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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곡이 있습니다.>
지금은 침례교 목사이면서 백석예술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계시는 ‘하덕규’ 라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이름을 알고 계시는 분들이 꽤 많으실 줄로 압니다.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으로 함춘호 씨와 더불어 1980년대에 활동하신 가수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가사와 곡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또 영감을 주었던 분이죠. 하덕규 씨가 1986년에 시인과 촌장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셨는데, 그중에 ‘풍경’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제법 짧은 가사인데요. 생각할수록 마음에 감동을 주고 정곡을 찌르는 가사입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서 돌아가는 풍경이다.”는 노랫말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저희 교회 하나의 비전으로 ‘아름다운 교회’라는 비전을 세웠는데, 어떻게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을지 방법론에 관하여서도 깨우침을 주는 좋은 가사로도 보입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제가 언젠가 아름다움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면서 밥풀이 밥그릇에 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머리카락에 붙어 있으면 아름답지 못하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 다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그 말씀을 증거하는 저는 목사로서 자리를 지키고, 장로님은 장로님의 자리를 지키고, 권사님은 권사님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내는 아내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자리를 지킬 때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낼 수 있겠죠. 군인은 군인으로, 학자는 학자로 소임을 다할 때에 아름다운 사회, 아름다운 국가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신 적이 없다고 생각되시는 분이나 잊어버리신 분들은, 성도로서의 제자리에 계신 것이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여기서 제자리는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첫째는 항상 발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자리걸음이라는 표현도 있죠. 한편으로는 마땅히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를 뜻하기도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은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를 가리키겠습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서 말씀드린 부분들은 다분히 실천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삶 속에서, 신앙생활에서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찾고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자는 적용의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읽어 드린 시인과 촌장이 발표한 “풍경”이라는 노래는 사실 그 이상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듯합니다. 보다 본질적이고 더 깊은 인간의 숙명을 말하는 듯 보입니다. 큰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다. 그러니 네 자리로 돌아가렴.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정말 그곳인지 다시 한번 살펴보렴. 만약에 그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렴. 너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 진정 행복할 거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을 거는 듯 들립니다.
그런데 훗날 하덕규 목사는 이 노래를 평가하면서 자신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때 지었던 노래라고 회고하며 이야기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풍경이라고 노래하면서도 정작 그는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 질문을 던지며 노래를 불렀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게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과연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다는 말인가?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나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방황하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원리를 찾은 것 같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자신의 문제를 노래하고 있었던 셈이죠.
그때 그분은 깊은 고뇌와 방황 가운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81년, 시인과 촌장으로 데뷔해서 포크 음악의 선두 주자로 이름을 알리며 유명한 가수로 큰 인기를 얻고는 있었지만, 그 속에 깃든 공허함과 우울증을 이겨내고자 술과 대마초를 찾으며 살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 그 지혜로운 노래를 부르면서도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으며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풍경’이라는 그 곡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방황의 시기, 그가 정덕수 시인이 쓴 시 ‘한계령 1’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일부를 발췌해 노래를 만듭니다. 그 노래를 1985년 양희은 씨가 발표하게 되죠. 제목이 ‘한계령’이라는 노래입니다. 갑자기 제가 가요사를 말씀드리는 것 같네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으로 살다 갈 것을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하덕규 씨가 왜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요?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은 한계령 노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부딪침, 술과 대마초, 어디 기댈 곳 없는 방황 끝에 떨어져 죽을 마음으로 고향 근처 한계령에 오른 20대 청춘 하덕규는 산에서 죽음 대신 영감을 얻는다. 산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산은 ‘잊어라, 울지 마라, 내려가라’고 그의 지친 등을 떠밀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산에 오른 하덕규 씨가 아마도 그 산에서 방황을 끝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산은 그를 향해 울지 말라고, 돌아가라고 떠밉니다. 한계령은 자신이 그토록 찾았던 제자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로부터 내려온 그가 이번에는 누나의 손에 이끌려서 12월 31일, 어느 해인지 모르지만 송구영신예배에 참석합니다. 촛불이 가득 켜져 있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눈물범벅이었습니다. 한참이나 예배당에서 울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자리가 네가 그토록 찾던 곳이다. 이 자리가 바로 너의 자리이다. 인간이 돌아와야 할 자리이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 노래의 가사를 단번에 써 내려갑니다. 십분 만에 완성되었다는 그의 곡은 불후의 명곡이 됩니다. 바로 ‘가시나무’라는 노래입니다. 조성모 씨가 불러 더 많이 알려진 노래이기도 합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 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바로 그때,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는 듯 보이는 가사입니다. 슬픔과 어두움으로 가득했던 바로 그때에, 조금만 부대껴도 울어 대고, 쉴 곳을 찾아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갈 정도로 외로움과 고통 속에 있던 자신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라는 점에서 가사 속의 ‘당신’은 다중적인 의미가 있겠지만 하덕규 목사가 말하고자 한 당신은 ‘절대자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지 못했던 삶을 바라보면서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자신을 회개한 것이죠. 이후 그는 풍경이라는 노래를 종종 부를 때마다 마지막 부분에 문장을 추가해서 불렀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내 아버지께 돌아오는 풍경
얼마 전 하덕규 목사님을 초청해서 이곳 예배당에서 풍경 노래를 한 번 불러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참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제가 회심한 이후에 소망교회 수요예배에 여러 번 와서 뒷자리에 홀로 앉아 울며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이 예배당이 저에게는 아버지께 돌아오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랬던 이 자리에서 풍경 노래를 부르라고 하시니 정말로 뜻깊고 하나님의 섭리를 느낍니다.” 오늘 설교가 조금 다른 형식을 띤다는 점을 아셨겠지요. 이렇게 된 김에 하덕규 목사님의 풍경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들어보겠습니다.
<풍경을 듣고 있는 여러분의 풍경은 과연 어떠한가요?>
여러분, 지금 어디쯤 계시나요? 여러분의 자리를 한 번 보십시오. 과연 있어야 할 자리에 계십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우리가 너무도 많아 주님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한계령 어느 꼭대기, 절벽 위에 올라서 있는 그곳이 오늘 여러분의 자리는 아닙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에서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우리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주님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우리가 주님께 이를 때에만 참된 안식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인 이사야서를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1~22)
“너는 잊지 말아라. 절대로 잊지 말아라.”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었다는 것 잊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너는 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내가 너를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내가 너의 허물과 모든 죄를 사하였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나에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온라인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흩어져 있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오랫동안 주님 앞으로 나오지 않았던 분이 있으시다면, 또 방황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자리를 찾지 못해 고통 속에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 시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 네 자리로 돌아오라.” 주님의 명령 앞에 “예”라고 대답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떠난 탕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나가서 탕진하고 돌아오는 아들의 이야기죠. 결국 모든 것을 다 낭비한 후에야 염치없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마음을 갖게 됩니다. 더 이상은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꾼으로서 받아주시기를 원하며 발길을 돌립니다. 성경이 전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눅 15:20 중)
탕자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그저 후회만 하지 않았습니다. 절규만 하지 않았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일어나서 발길을 돌렸고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중)
아들이 떠난 다음부터 아버지는 늘 동구 밖에 나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아버지의 자리였습니다. 먼 곳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면서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이렇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찬송가 527장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절)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2절)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가 2년여 이상 자리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돌아와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주님 앞으로, 예배의 자리로, 예배당 안으로 함께 나오셔서 주님 만나고 예배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자리로 돌아오라. 나에게로 돌아오라.” 주님의 간절한 부르심에 우리 모두가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turn To Your Place
Isaiah 44:21-23
Ha Deok-kyu is currently a Baptist pastor and professor at the Baekseok Art University. Many of you will be familiar with his name. He was also a famous singer-songwriter in the 1980s whostarted the folk band “Poet and Chief” with guitarist Ham Chun-ho.
Ha was very popular for his songs and lyrics that touched people’s hearts. In the album “Poet and Chief,” there is a song called “Scenery” which goes like this:
The most beautiful scenery in the world
Where everything returns to its place
The most beautiful scenery in the world
Where everything returns to its place
Short and simple, the lyrics hit a core. What is the most beautiful scenery in the world? The scenery of everything returning to its place. In short, the world is beautiful when everything is where it’s meant to be.
In preaching about beauty, I once said that a grain of rice looks beautiful in a bowl, but not on a lock of hair. Everything looks beautiful when they are where they are meant to be.
This applies to pastors, elders, and senior deaconesses, too. Everyone is beautiful when theyfulfill their roles. When everyone—husbands, wives, soldiers, scholars, and pastors—does what they are meant to do, our homes, churches, society, and country will become beautiful.
When I talked about beauty in my previous sermon, the emphasis wason making the world beautiful by fulfilling our roles in our daily lives. I stressed the importance of discovering our roles in our life and in the church and doing our best to carry them out.
But Ha’s “Scenery” talks about something more. It sings of a deeper and more fundamental fate of man. Its meaning and message are more profound: ‘The world’s most beautiful scenery is one where everything returns to its place. So, return to your place. That will make you happy and beautiful.’ The lyrics seem to whisper a secret in our ears—the secret to living beautifully. They seem to be telling us the answer we have all been waiting for.
Yet Pastor Ha later confessed that the lyrics, which were written before he met God, were more of a question than an answer. He was asking himself, ‘If returning to one’s place is the most beautiful scenery in the world, then where is my place?’ He thought he had realized an important principle of the world. Yet this did not solve his own problem, which is why he sang about that problem in “Scenery.” He had gained wisdom and knowledge of the world, but where was “his place,” the place that he ought to return to? This was the question posed in the song.
Ha seemed to have been very confused and troubled at the time. Although he had become famous in 1981 with his debut album “Poet and Chief,” he sought alcohol and drugs to ease the emptiness and depression that came with his popularity.
Ha sang that the most beautiful picture was the one where everything returned to its place. He sang of this precious wisdom. But he himself was confused, lost, and still wandering. He had not returned to where he was meant to be.
In his confused years he wrote a song inspired by “Hangyeryeong 1,” a poem written by Jeong Deok-su. Ha’s song was titled “Hangyeryeong” and released bysinger Yang Hee-eun in 1985:
That mountain cries out to me, “Don’t cry, don’t cry.”
Deep in the mountain, layers of wet rocks under my feet,
That mountain cries out to me, “Forget,forget”—
Stroking my heart.
Ah! Life is but a wisp of wind
A wind that brings clouds of tears to this mountain and that.
That mountain cries out to me, “Go down, go down.”
What inspiredHa to suddenly write this song? Han Ki-Bong, journalist of the Hankook Ilbo and former member of the Press Arbitration Commission, wrote a review on Ha:
“Haclimbed Hangyeryeong Passin Mt. Seoraknear his hometown with a mind to put an end to his life. The disparity between reality and ideals was unbearable, drugs and alcohol were not the answer, and he was utterly lost with absolutely nothing to lean on. But when he reached that pass, the mountain did not invite him to death, but gave him inspiration instead. It cried out to him, ‘Forget, don’t cry.Go down the mountain.’ It gently pushed the tired poet down the mountain.”
Ha climbed the mountain because he was utterly lost, couldn’t find his place in the word, and wanted to put an end to his wandering. However, the mountain gently pushed him down, whispering, “Don’t cry, go down, and return.” Hangyeryeong Pass was not the place he ought to be.
Finally, this lost soul, led by his sister, attended a New Year’s Eve service at a church. But even before he had walked into that worship hall,brightly lit by candles, tears were streaming down him face. That very night in that very church, Ha heard God speaking into his heart:
“This is the very place you have been searching for all this time. This is your place. This is the place where men ought to return to.”
Ha confessed that the place he had been seeking all along—even when he was singing “Scenery”—was that very place God had called him to. He had finally found his place, the place where he ought to be.
After meeting God, Ha wrote another song. In just ten minutes he wrote these beautiful lyrics to the song “Thorn Tree”:
There’s so much of me inside of myself,
There’s no place for you to rest
There are so many vain expectations in me,
There’s no comfortable place for you
There’s a darkness that I can’t help but have in me
Which takes away the place of rest for you
There’s a sadness that I can’t win over in me
Like a thick thorn tree forest
Whenever the wind blows, the dried up branches harass each other and cry
The young birds that fly over to find a place of rest,
Get prickled by the thorns and fly away
Whenever the wind blows, I was lonely and miserable
There were many days of singing sad songs
There’s so much of me inside of myself,
There’s no place for you to rest
The above lyrics appear to be repenting his past, the time when the poet was not where he was meant to be. Seen as a pop song,the word “you” in “Thorn Tree”may be interpreted in diverse ways, but to the writer himself “you” means the Absolute One, God. Ha is reflecting on his past in which he left no place for God in his life and is repenting of his past when he was not where he was meant to be.
After receiving Christ, Ha often sangan extra line at the end of “Scenery”:
The most beautiful scenery in the world
Where all things return to their place,
Where I return to my Father.
Recently, when I invited Pastor Ha to sing “Scenery” at Somang Church, he said something amazing. He saidafter receiving Christ, he occasionally came to our Wednesday evening services, praying and crying in the back. He added that Somang Church was a place where he could meet and return to the Father. Singing “Scenery” in Somang Church would be deeply meaningful and he felt God was guiding him.
Today’s sermon started in a special way and we are proceeding in a special way, too. Why don’t we have something special in the middle of it? I would like to invite Pastor Ha Deok-kyu to sing “Scenery” for us.
(Ha Deok-kyu sings “Scenery.”)
Dear brothers and sisters, where are you now? Are you where Pastor Ha was decades ago? “There’s so much of me inside of myself,there’s no place for you to rest.” Are you by any chance leaving no room for God, pushing Him out of your life? Or are you standing on the edge of a high cliff like Hangyeryeong Pass where you feel absolutely lost?
Augustine confessed in “Confessions,”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rests in You.”
Our Lord speaks to us: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Matthew 11:28)
We have true peace and rest only when we reach God. The Lord also spoke to us through Isaiah: “Remember these things, Jacob, for you, Israel, are my servant. I have made you, you are my servant; Israel, I will not forget you. I have swept away your offenses like a cloud, your sins like the morning mist. Return to me, for I have redeemed you.” (Isaiah 44: 21-22)
Through these words the Lord is saying, ‘Remember this. I made you. I will not forget you. I have swept away your offenses and your sins and have redeemed you.’
Our sins are thick like the clouds in the sky and the morning mist. But God is telling us, ‘Return to me. Return to your place.’
The prodigal son squandered away all his wealth, after forcing his father to give it to him and running away from home. But he returned—in shame. He thought to ask his father to accept him as a hired hand instead of a son.
“So he got up and went to his father.” (Luke 15:20a)But what happened? “But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for him; he ran tohis son, threw his arms around him and kissed him.”(Luke 15:20b)
These are the lyrics of the hymn “O, Come Home”:
O come home, don’t delay! Only come back home today!
Can our sins, however great, however stark and grave
Prove more than Jesus can carry who came to seek and save!
Broader far is Jesus’ amply breast ’than is heaven from east to west!
O, come home, don’t delay! Only come back home today!
For our Savior, every day, stands waiting there for you
And nightly, door standing open, He waits the darkness through;
For his child’s return, who’s gone away
Still He’s waiting, O, don’t delay!
Our Lord cries out to us, “Return to your place! Return to Me!” How must we respond to this desperate plea?
이사야 44: 21 ~ 23
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23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
<우리 주님은 분명 부활을 예언해 주셨지만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2022년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부활절 환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환호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선포이자 고백이며 노래입니다. 단지 축구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선포 정도가 아닙니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환호도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차원도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값지고 멋진 환호가 바로 우리 주님의 부활 소식입니다. 살아 있는 누구라면 예외 없이 맞닥트려야 하는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죽음과의 대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해 있습니다.
어느 종교도, 어떤 가르침도 죽음을 이겼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죽음을 극복했다고 말하지도 않죠. 물론 죽음을 일종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거나, 또 어떻게 하면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을지 가르치는 종교는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이러한 방식으로 극복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죽음의 문제 자체가 해결되는 것 또한 아니죠.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숙명임을 끊임없이 말해 줍니다. 사망은 인간에게 가장 크고 상대하기 어려운 원수입니다. 사망은 쏘는 힘이며 인간을 무너트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세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5~57)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힘, 사망의 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게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환호하며 노래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선언과 선포로부터 기독교는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 바로 그 새벽에 일어난 일을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의 현장을 가감 없이 보여 주죠. 그 모습은 어떠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다리면서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대하거나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수난당하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 번 예언하셨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에 따르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고백을 하자 주님께서 “이야기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며 수난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29~31)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죽임당하신 후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죽으신 후 사흘째 되는 바로 그날에 주님을 기다렸던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도리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사흘 만에 살아나시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입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마 27:62~64 중)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혹시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놓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우길까봐 걱정합니다. 시신의 도난을 걱정했던 것이죠. 그래서 병사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도록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 앞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새벽 이른 아침, 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대하면서 산을 올랐을까요?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연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것이죠. 가능하다면 무덤 문을 열고서라도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을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을 겁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하지만 여인들도, 제자들도 모두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안타까워했고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만이 들려 있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부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말씀대로 부활하셨고, 천사를 통하여 그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주님은 천사를 통하여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십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 28:5~6)
중요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숨겨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부활을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까지도 알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도 부활을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인간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의 간절한 기다림의 결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간절한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요, 하나님의 선물이요, 기적이었습니다. 부활 소식은 믿음 없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부활 소식은 여전히 그러합니다. 수많은 인간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끊임없이 듣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는 않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열립니다. 바울이 증언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3~8)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게바에게, 열 두 제자에게, 오백여 형제에게, 야고보에게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까지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고 보여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좋아서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됨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그토록 너희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기억하지 못하였느냐?”는 것이죠. 한마디로 질책입니다. 복음서의 이야기 중 어느 곳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했다거나 준비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시작은 여인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게 되죠.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믿지 못한 자들로 말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 소식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신 준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다”는 의미는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이 실제가 되었기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확실한 지식이자 참이며 지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도 믿지 않은 부활이 실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이 땅에서 전하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의 말씀, 주님의 능력, 주님의 권위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주님의 말씀이 참이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라는 이 말씀이 그저 헛된 말씀이 아니고 공허한 말씀이 아니고 진정한 진리요 참다운 말씀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믿는 자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이고 우리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 되는 이유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 11:25~26)
바로 이 말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에게도 부활 소망이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사흘 만에 부활하겠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기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1~3)
이 말씀 역시 참이 되고 우리를 기대케 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보내 주실 성령을 약속하신 말씀이 그러하고,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하고 있다면 그분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축복의 말씀으로, 능력 있는 약속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부활을 고백하고 축하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진리로 받고 그 말씀 따라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다 깊은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은 단순히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인 의미이죠. 즉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은 부활 신앙의 일차적인 단계입니다. 오히려 부활 신앙은 우리를 더 깊은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 그 약속들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무게를 알아 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주옥과도 같은 말씀들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분의 말씀이 참임을 증명하셨듯이, 우리도 말씀 따라 살면서 주님의 말씀이 참이 되고 예스가 되는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을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0)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죽으면 다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고백하는 차원에서 멈춰야 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이 우리에게 정말 진리라면, 예수님이 하신 수많은 말씀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부활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하시던 대로 그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3월 2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네 자리로 돌아오라” (사 44:21-23)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91장, 53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사 44:21-23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2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하덕규 목사의 ‘풍경’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무엇인가? 이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다” 노래 가사는 보다 본질적이고 더 깊은 인간의 숙명을 말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 싶은 우리에게도 던지는 질문입니다. 나의 제자리는 어디입니까?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는 어디인가요?
설교의 요약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지혜와 혜안을 가졌어도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게 그 제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이는 깊은 고뇌 가운데 세상을 보는 혜안으로 노래하고 있던 하덕규 목사의 물음이었기도 합니다. 그는 대중가수로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그 속에 찾아든 공허함과 우울증을 이겨내고자 술과 대마초를 찾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있어야 할 자리, 제자리를 찾지 못해서 끝없이 방황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던 그가 누나의 손에 이끌려 어느 교회 예배당에 나오게 됩니다. 이 때 그는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그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마음 속 들려주시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네가 그렇게도 찾던 곳이다. 이 자리가 바로 너의 자리이다. 인간이 돌아와야 할 바로 그 자리이다” 이후 그는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며 ‘가시나무 새’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수많은 회한과 괴로움으로 몸부림쳤던,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는 노래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제자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주님을 밀어내고만 있는 그 자리가 여러분의 자리입니까? 방황의 끝을 찾아 낭떠러지에 올라선 그 자리가 여러분의 자리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우리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또한 오늘 본문(사 44:21-22)속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아, 이 일을 기억하라. 내가 너를 지었다. 나는 너를 결단코 잊지 않는다. 내가 너의 그 허물과 죄를 사했고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내게로 돌아오라. 네 자리로 돌아오라”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염치없이 귀환하는 탕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건 염치없더라도 그가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탕자를 외면하지 않고 먼발치에서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팬데믹으로 보낸 지난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제자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는 어떠합니까? “네 자리로 돌아오라! 나에게로 돌아오라!”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바로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풍경입니다.
나누기
1. 처음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만났던 그 때를 기억하시나요?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2. 지금 내 제자리는 어떠합니까? “네 자리로 돌아오라”는 주님 말씀 앞에 내가 응답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마무리기도
“내가 기억한다. 결단코 너를 잊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시나무 같은 우리 마음에 주님 거하실 곳을 마련하기 원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풍경임을 알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있게 하소서. 살아계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