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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이사야 42:1~4

김경진 목사

2024.12.22

<예수님은 오늘날과 같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12월 넷째 주입니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성탄절과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연말 행사로 바쁠 때인데, 요즘은 어쩐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계엄 선포와 대통령의 국회 탄핵 등을 경험하면서 허탈해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국가의 위상도 추락하였고 경제적인 신뢰도도 상당히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국민의 자존심도 많이 상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많이 어수선하시죠?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니 연말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우중충한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조금 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 또한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날씨가 추워서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도 상당히 춥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계속되고 있고요, 중동 전쟁의 확산을 보며 혹시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전운이 감돌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유튜브 등 여러 매체를 통해서 사실과 허위를 분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나라를 분열로 이끌어 가는 듯하기도 합니다. 평화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나라 걱정이 많을 때입니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어려운 위기를 잘 극복하며, 다시 잘 사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이러한 문제를 놓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 속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많은 그리스도인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인가 말을 해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어떤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이 위로를 받으실까요? 많은 분이 오늘날을 매우 위중한 시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생각과 사상들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유대가 로마의 치하에서 식민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로마의 디베료 황제(티베리우스 황제)가 세상을 다스리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치리하며,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예수님은 아주 잘 사는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채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식민 생활을 하던 척박한 유대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신 자리는 진공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역사적 상황 속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당시에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삶의 방향과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유대 지역의 많은 백성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정치·종교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 민족이 어려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가장 지혜로운지 서로 각기 다른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답을 서로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부류는 ‘바리새인(Pharisees)’이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사회적 문제들과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종교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룩성을 회복할 때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번영케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그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해 유대의 모든 전승과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과의 접촉을 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절기를 바르게 지키는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이중적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율법과 전승들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그들의 속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모습을 하며 거리에서는 큰 소리로 기도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거룩이 그들의 마음속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이중적인 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저 사람을 보며 거룩하지 못하다고 비난했고, 이 사람을 보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자기 자신만 신앙을 잘 지키는 양,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강하게 질타하셨죠.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자기 신앙의 틀 안에 갇힌 채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있습니다. 마치 자신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양 자랑하며 교만한 모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사두개인(Sadducee)’입니다. ‘사두개인’이라는 말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그룹을 의미합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로마 시대에 귀족 계급에 속하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정부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기득권을 누리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세의 보응이나 심판을 부정하며 심지어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 오경 외에는 어떤 경전도 인정하지 않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윤리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종교·정치·경제적인 주도권을 누리며 살아가던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죠.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어떤 정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의식도 없고, 나라 사랑의 정신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든지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에세네파(Essene)’라는 사람들입니다. 에세네파는 세상을 떠나 수도적인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에 뒤섞여 살기를 거부하며 육체노동과 금욕 생활을 하고,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만을 기다리고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정결 의식을 강조해서 매일 여러 번 정결례를 행하였고, 하루 종일 기도하기고 율법을 묵상하며 수도적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없지 않죠.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세속적인 하찮은 문제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일과 결별하고 오직 자기의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정치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도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마음의 평정과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부류는 ‘열심당(Zealot)’입니다. 열심당은 주전 6년경에 로마가 시행한 호적 명령에 반발하며 세워진 애국 무장 독립 단체에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민족적 우월주의와 선민사상을 근간으로 하며 로마로부터 나라의 해방을 목표로 살아가는 애국 독립투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습니다. 로마에 불복종하는 운동을 벌였고, ‘시카리’ 즉 ‘단검을 가진 사람들’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로마와 타협을 하거나 협력하는 이들을 암살하는 일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신앙은 애국과 하나였습니다. 애국이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죠. 특별히 신앙을 애국과 관련해서 이해하고 나라를 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의 독립과 번영이 그들에게는 강력한 신앙의 동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열심당과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이와 같이 다양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을 견주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조하며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삶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모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누구였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의 손을 들어 주셨을까요? 율법과 전승을 잘 지키는 것이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의 신앙은 자랑하고 다른 이들은 비난했던 바리새인들이었을까요? 로마의 권력에 붙어서 자신의 안위를 챙기던 현실주의자 사두개인이었을까요? 광야의 수도원에 들어가 매일 말씀 읽고 정결례를 행하며 심판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에세네파였을까요? 아니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칼을 품고 정치 일선에 나서서 투쟁하였던 열심당이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는 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혼란의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의 자세를 견제해야 하는지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유형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이 선택할 사람의 모습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말씀의 시작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 42:1)

하나님은 “내가 기뻐하는 사람, 내가 택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정의를 세우는 분’입니다. 최근에 발간된 새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보라, 나의 종이다! 내가 그를 붙들고 있다. 내가 골라 뽑은 사람이지. 내 마음에 들어. 내가 내 영을 그의 위에 두었다. 그가 정의를 민족들에게 이루어 줄 것이다.” (사 42:1, 새한글)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 내가 택한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마태복음 12장 18~20절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 42장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든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 땅에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정의를 세우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의를 행하는 모습, 하나님의 마음에 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모양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제도를 고치거나 악인들을 심판하는 것으로, 또는 어떤 정권이나 왕을 세우는 것으로 정의를 세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모습 속에 있습니다. 손이 마른 사람과 수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자리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그가 정의를 베풀고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1절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 42:1b)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을 주셨으니 그가 정의를 베풀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가 아닙니다. 어떤 제도적, 법적 정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정의, 그 지점에 예수님의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어떤 정의입니까?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얻게 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입니다. 희생을 통하여 얻은 정의입니다. 다른 이를 죽이거나 물리쳐서 얻은 정의, 어떤 사법적인 체계를 만들어서 확보한 정의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희생, 자신의 죽음으로 얻은 정의입니다.
두 번째로 2절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보아야 합니다. 그 정의는 어떠한 정의일까요?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사 42:2)

하나님이 택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는 삶의 모습은 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떠들썩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희생합니다. 비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용서합니다. 저주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랑합니다. 선동하지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합니다.
세 번째 절을 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 42:3)

우리는 누군가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짓밟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기업 문화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상한 갈대는 이미 기울어진 운명입니다. 꺼져 가는 등불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다.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살리는 것입니다.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억울한 이들의 항변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살려 내고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펼치시는 정의는 ‘살리는 정의’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입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 42:4)

주님은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고 낙담하지도 않았습니다. 꾸준하게 그 길을 갔습니다. 자기희생의 길, 자기를 내주는 길을 끊임없이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자신을 내어 줌으로 진정한 정의를 이루어 냅니다. 말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일관되게 낙담하지 않고 세상에 정의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내 마음에 들어”라고 평가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 주시는 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키시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왕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왕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지도자, 우리의 모델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따라야 할 모습은 아기 예수로 오신 연약한 모습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30여 년을 이 땅에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함께하셨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연약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왕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프랑스 지역의 ‘꼴마르’라는 곳에 ‘운터린덴 미술관’이 있습니다. 교회를 개조해서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입니다. 그 안에는 큰 제단화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 제단화의 이름은 ‘이젠하임(Isenheim) 제단화’라고 불립니다. 이 제단화는 1512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51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독일의 르네상스 종교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한쪽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가락으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분이 예수님이시다’라는 의미를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의 손 위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문구가 흐릿하게 쓰여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모습이 흥하여야 한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가리키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의 육체가 허물과 가시로 가득합니다. 더럽고 흉하고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는 이 제단화에 다른 이름을 짓는다면 이렇게 붙여 보고 싶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오늘 같은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질문에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 마음에 들어.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짓하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잠잠한 양같이 순전한 모습으로, 어린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낙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세우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 우리의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나의 아들을 보라. 내 마음에 들어. 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Behold! He Is My Chosen One

Isiah 42:1-4

Today is the fourth Sunday of December. Soon it will be Christmas and the year will come to a close. Normally people are jolly and busy in this season, but not this year.

With the declaration of martial law and the impeachment of the president, many Koreans are troubled and confused. Korea’s status and economic credibility have plummeted. Koreans’ pride has been badly hurt. It appearsthe country will not escape a global recession, and business owners are frantically trying to predict the future amidst a national crisis. They say they have never seen such a recession.

As I drove around the city last week to attend various evening events, I noticed the streets were missing that holiday atmosphere. There wasn’t a lot of traffic, and it wasn’t hard—it was almost easy, actually—to get reservations at restaurants, whichhad never been the case this time of year.

Your hearts will be heavy. Russia’ war against Ukraine continues, and conflicts in the Middle East are ongoing. For several years now, such wars with countless death tolls have been going on. We are now worried that Korea might see such a thing too.

We are living in a world without peace, an era of crisis.

Furthermore, various media outlets such as YouTube continuouslyfeed us misleading stories, making it difficult to discern fact from falsehood. Some stoke fear about the future, while some powerfully incite viewers with their political ideas. Most unfortunate is that, as ideas become extreme, national opinion becomes worryingly divided.

How can Korea overcome this difficult crisis and restore itself to a prosperous nation? Currently, this problem deeply troubles us.

Many Christians expect the church to give answers to theconfusion and crisis we are now going through. What answer will make you feel assured and happy?

ManyKoreans view thenation’s current state as an emergency and serious crisis, but, in fact, Jesus’ time also saw similar problems as diverging ideas and thoughts clashed against one another.

When Jesus came to earth,Rome ruled the Israelites in Judea. The Bible describes the era as follows. As we read in last week’s Scripture on John the Baptist’s ministry, Jesus was born during the reign of Tiberius Caesar of Rome. At the time, Pontius Pilate was governor of Judea and Herod tetrarch of Galilee.

Jesus was born when Judea was Rome’s colony. So divergent political and religious views existed among the Jews who lived in Judea at the time.

They all claimed to have the wisest answer to how the Israelites should live in theirpresent historical plight.

One of them was the Pharisees. In short, the Pharisees were a Jewish sect that believedthat in order to solve all the secular, political, and social problems, the Israelites must recover their religiosity.

The Phariseesbelieved thatJews ought to live holy lives as God’s people. They believed that when they recover that holiness, God will prosper them. To restore their sanctity, the Pharisees thought the Israelites had to keep the laws and traditions very strictly.

In short, they believed the Jewish nation could be rebuilt by strictly observing all the laws and religious traditions. But as we saw in their criticism against Jesus, they denounced“impure”people, avoided contact with unclean people, criticized others for not keeping the Sabbath, and boastedabout their religious superiority. Jesus condemned their hypocrisy.

Jesus harshly criticized the Pharisees for merely appearing to be holy, for pretending to pray, and for having only the appearance of holiness and not its power.

Such people have always existed and continue to exist even today. Many people, trapped in a religious framework of their own making, criticize other people’s faith and boast as if they are the only ones possessing the properfaith.

The second group who claimed to have the answers to Israel’s problems was the Sadducees.

The word “Sadducee” likely derived from Zadok, the high priest who served during King David’s reign. The Sadducees, belonging to the nobility, mostly consisted of priests who served in the temple. Yetthe Sadducees were realists who enjoyed the status quo by maintaining a friendly attitude toward the Roman government.

They did not believe in reward and judgement in the afterlife; nor did theybelieve in resurrection. They accepted nothing but the Five Books of Moses and enjoyed political, religious, and economic privileges.

Of course, we can see such people even today. Even in our time, there are extremely realistic people seeking only their own interest, regardless of the political situation. With absolutely no perception of history or a love for their country, they seek only their own well-being.

The third group was a community called the Essenes.

The Essenes, who lived like hermits, practicedcelibacy and left the secular world. Waiting for the end, they rejected life in a secular world, did physical labor, and practiced abstinence. John the Baptist likely belonged to this sect. The Essenes prayed and meditated all day and lived ascetic lives, as they emphasized and performed purification rituals several times a day.

Such people exist today too. They consider all the problems of this world secular and trivial, part with all secular things, and focus only on their faith life. Totally indifferent topoliticaland social issues, they concern themselves with only their own peace of mind and salvation.

Fourth, there were the Zealots.

Zealots are believed to have originated from an armed, patriotic Jewish independence group that rebelled against Rome’s order to register for a census in 6 BC. They were patriotic independence fighters who fought to liberate the Jewish nation from Rome,based on the belief that the Israelitesare a chosen, superior people.

The Zealots were highly political. They were known for their disobedience to Rome and were nicknamed Sicarii, which means“dagger men,”because they assassinated those who cooperated or compromised with Rome.

Such people exist even today. In particular, there are those who link faith to patriotism, givingeverything to their country. Their faith isstrongly motivated by national independence and prosperity.

Among these four groups, whose side was Jesus on? Whose side did God want Jesus to take?

Did Jesus take the side of the Pharisees who thought so highly of keeping the law and traditions, who discerned and criticized “sinners,” and who boasted of their faith? Or did our Lord take the side of the Sadducees, realists who ensured their own well-being by clinging to Rome’s power?

Or did He side with the Essenes who went out into the wilderness, joined a monastery, read Scripture every day, performed purification rituals, and waited for the day of judgement? Or did Jesus sympathize with the Zealots who fought on the frontlines of politics for theindependence of the Jewish nation with daggers in their hands?

If we had lived in Jesus’ time, which of the four groups do you think God would have wanted us follow? What is the life that God is truly pleased with? How must we live in these times of turmoil?

Today’s passage starts like this:

“Here is my servant, whom I uphold, my chosen one in whom I delight; I will put my Spirit on him and he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Isaiah 42:1 NIV)

The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translates this as follows:

“Here is my servant! I have made him strong. He is my chosen one; I am pleased with him. I have given him my Spirit, and he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Isaiah 42:1 CEV)

Who is the one God is pleased with? Who is the one that God has chosen? The above verse says that he will bring justice. The New Testament in Matthew 12:18-20 tells us clearly who this is.

It is Jesus Christ. Quoting the above verse from Isaiah, Matthew declares that the one God is pleased with is none other than Jesus Christ.

When Jesus warnedHis disciples not to tell others about who He is after healingmany sick people, including a man with a shriveled hand, Matthew testifies that this was done to fulfill the prophecies of Isaiah.

Then how did Jesus, the chosen one whom God is pleased with, bring justice? By studying what our Lord did, we will get a critical answer to how we must live.

First, we must deeply meditate on these words: “I have given him my Spirit, and he will bring justice to the nations.”

Jesus did not act upon His own ideas or judgement. He judged and acted with God’s Spirit. That is, He lived a life that asked God’s will. With the Spirit of God, He wished to bring God’s justice.

Then what was that justice of God? It was to die on the Cross for our sins. Justice would be brought by this act. It was a justicegained by sacrifice. This justice was not done by murder or rebellion. It was earned through the sacrifice and death of our Lord.

Second, we must meditate on the following verse:

“He will not shout or cry out, or raise his voice in the streets.”(Isaiah 42:2 NIV)

Our Lord, God’s chosen One, did not raise His voicein the streets. He was not loud. He did not boast. He was not proud.

God’s chosen one does not raise his voice. This is his way of life. Instead he sacrificeshimself. He does not criticize. He forgives. He does not curse. He loves. Neither does he incite. He does not rebel against injustice. This is how God’s chosen one lives.

Third, let’s look at another verse:

“A bruised reed he will not break, and a smoldering wick he will not snuff out. In faithfulness he will bring forth justice;”(Isaiah 42:3 NIV)

People tend to trample on others when they fall, instead of helping them up. A bruised reed is destined to break. A smoldering wick will surely go out. But God’s chosen one doesn’t break a bruised reed. Nor does he snuff out a smoldering wick. He saves. He helps others up.

This is precisely why Jesus healed so many sick people. Our Lord does not break a bruised reed or snuff out a smoldering wick. He listens to the protests of the wronged and saves them. He restores and saves the weak. The justice of our Lord is a saving justice.

Fourth, we must consider this deeply:

“he will not falter or be discouraged till he establishes justice on earth. In his law the islands will put their hope.”(Isaiah 42:4)

He does not give up because it is too hard; he is not discouraged and continues. He walks the path of self-sacrifice, the way of giving himself for us. By giving himself up, he brings justice. He pursues justice in the world, without shouting, without raising his voice, silently, without breaking a bruised reed, without snuffing out a smoldering wick, without being discouraged, and consistently. This is the one chosen by God.

These are God’s words to us, teaching us how we must live.

In the Unterlinden Museum in Colmar, France, there is a colossal altarpiece. During a trip there with newly appointed elders, I took a pictureof it.

This masterpiece is titled the Isenheim altarpiece. It was created in 1515. It is known to have been created by Matthias Grünewald, the German Renaissance painter who created religious works.

What is poignant about this altarpiece is that the figure, who appears to be John the Baptist, is holding the Bible in one hand, while pointing to crucified Jesus with his other hand.

It seems to be saying that the one the Bible is referring to is none other than Jesus Christ. But how is Jesus depicted? The Jesus that John the Baptist points to—how is He depicted?

Above John’s finger, it is written in Latin,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But how is Jesus depicted in this masterpiece? His body is covered with sores and thorns. Our crucified Lord looks dirty, ugly, and in intense pain.

If I were to give this altarpiece a name of my own, I would take it from a verse in today’s Scripture:

“Here is my servant, whom I uphold, my chosen one in whom I delight;”

How must we live in such corrupt times? In answering our question, I believe God will point His finger toour Lord’s Cross, to crucified Jesus.

And He will say, “He is my chosen one.”

That Lord came to us—like a pure, silent lamb. He came to us in the form of a small, powerless baby. He did not raise His voice. He did not break a bruised reed. He was never discouraged. He brought justice to earth.

We call Him Jesus, our Savior. We call Him our Hope.

God says to us, “Behold! He is my chosen one!”
And our Lord calls to us, “Follow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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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2:1~4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예수님은 오늘날과 같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12월 넷째 주입니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성탄절과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연말 행사로 바쁠 때인데, 요즘은 어쩐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계엄 선포와 대통령의 국회 탄핵 등을 경험하면서 허탈해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국가의 위상도 추락하였고 경제적인 신뢰도도 상당히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국민의 자존심도 많이 상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많이 어수선하시죠?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니 연말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우중충한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조금 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 또한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날씨가 추워서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도 상당히 춥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계속되고 있고요, 중동 전쟁의 확산을 보며 혹시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전운이 감돌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유튜브 등 여러 매체를 통해서 사실과 허위를 분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나라를 분열로 이끌어 가는 듯하기도 합니다. 평화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나라 걱정이 많을 때입니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어려운 위기를 잘 극복하며, 다시 잘 사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이러한 문제를 놓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 속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많은 그리스도인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인가 말을 해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어떤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이 위로를 받으실까요? 많은 분이 오늘날을 매우 위중한 시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생각과 사상들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유대가 로마의 치하에서 식민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로마의 디베료 황제(티베리우스 황제)가 세상을 다스리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치리하며,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예수님은 아주 잘 사는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채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식민 생활을 하던 척박한 유대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신 자리는 진공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역사적 상황 속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당시에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삶의 방향과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유대 지역의 많은 백성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정치·종교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 민족이 어려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가장 지혜로운지 서로 각기 다른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답을 서로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부류는 ‘바리새인(Pharisees)’이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사회적 문제들과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종교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룩성을 회복할 때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번영케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그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해 유대의 모든 전승과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과의 접촉을 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절기를 바르게 지키는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이중적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율법과 전승들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그들의 속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모습을 하며 거리에서는 큰 소리로 기도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거룩이 그들의 마음속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이중적인 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저 사람을 보며 거룩하지 못하다고 비난했고, 이 사람을 보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자기 자신만 신앙을 잘 지키는 양,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강하게 질타하셨죠.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자기 신앙의 틀 안에 갇힌 채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있습니다. 마치 자신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양 자랑하며 교만한 모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사두개인(Sadducee)’입니다. ‘사두개인’이라는 말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그룹을 의미합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로마 시대에 귀족 계급에 속하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정부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기득권을 누리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세의 보응이나 심판을 부정하며 심지어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 오경 외에는 어떤 경전도 인정하지 않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윤리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종교·정치·경제적인 주도권을 누리며 살아가던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죠.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어떤 정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의식도 없고, 나라 사랑의 정신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든지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에세네파(Essene)’라는 사람들입니다. 에세네파는 세상을 떠나 수도적인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에 뒤섞여 살기를 거부하며 육체노동과 금욕 생활을 하고,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만을 기다리고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정결 의식을 강조해서 매일 여러 번 정결례를 행하였고, 하루 종일 기도하기고 율법을 묵상하며 수도적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없지 않죠.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세속적인 하찮은 문제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일과 결별하고 오직 자기의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정치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도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마음의 평정과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부류는 ‘열심당(Zealot)’입니다. 열심당은 주전 6년경에 로마가 시행한 호적 명령에 반발하며 세워진 애국 무장 독립 단체에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민족적 우월주의와 선민사상을 근간으로 하며 로마로부터 나라의 해방을 목표로 살아가는 애국 독립투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습니다. 로마에 불복종하는 운동을 벌였고, ‘시카리’ 즉 ‘단검을 가진 사람들’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로마와 타협을 하거나 협력하는 이들을 암살하는 일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신앙은 애국과 하나였습니다. 애국이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죠. 특별히 신앙을 애국과 관련해서 이해하고 나라를 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의 독립과 번영이 그들에게는 강력한 신앙의 동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열심당과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이와 같이 다양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을 견주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조하며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삶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모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누구였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의 손을 들어 주셨을까요? 율법과 전승을 잘 지키는 것이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의 신앙은 자랑하고 다른 이들은 비난했던 바리새인들이었을까요? 로마의 권력에 붙어서 자신의 안위를 챙기던 현실주의자 사두개인이었을까요? 광야의 수도원에 들어가 매일 말씀 읽고 정결례를 행하며 심판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에세네파였을까요? 아니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칼을 품고 정치 일선에 나서서 투쟁하였던 열심당이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는 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혼란의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의 자세를 견제해야 하는지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유형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이 선택할 사람의 모습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말씀의 시작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 42:1)

하나님은 “내가 기뻐하는 사람, 내가 택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정의를 세우는 분’입니다. 최근에 발간된 새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보라, 나의 종이다! 내가 그를 붙들고 있다. 내가 골라 뽑은 사람이지. 내 마음에 들어. 내가 내 영을 그의 위에 두었다. 그가 정의를 민족들에게 이루어 줄 것이다.” (사 42:1, 새한글)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 내가 택한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마태복음 12장 18~20절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 42장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든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 땅에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정의를 세우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의를 행하는 모습, 하나님의 마음에 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모양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제도를 고치거나 악인들을 심판하는 것으로, 또는 어떤 정권이나 왕을 세우는 것으로 정의를 세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모습 속에 있습니다. 손이 마른 사람과 수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자리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그가 정의를 베풀고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1절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 42:1b)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을 주셨으니 그가 정의를 베풀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가 아닙니다. 어떤 제도적, 법적 정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정의, 그 지점에 예수님의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어떤 정의입니까?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얻게 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입니다. 희생을 통하여 얻은 정의입니다. 다른 이를 죽이거나 물리쳐서 얻은 정의, 어떤 사법적인 체계를 만들어서 확보한 정의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희생, 자신의 죽음으로 얻은 정의입니다.
두 번째로 2절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보아야 합니다. 그 정의는 어떠한 정의일까요?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사 42:2)

하나님이 택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는 삶의 모습은 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떠들썩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희생합니다. 비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용서합니다. 저주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랑합니다. 선동하지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합니다.
세 번째 절을 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 42:3)

우리는 누군가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짓밟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기업 문화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상한 갈대는 이미 기울어진 운명입니다. 꺼져 가는 등불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다.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살리는 것입니다.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억울한 이들의 항변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살려 내고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펼치시는 정의는 ‘살리는 정의’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입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 42:4)

주님은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고 낙담하지도 않았습니다. 꾸준하게 그 길을 갔습니다. 자기희생의 길, 자기를 내주는 길을 끊임없이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자신을 내어 줌으로 진정한 정의를 이루어 냅니다. 말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일관되게 낙담하지 않고 세상에 정의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내 마음에 들어”라고 평가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 주시는 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키시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왕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왕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지도자, 우리의 모델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따라야 할 모습은 아기 예수로 오신 연약한 모습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30여 년을 이 땅에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함께하셨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연약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왕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프랑스 지역의 ‘꼴마르’라는 곳에 ‘운터린덴 미술관’이 있습니다. 교회를 개조해서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입니다. 그 안에는 큰 제단화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 제단화의 이름은 ‘이젠하임(Isenheim) 제단화’라고 불립니다. 이 제단화는 1512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51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독일의 르네상스 종교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한쪽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가락으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분이 예수님이시다’라는 의미를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의 손 위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문구가 흐릿하게 쓰여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모습이 흥하여야 한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가리키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의 육체가 허물과 가시로 가득합니다. 더럽고 흉하고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는 이 제단화에 다른 이름을 짓는다면 이렇게 붙여 보고 싶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오늘 같은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질문에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 마음에 들어.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짓하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잠잠한 양같이 순전한 모습으로, 어린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낙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세우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 우리의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나의 아들을 보라. 내 마음에 들어. 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12월 22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사 42장 1~4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84장, 87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이사야 42장 1~4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12월 2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지금 우리는 평화롭지 않은 세상, 위기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사실과 허위를 분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혼란과 위기상황에 대해 교회가 어떤 답을 주면 좋을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요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오늘 우리가 겪는 비슷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생각들과 사상들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유대가 로마 치하에서 식민생활을 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치하에서 식민지로 살아가던 유대 땅에 여러 가지 정치적 종교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셨을까요? 율법과 전승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며 죄인들을 식별하고 비난하는 신앙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바리새인? 로마의 권력에 붙어서 자신의 안위를 챙기던 사두개인? 광야로 나가 수도원에 들어가 매일 말씀을 읽으며 정결례를 행하며 심판의 날만 기다리는 에세네파? 아니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칼을 품고 정치의 일선에 나서서 투쟁하는 열심당?

 

하나님은 이들 네 부류 중에서 예수님이 어디에 속해 있기를 원하셨을까요? 세상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이 택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한 마디로,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행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행동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 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고자 하셨고, 그것은 바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은 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떠들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습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습니다. 살리는 자입니다. 그리고 일으켜 세우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고 낙담하지도 않고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자기희생의 길, 자신을 내어주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여주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향해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나누기

 

  1.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무엇을 느끼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2. 어수선한 마음 가운데, 걱정과 염려가 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가 세상에 보여야 할 모습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대림절 마지막 주일, 혼탁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주님께 묻습니다. 내가 택한 사람, 이 사람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길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으로 이 땅에 정의를 이루어 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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