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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
우리가 롯에 대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롯의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은 많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다가 그 성이 멸망할 때 탈출해 산 위에서 살다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27절부터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입니다.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나홀, 하란입니다. 이 세 아들 중 한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하란입니다. 하란은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남겨진 자녀가 롯, 밀가, 이스가였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책임지기로 하고, 밀가는 삼촌인 나홀과 결혼해서 살게 됩니다. 아마 이스가도 그와 함께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과 롯은 운명적 가정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을 함께 돌며 인생을 보냅니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끔찍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와 아들처럼, 때로는 형과 동생처럼,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관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날 때 롯도 함께 떠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한 후로 많은 혜택을 입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축복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롯도 함께 축복을 얻었습니다. 창세기 13장 2절에서 아브라함은 짐승과 은과 금 등 많은 재물을 얻게 된 부자로 묘사됩니다. 이어 5~6절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창세기 13:5~6)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하면서 점차 부자가 되어 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는 서로가 함께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롯에게 독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창세기 13장 8~9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서 조카를 향한 애틋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나의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이처럼 롯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나 롯에게는 아브라함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는 크게 없어 보입니다. 자신에게 더 좋은 땅,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한 롯입니다. 그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3장 10절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세기 13:10)
이렇게 해서 롯은 요단 동편의 온 들판을 갖기로 하고 아브라함을 떠납니다. 롯이 선택한 땅은 이미 문명이 발달한 곳이었고, 성읍들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롯은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다 결국 ‘소돔’이란 성에 살기 시작합니다.
< 롯은 주변의 덕을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
소돔에 살면서 그에게는 여러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러 왕들이 연합해 소돔과 고모라 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소돔에 살던 롯과 그의 가족들 모두가 잡혀가는 처지가 됩니다. 재물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이때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훈련된 자 318명을 데리고 달려와 후방을 쳐서 롯과 그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잃었던 재산까지 환수합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많은 왕이 쳐들어 왔을 때 롯은 무엇을 했을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사로잡혀 간 정황만 기록돼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려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롯의 모습은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롯은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얻었고, 성공하게 되었으며, 부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롯이 스스로 한 일은 크게 없어 보입니다. 롯은 누리는 사람이긴 했으나, 무언가를 스스로 세우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롯에게 가장 큰 사건은, 단연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던 순간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생각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여러분도 이 대목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어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마지막에는 10명만 있더라도 멸망을 거둬 달라고 요청한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0명만 의인이 있더라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땅에는 의인 10명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향한 애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에는 의인 10명조차 없어 결국 롯과 그의 가족 모두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하나님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해 주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이 두 천사를 보내셔서 롯과 그 가족을 소돔 성 밖으로 내 보내신 것입니다.
찬찬히 롯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특히 아브라함의 보살핌과 배려로 순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소돔이 멸망할 때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주셔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롯은 얼마나 정직했을까? 어느 정도로 의인이었을까?’ 또 더 궁금한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은 롯에게 이토록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을까? 왜 롯을 사랑해 주셨을까?’ 아무리 살펴봐도 롯에게는 이렇다 할 신앙적 특징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신앙이 있었는지 찾아내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 롯은 신앙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
롯의 삶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창세기를 보면, 롯이 소돔에 정착할 당시 소돔이 어떤 상태였는지가 드러납니다. 창세기 13장 13절입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13)
소돔 성은 롯이 정착하기로 결정한 도시였습니다. 롯 스스로 정착을 결정한 땅입니다. 그러나 롯은 그 땅의 영적인 상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소돔 성의 편의성과 여러 유익을 고려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 죄인들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인지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돔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롯은 소돔 땅에서 의롭게 살았습니까? 그렇지도 않은 듯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멸망하기 전, 하나님은 천사 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롯을 찾아왔을 때 롯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롯에게 손님들이 찾아온 것을 알고는 집을 에워싸 그들을 내어놓으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롯이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하며, 자신에게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두 딸이 있으니 그들을 내어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해결 방법입니다. 창세기 19장 8절입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창세기 19:8)
과연 이런 결정이 아버지로서 할 법한 일입니까? 그야말로 당시 소돔 성이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하고 혼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분명 성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물론 롯이 그렇게 말한 이유 가운데는 하나님의 천사를 귀히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모시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하겠다는 의지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당시 나그네들이 얼마나 힘없는 약자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롯의 해결 방식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란 바로 적당한 ‘타협’에 있습니다. 롯은 언제나 타협하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는 하지만, 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을 위로할 만한 것을 내어 주면서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와 같은 롯의 모습에서 신앙적인 단호함이나 원칙, 철저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대강 좋을 대로 살아가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딸들을 내어 주는 것조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딸들이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사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롯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뒷부분에 나오는 말씀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것이란 소식을 들은 후 롯은 자신의 딸들과 결혼할 사윗감들에게도 그 내용을 알렸습니다. 그럼에도 사윗감들은 그 사실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혼탁한 성적인 문화를 유추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롯의 딸들이 정절을 지켰을지도 의문입니다.
더욱이 롯의 사위들은 롯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돔 성을 따라나서지도 않았습니다. 롯은 예비 사위들에게조차 하나님을 알리거나,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롯의 가족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앙적 기준도 없었습니다. 그중 혹시 한 사람이 그런 기준을 가졌다면, ‘롯’ 정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입니다.
< 롯의 가족들도 불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
롯의 아내와 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 나올 때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사자들의 명령을 들었지만, 롯의 아내는 결국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롯의 아내가 세상적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징표입니다. 두고 온 집과 재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하나님의 명령도 마음에 새기지 못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롯의 두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 그들은 잠시 소알에 머물다 산으로 피신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심판을 경험한 후에 온 심각한 후유증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산속에서 은둔의 삶을 살아갑니다. 평생을 그렇게 지냅니다. 이때 롯의 두 딸은 자신에게 배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아버지가 누운 곳에 몰래 들어가 정사를 합니다. 큰딸에 이어 둘째 딸마저 관계를 맺어 아이를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그 당시는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해석자는 바로 이 장면이 당시 그들이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롯이 성적으로 타락한 소돔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또다시 그의 가족들로부터 또 다른 소돔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롯은 그러한 과정에서조차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롯에게 두 딸이 아버지에게서 아이를 얻을 계획을 말했다면, 롯은 거절했거나 다른 조치를 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롯의 딸들은 그 일을 아버지가 모르게 진행했습니다. 창세기 19장 33절입니다.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창세기 19:33)
이어 35절에서는 둘째 딸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시 같은 표현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 어떻게 보입니까? 제대로 된 가정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산에 아버지와 두 딸만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어떤 남성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도 않는 은둔의 삶을 살고 있는데, 두 딸의 배가 불러옵니다. 이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요? 즉 당시 아버지 롯은 무슨 생각을 하며 딸들을 바라보았을까요? 롯이라면 ‘내 딸들이 어디선가 남자와 관계를 맺었나 보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즉 그에게서는 딸들을 훈육하거나 신앙적으로 바로 세우려는 흔적조차 엿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롯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습니다. >
이러한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롯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과 너무 닮아서인지도 모릅니다. 롯이 그동안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성경 구석구석을 살펴보십시오. 롯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렸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호해 주고 사랑해 준 아브라함에게 무언가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만을 알고, 자기만을 위해, 또 자신의 영달과 번영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롯입니다. 게다가 어려움이 찾아오면 모른 척하거나 면피한 채 살아가던 사람이 롯입니다.
그는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면서 온전한 제사도 한 번 드린 적이 없습니다. 소돔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 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아내와 딸들, 사윗감들에게도 신앙적 의로움과 원칙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 성에 10명의 의인만 있으면 구해 달라고 했을 때, 왜 5명으로 줄이지는 않았을까요? 롯의 가족을 다 합하면 대략 6명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롯이 있으니 가족은 다 구원의 길로 인도했겠지. 적어도 6명은 구원했겠지. 그리고 그 땅에서 오래 살았으니, 적어도 가족 외에 4명 정도는 구원의 길로 인도했겠지.’ 그러나 소돔에는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몇 명의 의인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롯은 아브라함 때문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후에도 거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끼신 사랑으로 롯도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롯의 인생은 의미 있는 인생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저 소돔에서 탈출한 후 소알이란 곳에 머물다 산 위로 올라가 폐인처럼 숨어 살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인생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특히 롯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내가 롯입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자책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회를 변혁하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데 연연하며,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 성읍이 아니고는 도저히 살아갈 줄 모르는 롯! 그래서 문명의 이기는 구하지만, 그 속에서 불신앙과 이교도적인 사상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도 있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롯! 더욱이 롯은 한 번도 도전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일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나약하게 자기 삶만을 꾸릴 뿐입니다. 이런 롯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연약하고, 가정을 복음화 시키지도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때문에 롯이 불쌍할 뿐만 아니라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처절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의롭다’ 칭하셨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에 참으로 기막힌, 너무도 놀라운 구절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6~8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베드로후서 2:6~8)
하나님은 이 가련한 인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롯을 향해 ‘의인’이란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롯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정말 형편없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롯을 ‘의인’이라 불러주십니다.
왜 롯을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까? 롯을 그토록 귀하게 대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소돔 성을 멸망시킬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9장 2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세기 19:29 중)
롯이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며, 마음 상했을 뿐입니다. 무언가 시도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공헌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마음만 상할 뿐 시류에 휩쓸린 삶을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그를 의인으로 불러주십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유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의롭다 여겨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바라보심으로, 너무도 하찮고 볼품없는 우리에게도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의인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만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셔서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봅니다.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귀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는 롯입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못 살았습니다. 나는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회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귀한 사순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2: 4 ~ 8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 롯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
우리가 롯에 대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롯의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은 많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다가 그 성이 멸망할 때 탈출해 산 위에서 살다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27절부터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입니다.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나홀, 하란입니다. 이 세 아들 중 한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하란입니다. 하란은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남겨진 자녀가 롯, 밀가, 이스가였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책임지기로 하고, 밀가는 삼촌인 나홀과 결혼해서 살게 됩니다. 아마 이스가도 그와 함께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과 롯은 운명적 가정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을 함께 돌며 인생을 보냅니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끔찍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와 아들처럼, 때로는 형과 동생처럼,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관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날 때 롯도 함께 떠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한 후로 많은 혜택을 입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축복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롯도 함께 축복을 얻었습니다. 창세기 13장 2절에서 아브라함은 짐승과 은과 금 등 많은 재물을 얻게 된 부자로 묘사됩니다. 이어 5~6절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창세기 13:5~6)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하면서 점차 부자가 되어 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는 서로가 함께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롯에게 독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창세기 13장 8~9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서 조카를 향한 애틋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나의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이처럼 롯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나 롯에게는 아브라함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는 크게 없어 보입니다. 자신에게 더 좋은 땅,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한 롯입니다. 그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3장 10절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세기 13:10)
이렇게 해서 롯은 요단 동편의 온 들판을 갖기로 하고 아브라함을 떠납니다. 롯이 선택한 땅은 이미 문명이 발달한 곳이었고, 성읍들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롯은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다 결국 ‘소돔’이란 성에 살기 시작합니다.
< 롯은 주변의 덕을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
소돔에 살면서 그에게는 여러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러 왕들이 연합해 소돔과 고모라 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소돔에 살던 롯과 그의 가족들 모두가 잡혀가는 처지가 됩니다. 재물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이때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훈련된 자 318명을 데리고 달려와 후방을 쳐서 롯과 그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잃었던 재산까지 환수합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많은 왕이 쳐들어 왔을 때 롯은 무엇을 했을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사로잡혀 간 정황만 기록돼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려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롯의 모습은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롯은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얻었고, 성공하게 되었으며, 부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롯이 스스로 한 일은 크게 없어 보입니다. 롯은 누리는 사람이긴 했으나, 무언가를 스스로 세우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롯에게 가장 큰 사건은, 단연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던 순간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생각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여러분도 이 대목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어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마지막에는 10명만 있더라도 멸망을 거둬 달라고 요청한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0명만 의인이 있더라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땅에는 의인 10명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향한 애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에는 의인 10명조차 없어 결국 롯과 그의 가족 모두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하나님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해 주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이 두 천사를 보내셔서 롯과 그 가족을 소돔 성 밖으로 내 보내신 것입니다.
찬찬히 롯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특히 아브라함의 보살핌과 배려로 순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소돔이 멸망할 때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주셔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인생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롯은 얼마나 정직했을까? 어느 정도로 의인이었을까?’ 또 더 궁금한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은 롯에게 이토록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을까? 왜 롯을 사랑해 주셨을까?’ 아무리 살펴봐도 롯에게는 이렇다 할 신앙적 특징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신앙이 있었는지 찾아내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 롯은 신앙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
롯의 삶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창세기를 보면, 롯이 소돔에 정착할 당시 소돔이 어떤 상태였는지가 드러납니다. 창세기 13장 13절입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13)
소돔 성은 롯이 정착하기로 결정한 도시였습니다. 롯 스스로 정착을 결정한 땅입니다. 그러나 롯은 그 땅의 영적인 상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소돔 성의 편의성과 여러 유익을 고려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 죄인들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인지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돔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롯은 소돔 땅에서 의롭게 살았습니까? 그렇지도 않은 듯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멸망하기 전, 하나님은 천사 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롯을 찾아왔을 때 롯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롯에게 손님들이 찾아온 것을 알고는 집을 에워싸 그들을 내어놓으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롯이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하며, 자신에게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두 딸이 있으니 그들을 내어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해결 방법입니다. 창세기 19장 8절입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창세기 19:8)
과연 이런 결정이 아버지로서 할 법한 일입니까? 그야말로 당시 소돔 성이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하고 혼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분명 성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물론 롯이 그렇게 말한 이유 가운데는 하나님의 천사를 귀히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모시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하겠다는 의지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당시 나그네들이 얼마나 힘없는 약자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롯의 해결 방식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란 바로 적당한 ‘타협’에 있습니다. 롯은 언제나 타협하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는 하지만, 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을 위로할 만한 것을 내어 주면서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와 같은 롯의 모습에서 신앙적인 단호함이나 원칙, 철저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대강 좋을 대로 살아가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딸들을 내어 주는 것조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딸들이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사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롯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뒷부분에 나오는 말씀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것이란 소식을 들은 후 롯은 자신의 딸들과 결혼할 사윗감들에게도 그 내용을 알렸습니다. 그럼에도 사윗감들은 그 사실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혼탁한 성적인 문화를 유추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롯의 딸들이 정절을 지켰을지도 의문입니다.
더욱이 롯의 사위들은 롯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돔 성을 따라나서지도 않았습니다. 롯은 예비 사위들에게조차 하나님을 알리거나,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롯의 가족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앙적 기준도 없었습니다. 그중 혹시 한 사람이 그런 기준을 가졌다면, ‘롯’ 정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입니다.
< 롯의 가족들도 불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
롯의 아내와 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 나올 때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사자들의 명령을 들었지만, 롯의 아내는 결국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롯의 아내가 세상적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징표입니다. 두고 온 집과 재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하나님의 명령도 마음에 새기지 못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롯의 두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 그들은 잠시 소알에 머물다 산으로 피신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심판을 경험한 후에 온 심각한 후유증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산속에서 은둔의 삶을 살아갑니다. 평생을 그렇게 지냅니다. 이때 롯의 두 딸은 자신에게 배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아버지가 누운 곳에 몰래 들어가 정사를 합니다. 큰딸에 이어 둘째 딸마저 관계를 맺어 아이를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그 당시는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해석자는 바로 이 장면이 당시 그들이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롯이 성적으로 타락한 소돔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또다시 그의 가족들로부터 또 다른 소돔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롯은 그러한 과정에서조차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롯에게 두 딸이 아버지에게서 아이를 얻을 계획을 말했다면, 롯은 거절했거나 다른 조치를 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롯의 딸들은 그 일을 아버지가 모르게 진행했습니다. 창세기 19장 33절입니다.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창세기 19:33)
이어 35절에서는 둘째 딸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시 같은 표현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 어떻게 보입니까? 제대로 된 가정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산에 아버지와 두 딸만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어떤 남성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도 않는 은둔의 삶을 살고 있는데, 두 딸의 배가 불러옵니다. 이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요? 즉 당시 아버지 롯은 무슨 생각을 하며 딸들을 바라보았을까요? 롯이라면 ‘내 딸들이 어디선가 남자와 관계를 맺었나 보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즉 그에게서는 딸들을 훈육하거나 신앙적으로 바로 세우려는 흔적조차 엿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롯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습니다. >
이러한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롯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과 너무 닮아서인지도 모릅니다. 롯이 그동안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성경 구석구석을 살펴보십시오. 롯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렸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호해 주고 사랑해 준 아브라함에게 무언가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만을 알고, 자기만을 위해, 또 자신의 영달과 번영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롯입니다. 게다가 어려움이 찾아오면 모른 척하거나 면피한 채 살아가던 사람이 롯입니다.
그는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면서 온전한 제사도 한 번 드린 적이 없습니다. 소돔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 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아내와 딸들, 사윗감들에게도 신앙적 의로움과 원칙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 성에 10명의 의인만 있으면 구해 달라고 했을 때, 왜 5명으로 줄이지는 않았을까요? 롯의 가족을 다 합하면 대략 6명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롯이 있으니 가족은 다 구원의 길로 인도했겠지. 적어도 6명은 구원했겠지. 그리고 그 땅에서 오래 살았으니, 적어도 가족 외에 4명 정도는 구원의 길로 인도했겠지.’ 그러나 소돔에는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몇 명의 의인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롯은 아브라함 때문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후에도 거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끼신 사랑으로 롯도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롯의 인생은 의미 있는 인생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저 소돔에서 탈출한 후 소알이란 곳에 머물다 산 위로 올라가 폐인처럼 숨어 살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인생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특히 롯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내가 롯입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자책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회를 변혁하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데 연연하며,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 성읍이 아니고는 도저히 살아갈 줄 모르는 롯! 그래서 문명의 이기는 구하지만, 그 속에서 불신앙과 이교도적인 사상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도 있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롯! 더욱이 롯은 한 번도 도전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일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나약하게 자기 삶만을 꾸릴 뿐입니다. 이런 롯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연약하고, 가정을 복음화 시키지도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때문에 롯이 불쌍할 뿐만 아니라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처절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의롭다’ 칭하셨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에 참으로 기막힌, 너무도 놀라운 구절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6~8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베드로후서 2:6~8)
하나님은 이 가련한 인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롯을 향해 ‘의인’이란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롯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정말 형편없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롯을 ‘의인’이라 불러주십니다.
왜 롯을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까? 롯을 그토록 귀하게 대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소돔 성을 멸망시킬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9장 2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세기 19:29 중)
롯이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며, 마음 상했을 뿐입니다. 무언가 시도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공헌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마음만 상할 뿐 시류에 휩쓸린 삶을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그를 의인으로 불러주십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유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의롭다 여겨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바라보심으로, 너무도 하찮고 볼품없는 우리에게도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의인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만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셔서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봅니다.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귀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는 롯입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못 살았습니다. 나는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회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귀한 사순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3월 1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나는 롯입니다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69장, 31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벧후2:4~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1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가 롯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라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다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는 때에 탈출하여서 산에 살다가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는 정도입니다. 오늘은 롯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교의 요약
창12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날 때에 롯도 함께 떠납니다(창12:4, 13:1).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한 이후로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롯은 아브람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롯은 철저히 자신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땅, 물이 넉넉해 보이는 땅을 선택(창13:10)하였지만, 오히려 그 땅에서 여러 번 어려움을 당했습니다(창14장). 한마디로 아브람을 통해서 복을 받았고 성공하게 되었으며 부도 누리게 되었지만, 스스로 행한 것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롯은 누리는 사람이었지만, 무엇을 세우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롯과 그의 가족은 소돔과 고모라 당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그들을 소돔성 밖으로 피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롯을 이토록 보호해 주셨을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롯은 하나님의 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롯이 죄악의 땅에서 정결하고 의롭게 살았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창19:8)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거나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데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앙적인 기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소돔에 있었던 롯의 가족들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롯은 자신의 아내조차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실패한 사람입니다.
사실 롯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과 너무 닮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롯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 드린 것이 있었나요? 자신을 보호해 주고 도와준 아브라함을 위해서 혹은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 온전한 제사를 한 번도 드리지 못했으며, 그 성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아내, 딸들 그리고 사윗감들에게까지도 그의 신앙과 의로움, 생각을 전달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서 한 가지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후서 2장 6-8절입니다. 롯은 한 번도 새롭게 도전하거나, 하나님을 선포하지 못한 나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불쌍하고 가련한 롯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불러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실제로 의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 행위를 보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만한 의인은 결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롯을 의인으로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그렇게 귀하게 보아주신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소돔 성을 멸망시킬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과 가족을 구해 주셨습니다(창19: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나약한 모습이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의인이라 불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며 감사하는 사순절의 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타인을 위하여 나의 소유와 권리를 포기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함께 나눠보세요.
2. 롯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실패한 인생이 아닌, 의인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참으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