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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 이야기

열왕기하 5: 9 ~ 14

김경진 목사

2021.11.28

<성경은 나아만 장군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증언합니다.>

시각 장애인 남성과 결혼한 한 여인이 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으로 잘 자라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시각 장애인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이 모두 나서서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시각 장애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는 시각 장애인과 결혼한 두 가지 이유를 친구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남들 사는 인생이 아닌 그녀의 인생, 그녀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였습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믿음에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정말 나만의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남들이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흉내내면서 따라가지는 않은가?’ 한 여인이 시각 장애인과 결혼하기로 결심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듯이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 믿음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은 병 고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나아만 이야기입니다. 말씀에는 병 고침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요소들이 잘 갖추어져 있죠. 먼저는 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은 나아만에게 나병이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본문은 끝이 납니다.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결론이 14절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나아만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참된 예배자가 되었는지 과정을 보여 줍니다. 종인 게하시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값없는 은혜를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과정이 나아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 1절은 나아만 장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열왕기하 5장 1절, 새번역)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 이야기는 흥미로운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은 나아만이 왕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묘사합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아마도 왕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고 존경받은 장군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설명과 더불어서 성경은 두 가지 사실을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열왕기하 5장 1절 중)

조금 의아하기도 하고 뜬금없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원어 성경은 이곳에 ‘야훼 여호와’라는 단어를 넣어서 표현합니다. 즉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아람(시리아)를 구원하는 데 큰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나아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저 시리아에 충성된 장군이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명예욕에 따라, 혹은 사명감에 따라 나라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와 함께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 함께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그저 사업을 하고 연구를 하고 세상적인 일을 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관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던 때에 그를 주목하고 계셨고, 그와 함께하셔서 승리에 관여해 주셨습니다. 나아만의 세상적인 성공은 하나님께서 관여하신 결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아만이 얻은 첫 번째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요.
성경은 나아만과 관련하여 두 번째 이야기를 알려 줍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열왕기하 5장 1절 중)

나아만은 대단한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병이라는 질병입니다. 여기서 나병이라고 표현된 이 병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문둥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가 집에 있었다는 점, 왕 앞에까지도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전염이 되지 않는 나병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아마도 온몸에 퍼져 있는 피부병이었겠지요. 전염은 되지 않지만 그를 극히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7절을 보면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대가를 요구하다가 나병을 도리어 얻게 되는데, 그 역시 마른버짐 같은 피부병을 얻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토피 피부염을 앓으신 분들이 꽤 되실 텐데 그보다 더 심한 피부병이 아니었을까요? 전염성 있는 피부병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당시 피부병은 큰 두려움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나아만은 아마도 피부병으로 인해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을 듯합니다.
정리해 보면 장소는 이스라엘이 아닌 시리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을 것 같은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나아만과 함께하시며 시리아의 군대가 승리하도록 하셨습니다. 게다가 나아만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일을 시작하고 계셨고, 많은 성취를 얻도록 이끄셨습니다. 동시에 나병인 피부병까지도 허락하셨죠.

<나병이 나아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했다면, 나에게 나병과 같은 존재는 무엇입니까?>

나아만에게 나병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 매우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나병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만 없으면 모든 것이 완벽한 인생인데 우리 스스로를 망가트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나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의 소식을 듣고 선뜻 길을 나서는 모습에서 시리아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에게 나병이란 병은 희망을 줄 수 없는 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날마다 더욱더 심한 고통과 열등감, 힘든 고욕으로 몰아넣는 병이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사는 듯 보입니다. 집에 가면 좋은 가구를 들여놓고, 넓은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뜻 보면 모두가 그래 보이지요. 그러나 내면 깊이 들여다보면 나아만이 앓던 나병처럼 더럽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하나둘씩 가진 걸 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허물, 지금까지 이룬 모든 성취들을 모조리 의미 없게 만드는 것 같은 문제들, 아니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아 꺼내기조차 원치 않은 과제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신앙을 만든다’, ‘나만의 신앙을 만든다’라는 것은 이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아만이 나병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여서 하나님을 알며 나아가게 되었듯이, 나에게 주어진 나병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씨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신앙을 만들어 갑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살아나고,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아만의 나병이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의 질병일 수 있습니다. 혈액암, 간암, 대장암일 수 있고요. 병명을 알 수 없는, 치료법도 알기 어려운 불치병일 수도 있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나병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녀일 수 있고,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일 수도 있겠죠.
만일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고상한 사색을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일까?’ 세상의 이치를 따져 가며 신앙적인 점검을 해 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우주의 이치를 따지며 하나님을 규명하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신앙이 커 가기를 원하죠. 물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신앙은 우리 안에 놓인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면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데서부터 커 가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기 원하고 우리의 신앙이 보다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나병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아픔, 나의 문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나의 신앙이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따금 현대 교인들 중에 참으로 고상해 보이는, 그러나 안타까운 신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고상하게 차려입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정숙하게 예배합니다.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나병은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 주님은 제가 드리는 감사를 그저 받기만 하세요. 내면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울고 불며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나는 고상하게 당신을 믿고 싶어요.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어요. 나는 참 좋은 교인이지요.” 그러나 잘못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병원에 가서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오셨나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 무엇이 불편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아니요, 불편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저 참을 만해요.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까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관리할게요.”라고 말한다면 병원에 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나병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문제를 들고 씨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만나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 문제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나병과 같이 해결할 수 없는 큰 과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매우 중요한 길목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로부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론 신학자의 이론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조직적으로,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일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문제를 가지고 풀어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할 수 있어야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겁니다.
만약에 나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문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한 채 ‘누구는 병이 나았다더라, 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더라’는 소문만 듣는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저 일상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나병은 무엇입니까? 깊숙이 숨겨 있는 상처 덩어리는 무엇입니까?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만나시고자 마련해 놓으신 참으로 귀한 선물입니다. 보기에는 더럽고 추하고 남들이 보면 도망갈 것 같은 큰 아픔지만, 아픔을 주시면서까지 나를 만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강에 7번 몸을 씻게 합니다. 그러면 장군의 몸이 깨끗하게 된다고 말하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이 진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발길을 돌렸다고 증언합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열왕기하 5장 11~12절 중, 새번역)

나아만 자신이 생각하는 나름의 치료 과정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나와서 영접하고 아픈 부위에 손을 얹은 후에 나름대로의 특별한 행위를 통해 낫게 해 주리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단지 물에 씻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더러운 요단강보다 깨끗한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 할 때에 종을 통해 한 소리가 들립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열왕기하 5장 13절)

<하나님은 때로 주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나아만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익명의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조금 전 등장한 한 부하가 있고, 이스라엘에 잡혀 와서 나아만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종으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소녀가 있습니다(왕하 5:2). 두 사람은 하나님을 소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나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이스라엘에 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분에게 나아가면 나을 수 있다고 전해 주죠. 엘리사에게 갔다가 돌아서려는 나아만을 향해 한 부하는 나아만을 설득하며 장군의 발길을 되돌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는 돕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길에서 자칫하면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고 좌절될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자’는 생각을 할 때가 있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돌아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들려지는 소리, 그때마다 함께하는 또 다른 신앙의 목소리, 그 목소리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게 됩니다. 종의 부탁을 들은 나아만이 요단강에 7번 몸을 담궈야 하는 일 앞에 서 있습니다. 자신의 부하로부터 들려온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엘리사의 말을 따라 요단강에 7번 들어가는 순종을 보입니다.
종종 이단들이 나아만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교주의 명령에 무조건적 복종을 하라고 가르치죠. 엘리사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씀에 순종하는 나아만을 강조하면서 교주들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엘리사의 말에 복종하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교주나 목회자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과거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셨고 다른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그분의 말씀과 약속은 성경 안에 이미 가득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린도후서 1장 20절)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스”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승인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두신 약속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그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경험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7번 씻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반드시 7번 씻어야만 낫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가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아만으로 하여금 7번이나 몸을 씻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나아만이 7번 몸을 씻는 동안 사실은 6번의 실패가 존재합니다. 한 번 들어가 봅니다. 별 반응이 없습니다. 달라진 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지…’하고 두 번 들어가 봅니다. 여전히 달라진 점이 없습니다. 세 번째 들어가 봅니다. ‘이거 혹시 헛고생하는 것 아닌가? 여기가 맞는 곳인가?’ 생각하며 또 다시 들어갑니다. ‘이보다 좋은 강도 많은데 왜 하필 더러운 요단강에서 씻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다섯 번째 들어갑니다. 변화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 들어가지만 어떤 기미도 나타나지 않아 실망할 즈음, 마지막 일곱 번째에 들어갔다 나오니 변화된 자신의 몸을 봅니다.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장 14절)

저는 이 7번의 과정이 나아만 자신의 신앙을 만들어 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나만의 신앙을 가지는 일은 어렵고 힘듭니다. 여섯 번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앙하고, 믿고, 결단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들고는 이것을 보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말하죠. 쳐다만 보아도 산다고 했지만 정작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이성을 앞세우며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놋뱀을 바라보고 일어나 걸어간 사람들이 옆에 있었음에도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놋뱀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것, 이것이 인간의 미련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낮아지는 곳, 자존심과 자만심이 내세워지지 않는 곳,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합니다. 순종이 있는 그곳에, 순종이 아니고는 더 이상 방도가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우리는 오늘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께서 오신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억눌린 자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 그분께 희망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he Story of Naaman

2 Kings 5:9-14

A beautiful woman marrieda blind man. The woman, who had no disabilities, came from an affluent family. She married him despite fierce opposition from her family and friends.As she finally tied the knot, she said, “I am marrying this man, first, because I love him, and second, because I want to live ‘my’ life, not someone else’s.”

These words are food for thought. Am I living my life, a life of my own? If I am living like everyone else, am I really living my life? Is a life that follows others really my life?

Such reflections can be applied to our faith, too. Do I have a faith of my own? Is my faith my own, or am I just following others?

A believer must be able to say,“This is my faith!”like the woman who boldly announced, “This is the life I choose!” as she married a blind man.

Today’s Scripture is about Naaman, apagan commander who came to know God through thehealing of his leprosy. The chapter contains all the basic elements of healing. First, it starts with a “problem.” As 2 Kings 5:1 states, Naaman was sick with leprosy. Finally, the text ends with the problem “being solved.” As Verse 14 states, Naaman’s skin became “clean like that of a young boy.”

The middle part describes how Naaman’s leprosy was healed. The process of healing also reveals a principle of faith essential to believers. Naaman’s story holds an important principle of faith, one that allows us to experience God’s power and have a faith of our own. Let’s study those principles today.

A brief introduction of Naamanis given in the first verse of today’s passage:

“Now Naaman was a commander of the army of the king of Aram. He was a great man in the sight of his master and highly regarded, because through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 He was a valiant solder, but he had leprosy.” (2 Kings 5: 1)

The story of Naaman, a brave soldier of Aram, starts withsome fascinating details. Naaman was “a great man in the sight of his master and was highly regarded.” It appears Naaman was highly respected and trusted by the king and the people.

In addition to this, however, the Bible records two more interesting details.

First, it says, “through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2 Kings 5: 1) In the original text, the word for “the Lord” is “Yahweh,” which is the name of the Lord.

The Bible is telling us that the God of Israel allowed thisgeneral of Aram to save his country and do great things. It must be noted that Naaman did not yet know God. He was a loyal soldier of Aram, a pagan! Yet the Bible explicitly notes that God was with him even then.

This applies to us, too. Thismeans that God may have intervened in our lives even when we didn’t know Him—when did business, conducted research, and did other worldly things as unbelievers. God was behind all our life’s successes—even when we were ignorant of Him.

Even when Naaman did not know God, God knew him, was with him, and gave him success. Even when he did not know God, Naaman had already been found by Him. This is grace.

Second, the Bible describes that Naaman was a leper: “He was a valiant soldier, but he had leprosy.” (2 Kings 5: 1)Naaman was a great soldier with a serious problem: leprosy.

The exact condition of his disease is not certain. Although the Bible says it was “leprosy,” that Naaman lived at home and went before the king suggests that his condition was a skin disease that spread all over his body, rather than an infectious leprosy. In Verse 27, it says that Gehazi’s skin became “leprous” after he asked Naaman for a compensation. This condition of Gehazi is known to be a type of skin disease, such as psoriasis.

Some of you may have experienced atopic skin disorders. Naaman’s disease was something of the sort, albeit more severe. Although noncommunicable,it frightened people at the time, making his social activities inappropriate and bringing him much pain.

To sum up, Naaman’s story took place not in Israel but in Aram, and the main actor was not an Israelite but a pagan. God was present and working in the most unlikely of places. Furthermore, God gave Naaman both victories and leprosy. In the story’s structure, Naaman’s disease serves as a tool that helps him to meet God. This made me think, ‘What is leprosy to us? What is the one thing that prevents my life from being perfect? That thing that ruined my life? That problem that torments me each night? That heavy burden that oppresses me?’

Although the Bible does not say, it appears Naaman had tried everything possible to cure his disease in country, for he did not hesitate tojourney to Israel upon hearing from a servant girl that a powerful prophet there could heal him. He knew that there was no hope, no cure in his country. His disease had robbed him of hope. It tortured him without end. Dejected, he suffered increasingly from a sense of inferiority and self-destructive thoughts.

This is the state many of us are in today. Although we live in luxury apartments furnished with high-end furniture, deep inside, we suffer from horrible, unsolvable problems like Naaman’s leprosy. Today we, knowingly and unknowingly, have troubles that we dare not tell anyone, intractable problems that might wipe out all of our achievements.

Coming to have a faith of my own—that is, a personal faith—starts with struggling with such problems and troubles. Just as Naaman came to know God trough his disease, we possess a personal faith, builda life of our own, and find a personal meaning to life through the process of struggling with our problems in God.

In this sense, Naaman’s leprosy may be a different name for the disease that we are suffering today. It may be leukemia, liver cancer, intestinal cancer, or another illness. It may be an unknown, intractable disease. It may be a painful issue that I am having with my daughter, son, or spouse. It may be a painful reality. It may be a deep trouble threatening to nullify all my achievements and successes.

It may be a secret that you have been hiding about your birth or family. It may have to do with your parent. It may be poverty. Whatever it is, the thing that continually tortures us is our “leprosy.”

If we consider our faith—that is, if we want to know the living God—we must take our disease, our “leprosy,” our problems to God. We must wrestle with Him. Therefore, leprosy served as a pathway of blessing for Naaman incoming to know God and having his own faith. Many sick people appear in the Bible. They came to God’s prophets and to Jesus to be healed. More importantly, they came to know God because of their illness. Their faith grew because of it.

If you want to knowa living God, to experience His grace, you must come to Him with your disease. You must come to Him with your pain. You must come to Him with your problems, asking for His grace.

Unfortunately, there are those “sophisticated” Christians today who refuse to do this. They come to church in their fine clothes, present their offerings, and worship solemnly. They do not cling to God, as if they don’t haveany problems in their life. They seem to be saying, “God, I’ll take care of my own ‘leprosy.’ You just receive my thanksgiving. I do have problems, deep inside, but I won’t break down in tears like those people. I’m going to worship You in style. You see, I don’t want that much from You.”

How sophisticated this sounds! But how terribly mistaken!

What if we went to the doctor and acted as such? Your doctor asks you, “How can I help you? What’s the problem? Are you feeling pain?” But you answer, “Well, I don’t have a problem, doctor. I do feel some pain here, but I’m fine, really.”

You must come to God with your “leprosy.” You must wrestle with Him with that problem. God gave us that problem because He wants to meet us in the process of solving it. God’s will resides in that problem. Therefore, our faith must start from our problems.

An objective faith is important, too. Theories on God developed by theologians also have value. However, the God I meet—that is, “my God”—is more important. My God who solves my problems is more important.

If we come to God—without solving our problems in God and without experiencing His grace through them—then my faith is not “mine”, but an impersonal, general faith. If we only “hear” about God’s healing and grace from other people’s stories, then our faith cannot be truly ours.

What is the “leprosy” that you are suffering from? What is that deep scar hidden deep within? That pain is God’s gift that will help you know Him. It may seem horrible, and others may avoid me for it, but we must see God who gave us that hurt out of His burning desire to meet us.

In the scene where Naaman meets Elisha and dips himself in the Jordan seven times, we see Naaman coming to have his own faith.

When Naaman came to Elisha, Elisha told him through a messenger that he will be healed if he washed in the Jordan seven times, which made Naaman furious. He started to go back to Aramfor this was what he thought:

“I thought that he would surely come out to me and stand and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his God, wave his hand over the spot and cure me of my leprosy. Are not Abana and Pharpar, the rivers of Damascus, better than all the waters of Israel? Couldn’t I wash in them and be cleansed?”(2 Kings 5: 11-12)

Naaman had a certain regimen in his mind. But Elisha’s prescription was entirely different from what he had expected. He thought that if washing was the answer, the waters of Abana or Pharpar would be much better than that of the Jordan.

But when he was about to leave, a servant persuaded him, “My father, if the prophet had told you to do some great thing, would you not have done it? How much more, then, when he tells you, ‘Wash and be cleansed’!”(2 Kings 5: 13)

Elisha’s prescription was too easy. Can onebe healed this way? One can only be doubtful. But since it came from a messenger of God, why don’t you give it try? Naaman was a great man in that he followed this advice. He listened to the whisper of an unimportant servant and obeyed, dipping himself in the Jordan seven times.

Heretical groups often order its followers to unconditionally follow the words of their leader. How should we interpret Naaman’s obedience to Elisha’s irrational command? Is his obedience a lesson on unconditional obedience to your pastor’s words? In the past, God spoke through prophets, including Elisha, but all such words of God are now recorded in the Bible. All these promiseshave already been given to us in the Bible.

This is what 2 Corinthians 1:20 says:

“For no matter how many promises God has made, they are ‘Yes’ in Christ. And so through him the ‘Amen’ is spoken by us to the glory of God.” (2 Corinthians 1: 20)

All God’s promises in the Bile are “Yes” in Christ. If we say “Amen” to them, we will enjoy them all. If we receive God’s promises with faith, we will see the glory of God. Elisha ordered Naaman to wash in the Jordan seven times.

Waswashing seven times a precondition for God’s healing? God is more than able to heal. He can heal us without washing. So what does the bathing mean? It doesn’t meanthat sixfailures must come before the final healing.

Let’s imagine the scene of Naaman going in and out of the water. He tries once. No change. Nothing. He tries a second time. Still no change. He tries a third time. What a waste of time. He bathes a fourth time. He regrets coming to Israel at all—when the rivers at home are better and cleaner. He dips himself in the water a fifth time. Still nothing. He loses hope. The sixth time produces no change either. He is disappointed. Will I ever be healed? But on the seventh try, he feels a change. A miracle!

“So he went down and dipped himself in the Jordan seven times, as the man of God had toldhim, and his flesh was restored and became clean like that of a young boy.” (2 Kings 5: 14)

I believe that the seven diveswere an important process of building his personal faith, a faith of his own. God wanted Naaman to have that kind of faith.

When many Israelites were dying from venomous snake bites in the wilderness of Zin, Moses and Aaron made a bronze snake, telling the Israelites that all who look at it will live. All the Israelites had to do was to look at it, but manyof them did not and died. Those who prioritized reason thought no such healing could come from merely at a bronze stick and refused to look at it. Even when they witnessed some of their fellows get well, they continued to stubbornly reject God’s remedy and died, thinking their way was correct. Even when they had no alternative, they did not listen. They refused to look at the bronze snake simply because they thought it was absurd and irrational.

We experience God’s grace when we are thoroughly humbled, when we have let go of all our pride, when we have reached a nadir wherewe can only weep. When we find no other waythan to obey, God’s amazing work begins.

To receive His grace, we must be somewhere between “fanaticism” and “absolute obedience.” If we refuse the latter because we dislike the former, we will not be able to receive His grace and miracles. We must lay ourselves down before God’s commands that are shown to us through the Bible, abandon our pride, and bring our “leprosy” to Him. God’s special gift of grace is given only to those who show absolute obedience like Naa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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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5: 9 ~ 14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성경은 나아만 장군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증언합니다.>

시각 장애인 남성과 결혼한 한 여인이 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으로 잘 자라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시각 장애인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이 모두 나서서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시각 장애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는 시각 장애인과 결혼한 두 가지 이유를 친구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남들 사는 인생이 아닌 그녀의 인생, 그녀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였습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믿음에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정말 나만의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남들이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흉내내면서 따라가지는 않은가?’ 한 여인이 시각 장애인과 결혼하기로 결심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듯이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 믿음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은 병 고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나아만 이야기입니다. 말씀에는 병 고침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요소들이 잘 갖추어져 있죠. 먼저는 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은 나아만에게 나병이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본문은 끝이 납니다.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결론이 14절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나아만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참된 예배자가 되었는지 과정을 보여 줍니다. 종인 게하시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값없는 은혜를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과정이 나아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 1절은 나아만 장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열왕기하 5장 1절, 새번역)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 이야기는 흥미로운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은 나아만이 왕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묘사합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아마도 왕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고 존경받은 장군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설명과 더불어서 성경은 두 가지 사실을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열왕기하 5장 1절 중)

조금 의아하기도 하고 뜬금없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원어 성경은 이곳에 ‘야훼 여호와’라는 단어를 넣어서 표현합니다. 즉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아람(시리아)를 구원하는 데 큰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나아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저 시리아에 충성된 장군이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명예욕에 따라, 혹은 사명감에 따라 나라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와 함께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 함께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그저 사업을 하고 연구를 하고 세상적인 일을 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관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던 때에 그를 주목하고 계셨고, 그와 함께하셔서 승리에 관여해 주셨습니다. 나아만의 세상적인 성공은 하나님께서 관여하신 결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아만이 얻은 첫 번째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요.
성경은 나아만과 관련하여 두 번째 이야기를 알려 줍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열왕기하 5장 1절 중)

나아만은 대단한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병이라는 질병입니다. 여기서 나병이라고 표현된 이 병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문둥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가 집에 있었다는 점, 왕 앞에까지도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전염이 되지 않는 나병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아마도 온몸에 퍼져 있는 피부병이었겠지요. 전염은 되지 않지만 그를 극히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7절을 보면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대가를 요구하다가 나병을 도리어 얻게 되는데, 그 역시 마른버짐 같은 피부병을 얻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토피 피부염을 앓으신 분들이 꽤 되실 텐데 그보다 더 심한 피부병이 아니었을까요? 전염성 있는 피부병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당시 피부병은 큰 두려움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나아만은 아마도 피부병으로 인해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을 듯합니다.
정리해 보면 장소는 이스라엘이 아닌 시리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을 것 같은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나아만과 함께하시며 시리아의 군대가 승리하도록 하셨습니다. 게다가 나아만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일을 시작하고 계셨고, 많은 성취를 얻도록 이끄셨습니다. 동시에 나병인 피부병까지도 허락하셨죠.

<나병이 나아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했다면, 나에게 나병과 같은 존재는 무엇입니까?>

나아만에게 나병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 매우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나병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만 없으면 모든 것이 완벽한 인생인데 우리 스스로를 망가트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나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의 소식을 듣고 선뜻 길을 나서는 모습에서 시리아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에게 나병이란 병은 희망을 줄 수 없는 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날마다 더욱더 심한 고통과 열등감, 힘든 고욕으로 몰아넣는 병이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사는 듯 보입니다. 집에 가면 좋은 가구를 들여놓고, 넓은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뜻 보면 모두가 그래 보이지요. 그러나 내면 깊이 들여다보면 나아만이 앓던 나병처럼 더럽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하나둘씩 가진 걸 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허물, 지금까지 이룬 모든 성취들을 모조리 의미 없게 만드는 것 같은 문제들, 아니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아 꺼내기조차 원치 않은 과제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신앙을 만든다’, ‘나만의 신앙을 만든다’라는 것은 이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아만이 나병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여서 하나님을 알며 나아가게 되었듯이, 나에게 주어진 나병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씨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신앙을 만들어 갑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살아나고,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아만의 나병이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의 질병일 수 있습니다. 혈액암, 간암, 대장암일 수 있고요. 병명을 알 수 없는, 치료법도 알기 어려운 불치병일 수도 있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나병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녀일 수 있고,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일 수도 있겠죠.
만일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고상한 사색을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일까?’ 세상의 이치를 따져 가며 신앙적인 점검을 해 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우주의 이치를 따지며 하나님을 규명하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신앙이 커 가기를 원하죠. 물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신앙은 우리 안에 놓인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면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데서부터 커 가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기 원하고 우리의 신앙이 보다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나병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아픔, 나의 문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나의 신앙이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따금 현대 교인들 중에 참으로 고상해 보이는, 그러나 안타까운 신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고상하게 차려입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정숙하게 예배합니다.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나병은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 주님은 제가 드리는 감사를 그저 받기만 하세요. 내면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울고 불며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나는 고상하게 당신을 믿고 싶어요.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어요. 나는 참 좋은 교인이지요.” 그러나 잘못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병원에 가서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오셨나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 무엇이 불편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아니요, 불편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저 참을 만해요.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까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관리할게요.”라고 말한다면 병원에 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나병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문제를 들고 씨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만나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 문제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나병과 같이 해결할 수 없는 큰 과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매우 중요한 길목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로부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론 신학자의 이론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조직적으로,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일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문제를 가지고 풀어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할 수 있어야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겁니다.
만약에 나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문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한 채 ‘누구는 병이 나았다더라, 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더라’는 소문만 듣는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저 일상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나병은 무엇입니까? 깊숙이 숨겨 있는 상처 덩어리는 무엇입니까?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만나시고자 마련해 놓으신 참으로 귀한 선물입니다. 보기에는 더럽고 추하고 남들이 보면 도망갈 것 같은 큰 아픔지만, 아픔을 주시면서까지 나를 만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강에 7번 몸을 씻게 합니다. 그러면 장군의 몸이 깨끗하게 된다고 말하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이 진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발길을 돌렸다고 증언합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열왕기하 5장 11~12절 중, 새번역)

나아만 자신이 생각하는 나름의 치료 과정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나와서 영접하고 아픈 부위에 손을 얹은 후에 나름대로의 특별한 행위를 통해 낫게 해 주리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단지 물에 씻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더러운 요단강보다 깨끗한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 할 때에 종을 통해 한 소리가 들립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열왕기하 5장 13절)

<하나님은 때로 주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나아만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익명의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조금 전 등장한 한 부하가 있고, 이스라엘에 잡혀 와서 나아만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종으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소녀가 있습니다(왕하 5:2). 두 사람은 하나님을 소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나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이스라엘에 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분에게 나아가면 나을 수 있다고 전해 주죠. 엘리사에게 갔다가 돌아서려는 나아만을 향해 한 부하는 나아만을 설득하며 장군의 발길을 되돌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는 돕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길에서 자칫하면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고 좌절될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자’는 생각을 할 때가 있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돌아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들려지는 소리, 그때마다 함께하는 또 다른 신앙의 목소리, 그 목소리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게 됩니다. 종의 부탁을 들은 나아만이 요단강에 7번 몸을 담궈야 하는 일 앞에 서 있습니다. 자신의 부하로부터 들려온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엘리사의 말을 따라 요단강에 7번 들어가는 순종을 보입니다.
종종 이단들이 나아만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교주의 명령에 무조건적 복종을 하라고 가르치죠. 엘리사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씀에 순종하는 나아만을 강조하면서 교주들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엘리사의 말에 복종하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교주나 목회자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과거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셨고 다른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그분의 말씀과 약속은 성경 안에 이미 가득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린도후서 1장 20절)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스”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승인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두신 약속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그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경험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7번 씻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반드시 7번 씻어야만 낫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가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아만으로 하여금 7번이나 몸을 씻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나아만이 7번 몸을 씻는 동안 사실은 6번의 실패가 존재합니다. 한 번 들어가 봅니다. 별 반응이 없습니다. 달라진 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지…’하고 두 번 들어가 봅니다. 여전히 달라진 점이 없습니다. 세 번째 들어가 봅니다. ‘이거 혹시 헛고생하는 것 아닌가? 여기가 맞는 곳인가?’ 생각하며 또 다시 들어갑니다. ‘이보다 좋은 강도 많은데 왜 하필 더러운 요단강에서 씻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다섯 번째 들어갑니다. 변화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 들어가지만 어떤 기미도 나타나지 않아 실망할 즈음, 마지막 일곱 번째에 들어갔다 나오니 변화된 자신의 몸을 봅니다.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장 14절)

저는 이 7번의 과정이 나아만 자신의 신앙을 만들어 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나만의 신앙을 가지는 일은 어렵고 힘듭니다. 여섯 번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앙하고, 믿고, 결단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들고는 이것을 보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말하죠. 쳐다만 보아도 산다고 했지만 정작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이성을 앞세우며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놋뱀을 바라보고 일어나 걸어간 사람들이 옆에 있었음에도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놋뱀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것, 이것이 인간의 미련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낮아지는 곳, 자존심과 자만심이 내세워지지 않는 곳,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합니다. 순종이 있는 그곳에, 순종이 아니고는 더 이상 방도가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우리는 오늘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께서 오신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억눌린 자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 그분께 희망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1년 11월 2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나아만 이야기” (왕하 5:9~14)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91, 54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왕하 5:9~1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1월 2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나는 정말 나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남들처럼 살고 있는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인가?” 삶을 돌아보며 갖는 깊은 질문입니다이를 신앙에 접목한다면 어떨까요? “정말 나는 나의 신앙을 갖고 있는가흉내 내고 있는 믿음은 아닌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며 이것이 정말 내가 선택한 나의 신앙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흉내 내고 있는 신앙이 아니라 나만의 신앙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 말씀은 병 고침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아람의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입니다나아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장군이었지만성경은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통해 아람을 구원케 하셨다(왕하 5:1)고 말씀합니다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데 나아만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그런 면에서 나아만에게 찾아든 병은 이미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찾고 만나도록 하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문제없는 듯 고상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면 나아만처럼 절망적이고 끊임없이 괴롭히는 병과 같은 인생의 짐들이 많습니다지금껏 이뤄온 성취들을 의미 없게 만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육중한 무게의 과제들을 한 사람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나의 신앙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이 문제들과 씨름하는 데서 출발합니다나에게 주어진 이 나병과 같은 문제를 짊어지고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의 신앙나의 의미나의 인생이 만들어진다는 말씀입니다객관적 신앙도 중요하고신학적 사색도 물론 필요합니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난 하나님입니다단지 누가 은총을 입었더라는 소문만으로 교회에 출석만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 신앙이 아닙니다단지 일상적 신앙 생활에만 머물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나병과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여러분 삶에 파고든 문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한 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고통스럽고 힘든 아픔이기도 하지만그 아픔을 주면서까지 나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그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후 나아만이 엘리사를 만나고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만들어가는 나아만을 봅니다자신의 기대와는 너무 달랐던 엘리사와의 만남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고 씻는 과정 속에 나아만에게 들었을 실망과 분노와 회의들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 일곱 번의 과정은 바로 나의 신앙나만의 신앙이 생겨나고 다져지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놋 뱀을 쳐다보면 살겠다고 했을 때기를 쓰고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면서 절대로 그것을 바라보지 않겠다고대안도 없이 그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놋 뱀을 쳐다보지도 않고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은총은 자존심자만심을 내려놓는 곳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경험합니다.

    대림절예수님께서 오십니다포로 된 자를 자유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오직 그 예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나의 나병과 같은 삶의 문제들을 내려놓고주신 말씀에 순복하며 그 믿음으로 행하고 주님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신앙으로 고백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누기

1. 나아만의 나병처럼하나님 앞에 가져와야 할 내게 놓인 나병과 같은 삶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2.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며 나 자신의 신앙을 만들어간 나아만의 경험이 내게도 있습니까?

마무리 기도

    주님내 안의 나병 같은 삶의 짐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주님과 함께 그 문제를 들고 씨름하게 하시고때론 회의가 들고아픔도 느끼지만 일곱 번 순종하고 또 순종하면서 은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나의 신앙 고백으로 올려 드리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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