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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진리에 이를 수 없는 사람

디모데후서 3:1~7

김경진 목사

2024.09.15

<수천 년부터 존재하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며 신앙의 건강을 점검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하면서 제가 화상을 당했을 때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저를 만나시는 분들이 자꾸 제 얼굴을 만지려고 하셔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제 얼굴은 지금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 설교 말씀을 드렸는데 사진만 기억하셔서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또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디모데후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목회와 관련하여서 교훈하고 있는 내용이 디모데후서입니다. 특별히 디모데후서에서 두드러지는 내용은 거짓 교사들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초대교회가 왕성하게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이단과 거짓 교사들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다른 종교나 다른 이단 및 종파를 만들기도 했고요. 또 교회의 편지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왜 초기부터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이렇게 많았을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진리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노력이 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의 지리한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은 달콤한 말과 유언비어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수를 들고 있었던 사도바울까지도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 상황 속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일수록 더 수려한 말과 언어, 논리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이나 가까운 곳에 그러한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가족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모든 성도 여러분이 거짓 교사에게 유혹받지 않고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진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얼굴 가지고는 구별이 잘 안됩니다. 오늘 바울이 전하는 가짜 복음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건강을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짓 가르침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딤후 3:6a)

 

여기서 ‘그들’이라고 표현된 단어는 ‘거짓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하는 전형적인 포교 방법을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슬그머니 남의 집으로 들어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도둑처럼 담을 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저런 사람들의 소개를 통해서 접근할 수도 있겠고요. 또 지나가면서 물을 한 모금 달라고 하면서 접근할 수도 있겠죠. 어쨌든 자연스럽게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과 접근해서 대화를 시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전형적인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포교 방법입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여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작은 여인이라는 뜻인데 상징적으로는 ‘미숙한 여인’, ‘미숙한 사람’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무언가 미숙한 사람, 특별히 신앙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 접근하여서 그들을 영적으로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전략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붙잡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 3:7)

 

항상 배우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참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결코 진리의 지식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거짓 교사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경건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면서 그 굴레 안에 가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일들이 참 많기는 하지만, 중세 교회만 보더라도 그런 예가 분명해집니다.

중세 교회는 구원을 받으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유아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죠.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8일 되기 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원죄를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세례를 받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또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원죄는 제거됐는지 모르지만 자범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늘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평생 고해성사를 하고, 자범죄를 제거하며,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죄를 없앨 수 있다고 가르쳤죠.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자범죄를 다 해소할 수 있느냐?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선도 행하여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는 데 헌물도 드려야 되고, 헌신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진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그러면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가 구원을 완성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세례를 받고 고해성사와 미사, 자선, 헌신, 헌물 등 그렇게 열심히 모든 것들을 해도 죽게 되면 그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지 아직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의 영혼이 연옥에 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면죄부를 사서 바쳐야 된다고 합니다. 평생 동안 노력해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죽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중세 교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살았어도 죽으면 다시 면죄부를 위해서 헌금을 드려야 되고, 또 헌신해야 되는 악순환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세 교회는 성도들에게 확실한 구원의 감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끊임없이 노력하고 노력하되 여전히 이룰 수 없는 단계에 머물도록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가짜 복음과 진짜 복음을 구별하는 첫 번째 방법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신앙의 체계가 자꾸 ‘무엇인가 더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붙잡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가짜 복음입니다. 진정한 복음, 진짜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복음입니다. 어떤 것인가에 매여 구원을 얻기 위하여 쩔쩔매게 하고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직도 멀었다고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 가르침은 잘못된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 해내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실 모든 준비를 다 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죄책감과 욕심으로 미혹합니다.>

 

그렇다면 거짓 교사들은 어리숙하고 미숙한 신앙인을 어떻게 미혹하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굴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게 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빠져드는 것일까요. 다시 본문을 봅니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6)

 

여기 흥미로운 두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는 죄를 중히 지고라는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죄의 무게를 무겁게 지고 살아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난 자유를 그들이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더 배워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하고, 구원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가르칩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심어 줍니다. “아직 너는 구원받으려면 멀었어. 너는 더 노력해야 해. 너는 성경을 더 알아야 하고, 더 기도하고 금식해야 해. 이 정도로는 안 돼.”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죄의식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를 교회나 어떤 선교 단체, 성경 공부 모임, 기도 모임 안에 가두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여기서 가르치는 대로 더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안에 있다 보면 죄의 짐을 벗지 못합니다. 늘 회개해야 하고 늘 부족합니다.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이미 대신 져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은 내가 지고 있던 모든 죄의 짐을 다 내려놓고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이 땅에서 힘차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모든 예배나 봉사, 자선, 헌금 등 이와 같은 것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이며 진짜 신앙인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거짓 교사들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배우게 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동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욕심’과 ‘욕망’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 성공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사업이 잘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올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이 마음의 동기라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오랫동안 나와도 진정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진정한 복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로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기보다는 성도들을 만나고 그들과 거래와 사업을 하려는 목적을 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나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복음의 진수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영적으로 깊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죠. 그런데 그것이 간혹 욕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심을 ‘거룩한 욕심’이라고 멋지게 포장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말 거룩한 욕심이 될 수도 있겠고, 그것이 영적 삶을 더욱 깊이 끌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주제가 신앙적으로 보일 뿐, 중심에 흐르는 진정한 힘은 이 세상의 욕심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단들이나 거짓 교사들은 세상적인 경쟁심을 부추기곤 합니다. 오직 구원을 받을 사람은 14만 4천 명밖에 없으니 이 안에 들어가려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 하늘나라에서 좋은 집과 높은 자리에 위치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덧붙이곤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일이니 좋은 것이라 여기고 열심히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좋은 집에 살려고 욕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과 하늘나라에서 남들보다 더 좋은 집에 살려고 노력하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실은 차이가 없겠죠. 그 동력에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둘 다 누군가를 누르고 내가 더 잘 살겠다는 욕망이 그 안에서 꿈틀거릴 뿐입니다. 주제가 하나님 나라여서 그렇지, 결국은 세상적인 욕심이 발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것들을 우리로 하여금 미혹당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실상 구원은 그러한 모습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남들보다 더 많이 해서 더 우월한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구원이 너무나도 값지고 감사해서 감격으로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자유케 하는 힘, 그리고 우리를 감사함으로 이끄는 힘이 구원의 힘입니다.

 

<참된 복음은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제 거짓 복음과 진정한 복음을 구별하는 또 다른 한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5)

 

여기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경건의 모양’, ‘경건의 능력’이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경건의 능력’이라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십니까? 흔히 생각하기를, 방언이나 예언을 하거나 또는 병 고치는 능력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도를 잘하거나 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것도 경건의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06년도에 나온 『만주의 선교 방법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존 로스(John Ross)라는 영국의 선교사가 쓴 책입니다. 그분은 중국의 만주에서 한국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을 전도했던 중국과 한국의 초기 선교사였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던 초기 시대에 선교사들은 현지인, 즉 한국 사람 또는 중국 사람 중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선발해서 조사로 파송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세울 때 선교사님들이 어떻게 그에게 신앙이 있는지, 신앙 리더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구별하였을까요? 선교사님들은 구별 방법으로 유창한 기도를 하나의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갑자기 즉흥 기도를 하게 해서 그가 유창하게 잘 기도하면 이 사람은 리더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조사나 권서를 맡기거나 지도자로 파송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한국교회에는 기도를 잘하는 것이 영성의 힘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꽤 많이 있죠. 모르는 사람이 서로 만나서 인사를 하다가 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하게 되면, 기도로 그분들과의 관계가 판가름이 납니다. 누가 더 위인지 누가 아래인지 기도 한번 하면 위계질서가 분명해지죠. 유창한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이 아랫사람이 되는 경향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유창한 기도를 하는 분을 만나게 되면 너무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삶을 한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삶이 정말 기독교인다운지를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경건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이러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잘하거나 어떤 능력을 가지고 경건의 능력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이런 것들을 ‘경건의 모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겠죠. 헌금 생활, 봉사, 섬김, 기도 생활, 심지어 새벽기도, 금식 기도 같은 것들도 포함이 되겠죠. 이 모든 것들은 경건의 모양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경건의 능력’을 무엇으로 보았을까요? 바울은 경건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대답하기 전에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2~4)

 

여러분, 이 내용들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요즘 우리들 이야기 아닙니까? 그냥 우리 세상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쓰일 당시는 2천 년 전 초대교회의 상황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2천 년 전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이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똑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모함하며 살아갑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배신하고 조급하게 살아가는 거죠. 이 상태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세상의 삶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2천 년 전부터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다”라는 말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에게 들어간 복음이 그의 삶을 바꿔 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죠. 그리고 자유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꿉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때 우리는 진정 경건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세계관이 바뀌고 살아가는 이유가 분명해지며 삶의 체질이 바뀝니다. 진정 복음의 사람이 되고 경건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능력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 사랑하는 모습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경건의 능력은 믿음, 소망, 사랑의 행동과 성령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짜 복음에 현혹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자유를 주는 진짜 복음에 우리 모두가 자유를 느끼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사랑 가운데 삶이 변화되는 진정 경건의 능력을 가진 우리 소망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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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1~7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수천 년부터 존재하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며 신앙의 건강을 점검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하면서 제가 화상을 당했을 때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저를 만나시는 분들이 자꾸 제 얼굴을 만지려고 하셔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제 얼굴은 지금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 설교 말씀을 드렸는데 사진만 기억하셔서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또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디모데후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목회와 관련하여서 교훈하고 있는 내용이 디모데후서입니다. 특별히 디모데후서에서 두드러지는 내용은 거짓 교사들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초대교회가 왕성하게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이단과 거짓 교사들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다른 종교나 다른 이단 및 종파를 만들기도 했고요. 또 교회의 편지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왜 초기부터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이렇게 많았을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진리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노력이 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의 지리한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은 달콤한 말과 유언비어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수를 들고 있었던 사도바울까지도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 상황 속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일수록 더 수려한 말과 언어, 논리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이나 가까운 곳에 그러한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가족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모든 성도 여러분이 거짓 교사에게 유혹받지 않고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진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얼굴 가지고는 구별이 잘 안됩니다. 오늘 바울이 전하는 가짜 복음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건강을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짓 가르침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딤후 3:6a)

 

여기서 ‘그들’이라고 표현된 단어는 ‘거짓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하는 전형적인 포교 방법을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슬그머니 남의 집으로 들어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도둑처럼 담을 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저런 사람들의 소개를 통해서 접근할 수도 있겠고요. 또 지나가면서 물을 한 모금 달라고 하면서 접근할 수도 있겠죠. 어쨌든 자연스럽게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과 접근해서 대화를 시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전형적인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포교 방법입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여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작은 여인이라는 뜻인데 상징적으로는 ‘미숙한 여인’, ‘미숙한 사람’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무언가 미숙한 사람, 특별히 신앙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 접근하여서 그들을 영적으로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전략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붙잡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 3:7)

 

항상 배우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참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결코 진리의 지식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거짓 교사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경건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면서 그 굴레 안에 가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일들이 참 많기는 하지만, 중세 교회만 보더라도 그런 예가 분명해집니다.

중세 교회는 구원을 받으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유아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죠.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8일 되기 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원죄를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세례를 받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또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원죄는 제거됐는지 모르지만 자범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늘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평생 고해성사를 하고, 자범죄를 제거하며,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죄를 없앨 수 있다고 가르쳤죠.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자범죄를 다 해소할 수 있느냐?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선도 행하여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는 데 헌물도 드려야 되고, 헌신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진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그러면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가 구원을 완성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세례를 받고 고해성사와 미사, 자선, 헌신, 헌물 등 그렇게 열심히 모든 것들을 해도 죽게 되면 그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지 아직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의 영혼이 연옥에 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면죄부를 사서 바쳐야 된다고 합니다. 평생 동안 노력해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죽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중세 교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살았어도 죽으면 다시 면죄부를 위해서 헌금을 드려야 되고, 또 헌신해야 되는 악순환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세 교회는 성도들에게 확실한 구원의 감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끊임없이 노력하고 노력하되 여전히 이룰 수 없는 단계에 머물도록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가짜 복음과 진짜 복음을 구별하는 첫 번째 방법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신앙의 체계가 자꾸 ‘무엇인가 더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붙잡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가짜 복음입니다. 진정한 복음, 진짜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복음입니다. 어떤 것인가에 매여 구원을 얻기 위하여 쩔쩔매게 하고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직도 멀었다고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 가르침은 잘못된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 해내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실 모든 준비를 다 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죄책감과 욕심으로 미혹합니다.>

 

그렇다면 거짓 교사들은 어리숙하고 미숙한 신앙인을 어떻게 미혹하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굴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게 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빠져드는 것일까요. 다시 본문을 봅니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6)

 

여기 흥미로운 두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는 죄를 중히 지고라는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죄의 무게를 무겁게 지고 살아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난 자유를 그들이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더 배워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하고, 구원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가르칩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심어 줍니다. “아직 너는 구원받으려면 멀었어. 너는 더 노력해야 해. 너는 성경을 더 알아야 하고, 더 기도하고 금식해야 해. 이 정도로는 안 돼.”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죄의식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를 교회나 어떤 선교 단체, 성경 공부 모임, 기도 모임 안에 가두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여기서 가르치는 대로 더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안에 있다 보면 죄의 짐을 벗지 못합니다. 늘 회개해야 하고 늘 부족합니다.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이미 대신 져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은 내가 지고 있던 모든 죄의 짐을 다 내려놓고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이 땅에서 힘차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모든 예배나 봉사, 자선, 헌금 등 이와 같은 것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이며 진짜 신앙인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거짓 교사들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배우게 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동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욕심’과 ‘욕망’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 성공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사업이 잘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올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이 마음의 동기라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오랫동안 나와도 진정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진정한 복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로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기보다는 성도들을 만나고 그들과 거래와 사업을 하려는 목적을 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나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복음의 진수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영적으로 깊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죠. 그런데 그것이 간혹 욕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심을 ‘거룩한 욕심’이라고 멋지게 포장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말 거룩한 욕심이 될 수도 있겠고, 그것이 영적 삶을 더욱 깊이 끌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주제가 신앙적으로 보일 뿐, 중심에 흐르는 진정한 힘은 이 세상의 욕심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단들이나 거짓 교사들은 세상적인 경쟁심을 부추기곤 합니다. 오직 구원을 받을 사람은 14만 4천 명밖에 없으니 이 안에 들어가려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 하늘나라에서 좋은 집과 높은 자리에 위치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덧붙이곤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일이니 좋은 것이라 여기고 열심히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좋은 집에 살려고 욕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과 하늘나라에서 남들보다 더 좋은 집에 살려고 노력하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실은 차이가 없겠죠. 그 동력에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둘 다 누군가를 누르고 내가 더 잘 살겠다는 욕망이 그 안에서 꿈틀거릴 뿐입니다. 주제가 하나님 나라여서 그렇지, 결국은 세상적인 욕심이 발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것들을 우리로 하여금 미혹당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실상 구원은 그러한 모습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남들보다 더 많이 해서 더 우월한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구원이 너무나도 값지고 감사해서 감격으로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자유케 하는 힘, 그리고 우리를 감사함으로 이끄는 힘이 구원의 힘입니다.

 

<참된 복음은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제 거짓 복음과 진정한 복음을 구별하는 또 다른 한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5)

 

여기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경건의 모양’, ‘경건의 능력’이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경건의 능력’이라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십니까? 흔히 생각하기를, 방언이나 예언을 하거나 또는 병 고치는 능력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도를 잘하거나 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것도 경건의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06년도에 나온 『만주의 선교 방법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존 로스(John Ross)라는 영국의 선교사가 쓴 책입니다. 그분은 중국의 만주에서 한국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을 전도했던 중국과 한국의 초기 선교사였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던 초기 시대에 선교사들은 현지인, 즉 한국 사람 또는 중국 사람 중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선발해서 조사로 파송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세울 때 선교사님들이 어떻게 그에게 신앙이 있는지, 신앙 리더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구별하였을까요? 선교사님들은 구별 방법으로 유창한 기도를 하나의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갑자기 즉흥 기도를 하게 해서 그가 유창하게 잘 기도하면 이 사람은 리더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조사나 권서를 맡기거나 지도자로 파송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한국교회에는 기도를 잘하는 것이 영성의 힘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꽤 많이 있죠. 모르는 사람이 서로 만나서 인사를 하다가 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하게 되면, 기도로 그분들과의 관계가 판가름이 납니다. 누가 더 위인지 누가 아래인지 기도 한번 하면 위계질서가 분명해지죠. 유창한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이 아랫사람이 되는 경향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유창한 기도를 하는 분을 만나게 되면 너무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삶을 한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삶이 정말 기독교인다운지를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경건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이러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잘하거나 어떤 능력을 가지고 경건의 능력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이런 것들을 ‘경건의 모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겠죠. 헌금 생활, 봉사, 섬김, 기도 생활, 심지어 새벽기도, 금식 기도 같은 것들도 포함이 되겠죠. 이 모든 것들은 경건의 모양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경건의 능력’을 무엇으로 보았을까요? 바울은 경건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대답하기 전에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2~4)

 

여러분, 이 내용들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요즘 우리들 이야기 아닙니까? 그냥 우리 세상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쓰일 당시는 2천 년 전 초대교회의 상황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2천 년 전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이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똑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모함하며 살아갑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배신하고 조급하게 살아가는 거죠. 이 상태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세상의 삶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2천 년 전부터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다”라는 말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에게 들어간 복음이 그의 삶을 바꿔 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죠. 그리고 자유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꿉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때 우리는 진정 경건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세계관이 바뀌고 살아가는 이유가 분명해지며 삶의 체질이 바뀝니다. 진정 복음의 사람이 되고 경건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능력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 사랑하는 모습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경건의 능력은 믿음, 소망, 사랑의 행동과 성령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짜 복음에 현혹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자유를 주는 진짜 복음에 우리 모두가 자유를 느끼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사랑 가운데 삶이 변화되는 진정 경건의 능력을 가진 우리 소망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9월 15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끝내 진리에 이를 수 없는 사람” (딤후 3장 1-7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528장, 342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딤후 3장 1-7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9월 1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참된 복음과 거짓된 복음은 어떻게 다를까요? 그리고 참된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과 거짓된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거짓교사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단들과 거짓교사들의 출현을 경험했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가르쳤던 바울조차도 거짓교사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가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진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먼저 거짓된 복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결코 진리의 지식에는 이르지 못하는 복음입니다. 옛날 중세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세례, 성찬, 미사, 고해, 자선 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직 부족하니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드리고 헌금을 하도록 했습니다. 자꾸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붙잡아 놓는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음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짓교사들은 어떻게 사람들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바로 죄책감과 죄의식을 통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의 짐을 벗지 못하게 만들고 늘 회개하지만 늘 부족하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거기에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는 자유가 있고 예수를 믿으면 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으로 우리는 봉사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자선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입니다. 

 

     거짓교사들이 계속해서 배우고 또 배우도록 만드는 또 다른 동력은 욕심입니다. 거짓교사들과 이단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우리의 욕심입니다. 특히 이단들이나 거짓교사들은 우리의 경쟁심을 부추깁니다. 

 

     마지막으로 거짓된 복음과 진정한 복음을 구별하는 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그 자유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때 경건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드러나고 믿음과 소망 가운데 나타나며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거짓된 복음에 현혹되지 않고 진정한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삶이 변화되는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누기

  1. 이단의 가르침을 접했던 사람을 알거나 자신이 직접 이단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으로서 교회봉사를 하는 것과 구원을 얻기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의 차이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의 노력이나, 헌신이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닫습니다. 주님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항상 잊지 않게 하시고, 이 참된 자유를 누리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진정,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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