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나를 따르라
<공생애 기간, 주님은 제자를 부르고 기르시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요즈음 새벽기도 시간에 마가복음을 함께 읽어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읽어가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이신 일이 제자를 선택하시고 키우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생략하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사십 일간 광야에서 시험받으시죠. 그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는 말씀을 외치시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이 하신 첫 번째 일이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6~18절입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6~18)
예수님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헬라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Δεῦτε ὀπίσω μου (Deute opisō mou, Come after me)
문자적으로는 “내 뒤에 오라. 내 뒤에 바짝 따라와서 나를 따라오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신 주님은 이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기를 시작하십니다.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놀라운 권위로 가르치셨고요. 귀신들린 자를 보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길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적과 치유의 사건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셨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때는 특별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실 때에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막 3:4) 하고 물으시며 안식일의 기본 정신을 다시 세워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3장에서는 열두 제자를 모두 부르신 후에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본격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모여든 무리에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듣고는 갔으나 그 뜻을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그때 의미를 묻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비유를 따로 풀이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많은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지만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정작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후로도 주님은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풍랑이 일었을 때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보시고는 잔잔케 하신 후에 야단치기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5장에서 주님은 거라사 지역까지 방문을 확장하시고, 이방 지역에서 귀신들린 자를 내어쫓으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고치셨고,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도 고쳐 주셨습니다. 6장에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고, 7장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더러운 딸을 치유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8장에서는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과 함께 벳새다 맹인을 고쳐 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이방인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며, 배고픈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시는 분이시며,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1장부터 8장까지가 마가복음 전반부에 해당되고, 8장 이후부터 마지막 부분은 후반부에 해당됩니다. 전반부에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이 나타나고, 8장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에 가셔서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이 전해집니다.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곳에 벳세다 맹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자리하며, 마가복음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사건에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하나 보이는데,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맹인을 단번에 고치시지 않으시고 두 번에 걸쳐서 고쳐 주셨다는 점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신 후에 물어보시죠.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그의 눈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안수하셨고, 그가 ‘밝히’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온전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 주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벳세다 맹인의 치유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인 세례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합니다.>
자, 그렇다면 마가복음 1장부터 8장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제자들이 발견하게 된 예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흐릿하게 본 맹인처럼 제자들이 바라본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이 마가복음 8장 27절 이후에 베드로의 고백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답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수없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을 보여 주셨는데, 과연 무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물으신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이번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대답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3년여 동안의 시간 동안 알게 되고 고백하게 된 예수님의 정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이 말을 바꾸면 “예수님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린 분이시구나! 우리를 구원해 내실 그분이시구나!’라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고백한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자,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한 베드로가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예수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멋진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시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막 8:30~32a)
여기서 ‘비로소’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이어지죠. 벳새다의 맹인을 두 번에 걸쳐서 고치신 것처럼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다시금 계시하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다. 네가 나를 메시야라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분명 맞는 고백이다. 그런데 네가 지금 생각하는 메시야와 내가 가는 메시야의 길은 다르다.”라는 말씀을 두 번에 걸쳐서 전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상을 심판하고 정의로 새 나라를 세우고 통치할 메시야를 믿어 왔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도 동일한 생각을 한 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메시야다!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했을 때, 아마도 세상을 통치하고 제압하고 심판하는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정작 수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강하게 항변합니다. 성경은 그 흐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b)
‘항변하다’라고 표현된 헬라어 ἐπιτιμάω(epitimaó)는 “경고하다”, “꾸짖다”라는 뜻이 포함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같은 단어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막 8:33 중)
여기서 ‘꾸짖다’라는 단어가 ‘항변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꾸짖었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반발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꾸짖으며 항변합니다.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바다도 순종하고 귀신도 순종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아닙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십니까?”
그때 주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말씀하시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막 8:33 중)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먼저 “사탄아!”라고 말씀하시면서 강하게 경고하십니다. 사실 너무도 강력한 탓에 예수님께서 감정조절을 못하신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며 받아오셨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렇게 해석해 오곤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들어간 사탄아, 그곳에서 나와라! 꺼져라! 사라져라!” 그렇게 명령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을 깊이 연구하면서 숨겨진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비밀의 열쇠는 바로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베드로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라면, 예수님은 “사탄아, 베드로의 뒤로 물러서라!”라고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앞에서 유혹하는 사탄을 향하여 나의 뒤로 물러서라는 말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원어로 살펴보면 조금 더 깊은 뜻이 있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헬라어로 보면 이렇습니다.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Σατανᾶ (Hypage opisō mou Satana, Get behind me, Satan)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어디선가 익숙해 보이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 뒤로 물러서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이미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opisō mou’ 라는 표현이 제자들을 향하여 “내 뒤로 오라!” 하신 말씀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오피소 무’라는 표현이 두 가지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Δεῦτε ὀπίσω μου (Deute opisō mou), 나를 따라오라 (막 1:17)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Hypage opisō mou),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3)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를 두 번째 소명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풀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너의 생각을 지금 말하고 있다만, 그것은 사탄의 생각이다. 베드로야, 나를 따라오너라. 내 뒤에 서라. 내 앞에 서려고 하지 말아라. 내 뒤에 서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자신을 따르는 것에 대한 비밀을 열어 보여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 사탄을 따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것은 영광스런 점령군의 대장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왕을 옹립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나를 따르라”는 두 번째 명령 다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열어 보여 주십니다. 그 길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십자가를 지는 것, 이것이 진정 예수를 따르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를 쫓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남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형은 어떤 형벌입니까? 사형의 형틀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라는 말의 진정한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어찌 대속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죗값으로 주어진 사형 선고, 그 죽음의 자리에 나아갈 뿐입니다.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해방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쥐고 있고, 붙잡고 있고, 의지하고 있고, 바라보고 있고, 희망하는 모든 것들이 허무로 돌아가는 그 자리로 나아갈 때에 진정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곳에서 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더 이상 희망 없는 그곳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소망이고, 기쁨이고, 유일한 희망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지 우리가 내세만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살자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의 현실을 직면하자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나의 삶에 있어서 상수로 놓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다시 파악합니다. ‘죽었다’라고 생각하고 죽음 앞에 설 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모든 질서가 거꾸로 되고, 세상의 가치가 역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된 지혜를 얻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허무 앞에서 우리는 박해도, 고난도, 어떤 것도 견딜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허무가 소망으로 다시 바뀌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예수님 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젊었을 때 일입니다. 목회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도 풀 수 없고 저렇게 해도 풀 수 없는, 참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종종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 제가 아무리 해도 풀 수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목회하시던 아버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라. 니가 죽었다고 생각해.” 그 말씀이 저의 마음속에 깊이 남았습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일이 더 커지고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아, 내가 죽었구나. 이 시간에 내가 죽었구나.’ 생각하니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소망가족 수련회에 유기성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아주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요. 목사님께서 중요한 질문을 하시며 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 안에 거하는가? 예수 안에 살고 있는가?” 이 질문과 함께 오늘 저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을 경험할 때, 내가 죽을 때, 그곳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결국 죽음을 경험할 때 모든 것이 덤이 되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날이지요. 주님이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사람들이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환영한 것은 이 땅의 왕 메시야였습니다. 그 기대를 품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성으로 모셨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자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당당하고 위엄 있는 말이 아니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뒤에 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뒤따라갑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의 수난의 길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거쳤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일차적으로는 영광스런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 병을 고치시는 주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보지요. 다음 단계에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로 밝히 보게 해 주십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이 단계에 이를 때에 비로소 시작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너를 죽여라. 그럴 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너희는 진정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Follow Me
Mark 8:33-35
These days as we read the Gospel of Mark in our early morning prayer service, it occurred to me that the work to which Jesus exerted His greatest efforts during His public ministry was making disciples of men.
Mark omits Jesus’ childhood and goes straight into the story of how His public ministry starts. After being baptized by John the Baptist and being tested in the wilderness for forty days, Jesus starts His public ministry.
The first thing He did as He started it was to call His disciples:
“As Jesus walked beside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casting a net into the lake, for they were fishermen. ‘Come, follow me,’ Jesus said, ‘and I will send you out to fish for people.’ At once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Mark 1:16-18)
Jesus also calls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in a similar way. When He calls His disciples, His words are “follow me.”
Δεῦτε ὀπίσω μου (Deute opisō mou, Come after me)
These words literally mean to “come after me,” or to “follow right behind me.”
Then Jesus starts the work of first telling the disciples, who have started to follow Him, who He is.
First, in CapernaumHe teaches with an amazing authority, casts out demons, and heals the sick. Then He goes to the region of Galilee with His disciples where He performs many miracles and healings. He heals a leper (Mark 1:40-45);tells a paralyzed man that his sins are forgiven(Mark 2:5)and heals him;and heals a man with a shriveled hand on the Sabbath, asking, “Which is lawful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evil, to save life or to kill?”(Mark 3:4), to teach people about the true meaning of the Sabbath.
Then in Mark 3 aftercalling all twelve disciples, He reveals who He is in earnest.
First, in Mark 4 He tells the Parable of the Sower to the people who have flocked to Him; but later He takes His disciples aside to explain to them the meaning of the parable. This is an example of Jesus’ special treatment ofHis disciples.
Jesus also calms the storm; heals a demon-possessed man in the region of the Gerasenes in chapter 5; heals the sick daughter of Jairus the synagogue leader; and heals the woman who had a flow of blood for twelve years. He feeds the five thousand in chapter 6; heals the demon-possessed daughter of a Syrophoenecian woman in chapter 7; feeds the four thousand in chapter 8; and restores the sight of a blind man in Bethsaida.
Through such work Jesus reveals who He is to His disciples.
He reveals that He is One who forgives sins; the Son of God; the Lord of the Sabbath; One whose mercy extends even to the Gentiles; One who can raise the dead; One who is compassionate to and feeds the hungry; and One who is able to still the storm.
And now in today’s passage where He heals a blind manHe enters a “second phase” of revealing who He is. A characteristic about this healing is that it is done in two stages.
First, Jesus spits on the man’s eyes and puts His hands on him; then He asks him if he sees anything. The man answers that he sees people who look like trees walking around. Then Jesus puts His hands on him again, which makes him receive his sight.
This incident serves as a “link” that connects the first and latter part of Mark. If the disciples thought they had understood who Jesus is through what He had shown them till then, their knowledge was in fact not whole. Jesus’ healing of the blind man in Bethsaida, therefore,is a symbolic event that signals that our Lord will now enter a new phase where He will reveal more clearly who He is.
Then what was the disciples’ primary understanding of Jesus? If it is to be compared to the first blurry image seen by the blind man—that is, people who look like trees walking around—what was the “first, blurry image” of Jesus that the disciples saw?
That image is revealed to us in Peter’s confession in the text that starts from Mark 8:27.
In this passage Jesus asks His disciples, “Who do people say I am?”—to which they answer, “Some say John the Baptist; others say Elijah; and still others, one of the prophets.”Hearing their answer, Jesus asks again, “Who do you say I am?” This is when Peter replies, “You are the Messiah.” This was the identity of Jesus that Peter and the disciples came to realize and confess, as they followed Jesus.
After spending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with Jesus, they came to know. They realized that Jesus is the Christ.That is, Jesus is the Messiah.
They had confidencethat He was the One they were waiting for, that He would deliver them. Peter’s confession that Jesus is the Christ is truly amazing. It is in fact accurate. The Gospel of Matthew records that Jesus commended Peter for it:
“Blessed are you, Simon son of Jonah, for this was not revealed to you by flesh and blood, but by my Father in heaven.”(Matthew 16:17)
However, in the very next scene Jesus harshly rebukes Peter, who had just given a splendid confession. This is our text for today.
Jesus, who heard the astounding confession “You are the Christ,” is now moving to His second phase of revealing His identity. The Bible describes this process as follows:
“Jesus warned them not to tell anyone about him. He then began to teach them that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and that he must be killed and after three days rise again. He spoke plainly about this, […].” (Mark 8:30-32a)
Just as Jesus heals the blind man in Bethsaida in two separate stages, Jesus enters a second phase in revealing who He is to His disciples after hearing Peter’s confession.
This is what Jesus is saying: You confessed that I am the Christ, that I am the Messiah. That is truly correct. But the “Messiah” that you are now thinking of and the path of the “Messiah” that I must take are not the same.
The Jews believed that when the Messiah comes, He will judge the whole world, build a new nation, and become its ruler. Peter and the other disciples, too, would have had this idea. When they believedJesus is the “Messiah,” they probably imagined glorious things such as victory, judgement, and rule of Jesus.
But Jesus tells them that He will suffer, be murdered, and rise again. This would have been all too unfamiliar to the disciples. So Peter strongly objects. The Bible describes the flow of the story as follows: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Mark 8:32b)
The original Greek for “rebuke” is “ἐπιτιμάω (epitimaó),” which means “to warn or to rebuke.”But that same Greek word is used again in the verse immediately following the verse above:
“But when Jesus turned and looked at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 ‘Get behind me, Satan!’ he said. ‘You do not have in mind the concerns of God, but merely human concerns.’”(Mark 8:33)
The original Greek for “rebuked” in theverse above is also“ἐπιτιμάω (epitimaó).”
So when Peter objects to Jesus’ words that He will suffer, die, and be raised again, Jesus rebukes Peter in turn. Jesus objects to Peter.
This is what Peter is saying: Lord, what are you saying? Why do you have to suffer and die? Even the seas and demons obey you; you raised the dead; and you fed the five thousand and the four thousand. Why mustYou, the Messiah with all this power, die?
This cannot be. I cannot accept it. You are the Messiah, our Deliverer.
But Jesus rebukes Peter, saying:
“Get behind me, Satan! […] You do not have in mind the concerns of God, but merely human concerns.”(Mark 8:33)
After calling Peter “Satan,” Jesus gives a strong warning. His rebuke is so harsh that it makes us wonder if our Lord was incapable of controlling His emotions.
Dear Church, what was your understanding of this passage till now? When I was little, I thought Jesus meant to say, “Satan, who has entered Peter, come out! Be gone, Satan!”But as I studied the verse more deeply as a pastor,I found a secret clue hiding in it: the phrase “Get behind me.”
IfJesus were commanding Satan to come out of Peter, He should have said, “Satan, get behind Peter!” But He says, “Get behind me, Satan!”
Of course, Jesus’ words may be interpreted as commanding Satan, who is tempting Jesus, to stop tempting Him and stand behind Him. But when we look at the original Greek New Testament, we will discover a deeper meaning.
In Greek this is what Jesus said: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Σατανᾶ (Hypage opisō mou Satana, Get behind me, Satan)
This is an interesting expression. “Get behind me” was Jesus’ very words to His disciples when He called them. The expression “opisō mou,” which means “come behind me, get behind me,” also means “follow me!”
Δεῦτε ὀπίσω μου (Deute opisō mou): “Come, follow me,”(Mark 1:17)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Hypage opisō mou):“Get behind me.”(Mark 8:33)
What does this imply? Jesus is now inviting Peter to his second calling. The above words may be paraphrased as such: “Peter, you speak, thinking you are right, but that is the thought of Satan. Peter, follow Me. Stand behind Me. Don’t stand in My way, but follow Me by getting behind Me.”
In Jesus’ first call to His disciples He told them to follow Him. Then He showed them His power and might and revealed who He is. Through this they concluded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the Christ, the Messiah.
But now Jesus is calling Peter and His disciples a second time: “Follow Me! Follow My path of suffering! Get behind me and follow Me!”Furthermore, in His words immediately following that call He reveals the secret to following Him:
“Whoever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deny themselves and take up their cross and follow me. For whoever wants to save their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their life for me and for the gospel will save it.” (Mark 8:34-35)
Peter, follow Me! Don’t follow Satan; follow Me! To follow Me is to deny yourself and to take up your own cross. This is what Jesus is saying.
Following Jesus is not following a leader of a glorious occupying force, or to set up and follow a worldly king. If you want to follow Me, you must deny yourself, take up your own cross, and follow Me.
As Jesus gives His disciples His second command to follow Him, He teaches them about the path of following Him.
“Take up your own cross!” What does this mean? What is the underlying meaning of “You must take up your own cross if you want to follow Me”?
The Bible uses the expression “their cross.” So it is not someone else’s cross. What was the cross as a penalty? It was the very board on which the death penalty was carried out. So what does it mean to take up one’s cross? In a word, it means to kill oneself. It means to crucify oneself on the cross.
That is, to take up one’s cross means to experience one’s own death.
The cross that we take up is not the cross of redemption. How can we take up the cross of redemption? Our cross is simplyour death penalty for our sins. That is, it means going to the place of death.
When we go to the place of our death, we finally experience true freedom. When we go that place where everything that we have, hold on to, trust, look to, and hope for becomes nothing, we find true wisdom there.
The place of our death, that hopeless place where everything seems to have come to an end, is where we see our Lord crucified with us. That Lord speaks to us.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This is our promise, our joy, and our only hope.
When we stand before death, everything looks different and becomes different. The order of this world is turned upside down, and its values reversed. And true wisdom is gained. Before the futility of death, everything changes. Before the cross of our Lord on Golgotha, that futility turns into hope.
Yesterday in his sermon Pastor Yoo Ki Sung mentioned a Christian who was ill, poor, and struggling. When people asked him, “Do you still think God loves you even in such poverty? Do you think God loves you when you are so weak and ill?,” the man answered, “Whenever I have those questions, I go to the Cross on Calvary.” And he confessed that God loved him so every time he went to the cross and stood before the precious blood.
This is our faith.
Dear Church, do you want to live a truly happy life? Do you desire an unshakable peace—no matter the trial or circumstance? If you do, you must die. You must take upyour cross. Then you must follow the risen Lord.
Consider yourself dead. If you die, you will see a way. Everything will become a gift, a reason to give thanks.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Galatians 2:20)
When we experience our death, we experience the resurrection that revives us to a new life with Christ. Therefore, to follow Jesus is to die and to follow the path He took. It is to live according to His guidance.
Today is Palm Sunday, the day that celebrates Jesus entry into Jerusalem on a colt. People laid down their cloaks, waved palm branches, and cried, “Hosanna,” as Jesus entered the city.
The Man they welcomed was a worldly king, their “Messiah.” The people of Jerusalem greeted Him with their expectations. They would have considered Him a conquering “General,” a “Savior” who would liberate them from Roman rule. But our Lord rode a colt into Jerusalem.It was a humble, worthless animal—not a grand, magnificent stallion.
And the disciples were behind Him. They became the ones who followed Jesus who had already entered the Passion of the Cross. Almost all of the disciples met the same fate as our Lord; yet they gained that which the world cannot give—true life.
Follow Me! Our Lord speaks to us:
“For whoever wants to save their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their life for me and for the gospel will save it.”(Mark 8:35)
마가복음 8: 33~35
33~35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공생애 기간, 주님은 제자를 부르고 기르시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요즈음 새벽기도 시간에 마가복음을 함께 읽어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읽어가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이신 일이 제자를 선택하시고 키우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생략하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사십 일간 광야에서 시험받으시죠. 그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는 말씀을 외치시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이 하신 첫 번째 일이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6~18절입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6~18)
예수님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헬라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Δεῦτε ὀπίσω μου (Deute opisō mou, Come after me)
문자적으로는 “내 뒤에 오라. 내 뒤에 바짝 따라와서 나를 따라오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신 주님은 이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기를 시작하십니다.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놀라운 권위로 가르치셨고요. 귀신들린 자를 보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길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적과 치유의 사건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셨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때는 특별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실 때에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막 3:4) 하고 물으시며 안식일의 기본 정신을 다시 세워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3장에서는 열두 제자를 모두 부르신 후에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본격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모여든 무리에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듣고는 갔으나 그 뜻을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그때 의미를 묻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비유를 따로 풀이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많은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지만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정작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후로도 주님은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풍랑이 일었을 때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보시고는 잔잔케 하신 후에 야단치기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5장에서 주님은 거라사 지역까지 방문을 확장하시고, 이방 지역에서 귀신들린 자를 내어쫓으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고치셨고,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도 고쳐 주셨습니다. 6장에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고, 7장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더러운 딸을 치유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8장에서는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과 함께 벳새다 맹인을 고쳐 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이방인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며, 배고픈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시는 분이시며,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1장부터 8장까지가 마가복음 전반부에 해당되고, 8장 이후부터 마지막 부분은 후반부에 해당됩니다. 전반부에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이 나타나고, 8장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에 가셔서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이 전해집니다.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곳에 벳세다 맹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자리하며, 마가복음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사건에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하나 보이는데,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맹인을 단번에 고치시지 않으시고 두 번에 걸쳐서 고쳐 주셨다는 점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신 후에 물어보시죠.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그의 눈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안수하셨고, 그가 ‘밝히’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온전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 주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벳세다 맹인의 치유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인 세례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합니다.>
자, 그렇다면 마가복음 1장부터 8장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제자들이 발견하게 된 예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흐릿하게 본 맹인처럼 제자들이 바라본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이 마가복음 8장 27절 이후에 베드로의 고백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답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수없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을 보여 주셨는데, 과연 무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물으신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이번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대답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3년여 동안의 시간 동안 알게 되고 고백하게 된 예수님의 정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이 말을 바꾸면 “예수님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린 분이시구나! 우리를 구원해 내실 그분이시구나!’라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고백한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자,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한 베드로가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예수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멋진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시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막 8:30~32a)
여기서 ‘비로소’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이어지죠. 벳새다의 맹인을 두 번에 걸쳐서 고치신 것처럼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다시금 계시하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다. 네가 나를 메시야라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분명 맞는 고백이다. 그런데 네가 지금 생각하는 메시야와 내가 가는 메시야의 길은 다르다.”라는 말씀을 두 번에 걸쳐서 전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상을 심판하고 정의로 새 나라를 세우고 통치할 메시야를 믿어 왔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도 동일한 생각을 한 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메시야다!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했을 때, 아마도 세상을 통치하고 제압하고 심판하는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정작 수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강하게 항변합니다. 성경은 그 흐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b)
‘항변하다’라고 표현된 헬라어 ἐπιτιμάω(epitimaó)는 “경고하다”, “꾸짖다”라는 뜻이 포함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같은 단어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막 8:33 중)
여기서 ‘꾸짖다’라는 단어가 ‘항변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꾸짖었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반발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꾸짖으며 항변합니다.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바다도 순종하고 귀신도 순종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아닙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십니까?”
그때 주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말씀하시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막 8:33 중)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먼저 “사탄아!”라고 말씀하시면서 강하게 경고하십니다. 사실 너무도 강력한 탓에 예수님께서 감정조절을 못하신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며 받아오셨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렇게 해석해 오곤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들어간 사탄아, 그곳에서 나와라! 꺼져라! 사라져라!” 그렇게 명령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을 깊이 연구하면서 숨겨진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비밀의 열쇠는 바로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베드로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라면, 예수님은 “사탄아, 베드로의 뒤로 물러서라!”라고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앞에서 유혹하는 사탄을 향하여 나의 뒤로 물러서라는 말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원어로 살펴보면 조금 더 깊은 뜻이 있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헬라어로 보면 이렇습니다.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Σατανᾶ (Hypage opisō mou Satana, Get behind me, Satan)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어디선가 익숙해 보이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 뒤로 물러서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이미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opisō mou’ 라는 표현이 제자들을 향하여 “내 뒤로 오라!” 하신 말씀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오피소 무’라는 표현이 두 가지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Δεῦτε ὀπίσω μου (Deute opisō mou), 나를 따라오라 (막 1:17)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Hypage opisō mou),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3)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를 두 번째 소명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풀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너의 생각을 지금 말하고 있다만, 그것은 사탄의 생각이다. 베드로야, 나를 따라오너라. 내 뒤에 서라. 내 앞에 서려고 하지 말아라. 내 뒤에 서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자신을 따르는 것에 대한 비밀을 열어 보여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 사탄을 따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것은 영광스런 점령군의 대장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왕을 옹립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나를 따르라”는 두 번째 명령 다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열어 보여 주십니다. 그 길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십자가를 지는 것, 이것이 진정 예수를 따르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를 쫓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남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형은 어떤 형벌입니까? 사형의 형틀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라는 말의 진정한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어찌 대속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죗값으로 주어진 사형 선고, 그 죽음의 자리에 나아갈 뿐입니다.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해방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쥐고 있고, 붙잡고 있고, 의지하고 있고, 바라보고 있고, 희망하는 모든 것들이 허무로 돌아가는 그 자리로 나아갈 때에 진정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곳에서 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더 이상 희망 없는 그곳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소망이고, 기쁨이고, 유일한 희망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지 우리가 내세만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살자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의 현실을 직면하자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나의 삶에 있어서 상수로 놓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다시 파악합니다. ‘죽었다’라고 생각하고 죽음 앞에 설 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모든 질서가 거꾸로 되고, 세상의 가치가 역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된 지혜를 얻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허무 앞에서 우리는 박해도, 고난도, 어떤 것도 견딜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허무가 소망으로 다시 바뀌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예수님 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젊었을 때 일입니다. 목회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도 풀 수 없고 저렇게 해도 풀 수 없는, 참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종종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 제가 아무리 해도 풀 수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목회하시던 아버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라. 니가 죽었다고 생각해.” 그 말씀이 저의 마음속에 깊이 남았습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일이 더 커지고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아, 내가 죽었구나. 이 시간에 내가 죽었구나.’ 생각하니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소망가족 수련회에 유기성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아주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요. 목사님께서 중요한 질문을 하시며 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 안에 거하는가? 예수 안에 살고 있는가?” 이 질문과 함께 오늘 저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을 경험할 때, 내가 죽을 때, 그곳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결국 죽음을 경험할 때 모든 것이 덤이 되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날이지요. 주님이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사람들이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환영한 것은 이 땅의 왕 메시야였습니다. 그 기대를 품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성으로 모셨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자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당당하고 위엄 있는 말이 아니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뒤에 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뒤따라갑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의 수난의 길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거쳤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일차적으로는 영광스런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 병을 고치시는 주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보지요. 다음 단계에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로 밝히 보게 해 주십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이 단계에 이를 때에 비로소 시작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너를 죽여라. 그럴 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너희는 진정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2023년 4월 2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나를 따르라” (막 8장 33~35절)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40장, 15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막 8장 33~35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며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설교의 요약
마가복음을 읽으며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첫 번째 하신 일이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며 “나를 따라오라” 하십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내 뒤로 오라,” “내 뒤에 붙어서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집중하시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이방인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며, 배고픈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시는 분이시며, 풍랑을 잔잔케 하는 분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이신지 두 번째로 드러내 보여 주시는 단계로 나아가십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 주실 때,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주님께서 가시는 메시아의 길이 다름을 알려주십니다. 메시아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리와 심판, 통치와 같은 영광스러운 일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하는지, 이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를 두 번째 소명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내 앞에 서지 말고, 내 뒤에 서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다시 부르십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어 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으로 주어진 사형 선고, 그 죽음의 자리에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내가 죽어야 길이 보입니다. 나의 죽음을 경험할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고,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수난으로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이 제자입니다.
나누기
-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았다면, 우리는 지금 제자로써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가 죽어야 할 부분”은 무엇이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늘 죽음을 기억하며,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참되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오시어 십자가에서 큰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