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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능력을 주소서

골로새서 3: 12 ~ 14

김경진 목사

2020.05.03

< 부활 신앙을 삶으로 구현하길 원합니다. >

꼭 10주 만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분들도 많지만, 오늘은 특별히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도 재개된 첫 주일입니다. 목사로서 예배당 문을 닫는 결정을 했을 때, 사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많이 아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많이 당황스럽기도 했고, ‘차라리 전쟁이라면 예배드리다 죽겠다.’라고 할 수 있는데, 전염병 확산 때문에 불거진 일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 불구하고 우리 교회의 리더십에 협조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며 인내해 주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조금씩 사정이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 예배당으로 한 분 한 분 더 돌아오실 것입니다. 조금씩 좁혀 앉고,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길 원합니다.
오늘 이 주일도 부활절 기간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50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며, 예배당에서 다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특별한 날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굉장히 뜻깊은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종말론적 즉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부활 곧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배당 문이 열리고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때, 새로운 존재로 돌아오면 좋겠다는 소망도 나누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활 생명으로 돌아온다는 것의 의미 중 하나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며, 그렇기에 서로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도 나누었습니다. 정으로 깨고 쪼아 변형을 이루어 하나의 건물처럼 연결되며, 몸처럼 서로 영양분을 주고받는 생명체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공감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품고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 상황,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

공감의 능력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요즘 많이 회자되기도 하고, 여러분도 공감하기 위해 애쓰고 계실 줄 압니다. 공감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는 이번 주간에도 그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습니다.
교육부 공식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아버지를 위한 자녀 교육 가이드’라는 코너가 있는데, 그곳에 4월 30일에 쓰인 내용이 있습니다. 얼마 후 삭제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아빠들은 뇌 구조가 달라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으로 소개했다가 공감받지 못하고 바로 내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아버지들이 자녀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길 바라는 의도로 그 글을 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는 비난도 있었고, 이 이론 자체가 너무 오래된 이론이라는 반론도 있었으며,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해 금방 내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제게 그 기사를 알려주시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교육부에서 그 내용을 올리신 분이 아마 남성이 아니었을까요?’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여러모로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나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 저로서는 참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었습니다. 남성, 여성을 떠나 ‘부모로서 과연 나는 자녀들과 공감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니, 생각보다 쉽게 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감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정작 지나고 생각해 보면 ‘내가 그때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후회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녀들과 공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지금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계신 분들도 많을 텐데,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인사하면 어떨까요? “미안해. 앞으로 더 잘 이해할게.”
여러분께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만약 동물로 태어난다면 어떤 동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요즘에는 여러 교육 자료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대화도 나누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심리 상담하시는 분들 가운데 이러한 접근을 취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하나가 있는데, ‘만약 동물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동물이 될까?’라는 질문에 대한 한 어린이의 대답이었습니다. “나는 호랑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아빠를 무섭게 해 주고 싶다.” 이유가 대단하지요? 동물이 된다면 호랑이가 되어 아빠를 혼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빠는 나를 항상 핫도그라고 부르니까. 그리고 가족을 지키고 싶다. 호랑이는 빠르고 힘이 세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에서 어떤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아마 아빠에게 놀림 받는 게 꽤나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호랑이가 되어 아빠를 혼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빠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며 이야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핫도그야. 핫도그야.” 이렇게 애칭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애칭이 싫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아이와 소통한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공감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사실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지요? 물론 나는 공감했다고 생각합니다. 소통되었다고 여기는데, 실제로는 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오죽하면 ‘공감 능력’이라고 하겠습니까? 공감은 소통을 위한 능력입니다.
앞에서 드린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만약 동물로 태어난다면 어떤 동물이 되고 싶습니까? 제가 들은 몇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데, 소개해 드립니다. “저는 애완용 강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듬뿍 받고 싶어요.” 또 어떤 사람은 “나는 공작새가 되고 싶어요. 홀로 있지만 아름다움을 뽐내는 동물이 되고 싶어요.”라고 답했고, 어떤 사람은 “나는 앵무새가 되고 싶어요. 마음껏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사람들과 마음껏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 번도 앵무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공작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애완용 강아지를 생각하고, 어떤 분들은 공작새를 생각하고, 어떤 분들은 앵무새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참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공감하는 교회와 성도, 가족이 되고 있습니까? >

심리학자요 상담가인 에린 K. 레너드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책이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공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감이 안 되면 관계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관계를 세우려면 공감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에 섬세하게 접근해서 그것을 먼저 느끼려고 합니다. 또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해 준다고 합니다. 상대방과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감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공감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배려심이 많고,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이타적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공감 능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로, 이기적이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며,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도 자존감이 많이 낮다고 합니다.
자녀를 때리는 부모, 부하 직원에게 갑질하는 사람, 타인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 욕을 잘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 이런 사람 중에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성도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공감의 능력을 많이 키워 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가족원들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공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까? 이번 어린이날을 맞이하면서 우리 가족들 간에 공감 능력을 세워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족 구성원이 서로 공감하는 가족이 되어야겠다. 코로나19로 함께 모인 이 시기를 기회로 여기고, 서로 공감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자.’라고 결단하면 어떻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 소망교회도 공감의 능력을 갖추면 좋겠습니다. 총선이 끝난 후, 보수 정당의 실패 원인을 분석한 내용이 실린 사설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당은 공감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참패했습니다. 국민은 함께 울어주고 넘어지면 손잡아 일으키는 정치와 정치인을 원하는데, 우리 당은 폼 잡고 의전을 좋아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습니다.”라는 반성의 글이었습니다. 사설 마지막 부분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총선 패배의 원인을 두고 많은 분석이 나왔지만, 이 이야기만큼 고개가 끄떡여지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공감을 이루지 못해서 패했다는 말이 공감되었다는 뜻입니다.
정치도 그렇지만, ‘우리 교회의 문제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거에 패한 정당만큼, 우리 교회의 현실도 비슷해 보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예배당에도 나오지 못하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사회와 함께 호흡하려고 노력하며 배려하고 있는데, 사실상 사회는 교회를 좋게 바라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꾸 시비 걸 문제를 찾고, 그래서 때로는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마음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왜 교회를 자꾸 흠집을 내려 하는 걸까? 우리는 예배당에서 예배도 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불만이 많을까?’라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배당 예배만을 강행하려는 몇몇 교회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혹시 우리가 사회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비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교회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것도 압니다. 교회는 ‘텍스트(Text)’를 가지고 있습니다. 텍스트, 즉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토대로 믿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수 주일’ 해야 한다는 교리도 가지고 있고, 그밖에도 여러 신앙생활의 표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준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텍스트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다가 컨텍스트(Context)를 놓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컨텍스트, 즉 우리가 처한 ‘상황’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

<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감하는 삶의 본이 되셨습니다. >

예배당으로 성도님들이 돌아오는 이 시점에, 우리가 결단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 모두가 나만을 생각하는 믿음, 우리 가족만을 생각하는 믿음, 내 안위만을 생각하는 믿음, 그러니까 ‘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공감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믿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믿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도 잘해 오셨지만, 앞으로 더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공감의 능력과 공감의 의미에 관한 여러 다양한 서적들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해 공감 능력의 기술을 발휘하라는 책들도 많고, 하나의 기술처럼 공감을 다루는 서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공감의 정신이 무엇인지, 또 공감의 능력을 배양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려 주는 책 중의 책은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공감’이란 한글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공감과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공감이란 말만큼 기독교와 밀접하게 연관된 단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부르는 찬양 가운데 ‘위러브’라는 단체에서 부르는 ‘공감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 중 일부가 이렇습니다.

혼자서만 세상을 사는 듯이
주가 멀어 보이기만 할 때
우리는 바라보아야 하네
우리에게 오셨던 그 주님을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맘을 아시네
가까이서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네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던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네

성경에 공감이란 단어가 없을지라도, 찬양 중에는 ‘공감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공감’이란 단어도 참 많이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공감하시네’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네’라고 바꿔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공감하시네’와 ‘주님이 아시네’라는 표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이 아시네’라는 표현이 담지 못하는 한 가지를 ‘공감하시네’가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과 관련됩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표현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굉장히 중립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공감하시네’라는 말에는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즉 성육신하셨다.’라는 뜻이며,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길을 경험하셨다.’라는 뜻이자, ‘인간과 똑같은 길을 가시면서 때로는 슬퍼하셨고 때로는 기뻐하셨고 때로는 좌절하셨고 때로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이 바로 공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공감하신다는 말씀의 뜻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과 같은 삶을 사시며, 인간이 겪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는 주님, 우리 모두를 체휼하시는 주님, 죽음까지도 경험하신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4~16)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삶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성을 입고 인간의 삶을 경험하신 그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며 공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며, 우리는 이 기초로부터 공감의 원리를 깨닫습니다. 이 공감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공감해 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공감은 주님께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을 알고 계시는 주님, 그 주님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대신 드리시며 대제사장의 역할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깊은 탄식 속에서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고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려 주십니다.

< 우리는 공감의 사명을 받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힘든 분들이 참 많지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고통스러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알고 공감해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감하신다.’라는 것이 공감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감하신다는 출발점에서 공감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공감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께 중보해 주시는 주님입니다. 그 주님이 이제 모든 제자에게 공감의 사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서 3:12~14)

이 말씀에 ‘공감’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통 공감과 관련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이라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감을 받은 자처럼”이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모두 공감의 언어입니다. 공감의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감을 이룰 수 있을까요? 많은 심리학 및 인문학 서적이 공감의 방법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모든 내용이 이미 성경에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4~8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4~8)

이것이 바로 공감의 방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공감하시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하셨는지를 유의해 본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어떻게 공감을 이룰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이었고, 공감을 이루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다른 이들과 공감하길 원한다면, 자녀들과 공감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공감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의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상대방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파하며, 상대방의 처지에서 함께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방법을 세상의 지식도 권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이것이 귀한 방법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면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공감을 이루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식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 방법은 ‘타인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걷는 것이며, 그 사람의 눈으로 보고, 그 사람의 귀로 들으며, 그 사람의 심장으로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가정에 이와 같은 공감의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품에 안는 공감의 신앙생활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장애인과 공감하는 것, 그들의 부모와 가족과 공감을 이루는 것, 병을 앓고 있는 이들과 공감을 이루는 것, 그의 가족과 공감을 이루는 것이 공감의 사람이 되어 가는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식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 실천과 삶을 통해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가 더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시작을 오늘부터 저와 여러분이 함께하길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Give Us Empathy

Colossians 3:12-14

I. Greeting

It has been exactly 10 weeks. Dear Church, how happy I am to see you! I am aware that many of you are still worshipping online, but it’s so overwhelming to see Somang Church gather for worship again.

As your pastor, it was extremely painful tostop all gatherings. It was painful for all of us. If it had been a war, we might have risked our lives and come to church. But it was a pandemic. And a pandemic affects not just me and us, but our neighbors. For many, the church’s decision may have been hard to accept. So, as the head pastor, I would like to take this opportunity to thank all our congregants for trustingSomang’s leadership.

These days we are celebrating Eastertide, a joyous season, and today is Children’s Sunday. Furthermore,historically, today is our first offline Sunday service since the outbreak of Covid-19. Today, the title of my message is “Give Us Empathy.”

II. What is Empathy?

How can we define empathy, or the ability to empathize? Empathy is a frequently used word these days.

While preparing for this sermon, Iread an article on the Ministry of Education’s blog titled, “Parenting Tips for Fathers.” It was about empathy. According to the article, women evolved to be goodmothers, while men became good hunters. As a result, their brains function differently, with men lackingempathic ability. The article was almost immediately deleted for reinforcing gender bias. But it got me thinking: ‘Do parents really understand their children?’As a father, I can’t say that I do. I say things in an effort to empathize with my children, but later regret saying them because theyare far from empathizing.

As we celebrate Children’s Sunday, how would you assess yourselves as a parent? In the past, parents simply didn’t have the luxury to think about empathy or the sort. They were too busy making ends meet. But, today, empathy and communication within the family have become critical virtues.

A question.I you were an animal, what would you be? What animal do you think best represents you? These are questions used in school programs and psychological therapy. Asking these questions to your family is a good way to get to know them better.

I found some interesting answers on the Internet. A boy said he wanted to be a tiger because he wanted to scare his dad who always called him “hot dog.” He also wanted to protect his family like a fierce and fast tiger. It seems he hated his dad calling him “hot dog,” which is why he wanted to give dad a bad scare like a tiger. I wonder if his dad knew this. His dad probably called him “hot dog” out of love, but the son hated it.

Empathy is truly precious. We even have the word “empathic ability.” The ability to empathize is power. To communicate well you must be able toempathize.

In her book Loving Well,psychotherapist Dr. Erin Leonard writes that human relationships fall apart because people are incapable of empathic communication. Indeed, without empathy, relationships crumble. In other words, you need empathy to rebuild them.

What is empathy, or empathic ability? I think it is a psychological state of being able to feel and share in the pain, joy, and feelings of another person. People with this ability approach and acknowledge a person’s feelings delicately. Such people try to find a solution together, and they are usually considerate, understanding, selfless, and full of love. Empathy is found in people with a high self-esteem. People who lack empathy, however, are usually self-centered, self-absorbed, selfish, greedy, and incapable of understanding other people’s pain. Furthermore, they usually have low self-esteem. Abusive parents, bosses who abuse their power, unforgiving and criticizing people, violent people, and people who constantly sweartend to lack empathy.

Dear Church, how much empathy do you have for each other in your family? I hope that my message today will help families changeand have more empathy for each other. This goes for the Church, too. I hope that Somang Church and Korean churches will havemore empathy.

After the April 15 parliamentary election, I read a newspaper opinion analyzing why the conservative party lost. It quoteda conservative lawmaker who said, “We failed miserably because we lacked empathy. People wanted politicians to cry with them and hold their hands in need, but the conservative party failed to do this, appearing self-absorbed.”

The situation of Korean churches today is not so different from that of the defeated party above. When Covid-19 was spreading, it appeared as if churcheswere incapable of communicating and empathizing with the world. Of course, the nature of the Church and church gatherings played a part. But it is unfortunate that the Protestant Church appeared less understanding and empathetic than the Catholic Church or Buddhists. The Church has the Bible, which is “the Text”. Its doctrine is to keep the sabbath holy. But I think it placed too much emphasis on the text, while failing to fully consider the context.

The Church seems to be failing in empathizing with the people in this world and the situation they are in. We have failed to win their hearts. As I was praying, I found myself asking God, ‘Lord what should we pray for at this point in time, as we gather again for worship?’ In my prayers, I think I found an answer. ‘Shouldn’t the Churchrestore its ability to empathize with the world—the world that God so loved that He gave His only Son?’

Restoring empathy for the world does not mean secularization. It is to have the same attitude as Jesus who so loved the world that Hebecame God Incarnate.

III. Why Do Christians Need Empathy?

The Korean word for empathy, gong-gam,actually does not appear in the Korean Bible. Yet, empathy is a profoundly Christian word and concept. WELOVE’s song “He Empathizes” is a popular Korean CCM. The lyrics go like this: “When I’m alone and He seems so far away / I look to Him who comes to me / He knows my pain / He empathizes with my pain / He comes to me / He empathizes with my circumstance.”

“He empathizes” is another way of saying thatHe knows everything. But the former holds something that the latter doesn’t: Jesus became flesh. When you say, “He knows everything,” you are statingsomething about God’s character: God is all-knowing and almighty. But when you say that “He empathizes,” you are acknowledging that the Son became fully human—like us.

Our Lord became flesh like us. Jesus had a childhood, He grew up, and He was betrayed and tortured—like us. And He went through death, the thing humans fear the most. Therefore, Jesus who experienced all these is able to fully empathize with us.

Therefore, Hebrews boldly states:

“Therefore, since we have a great high priest who has ascended into heaven,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firmly to the faith we profess.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e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we have one who has been tempted in every way, just as we are—yet he did not sin. Let us then approach God’s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Hebrews 4:14-16)

Jesus is not one who is un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He empathizes with us. Our Lord who became fully flesh empathizes with our weaknesses.

In fact, this is the very foundation of our faith. Our Lord knows my everything. His knowledge comes not only from His power, but also from His own experience of becoming like us. He knows our situation and reality too well. Out of this empathy, He prays earnestly for us. Isn’t this what allows us to pray? We pray because we trust that our Lord hearsand understands our cries and anguishes.

Dear Church, I know many of you are facing hard times. Maybe you feel lost. Come to the Lord who knows our circumstances and empathizes with them. He feels what we feel. He hurts when we hurt. And He finds a solution for us. Approach Him. Our Lord knows our weaknesses. He is a God of love who knows our hearts.

Furthermore, our Lord—who empathizes with us and is with us—gave us a ministry of empathy. To all His disciples who follow Him, He gave the work of empathizing with others. Let’s read today’s scripture together:

“Therefore, as God’s chosen people, holy and dearly loved, clothe yourselves with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nd patience. Bear with each other and forgive one another if any of you has a grievance against someone. Forgive as the Lord forgave you. And over all these virtues put on love, which binds them all together in perfect unity.” (Colossians 3:12-14)

In God’s words above given to Paul, we see words like compassion, kindness, gentleness, humility, and patience. What do these words mean? They all have to do with empathy. To have empathy for others, the Lord is telling His disciples to have compassion, kindness, gentleness, humility, and patience.

IV. How is Empathy Obtained?

The Lord says in Philippians:

“[…] not looking to your own interests but each of you to the interests of the others.In your relationships with one another, have the same mindset as Christ Jesus:Who, being in very nature God,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used to his own advantage;rather, he made himself nothingby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being made in human likeness.And 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he humbled himselfby becoming obedient to death—even death on a cross!” (Philippians 2: 4-8)

How do we obtain empathy? Jesus did so by humbling Himself, making Himself nothing, and becoming God Incarnate. If we want to empathize with others, we need to become like our Lord. We must humble ourselves, make ourselves nothing, and put ourselves in other people’s shoes. We must enter their hearts, become like them, hurt like them, think in their shoes, and come up with solutions together. We grow empathy by putting ourselves in other people’s shoes, by walking with them, by seeing, hearing, and feeling throughtheir eyes, ears, and hearts.

Beloved members of Somang Church, I pray that empathy will grow in our homes and in our church.

If your faith has been self-centered till now—that is, if you have focused only on my faith, my blessing, my family, my business—then now is the time to empathize with others. Let your hearts become one with your neighbors in need. Empathize with the disabled and their families. Empathize with the sick and their families.

I hope your faith will grow as you care for others with empathy. Through such efforts, I hope that our homes, our church, and our society will become happier. Let’sbegin this work today. The Lord will help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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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 12 ~ 14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부활 신앙을 삶으로 구현하길 원합니다. >

꼭 10주 만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분들도 많지만, 오늘은 특별히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도 재개된 첫 주일입니다. 목사로서 예배당 문을 닫는 결정을 했을 때, 사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많이 아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많이 당황스럽기도 했고, ‘차라리 전쟁이라면 예배드리다 죽겠다.’라고 할 수 있는데, 전염병 확산 때문에 불거진 일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 불구하고 우리 교회의 리더십에 협조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며 인내해 주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조금씩 사정이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 예배당으로 한 분 한 분 더 돌아오실 것입니다. 조금씩 좁혀 앉고,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길 원합니다.
오늘 이 주일도 부활절 기간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50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며, 예배당에서 다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특별한 날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굉장히 뜻깊은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종말론적 즉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부활 곧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배당 문이 열리고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때, 새로운 존재로 돌아오면 좋겠다는 소망도 나누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활 생명으로 돌아온다는 것의 의미 중 하나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며, 그렇기에 서로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도 나누었습니다. 정으로 깨고 쪼아 변형을 이루어 하나의 건물처럼 연결되며, 몸처럼 서로 영양분을 주고받는 생명체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공감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품고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 상황,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

공감의 능력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요즘 많이 회자되기도 하고, 여러분도 공감하기 위해 애쓰고 계실 줄 압니다. 공감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는 이번 주간에도 그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습니다.
교육부 공식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아버지를 위한 자녀 교육 가이드’라는 코너가 있는데, 그곳에 4월 30일에 쓰인 내용이 있습니다. 얼마 후 삭제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아빠들은 뇌 구조가 달라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으로 소개했다가 공감받지 못하고 바로 내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아버지들이 자녀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길 바라는 의도로 그 글을 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는 비난도 있었고, 이 이론 자체가 너무 오래된 이론이라는 반론도 있었으며,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해 금방 내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제게 그 기사를 알려주시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교육부에서 그 내용을 올리신 분이 아마 남성이 아니었을까요?’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여러모로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나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 저로서는 참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었습니다. 남성, 여성을 떠나 ‘부모로서 과연 나는 자녀들과 공감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니, 생각보다 쉽게 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감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정작 지나고 생각해 보면 ‘내가 그때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후회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녀들과 공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지금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계신 분들도 많을 텐데,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인사하면 어떨까요? “미안해. 앞으로 더 잘 이해할게.”
여러분께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만약 동물로 태어난다면 어떤 동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요즘에는 여러 교육 자료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대화도 나누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심리 상담하시는 분들 가운데 이러한 접근을 취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하나가 있는데, ‘만약 동물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동물이 될까?’라는 질문에 대한 한 어린이의 대답이었습니다. “나는 호랑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아빠를 무섭게 해 주고 싶다.” 이유가 대단하지요? 동물이 된다면 호랑이가 되어 아빠를 혼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빠는 나를 항상 핫도그라고 부르니까. 그리고 가족을 지키고 싶다. 호랑이는 빠르고 힘이 세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에서 어떤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아마 아빠에게 놀림 받는 게 꽤나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호랑이가 되어 아빠를 혼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빠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며 이야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핫도그야. 핫도그야.” 이렇게 애칭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애칭이 싫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아이와 소통한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공감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사실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지요? 물론 나는 공감했다고 생각합니다. 소통되었다고 여기는데, 실제로는 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오죽하면 ‘공감 능력’이라고 하겠습니까? 공감은 소통을 위한 능력입니다.
앞에서 드린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만약 동물로 태어난다면 어떤 동물이 되고 싶습니까? 제가 들은 몇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데, 소개해 드립니다. “저는 애완용 강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듬뿍 받고 싶어요.” 또 어떤 사람은 “나는 공작새가 되고 싶어요. 홀로 있지만 아름다움을 뽐내는 동물이 되고 싶어요.”라고 답했고, 어떤 사람은 “나는 앵무새가 되고 싶어요. 마음껏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사람들과 마음껏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 번도 앵무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공작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애완용 강아지를 생각하고, 어떤 분들은 공작새를 생각하고, 어떤 분들은 앵무새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참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공감하는 교회와 성도, 가족이 되고 있습니까? >

심리학자요 상담가인 에린 K. 레너드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책이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공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감이 안 되면 관계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관계를 세우려면 공감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에 섬세하게 접근해서 그것을 먼저 느끼려고 합니다. 또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해 준다고 합니다. 상대방과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감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공감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배려심이 많고,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이타적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공감 능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로, 이기적이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며,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도 자존감이 많이 낮다고 합니다.
자녀를 때리는 부모, 부하 직원에게 갑질하는 사람, 타인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 욕을 잘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 이런 사람 중에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성도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공감의 능력을 많이 키워 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가족원들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공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까? 이번 어린이날을 맞이하면서 우리 가족들 간에 공감 능력을 세워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족 구성원이 서로 공감하는 가족이 되어야겠다. 코로나19로 함께 모인 이 시기를 기회로 여기고, 서로 공감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자.’라고 결단하면 어떻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 소망교회도 공감의 능력을 갖추면 좋겠습니다. 총선이 끝난 후, 보수 정당의 실패 원인을 분석한 내용이 실린 사설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당은 공감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참패했습니다. 국민은 함께 울어주고 넘어지면 손잡아 일으키는 정치와 정치인을 원하는데, 우리 당은 폼 잡고 의전을 좋아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습니다.”라는 반성의 글이었습니다. 사설 마지막 부분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총선 패배의 원인을 두고 많은 분석이 나왔지만, 이 이야기만큼 고개가 끄떡여지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공감을 이루지 못해서 패했다는 말이 공감되었다는 뜻입니다.
정치도 그렇지만, ‘우리 교회의 문제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거에 패한 정당만큼, 우리 교회의 현실도 비슷해 보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예배당에도 나오지 못하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사회와 함께 호흡하려고 노력하며 배려하고 있는데, 사실상 사회는 교회를 좋게 바라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꾸 시비 걸 문제를 찾고, 그래서 때로는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마음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왜 교회를 자꾸 흠집을 내려 하는 걸까? 우리는 예배당에서 예배도 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불만이 많을까?’라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배당 예배만을 강행하려는 몇몇 교회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혹시 우리가 사회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비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교회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것도 압니다. 교회는 ‘텍스트(Text)’를 가지고 있습니다. 텍스트, 즉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토대로 믿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수 주일’ 해야 한다는 교리도 가지고 있고, 그밖에도 여러 신앙생활의 표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준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텍스트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다가 컨텍스트(Context)를 놓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컨텍스트, 즉 우리가 처한 ‘상황’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

<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감하는 삶의 본이 되셨습니다. >

예배당으로 성도님들이 돌아오는 이 시점에, 우리가 결단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 모두가 나만을 생각하는 믿음, 우리 가족만을 생각하는 믿음, 내 안위만을 생각하는 믿음, 그러니까 ‘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공감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믿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믿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도 잘해 오셨지만, 앞으로 더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공감의 능력과 공감의 의미에 관한 여러 다양한 서적들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해 공감 능력의 기술을 발휘하라는 책들도 많고, 하나의 기술처럼 공감을 다루는 서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공감의 정신이 무엇인지, 또 공감의 능력을 배양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려 주는 책 중의 책은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공감’이란 한글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공감과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공감이란 말만큼 기독교와 밀접하게 연관된 단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부르는 찬양 가운데 ‘위러브’라는 단체에서 부르는 ‘공감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 중 일부가 이렇습니다.

혼자서만 세상을 사는 듯이
주가 멀어 보이기만 할 때
우리는 바라보아야 하네
우리에게 오셨던 그 주님을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맘을 아시네
가까이서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네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던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네

성경에 공감이란 단어가 없을지라도, 찬양 중에는 ‘공감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공감’이란 단어도 참 많이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공감하시네’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네’라고 바꿔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공감하시네’와 ‘주님이 아시네’라는 표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이 아시네’라는 표현이 담지 못하는 한 가지를 ‘공감하시네’가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과 관련됩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표현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굉장히 중립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공감하시네’라는 말에는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즉 성육신하셨다.’라는 뜻이며,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길을 경험하셨다.’라는 뜻이자, ‘인간과 똑같은 길을 가시면서 때로는 슬퍼하셨고 때로는 기뻐하셨고 때로는 좌절하셨고 때로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이 바로 공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공감하신다는 말씀의 뜻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과 같은 삶을 사시며, 인간이 겪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는 주님, 우리 모두를 체휼하시는 주님, 죽음까지도 경험하신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4~16)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삶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성을 입고 인간의 삶을 경험하신 그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며 공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며, 우리는 이 기초로부터 공감의 원리를 깨닫습니다. 이 공감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공감해 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공감은 주님께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을 알고 계시는 주님, 그 주님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대신 드리시며 대제사장의 역할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깊은 탄식 속에서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고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려 주십니다.

< 우리는 공감의 사명을 받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힘든 분들이 참 많지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고통스러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알고 공감해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감하신다.’라는 것이 공감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감하신다는 출발점에서 공감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공감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께 중보해 주시는 주님입니다. 그 주님이 이제 모든 제자에게 공감의 사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서 3:12~14)

이 말씀에 ‘공감’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통 공감과 관련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이라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감을 받은 자처럼”이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모두 공감의 언어입니다. 공감의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감을 이룰 수 있을까요? 많은 심리학 및 인문학 서적이 공감의 방법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모든 내용이 이미 성경에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4~8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4~8)

이것이 바로 공감의 방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공감하시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하셨는지를 유의해 본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어떻게 공감을 이룰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이었고, 공감을 이루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다른 이들과 공감하길 원한다면, 자녀들과 공감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공감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의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상대방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파하며, 상대방의 처지에서 함께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방법을 세상의 지식도 권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이것이 귀한 방법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면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공감을 이루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식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 방법은 ‘타인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걷는 것이며, 그 사람의 눈으로 보고, 그 사람의 귀로 들으며, 그 사람의 심장으로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가정에 이와 같은 공감의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품에 안는 공감의 신앙생활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장애인과 공감하는 것, 그들의 부모와 가족과 공감을 이루는 것, 병을 앓고 있는 이들과 공감을 이루는 것, 그의 가족과 공감을 이루는 것이 공감의 사람이 되어 가는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식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 실천과 삶을 통해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가 더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시작을 오늘부터 저와 여러분이 함께하길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2020년 5월 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공감의 능력을 주소서” (골 3:12-14)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563장, 29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골 3:12-1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5월 3일자 주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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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코로나 19로 닫혔던 문이 열리고 드리는 첫 번째 예배이며 어린이 주일 예배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과 잘 공감하십니까? 공감이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심리상태, 그 마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 마음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상태가 아닐까합니다. 왜 기독교인에게 공감의 능력이 필요할까요?

 설교의 요약

    ‘공감’이라는 단어는 사실, 우리말로 된 모든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공감이라는 단어만큼 기독교적인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의 오심과 이 땅에서의 사심이 그러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육신 하셔서 인간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어린 시절도 겪으셨고, 인간이 경험하는 성장의 시간도 거치셨고, 인간에게 배신도 당하셨고, 인간이 당하는 고통스런 고문도 당하셨으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경험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황에 공감하신다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공감하시고 함께 해주시는 우리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바로 이 공감의 사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2-14).

    그렇다면 우리가 공감의 능력을 갖추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빌 2:4-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이 바로 공감의 방식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함께 아파하고 상대방의 처지에서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공감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나 중심의 신앙, 나의 복, 나의 가족, 나의 사업을 세우는 데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다면, 이제는 공감의 능력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담는 것에 관심을 둡시다. 어려운 이웃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장애우들과 공감하고, 장애우들의 가족들과 공감하는 것입니다. 병을 앓고 있는 이들과 그리고 그 가족들과 공감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공감의 능력으로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신앙으로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나누기

 1. 나는 어떤 동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어떤 동물로 자신을 표현하나요?

 2. 과거, 공감을 실천 했을 때, 내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앞으로 내가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공감의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와 같은 삶은 사시면서 우리를 공감해주신 하나님. 우리도 세상과 공감하며, 교인 간에 소통하고, 가족 간에도 공감으로 소통하는 따뜻한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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