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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시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에스겔 11: 14 ~ 21

김경진 목사

2020.03.01

<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는 주일입니다. >

온라인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첫 번째 날입니다.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따뜻한 느낌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오늘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우리는 온라인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팠습니다. 새벽기도회가 드려지는 시간마다 교회에 오셔서 멀찍이 예배당을 바라보시는 성도님들도 있었습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교역자들을 바라보시는 분들도 보였습니다. 그런 분들을 모시고 예배당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안타까워하셨지만, 함께 기도하며 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마다 교회에 오셨다 돌아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낮에도 교회에 오셨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예배당 주위를 여러 번 돌며 기도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면 그러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동안 예배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몰래 인터넷 예배를 드린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병상에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지 못한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여행 중이라 예배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동안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분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서, 너무 바빠서,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예배드리지 못한 분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예배당 문이 잠기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 불현듯 ‘주일 성수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고,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참 묘한 일입니다. 항상 열려 있던 예배당 문이 닫힌 것을 보면서 ‘아, 우리 소망교회 예배당도 닫힐 수 있구나. 주일에 예배드리러 못 올 수도 있구나. 도리어 내가 거부될 수도 있구나.’라는 낯선 경험을 하는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 소망교회와 많은 한국의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도 유례없는 기록으로 남겨질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0년 3월 1일, 1919년 3.1절 이후 101년째 되는 주일 이 아침입니다.

<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하십니다. >

온라인 예배를 처음 드리면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목회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려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조금은 설교의 틀을 벗어날 수 있겠지만, 우리 교우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어떤 분들은 굉장히 서운해하셨고, 또 어떤 분들은 노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중단할 수 있느냐?”, “어떻게 예배를 안 드릴 수 있느냐?”라고 하시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한국 교회에 이런 역사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도 설교하면서 “우리는 전쟁 중에도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예배를 중단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예배를 중단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셨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예배의 중단이 아닙니다. 나아가 “예배가 중단된 적이 없다.”라고 말한 데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중단한 적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 일이 중단된 적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조금은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6.25 전쟁 중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드렸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예배당에서 예배드렸던 교회 역시 몇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도 행운이었을 뿐이지, 대부분의 교회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의미는 있겠으나 자랑으로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배당이 폐쇄되거나 예배당 건물이 무너져 예배드릴 처소가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예배드렸을까요? 주일이 되면 거리에서 예배했고, 집에서 예배했으며, 피난처에서 예배했습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자리에서도 예배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는 전쟁 중에도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가 처음 예배를 드렸을 때, 처음부터 예배당에서 예배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예배드렸고,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는 카타콤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카타콤에서도 들키지 않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장소를 바꾸며 예배드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분명한 관점이었습니다. “어디에 예배가 있는가? 누가 예배할 수 있는가?”라는 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마다 예배가 있고, 교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카타콤에서든 가정에서든 상관없이 예배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 3.1절인 오늘, 우리는 신앙공동체로서 나라 사랑과 인류애에 동참합니다. >

참 놀랍게도 오늘은 3.1절 10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01년 전 3월 1일은 무슨 요일이었을까요? 1919년 3월 1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날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거리에서 민족의 자결을 외쳤습니다. 우리나라가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외쳤습니다. 그날이 3월 1일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그 주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역사는 그 내용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배당들도 폐쇄되었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많은 교우가 잡혀 들어가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3월 2일 주일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전개되었고, 더 많은 예배당이 폐쇄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UCLA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옥성득 교수님이 최근 페이스북에 이와 관련된 자료를 올리셨습니다. 1919년 3월 19일 기독신보에 들어간 광고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금번 경성으로부터 각 지방 분요한 이때에 형편에 의하여 다소간 강대가 당분간 빈 곳이 있음이 물론이고 집회 금지 중에 처한 곳도 있을 줄로 생각하여지오니 청컨대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주일은 더욱 경건히 지켜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실 줄로 알고 이에 앙고하나이다.” (1919. 3. 19. 기독신보,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3월 1일 독립 선언이 있은 후, 긴 기간 한국 교회는 박해를 받습니다. 예배당은 폐쇄되기도 하고 막히기도 했습니다. 많은 목사님이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기독신보는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주일을 더욱 경건히 지켜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기독신보가 전하는 ‘주일을 경건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폐쇄된 예배당 문을 뚫고 들어가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목사님을 감옥에서 구출해서라도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이미 계시는 바로 그곳에서 함께 모여 기도와 찬송을 하며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라는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설교할 목사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 잡혀가 홀로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에 못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찬송과 기도로, 신실한 믿음으로 주님께 기도하라는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참 공교롭게도 이번 일이 3.1절 이후의 한국 교회에서 발생했습니다. 101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01년 후인 오늘 아주 비슷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교회당을 비우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101년 전과 겹쳐질까?’ 물론 우연으로 볼 수 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919년 3.1절과 2020년 3월 1일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왜 우리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까?’라는 질문 아래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두 사건을 비교하면서 하나의 동일한 관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민족 사랑, 인류 사랑, 나라 사랑’입니다.
101년 전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탈에 저항한 운동이었습니다. 3.1절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날입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스스로 지키겠다고 세계에 천명한 날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며 민족을 자랑하면서 이 나라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날이 3월 1일, 3.1절 아침입니다.
그리고 101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와 함께하는 사회인과 시민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잠시 내려놓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주일 예배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함께 모이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안에는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귀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이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살펴보고 애국가를 부르는 정도의 나라 사랑, 혹은 기억의 의미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돌입하여 보다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을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생각과 정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로 민족 사랑, 인류 사랑, 인간 사랑을 실천하는 길로 들어서 보는 것입니다. 이 길에 우리 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 것을 저는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 예배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

물론 온라인 예배가 완전한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예배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희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일시적이며 상황적인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예배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예배당을 짓고 함께 모여 일정한 시간에 예배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때문에 예배당 차원에서의 교회 역시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배의 정체성이자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혹은 멋지게 장식되고 준비된 장소에서 예배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카타콤에서 예배드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또 어떤 사람은 강가에서 예배드렸으며, 광야에서 예배드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염병이 창궐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온라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잠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이 첫날, 나아가 앞으로도 몇 주간 계속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홀로 예배드리기보다 가족이 함께 모여, 혹은 한두 가정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면 좋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보려는 것은 전염병에 대응하는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 전염병 앞에서 간혹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염병이 오더라도 예배당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텐데 왜 걱정하느냐고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염병 때문에 예배당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믿음 없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고 우리를 잘 돌보고 계시는데 왜 믿지 못하냐고 야단치는 분들도 있습니다. 최근 보도되는 내용을 보니, 신천지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협동 목사님이신 박경수 교수님이 제게 작은 글을 하나 보내 주셨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전염병의 상황 속에서 어떤 신학적인 태도를 취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도 전염병이 발생했습니다. 특별히 종교개혁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흑사병이 발병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그때, 페스트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갔음을 여러 자료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츠빙글리가 살던 제네바에는 당시 7,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페스트로 인해 2,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츠빙글리 역시 자녀를 흑사병으로 잃었습니다. 자신도 흑사병으로 두 달이나 고생하다 겨우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 중에는 흑사병이 전파될 때 약을 받으려 하지도 않고, 흑사병에 감염된 사람들이나 장소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전염병을 전파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전염병의 숙주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악한 자가 독과 치명적인 병을 퍼뜨렸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 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조제하여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음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죽게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자신의 죽음이나 이웃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1527년 마틴 루터가 쓴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라는 소책자에 담긴 글입니다. 브레슬라우의 목사 요한 헤스로부터 ‘치명적인 흑사병이 덮칠 때 그리스도인들이 도망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받고 루터가 답한 글입니다.
루터는 이 글에서 “전염병이 발병했을 때 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염병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악한 이들로부터 시작된 일이므로 전염병을 퍼뜨리는 일은 마귀의 행동과 같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과 같다고까지 했습니다. 나아가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서 불이 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며 집 안에 있는 것이 합당한가? 물속에 빠졌는데 ‘이것이 운명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숨을 쉬지 않고 죽어 가는 것이 마땅한가?”
우리는 전염병의 위기 앞에서 두 가지 계명을 생각하며 판단하고자 합니다. 전염병이 돌면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많은 분이 생각하는 계명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라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생각하며, 예배당에 꼭 나와 예배드려야 한다고 고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계명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입니다. 예배를 지키려다가 도리어 살인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전염병의 상황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살인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어쩌면 또 다른 의미의 자살이 될 수도 있기에, 내가 다른 이에게 전염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예배의 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정확한 상황이자 대처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탄식 앞에 새롭게 갱신하며 변화되는 교회가 됩시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만약 루터가 인정하듯이 전염병이 악한 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일이라면, 또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왜 이 땅에 전염병을 일으키셨으며, 왜 그것을 방조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일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특별히 어느 한 종파, 혹은 이단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와 같은 상황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바로 나에게 주시는,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교회에 주시는, 모든 교회에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자 마지막으로 주시는 사랑의 권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2020년 이 땅에 전염병이 번지는 것을 허용하시면서 하고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이단인 신천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대형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가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내시는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오늘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를 보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한국 교회를 보시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한국 교회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시면서, 교회의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목회자의 일탈과 욕심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물질주의로 가득 찬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성공주의, 기복주의, 자기중심주의, 율법주의로 가득 찬 교회를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세상을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바르게 서지 못하는 바리새주의를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자기 생각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독단주의,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착시 현상, 교회 직분자들이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고 자기 안위와 영달만을 찾는 상황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이사야 1장 말씀이 떠오르는 오늘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1:4)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12~13)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던 신천지가 교인들의 명단을 세상에 공개할 수밖에 없게 된 이 상황을 보면서, 또 많은 교회가 하나같이 예배의 자리에서 떠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예배당을 비워야 하는 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내가 더는 너희를 예배당에서 볼 수가 없구나.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예배당에서 만날 수가 없구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탄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가라고, 이 예배당에서 당장 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예배드릴 수도 없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만을 바라보며 흩어져 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해 주십니다.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여라 (에스겔 11:16 중, 새번역)

우리가 흩어져 있는 바로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의 성소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에스겔 11:19, 새번역)

주님께서 흩어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 역사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지금 예배드리는 모든 가정마다 넘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교회가 되어 출발합시다. 새로운 교회가 됩시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다시 모아주시는 그날, 정결한 신부가 되어 주님 앞으로 나아옵시다.

For a Little While I Have Been a Sanctuary for Them

Ezekiel 11: 14-21

Since last Monday’s early morning service, Somang Church has been worshipping online. I could spot a few members outside pacing the church grounds. I so badly wanted to invite them in, but I couldn’t. They did not expect to come inside, either. They were just there, loving and missing the church. My heart went out to them. This past week I had to fight back tears many times.

Dear Church, I hope all is well. Greetings to you in the name of Christ!

Before this outbreak, I bet there were times when you wanted to skip church. Perhaps you wanted to go on a trip. Perhaps you were too busy. Or perhaps you were hospitalized and couldn’t come.

But at this very moment we literally “cannot” come to church. We feel a strange sense of guilt weighing on us because it’s like we’re not keeping the Sabbath properly. We are also realizing that our place ofworship—which has always been open to us—can actually close.

Today, many other Korean churches are worshipping online, too. This will mark a new history in Korean churches.

For many of us, including myself, who have kept their faith and the Sabbath faithfully, this is a confusing and hard experience.Some have called this a “suspension” of church services. However, this is a misnomer. You may call this situation “a temporary suspension of services held within the church building,” but if you mean to say that church services have vanished altogether by calling it “a suspension of services,” then it would be inaccurate and inappropriate.

That Korean church services “have never ceased to date” must also be interpreted from the same perspective. This statement does not imply that worship held within the church building never once stopped. During the Korean War many churches were unable to worship in churches. As people fled their homes, churches worshipped in their place of refuge, and Christians gathered and worshipped together wherever they could.

The Early Church did the same. In fact, it mostly gathered in homes. Services in the home is also worship. Faced with persecution, it went underground into catacombs and moved here and there for worship to avoid capture. For Early Christians, the place of worship was notimportant. Because they believed they themselves were a holy temple.Therefore, Saint Paul says to the Church in Corinth,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dwells in your midst?”(1 Corinthians 3: 16)

I mentioned in my last sermon that even during times of war Korean churches did not cease to worship. This does not mean that services were always held within church buildings. It means that Christians worshipped in homes, in the streets, in tents, in refugee camps, and even on battlegroundsasbullets flew all around them.

Coincidentally, today marks the 101st anniversary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 On Saturday, March 1st, 1919,33 Korean leaders read an independence manifesto, declaring freedom from Japanese colonial rule. Many Christians were imprisoned for this, and quite a few churches were shut down. This was why many Christians had no church to come to on Sunday, March 2nd.

In the days following Korean churches faced harsh persecution from their Japanese oppressors. Church buildings were shut down and pastors imprisoned, leaving some churches preacher-less.

The Christian Daily of that time, however, strongly encouraged Christians: “We must keep the Sabbath even holier now by standing firm in the faith and praising God with prayers and songs.” What did it mean by writing that Christians should keep the Sabbath holy? Did it mean that Christians had to physically force themselves into their closed churches and worship there? No. It probably meant to say that Christians must worship God with a firm faith wherever they are. This was the article’s meaning of keeping the Sabbath holy. There may not be a pastor on the pulpit. All your church members may be imprisoned, leaving you alone to worship. Still, Christians had to worship with songs, prayer, and faith.

It is a strange coincidence that today we are in a similar situation as that of our ancestors of faith on March 1st of 1919. We, too, are prevented from worshipping freely in churches. However, the two situations have one thing in common—that is, love for our people and love for humanity.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was a resistance against Japanese rule. It was born out of our love for our country and our people. It was a declaration that Koreans would determine their own fate. As churches loved and fought for the Korean people and humanity, they faced persecution and were prohibited from worshipping in churches.

What about us today? As a responsible member of this society, we gave up worshipping in our own churches out of our love for our fellow Koreans and our community.In this sense, I believe that the spirit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has evolved in a new way. Upholding this spirit is not just about singing the national anthem together and shouting,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anymore. It is to practice our love for the Korean people and humanity with a new paradigm. I think that yielding our right to worship in church amidst an outbreak of a serious infectious disease is an expression of our love for humanity.

I am not saying that online worship should be the norm or the future. It is only a temporary measure. Our ancestors of faith sought alternative but adequate places of worship and tried to gather for worship at a set time. We must not give up the identity of the church or the essence of worship: that is, we must strive to be a church that gathers in one place as a community, worshipping wholeheartedly with utmost holiness.

Yet, for a while, we can worship online. As I mentioned, we are God’s holy temple and the Spirit is with us. The Lord also said, “For where two or three gather in my name, there I will be with them.”When worshipping online, Irecommend worshiping together with your family, friends, or other families.

Second, we must reflect on how we respond to an infectious disease. Some say that worship must take place in the church building—even during a serious outbreak—because God protects us. Such people stress faith, saying that failing to attend church signifies a lack of faith. Since God is indeed almighty and great, we may think so. However, according to news reports, followers of Shincheonji had this faith, inflicting an enormous damage to our nation.

In the Middle Ages, there were people who thought like this. There still are today. They seem to think that this is faith.

Around the time of the Reformation, the Black Death broke out in Europe, killing tens of millions. In Geneva where Zwingli lived, 2,000 of its total population of 7,000 died.Zwingli lost his child to the plague, and he himself nearly succumbed to it. At the time, some people condemned using medicine and did not make any effort to avoid contaminated places or infected people. Believing that it was all God’s will, they behaved as such, as if trying to prove their faith. This only made the outbreak worse. Ironically, the “faithful” became the very hosts of the plague.

In 1527 Martin Luther, the reformist, wrotea pamphlet answering a question on whether a Christian may flee from a deadly disease, titled“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 He advised to “use medicine; take potions which can help you; fumigate house, yard, and street; shun persons and places wherever your neighbor does not need your presence or has recovered.”He also wrote that not avoiding the plague is not faith but testing God. Furthermore, he stated that spreading the disease is an act of the devil—akin to suicide—since the plague was started by evil men under God’s authority.

Therefore, we have two commandments before us: “keep the Sabbath holy” and “thou shalt not murder.”We are in a situation where, by keeping the Sabbath correctly, we may end up killing others. Therefore, to keep ourselves from murder and to prevent ourselves from spreading Covid-19 to our neighbors, we have decided to change the way we worship. This is the accurate description of our situation.In this sense, our decision to worship at home today is an act of faith aimed at preventing a further spread of the disease and an act of faith preventing us from becoming a tool for the wicked.

Lastly, we must reflect on this: If an infectious disease is the work of the wicked but, nevertheless, something God has allowed under His authority, then why did God allow this outbreak to happen? And what must we learn from this situation?

Some consider this outbreak as God’s punishment. Some point to a certain religious sect. However, I believe that God is sending us a sharp warning to us believers through this outbreak. It is His final rebuke of love toward us. What did God intend by allowing this disease to spread in this nation? I think God is grieving and sighing for the church.

We must reflect on whether the Korean church was upright in God’s eyes.Today, churches in Korea are being condemned by the world. Pastors are deviating, seeking worldly desires, and Christians are fighting within the church. Churches are pursuing materialism, success, prosperity, self-centeredness, and legalism. They condemn others, but are not holy themselves. They are trapped in dogmatic beliefs, thinking they are the truth and faith. Leaders in the church seek their own happiness and well-being, instead of lifting His name.

We must ask ourselves, “Would God be pleased?”Chapter 1 of Isaiah, a passage we have heard many times, rings truer than ever today:

“Woe to the sinful nation,a people whose guilt is great,a brood of evildoers,children given to corruption!They have forsaken the Lord;they have spurned the Holy One of Israeland turned their backs on him.” (Isaiah 1:4)

“When you come to appear before me,who has asked this of you,this trampling of my courts?Stop bringing meaningless offerings!Your incense is detestable to me.New Moons, Sabbaths and convocations—I cannot bear your worthless assemblies.” (Isaiah 1:12-13)

I consider this current situation as God’s final warning toward us—the church and believers. It is as if He is saying, ‘I cannot bear your worship and services. So, I will rather stop you from worshipping in your sanctuaries.’

Still, this passage gives us hope. By the Kebar River, God’s power falls. Some of the Israelites are taken as captives to Babylon. The Bible says that God was behind this exile. Thoseexiled could not worship God properly according to the law.However, God speaks to them through Ezekiel:

“Therefore say: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says: Although I sent them far away among the nations and scattered them among the countries, yet for a little while I have been a sanctuary for them in the countries where they have gone.’” (Ezekiel 11:16)

“I will give them an undivided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them; I will remove from them their heart of stone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Ezekiel 11:19)

In this captive-like situation, God is speaking to us: “Yet for a little while I have been a sanctuary for them.” As we worship online, I pray that this place of worship will be a sanctuary where God rests for a little while. I hope that in this place of worship our hearts of stone will become hearts of fl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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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1: 14 ~ 21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5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는 주일입니다. >

온라인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첫 번째 날입니다.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따뜻한 느낌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오늘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우리는 온라인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팠습니다. 새벽기도회가 드려지는 시간마다 교회에 오셔서 멀찍이 예배당을 바라보시는 성도님들도 있었습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교역자들을 바라보시는 분들도 보였습니다. 그런 분들을 모시고 예배당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안타까워하셨지만, 함께 기도하며 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마다 교회에 오셨다 돌아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낮에도 교회에 오셨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예배당 주위를 여러 번 돌며 기도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면 그러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동안 예배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몰래 인터넷 예배를 드린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병상에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지 못한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여행 중이라 예배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동안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분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서, 너무 바빠서,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예배드리지 못한 분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예배당 문이 잠기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 불현듯 ‘주일 성수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고,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참 묘한 일입니다. 항상 열려 있던 예배당 문이 닫힌 것을 보면서 ‘아, 우리 소망교회 예배당도 닫힐 수 있구나. 주일에 예배드리러 못 올 수도 있구나. 도리어 내가 거부될 수도 있구나.’라는 낯선 경험을 하는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 소망교회와 많은 한국의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도 유례없는 기록으로 남겨질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0년 3월 1일, 1919년 3.1절 이후 101년째 되는 주일 이 아침입니다.

<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하십니다. >

온라인 예배를 처음 드리면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목회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려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조금은 설교의 틀을 벗어날 수 있겠지만, 우리 교우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어떤 분들은 굉장히 서운해하셨고, 또 어떤 분들은 노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중단할 수 있느냐?”, “어떻게 예배를 안 드릴 수 있느냐?”라고 하시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한국 교회에 이런 역사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도 설교하면서 “우리는 전쟁 중에도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예배를 중단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예배를 중단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셨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예배의 중단이 아닙니다. 나아가 “예배가 중단된 적이 없다.”라고 말한 데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중단한 적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 일이 중단된 적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조금은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6.25 전쟁 중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드렸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예배당에서 예배드렸던 교회 역시 몇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도 행운이었을 뿐이지, 대부분의 교회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의미는 있겠으나 자랑으로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배당이 폐쇄되거나 예배당 건물이 무너져 예배드릴 처소가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예배드렸을까요? 주일이 되면 거리에서 예배했고, 집에서 예배했으며, 피난처에서 예배했습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자리에서도 예배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는 전쟁 중에도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가 처음 예배를 드렸을 때, 처음부터 예배당에서 예배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예배드렸고,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는 카타콤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카타콤에서도 들키지 않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장소를 바꾸며 예배드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분명한 관점이었습니다. “어디에 예배가 있는가? 누가 예배할 수 있는가?”라는 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마다 예배가 있고, 교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카타콤에서든 가정에서든 상관없이 예배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 3.1절인 오늘, 우리는 신앙공동체로서 나라 사랑과 인류애에 동참합니다. >

참 놀랍게도 오늘은 3.1절 10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01년 전 3월 1일은 무슨 요일이었을까요? 1919년 3월 1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날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거리에서 민족의 자결을 외쳤습니다. 우리나라가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외쳤습니다. 그날이 3월 1일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그 주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역사는 그 내용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배당들도 폐쇄되었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많은 교우가 잡혀 들어가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3월 2일 주일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전개되었고, 더 많은 예배당이 폐쇄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UCLA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옥성득 교수님이 최근 페이스북에 이와 관련된 자료를 올리셨습니다. 1919년 3월 19일 기독신보에 들어간 광고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금번 경성으로부터 각 지방 분요한 이때에 형편에 의하여 다소간 강대가 당분간 빈 곳이 있음이 물론이고 집회 금지 중에 처한 곳도 있을 줄로 생각하여지오니 청컨대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주일은 더욱 경건히 지켜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실 줄로 알고 이에 앙고하나이다.” (1919. 3. 19. 기독신보,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3월 1일 독립 선언이 있은 후, 긴 기간 한국 교회는 박해를 받습니다. 예배당은 폐쇄되기도 하고 막히기도 했습니다. 많은 목사님이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기독신보는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주일을 더욱 경건히 지켜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기독신보가 전하는 ‘주일을 경건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폐쇄된 예배당 문을 뚫고 들어가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목사님을 감옥에서 구출해서라도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이미 계시는 바로 그곳에서 함께 모여 기도와 찬송을 하며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라는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설교할 목사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 잡혀가 홀로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에 못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찬송과 기도로, 신실한 믿음으로 주님께 기도하라는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참 공교롭게도 이번 일이 3.1절 이후의 한국 교회에서 발생했습니다. 101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01년 후인 오늘 아주 비슷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교회당을 비우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101년 전과 겹쳐질까?’ 물론 우연으로 볼 수 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919년 3.1절과 2020년 3월 1일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왜 우리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까?’라는 질문 아래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두 사건을 비교하면서 하나의 동일한 관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민족 사랑, 인류 사랑, 나라 사랑’입니다.
101년 전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탈에 저항한 운동이었습니다. 3.1절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날입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스스로 지키겠다고 세계에 천명한 날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며 민족을 자랑하면서 이 나라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날이 3월 1일, 3.1절 아침입니다.
그리고 101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와 함께하는 사회인과 시민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잠시 내려놓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주일 예배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함께 모이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안에는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귀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이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살펴보고 애국가를 부르는 정도의 나라 사랑, 혹은 기억의 의미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돌입하여 보다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을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생각과 정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로 민족 사랑, 인류 사랑, 인간 사랑을 실천하는 길로 들어서 보는 것입니다. 이 길에 우리 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 것을 저는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 예배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

물론 온라인 예배가 완전한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예배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희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일시적이며 상황적인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예배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예배당을 짓고 함께 모여 일정한 시간에 예배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때문에 예배당 차원에서의 교회 역시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배의 정체성이자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혹은 멋지게 장식되고 준비된 장소에서 예배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카타콤에서 예배드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또 어떤 사람은 강가에서 예배드렸으며, 광야에서 예배드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염병이 창궐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온라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잠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이 첫날, 나아가 앞으로도 몇 주간 계속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홀로 예배드리기보다 가족이 함께 모여, 혹은 한두 가정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면 좋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보려는 것은 전염병에 대응하는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 전염병 앞에서 간혹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염병이 오더라도 예배당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텐데 왜 걱정하느냐고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염병 때문에 예배당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믿음 없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고 우리를 잘 돌보고 계시는데 왜 믿지 못하냐고 야단치는 분들도 있습니다. 최근 보도되는 내용을 보니, 신천지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협동 목사님이신 박경수 교수님이 제게 작은 글을 하나 보내 주셨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전염병의 상황 속에서 어떤 신학적인 태도를 취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도 전염병이 발생했습니다. 특별히 종교개혁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흑사병이 발병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그때, 페스트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갔음을 여러 자료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츠빙글리가 살던 제네바에는 당시 7,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페스트로 인해 2,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츠빙글리 역시 자녀를 흑사병으로 잃었습니다. 자신도 흑사병으로 두 달이나 고생하다 겨우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 중에는 흑사병이 전파될 때 약을 받으려 하지도 않고, 흑사병에 감염된 사람들이나 장소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전염병을 전파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전염병의 숙주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악한 자가 독과 치명적인 병을 퍼뜨렸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 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조제하여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음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죽게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자신의 죽음이나 이웃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1527년 마틴 루터가 쓴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라는 소책자에 담긴 글입니다. 브레슬라우의 목사 요한 헤스로부터 ‘치명적인 흑사병이 덮칠 때 그리스도인들이 도망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받고 루터가 답한 글입니다.
루터는 이 글에서 “전염병이 발병했을 때 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염병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악한 이들로부터 시작된 일이므로 전염병을 퍼뜨리는 일은 마귀의 행동과 같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과 같다고까지 했습니다. 나아가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서 불이 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며 집 안에 있는 것이 합당한가? 물속에 빠졌는데 ‘이것이 운명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숨을 쉬지 않고 죽어 가는 것이 마땅한가?”
우리는 전염병의 위기 앞에서 두 가지 계명을 생각하며 판단하고자 합니다. 전염병이 돌면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많은 분이 생각하는 계명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라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생각하며, 예배당에 꼭 나와 예배드려야 한다고 고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계명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입니다. 예배를 지키려다가 도리어 살인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전염병의 상황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살인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어쩌면 또 다른 의미의 자살이 될 수도 있기에, 내가 다른 이에게 전염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예배의 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정확한 상황이자 대처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탄식 앞에 새롭게 갱신하며 변화되는 교회가 됩시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만약 루터가 인정하듯이 전염병이 악한 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일이라면, 또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왜 이 땅에 전염병을 일으키셨으며, 왜 그것을 방조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일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특별히 어느 한 종파, 혹은 이단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와 같은 상황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바로 나에게 주시는,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교회에 주시는, 모든 교회에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자 마지막으로 주시는 사랑의 권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2020년 이 땅에 전염병이 번지는 것을 허용하시면서 하고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이단인 신천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대형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가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내시는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오늘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를 보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한국 교회를 보시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한국 교회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시면서, 교회의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목회자의 일탈과 욕심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물질주의로 가득 찬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성공주의, 기복주의, 자기중심주의, 율법주의로 가득 찬 교회를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세상을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바르게 서지 못하는 바리새주의를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자기 생각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독단주의,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착시 현상, 교회 직분자들이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고 자기 안위와 영달만을 찾는 상황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이사야 1장 말씀이 떠오르는 오늘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1:4)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12~13)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던 신천지가 교인들의 명단을 세상에 공개할 수밖에 없게 된 이 상황을 보면서, 또 많은 교회가 하나같이 예배의 자리에서 떠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예배당을 비워야 하는 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내가 더는 너희를 예배당에서 볼 수가 없구나.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예배당에서 만날 수가 없구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탄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가라고, 이 예배당에서 당장 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예배드릴 수도 없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만을 바라보며 흩어져 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해 주십니다.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여라 (에스겔 11:16 중, 새번역)

우리가 흩어져 있는 바로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의 성소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에스겔 11:19, 새번역)

주님께서 흩어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 역사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지금 예배드리는 모든 가정마다 넘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교회가 되어 출발합시다. 새로운 교회가 됩시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다시 모아주시는 그날, 정결한 신부가 되어 주님 앞으로 나아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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