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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마냥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오래전에 한 연극을 보려고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연극은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라는 연극이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hett)가 쓴 작품이죠. 이 작품에는 블라드미르라고 하는 사람과 에스트라공이라고 하는 두 사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어느 나무 아래에서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장면도 별로 바뀌지 않고요. 그저 비슷한 장소에서 두 사람이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연극이었습니다. 대략 연극의 대사는 이러했습니다.
블리디미르(디디): 우린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에스트라공(고고): 어딜 가도 마찬가지지.
블라디미르(디디): 고고, 그런 소리 말게, 내일이면 다 잘 되거니까.
에스트라공(고고): 잘 된다고? 왜?
블라디미르(디디): 자네 그 꼬마가 하는 얘기 못 들었나?
에스트라공(고고): 못 들었네.
블라디미르(디디): 그놈이 말하길 고도가 내일 온다는군. 그게 무슨 뜻이겠나?
에스트라공(고고):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 뭐.
블라디미르(디디): 내일 같이 목이나 매세. 고도가 안 온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고고): 고도가 오면?
블라디미르(디디): 그럼 사는 거지.
대사의 짧은 일부를 보여 드렸는데요. 좀 이해가 되시는지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되죠. 갑자기 왜 목을 매자고 하는지, 또 어떻게 산다는 것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 대사입니다. 이런 대사가 2시간여 동안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두서없는 대화, 무의미한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심지어는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밥은 먹었느냐?”라고 묻는데 상대방은 “나는 술이 싫어.”라고 대답하는 대화의 연속입니다.
고도가 누구인지, 고도가 오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심지어는 고도가 실존하고는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고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연극입니다. 저는 연극을 보면서 줄곧 고도가 누굴까 생각하면서 몰두해서 연극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답이 주어지지 않았고, 어떤 결론에도 이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대화만 이어지다가 허무하게 연극이 막을 내렸습니다. 한편으로 본다면 정말 지루하고 허무한 연극이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실망을 억누르고 감춘 채, 그래도 노벨상을 받았다는 작품이니 무언가 느꼈다는 듯이 표정을 관리하면서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젊은 친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설교보다 더 지루한 것이 여기 있었네.” 신학생인 저는 뜨끔했고요. 한편으로는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생각도 들며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의 평가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오늘 설교도 지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연극보다는 괜찮을 것 같으니 좀 참고 설교를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은 1953년에 초연되었습니다. 그런데 초연 후에 고도가 무엇일까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과 견해들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고도’라는 표현이 영어 단어로는 ‘Godot’입니다. 그래서 이름 앞 글자인 ‘God’을 보고 그가 하나님, 신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작가조차도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연극은 우리가 무언가 마냥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언가를 계속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합니다. “밥은 먹었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술이 싫어”라고 말하는 대화가 이어집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입니다. 그들은 그저 각자 생각에 몰입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이 이 연극의 주된 흐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자녀의 대학 합격 소식을 기다릴 수도 있겠고, 사업의 성공을 기다릴 수도 있겠죠. 또 결혼이나 다양한 것들을 기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정말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상과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 ‘미래’는 두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 단어 중에 ‘미래’를 나타내는 단어는 크게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Futurum(푸투룸)’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Future’이 파생되었습니다. 이 Futurum은 한마디로 ‘이어지는 미래’를 의미합니다. 어제가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는 이러한 미래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미래는 변화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예측이 가능한 미래를 Futurum이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내일은 무엇을 하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질을 하겠죠. 그리고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서 출근을 하겠죠. 그다음 회사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퇴근하겠죠. 그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Futurum은 이렇게 이어지는 미래, 예측이 가능한 미래입니다. 사실 이 미래는 닫혀 있는 미래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종종 “내일 뭐 할 거야?”라고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는 미래가 Futurum입니다.
그런데 라틴어에는 미래의 의미를 가진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Adventus(아드벤투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2025년 11월 13일이 무슨 날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1년 후 가을의 어느 날쯤 되겠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어느 날일 것입니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느 분들은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있는 날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출근이 늦어질 수도 있는 날, 교통이 조금 복잡한 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의 공통점은 예측이 가능한 미래입니다. 누구에게나 느껴질 수 있고, 누구에게나 오게 되는 미래입니다. Futurum입니다.
그런데 이날이 어떤 사람에게는 Futurum이 아닌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내년에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벌써 그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세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미래이지요. 이것이 Adventus입니다. 또한 어떤 여성이 아이를 가지고 4개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배가 불러 오고 아기의 움직임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산달이 되면 그 아이는 태어날 것입니다. 아이를 잉태했는데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이를 잉태했으면 반드시 아이는 태어나게 되어 있죠. 이것이 Adventus입니다. 이미 확정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확실하면서도 점점 다가오고 있는 Adventus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을 통해 대학을 가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시험 보는 날이 Adventus이겠죠.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미래입니다. 아기를 임신한 여인에게는 아기가 태어나는 날이 Adventus입니다. 그날은 정해져 있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빌린 돈을 갚는 날도 Adventus이죠. 점점 그날이 다가오고 있고, 그날에는 반드시 빌린 돈을 갚아야 합니다.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는 수감자들에게도 Adventus가 다가오고 있죠. 석방의 날, 해방의 날, 자유의 몸이 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Adventus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확정된 다가오는 미래, ‘Adventus’가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오지만 나에게는 오지 않는 미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대부분 결혼하는 날이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평생 그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죠. 암을 앓고 있는 이들은 암에서 완치되어 해방되는 그날을 모두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날이 올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기를 임신하게 되는 날도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다가오고 있는 어떤 미래가 누군가에게는 올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하여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확정된 미래, Adventus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입니다. 모두에게 죽음은 정해져 있고, 오고 있으며, 확실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 Adventus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확정된 미래이고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미래라면, 과연 우리는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거절할 수 없는 미래, 죽음이라는 미래인 Adventus를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저 죽음을 기다리며, 맞이할 죽음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확정되어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Adventus를 어떻게 물리칠지, 혹시라도 어떻게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내가 죽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낼 것인지,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자 기다림 아니겠습니까?
한 사형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형 집행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확정된 미래인 사형 집행일 Adventus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런데 확정된 미래를 앞둔 이가 만약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다가오고 있는 사형 집행이 취소되는 것, 그야말로 석방의 소식, 해방의 소식일 것입니다. 사형수가 기다리고 있는 고도는 바로 자유, 해방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 연극이 발표되고 나서 대부분의 많은 평론가들이 연극에 대하여 혹평을 쏟아 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 곳에서는 아주 엄청난 열렬한 환영과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곳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샌 퀜틴 교도소였습니다. 그 교도소에서 이 연극이 상영되었는데, 죄수들은 연극이 끝난 다음에 기립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기 말만 횡설수설하는 것 같은 대화 속에서도 분명히 기다리고 갈구하는 것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죄수들에게는 그 고도가 분명했습니다. 자유, 해방, 석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다림을 나타내는 그 연극을 보며 환호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확정된 미래는 ‘죽음’ 이외에 또 하나의 Adventus가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는 ‘Advent’입니다. 다가오고 있는 확정된 미래를 표현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무엇인가 확정된 미래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 입시 시험의 날짜가 오고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를 한국말로 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모든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Adventus, Advent는 죽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죽음 이외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성경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한 아기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한 아기를 예정하시고 이 땅에 보내시기로 확정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기가 오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실 것입니다. 기묘자로서, 모사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평강의 왕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풀어내시고 평강의 왕으로 우리를 통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한 가지 확실한 Adventus는 죽음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또 다른 Adventus는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 9장에서는 인간의 실존 상태를 “전에 고통받던 자들”(1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2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깜깜한 중에 고통받으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결국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인류를 위해 한 아기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아기가 이미 잉태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마침내 그 아이가 마리아의 몸에 오시게 된 것은 이사야의 예언 뒤 오랜 후의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전에 이미 자신의 아들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확정된 미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우리에게 옵니다. 확정된 미래로 다가옵니다. 어두운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사망 권세 아래에 눌려 있는 이들을 위해 한 아기가 옵니다. 그는 오셔서 고통받는 이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며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시며 권좌에 앉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으로 불릴 것이고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이사야 말씀 중에 ‘기묘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영어로는 ‘Wonderful’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놀라운 일을 하실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아주 멋진 일을 하실 분이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시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십니다.>
한 아기가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이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복음서가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누가복음은 총 24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1장과 2장을 할애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먼저 예언의 말씀과 함께 세례 요한이 잉태하는 과정과 아버지 어머니의 믿음의 내용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으로 오시는 과정과 천사들의 예언, 마리아의 믿음,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누가복음은 이사야서가 예언한 ‘한 아기가 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 오실 아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최근 새벽 기도에서 말씀을 읽으면서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 장면을 함께 읽었습니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7: 19)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서 말했던 이유는 그가 옥에서 듣는 예수님의 사역의 소식이 그가 기대했던 모습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면 성령으로 세례를 부으며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심판하실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자 세례 요한은 실망한 듯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말씀을 이사야서의 말씀을 연결해서 표현한다면 이런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은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그 아이가 맞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2)
이 말씀은 그저 단순한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묘사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 안에 들어 있던 한 아기의 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첫 번째로 설교하실 때 이사야 61장을 인용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 61:1)
“한 아기가 온다”라는 예언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요? 성령을 받으신 주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실 아기는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다른 장에서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사 29:18~19)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사 35:5~6)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사 26:19)
아들이 온다는 사실, Adventus를 전했던 이사야의 예언은 이런 말씀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맹인의 눈을 밝히 열어 주시며, 귀를 열어 주시고 저는 자를 걷게 하시는 주님이 오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2)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인간, 아무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한 아기가 오십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또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 주시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우리에게 오실 아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의 눈을 열어 주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여러분의 귀를 열어 주시고, 그리고 어긋나 있는 우리의 다리를 고쳐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열어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십니다. “한 아기가 온다.” 이 기쁨의 소식이 우리 모두에게 참된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사야 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람은 누구나 마냥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오래전에 한 연극을 보려고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연극은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라는 연극이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hett)가 쓴 작품이죠. 이 작품에는 블라드미르라고 하는 사람과 에스트라공이라고 하는 두 사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어느 나무 아래에서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장면도 별로 바뀌지 않고요. 그저 비슷한 장소에서 두 사람이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연극이었습니다. 대략 연극의 대사는 이러했습니다.
블리디미르(디디): 우린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에스트라공(고고): 어딜 가도 마찬가지지.
블라디미르(디디): 고고, 그런 소리 말게, 내일이면 다 잘 되거니까.
에스트라공(고고): 잘 된다고? 왜?
블라디미르(디디): 자네 그 꼬마가 하는 얘기 못 들었나?
에스트라공(고고): 못 들었네.
블라디미르(디디): 그놈이 말하길 고도가 내일 온다는군. 그게 무슨 뜻이겠나?
에스트라공(고고):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 뭐.
블라디미르(디디): 내일 같이 목이나 매세. 고도가 안 온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고고): 고도가 오면?
블라디미르(디디): 그럼 사는 거지.
대사의 짧은 일부를 보여 드렸는데요. 좀 이해가 되시는지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되죠. 갑자기 왜 목을 매자고 하는지, 또 어떻게 산다는 것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 대사입니다. 이런 대사가 2시간여 동안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두서없는 대화, 무의미한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심지어는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밥은 먹었느냐?”라고 묻는데 상대방은 “나는 술이 싫어.”라고 대답하는 대화의 연속입니다.
고도가 누구인지, 고도가 오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심지어는 고도가 실존하고는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고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연극입니다. 저는 연극을 보면서 줄곧 고도가 누굴까 생각하면서 몰두해서 연극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답이 주어지지 않았고, 어떤 결론에도 이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대화만 이어지다가 허무하게 연극이 막을 내렸습니다. 한편으로 본다면 정말 지루하고 허무한 연극이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실망을 억누르고 감춘 채, 그래도 노벨상을 받았다는 작품이니 무언가 느꼈다는 듯이 표정을 관리하면서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젊은 친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설교보다 더 지루한 것이 여기 있었네.” 신학생인 저는 뜨끔했고요. 한편으로는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생각도 들며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의 평가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오늘 설교도 지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연극보다는 괜찮을 것 같으니 좀 참고 설교를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은 1953년에 초연되었습니다. 그런데 초연 후에 고도가 무엇일까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과 견해들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고도’라는 표현이 영어 단어로는 ‘Godot’입니다. 그래서 이름 앞 글자인 ‘God’을 보고 그가 하나님, 신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작가조차도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연극은 우리가 무언가 마냥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언가를 계속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합니다. “밥은 먹었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술이 싫어”라고 말하는 대화가 이어집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입니다. 그들은 그저 각자 생각에 몰입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이 이 연극의 주된 흐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자녀의 대학 합격 소식을 기다릴 수도 있겠고, 사업의 성공을 기다릴 수도 있겠죠. 또 결혼이나 다양한 것들을 기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정말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상과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 ‘미래’는 두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 단어 중에 ‘미래’를 나타내는 단어는 크게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Futurum(푸투룸)’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Future’이 파생되었습니다. 이 Futurum은 한마디로 ‘이어지는 미래’를 의미합니다. 어제가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는 이러한 미래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미래는 변화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예측이 가능한 미래를 Futurum이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내일은 무엇을 하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질을 하겠죠. 그리고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서 출근을 하겠죠. 그다음 회사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퇴근하겠죠. 그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Futurum은 이렇게 이어지는 미래, 예측이 가능한 미래입니다. 사실 이 미래는 닫혀 있는 미래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종종 “내일 뭐 할 거야?”라고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는 미래가 Futurum입니다.
그런데 라틴어에는 미래의 의미를 가진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Adventus(아드벤투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2025년 11월 13일이 무슨 날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1년 후 가을의 어느 날쯤 되겠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어느 날일 것입니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느 분들은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있는 날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출근이 늦어질 수도 있는 날, 교통이 조금 복잡한 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의 공통점은 예측이 가능한 미래입니다. 누구에게나 느껴질 수 있고, 누구에게나 오게 되는 미래입니다. Futurum입니다.
그런데 이날이 어떤 사람에게는 Futurum이 아닌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내년에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벌써 그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세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미래이지요. 이것이 Adventus입니다. 또한 어떤 여성이 아이를 가지고 4개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배가 불러 오고 아기의 움직임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산달이 되면 그 아이는 태어날 것입니다. 아이를 잉태했는데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이를 잉태했으면 반드시 아이는 태어나게 되어 있죠. 이것이 Adventus입니다. 이미 확정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확실하면서도 점점 다가오고 있는 Adventus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을 통해 대학을 가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시험 보는 날이 Adventus이겠죠.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미래입니다. 아기를 임신한 여인에게는 아기가 태어나는 날이 Adventus입니다. 그날은 정해져 있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빌린 돈을 갚는 날도 Adventus이죠. 점점 그날이 다가오고 있고, 그날에는 반드시 빌린 돈을 갚아야 합니다.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는 수감자들에게도 Adventus가 다가오고 있죠. 석방의 날, 해방의 날, 자유의 몸이 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Adventus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확정된 다가오는 미래, ‘Adventus’가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오지만 나에게는 오지 않는 미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대부분 결혼하는 날이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평생 그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죠. 암을 앓고 있는 이들은 암에서 완치되어 해방되는 그날을 모두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날이 올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기를 임신하게 되는 날도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다가오고 있는 어떤 미래가 누군가에게는 올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하여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확정된 미래, Adventus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입니다. 모두에게 죽음은 정해져 있고, 오고 있으며, 확실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 Adventus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확정된 미래이고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미래라면, 과연 우리는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거절할 수 없는 미래, 죽음이라는 미래인 Adventus를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저 죽음을 기다리며, 맞이할 죽음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확정되어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Adventus를 어떻게 물리칠지, 혹시라도 어떻게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내가 죽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낼 것인지,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자 기다림 아니겠습니까?
한 사형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형 집행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확정된 미래인 사형 집행일 Adventus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런데 확정된 미래를 앞둔 이가 만약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다가오고 있는 사형 집행이 취소되는 것, 그야말로 석방의 소식, 해방의 소식일 것입니다. 사형수가 기다리고 있는 고도는 바로 자유, 해방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 연극이 발표되고 나서 대부분의 많은 평론가들이 연극에 대하여 혹평을 쏟아 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 곳에서는 아주 엄청난 열렬한 환영과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곳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샌 퀜틴 교도소였습니다. 그 교도소에서 이 연극이 상영되었는데, 죄수들은 연극이 끝난 다음에 기립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기 말만 횡설수설하는 것 같은 대화 속에서도 분명히 기다리고 갈구하는 것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죄수들에게는 그 고도가 분명했습니다. 자유, 해방, 석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다림을 나타내는 그 연극을 보며 환호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확정된 미래는 ‘죽음’ 이외에 또 하나의 Adventus가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는 ‘Advent’입니다. 다가오고 있는 확정된 미래를 표현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무엇인가 확정된 미래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 입시 시험의 날짜가 오고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를 한국말로 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모든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Adventus, Advent는 죽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죽음 이외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성경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한 아기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한 아기를 예정하시고 이 땅에 보내시기로 확정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기가 오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실 것입니다. 기묘자로서, 모사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평강의 왕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풀어내시고 평강의 왕으로 우리를 통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한 가지 확실한 Adventus는 죽음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또 다른 Adventus는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 9장에서는 인간의 실존 상태를 “전에 고통받던 자들”(1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2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깜깜한 중에 고통받으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결국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인류를 위해 한 아기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아기가 이미 잉태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마침내 그 아이가 마리아의 몸에 오시게 된 것은 이사야의 예언 뒤 오랜 후의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전에 이미 자신의 아들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확정된 미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우리에게 옵니다. 확정된 미래로 다가옵니다. 어두운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사망 권세 아래에 눌려 있는 이들을 위해 한 아기가 옵니다. 그는 오셔서 고통받는 이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며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시며 권좌에 앉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으로 불릴 것이고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이사야 말씀 중에 ‘기묘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영어로는 ‘Wonderful’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놀라운 일을 하실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아주 멋진 일을 하실 분이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시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십니다.>
한 아기가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이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복음서가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누가복음은 총 24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1장과 2장을 할애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먼저 예언의 말씀과 함께 세례 요한이 잉태하는 과정과 아버지 어머니의 믿음의 내용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으로 오시는 과정과 천사들의 예언, 마리아의 믿음,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누가복음은 이사야서가 예언한 ‘한 아기가 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 오실 아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최근 새벽 기도에서 말씀을 읽으면서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 장면을 함께 읽었습니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7: 19)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서 말했던 이유는 그가 옥에서 듣는 예수님의 사역의 소식이 그가 기대했던 모습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면 성령으로 세례를 부으며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심판하실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자 세례 요한은 실망한 듯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말씀을 이사야서의 말씀을 연결해서 표현한다면 이런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은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그 아이가 맞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2)
이 말씀은 그저 단순한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묘사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 안에 들어 있던 한 아기의 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첫 번째로 설교하실 때 이사야 61장을 인용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 61:1)
“한 아기가 온다”라는 예언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요? 성령을 받으신 주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실 아기는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다른 장에서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사 29:18~19)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사 35:5~6)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사 26:19)
아들이 온다는 사실, Adventus를 전했던 이사야의 예언은 이런 말씀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맹인의 눈을 밝히 열어 주시며, 귀를 열어 주시고 저는 자를 걷게 하시는 주님이 오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2)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인간, 아무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한 아기가 오십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또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 주시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우리에게 오실 아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의 눈을 열어 주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여러분의 귀를 열어 주시고, 그리고 어긋나 있는 우리의 다리를 고쳐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열어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십니다. “한 아기가 온다.” 이 기쁨의 소식이 우리 모두에게 참된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12월 1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곧 오소서 임마누엘” (이사야 9장 6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406장, 104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이사야 9장 6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12월 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는 혹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모른 채, 마냥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설교의 요약
라틴어 중에서 미래를 나타내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Futurum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Future가 왔습니다. Futurum은 한 마디로 “이어지는 미래”입니다.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미래입니다. 이 미래는 변화가 없고 거의 예측이 가능합니다. 닫힌 미래입니다. 내일 아침밥을 먹고, 출근을 하는 등 예상되는 미래입니다.
또 다른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Adventus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예를 들어 2025년 11월 13일은 그냥 늦가을의 어느 날, 그냥 미래일 수 있지만, 조금 특정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일입니다. 내년에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나, 그 가족에게 이 날은 더 이상 평범한 날이 아닙니다. 그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이렇듯 확실하면서도 점점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을 영어로 Advent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다가오고 있는 확정된 미래를 표현하는 Adventus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대림절은 그래서 “오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확정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서 9장의 말씀은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마치 임산부에게 아이가 잉태된 것처럼, 그렇게 한 아기가 오고 있음을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그 아들, 확정된 미래의 아들에 대해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예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사 9:6, 새번역). 어두운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사망의 권세 아래 눌려 있는 이들을 위해 한 아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자유, 해방이 한 아기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기가 막히게 좋은 분이 온다는 것입니다. 한 아들이 오셔서, 그 아들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불쌍하고, 고통당하며, 자유롭지 않으며,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오셔서 함께하여 주십니다. 그 아들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확정된 미래입니다.
나누기
- 여러분은 요새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마음에는 무엇이 있나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 한 아기를 맞이하는 대림절의 시기를 묵상하며, 우리에게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이 있는지,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그토록 기다리는 구원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한 아기를 예정하시고, 확정된 미래가 있게 하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참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그 오신 아기를 우리의 마음에 모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품게 되고, 주님을 잉태할 때, 하나님의 나라, 그 자유와 해방이 확정된 미래가 될 것을 믿습니다. 이번 대림절이 아기로 오시는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잉태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