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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누가복음 10:30~37

김경진 목사

2024.02.25

<예수님 비유에는 더 깊이 생각해 볼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께서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말씀의 발단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율법사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을 합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내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내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율법사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 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라.”라고 답을 주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더 옳게 보이려고 자랑하듯이 한 가지 질문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고, 거의 죽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때 한 제사장이 지나갔지만 그를 피하여 갔고,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를 피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는 상처를 싸매 주고 그를 나귀에 싣고 여관까지 데려가서 살펴 주었습니다. 다음 날 떠날 때는 데나리온 둘을 여관 주인에게 맡기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부탁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으셨죠. “네가 보기에는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때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시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기도 하고 감명을 많이 받기도 한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자선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이름을 ‘사마리아인’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하고 여러 돕는 일들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이미 많이 읽고 묵상했기 때문에 주된 흐름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사마리아인’을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그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말씀을 만들어 가셨을까요? 지나가는 아라비아 상인이라고 했어도 충분히 내용이 재미있게 전개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어 주인공으로 만드셨을까요? 강조나 과장의 용법으로 가지고 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질문을 던져 보게 됩니다.

한 가지 다른 관점으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과연 강도 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하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이 질문은 설교의 제목이지만 대답을 찾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말씀만 가지고는 도저히 강도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제목의 질문을 가지고 본문 말씀을 좀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누가복음 10장 말씀만 가지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경의 다른 말씀을 참고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구약에 있습니다. 구약의 구절은 누가복음의 비유와 아주 밀접하고 ‘사마리아’ 및 ‘여리고’와 같은 비슷한 지명이 나오고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장면처럼 구약 본문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지나서 ‘사마리아’로 가는 길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역대하 28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비유의 말씀과 유사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비유를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추정이 됩니다.

역대하에는 남유다의 백성들이 동족이었던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잡혀갔던 상황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남유다의 백성들이 북이스라엘 동족들에게 패하여 전쟁의 포로로 잡혀가고 있던 때입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가다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인들이 도움을 주었던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과 역대하 28장에는 비슷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이동하는 장면과 ‘사마리아’와 ‘여리고’라고 하는 지명이 나타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곳에 비슷한 문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설명하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눅 10:34)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역대하 28장에도 사마리아인들이 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대하 28:15)

 

누가복음 10장에 있는 말씀과 역대하 28장에 있는 말씀에 유사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아마도 율법사였던 사람은 이 역대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사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몇몇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배경이 아닐지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구약을 통해 사마리아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대하 28장에는 어떤 내용의 말씀이 들어있을까요? 때는 아하스 왕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 남유다는 아람 왕의 침략과 여러 민족의 침략을 받았는데, 계속해서 패배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동족이었던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침공을 받아서 전쟁에서 패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남유다의 현실은 참으로 참혹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합하여 이십만 명을 사로잡고 그들의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대하 28:5,8)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겁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유다를 침공해 와서 많은 사람들을 형제들을 죽이고 이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는 말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선지자 오뎃이 이스라엘로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을 막으면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남유다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고 너희가 승리하게 되었다. 너희는 도리어 승리를 자축하면서 살육하고 너의 동족 형제들을 노예로 끌고 오고 있다. 너의 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잡아 오는 포로를 속히 돌려보내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큰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진노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뎃의 예언을 들은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었겠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승리해서 취해서 돌아오고 있었을 때 멈추어 서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네 용사가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의 우두머리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아사랴’와 ‘베레갸’, ‘여히스기야’, ‘아마사’라고 하는 이름이 거명됩니다. 그들이 군사들을 막아서고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속히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자”고 말합니다. 우리의 허물이 커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임할까 두렵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설득합니다. 우리의 동족과 형제들을 결코 노예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머뭇머뭇 거리다가 끌고 오던 노예들과 물건들을 다 놓고 도망가듯이 사라집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에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포로와 노략한 물건을 방백들과 온 회중 앞에 둔지라 (대하 28:14)

 

모든 것들을 놓아두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우두머리들이 포로들을 풀어서 돌보아 주고 여리고까지 데려다 줍니다.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올 때 많이 맞고 살육을 당하기도 하였을 터인데 그들을 보듬어 주고 그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대하 28:15)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역대하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율법사라면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과거의 사건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동족인 유다의 백성들을 잡아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노예로 삼으려고 이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끌고 올라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너의 형제들이다. 너희들의 같은 혈육이다.”라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말씀을 듣고는 그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약한 자들은 나귀에 태워서 돌려보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율법사가 나아와서 물음을 묻고 있었던 그때 사마리아인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스라엘에게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서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혼혈정책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이방 민족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다양한 민족과 섞여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들이 땅을 되찾았기는 했지만 모든 혈통이 섞여 버림으로써 남유다의 백성들은 그들을 이웃과 형제로 여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서 과거 사마리아 사람들이 너희의 이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를 형제로 대우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대기의 포로로 잡혀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가 아닐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고, 역대하에서는 남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혀서 여리고를 통해 사마리아 땅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강도 만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통해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들이 왜 포로로 잡혀가고 있습니까? 물론 전쟁에서 패하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때는 아하스 시대입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왕이었고 백성들도 그러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대하 28:2b~4)

 

이것이 남유다 예루살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유다를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유린당하게 하셨고 심지어는 자신의 동족들에게도 침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대하 28:5~6a)

 

강도 만난 자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던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의 이유는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강도 만난 자가 되었고, 포로로 잡혀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으면서 강도 만난 자를 중립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합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재수 없게 우연히 강도를 만나서 죽어 가고 있던 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역대기의 말씀을 연결해서 본다면 강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용하신 사람이며, 그렇게 죽어 가고 있던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먼저 사마리아인이 되려고 하는 결단 보다 ‘내가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인가요? 나는 상처와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피를 흘리며 내 던져진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왜 강도를 만났나요? 내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업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없음에도 보다 나은 길로 이끌기 위해서 어려운 국면을 만들어 가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온 결과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에서 어려움이나 힘든 일을 당한 것을 돌이켜 보면 내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강도를 만나게 된 것은 재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받은 대로 은혜를 돌려줘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못된 유다 백성들이 자신의 동족에게 이십만 명이나 잡혀서 올라가게 하셨음에도 다시 선지자 오뎃을 통해 말씀하시고 더 이상 포로로 잡혀 가지 않도록 막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이들을 보내셔서 포로로 잡혀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돌보게 하시고 그들을 여리고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을 통해서 노임을 받게 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잠시 진노하시고 심판의 자리까지 끌고 가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용서하시고 보듬어 주시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핵심에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라는 말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그저 제 3자 관찰자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규범이나 교과서적 관점에서 하나의 선택을 요청하는 것도 아닙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레위인과 제사장은 그냥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은 그를 도와주었는데,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는 가벼운 윤리적 질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네가 강도 만난 자였어.”라는 사실을 보게 하십니다. 죄 때문에 강도 만난 자처럼 죽어 가고 있던 우리를 도와주었던 분이 누구인지를 다시 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도 살아가면서 제가 도움을 주었던 경우도 있고 도움을 받았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았던 것은 크게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도움을 주었던 것은 영원히 기억될 것처럼 또렷합니다. 제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보면 ‘저 사람 그때 이렇게 도와줬는데 기억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전에 이미 고맙다고 말했는데 또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은 기억이 나는데 내가 도움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어려웠을 때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은 누구였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내가 힘들었을 때 나에게 손을 내밀고 나를 붙잡아 줬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손길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그분처럼 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치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경험으로부터 끌어 올라오는 나의 선택과 결단인 것입니다. 그것은 갚아지는 것이지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의 비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일절을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 백오 주년입니다. 105년 전 삼일절 그때는 어떠했습니까? 우리 대한민국 조선 땅에 많은 선조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면서 방방곡곡 돌아다녔습니다.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면서 일제의 총칼 앞에서 그렇게 외쳤던 이유는 세계의 모든 열방들에게 요청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좀 봐주십시오. 우리가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세상 사람들이여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이여 돌보아 주십시오.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들은 이런 마음으로 태극기를 들고 노래하며 부르짖지 않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자 열방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성장을 거듭했고 지금은 세계를 리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계를 이끌어 가는 나라가 되었지만 세계 방방곡곡에는 아직 105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과 같은 곳이 있습니다. “이 땅을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 민족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많이 들리고 있습니까.

우크라이나 땅과 세계 여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저 좋은 일이니까 사마리아인처럼 하자’가 아니라 우리가 도움을 받았기에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의 비결입니다. 삼일절을 보내면서 모든 열방과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어려운 사람들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Who Was the Man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Luke 10:30-37

 

This is how Jesus’ parable begins.

 

An expert of the law asks Him, “Teacher,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Jesus answers,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do you read it?” The expert answers,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Jesus replies, “Do this and you will live.”

 

But to justify himself, the expert of the law asks Jesus again, “And who is my neighbor?” This is when Jesus tells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A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whenrobbers attacked him. They stripped him of his clothes, beat him, and went away, leaving him half dead.A priest who saw him just passed by on the other side. So did a Levite.

 

But a Samaritan who happened to be passing by had compassion on him, went to him, bandaged him, put him on his own donkey, brought him to an inn, and cared for him. The next day,the Samaritan even gave two denarii to the innkeeper, saying, “On my return, I will reimburse you for any extra expense you may have.”

 

Jesus then asks,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The expert of the law replies, “The one who had mercy on him.” Jesus says to him, “Go and do likewise.”

 

This story, known as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has moved countless people’s hearts since our Lord told it andhas motivated many to become “Good Samaritans” themselves. The word “Samaritan” has become a byword for charity or for people who do good works.

 

First, of all people, why did Jesus pick a Samaritan, someone ethnically Jewish but looked down on and scorned by the Jews,as the protagonist of this magnificent story? Why did He not choose, for example, an Arabian merchant instead?

 

Second, a question we hardly ever ask is this: Who was the man that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Just as it is impossible to know who exactly the Good Samaritan was, we cannot know for sure the identity of the man attacked by robbers. Yet, I have titled today’s sermon “Who Was the Man That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To answer this question, I wish to look at a story in the Old Testament.

 

I do so because this story has many parallels with Jesus’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and, therefore, I believe that Jesus would have had the former in mind when He told the latter.

 

The story from the Old Testamentis none other than the one in 2 Chronicles 28.

 

This chapter tells the story of how the people of the Kingdom of Judah were defeated by the Kingdom of Israel and taken as captives. Fortunately, however, with God’s intervention and help, the people of Judah return home safely.

 

There are many similarities between Luke 10 and 2 Chronicles 28.

 

First, Jesus’ parable in Luke starts with this sentence: “A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when he was attacked by robbers…”

 

The people of Judah in 2 Chronicles 28, too, were taken from their home, Jerusalem, to Samaria, a region of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nd Jericho lay in the path of their torturous journey to Samaria.

 

So you can see that Jericho and Samaria are mentioned in both passages from Luke and Chronicles.

 

Above all, both texts use extremely similar expressions.

 

This is what the Samaritan in Luke does to the man attacked by robbers:

 

“He went to him and bandaged his wounds, pouring on oil and wine. Then he put the man on his own donkey, took him to an inn and took care of him.” (Luke 10:34)

 

And what about 2 Chronicles? Let’s look at how the four Samaritan warriors treatthe Jewish prisoners from Judah:

 

“The men designated by name took the prisoners, and from the plunder they clothed all who were naked. They provided them with clothes and sandals, food and drink, and healing balm. All those who were weak they put on donkeys. So they took them back to their fellow countrymen at Jericho, the City of Palms, and returned to Samaria.”(2 Chronicles 28:15)

 

Therefore, when Jesus told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it likely that His audience recalled the story of the Old Testament—at least, the expert ofthe law would have. Even today some scholars of the Old Testament suspect that the context of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is a story from the Old Testament.

 

Then what does 2 Chronicles 28 write about?

 

It was when King Ahaz was king of Judah.

 

Jerusalem, that is, the southern Kingdom of Judah, was attacked by the king of Aram and many people of Judah were. Furthermore, Judah was invaded by Israel, which left many dead and enslaved:

 

“Therefore the LORD his God handed him over to the king of Aram. The Arameans defeated him and took many of his people as prisoners and brought them to Damascus. He was also given into the hands of the king of Israel, who inflicted heavy casualties on him…The Israelites took captive from their kinsmen two hundred thousand wives, sons and daughters. They also took a great deal of plunder, which they carried back to Samaria…” (2 Chronicles 28:5, 8)

 

At that time a prophet named Oded prophesized to Israel. His message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You, Israel, were able to defeat Judah because God gave it over to you for its sins against Him.But you are slaughtering and enslaving Judah, your brethren. Are you not without sin? Set the prisoners of Judah free and send them back to their homes. Or else, My wrath will be upon you.”

 

“But a prophet of the LORD named Oded was there, and he went out to meet the army when it returned to Samaria. He said to them, ‘Because the LORD, the God of your fathers, was angry with Judah, he gave them into your hand. But you have slaughtered them in a rage that reaches to heaven.And now you intend to make the men and women of Judah and Jerusalem your slaves. But aren’t you also guilty of sins against the LORD your God?Now listen to me! Send back your fellow countrymen you have taken as prisoners, for the LORD’s fierce anger rests on you.’” (2 Chronicles 28:9-11)

 

Hearing this, four leaders of Ephraim confronted their people coming back from victory and stopped them from bringing the prisoners to their land:

 

“Then some of the leaders in Ephraim–Azariah son of Jehohanan, Berekiah son of Meshillemoth, Jehizkiah son of Shallum, and Amasa son of Hadlai–confronted those who were arriving from the war. ‘You must not bring those prisoners here,’ they said, ‘or we will be guilty before the LORD. Do you intend to add to our sin and guilt? For our guilt is already great, and his fierce anger rests on Israel.’” (2 Chronicles 28:12-13)

 

So the Israelite soldiers give up the prisoners and plunder:

 

“So the soldiers gave up the prisoners and plunder in the presence of the officials and all the assembly.”(2 Chronicles 28:14)

 

Then the four leaders take care of the prisoners and take them back all the way to Jericho, after which they themselves return to Samaria:

 

“The men designated by name took the prisoners, and from the plunder they clothed all who were naked. They provided them with clothes and sandals, food and drink, and healing balm. All those who were weak they put on donkeys. So they took them back to their fellow countrymen at Jericho, the City of Palms, and returned to Samaria.” (2 Chronicles 28:15)

 

Now if the man who came to Jesus was an expert of the law familiar with this story, he would have immediatelyrecalled it as Jesus told the parable.

 

After hearing God’s message of rebuke that weighed on their conscience, the four Samaritan leaders sent the prisoners back to Judah. They also provided the prisoners with healing balm and placed the weak on donkeys as they sent them back.

 

But what has become of the Samaritans now? Thoughnot their fault, their state has become dire. Due to Assyria’s policies, the people of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were scattered and because of the Assyrian intermarriage policy, they experienced the pain of being forced to mix with diverse ethnic groups. Since they are mixed blood, they are not our people? So the people of Judah and Jerusalem did not consider them their countrymen. In short, they did not see them as their neighbor.

 

But through a parable Jesus reminds the Jews of the past incident when the Samaritans sent the people of Judah back because they considered them their countrymen. By mentioning a Samaritan, He wants to remind the Jews that the Samaritans had already been their neighbors, going beyond merely taking an extreme example.

 

Now if we understand the context of Jesus’ parable, we can now make a presumption about the identity of the man attacked by the robbers.

 

He would have represented none other than the prisoners in 2 Chronicles. And the prisoners were the people of Judah and Jerusalem. Why were they taken as captives? Of course, it was because they were defeated in a war. But the Bible mentions a different reason.

 

It was the era of Ahaz. King Ahaz was not honest before God. He did not serve God.

 

“He walked in the ways of the kings of Israel and also made cast idols for worshiping the Baals.He burned sacrifices in the Valley of Ben Hinnom and sacrificed his sons in the fire, following the detestable ways of the nations the LORD had driven out before the Israelites.” (2 Chronicles 28:2-4)

 

God was angry with Ahaz for such actions. So God did not protect Judah and let them be attacked and plundered by other nations and the Kingdom of Israel.

 

“Therefore the LORD his God handed him over to the king of Aram. The Arameans defeated him and took many of his people as prisoners and brought them to Damascus. He was also given into the hands of the king of Israel, who inflicted heavy casualties on him. […]because Judah had forsaken the LORD, the God of their fathers.” (2 Chronicles 28:5-6)

 

If we revisit Jesus’ parable in light of this historic event of the Old Testament, who is the man that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He is none other than the people of Judah who took pride in being God’s people.

 

But why did they fall into the hands of robbers? Because of their sins, they became slaves. This is the reality of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as told by Chronicles.

 

A people who left God. God did not protect them from war and let them become prisoners. There was a reason the man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at least, from the perspective of Chronicles. It was only fitting that he be attacked.

 

But aren’t we such people too?

 

Before we try to become theGood Samaritan, we must first reflect on who we are. We are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We are like that man who was beaten by robbers, wounded, bleeding, and left to die.

 

It was not just bad luck that we met robbers. It was because of our sins. Because of our sins, God abandoned us. Just as the people of Judah were beaten and taken as captives after being defeated in war, we too have been abandoned by God.

 

Yet by sending a prophet to that wicked people of Judah as well as four brave men who obeyed the word of God, God bandaged the wounds of His enslaved people, healed them, and returned them to their home, Jericho.

 

God set them free from the Samaritans and allowed them to return home.

 

This is God’s grace.

 

The essence of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is Jesus’ command to do just as the Samaritan did.

 

But to understand the context of this parable deeply, we must first listen to the voice of the Lor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an attacked by the robbers.

 

Jesus does not want us to see His parable just as an observer.

 

Once there was a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A priest and a Levite passed by, but it was a Samaritan who helped him. Who do you think was good among them? Live like that Samaritan… This is not what Jesus is saying.

 

Jesus wants us to see the parab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You are that man who was almost beaten to death. You came to that state because of your sins. Yet… a Samaritan helped you in your distress. But how do you consider those Samaritans now? How are you treating them?

 

Don’t you treat them as Gentiles? They are your brothers, your neighbors. Shouldn’t you treat them with kindness and gratitude? Live like that Good Samaritan. Do likewise.

 

Therefore, this parable is not talking about morals and rules of an ethic book. It is not teaching a lesson to be good and respectful and to help others.

 

I once met a man who extended kindness when I was in great difficulty. I cannot forget that kindness. Thanks to him, I survived, though I was half dead. Thank you. Therefore, I, too, want to live like that man who helped me. This is how we ought to live.

 

This is the very secret to loving our neighbors that Jesus is teaching us.

 

As we celebrate the March 1st Movement this week, we remember our colonial past when Koreastrived to show the world that it is independent from Japan and called to many countries for help. Eventually, Korea gained independence with the help of many nations, which was the grace of God.

 

Today with God’s blessing, Korea has achieved an unprecedented growth in world history and has become a strong, prosperous, and leading nation. Now what must we do? Where are those who helped you when you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Do as they did. There are things Koreaought to do for the suffering people and nations of the world today. It is my hope that, with a sense of mission, Korea will become a nation and a people that does service to mankind, working for the freedom and happiness of other nations and peo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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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30~37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 비유에는 더 깊이 생각해 볼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께서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말씀의 발단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율법사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을 합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내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내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율법사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 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라.”라고 답을 주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더 옳게 보이려고 자랑하듯이 한 가지 질문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고, 거의 죽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때 한 제사장이 지나갔지만 그를 피하여 갔고,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를 피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는 상처를 싸매 주고 그를 나귀에 싣고 여관까지 데려가서 살펴 주었습니다. 다음 날 떠날 때는 데나리온 둘을 여관 주인에게 맡기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부탁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으셨죠. “네가 보기에는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때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시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기도 하고 감명을 많이 받기도 한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자선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이름을 ‘사마리아인’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하고 여러 돕는 일들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이미 많이 읽고 묵상했기 때문에 주된 흐름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사마리아인’을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그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말씀을 만들어 가셨을까요? 지나가는 아라비아 상인이라고 했어도 충분히 내용이 재미있게 전개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어 주인공으로 만드셨을까요? 강조나 과장의 용법으로 가지고 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질문을 던져 보게 됩니다.

한 가지 다른 관점으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과연 강도 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하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이 질문은 설교의 제목이지만 대답을 찾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말씀만 가지고는 도저히 강도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제목의 질문을 가지고 본문 말씀을 좀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누가복음 10장 말씀만 가지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경의 다른 말씀을 참고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구약에 있습니다. 구약의 구절은 누가복음의 비유와 아주 밀접하고 ‘사마리아’ 및 ‘여리고’와 같은 비슷한 지명이 나오고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장면처럼 구약 본문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지나서 ‘사마리아’로 가는 길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역대하 28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비유의 말씀과 유사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비유를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추정이 됩니다.

역대하에는 남유다의 백성들이 동족이었던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잡혀갔던 상황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남유다의 백성들이 북이스라엘 동족들에게 패하여 전쟁의 포로로 잡혀가고 있던 때입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가다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인들이 도움을 주었던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과 역대하 28장에는 비슷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이동하는 장면과 ‘사마리아’와 ‘여리고’라고 하는 지명이 나타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곳에 비슷한 문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설명하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눅 10:34)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역대하 28장에도 사마리아인들이 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대하 28:15)

 

누가복음 10장에 있는 말씀과 역대하 28장에 있는 말씀에 유사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아마도 율법사였던 사람은 이 역대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사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몇몇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배경이 아닐지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구약을 통해 사마리아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대하 28장에는 어떤 내용의 말씀이 들어있을까요? 때는 아하스 왕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 남유다는 아람 왕의 침략과 여러 민족의 침략을 받았는데, 계속해서 패배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동족이었던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침공을 받아서 전쟁에서 패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남유다의 현실은 참으로 참혹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합하여 이십만 명을 사로잡고 그들의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대하 28:5,8)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겁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유다를 침공해 와서 많은 사람들을 형제들을 죽이고 이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는 말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선지자 오뎃이 이스라엘로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을 막으면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남유다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고 너희가 승리하게 되었다. 너희는 도리어 승리를 자축하면서 살육하고 너의 동족 형제들을 노예로 끌고 오고 있다. 너의 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잡아 오는 포로를 속히 돌려보내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큰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진노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뎃의 예언을 들은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었겠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승리해서 취해서 돌아오고 있었을 때 멈추어 서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네 용사가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의 우두머리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아사랴’와 ‘베레갸’, ‘여히스기야’, ‘아마사’라고 하는 이름이 거명됩니다. 그들이 군사들을 막아서고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속히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자”고 말합니다. 우리의 허물이 커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임할까 두렵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설득합니다. 우리의 동족과 형제들을 결코 노예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머뭇머뭇 거리다가 끌고 오던 노예들과 물건들을 다 놓고 도망가듯이 사라집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에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포로와 노략한 물건을 방백들과 온 회중 앞에 둔지라 (대하 28:14)

 

모든 것들을 놓아두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우두머리들이 포로들을 풀어서 돌보아 주고 여리고까지 데려다 줍니다.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올 때 많이 맞고 살육을 당하기도 하였을 터인데 그들을 보듬어 주고 그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대하 28:15)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역대하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율법사라면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과거의 사건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동족인 유다의 백성들을 잡아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노예로 삼으려고 이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끌고 올라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너의 형제들이다. 너희들의 같은 혈육이다.”라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말씀을 듣고는 그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약한 자들은 나귀에 태워서 돌려보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율법사가 나아와서 물음을 묻고 있었던 그때 사마리아인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스라엘에게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서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혼혈정책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이방 민족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다양한 민족과 섞여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들이 땅을 되찾았기는 했지만 모든 혈통이 섞여 버림으로써 남유다의 백성들은 그들을 이웃과 형제로 여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서 과거 사마리아 사람들이 너희의 이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를 형제로 대우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대기의 포로로 잡혀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가 아닐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고, 역대하에서는 남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혀서 여리고를 통해 사마리아 땅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강도 만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통해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들이 왜 포로로 잡혀가고 있습니까? 물론 전쟁에서 패하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때는 아하스 시대입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왕이었고 백성들도 그러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대하 28:2b~4)

 

이것이 남유다 예루살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유다를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유린당하게 하셨고 심지어는 자신의 동족들에게도 침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대하 28:5~6a)

 

강도 만난 자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던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의 이유는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강도 만난 자가 되었고, 포로로 잡혀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으면서 강도 만난 자를 중립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합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재수 없게 우연히 강도를 만나서 죽어 가고 있던 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역대기의 말씀을 연결해서 본다면 강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용하신 사람이며, 그렇게 죽어 가고 있던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먼저 사마리아인이 되려고 하는 결단 보다 ‘내가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인가요? 나는 상처와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피를 흘리며 내 던져진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왜 강도를 만났나요? 내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업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없음에도 보다 나은 길로 이끌기 위해서 어려운 국면을 만들어 가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온 결과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에서 어려움이나 힘든 일을 당한 것을 돌이켜 보면 내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강도를 만나게 된 것은 재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받은 대로 은혜를 돌려줘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못된 유다 백성들이 자신의 동족에게 이십만 명이나 잡혀서 올라가게 하셨음에도 다시 선지자 오뎃을 통해 말씀하시고 더 이상 포로로 잡혀 가지 않도록 막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이들을 보내셔서 포로로 잡혀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돌보게 하시고 그들을 여리고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을 통해서 노임을 받게 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잠시 진노하시고 심판의 자리까지 끌고 가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용서하시고 보듬어 주시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핵심에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라는 말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그저 제 3자 관찰자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규범이나 교과서적 관점에서 하나의 선택을 요청하는 것도 아닙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레위인과 제사장은 그냥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은 그를 도와주었는데,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는 가벼운 윤리적 질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네가 강도 만난 자였어.”라는 사실을 보게 하십니다. 죄 때문에 강도 만난 자처럼 죽어 가고 있던 우리를 도와주었던 분이 누구인지를 다시 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도 살아가면서 제가 도움을 주었던 경우도 있고 도움을 받았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았던 것은 크게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도움을 주었던 것은 영원히 기억될 것처럼 또렷합니다. 제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보면 ‘저 사람 그때 이렇게 도와줬는데 기억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전에 이미 고맙다고 말했는데 또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은 기억이 나는데 내가 도움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어려웠을 때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은 누구였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내가 힘들었을 때 나에게 손을 내밀고 나를 붙잡아 줬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손길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그분처럼 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치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경험으로부터 끌어 올라오는 나의 선택과 결단인 것입니다. 그것은 갚아지는 것이지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의 비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일절을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 백오 주년입니다. 105년 전 삼일절 그때는 어떠했습니까? 우리 대한민국 조선 땅에 많은 선조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면서 방방곡곡 돌아다녔습니다.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면서 일제의 총칼 앞에서 그렇게 외쳤던 이유는 세계의 모든 열방들에게 요청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좀 봐주십시오. 우리가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세상 사람들이여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이여 돌보아 주십시오.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들은 이런 마음으로 태극기를 들고 노래하며 부르짖지 않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자 열방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성장을 거듭했고 지금은 세계를 리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계를 이끌어 가는 나라가 되었지만 세계 방방곡곡에는 아직 105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과 같은 곳이 있습니다. “이 땅을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 민족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많이 들리고 있습니까.

우크라이나 땅과 세계 여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저 좋은 일이니까 사마리아인처럼 하자’가 아니라 우리가 도움을 받았기에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의 비결입니다. 삼일절을 보내면서 모든 열방과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어려운 사람들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2월 25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그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눅 10장 30~37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54장, 305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눅 10장 30~37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2월 2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왜 예수님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냉대와 천대를 받았던 사마리아인을 이 비유의 주인공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요약

 

아하스 왕이 유다를 통치하던 시기에 예루살렘은 아람 왕의 침략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북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서, 또 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뎃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같은 민족을 살육하고 노예로 잡아오는 모습 가운데, “너희에게는 죄가 없느냐? 너희가 잡아 오는 포로를 놓아서 돌아가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에브라임의 우두머리 네 사람이 일어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막고, 포로를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동족인 유다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다가,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 그들을 돌려 보내주었습니다. 상처를 싸매어 주고, 약한 자들은 나귀에 태워서 돌려 보내주었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역대하 28장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유다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강도를 만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고, 이로 인해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대하 28장이 알려주는 강도 만난 자의 실상을 통해,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전에 우리가 누구인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로 괴로움을 당하고, 피를 흘리며, 내던져진 강도 만난 사람과 같습니다. 강도를 만나게 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못된 유다 백성들을 위해 선지자를 보내시고, 용감한 네 사람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을 보내셔서, 포로로 잡혀가던 이스라엘을 싸매시고, 고치시고, 여리고로,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십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놓임을 받게 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에서부터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누기

 

  1. 우리는 도움을 받은 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도와준 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를 고치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받은 은혜가 크기에,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 늘 그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또한 나를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도움을 베풀어 주었던 사람들, 우방들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감당하는 참된 이웃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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