므로 치부해 버리는 문화가 오늘의 문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리마다 다투는 소리가 가득하고 서로 분노를 부추기며 투쟁을 역설합니다. 전쟁의 전선에 설 것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자리에 나와서 한번 영웅이 되어 보라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겁하고 능력 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비난합니다.
전쟁의 자리에서 온유는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모자람이겠죠. 이 투쟁의 자리에서 겸손은 악덕에 해당할 것입니다. 성난 사람들처럼 비난을 쏟아 내고 더 큰 분노를 만들어야만 투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서 전투를 하는 군인들에게 온유한 군인, 겸손한 군인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겸손이 사라진 사회는 전쟁 사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잃어버린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겸손과 온유를 모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정확히 말하면 겸손과 온유를 내다 버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온유와 겸손에 있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온유와 겸손이 악덕으로 이해된 데에는 이 땅의 문화가 여전히 전쟁과 투쟁의 문화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화가 남겨진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함에 대해서 수없이 말씀하시며 이것이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29)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세상의 관점과는 달리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을 역설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 안에 진정한 쉼과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 그 안에 안식과 평안과 쉼과 해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미 온유와 겸손이 중요한 개념으로 인정받지 않던 시대에 예수님이 하신 이 일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전쟁과 투쟁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이 땅을 다른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이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있는 세상을 우리가 이 땅에 만들어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끝없이 정복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라, 꿈꾸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우리의 욕망으로 작동합니다. 내가 욕망하던 그 나라, 그 시스템을 만들면 행복이 올 것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전쟁도 불사합니다. 그 투쟁이 역사가 기록되던 이래로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고 희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온유와 겸손을 배움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 갈 때만 진정한 행복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을 우리 가정에 한번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요? 어떤 적절한 시간과 상황 속에서 가족에게 분노를 느끼며 그것을 표출하는 것이 칭찬받을 만하다면, 이 원리를 여러분의 가정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할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멋진 가정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말 속에는 이미 파멸되는 사회가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정복적인 권한이 팽배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온유와 겸손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서로를 향하여 비난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회나 정치로 확대하면 분노를 적절하게 느끼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것이 진실일까요?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세상의 사람들 여러 사람들은 이미 사회 속에서 서로 분노를 부추기며 투쟁을 선동합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함에도 끊임없이 분노를 양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이렇게 해야만 세상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도저히 겸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여러분,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열등함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해서 불만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밑으로 내려와서 낮은 자리에 처할 수 있겠습니까?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결코 겸손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 조금만 자신을 낮게 본다고 생각하면 분노하고 좌절하며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더 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겸손함’이란 ‘성숙한 정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기의 만족감과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더 높은 생각의 경지입니다.
또 겸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결코 겸손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며 다른 일을 낮게 여기고 무시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기는 어렵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겸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늘 쉽게 분노하고 불평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늘 불안해하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또한 감사가 없고 원망과 불만이 그들을 따라다닙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온유와 겸손은 더 강한 정신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실천할 수 있는 덕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말씀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랑과 칭찬을 받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 안에 서로 하나 되게 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문제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빌 2:1, 새번역)

말씀의 내용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거나, 성령 안에서 교제를 갖거나 동정심 혹은 자비로 일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작게는 가정에서, 좀 더 넓게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더 넓게는 세상을 위해 교회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준을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2~3)

여기서 사용하는 ‘겸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타페이노프로쉬네(ταπεινοφροσύνη[tapeinophrosune], Humility, lowliness of mind)’입니다. ‘낮은’이라는 뜻인 ‘타페이노스(ταπεινὸς[tapeinos], lowly)’와 ‘마음’이라는 뜻인 ‘프랜(φρήν[phren], mind, understanding)’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즉, 겸손은 ‘마음을 낮은 데 둔다’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이 말씀에 겸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 수 있다. 나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자칫 열등감과 혼동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겸손은 열등감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분명해집니다.
겸손은 나에게도 모든 것이 다 있고 충분합니다. 나의 생각도 옳으며 나도 판단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더 좋은 말,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겸손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열린 자세로 살아가는 것, 나만 옳다고 하는 닫힌 자세가 아니라 열린 마음과 귀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살아가는 태도가 겸손한 삶의 모습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의 상황을 다시 봅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겸손의 덕목이 실종된 게 아닐지 생각합니다. 남을 존중하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뜻을 반영하고 배우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생각이 정의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저주하고 분노하며 비난합니다. 겸손히 사라진 세상입니다. 특별히 한국 사회가 그러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우리 사회가 그러합니다.
우리는 현재 국가적, 민족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국회의 입법 파행과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부터 시작된 국가의 위기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매우 위중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좌와 우가 맹렬하게 싸우고 서로 간의 이념을 그치지 않는 전쟁 같은 상황입니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요?
항간에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어떻게든지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우리 국민을 한마음으로 묶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서로 갈라진 틈을 메울 수 있습니까? 바로 겸손함이 아닐까요? 겸손히 서로가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호령하고 가르치려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한마음과 한뜻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 한편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을 이어 갑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빌 2:2)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관점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일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미움이어서는 안 됩니다. 증오, 정치적인 욕망, 자기를 드러내고자 함, 다툼이나 허용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세상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겸손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빌 2:2)

이 말씀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됩니다. 또한 ‘뜻’이라는 단어도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한마음 한뜻이 돼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과 같이 나라가 서로 분열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한마음 한뜻을 가질 수 있을까요? 승패가 갈라져야 하나요? 어떻게 한마음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중간에서 절충하라는 말씀입니까? 한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그리스도인이 한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느 편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 현안에 어떤 한 선택을 결정해서 한마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렵고 복잡할수록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세상을 보고 계실지 생각하며, 그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마음을 설명합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모습,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는 과정, 그리고 또다시 낮은 자리에 처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종,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죽음에까지 순종하는 길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도 비워 내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주는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한마음이 되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마음을 품고 하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잊고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 그분의 고난과 자기 비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습, 그 길을 따라가는 절기입니다. 기독교가 십자군을 만들고 힘으로 일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이어졌죠. 그 기간이 그리스도 교회 성장의 시기, 부흥의 시기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시기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시기는 로마의 박해 아래에서도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는 이들이 있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놓고 순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였던 사람들, 온유하고 겸손하게 세상 권력에 맞서며 저항 없이 죽어 갔던 그 사람들이 있던 시기입니다. 곧 초대교회 시기가 하나님이 기뻐하신 시기, 기독교 부흥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세상이 어려운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변혁, 세상을 바꿔 낼 수 있는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이 민족과 우리 가정을 살릴 것입니다. 나의 삶을 바꿀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 나라를 바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리로 우리 모두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의 자리에서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주님의 종들, 그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정말 주님의 품 안에 올려 드리는 귀한 주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이 땅에서 진정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5년 3월 16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겸손을 잃어버린 세상” (빌2:1~4)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76장, 212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우리 주위에 온유하고 겸손하다 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의 어떠한 모습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하다 할 수 있습니까? 반대로, 그러한 사람이 주위에 없다면, 요즘 온유하고 겸손하다 할 만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교의 요약>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를 모자람으로, 겸손을 악덕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전쟁 문화였습니다. 사람들은 분노로 자신을 드러내는 영웅을 칭송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온유는 능력 없음으로, 겸손은 존재감 없음으로 치부되며, 세상은 투쟁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만이 참된 쉼과 행복의 열쇠라고 하셨습니다. 투쟁 속에서는 희생만 있을 뿐, 행복한 가정과 나라를 이루는 것은 오직 온유와 겸손입니다.

  겸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은 항상 불만과 원망이 가득합니다. 

  반면, 겸손한 사람은 만족하며 감사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낫게 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지만 그것은 열등감이 아니라, 오히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통해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겸손이 사라졌습니다. 서로 존중하기보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 속에서 대통합을 이루려면 사랑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셨으며,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예수님의 겸손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대립과 갈등이 깊어진 우리나라 가운데 온유와 겸손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 참된 변화와 화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누기>

  1. 우리 구역 식구들에게서 내가 배웠으면 하는 점들이 있습니까? 각 사람에게서 본받고 싶은 점들을 찾아서 나누어 봅니다.
  2. 사순절을 지내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삶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나라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가 해결되길 기도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시고,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시어 말씀에 순종하신 주님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의 삶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이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럽습니다. 주님의 겸손을 배워 바르게 세워져가는 우리 소망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