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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간에게 주님께서 진정한 쉼의 초청을 주십니다.>
쉼에 대한 욕구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육체를 가진 우리는 몸을 움직이고 사용할수록 쉼에 대한 욕구를 느낍니다. 몸을 사용하면서 소모된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싶어 합니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은 반드시 손상된 세포를 복구하기 위한 쉼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도 쉬고 싶어 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경험합니다. 또 인간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 긴장감이 계속되면 때로는 평정심을 잃기도 하고 통제력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리적으로도 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쉼에 대한 욕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실존적인 쉼의 욕구입니다. 우리는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를 묻게 됩니다. 사색하고 성찰하고 싶은 욕구, 존재의 충일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진정한 쉼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불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무심한 상태가 될 때 자유와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명상과 참선을 통해 위로와 평안,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진정한 쉼을 얻는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하루에 5번 드리는 예배인 ‘살라트’와 라마단 기간에 드리는 단식인 ‘사움’ 등의 의례를 합니다. 그들은 이런 행위들을 통해 알라에게 집중함으로써 육체적 쾌락에서 벗어나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살라트와 사움은 자신을 안식으로 이끌어 내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실천 덕목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쉼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칠까요?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쉼과 관련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일까요? 육체노동자들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무거운 짐을 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을 향한 말씀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말씀 안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숙명이 담겨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청은 모든 인류를 향한 초청입니다. 자신에게 오는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쉼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쉼을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말씀을 예수님은 왜 마태복음 11장에서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마태복음의 큰 흐름 속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모든 사역의 내용들을 제자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세례 요한은 잠시 혼란스러워하며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내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을 여러 마을에서 행하셨지만, 그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을 향하여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0)
간단히 앞의 내용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까지도 혼란스러워하며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5~26)
진정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세상의 현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와 슬기가 있다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현실이 하나님의 큰 뜻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마 11:27a)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분이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진정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7b)
예수님과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님께서 하나님 외에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시는 놀라운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 순간은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것이 감추어져 있었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로마 정부와 대항해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그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일으킬 유대의 왕 메시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참된 안식과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드러내신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진정한 쉼은 모든 것을 주님께 과감히 내어 맡길 때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앞 절에 있는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셨기에 예수님은 인간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오늘의 본문 말씀을 암송하며 집에 액자로 걸어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분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쉼은 조용한 명상이나 금식과 같은 훈련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쉼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은 우선 자기에게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평범한 말씀 같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모두 한결같이 무거운 짐들입니다. 이 짐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도 있고 과거에 우리가 저지른 실수도 있습니다. 이 무거운 짐에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쌓인 여러 가지 고난과 불안, 염려 등이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이나 결핍, 자녀에 대한 염려를 무거운 짐처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스스로 바르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도 무거운 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내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무거운 짐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가지고 와서 맡기라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이 초청에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쉬울 것 같은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지고 있는 짐을 주님께 내어놓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며 혼자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진정한 쉼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처리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쉼이 시작합니다. 짐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길 때 안식이 시작합니다. 아들의 미래와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아무것도 내가 나의 자녀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부터 우리에게 진정한 쉼이 시작합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날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믿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쉼의 첫 출발점입니다.
<나의 힘을 빼고 순종의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멜 때, 가벼워진 멍에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쉼을 얻는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마 11:29)
많은 사람이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좋아하면서도 그다음에 이어지는 ‘나의 멍에를 메라’라는 말씀에는 부담을 갖습니다. 이 말씀이 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혹독한 노동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를 메라’라는 말씀은 우리를 힘겨운 노동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과거 예수님 당시에는 소 두 마리가 함께 멍에를 지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똑같이 힘센 소가 같이 멍에를 메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힘센 소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약한 소가 멍에를 함께 메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힘센 소와 함께 멍에를 멘 연약하고 미숙한 소를 상상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면 우리는 미숙한 소가 되고, 예수님은 힘센 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우리가 멍에를 메고 힘을 내서 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센 소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멍에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고 앞서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소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만약에 힘센 소와 함께 멍에를 멘 미숙한 소가 자기 마음대로 가려고 방향을 틀고 힘을 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소는 계속 힘을 쓰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맨 그 멍에는 매우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일도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형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멍에를 진 미약한 소에게 필요한 것은 힘센 소를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를 따라 움직이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힘겨운 시간이 계속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힘센 소와 같은 예수님을 겸손하게 따라가며 호흡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어떤 노동이 아닌 즐거운 일이 됩니다. 숙련된 분과 나란히 서서 걸음 속도와 박자를 맞춥니다. 이렇게 안식은 노동의 중단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조화 속에서 함께하는 새로운 노동의 차원으로 열립니다. 이 노동은 쉽고 즐거운 일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동양화를 전공하신 미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매우 훌륭하고 유명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께 제가 사군자를 배웠습니다. 난을 그릴 때 기수와 봉안, 파봉안을 만드는 연습을 수없이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큰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게 그림을 아무리 해도 좋은 그림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그리는 학생이 얼마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하다 보면 손이 떨려서 때로는 망칠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종종 저희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오셔서 제 손을 직접 잡고 그림을 그려 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해야 하는 일은 한 가지였습니다. 제 손에서 힘을 빼는 일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 손을 잡고 그림을 그려 주시려 할 때, 제가 이 방향, 저 방향으로 힘을 쓰면 붓이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면서 결국 그림을 망치게 되곤 했습니다. 반대로 힘을 빼면 선생님이 그리시는 방향으로 붓이 나가고 정말 멋진 그림이 탄생합니다. 제 손으로 그린 그림인데 멋진 작품이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머니께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자랑하곤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손을 잡아 주신 것이죠. 제가 한 일은 힘을 뺀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이끌려서 그분이 이끄시는 방식대로 나를 맡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차게 우리를 끌고 가시기에 힘을 빼고 순종의 마음으로 따라가면 그 일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 됩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면 도리어 힘들어지고 복잡해집니다.
<진정한 쉼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배워야 할 덕목을 말씀하셨죠. 쉼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께 배워야 할 덕목은 ‘온유와 겸손’이라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이 말씀에서 우리가 쉼을 얻기 위해 가져야 할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포악한 사람,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가 따로 특별하게 배워야 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 안에 온유와 겸손이 싹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쉼을 얻는 방법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것 아닙니까? 높고 높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의 겸비함을 우리가 닮아 간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떠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처럼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상황은 항상 감사로 충만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참된 쉼을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기의 고집을 꺾고 상대방에게 모두 맞추는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합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을 잘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온전히 주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쉼은 명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쉼은 금식이나 어떠한 경건한 형식이나 훈련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참된 쉼이 있습니다. 찬송가 486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새찬송가 486장 1절)
진정한 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누리는 자유와 기쁨, 평안이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서 얻는 참된 쉼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참된 안식이 있다’라는 고백이 종교개혁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된 안식은 금식이나 면죄부, 봉사, 노동, 헌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세 시대는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던 시대였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어마어마한 헌신과 교회에 대한 봉사가 있었지만, 진정한 쉼과 안식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쉼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하겠다’라는 의지를 내려놓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전능하신 주님께 나와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에게 쉼이 시작됩니다. 나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멥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분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함께 나아갑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어느덧 아름다운 주님의 성품인 온유와 겸손을 닮아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이 안식과 쉼을 누리는 소망의 모든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I Will Give You Rest
Matthew 11:28-30
The desire for rest may be the most fundamental instinct of man.
As physical beings, the more we move and use our bodies, the more we feel the need to rest. We have a desire to recharge the energy exhausted by our bodily activities. After vigorous exercise, it’s essential to take time to rest and recover damaged cells.
Our minds also want rest. While working, we undergo stress. We also experience psychological tensions in human relationships. If these tensions continue, we may lose our composure and control. People need time to recover from the pain and psychological wounds they get from emotional labor and relationships. Rest is necessary.
But there is an even stronger desire for rest—the desire for an existential, ontological rest. We humans have an urge to pause from our busy routines to reflect on who we are, what we are living for, and what life’s most important values are. We desire to experience the fullness of our existence.
How can we experience true rest? How can we enter into true rest?
Buddhism teaches that true rest and freedom are attained by letting go of all attachments to worldly things and reaching a state of non-attachment. Meditation and repentance offer comfort and peace. According to Buddhism, controlling the mind and maintaining equanimity can give genuine rest.
In Islam, believers can free themselves from bodily pleasures and find rest by focusing on Allah, through Salat, the five daily prayers, and Sawm, fasting during Ramadan. For Muslims, Salat and Sawm are vital religious practices that guide them to peace.
Then what does Christianity teach about finding rest? How can Christians attain true rest of the soul?
Today’s passage contains the Jesus’ remarkable and famous words about this very topic, rest: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Matthew 11:28 NIV)
This statement is truly remarkable—because no one can say such a thing. Yet Jesus spoke clearly and firmly: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Matthew 11:28 NIV)
To whom is Jesus speaking these words? Are they directed at laborers physically carrying heavy burdens? No. This invitation is not only for such laborers.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refers to the fate of all humanity. It means that every human being struggles and carries heavy loads.
Therefore, Jesus’ invitation is extended to all humanity—every person—and it is a promise to give true rest to anyone who comes to Him.
Why did Jesus say these remarkable words in Matthew 11? What is the background behind His words?
First, it’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se words within the overall flow of the Gospel of Matthew.
In chapter 11, we see various people’s reactions to Jesus’ ministry. First, we see the response of John the Baptist.
From prison, John the Baptist sends his disciples to ask Jesus: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Matthew 11:3 NIV)
For a moment, John doubts Jesus.
Following this, there is the story of Jesus performing many miracles in different towns, but those towns did not repent.
Jesus rebukes Chorazin, Bethsaida, and Capernaum:
“Then Jesus began to denounce the towns in which most of his miracles had been performed, because they did not repent.” (Matthew 11:20)
In short, the people did not truly understand who Jesus is. John the Baptist doubted, and the people of Chorazin, Bethsaida, and Capernaum did not believe in Him even after witnessing His power. No one knew exactly who Jesus is. Matthew 11 clearly conveys this fact.
Thus, in this unfortunate situation where people did not recognize Jesus properly, Jesus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because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learned, and revealed them to little children. Yes, Father, for this is what you were pleased to do.” (Matthew 11:25-26 NIV)
This indicates that the sad reality of the world that does not truly know Jesus is God’s will.
Jesus continues:
“All things have been committed to me by my Father. No one knows the Son except the Father […].” (Matthew 11:27a)
This means that only God knows that Jesus received all things from the Father. In other words, only God knows who Jesus truly is. Jesus goes on to say:
“No one knows the Father except the Son and those to whom the Son chooses to reveal him.” (Matthew 11:27b)
Only Jesus and those to whom Jesus revealed Himself can know God.
After saying these things, Jesus spoke the very words of today’s passage: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Matthew 11:28)
Therefore, this verse encapsulates a critical moment when Jesus reveals who He is. When everything about Jesus was hidden and people failed to recognize who He truly is, Jesus Himself revealed His identity.
Who is Jesus? He is not the One who opposes the Roman government to free Israel. Who is Jesus? He is not the Messiah that all Jews are waiting for to rebuild a fallen nation. Who is Jesus? He is the One who gives true rest and peace to everyone burdened with heavy loads. This is the message that Matthew 11 conveys to us.
But at this point, we need to clarify one very important thing.
On what basis can Jesus say, “Come to me, and I will give you rest”?
It is because the Father has given everything to the Son, as stated in the previous verse. Only the Father knows the Son; and only Jesus and those who received a revelation through Him know the Father.
Because God has given all things to Jesus, Jesus can say to humanity, “Come to me; I will give you rest.”
So, how can we truly find rest through Jesus? Many people like today’s verse, memorize it, and even make it into a framed picture in their homes, but not many understand its true meaning.
The Bible does not say that we find rest through religious discipline such as meditation and fasting.
How then can we attain true rest through Christ?
First, Jesus tells us to come to Him if we want true rest. This advice seems all too ordinary, but in fact it is critical.
This is Jesus’ invitation to us. Jesus calls everyone on earth who are burdened with heavy loads.
Everyone carries their own burdens in life. All of these burdens are heavy.
These burdens include our guilt, past mistakes, and unresolved issues. They also encompass various hardships, anxieties, and worries accumulated along our life journey. Concerns about health are heavy burdens too. Some carry poverty as a burdensome load. Many try to appear righteous and make efforts to be good, which also becomes a heavy burden. Worries about our children and the future are also burdens.
No one lives without carrying a heavy burden. Everyone bears a heavy load.
But the Lord speaks to us: “Come to me, and I will give you rest.”
Jesus wants us, we who are burdened, to respond to His invitation. The meaning of this is clear.
Jesus is telling us to acknowledge and accept that we cannot solve these heavy burdens with our own strength and abilities. This is what it means to come to Him.
Therefore, this verse is inviting us to come to Jesus, believing that only He can solve our problems. But this task, which seems so simple, is not easy. Many people do not entrust their burdens to the Lord. They try to solve everything by themselves. They think they can do it on their own.
True rest begins when we shed the compulsive idea that we must do it ourselves. When we boldly lay down our burdens and entrust everything to the Lord, true rest finally begins.
When we let go of the idea that our children’s future must be such and such and that we must make it so, and when we give everything over to the Lord’s hands, true rest begins.
People who run businesses carry heavy burdens every day. Exchange rates fluctuate, and tariff issues make us sleepless. Acknowledge that you cannot handle all these problems on your own, and entrust them to the Lord. Believe that only Jesus can resolve your problems and go to the Lord. This is the beginning of rest.
The second step to gaining rest is to take up Jesus’ yoke:
“Take my yoke upon you […].” (Matthew 11:29a)
Many people like the words, “I will give you rest,” but feel burdened when they hear, “Take my yoke upon you.” Instead of giving us rest and peace, these words can feel like a command dragging us toward harsh labor. But Jesus’ words to take up His yoke are not meant to burden us with hard work. On the contrary, they are words of grace.
In Jesus’ time, it was common for two oxen to share a yoke. Sometimes, a strong ox would share the yoke with another equally strong ox, but, sometimes, a strong ox was tied to a weaker one.
Jesus’ words evoke the image of a strong ox yoked with a weaker and less experienced one. If we take up the yoke with Jesus, we become the weaker ox, and He becomes the strong one.
The reason our burdens become lighter is not because we work harder and better. It is because Jesus, the strong ox, bears all the weight of the yoke. Therefore, the qualities required of the weaker ox are faith and obedience.
What happens if a weak ox, yoked with a strong one, tries to do things its own way? That ox will exert efforts but will not accomplish anything properly. And its yoke will only become heavier. It will end up doing nothing and carrying an even greater load. Therefore, what it needs to do is to follow the strong ox. To do this, humility is needed. The more it tries to do things its own way stubbornly, the more it will suffer.
Therefore, what we must do when we are yoked with Jesus is not labor, but humbly follow Him and keep in step with Him.
When we do this, taking up His yoke will not be a burden but a joy.
This means standing side by side with Jesus, our skilled Lord, and learning how to follow His pace and rhythm. This makes rest not a suspension of labor, but a new kind of labor that is done in harmony with Christ. This kind of labor is easy. It is joyful.
When I was in high school, I had an art teacher who specialized in Oriental painting. I learned Oriental painting, especially the Four Gracious Plants, from this teacher.
When painting orchids, I practiced drawing the stem, the leaf, and the buds in one stroke countless times. But no matter how much I tried, my drawings were not so good. It is hard for a student to do well. Sometimes, my hand would tremble, and I would ruin my work completely.
But sometimes, my teacher would come and gently take my hand while I was drawing. In those moments, all I had to do was relax my grip and let my teacher guide my brush.
If I tried to move my hand while my teacher’s hand was on mine, the brush would only move this way and that and ruin the drawing. But if I loosened my grip, the brush would follow the direction my teacher was guiding it, and a beautiful picture would emerge. Though my hand was on the brush, drawing took no effort at all, since I had entrusted the drawing to my teacher who was holding my hand.
Isn’t this what Jesus means by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This will be the meaning of His command to “take up my yoke and learn from me.” It means to entrust ourselves to Him and to follow His ways, being led by His words. This requires letting go of control. We must follow Him with an obedient heart. When we try to do things our way, it only makes things harder.
Third, Jesus tells us to learn from Him. There are qualities we must learn from Him. The virtues we must learn from our Lord to find rest are humility and gentleness: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Matthew 11:29)
From this, we understand that we must possess certain attributes in order to gain rest.
Doesn’t this mean that proud people can never enjoy rest? Doesn’t it mean that vicious and angry people can never have rest?
When we take up the yoke with Jesus and follow the path He leads us to, we will naturally develop the qualities of gentleness and humility. This is how we receive rest through Jesus Christ.
Our rest is not obtained through meditation. It is not gained through fasting or endless religious rituals.
Our rest is only given through Jesus Christ. True rest is a gift from our Lord Jesus Christ.
The hymn “My soul in sad exile” sings:
“My soul in sad exile was out on life’s sea,
So burdened with sin, and distressed,
Till I heard a sweet voice saying, ‘Make Me your choice,’
And I entered the haven of rest.
I’ve anchored my soul in the haven of rest,
I’ll sail the wide seas no more;
The tempest may sweep o’er the wild stormy deep,
In Jesus I’m safe evermore.”
True rest is found in Jesus Christ. The freedom, joy, and peace that we share with Him—that is true rest. It is the genuine rest the world does not know and cannot give.
Today is Reformation Sunday. Our confession that true rest is in Jesus Christ—isn’t this the very spirit of the Reformation? True rest is not given through fasting, indulgences, service, labor, or offerings. The Middle Ages were filled with the obsession that we must do something to attain true rest. In that era, true rest was not attained, although there was much dedication and sacrifice.
Even today, the same is true. Dear brothers and sisters, do you want to find true rest? Ture rest begins when we surrender our will to do things on our own and entrust everything to our Lord Almighty. Lay all your burdens before Him. Then take up the yoke with Jesus and follow the path He leads you to, walking in step with Him. In doing so, you will find yourself becoming more like Him—humble and gentle. And true peace will fill your hearts.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간에게 주님께서 진정한 쉼의 초청을 주십니다.>
쉼에 대한 욕구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육체를 가진 우리는 몸을 움직이고 사용할수록 쉼에 대한 욕구를 느낍니다. 몸을 사용하면서 소모된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싶어 합니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은 반드시 손상된 세포를 복구하기 위한 쉼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도 쉬고 싶어 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경험합니다. 또 인간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 긴장감이 계속되면 때로는 평정심을 잃기도 하고 통제력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리적으로도 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쉼에 대한 욕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실존적인 쉼의 욕구입니다. 우리는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를 묻게 됩니다. 사색하고 성찰하고 싶은 욕구, 존재의 충일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진정한 쉼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불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무심한 상태가 될 때 자유와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명상과 참선을 통해 위로와 평안,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진정한 쉼을 얻는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하루에 5번 드리는 예배인 ‘살라트’와 라마단 기간에 드리는 단식인 ‘사움’ 등의 의례를 합니다. 그들은 이런 행위들을 통해 알라에게 집중함으로써 육체적 쾌락에서 벗어나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살라트와 사움은 자신을 안식으로 이끌어 내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실천 덕목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쉼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칠까요?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쉼과 관련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일까요? 육체노동자들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무거운 짐을 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을 향한 말씀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말씀 안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숙명이 담겨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청은 모든 인류를 향한 초청입니다. 자신에게 오는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쉼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쉼을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말씀을 예수님은 왜 마태복음 11장에서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마태복음의 큰 흐름 속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모든 사역의 내용들을 제자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세례 요한은 잠시 혼란스러워하며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내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을 여러 마을에서 행하셨지만, 그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을 향하여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0)
간단히 앞의 내용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까지도 혼란스러워하며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5~26)
진정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세상의 현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와 슬기가 있다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현실이 하나님의 큰 뜻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마 11:27a)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분이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진정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7b)
예수님과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님께서 하나님 외에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시는 놀라운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 순간은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것이 감추어져 있었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로마 정부와 대항해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그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일으킬 유대의 왕 메시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참된 안식과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드러내신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진정한 쉼은 모든 것을 주님께 과감히 내어 맡길 때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앞 절에 있는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셨기에 예수님은 인간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오늘의 본문 말씀을 암송하며 집에 액자로 걸어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분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쉼은 조용한 명상이나 금식과 같은 훈련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쉼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은 우선 자기에게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평범한 말씀 같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모두 한결같이 무거운 짐들입니다. 이 짐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도 있고 과거에 우리가 저지른 실수도 있습니다. 이 무거운 짐에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쌓인 여러 가지 고난과 불안, 염려 등이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이나 결핍, 자녀에 대한 염려를 무거운 짐처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스스로 바르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도 무거운 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내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무거운 짐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가지고 와서 맡기라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이 초청에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쉬울 것 같은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지고 있는 짐을 주님께 내어놓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며 혼자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진정한 쉼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처리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쉼이 시작합니다. 짐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길 때 안식이 시작합니다. 아들의 미래와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아무것도 내가 나의 자녀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부터 우리에게 진정한 쉼이 시작합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날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믿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쉼의 첫 출발점입니다.
<나의 힘을 빼고 순종의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멜 때, 가벼워진 멍에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쉼을 얻는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마 11:29)
많은 사람이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좋아하면서도 그다음에 이어지는 ‘나의 멍에를 메라’라는 말씀에는 부담을 갖습니다. 이 말씀이 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혹독한 노동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를 메라’라는 말씀은 우리를 힘겨운 노동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과거 예수님 당시에는 소 두 마리가 함께 멍에를 지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똑같이 힘센 소가 같이 멍에를 메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힘센 소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약한 소가 멍에를 함께 메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힘센 소와 함께 멍에를 멘 연약하고 미숙한 소를 상상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면 우리는 미숙한 소가 되고, 예수님은 힘센 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우리가 멍에를 메고 힘을 내서 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센 소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멍에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고 앞서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소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만약에 힘센 소와 함께 멍에를 멘 미숙한 소가 자기 마음대로 가려고 방향을 틀고 힘을 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소는 계속 힘을 쓰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맨 그 멍에는 매우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일도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형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멍에를 진 미약한 소에게 필요한 것은 힘센 소를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를 따라 움직이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힘겨운 시간이 계속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힘센 소와 같은 예수님을 겸손하게 따라가며 호흡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어떤 노동이 아닌 즐거운 일이 됩니다. 숙련된 분과 나란히 서서 걸음 속도와 박자를 맞춥니다. 이렇게 안식은 노동의 중단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조화 속에서 함께하는 새로운 노동의 차원으로 열립니다. 이 노동은 쉽고 즐거운 일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동양화를 전공하신 미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매우 훌륭하고 유명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께 제가 사군자를 배웠습니다. 난을 그릴 때 기수와 봉안, 파봉안을 만드는 연습을 수없이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큰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게 그림을 아무리 해도 좋은 그림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그리는 학생이 얼마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하다 보면 손이 떨려서 때로는 망칠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종종 저희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오셔서 제 손을 직접 잡고 그림을 그려 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해야 하는 일은 한 가지였습니다. 제 손에서 힘을 빼는 일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 손을 잡고 그림을 그려 주시려 할 때, 제가 이 방향, 저 방향으로 힘을 쓰면 붓이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면서 결국 그림을 망치게 되곤 했습니다. 반대로 힘을 빼면 선생님이 그리시는 방향으로 붓이 나가고 정말 멋진 그림이 탄생합니다. 제 손으로 그린 그림인데 멋진 작품이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머니께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자랑하곤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손을 잡아 주신 것이죠. 제가 한 일은 힘을 뺀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이끌려서 그분이 이끄시는 방식대로 나를 맡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차게 우리를 끌고 가시기에 힘을 빼고 순종의 마음으로 따라가면 그 일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 됩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면 도리어 힘들어지고 복잡해집니다.
<진정한 쉼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배워야 할 덕목을 말씀하셨죠. 쉼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께 배워야 할 덕목은 ‘온유와 겸손’이라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이 말씀에서 우리가 쉼을 얻기 위해 가져야 할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포악한 사람,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가 따로 특별하게 배워야 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 안에 온유와 겸손이 싹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쉼을 얻는 방법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것 아닙니까? 높고 높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의 겸비함을 우리가 닮아 간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떠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처럼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상황은 항상 감사로 충만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참된 쉼을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기의 고집을 꺾고 상대방에게 모두 맞추는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합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을 잘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온전히 주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쉼은 명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쉼은 금식이나 어떠한 경건한 형식이나 훈련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참된 쉼이 있습니다. 찬송가 486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새찬송가 486장 1절)
진정한 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누리는 자유와 기쁨, 평안이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서 얻는 참된 쉼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참된 안식이 있다’라는 고백이 종교개혁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된 안식은 금식이나 면죄부, 봉사, 노동, 헌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세 시대는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던 시대였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어마어마한 헌신과 교회에 대한 봉사가 있었지만, 진정한 쉼과 안식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쉼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하겠다’라는 의지를 내려놓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전능하신 주님께 나와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에게 쉼이 시작됩니다. 나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멥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분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함께 나아갑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어느덧 아름다운 주님의 성품인 온유와 겸손을 닮아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이 안식과 쉼을 누리는 소망의 모든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30)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51, 486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요즘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짐은 무엇입니까?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설교의 요약>
쉼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육체적 쉼, 정신적 평안도 필요하지만, 더 강력한 것은 실존적 쉼의 욕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성찰하며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불교는 무심을, 이슬람은 예배와 단식을 통해 쉼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1장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세례요한도 의심했고,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도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과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는 이 무거운 짐을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쉼은 “내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힘센 소와 함께 멍에를 멘 미숙한 소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힘을 빼고 예수님을 따라 호흡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힘을 빼고 주님께 맡길 때, 그분이 인도하시는 방향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낮추는 것입니다. 낮아질수록 모든 것이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힘을 빼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참된 안식은 금식이나 면죄부나 봉사나 헌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쉼을 얻으려면 “내가 하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전능하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나의 모든 짐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말씀의 길을 따라 호흡을 맞추며 나아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어느덧 겸손과 온유함을 닮아가게 되고, 참된 평안이 마음에 가득할 것입니다. 참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나누기>
1. 내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붙들고 있는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주님께 내려놓고 맡기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2.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성품인 겸손과 온유함을 배우며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희망으로 붙잡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참된 쉼이 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 쉼과 안식을 얻고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 종교개혁의 날에 우리가 진정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