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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놋뱀을 부수라

열왕기하 18: 1~6

김경진 목사

2023.06.04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가 있었습니다.>

 

6월 3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아마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마는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습니다. 저로서는 월드컵 경기장 방문이 처음이었는데 경기장 모습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곳을 가득 메운 성도님들의 모습도 참으로 놀라웠고,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러 준 기독예능인들의 모습에 감동도 받았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아들인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만 명의 성도님들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이어졌는데 가슴이 정말 벅찼습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대한민국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과거 50년 전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당시 저는 구로동에서 영등포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는데, 버스가 그만 나아가질 못해서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서울교인가요? 그 다리를 통해서 여의도 쪽으로 올라가는데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함께 걸어서 올라간 기억이 있습니다. 신문지를 깔아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소풍 온 것처럼 예배를 드리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강대는 저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렸으니, 열기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이후로 한국교회는 급성장했습니다. 초대형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최측은 5일간 모인 총 인원이 320만 명 정도 된다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된 숫자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수십만의 사람이 함께하며 귀한 은혜를 경험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기념대회도 뜨겁고 은혜가 있었습니다만은 세 시간 동안 예배가 진행되면서 마음 한편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답답하다고 해야 할까요? 50년 전에는 그야말로 여의도 광장이었습니다. 그 드넓은 곳이 사람들로 가득 차서 좀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념대회는 경기장에서 모여서 그런지 처음엔 압도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딘가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앉은 곳에서 아파트가 멀리 보였는데 경기장과 아파트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 것 같습니다.

50년 전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때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이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께서 예수 믿을 사람들은 일어서라고 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고, 함께 애통해 하며 기도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구원초청이라고 하죠. 그런데 어제 예배에서는 새롭게 오신 분들을 결단하는 자리로 초청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일어서는 분들이 많치는 않았습니다. 제 눈에 한두 명 정도 일어설 뿐이었습니다. 물론 기념대회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셨으리라 생각하고 위안을 삼았습니다마는, 50년 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50년 전 여의도 광장에서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믿는 예수가 희망이다’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73년이 지나고 74년이 되었을 때, ‘엑스플로 74 전도대회’라는 또 다른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표어가 ‘나는 찾았네’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자신 있게 외치는 기독교의 자신감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번 기념대회에서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듯한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숙제를 받고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히스기야 왕 재위 시절까지 놋뱀을 향하여 분향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와는 관계없이 정해진 본문인데, 준비를 하면서 보니까 연결이 잘 되겠구나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도록 하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본문 말씀은 히스기야 왕이 재위 기간 동안에 행한 일들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선한 왕으로서 그는 아버지 아하스 왕의 잘못을 시정하고,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바르게 세우고, 남유다의 잘못된 예배 관행들 바로잡는 일을 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3~4)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아하스 재위 기간에는 이스라엘에 이방 신을 가져와서 섬기도록 명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종교를 두기도 했죠.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은 히스기야는 아버지가 장려한 산당의 제사를 모두 없애버립니다. 바알의 주상을 깨트리고, 아세라의 목상을 깨트립니다. 이와 함께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그때까지 분향하고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히스기야가 부수어 버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는 놋뱀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놋뱀은 모세와 관련된 내용 속에서 나오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생활을 하던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광야 길을 걷는 동안에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원망합니다. 먹을 것도 없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상황에 진저리가 난다고 원망한 것입니다. 원망하는 백성들을 보시며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불뱀을 풀어놓으셨습니다. 독사였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그 뱀에 물려 죽어 갔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께 간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니 불뱀들을 다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 백성들을 대신하여 모세가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해결책 하나를 주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자마다 살아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대로 놋뱀을 높이 달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살아났다는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민수기 21장입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나오는 이 사건이 모세를 기억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러한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를 가 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느보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진 곳입니다.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 모세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환송하며 이별합니다. 바로 그 느보산에 구리로 만든 큰 십자가 형태의 뱀이 상징물로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를 기억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놋뱀을 빼고는 모세를 기억할 수 없다는 의미가 상징적으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놋뱀이 히스기야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향하여 분향하는 일을 중단시키고 놋뱀을 부수었다는 기록입니다. 출애굽 시기를 주전 1,400년 경으로 환산하고 히스기야가 산 시기를 주전 700년 경으로 계산해 본다면, 약 700년 동안의 간격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약 700여 년 동안 숭상했다는 말입니다. 그 놋뱀을 히스기야가 부숩니다. 놋뱀을 가리켜 그는 ‘느후스단’이라고 불렀습니다. ‘놋조각’이라는 것이죠. “지금 너희들이 숭배하는 놋뱀은 그저 놋조각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책망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수백 년 동안 놋뱀에게 분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놋뱀을 보면서 광야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놋뱀에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아픈 이를 위해서 분향하고,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서 분향하면서 기적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놋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이런 경험은 역사에 자주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성의라는 것이 있죠. 마지막 만찬으로 사용하신 성배라는 것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찾고자 했고, 또 경배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제가 유럽의 어느 도시를 여행 중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예수님의 ‘성혈교회’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저도 들어가 보니 조그마한 유리 속에 불그스름하기도 하고, 거무스름하기도 한 물체가 살짝 보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의 성혈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체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호를 그으며 기도했고, 나오는 길에 헌금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야, 이런 장사하면 돈 정말 많이 벌겠다.’ 생각이 들었네요.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피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사실 찾았다 한들 우리에게 신비한 능력을 줄 수 있을까요?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놋뱀의 이야기에서 진짜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놋뱀을 보게 하시고, 그들을 살리신 하나님 자신이시죠. 놋뱀은 그저 하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놋뱀이 아닌 나무걸레를 만들어서 걸으라고 말씀하셨어도 하나님은 백성들을 살리셨을 것입니다. 놋뱀이냐, 은뱀이냐, 금뱀이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중요하죠. 그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도구에 관심을 가지며 매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숭배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도구에 매인 경우를 삶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특정한 기도원에 올라가야지만 은혜를 받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도원은 그저 하나님이 일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영적 경험이 보다 중요합니다. 특별한 목사님이나 영적 지도자를 따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사님을 사랑하시는 것 좋습니다. 저도 그런 사랑 많이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위험합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이 되는 경우라면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목사님이나 지도자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저도 오늘 이 자리에 말씀을 대언하지만 저의 역할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붙잡아 잠시 사용하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듯 자신을 섬기게 하며 하나님 자리에 올라서는 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놋뱀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향하여 분향합니다. 도구가 도리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만을 바라보다가 정작 살아 계신 하나님을 놓친 안타까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저는 도구와 하나님을 잘 구별할 줄 압니다. 그럼에도 제가 놋뱀을 든 이유는 과거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자 들고 있을 뿐입니다. 이 놋뱀은 그저 도구입니다. 섬기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마다 돌아가고픈 아름다운 신앙의 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현장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설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놋뱀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때의 그 기억, 그 자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모두 과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0여 년 전의 과거를 붙잡고 있습니다. 놋뱀을 붙잡습니다. 물론 소중한 기억이지만 현재는 아닙니다. 현재에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거와 같은 역동성이 사라졌습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부수며 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잡도록 이끕니다.>

 

어제 있었던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50주년 기념대회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50년 전 그날 참 좋았지. 너무도 귀했지. 큰 은혜를 받았지.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지.’ 그러나 오늘은 아닙니다. 우리 소망교회도 46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기에 물불 가리지 않으시고 신앙의 즐거움에 빠지신 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식당 봉사, 조의 봉사, 경조부, 차량부, 교육부, 찬양대 할 것 없이 봉사자들이 수없이 몰리고 힘 있게 일했던 시간들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소망교회의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자랑입니다. 그런데 과거입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부수고 그것을 ‘느후스단’ 곧 ‘놋조각’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백성들이 과거의 신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흔적을 더듬는 신앙이 아니라 산 신앙을 원했습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을 원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어떠했을까요?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치러 랍사게 등을 보냈을 때에 예루살렘이 포위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를 경험하게 되죠.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직접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15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왕하 19:15~16,19)

 

히스기야의 신앙은 현재의 신앙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이사야를 통하지도 않았습니다.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갔습니다.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병이 들었을 때도 그렇습니다. 히스기야의 병은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확정의 말씀을 이사야를 통해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당황스럽게 할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하신 그의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15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너의 눈물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시며 역사를 새롭게 써 주셨습니다. 이렇게 히스기야는 자신의 삶과 함께했습니다. 현실과 함께했습니다. 문제를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절히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 조금 강한 표현이긴 합니다. “너의 놋뱀을 부수라.” 혹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도구를 섬기고 있다면 그것을 부숩시다. 과거의 신앙, 과거의 경험에 매여 있다면 그것 또한 부수어 버리십시다. 그리고 오늘을 사십시다. 현재 나의 문제를 들고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현재의 하나님 앞으로 함께 나아가 기도하십시다.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하나님을 함께 만나십시다. 과거의 이야기, 한때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도 진정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할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전하는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드립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3~4)

Demolish Your Bronze Snake

 

2 Kings 18:1-6

 

Yesterday, on June 3, tens of thousands of Christians gathered for worship at the Seoul World Cup Stadium to commemorate the 50th anniversary of the 1973 Billy Graham Crusade in Seoulwhich started amazing things in this land.

 

Itoo attended yesterday’s event, worshiping and giving thanks to God and recalling the wonderful things God did for us 50 years ago. As it was my first visit to the Seoul World Cup Stadium, I was awed by its size, while deeply grateful for the many Christians filling the stands and the Christians artists leading the praise passionately.

 

After Pastor Franklin Graham, Billy Graham’s son, preached, everyone prayed out loud; during this prayer time I felt a deep passion stir in my heart and prayed earnestly with all the others for the Korean church and for Korea.

 

Memories of the past 50 years were stirred. I recalled how five decades ago I walked to the Billy Graham Crusade in Yeouido, taking a bus from Gurodong to Yeongdeungpo and walking across Mapo Bridge. My memory was brought back to the wide roads packed with people walking on foot all the way to Yeouido because they had been closed.

 

The atmosphere was truly intense. I can vaguely remember how throngs of people streamed endlessly into Yeouido from Gangnam and fromGangbuk. Bringing newspapers to sit on, we sat down so far from the podium that the speaker was hardly visible and chatted happily with other attendees as if it were a picnic. Going to such evangelistic crusades has now become a cherished memory.

 

After the Billy Graham Crusade, Christianity in Korea saw a great revival, and the event served as a cradle formany megachurches in Korea. During those five days a total of 3.2 Koreans gathered to listen to the American preacher. This number claimed by the hosts may be a little exaggerated; nevertheless, it is undeniable that tens of thousands filled Yeouido Square daily during the conference.

 

How many gathered at the World Cup Stadium yesterday? About 40 thousand? It appeared to be at least that. It was a truly moving and graceful commemorative event, but I also felt a bit of frustration during the 3-hour program and worship.

 

Fifty years ago, we gathered in an open square. The venue then was outdoors, open on all sides. In this seemingly endless, vast space, we sat and worshipped together. But yesterday in the World Cup Stadium I felt somewhat caged in. From where I was sitting, I could see a few apartment buildings looming over the stadium walls, but inside I felt somewhat estranged from the world outside. Fifty years ago sitting in that open space in Yeouido Square, I felt connected to the world, but in yesterday’s stadium it felt stuffy, as if it was only us in that closed space, even though our cries, prayers, and praise were very loud.

 

Five decades ago, many who came to the Crusade were people who didn’t know Christ but showed up out of curiosity. So when Billy Graham invited people to stand and to come to Christ at the end of the conference, manyindeed stood up.

 

But at yesterday’s event when the speaker made a similar invitation, I sensed that there were hardly any people whohad yet to know Christ. This was only natural because almost everyone there were longtime believers.

 

Since it was a commemorative event, it is understandable that only those who appreciated its meaning attended. I took comfort in this fact. Still, it pained me that Korean Christians today were singing their own songs and spending their own time in a fenced-in area isolated from the world, instead of celebrating with it in an open square as they did 50 years ago.

 

So while I was grateful for yesterday’s event, it also felt as if I was given a great assignment.

 

Today’s Scripture tells us about the acts of King Hezekiah during his reign. In particular, it talks about how Hezekiah, a good king loved by God, rectified the wrongs of his father King Ahaz, set the people’s faith on the right path, and corrected theperverse worship of Judah:

 

“He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just as his father David had done. He removed the high places, smashed the sacred stones and cut down the Asherah poles. He broke into pieces the bronze snake Moses had made, for up to that time the Israelites had been burning incense to it. (It was called Nehushtan.)”(2 Kings 18:3-4)

 

His father King Ahaz is recorded as an evil king. During his reign he adopted and allowed the worship of foreign idols, even making his own son pass through fire.

 

But Hezekiah did not follow in his steps but abolished worship in the high places, which had been encourage by his father, destroyed altars for Baal, and cut down Asherah poles. However one interesting fact is mentioned in this passage: the Israelites had been burning incense to the bronze snake that Moses set up even until Hezekiah’s time. And Hezekiah demolished even that bronze snake.

 

Through the Bible—Numbers, in particular—we are familiar with the bronze snake that Moses made.

 

When the Israelites were in the wilderness under the leadership of Moses, they complained to him. Wandering in the desert, they became anxious. They came to resent Moses:

 

“they spoke against God and against Moses, and said, ‘Why have you brought us up out of Egypt to die in the wilderness? There is no bread! There is no water! And we detest this miserable food!’” (Numbers 21:5)

 

God was furious at their complaints and sent venomous snakes. They were poisonous. Many Israelites were bitten and died. So they came to Moses and said:

 

“We sinned when we spoke against the Lord and against you. Pray that the Lord will take the snakes away from us.”(Numbers 21:7)

 

Then God gave Moses a solution: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Numbers 21:8)

 

So Moses made a bronze snake as God commanded and set it up on a pole. Those who looked at it lived.

 

This incident, which might be read as a passing story, seems to have had a great impact on the Israelites. The bronze snake became an essential element of the Israelite’s memory of Moses.

 

In Israel there is a place called Mount Nebo. This is where Moses parted with the people. He stayed behind at this mountain as he gazed at the promised land far away. He appointed Joshua as his successor to lead the Israelites there. At Mount Nebo today there stands a big statue of a bronze snake, just like a great cross. Visitors usually take photos in front of it.

 

This is how famous the bronze snake of Mount Nebo is. Even a monument was erectedin memory of the life of Moses. The incident of the bronze snake and the poisonous snakes was an unforgettable history to the Israelites.

 

It is this bronze snake that appears in today’s text on Hezekiah. When he saw the Israelites burning incense to it, he demolished it and banned its worship.

 

If we estimate the period of Moses’ leadership, including Israel’s exodus, to be around 1400 BC, Hezekiah’s era is guessed to be approximately 700 BC. This means that the Israelites had been burning incense to the bronze snake of Moses for 700 years.

 

The Bible’s record of Hezekiah’s destruction of the bronze snake is impressive. The Bible states that Hezekiah called it “Nehushtan.” What does Nehushstan mean? It means “a piece of bronze.” The use of this term means that the bronze snake was nothing but a piece of bronze.

 

The Israelites made bronze snakes and burned incense to them. But Hezekiah demolished them. They were mere pieces of bronze. This is what the Bible is telling us.

 

This part of Scripture reveals Hezekiah’s faith. Hezekiah did not want a dead faith. He did not what a faith that only fumbled for traces of the past. He wanted a living faith, not one of the past. He wanted a faith of the present.

 

Why did the Israelites burn incense to the bronze snake for hundreds of years? They probably took the incident of the venomous snake in the wilderness to their hearts. They would also have remembered how the bronze snake saved their lives when they were bitten by the snakes. So the bronze snake became a precious relic. Like the staffs of Moses and Aaron, it became a cherished jewel.

 

Gradually it became a holy object. As time passed, they may have come to believe it possessedsome sort of mysterious power. Accordingly, they started to burn incense to it.

 

As they burned incense, the Israelites would have prayed for the sick. Since the bronze snake had saved their ancestors from death and poisonous snake bites, they probably thought it had a power to save the dying. This is probably how the act of worshiping, and burning incense to, the bronze snake continued for centuries.

 

In our lives and in history, such things happen quite frequently. The clothes Jesus supposedly wore is called the Holy Robe. The cup He used at the Last Supper became the Holy Grail. We have seen often in history how humans discover and worship meaningful objects.

 

During a trip to Europe I happened to visit the Church of the Holy Blood of Jesus. There was a long queue at the entrance. Inside there was a small glass box containing something red. This, they said, was the “holy blood.” Visitors put money in the offering box and prayed. I thought, ‘Great business!’ as I came out.

 

Dear Church, who is the true central figure of the story of the bronze snake? It was God who made the people look at it and saved them. The bronze snake was just a tool. Even if God had told Moses to prop up a wooden mop instead of a bronze snake, anyone who looked upon it would have lived. The objectattached to the pole is not important; God who works in it is. God is important.

 

Like the Israelites who worshiped the bronze snake, we tend to look to and worship God’s tools, not God Himself.

 

Some Christiansrevisit a certain prayer house. It is because they had great spiritual experiences there. That is why they often revisit the place. But when we think about it, the prayer house is just a tool. It may be the place where we met God and experienced special things spiritually, but it is hardly the source of power.

 

Some people follow a certain pastor or a spiritual leader. It is good to love a pastor. I too want to be loved as a pastor. But going beyond that is dangerous. Pastors must never become your God. Pastors and leaders are only His tools. We may love them, but we must not worship them.

 

When people, God’s tools, are worshiped instead of God Himself, it is heresy. Almost all heresies appear to start with the worship of God, but in the end worship the person who created the cult, as if that person were God.

 

God works through pastors. He works through spiritual leaders. He works in certain prayer houses. He worked through the bronze snake.

 

But it is not the bronze snake, or some tool, or some man/woman that is important. God who works is important.

 

In Hezekiah’s time the Israelites burned incense to the bronze snake. The tool became God. The people ended up losing sight of God by looking at His tool.

 

The Israelites would not always have worshiped the bronze snake. At first, they would have considered it a mere tool. They would have praised God, who was with them, commanded them to set up a bronze snake, and saved them. But as time passed, they clung to the useless tool, forgetting the God who worked among them.

 

This is the sad reality of men.

 

Some may refute this criticism by saying, “No. I am well capable of distinguishing God from His tools. However, I just want to remember the God who was with me during a certain incident. That is why I always place the bronze snake before me—to remember that day when God was with me.”

 

Some may make such a refute confidently. They may say they often look at the bronze snake to worship God, who was with Moses, made him lift up the bronze snake, and saved the Israelites; and to remember that day.

 

Yes, it is true. We have a beautiful past faith that we would like to return to. There were overwhelming times in our history when we witnessed and experienced God Himself working among us.

 

Then what is our “the bronze snake”? It may be that beautiful experience in our past faith, the memory of that beautiful past, and the place of the past that filled us with excitement.

 

But all that has now become the past. That is the problem. We see in today’s passage the Israelites clinging to a past that existed 700 years ago. Indeed, it was a precious memory to them. However, the past is the past. It is not the present. People clinging to the pastreplay the beautiful memories and traces of their past faith. In their present, however, there is no dynamics, miracles, or amazing histories.

 

Yesterday’s conference held in commemoration of the 50th anniversary of the Billy Graham Crusade was just so. Our past was so good. Yes, it was. Amazing things happened then. But… not today.

 

Somang Church is also celebrating its 46th anniversary. Many members talk about how they lived in pure joy with faith, overcoming all trials, when Somang Church was first founded. Even now many people talk about these things. They talk about how eager everyone was back then, serving in the cafeteria, in funerals, at festive events, in the car park, in Sunday schools, in the choir, and so on. How good it was back then…Manyof our members talk about the past, reminiscing the time when the worship halls of this church were packed with people.

 

Of course,this is a proud history of Somang Church. But… it is the past.

 

What does it mean to burn incense to the bronze snake? What is its present meaning to us? We remember our amazing history and our past experiences which were full of miracles… but that power is currently absent in our present. All we do now isreminisce the past.

 

Why did Hezekiah demolish the bronze snake and call it “Nehushtan,” a mere piece of bronze? He wanted his people to look at God Himself, not at His tools. Furthermore, he wanted his people to advance to a faith of the present, not remain in that of the past.

 

Then how can we describe the faith of Hezekiah? When King Sennacherib of Assyria sent Rabshakeh to invade Judah, Jerusalem faced a crisis. Hezekiah tore his clothes, put on sackcloth, and entered the temple of God. And prayed:

“Lord, the God of Israel, enthroned between the cherubim, you alone are God over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You have made heaven and earth. Give ear, Lord, and hear; open your eyes, Lord, and see; listen to the words Sennacherib has sent to ridicule the living God.Now, Lord our God, deliver us from his hand, so that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may know that you alone, Lord, are God.”(2 Kings 19:15-16, 19)

After this prayer, Hezekiah witnessed God Himself at work.Hezekiah sought God directly instead of seeking His tool. He did not remain in the past but wrestled with God in the present. He prayed and received God’s grace.

 

This was also what he did when he got sick. Hezekiah became seriously ill. He even heard from the prophet that he would not recover. This is how the Bible describes the event:

 

“In those days Hezekiah became ill and was at the point of death. The prophet Isaiah son of Amoz went to him and said, “This is what the Lord says: Put your house in order, because you are going to die; you will not recover.” (2 Kings 20:1)

 

But what did Hezekiah do in such a situation?

 

“Hezekiah turned his face to the wall and prayed to the Lord, ‘Remember, Lord, how I have walked before you faithfully and with wholehearted devotion and have done what is good in your eyes.’ And Hezekiah wept bitterly.”(2 Kings 20:2-3)

 

And didn’t his earnest prayer move God’s heart? God changed His plans for him. This is what He says to Isaiah:

 

“Go back and tell Hezekiah, the ruler of my people,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your father David, says: I have heard your prayer and seen your tears; I will heal you. On the third day from now you will go up to the temple of the Lord. I will add fifteen years to your life. And I will deliver you and this city from the hand of the king of Assyria. I will defend this city for my sake and for the sake of my servant David.’”(2 Kings 20:5-6)

 

Hezekiah sought God directly in his reality and solved his problem.

 

Some people worshiped the bronze snake, a mere tool, remembering the incident 700 years ago; but Hezekiah didn’t. He prayed to God about his problem and his country’s problems of the present, instead of the past, which led to an amazing history.

 

Dear Church, the title of my message today is quite bold—“Demolish Your Bronze Snake.” If by any chance you are worshiping God’s tools instead of Him, demolish them. If you are clinging to the faith and experiences of the past, do away with them.

 

Let’s go to the living God who works even now and today. Let’s go to our place of prayer with today’s problems. Let’s live today with a sincere heart. Let us meet God today. Let us experience and enjoy the presence and descent of the Holy Spirit today.

 

Let us not cling to the stories of the past, to mere memories, but become men of God, believing in Him who is alive and working even now and create new histories.

 

“He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just as his father David had done. He removed the high places, smashed the sacred stones and cut down the Asherah poles. He broke into pieces the bronze snake Moses had made, for up to that time the Israelites had been burning incense to it. (It was called Nehushtan.)”(2 Kings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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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8: 1~6

1~6

1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1)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가 있었습니다.>

 

6월 3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아마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마는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습니다. 저로서는 월드컵 경기장 방문이 처음이었는데 경기장 모습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곳을 가득 메운 성도님들의 모습도 참으로 놀라웠고,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러 준 기독예능인들의 모습에 감동도 받았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아들인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만 명의 성도님들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이어졌는데 가슴이 정말 벅찼습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대한민국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과거 50년 전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당시 저는 구로동에서 영등포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는데, 버스가 그만 나아가질 못해서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서울교인가요? 그 다리를 통해서 여의도 쪽으로 올라가는데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함께 걸어서 올라간 기억이 있습니다. 신문지를 깔아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소풍 온 것처럼 예배를 드리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강대는 저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렸으니, 열기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이후로 한국교회는 급성장했습니다. 초대형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최측은 5일간 모인 총 인원이 320만 명 정도 된다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된 숫자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수십만의 사람이 함께하며 귀한 은혜를 경험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기념대회도 뜨겁고 은혜가 있었습니다만은 세 시간 동안 예배가 진행되면서 마음 한편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답답하다고 해야 할까요? 50년 전에는 그야말로 여의도 광장이었습니다. 그 드넓은 곳이 사람들로 가득 차서 좀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념대회는 경기장에서 모여서 그런지 처음엔 압도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딘가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앉은 곳에서 아파트가 멀리 보였는데 경기장과 아파트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 것 같습니다.

50년 전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때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이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께서 예수 믿을 사람들은 일어서라고 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고, 함께 애통해 하며 기도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구원초청이라고 하죠. 그런데 어제 예배에서는 새롭게 오신 분들을 결단하는 자리로 초청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일어서는 분들이 많치는 않았습니다. 제 눈에 한두 명 정도 일어설 뿐이었습니다. 물론 기념대회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셨으리라 생각하고 위안을 삼았습니다마는, 50년 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50년 전 여의도 광장에서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믿는 예수가 희망이다’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73년이 지나고 74년이 되었을 때, ‘엑스플로 74 전도대회’라는 또 다른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표어가 ‘나는 찾았네’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자신 있게 외치는 기독교의 자신감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번 기념대회에서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듯한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숙제를 받고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히스기야 왕 재위 시절까지 놋뱀을 향하여 분향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와는 관계없이 정해진 본문인데, 준비를 하면서 보니까 연결이 잘 되겠구나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도록 하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본문 말씀은 히스기야 왕이 재위 기간 동안에 행한 일들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선한 왕으로서 그는 아버지 아하스 왕의 잘못을 시정하고,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바르게 세우고, 남유다의 잘못된 예배 관행들 바로잡는 일을 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3~4)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아하스 재위 기간에는 이스라엘에 이방 신을 가져와서 섬기도록 명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종교를 두기도 했죠.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은 히스기야는 아버지가 장려한 산당의 제사를 모두 없애버립니다. 바알의 주상을 깨트리고, 아세라의 목상을 깨트립니다. 이와 함께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그때까지 분향하고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히스기야가 부수어 버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는 놋뱀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놋뱀은 모세와 관련된 내용 속에서 나오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생활을 하던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광야 길을 걷는 동안에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원망합니다. 먹을 것도 없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상황에 진저리가 난다고 원망한 것입니다. 원망하는 백성들을 보시며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불뱀을 풀어놓으셨습니다. 독사였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그 뱀에 물려 죽어 갔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께 간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니 불뱀들을 다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 백성들을 대신하여 모세가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해결책 하나를 주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자마다 살아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대로 놋뱀을 높이 달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살아났다는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민수기 21장입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나오는 이 사건이 모세를 기억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러한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를 가 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느보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진 곳입니다.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 모세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환송하며 이별합니다. 바로 그 느보산에 구리로 만든 큰 십자가 형태의 뱀이 상징물로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를 기억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놋뱀을 빼고는 모세를 기억할 수 없다는 의미가 상징적으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놋뱀이 히스기야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향하여 분향하는 일을 중단시키고 놋뱀을 부수었다는 기록입니다. 출애굽 시기를 주전 1,400년 경으로 환산하고 히스기야가 산 시기를 주전 700년 경으로 계산해 본다면, 약 700년 동안의 간격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약 700여 년 동안 숭상했다는 말입니다. 그 놋뱀을 히스기야가 부숩니다. 놋뱀을 가리켜 그는 ‘느후스단’이라고 불렀습니다. ‘놋조각’이라는 것이죠. “지금 너희들이 숭배하는 놋뱀은 그저 놋조각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책망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수백 년 동안 놋뱀에게 분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놋뱀을 보면서 광야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놋뱀에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아픈 이를 위해서 분향하고,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서 분향하면서 기적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놋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이런 경험은 역사에 자주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성의라는 것이 있죠. 마지막 만찬으로 사용하신 성배라는 것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찾고자 했고, 또 경배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제가 유럽의 어느 도시를 여행 중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예수님의 ‘성혈교회’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저도 들어가 보니 조그마한 유리 속에 불그스름하기도 하고, 거무스름하기도 한 물체가 살짝 보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의 성혈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체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호를 그으며 기도했고, 나오는 길에 헌금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야, 이런 장사하면 돈 정말 많이 벌겠다.’ 생각이 들었네요.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피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사실 찾았다 한들 우리에게 신비한 능력을 줄 수 있을까요?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놋뱀의 이야기에서 진짜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놋뱀을 보게 하시고, 그들을 살리신 하나님 자신이시죠. 놋뱀은 그저 하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놋뱀이 아닌 나무걸레를 만들어서 걸으라고 말씀하셨어도 하나님은 백성들을 살리셨을 것입니다. 놋뱀이냐, 은뱀이냐, 금뱀이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중요하죠. 그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도구에 관심을 가지며 매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숭배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도구에 매인 경우를 삶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특정한 기도원에 올라가야지만 은혜를 받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도원은 그저 하나님이 일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영적 경험이 보다 중요합니다. 특별한 목사님이나 영적 지도자를 따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사님을 사랑하시는 것 좋습니다. 저도 그런 사랑 많이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위험합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이 되는 경우라면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목사님이나 지도자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저도 오늘 이 자리에 말씀을 대언하지만 저의 역할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붙잡아 잠시 사용하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듯 자신을 섬기게 하며 하나님 자리에 올라서는 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놋뱀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향하여 분향합니다. 도구가 도리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만을 바라보다가 정작 살아 계신 하나님을 놓친 안타까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저는 도구와 하나님을 잘 구별할 줄 압니다. 그럼에도 제가 놋뱀을 든 이유는 과거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자 들고 있을 뿐입니다. 이 놋뱀은 그저 도구입니다. 섬기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마다 돌아가고픈 아름다운 신앙의 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현장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설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놋뱀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때의 그 기억, 그 자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모두 과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0여 년 전의 과거를 붙잡고 있습니다. 놋뱀을 붙잡습니다. 물론 소중한 기억이지만 현재는 아닙니다. 현재에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거와 같은 역동성이 사라졌습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부수며 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잡도록 이끕니다.>

 

어제 있었던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50주년 기념대회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50년 전 그날 참 좋았지. 너무도 귀했지. 큰 은혜를 받았지.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지.’ 그러나 오늘은 아닙니다. 우리 소망교회도 46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기에 물불 가리지 않으시고 신앙의 즐거움에 빠지신 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식당 봉사, 조의 봉사, 경조부, 차량부, 교육부, 찬양대 할 것 없이 봉사자들이 수없이 몰리고 힘 있게 일했던 시간들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소망교회의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자랑입니다. 그런데 과거입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부수고 그것을 ‘느후스단’ 곧 ‘놋조각’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백성들이 과거의 신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흔적을 더듬는 신앙이 아니라 산 신앙을 원했습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을 원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어떠했을까요?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치러 랍사게 등을 보냈을 때에 예루살렘이 포위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를 경험하게 되죠.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직접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15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왕하 19:15~16,19)

 

히스기야의 신앙은 현재의 신앙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이사야를 통하지도 않았습니다.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갔습니다.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병이 들었을 때도 그렇습니다. 히스기야의 병은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확정의 말씀을 이사야를 통해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당황스럽게 할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하신 그의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15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너의 눈물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시며 역사를 새롭게 써 주셨습니다. 이렇게 히스기야는 자신의 삶과 함께했습니다. 현실과 함께했습니다. 문제를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절히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 조금 강한 표현이긴 합니다. “너의 놋뱀을 부수라.” 혹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도구를 섬기고 있다면 그것을 부숩시다. 과거의 신앙, 과거의 경험에 매여 있다면 그것 또한 부수어 버리십시다. 그리고 오늘을 사십시다. 현재 나의 문제를 들고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현재의 하나님 앞으로 함께 나아가 기도하십시다.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하나님을 함께 만나십시다. 과거의 이야기, 한때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도 진정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할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전하는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드립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3~4)

2023년 6월 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너의 놋뱀을 부수라 (왕하18:1-6)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83장, 433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왕하 18:1-6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6월 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했을 때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도 주셨는데,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오랫동안 그들의 가슴에 새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설교의 요약

놋뱀의 이야기가 히스기야의 이야기 속에 등장합니다. 광야생활 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 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700여년 동안 놋뱀을 향하여 분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향 하여 분향한 것은 하나의 소중한 기념물이 된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팡 이, 아론의 지팡이와 같이 놋뱀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점차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것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듯 자연스럽게 이것에 대하여 분향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놋뱀에 분향 하며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세운 것은, 놋뱀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놋뱀은 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어떤 도구에 관 심을 가지고 그 도구를 숭배하는 경향이 발생했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를 보다가 정작 하나님 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사람들이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향하여 분향했던 것을 부숩니다. 이것은 단지 놋조각에 불과하다 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죽은 신앙을 원치 않았습니다. 흔 적을 더듬는 신앙을 원치 않았고, 살아있는 신앙을 원했습니다. 과거의 신앙을 원치 않았고, 현재의 신앙을 원했습니다.

 

우리에게 돌아가고픈 아름다운 신앙의 과거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설레는 가슴으 로 경험한 역사가 있습니다. “과거에 참 좋았지, 그 때 그랬어”라고 회상할 수 있어도 그것은 과거 일 뿐입니다. 과거의 경험, 과거의 놀라웠던 기적의 자리가 있었지만, 현재 그 능력이 사라졌고 기 억만 할 뿐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일까요?

 

과거의 신앙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도구를 섬기고 있다면, 그것을 부수어야 합니다. 혹시 과거의 신앙, 과거의 경험에 매어 있 다면 그것을 부수어야 합니다. 오늘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문 제를 들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신앙의 모습은 무엇이 있을까요?
2. 우리 믿음의 과거와 현재가 신앙으로 이어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함께 이야 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주님을 섬기려다 놋뱀을 섬기는 잘못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과거에 매여, 오늘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미련한 자 되지 않도록 오늘, 주님의 능력의 현장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살아있는 신앙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성령 의 교회, 성령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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