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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연못은 수많은 병자들로 가득 넘쳐났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던 신념 하나가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물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에 모든 걸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베데스다 못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움직이는 연못을 보는 것이었고, 또 다른 희망이 있다면 그 물 속에 달려든 첫 번째 사람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징어게임을 연상시키는 동네가 베데스다 연못 주변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승자가 되는 꿈을 꾸며 승자가 되기 위해 천사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게임에서 번번이 패자가 되어 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던 병자로 우리는 그가 정확히 몇 살 때부터 병을 앓았는지는 모릅니다. 또 그가 언제부터 베데스가 못가에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38년이라는 숫자를 통해 말을 걸어옵니다. 여러분, 38년이라는 숫자는 어떤 숫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방황하며 유리하던 고통의 시간이었죠. 신명기 2장 14절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신명기 2장 14절 중)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후에 그곳을 떠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2년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는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를 떨어트리죠.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시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가데스 바네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38년 동안 방랑의 시간을 보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질 못하고 형벌과 같이 오랜 시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38년이라는 긴 기다림의 시간을 베데스다 병자 역시 경험하며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38년은 고통의 시간이자 기다림의 시간이며, 동시에 형벌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살아나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곳에 다섯 개의 행각 즉 주랑이 있었는데, 물의 움직임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던 사람들로 가득 넘쳤다고 증언합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요한복음 5장 3절, 새번역)
소개되는 환자들의 면면이 사실은 가관입니다.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과연 이들은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첫 번째로 뛰어들어 갈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들 가운데 눈먼 사람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눈먼 사람이 어떻게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간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물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한들 다리 저는 사람들이 재빠르게 연못 속으로 달려갈 수 있었겠습니까? 개역성경에는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던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혈기 많은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새번역은 중풍병자로 번역합니다. 말 그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물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38년 된 병자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병에 걸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를 찾으셨을 때에 이미 누워 있었고, 병이 오래된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옮겨 주지 않으면 연못에 들어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중풍병을 앓고 있지는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처럼 베데스다 못가에 머물던 수많은 병자들에게 연못의 전설은 희망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희망을 이룰 수는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베데스다의 전설은 그곳에 살던 눈먼 자, 저는 자, 중풍병자들을 이미 패자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전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을까? 일어날 수도 있었고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쩌면 누워 있는 사람들, 저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에게 전설은 그저 가혹한 희망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을 보면서 저는 전설 하나 붙잡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움직이는 물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나을 것이라는 신념이 베데스다의 소망이었듯이, 우리도 어쩌면 비슷한 전설이나 신념을 소망으로 붙잡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부분입니다.
부자가 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전설, 아름답고 예뻐지기만 한다면 어떤 일도 해내며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베데스다의 새로운 전설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면 불행하게 하는 문제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기업을 얼마나 크게 만들어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큰 권력을 가져야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얼마만큼의 인기를 누려야지만 우리 스스로는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물이 동할 때 물 속으로 들어가면 낫는다는 베데스다의 전설은 그곳만의 전설은 아닌 듯싶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전설 하나쯤은 있을 법합니다. 우리는 그 전설을 도리어 진실로 믿으며 무한 경쟁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눈먼 자, 저는 자, 중풍병자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첨예한 경쟁의 자리에 서서 오롯이 한 가지 희망만을 붙잡은 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전설만이 희망이던 베데스다 연못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고는 질문하십니다.>
전설을 희망으로 삼으며 실현 불가능한 일을 기대하고 살아가던 베데스다에 예수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반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은 누워 있던 병자를 보시고는 그가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마디를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장 6절 중)
그러자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한복음 5장 7절)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병자의 말속에는 큰 원망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는 낫고자 하는 열망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이 크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낫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시간이 흐르고 희망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면서 사람들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이곳에서 버젓이 살아남아 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원망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한탄을 함께 듣습니다. ‘나도 아버지 잘 만나기만 했다면 승리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하며 절규하는 소리가 병자의 음성 가운데 함께 들립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그는 즉시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 속에 가득 들어 있는 원망과 분노를 내뱉습니다.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 자신을 버린 가족들, 병에 걸려 38년 동안이나 고생하던 과거의 모든 순간이 주마등같이 스쳤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앞에서 과거에 대한 모든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병자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은 놀랍도록 명쾌하고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분명하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죠.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네가 낫기를 원하고 있었지?”하고 물으시며, 병자에게 가장 절대적이며 중요한 소원을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의 소원을 상기시켜 주신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베데스다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던 이유가 무엇이냐, 물이 움직일 때에 빨리 달려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원인이 무엇이었느냐?”
그런데 병자의 소원은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낫기를 원했죠. 낫는 일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데스다에 오랜 시간 있으면서 그는 전설에 매이고 말았습니다. 물이 동할 때를 보고 제일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낫고 싶다는 소원보다 전설이 그를 더욱 압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정신에 압도되어 무엇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지 잃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권력을 얻어야 한다고, 인기를 얻어야 한다고, 아름답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도와주는 이가 없다고 원망하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지 않니? 네가 정말 평안하기를 원하고 있지 않니?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평안을 얻기 위해서 돈을 벌고자 하죠.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가 소원하는 바는 평안이요 행복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데스다 병자는 본질을 묻고 계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냅니다. 예수님께 간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신앙 고백도 하지 않죠. 예수님이 자신을 낫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은 예수님의 두 번째 병 고침의 사역에 해당합니다. 이 사건 앞에는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다가와 요청하며 고백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말씀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4장 47절)
<예수님의 질문에 원망을 쏟은 병자를 향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나와서 고쳐 달라고 간청했지만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도, 고쳐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환경만을 탓하며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원망을 표출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향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신앙 고백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고쳐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는 그를 도와주셨을까요? 아마도 병자의 마음속 깊은 곳의 절규를 보신 것 같습니다. 병자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것이죠. 얼마나 맺힌 한이 많았겠습니까? 친구들에게 얻어맞은 한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기면서 “엄마, 쟤가 나를 때렸어.”라고 고자질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동안 감추어 둔 수많은 억울함과 슬픔을 예수님께 한껏 토해 내는 병자의 모습이죠. 이 말을 하며 병자는 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억울하고 외로워서, 누구도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는 슬픔에 지쳐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은혜였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병자에게 예수님은 “네가 올바른 신앙을 보여 주어야만 내가 너를 고쳐 주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 고백을 해야지만 도와주겠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당하는 그리고 어려움에 처해 꼴찌 인생을 살아가던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다가가셨고, 그의 억울함을 들어주셨고, 낫기를 희망하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남 탓하는 병자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하고 계셨습니다. 첫 번째는 “일어나 네 자리를 걷으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침상을 의미하지만 단지 잠자리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무기력함, 비굴함, 분노와 원망이 모두 들어 있는 자리를 뜻합니다. 남을 탓하며 38년 동안 누워 있던 자리, 바로 그 자리로부터 주님은 일어나 자리를 치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걸으라, 이제 걸어 다니라”고 명령하십니다. 스스로 일어나서 걸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누가 걷고 싶지 않아서 걷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병자는 걷지 못하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님은 자리를 치우고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과연 그는 걸을 수 있었는데도 걷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미 몸은 나았는데 그것도 모른 채 병상에 누워만 있었던 것일까요? 38년 동안 그가 얼마나 걸으려고 노력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결심을 했겠습니까? 결심하고 또 결심하며 걸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걸을 수 없었죠. 그런데 그에게 주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자리를 치우고 일어나 걸어라.” 주님의 말씀이 병자의 귀를 통해 마음에 들어간 순간, 그가 일어서고자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몸에 힘이 들어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의 몸에 들어간 순간, 그의 삶에 들어선 순간,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우리는 때로 일어나야지 마음으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결심만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먹고 결심하고 또 다시 결심해도, 우리는 스스로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능력이 될 때, “일어나 걸어라”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길 때에 비로소 말씀은 능력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이 말씀이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Do You Want To Get Well?
John 5:1-9
There was a man who had gazed ata pool all his life. At Bethesda there was a myth that whoever entered the pool first when an angel stirred the water would be healed of his illness, no matter what. The countless sick living around the pool staked their lives on this tale.
Their only hope was to see the water being stirred and be the first one to jump in it. That person would rise as the victor. In a sense, the lives of these people at Bethesda were not so different from those of the contestants participating in the deadly Squid Game. Everyone at pool had been waiting all their lives to become the sole winner.
Among them there was a man who had continued to taste only defeat—a manwho had been an invalid for 38 years. We do not know at what age he became sick or when he first came to Bethesda, but the Bible mentions that he had been in that state for 38 years. This meaningful number resonates in our hearts.
Thirty-eight is the same number of years that the Israelites spent in the wilderness. This time was a period of intense pain and wandering. The Bible says, “Thirty-eight years passed from the time we left Kadesh Barnea until we crossed the Zered Valley.” (Deuteronomy 2:14)
When the Israelites reached Kadesh Barnea after escaping Egypt and sojourning at Mt. Sinai, they sent spies to scout out the land who reported to them.But the Israelites trembled in fear after hearing their report,despising and complaining to God for bringing them out of Egypt in the first place.
After this incident, God told them that generation would never see the promised land. This was what happened at Kadesh Barnea. Then 38 years of wandering began.
Just as the Israelites waited 38 years to enter the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the invalid at Bethesda waited 38 years to enter the water. Therefore, 38 years symbolizes a longperiod of pain, punishment, and waiting.
We do not know whetherthe myth was true—that is, whether the sick really got healed at Bethesda and returned home. Yet, throngs of people lived by the five colonnades surrounding the pool, earnestly waiting for the water to be stirred by an angel: “Here a great number of disabled people used to lie—the blind, the lame, the paralyzed.”(John 5:3)
The various and extremeconditions of the sick were a sight. They leave us wondering as to whether it wasrealistically possible for them to rush to the pool as the water was stirred.
First, there was the blind. How can a blind man see the water move? Is it even possible? Then there was the lame. How can a limping or limbless man jump into the water even if he were to see the water stir? Then there was the paralyzed. How can animmobile person get himself to the water to be healed?
And, among these sick, was the man who had been an invalid for 38 years. We do not know his exact illness, but the Bible says that he was lying down when Jesus found him, that his serious and chronic condition was evident, and that it was impossible for him to enter the water unless someone helped him.
Although the pool at Bethesda told a story of hope, this hope was out of reach to these sick. They were “the losers” of Bethesda. The myth that the first one to enter will be healed was turning the whole lot—the blind, the lame, and the paralyzed—into losers.
I wondered, ‘Was this tale true?’ The healings may, or may not, have happened. But did the tale give“hope” to the sickat Bethesda? I don’t think so. The tale was not “hope” to them for they were awaiting an impossible hope.
Furthermore, I realized that we are not so different from these people at Bethesda who depended on a flimsy and impossible tale. Just as they had put their hope in a “faith” that the first to enter will get well, we, too, may be placing our hope in a ludicrous story or a tale.
People today tend to believe that all their problems will go away with money. Isn’t this a myth that is guiding our hearts like the tale at Bethesda? How much money do we need to be free from all our problems and troubles? How big must my business be to be free from all problems? How much more power do I need to be free from all troubles?
The myth at Bethesda is found not just in Bethesda. We, too, have such myths. We, too, believe in such tales, trapping ourselves in endless competition.
The problem is, however, that at the pool there were blind men, lame men, and paralyzed men—like us. The Bible points this out. These people, who are destined to lose, live a life of cutthroat competition,risking their all on a single hope. Aren’t we like these people, too?
Jesus visited these people at Bethesda who had staked their lives on a myth, expecting the impossible to happen. When He met the invalid, He instantly knew that he had been sick for decades. Our Lord asked, “Do you want to get well?”(John 5: 6) The invalid answered, “Sir, I have no one to help me into the pool when the water is stirred.”(John 5: 7)
This reply holds a deep bitterness. This man had more bitterness and hatred for others than an eagerness to get well. At first, he had more of the latter. But, as the years went by and he experienceddefeat after defeat, he lost all hope of getting well, becoming only bitter toward others and his circumstance. He was bitter because he felt that he could have gotten well and returned home only if someone had helped him get into the water.
We hear similar sighs among the young today:‘If only I had a rich father. If only I had some help along the way… I would not be the loser I am now. I am in this state because no one helped me.’ We hear similar sighs among businessmen too. ‘If only someone had given a helping hand when I was in trouble… I would have recovered.’
When Jesus asked the invalid if he wanted to get well, he didn’t immediately answer “Yes!” Instead, he poured out his complaints and bitterness. He was angry at the people who didn’t offer him any help, his family who abandoned him, and his 38 years of pain and suffering.
Yet Jesus’ question was surprisingly succinct: “Do you want to get well?” Our Lord didn’t ask, ‘What do you want?’ Or ‘What do you want of me?’ He clearly asked this simple question: “Do you want to get well?”
Probably the invalid most wanted to enter the water first. Why? Because he wanted to get well. This was the reason he came to Bethesda in the first place. He had to get in the water quickly if he wanted to get well. Jesus was asking the man the most important and absolute question. He was asking him his greatest wish. In fact, He was reminding him of that deep, fundamental desire: ‘Why are you here? Why do you want to get into the water first? What brought you here in the first place? Why are you so bitter about others not helping you? Isn’t it because you want to get well? So, do you want to get well?’
Yet, confronted with this amazing question from Jesus, the invalid is complaining about his reality, venting outon Jesus his anger at the people who didn’t help him into the water.
Perhaps his wish was not to get well but to win the race to the water. ‘What is your most important wish? What is it that you truly want? Do you want to get well?’ These are the fundamental questions Jesus is asking.
True, he wanted to be the first to get into the water because he wanted to get well. But, as time passed, his sole wish and desire became getting into the water. That became his only goal.
We all make money to become happy. We need money in order to live a richer and more meaningful life. But, in this age, we have forgotten why we wanted to make money in the first place. The times are telling us that we must make more money. Period.
This is what our Lord asks us—we who insist on getting rich, making more money, and gaining more power, while complaining noone’s helping us: “Do you want to get well? Do you really want to become happy?”
Yes. Isn’t it true that we started out wanting more money, power, health, and honor in order to gain happiness? But what are we ultimately desiring now? Jesus is asking us about the essence of things. He asked the invalid at Bethesda the most fundamental question. But he only complained about his circumstance, expressing his bitterness and anger. The two weren’t clicking.
Jesus clearly asked: “Do you want to get well?” But the invalid didn’t answer, “Yes!” He only vented out his angeron Jesus and didn’t even think of asking Him for help. The sick man didn’t even confess his faith concerning, “Who is Jesus?”
Did he even have a faith that Jesus could heal him? It seems that he didn’t.
According to the book of John, Jesus’ healing of this invalid of 38 years was Jesus’ second healing. The first one was the healing of the son of a royal official. In this story the official clearly confessed his faith and begged Jesus to heal his son. According to the story, he came looking for Jesus and begged Him: “When this man heard that Jesus had arrived in Galilee from Judea, he went to him and begged him to come and heal his son, wo was close to death.” (John 4:47)
But the invalid who was sick for 38 years did not go to Jesus. Nor did he beg Him for healing. All he did was complain about his state and the people who didn’t offer him any help.
Yet, Jesus gave him grace. Why did our Lord help a man who didn’t event confess his faith properly or ask to be healed?
It was because Jesus saw through the heart of the sick. How bitter and hurt he was! He was like a baby who burst out in tears at the sight of Mommy after holding it in for so long. “Mommy! He hit me! Wah!” The invalid was just like this baby who had been deeply hurt. As soon as he met Jesus, he burst out in tears, pouring out all the grief he had kept inside all those years.
He was probably in tears when he complained to Jesus. He was that hurt, angry, bitter, lonely, and worn out. Out of his deep and lonely sadness, he said to Jesus, “Sir, I have no one to help me into the pool when the water is stirred. While I am trying to get in, someone else goes down ahead of me.” (John 5: 7)
The invalid may not have known about Jesus’s healing powers. He didn’t ask our Lord for healing.
And Jesus didn’t say to this man in pain, “Show me a proper faith before I heal you.” Our Lord didn’t insist that he had to confess the right faith in order to be healed. Jesus approached this down-and-out unconditionally, listened to his grievances, and only confirmed that he wanted to get well.
Then Jesus said,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John 5: 8) These are the very words of grace that our Lord spoke to the defeated, homeless, sick man.
To this sick, complaining man, Jesus ordered two things: First, “Pick up your mat!” A mat was a bed mattress used by the poor. But this mat did not just symbolize a place of sleep. It symbolized helplessness, bitterness, anger, a pathetic life attitude, and more. It symbolized all that he was—a helpless man who only blamed others. Jesus is commanding this man to get up from that place.
Second, Jesus commanded him to “walk.” Now he must walk. Our Lord is ordering this invalid to get up on his own and start walking. Who wouldn’t want to? How many times had he tried! But as time passed, he stopped trying, and nowhe didn’t even think of trying.Jesus is commanding this man, who had completely given up, to pick up his mat and walk.
Let’s ponder this: Does this mean that the invalid stayed in his bed even when he could walk? No. He had tried countless times. But he simply couldn’t get up and walk.
But now Jesus ordered him. “Pick up your mat and walk!” The moment these words pierced his ears and entered his heart, he tried again. He resumed his efforts to walk. And when he did, he felt a new strength in his legs and body.
Our Lord’s words saved him, raising him up. This is why we, too, wait upon His saving words today. His words will save us from within. His words will raise us up.
Miracles happen when we obey His word. I earnestly pray that this message will become words of power to you today.
Our Lord speaks to us now,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John 5:8)
요한복음 5: 1 ~ 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베데스다 연못은 수많은 병자들로 가득 넘쳐났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던 신념 하나가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물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에 모든 걸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베데스다 못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움직이는 연못을 보는 것이었고, 또 다른 희망이 있다면 그 물 속에 달려든 첫 번째 사람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징어게임을 연상시키는 동네가 베데스다 연못 주변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승자가 되는 꿈을 꾸며 승자가 되기 위해 천사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게임에서 번번이 패자가 되어 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던 병자로 우리는 그가 정확히 몇 살 때부터 병을 앓았는지는 모릅니다. 또 그가 언제부터 베데스가 못가에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38년이라는 숫자를 통해 말을 걸어옵니다. 여러분, 38년이라는 숫자는 어떤 숫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방황하며 유리하던 고통의 시간이었죠. 신명기 2장 14절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신명기 2장 14절 중)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후에 그곳을 떠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2년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는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를 떨어트리죠.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시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가데스 바네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38년 동안 방랑의 시간을 보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질 못하고 형벌과 같이 오랜 시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38년이라는 긴 기다림의 시간을 베데스다 병자 역시 경험하며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38년은 고통의 시간이자 기다림의 시간이며, 동시에 형벌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살아나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곳에 다섯 개의 행각 즉 주랑이 있었는데, 물의 움직임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던 사람들로 가득 넘쳤다고 증언합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요한복음 5장 3절, 새번역)
소개되는 환자들의 면면이 사실은 가관입니다.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과연 이들은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첫 번째로 뛰어들어 갈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들 가운데 눈먼 사람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눈먼 사람이 어떻게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간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물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한들 다리 저는 사람들이 재빠르게 연못 속으로 달려갈 수 있었겠습니까? 개역성경에는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던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혈기 많은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새번역은 중풍병자로 번역합니다. 말 그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물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38년 된 병자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병에 걸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를 찾으셨을 때에 이미 누워 있었고, 병이 오래된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옮겨 주지 않으면 연못에 들어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중풍병을 앓고 있지는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처럼 베데스다 못가에 머물던 수많은 병자들에게 연못의 전설은 희망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희망을 이룰 수는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베데스다의 전설은 그곳에 살던 눈먼 자, 저는 자, 중풍병자들을 이미 패자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전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을까? 일어날 수도 있었고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쩌면 누워 있는 사람들, 저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에게 전설은 그저 가혹한 희망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을 보면서 저는 전설 하나 붙잡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움직이는 물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나을 것이라는 신념이 베데스다의 소망이었듯이, 우리도 어쩌면 비슷한 전설이나 신념을 소망으로 붙잡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부분입니다.
부자가 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전설, 아름답고 예뻐지기만 한다면 어떤 일도 해내며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베데스다의 새로운 전설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면 불행하게 하는 문제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기업을 얼마나 크게 만들어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큰 권력을 가져야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얼마만큼의 인기를 누려야지만 우리 스스로는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물이 동할 때 물 속으로 들어가면 낫는다는 베데스다의 전설은 그곳만의 전설은 아닌 듯싶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전설 하나쯤은 있을 법합니다. 우리는 그 전설을 도리어 진실로 믿으며 무한 경쟁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눈먼 자, 저는 자, 중풍병자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첨예한 경쟁의 자리에 서서 오롯이 한 가지 희망만을 붙잡은 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전설만이 희망이던 베데스다 연못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고는 질문하십니다.>
전설을 희망으로 삼으며 실현 불가능한 일을 기대하고 살아가던 베데스다에 예수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반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은 누워 있던 병자를 보시고는 그가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마디를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장 6절 중)
그러자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한복음 5장 7절)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병자의 말속에는 큰 원망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는 낫고자 하는 열망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이 크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낫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시간이 흐르고 희망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면서 사람들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이곳에서 버젓이 살아남아 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원망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한탄을 함께 듣습니다. ‘나도 아버지 잘 만나기만 했다면 승리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하며 절규하는 소리가 병자의 음성 가운데 함께 들립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그는 즉시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 속에 가득 들어 있는 원망과 분노를 내뱉습니다.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 자신을 버린 가족들, 병에 걸려 38년 동안이나 고생하던 과거의 모든 순간이 주마등같이 스쳤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앞에서 과거에 대한 모든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병자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은 놀랍도록 명쾌하고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분명하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죠.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네가 낫기를 원하고 있었지?”하고 물으시며, 병자에게 가장 절대적이며 중요한 소원을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의 소원을 상기시켜 주신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베데스다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던 이유가 무엇이냐, 물이 움직일 때에 빨리 달려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원인이 무엇이었느냐?”
그런데 병자의 소원은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낫기를 원했죠. 낫는 일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데스다에 오랜 시간 있으면서 그는 전설에 매이고 말았습니다. 물이 동할 때를 보고 제일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낫고 싶다는 소원보다 전설이 그를 더욱 압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정신에 압도되어 무엇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지 잃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권력을 얻어야 한다고, 인기를 얻어야 한다고, 아름답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도와주는 이가 없다고 원망하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지 않니? 네가 정말 평안하기를 원하고 있지 않니?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평안을 얻기 위해서 돈을 벌고자 하죠.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가 소원하는 바는 평안이요 행복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데스다 병자는 본질을 묻고 계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냅니다. 예수님께 간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신앙 고백도 하지 않죠. 예수님이 자신을 낫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은 예수님의 두 번째 병 고침의 사역에 해당합니다. 이 사건 앞에는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다가와 요청하며 고백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말씀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4장 47절)
<예수님의 질문에 원망을 쏟은 병자를 향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나와서 고쳐 달라고 간청했지만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도, 고쳐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환경만을 탓하며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원망을 표출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향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신앙 고백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고쳐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는 그를 도와주셨을까요? 아마도 병자의 마음속 깊은 곳의 절규를 보신 것 같습니다. 병자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것이죠. 얼마나 맺힌 한이 많았겠습니까? 친구들에게 얻어맞은 한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기면서 “엄마, 쟤가 나를 때렸어.”라고 고자질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동안 감추어 둔 수많은 억울함과 슬픔을 예수님께 한껏 토해 내는 병자의 모습이죠. 이 말을 하며 병자는 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억울하고 외로워서, 누구도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는 슬픔에 지쳐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은혜였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병자에게 예수님은 “네가 올바른 신앙을 보여 주어야만 내가 너를 고쳐 주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 고백을 해야지만 도와주겠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당하는 그리고 어려움에 처해 꼴찌 인생을 살아가던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다가가셨고, 그의 억울함을 들어주셨고, 낫기를 희망하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남 탓하는 병자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하고 계셨습니다. 첫 번째는 “일어나 네 자리를 걷으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침상을 의미하지만 단지 잠자리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무기력함, 비굴함, 분노와 원망이 모두 들어 있는 자리를 뜻합니다. 남을 탓하며 38년 동안 누워 있던 자리, 바로 그 자리로부터 주님은 일어나 자리를 치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걸으라, 이제 걸어 다니라”고 명령하십니다. 스스로 일어나서 걸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누가 걷고 싶지 않아서 걷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병자는 걷지 못하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님은 자리를 치우고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과연 그는 걸을 수 있었는데도 걷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미 몸은 나았는데 그것도 모른 채 병상에 누워만 있었던 것일까요? 38년 동안 그가 얼마나 걸으려고 노력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결심을 했겠습니까? 결심하고 또 결심하며 걸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걸을 수 없었죠. 그런데 그에게 주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자리를 치우고 일어나 걸어라.” 주님의 말씀이 병자의 귀를 통해 마음에 들어간 순간, 그가 일어서고자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몸에 힘이 들어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의 몸에 들어간 순간, 그의 삶에 들어선 순간,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우리는 때로 일어나야지 마음으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결심만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먹고 결심하고 또 다시 결심해도, 우리는 스스로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능력이 될 때, “일어나 걸어라”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길 때에 비로소 말씀은 능력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이 말씀이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2021년 11월 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4장, 48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5:1-9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1월 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베데스다 연못가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내려온 이 전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연못가에 자리를 깔고 물이 움직이기 만을 바라며 모든 것을 걸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전설은 정말 희망이 되었을까요?
설교의 요약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눈먼 자, 다리 저는 사람, 중풍병자(요 5:3) 등 아무리 물이 움직여도 그 연못에 쉽게 뛰어들 수 없는 이들입니다. 이들에게 연못가의 전설은 간절히 붙든 희망이자 신념이었으나, 사실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죠. 당시 전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면 누군가 그 못에 뛰어드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하는 패자들이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들어가면 낫는다는 베데스다의 전설, 실현 불가능한 상황에도 끝내 이것을 희망과 신념으로 붙든 연못가에 사람들 모습은 오늘 우리 모습은 아닐지 생각하게 합니다. “부자만 된다면~”, “아름답고 예뻐지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신념이지요. 이 신념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베데스다의 전설은 아닐까라는 것입니다. 낙오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베데스다 못가의 첨예한 그 경쟁의 자리에, 희망고문으로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이들의 모습, 우리 또한 무한경쟁의 굴레 속 세상이 주는 희망과 신념의 전설에 붙들려 패배자로 살진 않습니까?
그 못가에 예수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워 있는 한 병자를 보셨고, 그에게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예수님의 말씀에 그 병자는 원망과 한탄을 쏟아내며 답합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저 물 속에 넣어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느새 낫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사람들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이 더 크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낫기 위함이 본질이었지만 본질은 사라지고 부차적인 것만 남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물음에 즉시 “예”라고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본질을 묻고 있습니다. “네가 베데스다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원망과 비판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이냐? 정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신앙고백도, 믿음도 없고, 원망만 표출했던 이 병자를 향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울분으로 가득한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고통당하고 어려움에 처한 그의 억울함을 들으셨고, 그가 낫기를 희망하고 있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 5:8)
38년 된 병자가 들고 일어서야 할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울분 속에 남을 탓하고 무력한 자신이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또 스스로 일어나 걸으라 하셨습니다. 38년 간 누워 있던 그가 그 명령에 걸으려고 했겠습니까? 다짐과 스스로 힘만으론 도저히 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다시 걷고자 노력하였고, 그때에 다리에 힘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 능력이 생겼고, 말씀이 그를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이들처럼, 희망고문으로 가득한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나누기
1.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베데스다의 전설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 명령 따라 내가 들고 일어서야 할 내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다시 믿음의 길을 걷도록 내 마음에 들어오는 생명의 말씀, 힘이 되는 주님 말씀이 있습니까?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흔들리는 세상살이에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기 원합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오늘 내가 일어나야 할 자리를 믿음의 눈 들어 보게 하시고,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힘과 생명을 얻어 믿음의 길 힘차게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