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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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열고 지혜를 듣다
<그리스도인은 힘든 인생길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 성도의 교재인 코이노니아를 경험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서신에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8). 그러니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하나님 합니다”입니다. “하나님 살아 계시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라는 뜻에서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 하십니다.”라는 인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같이 용기를 내어 인사합시다. 또한 두 눈을 크게 뜨고 옆에 계신 분들을 바라보며 감탄해 봅시다.
인사하는 것이 쉽지 않지요. 이러한 순간의 선택을 일컬어 신앙의 결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이 무겁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가 경험하는 경험이 가장 무겁고 힘들며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정입니다. 그러니 무겁고 힘겨운 발걸음 옮길 때마다 ‘이거 누가 할까요? 이걸 누가 가늠할까요?’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힘든 인생길 걸어갈 때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지으신 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경관 앞이 아니라 우리 삶의 평범함과 고통스러운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찬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식구 여러분, 우리가 한 성령 안에 한 말씀으로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날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세상 아름답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합니다”, “우와” 하며 인사하는 것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런데 고백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꼭 담기길 소망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엘리야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휩싸여 무너져 내린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당시 시대적 정황 속에는 북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매우 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 신상에게 절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을 잘못 들였습니다. 이세벨 여왕은 이방 신을 매우 쫓았으며,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웠습니다. 450명이나 되는 바알의 선지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통곡하며 자기들의 신을 찾았지만, 그 신은 아무런 능력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늘 문이 열리고 불이 떨어져서 재단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습니다. 그 길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를 모두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바라보니 이스라엘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에도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세상에 비가 내려서 가뭄이 해결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을 발휘했다면 아마 엘리야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정도쯤이면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평정되며,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열왕기상 18~19장을 보시면, 이세벨이라는 왕비가 다짐을 합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왕상 19:2)
엘리야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탈진하고 소진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도망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왕상 19:4)
그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던 것일까요? 사람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그 경험이 쌓이면 사람들은 자기만의 삶의 생각을 갖습니다. 이 생각이 더러는 자신만의 삶의 노하우가 되어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저런 상황에선 저렇게 하면 된다는 삶의 지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지나쳐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다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찾아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가 탈진하여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을 때,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등장해서 구운 떡과 물을 한 병 줬습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먹었지만 또다시 쓰러졌습니다. 기진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또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이제 힘을 얻은 엘리야는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한 가지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신정론에 대한 의구심이라고 일컫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신가? 과연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가?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신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악을 왜 그대로 두시는가? 선한 사람들은 왜 어려움을 당하는가? 오늘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질문들은 무척이나 중요한 질문으로 와닿을 때가 많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힘을 낸 엘리야가 40일 밤낮을 달려갔습니다. 여호와의 산인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굴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왕상 19:10)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가 통곡하면서 다 죽고 자신 혼자 살아남았다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젠 자신도 이세벨의 칼에 의해 죽임당할 것이며, 자신마저 죽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다 없어지고 끝이 난 것 같다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왕상 19:11)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그때 큰 바람이 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께서 등장하시는 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 계시지 않았습니다. 땅이 갈라지고 무너지며 지진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줄 알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불이 떨어지자 갈멜산에서 내려 주셨던 불을 기억했으나, 거기에 하나님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생각을 뒤집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신앙의 식구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올 때, 우리를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지성, 관점, 그리고 세계관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넓고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미한 소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세미한 소리’(콜 데마마 다카, קול דממה דקה)라는 말은 ‘적막함의 소리’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적막함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성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 소리도 없는데, 거기에 소리가 들렸다는 표현은 신비를 가리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어떻게 소리가 들리나요?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끝났다고 토로하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왕상 19:15~17)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8)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엘리야의 마음속에 주셨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늠할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일하시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 판단, 생각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과 지진, 불길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는 우리를 깨우치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고, 이 세상이 영 녹록지 않지요. 그렇지만 “사랑합니다”, “우와” 하며 고백하시라 부탁드렸습니다. 세상에는 한숨도 나고 눈물도 흘리며 힘도 빠지는 일도 많지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세미한 음성이 여러분의 가슴에 담기길 원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분주하고 이것도 저것도 소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나에게 박수 친다 할지라도, 혹은 비난한다 할지라도 하늘 아버지를 쳐다보십시오. 세상을 너무 쉽게 판단하셔서는 안 됩니다. 너무 쉽게 즐거워하셔도, 너무 쉽게 무너지셔서도 안 됩니다. 너무 쉽게 화내셔서도 안 되고, 너무 쉽게 짜증 내셔도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 살아 계시니, 우리 하나님 반드시 잘해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지키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압니다.
<우리의 상처까지도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침은 사람들을 깨우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새벽을 깨웁니다. 시간의 개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야기하는 시간은 이 세상이 이야기하는 시간과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셔야 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우신 줄은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름길 만드시는 줄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는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부분들, 열등감으로 가득한 상처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 달란트를 재능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달란트는 어떤 대단한 재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곧 달란트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부모 아래에서 자라며 어려운 상황을 겪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것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은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 달란트이든 다섯 달란트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지 않았습니다.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나 그들은 받은 달란트를 다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변명이 가득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마 25:24~25)
그러자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땅에 묻어 두기만 하다가 그래도 가지고 온 자를 주인이 책망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면,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가지고 와야 했다며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는 우리의 눈물과 한숨, 콤플렉스, 실패, 그리고 아픔도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의 눈물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픔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의 활용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에게 가득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고 세미한 음성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줄 압니다.
한 마을에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처자 하나의 배가 갑자기 불러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대체 누가 이런 것이냐 다그쳤습니다. 그 처자가 당장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그 존경받는 사람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잔뜩 난 채로 딸과 온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가서 존경받는 그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창피를 준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딱 한마디를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인의 아버지가 화가 나서 아이를 그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존경받던 사람은 그 아기를 안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젖동냥을 하며 키웠습니다. 그런데 아기 엄마가 죄책감이 들어 아버지에게 이실직고했습니다. 사실 그 아기는 이웃 마을의 청년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였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을 다시 그 사람에게 찾아가 사죄하고 아이를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자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릴 때가 많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당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며 힘든 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으시니, 지금 당장 내 눈에 눈물이 나고 지금 당장 마음은 무너지더라도 믿음을 붙드셔야 합니다.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하소서 (찬송가 484장 1절)
하나님께서 우리와 반드시 함께 계십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하루하루 살아가시며 항상 강건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잘해 주실 줄 믿습니다.
Open up and Listen to Wisdom
1 Kings 19:11-12
We often pray to know the will of God. But what is prayer? Many think that it is “to repeatedly tell God about what I want and to persuade Him.” They believe that if we pray this way, God will change His mind and give us what we want. So, in all earnestness and, sometimes, out of desperation, they pour out words of prayer.
Elijah was the same. When he went up against 450 prophets of Baal on Mount Carmel, he poured out his whole energy with the faith “I am right.” Fire came down from heaven and heavy rain fell on the parched land. Anyone who saw this would have cried out, “Look! God has answered! It is the power of prayer!” But what happened the very next day? At Jezebel’s threat, uttered in just one sentence, Elijah ran for his life into the wilderness. There he cried out to God, “I have had enough, Lord. Take my life.” (1 Kings 19:4) How did this happen? It was because Elijah had seen the power of God, but did not take part in His wisdom.
Strengthened by the baked bread and water brought to him by an angel, Elijah traveled forty days and forty nights to Horeb, the mountain of God. There he cried out to the Lord again, “I am the only one left, and now they are trying to kill me.” God replied, “Go out and stand on the mountain in the presence of the Lord.” (1 Kings 19:11).” At that moment, a great and powerful wind blew; then there was an earthquake; and after that a fire burned up the whole mountain. But God was not in any of them.
Finally, there came a “gentle whisper.”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original Hebrew “קול דממה דקה” that corresponds to “gentle whisper” would be “the sound of quiet.” This is clearly an oxymoron. How can quiet have a sound? But, in that quiet, Elijah experienced the presence of God. And he hears the plans of God: “Anoint Hazael king over Aram. Also anoint Jehu son of Nimshi king over Israel, and anoint Elisha son of Shaphat from Abel Meholah to succeed you as prophet.” (1 Kings 19:15-16) “Yet I reserve seven thousand in Israel—all whose knees have not bowed down to Baal and whose mouths have not kissed him.” (1 Kings 19:18)
This is prayer. Prayer is not our tempestuous cry to move God. Neither is it a flame that persuades God to attain our will. Nor it is an outpour of our passion and tears in an earthquake-like cry to God. Prayer is not about our will; it is to listen to God’s will, His will that we do not know. It is to lay down our zeal and strength and to take part in God’s wisdom.
Sometimes, we ask God, “Why are You so silent? Why do you not answer when so much pain and evil exist in this world?” Elijah had the same questions. “Why is there no change, after all my struggles for You?” At this point, we come to ask a classical theodicean question: “Is God all-powerful? If He is, why doesn’t He stop evil? Is God good? If He is, why is there pain?” Elijah gets his answer on Mount Horeb. God is all-powerful, but His ways are different from those of man’s. God does not renew the world by overturning it with violence. He changes it with His quiet wisdom. What we want are winds, earthquakes, and flames. But God works in a gentle whisper. Prayer is not persuading God with our sense of justice and zeal. It is a time and place to learn “Yet not as I will, but as you will.” (Matthew 26:39)
Think about the Parable of the Talents in Matthew 25. The master entrusted his servants with five, two, and one talent(s) each. Many people misunderstand the talents to symbolize special aptitudes of gifted people, or the top one percent. But the essence of this parable is that we ourselves are the talents. The talents represent our entire being, including our time, life, heart, and even our hurts. The servant who buried the one talent given to him in the ground says, “Master, I knew that you are a hard man, harvesting where you have not sown and gathering where you have not scattered seed. So I was afraid […].” (Matthew 25:24-25) What was this servant’s prayer? He did nothing because of his fear before God. In his prayer he didn’t listen to God. His prayer was one that hid his talents so as not to get hurt or disappointed.
However, this is what the master says to the other two servants who received five and two talents each and had the wisdom to listen to God’s gentle whisper in their prayers even amidst their hurts: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 Prayer is to open ourselves to God and let Him use us, despite our hurts and imperfections. Prayer is to discover the wisdom He has planted in us and the time and place where we gain the courage to live by that wisdom.
Dear brothers and sisters of Somang Church, how would you describe your lives? Are they filled with hurt and failures? Do you feel that your life is going in a direction different from your will? I believe that God will work in that very place. Therefore, prayer is not to hide our hurts and fears, but a time and place to confess them to God and lay them down before Him. Prayer is to realize that we ourselves are the talents and to give ourselves to God.
Elijah got up again after that gentle whisper. God said to him: “Elijah, go back. And continue doing what I have entrusted you to do.” Prayer is not a power that changes the world in the way I want. Prayer renews me; it is to take part in the wisdom of God who sends me. May you listen to the gentle whisper of God in your prayers. May you, in your prayers, believe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alents and gain the wisdom to discover those talents. When this happens, our lives will no longer be swept up by storms, earthquakes, or flames, but will be led by God’s gentle whisper.
열왕기상 19:11~12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그리스도인은 힘든 인생길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 성도의 교재인 코이노니아를 경험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서신에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8). 그러니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하나님 합니다”입니다. “하나님 살아 계시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라는 뜻에서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 하십니다.”라는 인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같이 용기를 내어 인사합시다. 또한 두 눈을 크게 뜨고 옆에 계신 분들을 바라보며 감탄해 봅시다.
인사하는 것이 쉽지 않지요. 이러한 순간의 선택을 일컬어 신앙의 결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이 무겁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가 경험하는 경험이 가장 무겁고 힘들며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정입니다. 그러니 무겁고 힘겨운 발걸음 옮길 때마다 ‘이거 누가 할까요? 이걸 누가 가늠할까요?’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힘든 인생길 걸어갈 때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지으신 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경관 앞이 아니라 우리 삶의 평범함과 고통스러운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찬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식구 여러분, 우리가 한 성령 안에 한 말씀으로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날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세상 아름답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합니다”, “우와” 하며 인사하는 것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런데 고백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꼭 담기길 소망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엘리야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휩싸여 무너져 내린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당시 시대적 정황 속에는 북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매우 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 신상에게 절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을 잘못 들였습니다. 이세벨 여왕은 이방 신을 매우 쫓았으며,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웠습니다. 450명이나 되는 바알의 선지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통곡하며 자기들의 신을 찾았지만, 그 신은 아무런 능력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늘 문이 열리고 불이 떨어져서 재단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습니다. 그 길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를 모두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바라보니 이스라엘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에도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세상에 비가 내려서 가뭄이 해결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을 발휘했다면 아마 엘리야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정도쯤이면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평정되며,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열왕기상 18~19장을 보시면, 이세벨이라는 왕비가 다짐을 합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왕상 19:2)
엘리야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탈진하고 소진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도망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왕상 19:4)
그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던 것일까요? 사람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그 경험이 쌓이면 사람들은 자기만의 삶의 생각을 갖습니다. 이 생각이 더러는 자신만의 삶의 노하우가 되어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저런 상황에선 저렇게 하면 된다는 삶의 지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지나쳐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다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찾아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가 탈진하여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을 때,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등장해서 구운 떡과 물을 한 병 줬습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먹었지만 또다시 쓰러졌습니다. 기진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또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이제 힘을 얻은 엘리야는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한 가지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신정론에 대한 의구심이라고 일컫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신가? 과연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가?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신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악을 왜 그대로 두시는가? 선한 사람들은 왜 어려움을 당하는가? 오늘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질문들은 무척이나 중요한 질문으로 와닿을 때가 많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힘을 낸 엘리야가 40일 밤낮을 달려갔습니다. 여호와의 산인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굴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왕상 19:10)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가 통곡하면서 다 죽고 자신 혼자 살아남았다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젠 자신도 이세벨의 칼에 의해 죽임당할 것이며, 자신마저 죽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다 없어지고 끝이 난 것 같다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왕상 19:11)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그때 큰 바람이 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께서 등장하시는 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 계시지 않았습니다. 땅이 갈라지고 무너지며 지진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줄 알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불이 떨어지자 갈멜산에서 내려 주셨던 불을 기억했으나, 거기에 하나님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생각을 뒤집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신앙의 식구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올 때, 우리를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지성, 관점, 그리고 세계관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넓고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미한 소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세미한 소리’(콜 데마마 다카, קול דממה דקה)라는 말은 ‘적막함의 소리’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적막함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성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 소리도 없는데, 거기에 소리가 들렸다는 표현은 신비를 가리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어떻게 소리가 들리나요?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끝났다고 토로하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왕상 19:15~17)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8)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엘리야의 마음속에 주셨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늠할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일하시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 판단, 생각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과 지진, 불길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는 우리를 깨우치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고, 이 세상이 영 녹록지 않지요. 그렇지만 “사랑합니다”, “우와” 하며 고백하시라 부탁드렸습니다. 세상에는 한숨도 나고 눈물도 흘리며 힘도 빠지는 일도 많지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세미한 음성이 여러분의 가슴에 담기길 원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분주하고 이것도 저것도 소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나에게 박수 친다 할지라도, 혹은 비난한다 할지라도 하늘 아버지를 쳐다보십시오. 세상을 너무 쉽게 판단하셔서는 안 됩니다. 너무 쉽게 즐거워하셔도, 너무 쉽게 무너지셔서도 안 됩니다. 너무 쉽게 화내셔서도 안 되고, 너무 쉽게 짜증 내셔도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 살아 계시니, 우리 하나님 반드시 잘해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지키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압니다.
<우리의 상처까지도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침은 사람들을 깨우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새벽을 깨웁니다. 시간의 개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야기하는 시간은 이 세상이 이야기하는 시간과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셔야 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우신 줄은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름길 만드시는 줄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는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부분들, 열등감으로 가득한 상처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 달란트를 재능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달란트는 어떤 대단한 재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곧 달란트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부모 아래에서 자라며 어려운 상황을 겪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것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은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 달란트이든 다섯 달란트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지 않았습니다.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나 그들은 받은 달란트를 다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변명이 가득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마 25:24~25)
그러자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땅에 묻어 두기만 하다가 그래도 가지고 온 자를 주인이 책망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면,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가지고 와야 했다며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는 우리의 눈물과 한숨, 콤플렉스, 실패, 그리고 아픔도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의 눈물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픔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의 활용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에게 가득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고 세미한 음성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줄 압니다.
한 마을에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처자 하나의 배가 갑자기 불러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대체 누가 이런 것이냐 다그쳤습니다. 그 처자가 당장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그 존경받는 사람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잔뜩 난 채로 딸과 온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가서 존경받는 그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창피를 준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딱 한마디를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인의 아버지가 화가 나서 아이를 그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존경받던 사람은 그 아기를 안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젖동냥을 하며 키웠습니다. 그런데 아기 엄마가 죄책감이 들어 아버지에게 이실직고했습니다. 사실 그 아기는 이웃 마을의 청년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였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을 다시 그 사람에게 찾아가 사죄하고 아이를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자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릴 때가 많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당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며 힘든 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으시니, 지금 당장 내 눈에 눈물이 나고 지금 당장 마음은 무너지더라도 믿음을 붙드셔야 합니다.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하소서 (찬송가 484장 1절)
하나님께서 우리와 반드시 함께 계십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하루하루 살아가시며 항상 강건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잘해 주실 줄 믿습니다.
“나를 열고 지혜를 듣다” (왕상19:11~12)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425, 528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점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변화된 경험이 있습니까?
<설교의 요약>
우리는 각자 살아온 삶의 여정에 따라 독특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은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갈고닦은 것이며, 때로는 우리를 지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프레임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상대로 승리하고 큰 기적을 행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위협에 두려워 광야로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절망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깊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선하십니까?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우십니까?” 그는 40일 밤낮을 뛰어 호렙산에 이르러 하나님께 토로했습니다. “하나님, 다 죽었습니다. 나 혼자 살아남았는데 나도 이제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큰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떨어졌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 즉 적막한 소리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겨두었다”라고 말씀하시며, 하사엘, 예후, 엘리사에게 기름 부을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당장 일어나는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쉽게 화내거나 즐거워하거나, 슬픔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찬찬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세상이 박수칠 때나 손가락질할 때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박수치고 계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는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가고 계시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아픔과 즐거움을 통해 우리를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와 아픔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둘 줄 아는 믿음을 가지고,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며 이 세상을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나누기>
1. 나의 생각과 관점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나를 열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2.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당당한 믿음을 구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참 고맙습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언제나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당당하게 살아갈 줄 아는 소망의 가족들 되게 하옵소서. 한 분 한 분 가슴 쥐고 아파하며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이깁니다’라는 신앙 고백으로 살아갈 줄 아는 힘과 능력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