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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과 골리앗 전투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긴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입니다. 아이들도 동화처럼 잘 알고 있고, 신앙이 없는 분들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뒤에 숨겨 있는 배경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골리앗 이름 뒤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블레셋 사람’이라는 명칭입니다. 사무엘상 17장의 긴 지면에 걸쳐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골리앗’이라는 이름은 두 번 등장하고 그 외에는 ‘블레셋 사람’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가드 사람이면서 블레셋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의 전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창세기 10장에 블레셋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데 노아의 아들인 함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 시대에 다시 등장합니다. 창세기 20~21장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을 만났다고 전해 줍니다. 창세기 26장에서는 그랄 지역에 간 이삭이 블레셋 사람을 만난 사건이 소개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 갔을 때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과 큰 마찰을 겪기보다는 좋은 관계로 지냈던 걸로 보입니다.
출애굽 때부터 블레셋 사람이라는 호칭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과 전투하게 되면 애굽으로 돌아가려 할까봐 하나님께서 걱정하셨던 것입니다(출 13장). 이어서 가나안 정복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부터 블레셋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살던 많은 민족을 몰아내며 그 땅을 차지했지만 정작 블레셋 사람들은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 간에는 마찰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이 갈등이 사사기에 많이 나타나는데, 3대 사사인 삼갈이라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소를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쳐 죽인 내용입니다. 다음에는 잘 알려진 삼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삼손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블레셋 민족의 통치를 받던 시기였습니다. 약 40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것 같은데, 당시 활동하던 사사가 삼손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게 되지만, 삼손이 죽는 순간에 다곤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약 3,000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우리는 삼손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국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블레셋과의 관계는 더욱 큰 문젯거리가 됩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 시절에 블레셋과 약 12번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2번의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이 패배했지만, 나머지 10번의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둡니다. 첫 번째 패배가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게 됩니다. 두 아들이 죽었다는 충격에 아버지 엘리 제사장도 죽는 사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패배는 길보아 전투에서 일어났는데 이 전투에서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이 죽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상에서만 이스라엘과 블레셋 전투가 약 8번 소개됩니다. 첫 번째 전투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언약궤를 빼앗기는 아벡에서의 전투이고요. 이어지는 전투는 사무엘상 7장에 나오는 미스바 전투입니다. 13,14장의 전투는 요나단을 중심으로 수행된 전투였고 승리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사무엘상 17장에는 엘라에서의 전투가 소개됩니다. 이 전투는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는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긴 역사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
자, 그렇다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기셨습니다. 출애굽 시키셨고,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가나안 땅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다른 민족, 특별히 블레셋 사람들이 살도록 허용하신 가나안 땅을 주셨을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가나안 땅을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그곳에 블레셋 사람들을 남겨 두셨던 걸까요? 질문의 대답은 성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3장이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가나안 전쟁을 전혀 겪어 본 일이 없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려고, 주님께서 그 땅에 남겨 두신 민족들이 있다.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이다. 그들은 바로 블레셋의 다섯 통치자와 가나안 사람 모두와 시돈 사람과 히위 사람이다. (사사기 3장 1~3절 중, 새번역)
사사기 3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기 위해 그리고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에게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가나안 땅에 남겨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전쟁하는 법이란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방법을 깨우칠 수 있도록 블레셋 사람들과 다른 가나안 민족들을 남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가나안 땅에 남겨 두셨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높은 문명의 장비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더 높은 문명을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13장 19절부터 22절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대장장이가 한 명도 없었다.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드는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릴 일이 있으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가야만 하였다. (사무엘상 13장 19~20절, 새번역)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사울과 요나단을 따라나선 모든 군인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었다.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손에만 그런 무기가 있었다. (사무엘상 13장 22절, 새번역)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죠. 한쪽에서는 칼과 창, 방패를 가지고 전쟁에 나왔는데 다른 한쪽은 쟁기와 농기구만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셨지만 그들에게는 무기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경험한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상황에 대입해 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나설 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악이나 잘못된 것이 없는, 아주 깨끗한 땅을 약속의 땅으로 선물해 주신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그렇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땅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는 비극, 슬픔, 질병이 함께합니다. 죽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두셨습니다. 싸워야 할 존재를 두셨고, 분투하고 노력해야 할 주제들도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그분의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도리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셨다는 사실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스런 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게으름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방임에서 나타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 없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고, 궁극적으로 그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만들어 줍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통해 완전한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
자, 오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두 민족의 긴 역사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도 블레셋과 전투 중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진을 쳤고, 사울과 이스라엘 군인들이 엘라 평지에 진을 칩니다. 서로 맞서 싸울 전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쪽은 창과 방패를 든 훈련된 군인들이 서 있고, 다른 한쪽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병기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앉아 있는 형국입니다. 제대로 된 병기라면 사울과 요나단이 가진 것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거인과 같은 사람, 골리앗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는 그의 키가 여섯 규빗 하고도 한 뼘이나 더 되었다고 묘사합니다. 청동으로 장식한 갑옷이 그의 몸을 온통 두르고 있습니다. 4절 이후에 나오는 말씀이 갑옷의 무게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칩니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사무엘상 17장 8~9절 중)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반응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다. (사무엘상 17장 11절, 새번역)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병기도, 칼도, 창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울과 요나단이 가진 것뿐입니다. 그런데 거대한 체구의 장군이 온갖 치장을 하고 방패를 들고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 나와서 큰 소리로 외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누구도 그 앞에 나가서 싸울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16절 말씀은 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되어 왔는지를 알려 줍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와서 싸움을 계속 걸었다고 전합니다. 그렇게 싸움을 걸어 온 지가 40일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실제 숫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도 가집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완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죠. 이 말씀은 완전한 금식에 도달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다는 말은 광야에서 완전한 경험을 했다, 온전한 경험을 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 골리앗 앞에서 40일간 협박을 당하며 고통스러운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한 두려움, 완전한 패닉 속에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40일 동안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끊임없이 싸워 보자고 말하는 사람, 이스라엘 민족을 지속적으로 두렵게 하는 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그 당시를 살았던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골리앗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떤 것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기려고 노력은 해 보지만 이길 엄두가 나지 않는 질병,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일 수 있습니다. 가난일 수도 있고, 우리가 경험하는 폭력일 수도 있습니다. 나태함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남녀 차별, 사회적 차별, 학력의 차별일 수도 있고요. ‘나이가 다 되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무기력증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코로나19 감염증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골리앗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만하자. 차라리 포기하자.’라고 생각하며 날마다 고통스러워하고 움츠러들기만 하는 40일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여기서 우리가 한, 두 가지 생각해 볼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누가 이 일을 허용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제3자의 입장에서, 전지적인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블레셋 사람을 가나안 땅에 들이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에게 철제 무기를 먼저 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싸움을 하도록 세우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누구 편이십니까? 어떤 의도로 이 일을 시작하셨나요? 이스라엘 편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고 훈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골리앗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는 3m가 넘는 거구의 사람, 소리를 크게 지르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 이전에 성경 어디에도 골리앗이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큰 소리로 40일 동안 외친 것도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얼마든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골리앗이 한 것이라고는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나와 싸워 보자”하고 외친 것뿐입니다. 이것이 골리앗의 모습입니다. 위세입니다. 허풍입니다. 허세입니다. 어쩌면 심리전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힘이 정말 셌거나, 능력 있는 장군이기보다 허우대만 멀쩡한 키 큰 사람, 덩치 큰 사람을 데려다가 갑옷만 입힌 작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기세에 눌려 이스라엘 백성은 40일 동안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최면을 당한 사람처럼,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그렇게 40일을 버티고 있습니다.
그때에 소년 다윗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먹을 것을 전해 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마술에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이라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거대한 체구의 최면에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싸움하는 방법을 배워 온 소년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사무엘상 17장 32절 중)
저는 다윗의 모습에서 비록 그가 어린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이길 수밖에 없게 하신 이유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다윗은 이 싸움이 자신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다!”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 가지는 첫 번째 태도이지요. 그가 말합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를 어찌 그대로 두겠습니까? (사무엘상 17장 36절 중, 새번역)
이어서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사무엘상 17장 45절 중)
여호와께 속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며 다윗이 나아갑니다. 그가 나아가면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리고는 믿음을 강하게 갖습니다. 3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무엘상 17장 37절 중)
다윗은 수많은 싸움을 이미 해 왔습니다. 광야에서 사자와도 싸웠고, 맹수와도 싸웠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그 과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현재에 과거를 소환해서 다시 생각하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던 다윗은 그분과 함께 골리앗을 향해 나아갑니다. >
다윗이 위대한 또 다른 점은 선포만 하지 않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 나갔다는 데 있습니다. 갑옷도 입지 않은 채, 가장 익숙한 것만을 들고 말입니다. 사실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분연히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함과 동시에 과거에 함께하셨던 사건을 기억하면서 맨 손에 다섯 개의 돌을 들고 골리앗에게 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 하나님과 함께 전투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교육하시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4,000명이 죽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패배의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바로 언약궤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방법을 언약궤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3만 명이 죽는 처참한 결과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궤와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약궤를 들고 싸우는 방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맷돌 다섯 개만을 들고 맨몸으로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갑니다. 이제 다급해진 분은 누구였을까요? 블레셋 사람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이었을까요? 이때에 가장 당황하고 다급해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겠다고 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가는 어린 다윗을 보며, 하나님은 그를 돕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추시거나 미루시면 다윗이 골리앗의 칼에 죽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은 적어도 네 번의 실패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훈련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이지만 실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다섯 개의 돌을 주워 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에 성공시키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네 번의 기회가 더 있다’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 개의 돌만 집어 들었다면 얼마나 큰 믿음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도 인간이기에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네 번의 기회를 갖고자 했습니다. 인간적이지만 그 안에 자신을 도와주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미리 준비한 네 개의 돌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골리앗의 머리를 단번에 정통으로 맞게 하십니다. 성경 원어를 보면 그냥 맞은 것이 아니라 ‘돌이 머리에 박혔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다급하셨으면 하나님이 골리앗의 머리에 돌이 박히도록 하셨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는 언제든지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골리앗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힘을 빼어 놓고는 합니다. 긴 시간 골리앗을 대하다 보면 전의를 상실하게 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전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길 원하십니다. 골리앗의 힘과 최면에 걸려들지 않는 사람, 다윗과 같은 한 사람을 주님께서는 찾으십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야말로 40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40일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그저 그렇게 보내면 블레셋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들어 안절부절 못하고 최면에 걸린 채 살아가는 40일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그들의 이야기에, 그들의 유혹에 빠져드는 40일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분의 명예를 위해, 주님과 함께 전쟁을 배우는 40일을 사시겠습니까? 주님은 과거에 함께해 주신 그분을 생각하며 골리앗을 쓰러뜨리기 위해 돌 다섯 개를 주워 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을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Forty Days With Goliath
1 Samuel 17: 45-50
Today’s story about David and Goliath is one we know all too well. Even nonbelievers and children are familiar with it. So I want to start with background of the story, as the story itself is well known.
First Samuel chapter 17 describes the battle between David and Goliath in its entirety, but Goliath’s name is mentioned only twice in the 58-verse chapter. The giant is more frequently referred to as “the Philistine.”
Who were the Philistines? The name“Philistine” first appears in Genesis chapter 10 which says that the Philistines were the descendants of Ham, Noah’s son. The second appearance is in Genesis chapters 20 and 21, which describes Abraham’s story, and Genesis chapter 26, which records Isaac’s story. When Abraham entered Canaan, the Philistines had already built a city state there. Israel was just a small familial community then, and so its relationship with the Philistines was relatively smooth.
The Philistines also appear in the Exodus story. In Exodus chapter 13 God did not take the Israelites on the road through the Philistine country, though that was shorter, because He thought that they would change their minds and return to Egypt if they faced war.
The Philistines also appear in the story of the Israelites’ conquest of Canaan. The land of the Philistines is listed among the regions yet to be taken by the Israelites. So after taking possession of Canaan, the relationship changes. The Israelites became a thorn in their side to the Philistines, and the two constantly fought as the newcomer tried to drive out the original inhabitants.
Judges records some well-known stories about this relationship. One of them is the story of Shamgar, the third judge of Israel, and the Philistines. In Judges 3:31 Shamgar kills 600 Philistines with a stick used for herding oxen.
The story of Samson and the Philistines is a most fascinating and popular one. Tensions between the Israelites and the Philistines continued in Samson’s time, which was about 1075 BC. The Philistines had been oppressing the Israelites for four decades, and Samson killed 3,000 Philistines gathered at a Dagon temple in his final victory.
As Israel grew into a kingdom, its confrontation with the Philistines was inevitable. During the reign of King Saul and King David, the two countries had 12 military clashes. The Philistines won two of those wars, with Israel winning ten.
Israel’s first defeat resulted in the taking of the ark of the covenant, the deaths of Eli’s two sons, Hophni and Phinehas, and the death of Eli himself due to shock. In its second defeat in the battle at Mount Gilboa, King Saul and his three sons died. At least 8 battles are recorded in 1 Samuel. The first is the battle of Aphek described in chapter 4. The next is the battle of Mizpah in chapter 7. Then come the battles mainly foughtby Jonathan in chapters 13 and 14. Then we have the battle of Elah, the famous fight between young David and Goliath, which is our passage today.
Who were the Philistines to the Israelites? The Philistines were the natives of Canaan, but God did not allow the Israelites to drive them out completely when they entered the new land.The reason is explained in Judges chapter 3:
“These are the nations the Lordleft to test all those Israelites who had not experienced any of the wars in Canaan (he did this only to teach warfare to the descendants of the Israelites who had not had previous battle experience): the five rulers of the Philistines, all the Canaanites, the Sidonians, and the Hivites living in the Lebanon mountains from Mount Baal Hermon to Lebo Hamath.”(Judges 3:1-3)
According to the Bible, when God gave the Israelites the promised land, God did not drive the Philistines out completely because He wanted His people to learn warfare.
One more thing. The Philistines’ civilization and weapons were much more advanced that those of the Israelites. Let’s look at Samuel chapter 13:
“Not a blacksmith could be found in the whole land of Israel, because the Philistines had said, ‘Otherwise the Hebrews will make swords or spears!’ So all Israel went down to the Philistines to have their plow points, mattocks, axes and sickles sharpened.” (1 Samuel 13: 19-20)
“So on the day of the battle not a soldier with Saul and Jonathan had a sword or spear in his hand; only Saul and his son Jonathan had them.” (1 Samuel 13: 22)
Think about it. When God led the Israelites into Canaan, He let the Philistines live among them. But the enemy had stronger weapons made of steel, while His people had none.
This was the situation faced by the Israelites. And it is our situation, too.
How nice would it be if our belief in God guaranteed happiness?How great would it be if we could escape all sadness, tragedies, disease, and even death by believing in God and attending church? Unfortunately, however, God didn’t plan things this way. There are always battles to fight, people we struggle with, and hard work to be done.
But the Bible tells us that God puts us in the midst of pain with a special purpose, not because He is incapable of giving us happiness. Hence, the pain involved in our faith is God’s intention, and, in the end, that painis a blessing through and through.
That pain given to us as we walk with God, trust in Him, and follow Him is never due to God’s laziness. Nor is it because of His neglect or powerlessness. God gives us that pain with a clear intention, which ultimately makes us whole.
Now, let’s go back to today’s passage. As always, the Israelites and the Philistines are at war. The enemy is encamped at Ephes-Dammim and God’s people at Elah. The two sides are lined up for battle.
Imagine this scene. Can you imagine the hearts of the Israelites standing beforethis horrible and powerful army? Only Saul and Jonathan were properly armed among them. What’s worse, a nine-foot giant wearing a bronze armor from head to toe was hollering at them:
“Goliath stood and shouted to the ranks of Israel, ‘Why do you come out and line up for battle? Am I not a Philistine, and are you not the servants of Saul? Choose a man and have him come down to me. 9If he is able to fight and kill me, we will become your subjects; but if I overcome him and kill him, you will become our subjects and serve us.’” (1 Samuel 17: 8-9)
Verse 11 tells us how the hearts of Saul and the Israelites melted at these words: “On hearing the Philistine’s words, Saul and all the Israelites were dismayed and terrified.” (1 Samuel 17:11)
In 1 Samuel 17:16 it says the Philistine giant taunted the Israelites every morning and evening for 40 days. Forty is a symbolic number in the Bible. It signifies sufficiency. Forty days is a sufficient time for experiencing something. That is why this number appears often in the Bible. For example, Jesus fasted for 40 days and the Israelites were disciplined in the wilderness for 40 years. In the same way, Moses life is divided into three stages—each made up of 40 years and representing a unique type of life—, and Saul and David each ruled for 40 years.
So the fact that Goliath came forward demanding a fight for 40 days means that the Israelites’ fear was at its peak. They were in their worst state, paralyzed in fear, because of this horrible and invincible giant.
Dear Church, who is this Philistine? Who is this Goliath? Goliath was not just any Philistine. Nor just any powerful general. He was more.
Goliath may be that “something” that we ourselves are facing this moment, that “something” that paralyzes us in fear. It may be an indomitable disease—like cancer or AIDS. It may be that suffocating despair that makes us thinks we will never escape a certain situation. Or poverty. Or domestic violence. Our Goliath may be a weakness or our laziness. It could be a sexual or social discrimination. Or it could be a discrimination against certain academic backgrounds. It may be a sense of powerlessness from old age.
In fact, we all have our own “Philistine army” and “Goliaths” confronting us now.
And in that giant’s hand there is an invincible weapon that I do not possess, and that great general leading an entirearmy looks absolutely fierce. We, too, have been tormented by the giant’s threat for 40 days. And we think, ‘OK. Let’s call it quits. I give up. Just let it be. I’ll just become their slave and save my life.’ We just want the battle to be over with, not caring whether we become the enemy’s slave or not. We think it will be better to just give up altogether than to live in pain.
But let’s consider these points about this scene.
First, who allowed this to happen? Clearly God, our Father. It was God who left the Philistines in Canaan. It was He that gave them weapons of steel. It was He who allowed this fight between Israel and the Philistines. Then… whose side is He on? Israel’s of course.
And who is this Goliath? Yes, he is over nine feet tall. He is fierce, strong, and confident.
But look carefully at his track record. Nowhere in the Bible does it say that this giant fought and won. If he had been that powerful and confident, he would have attacked and conquered the Israelites long ago.
All that he did, in fact, was come forward and holler at the Israelites every morning and evening for 40 days. Pure bluff. Just bluster. This is the real Goliath.
And, yes, it was God who gave David his victory, but Goliath was only just a man who fell after being hit on the head with a boy’s sling. This was Goliath.
Therefore, we can surmise that all that was done by the Philistines was just psychological warfare. Goliath was not really invincible… For all we know, he may have just been a tall man wearing a general’s armor. But the people confronted by him had trembled in fear for 40 days.
It is at this very moment that young David appears. The boy saw this astounding scene while on an errand for his father fetching his brothers food on the battlefield. He was not hypnotized by the enemy’s tricks. He was not under the spell of the Philistines nor Goliath. He spoke what he harbored in his heart: “David said to Saul, ‘Let no one lose heart on account of this Philistine; your servant will go and fight him.’” (1 Samuel 17: 32)
In David, I found several reasons why God had no choice but to let him win against a mighty giant, even though he was just a child.
First, David made it clear that this fight had to do with God’s honor. “Your servant has killed both the lion and the bear; this uncircumcised Philistine will be like one of them, because he has defied the armies of the living God.”(1 Samuel 17: 36)David also says in verse 45, “You come against me with sword and spear and javelin, but I come against you in the name of the LordAlmighty,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defied.” (1 Samuel 17: 45) David had a holy anger, a righteous anger. And he started his fight with God.
Second, as David went out to fight his opponent, he strengthened his faith by recalling all the past moments when God was with him. He says in verse 37, “The Lordwho rescued me from the paw of the lion and the paw of the bear will rescue me from the hand of this Philistine.” (1 Samuel 17: 37)
We must remember that God helped us in many ways in the past. Therefore, He will help us and protect us, yet again, today. This is a simple faith. But it is a living one. David did not let his past memoires just slip away, but held them close to his heart for futureadventures. He remembered them. And when a greater challenge came, he recalled his past experiences with God and boldly stepped into a new battlefield. This was David’s faith.
Finally, the greatest thing about his faith was that he was deeply upset about an affront to God, and actually confronted Goliath with the weapon most familiar to him, without any armor. He not only “thought” that God would help him based on his past experiences, but actually acted on this faith.
How reckless it seems! But David actually rose up against the giant and walked up to him to guard God’s honor.
What does it mean to fight with God on my side? What are the methods of war used in such a warfare? In the first part of 1 Samuel, the Israelites are attacked by the Philistines, leaving 4,000 dead. The Israelites believed that they lost because they did not have the ark of the covenant with them. They believed that to fight a war with God on their side, they must have the ark. However, the result was devastating. Even with the ark, 30,000 died. God was not in the ark.
David confronted Goliath with just a sling and five stones. David knew how to fight a war with God on his side.
Now, who should be more anxious? The Philistines or the Israelites? I think perhaps it was God who was most anxious. How could He sit on his hands when a young boy headed toward a giant with just a sling and a stone to lift up His name? Any hesitation or delay on God’s part would lead to David’s fatal injury.
David may have been anticipating four failed attempts before finally succeeding. That is why he chose five stones, I suspect. He might have been anxious that God may not give him victory on his first try.
Perhaps he would be seen as a man of greater faith if he had picked just one stone. But David was human, too, and wanted four more chances in case he failed. And he believed that God would help him in those five tries.
But what did God do? He made David hit a bullseye on his very first shot, rendering the four stones in his pocket useless. In the original text, it says that the stone didn’t just strike Goliath but stuck in his head. God must have been extremely anxious about David’s victory.
We may be confronted by “Goliaths” that leave us powerless—anytime, anywhere. These giants constantly torment us and sap our strength. After long confrontations with the giant, we lose our will to fight. We just want to give up. But it is at this time that we need someone like David—that one person who it not under the giant’s spell.
Lent has begun. Lent is made up of forty days. What will your forty days be like? Will you spend those days under a spell, trembling in fear of a Philistine? Or will you walk with God?
God is seeking outsomeone like David, someone who recalls how God was with him in the past and picks up five stones to slay the giant for God and His name.
사무엘상 17: 45 ~ 50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 다윗과 골리앗 전투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긴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입니다. 아이들도 동화처럼 잘 알고 있고, 신앙이 없는 분들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뒤에 숨겨 있는 배경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골리앗 이름 뒤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블레셋 사람’이라는 명칭입니다. 사무엘상 17장의 긴 지면에 걸쳐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골리앗’이라는 이름은 두 번 등장하고 그 외에는 ‘블레셋 사람’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가드 사람이면서 블레셋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의 전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창세기 10장에 블레셋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데 노아의 아들인 함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 시대에 다시 등장합니다. 창세기 20~21장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을 만났다고 전해 줍니다. 창세기 26장에서는 그랄 지역에 간 이삭이 블레셋 사람을 만난 사건이 소개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 갔을 때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과 큰 마찰을 겪기보다는 좋은 관계로 지냈던 걸로 보입니다.
출애굽 때부터 블레셋 사람이라는 호칭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과 전투하게 되면 애굽으로 돌아가려 할까봐 하나님께서 걱정하셨던 것입니다(출 13장). 이어서 가나안 정복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부터 블레셋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살던 많은 민족을 몰아내며 그 땅을 차지했지만 정작 블레셋 사람들은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 간에는 마찰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이 갈등이 사사기에 많이 나타나는데, 3대 사사인 삼갈이라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소를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쳐 죽인 내용입니다. 다음에는 잘 알려진 삼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삼손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블레셋 민족의 통치를 받던 시기였습니다. 약 40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것 같은데, 당시 활동하던 사사가 삼손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게 되지만, 삼손이 죽는 순간에 다곤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약 3,000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우리는 삼손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국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블레셋과의 관계는 더욱 큰 문젯거리가 됩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 시절에 블레셋과 약 12번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2번의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이 패배했지만, 나머지 10번의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둡니다. 첫 번째 패배가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게 됩니다. 두 아들이 죽었다는 충격에 아버지 엘리 제사장도 죽는 사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패배는 길보아 전투에서 일어났는데 이 전투에서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이 죽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상에서만 이스라엘과 블레셋 전투가 약 8번 소개됩니다. 첫 번째 전투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언약궤를 빼앗기는 아벡에서의 전투이고요. 이어지는 전투는 사무엘상 7장에 나오는 미스바 전투입니다. 13,14장의 전투는 요나단을 중심으로 수행된 전투였고 승리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사무엘상 17장에는 엘라에서의 전투가 소개됩니다. 이 전투는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는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긴 역사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
자, 그렇다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기셨습니다. 출애굽 시키셨고,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가나안 땅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다른 민족, 특별히 블레셋 사람들이 살도록 허용하신 가나안 땅을 주셨을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가나안 땅을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그곳에 블레셋 사람들을 남겨 두셨던 걸까요? 질문의 대답은 성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3장이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가나안 전쟁을 전혀 겪어 본 일이 없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려고, 주님께서 그 땅에 남겨 두신 민족들이 있다.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이다. 그들은 바로 블레셋의 다섯 통치자와 가나안 사람 모두와 시돈 사람과 히위 사람이다. (사사기 3장 1~3절 중, 새번역)
사사기 3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기 위해 그리고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에게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가나안 땅에 남겨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전쟁하는 법이란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방법을 깨우칠 수 있도록 블레셋 사람들과 다른 가나안 민족들을 남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가나안 땅에 남겨 두셨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높은 문명의 장비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더 높은 문명을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13장 19절부터 22절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대장장이가 한 명도 없었다.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드는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릴 일이 있으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가야만 하였다. (사무엘상 13장 19~20절, 새번역)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사울과 요나단을 따라나선 모든 군인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었다.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손에만 그런 무기가 있었다. (사무엘상 13장 22절, 새번역)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죠. 한쪽에서는 칼과 창, 방패를 가지고 전쟁에 나왔는데 다른 한쪽은 쟁기와 농기구만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셨지만 그들에게는 무기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경험한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상황에 대입해 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나설 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악이나 잘못된 것이 없는, 아주 깨끗한 땅을 약속의 땅으로 선물해 주신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그렇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땅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는 비극, 슬픔, 질병이 함께합니다. 죽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두셨습니다. 싸워야 할 존재를 두셨고, 분투하고 노력해야 할 주제들도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그분의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도리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셨다는 사실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스런 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게으름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방임에서 나타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 없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고, 궁극적으로 그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만들어 줍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통해 완전한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
자, 오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두 민족의 긴 역사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도 블레셋과 전투 중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진을 쳤고, 사울과 이스라엘 군인들이 엘라 평지에 진을 칩니다. 서로 맞서 싸울 전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쪽은 창과 방패를 든 훈련된 군인들이 서 있고, 다른 한쪽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병기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앉아 있는 형국입니다. 제대로 된 병기라면 사울과 요나단이 가진 것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거인과 같은 사람, 골리앗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는 그의 키가 여섯 규빗 하고도 한 뼘이나 더 되었다고 묘사합니다. 청동으로 장식한 갑옷이 그의 몸을 온통 두르고 있습니다. 4절 이후에 나오는 말씀이 갑옷의 무게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칩니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사무엘상 17장 8~9절 중)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반응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다. (사무엘상 17장 11절, 새번역)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병기도, 칼도, 창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울과 요나단이 가진 것뿐입니다. 그런데 거대한 체구의 장군이 온갖 치장을 하고 방패를 들고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 나와서 큰 소리로 외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누구도 그 앞에 나가서 싸울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16절 말씀은 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되어 왔는지를 알려 줍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와서 싸움을 계속 걸었다고 전합니다. 그렇게 싸움을 걸어 온 지가 40일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실제 숫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도 가집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완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죠. 이 말씀은 완전한 금식에 도달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다는 말은 광야에서 완전한 경험을 했다, 온전한 경험을 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 골리앗 앞에서 40일간 협박을 당하며 고통스러운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한 두려움, 완전한 패닉 속에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40일 동안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끊임없이 싸워 보자고 말하는 사람, 이스라엘 민족을 지속적으로 두렵게 하는 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그 당시를 살았던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골리앗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떤 것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기려고 노력은 해 보지만 이길 엄두가 나지 않는 질병,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일 수 있습니다. 가난일 수도 있고, 우리가 경험하는 폭력일 수도 있습니다. 나태함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남녀 차별, 사회적 차별, 학력의 차별일 수도 있고요. ‘나이가 다 되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무기력증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코로나19 감염증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골리앗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만하자. 차라리 포기하자.’라고 생각하며 날마다 고통스러워하고 움츠러들기만 하는 40일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여기서 우리가 한, 두 가지 생각해 볼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누가 이 일을 허용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제3자의 입장에서, 전지적인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블레셋 사람을 가나안 땅에 들이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에게 철제 무기를 먼저 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싸움을 하도록 세우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누구 편이십니까? 어떤 의도로 이 일을 시작하셨나요? 이스라엘 편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고 훈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골리앗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는 3m가 넘는 거구의 사람, 소리를 크게 지르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 이전에 성경 어디에도 골리앗이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큰 소리로 40일 동안 외친 것도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얼마든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골리앗이 한 것이라고는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나와 싸워 보자”하고 외친 것뿐입니다. 이것이 골리앗의 모습입니다. 위세입니다. 허풍입니다. 허세입니다. 어쩌면 심리전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힘이 정말 셌거나, 능력 있는 장군이기보다 허우대만 멀쩡한 키 큰 사람, 덩치 큰 사람을 데려다가 갑옷만 입힌 작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기세에 눌려 이스라엘 백성은 40일 동안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최면을 당한 사람처럼,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그렇게 40일을 버티고 있습니다.
그때에 소년 다윗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먹을 것을 전해 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마술에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이라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거대한 체구의 최면에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싸움하는 방법을 배워 온 소년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사무엘상 17장 32절 중)
저는 다윗의 모습에서 비록 그가 어린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이길 수밖에 없게 하신 이유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다윗은 이 싸움이 자신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다!”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 가지는 첫 번째 태도이지요. 그가 말합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를 어찌 그대로 두겠습니까? (사무엘상 17장 36절 중, 새번역)
이어서 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사무엘상 17장 45절 중)
여호와께 속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며 다윗이 나아갑니다. 그가 나아가면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리고는 믿음을 강하게 갖습니다. 3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무엘상 17장 37절 중)
다윗은 수많은 싸움을 이미 해 왔습니다. 광야에서 사자와도 싸웠고, 맹수와도 싸웠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그 과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현재에 과거를 소환해서 다시 생각하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던 다윗은 그분과 함께 골리앗을 향해 나아갑니다. >
다윗이 위대한 또 다른 점은 선포만 하지 않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 나갔다는 데 있습니다. 갑옷도 입지 않은 채, 가장 익숙한 것만을 들고 말입니다. 사실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분연히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함과 동시에 과거에 함께하셨던 사건을 기억하면서 맨 손에 다섯 개의 돌을 들고 골리앗에게 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 하나님과 함께 전투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교육하시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4,000명이 죽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패배의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바로 언약궤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방법을 언약궤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3만 명이 죽는 처참한 결과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궤와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약궤를 들고 싸우는 방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맷돌 다섯 개만을 들고 맨몸으로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갑니다. 이제 다급해진 분은 누구였을까요? 블레셋 사람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이었을까요? 이때에 가장 당황하고 다급해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겠다고 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가는 어린 다윗을 보며, 하나님은 그를 돕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추시거나 미루시면 다윗이 골리앗의 칼에 죽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은 적어도 네 번의 실패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훈련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이지만 실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다섯 개의 돌을 주워 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에 성공시키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네 번의 기회가 더 있다’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 개의 돌만 집어 들었다면 얼마나 큰 믿음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도 인간이기에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네 번의 기회를 갖고자 했습니다. 인간적이지만 그 안에 자신을 도와주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미리 준비한 네 개의 돌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골리앗의 머리를 단번에 정통으로 맞게 하십니다. 성경 원어를 보면 그냥 맞은 것이 아니라 ‘돌이 머리에 박혔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다급하셨으면 하나님이 골리앗의 머리에 돌이 박히도록 하셨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는 언제든지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골리앗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힘을 빼어 놓고는 합니다. 긴 시간 골리앗을 대하다 보면 전의를 상실하게 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전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길 원하십니다. 골리앗의 힘과 최면에 걸려들지 않는 사람, 다윗과 같은 한 사람을 주님께서는 찾으십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야말로 40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40일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그저 그렇게 보내면 블레셋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들어 안절부절 못하고 최면에 걸린 채 살아가는 40일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그들의 이야기에, 그들의 유혹에 빠져드는 40일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분의 명예를 위해, 주님과 함께 전쟁을 배우는 40일을 사시겠습니까? 주님은 과거에 함께해 주신 그분을 생각하며 골리앗을 쓰러뜨리기 위해 돌 다섯 개를 주워 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을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2021년 2월 2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골리앗과의 사십일” (삼상 17:45~50)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7장, 44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삼상 17:45~5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2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골리앗은 블레셋 사람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오랫동안 존재하며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던 민족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겐 없던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블레셋,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오며 괴롭게 했던 그 블레셋이 이스라엘 앞에 있었습니다. 블레셋과 마주하고 있는 이스라엘처럼, 우리 또한 늘 싸워야 하는 존재가 있고, 분투하고 노력해야 할 일들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모든 행복이 보장되면 좋겠지만 괴롭고 힘든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충분히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강력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블레셋의 군대와 이스라엘 진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거구의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청동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나와 40일 동안 아침과 저녁으로 싸움을 걸어옵니다. 성경에 ‘40’이라는 숫자는 충분함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40일 동안 싸움을 걸어왔다는 것은 완전한 두려움에 갇힌 이스라엘 군사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골리앗은 단지 한 사람 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위세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도록 하는 그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질병, 절망, 가난과 폭력, 사회적 차별 그리고 나약함과 게으름, 무기력증일 수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주눅이 들게 하는 존재 앞에 차라리 항복하고 종이 되든지, 마음 편하게 살자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골리앗은 분명 주눅이 들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허용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해 고안하신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블레셋의 편이 아니라, 이스라엘, 또한 우리의 편이십니다. 말씀 속 골리앗이 한 일은 이스라엘을 매일 같이 협박하고 두렵게 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골리앗의 진짜 모습입니다. 끊임없이 두렵게 하면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최면을 거는 것입니다.
골리앗이라는 최면에 걸리지 않은 한 사람, 다윗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군사 중 단 한 명도 골리앗 앞에 나갈 수 없는 상태에서, 어린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한 의분을 품고, 하나님과 함께 그 전투를 시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에 거룩한 의분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건들을 기억하고 전쟁이 누구에게 속하였는지 알았습니다. 아무 보호 장비도 없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 만을 들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다급해진 쪽은 누구입니까? 다윗을 돕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든지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골리앗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힘과 최면에 걸려들지 않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순절, 40일 동안 호통을 치며 두려움에 내모는 블레셋 사람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최면에 걸려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명예를 위해, 과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골리앗을 쓰러뜨리려고 물맷돌을 주워드는 주님과 함께 걷는 40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아침, 저녁으로 호통을 치며 주눅을 들게 하는 내 앞에 서 있는 골리앗은 무엇입니까?
2. 골리앗이라는 최면에 걸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전쟁 속에서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마무리기도
하나님, 늘 주변의 상황을 바라보며 골리앗 앞에 절망하고 낙담하였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다시 주님의 명예를 드높이며,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믿음의 물맷돌을 들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의 사순절, 40일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