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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악한 사람인가

사무엘하 23: 1 ~ 7

김경진 목사

2020.12.27

<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가 누구인가를 돌아봅니다. >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님이자 반 나치 운동가이셨던 분 그리고 독일 고백교회를 설립한 분 중 한 명이신 본회퍼 목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이 옥중에서 쓰신 글 중에 ‘Wer bin Ich(나는 누구인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1944년 7월경에 베를린의 테겔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이 글을 쓰고 약 9개월 후인 1945년 4월 9일, 군사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께 이 글을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감방에서 걸어 나올 때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같이
아주 침착하고 활기차고 흔들림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교도관들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가 도리어 명령하는 사람인 듯
아주 자유롭고 당당하고 명료하다고 하는데.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또한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고 있으면서도
내가 마치 늘 승리해 온 사람처럼
아주 태연하고 평화롭게 미소 짓는다고 하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알고 있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해하고 조마조마하고 병든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색깔과 꽃과 새소리에 굶주려 있는 나
따뜻한 말과 사람의 정에 목말라하는 나

아주 작은 모욕과 사람의 횡포에 치를 떨고
큰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
멀리 있는 친구들을 무기력하게 걱정만 하고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서 멍해져 있는 나
모두와의 작별을 대비하며 풀이 죽어 있는 나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오늘은 이것이다가 내일은 저것인가?
아니면 모두 다인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솔직하게 고백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 고백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낍니다. 이러한 고민과 고백이 사형집행을 앞둔 본회퍼 목사님만의 고민과 고백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정의에 목말라하며 불의에 분노하는 내가 진정한 나인가? 남이 보지 않는 구석에 슬그머니 쓰레기를 갖다 놓는 내가 진정한 나인가?’ 이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바뀌는 삶을 살아가는 이가 나 자신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습니다. >

성경의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다윗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는 선한 왕이었습니까, 악학 왕이었습니까? 자신을 공격하던 사울 왕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살려 주었던 그의 모습에서 선(善)을 발견하십니까? 밧세바를 얻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한 모습에서 악(惡)을 발견하십니까?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히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한 그의 용맹스러움을 기억하십니까? 아니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하던 그의 비겁함을 기억하십니까? 과연 어떤 모습이 진짜 다윗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다윗의 인생이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 그는 선했고, 때로는 악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고, 때로는 하나님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정의롭게 행동했지만, 때로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오늘 본문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공의를 베푸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다윗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과연 악(惡)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악행이라고 보시는 죄악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먼저 악을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회마다 규정해 놓은 법이 있습니다. 그 법규를 지키지 않은 사람을 ‘죄인’, ‘악인’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살인, 도둑질, 폭행, 성추행 등을 일삼는 사람을 악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어 도덕적인 차원에서도 악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가 서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지키는 통념이 있습니다. 그러한 관습과 통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악인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도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시편만 잘 살펴봐도, 그 속에 정말 많은 악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 나타난 악인에 관한 묘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으슥한 골목에 있다가 사람을 쳐 죽이는 사람
야심을 자랑하는 사람
탐욕을 부리는 사람
남을 기만하고 폭언하는 사람
욕설과 악담을 하는 사람
연약한 사람을 그물로 덮쳐서 끌고 가는 사람
학대하는 사람
포악한 사람
간사한 입술을 가진 사람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사람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

그밖에도 성경에는 정말 다양한 악인에 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분명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경험되는 악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준에서 악한 사람이란 일차선 도로에서 저속으로 계속해서 주행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악한 사람이란 뻔뻔하게 불법 주차를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악한 사람은 아무 데나 침을 뱉고 다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악인에 관한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기준에서 악인이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을 가리킵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 악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요?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주님이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구원을 허락한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주님이 배고프고 목말랐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의 본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작은 자를 환대하며 대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선한 자라고 칭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동시에 그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을 바라볼 때 혼란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나는 목마른 자를 환대했는가? 배고프고 연약한 사람을 모른 척하지 않았는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는가?’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어느 때는 모른 체하며 지나간 적도 많습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느라 급급하기도 했습니다. 항상 탐욕을 부린 것은 아니지만, 탐욕이 발동을 부릴 때가 있었습니다. 내 삶을 사느라 바빠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못한 적도 많습니다. 그동안의 나를 정밀하게 분석해 본다면, 정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악인이기도 하고 선인이기도 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분 앞에서 나는 선인입니까, 악인입니까? 또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에는 악인에 대한 규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인을 규정하시는지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사무엘하 23:6 중)

새번역으로도 읽어 보겠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아무도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는 것,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사무엘하 23:6~7 중, 새번역)

악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가시덤불과 같아서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어서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고 강력히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악한 사람이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많은 학생을 만났습니다. 훌륭한 제자들도 많았고, 추억도 많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학생을 가르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 어떤 제자가 좋은 제자입니까? 또 어떤 제자가 나쁜 제자입니까? 제 경우에 나쁜 학생은 이런 학생들이었습니다. 자기주장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가르치는 내용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는 학생입니다. 그런 학생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르쳐 주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에 사로잡혀 변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학생이 가르치기 가장 어렵고 힘든 학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은 관점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어오지 않으려는 사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벗어나려고만 하는 사람이 악인일 것입니다. 한때 다윗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밧세바라는 여인을 아내로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교만했고, 때로는 정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놀랍습니다. 사무엘하 23장 3~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리는 왕은, 구름이 끼지 않은 아침에 떠오르는 맑은 아침 햇살과 같다고 하시고, 비가 온 뒤에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빛과도 같다고 하셨다. 진실로 나의 왕실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아니한가? (사무엘하 23:3~5 중, 새번역)

<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삶이 선한 삶입니다. >

다윗의 삶을 돌아볼 때, 그는 때로 실수하고 잘못을 저질렀으나 늘 하나님 손안에 머물려고 했습니다.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죽게 했을 때도 하나님의 곁에 있으려고 했습니다. 나단을 통해 하나님이 그를 책망하셨을 때, 그는 철저히 회개하며 통곡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스릴 수 있는 자리, 하나님께서 만지실 수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머물며 삶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던 다윗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시편을 지었습니다. 시편을 통해 그의 고백과 감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는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죄악을 철저히 고백하며 통곡했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통회했습니다. 주님 앞에 간절히 소원을 아뢰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간구했습니다. 때로는 울부짖었고, 때로는 회개했으며, 때로는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다윗의 삶입니다. 그렇게 항상 주님의 손안에 있길 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다윗의 복이자 은혜 얻는 삶의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회퍼 목사님이 ‘Wer bin Ich(나는 누구인가)’라는 글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오늘은 이것이다가 내일은 저것인가?
아니면 모두 다인가?

(중략)

나는 누구인가?
이 혹독한 질문이 나를 비웃는다.
오, 하나님!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고백입니다. 나아가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남깁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본회퍼 목사님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사람들은 아무도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는 것,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사무엘하 23:6~7 중, 새번역)

Who is the Evil Man?

2 Samuel 23:1-7

German pastor Dietrich Bonhoeffer—an anti-Nazi activist and a founder of the German Confessing Church—wrote a poem titled, “Wer bin Ich (Who am I)?” The poem is known to have been written in July 1944 while he was incarcerated in Berlin’s Tegel Prison, months before his execution on April 9, 1945 in a military prison. It expresses the deep agony of a man awaiting his execution. It goes like this: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would step from my prison cell
Posed, cheerful and sturdy,
Like a nobleman from his country estate.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would speak with my guards
Freely, pleasantly and firmly,
As if I had it to command.
Who am I? I have also been told that I suffer the days of misfortune
With serenity, smiles and pride,
As someone accustomed to victory.
Am I really what others say about me?
Or am I only what I know of myself?
Restless, yearning and sick, like a bird in its cage,
Struggling for the breath of life,
As though someone were choking my throat;
Hungering for colors, for flowers, for the songs of birds,
Thirsting for kind words and human closeness,
Shaking with anger at capricious tyranny and the pettiest slurs,
Bedeviled by anxiety, awaiting great events that might never occur,
Fearfully powerless and worried for friends far away,
Weary and empty in prayer, in thinking, in doing,
Weak, and ready to take leave of it all.
Who am I? This man or that other?
Am I then this ma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ll at once? An imposter to others,
But to me little more than a whining, despicable weakling?
Does what is in me compare to a vanquished army,
That flees in disorder before a battle already won?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you know me, O God. You know I am yours.

In this poem which sings of the deep anguish of Bonhoeffer, the agony of man, we see ourselves. I find my own reflection in it. Who am I? Who am I, really?

The man who thirsts for justice and angers at injustice, is that the real me? Or am I the man who discards rubbish secretly in the dark? Which one is the real me? Just as day and night repeats itself, we, too, oscillate endlessly between a “holy me” and an “evil me”.

The subtitle of the first story of 2 Samuelchapter 23 is “David’s Last Words.” Dear Church, how do you assess David? What kind of person was he? Was he a good or wicked man? Was he a good king or an evil one?

Was he a good man because he stopped himself from murdering Saul even when he could have? Or was he evilas he pushed Uriah to his death out of his lust for Bathsheba? Was he a brave warrior who called upon God’s name in the face of a deadly foe, Goliath? Or was he a coward who just wanted to preserve his life by pretending to be mad before King Achish of Gath?

David’s life was no different from ours. He was sometimes good, but sometimes bad. At times, he walked closely with God, but at others he was far from Him. He was sometimes just, but, at other times, cowardly and unjust.

Which of these is the real David? Was David worthy to be saved? Or did he deserve to be cursed? From Uriah’s perspective, he may deserve condemnation. Then what was God’s assessment of David? Was he good or evil in God’s eyes?

At year’s end, these questions provoke us: Did I live a good life this year? Was I righteous? Or was I evil? Did I live respectful life? Was I a good Christian this year?

First, we need to establish the concept of evil.

The law provides one form of definition about evil. A person who violates the law of the state can be seen as evil. People who commit acts of murder, theft, assault, sexual violence, bribes, etc. are seen as people committing evil.

We may distinguish good and evil biblically. Although the Bible, in its entirety,defines and describes all sorts of wickedness,Psalm 10 is a brief but great guide to who the evil man is. It describes the wicked as such:

The wicked man hunts down the weak
He boasts about the cravings of his heart
He blesses the greedy
His mouth is full of lies and threats
He sneers at all his enemies
Trouble and evil are under his tongue
He catches the helpless and drags them off in his net

There is also a relative viewpoint to evil. Regardless of the law, certain actions offend us. And from a relative point of view, we consider them “evil.” We all do. To some, a car going slowly in the 1st lane seems evil. To some,people who park illegally are wicked. Some think that people who spit are evil. Disrespectful speech may seem wicked to some. If someone does not treat you back, even after you have treated him to lunch or dinner, you may feel deeply offended, and that person may seem wicked to you.These are relative evils.

Then what are God’s views and judgement on evil men? To God, who is the wicked man?

As I mentioned, the conundrum is that not all wicked men are always wicked, and not all good men are always good.This year, we have been both good and bad. At times, we were good, and, at other times, we were bad. To some people we were good, but to otherswe were bad.

I talked about Matthew 25 often. In the last day when Jesus comes to separate the goats from the sheep, He will seewhether we gave Him water when He was thirsty and food when He was hungry. Although I can comprehend the meaning of these words, what I cannot understand is why I sometimes give water to the thirsty, while at other times I refuse to do so. Why do I give food to certain people, but don’t to others?

Our lives are the same. We are not “always” greedy. We normally seem perfectly fine, but on certain occasions we suddenly become greedy because we don’t want to lose a certain thing. Such a person will say that he is usually “not greedy.” But, on certain occasions, he would become extremely greedy and fall because of this greed.

In this sense, we are all wicked—yet not wicked.

Then am I a good man before God? Or a wicked man? Am I the sheep or the goat?

In David’s last words in today’s passage, we see God’s assessment on who is thewicked man. David says, “But evil men are all to be cast aside like thorns,which are not gathered with the hand.”(2 Samuel 23:6)The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says, “But evil people are pulled uplike thornbushes.They are not dug up by hand,but with a sharp spearand are burned on the spot.” (2 Samuel 23: 6-7 CEV) David compares the wicked to thorns thatcannot be gathered with the hand.

From my experience, a “bad student” is not the one with bad grades. Even a student with bad grades can become a good student. A lazy student is not a bad student, either. I can take even a lazy student under my wing. To a professor, a straight-A student is not necessarily the “best” student. Actually, the worst student is someone who is so full of himself that there is simply no way to educate, change, or move him. This is the worst student. He is like“thorns,which are not gathered with the hand.”

David committed adultery with Uriah’s wife. He conducted a census against God’s will. Who can therefore say that David was righteous before God?

Verse 3 to 6 says that David was a king who feared God and ruled in righteousness.

“The God of Israel spoke,the Rock of Israel said to me: ‘When one rules over people in righteousness,when he rules in the fear of God,he is like the light of morning at sunriseon a cloudless morning,like the brightness after rainthat brings grass from the earth.’If my house were not right with God,surely he would not have made with me an everlasting covenant,arranged and secured in every part;surely he would not bring to fruition my salvationand grant me my every desire.” (2 Samuel 23: 3-5)

Did David live such a life? Well, sometimes he did, but sometimes he didn’t. This would be the honest assessment.

Yet, David was always in God’s hands. He always put himself in a position where God could move and touch him. When Nathan the prophet came and delivered God’s rebuke after David murdered Uriah, David wept and repented. He was a manalways in God’s hands. He was a man who always put himself underGod’s rule, a man whom God could move and touch, a man who could “be gathered with the hand.”

This is the blessed man, the good man, and the saved man. This is God’s grace, His love.

Pastor Gordon MacDonald, author of “Ordering Your Private World” and a member of the counseling committee for former president Bill Clinton regarding his sexual misconduct, committed adultery himself but later repented and got back on his feet again.

Bonhoeffer’s poem ends with these lines:

Who am I? This man or that other?
Am I then this ma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ll at once?
[…]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you know me, O God. You know I am yours.

The Lord speaks to us today through David’s last words: “But evil people are pulled uplike thornbushes.They are not dug up by hand,but with a sharp spearand are burned on the spot.” (2 Samuel 23: 6-7 C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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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3: 1 ~ 7

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6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가 누구인가를 돌아봅니다. >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님이자 반 나치 운동가이셨던 분 그리고 독일 고백교회를 설립한 분 중 한 명이신 본회퍼 목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이 옥중에서 쓰신 글 중에 ‘Wer bin Ich(나는 누구인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1944년 7월경에 베를린의 테겔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이 글을 쓰고 약 9개월 후인 1945년 4월 9일, 군사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께 이 글을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감방에서 걸어 나올 때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같이
아주 침착하고 활기차고 흔들림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교도관들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가 도리어 명령하는 사람인 듯
아주 자유롭고 당당하고 명료하다고 하는데.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또한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고 있으면서도
내가 마치 늘 승리해 온 사람처럼
아주 태연하고 평화롭게 미소 짓는다고 하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알고 있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해하고 조마조마하고 병든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색깔과 꽃과 새소리에 굶주려 있는 나
따뜻한 말과 사람의 정에 목말라하는 나

아주 작은 모욕과 사람의 횡포에 치를 떨고
큰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
멀리 있는 친구들을 무기력하게 걱정만 하고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서 멍해져 있는 나
모두와의 작별을 대비하며 풀이 죽어 있는 나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오늘은 이것이다가 내일은 저것인가?
아니면 모두 다인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솔직하게 고백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 고백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낍니다. 이러한 고민과 고백이 사형집행을 앞둔 본회퍼 목사님만의 고민과 고백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정의에 목말라하며 불의에 분노하는 내가 진정한 나인가? 남이 보지 않는 구석에 슬그머니 쓰레기를 갖다 놓는 내가 진정한 나인가?’ 이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바뀌는 삶을 살아가는 이가 나 자신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습니다. >

성경의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다윗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는 선한 왕이었습니까, 악학 왕이었습니까? 자신을 공격하던 사울 왕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살려 주었던 그의 모습에서 선(善)을 발견하십니까? 밧세바를 얻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한 모습에서 악(惡)을 발견하십니까?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히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한 그의 용맹스러움을 기억하십니까? 아니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하던 그의 비겁함을 기억하십니까? 과연 어떤 모습이 진짜 다윗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다윗의 인생이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 그는 선했고, 때로는 악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고, 때로는 하나님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정의롭게 행동했지만, 때로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오늘 본문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공의를 베푸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다윗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과연 악(惡)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악행이라고 보시는 죄악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먼저 악을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회마다 규정해 놓은 법이 있습니다. 그 법규를 지키지 않은 사람을 ‘죄인’, ‘악인’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살인, 도둑질, 폭행, 성추행 등을 일삼는 사람을 악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어 도덕적인 차원에서도 악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가 서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지키는 통념이 있습니다. 그러한 관습과 통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악인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도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시편만 잘 살펴봐도, 그 속에 정말 많은 악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 나타난 악인에 관한 묘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으슥한 골목에 있다가 사람을 쳐 죽이는 사람
야심을 자랑하는 사람
탐욕을 부리는 사람
남을 기만하고 폭언하는 사람
욕설과 악담을 하는 사람
연약한 사람을 그물로 덮쳐서 끌고 가는 사람
학대하는 사람
포악한 사람
간사한 입술을 가진 사람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사람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

그밖에도 성경에는 정말 다양한 악인에 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분명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경험되는 악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준에서 악한 사람이란 일차선 도로에서 저속으로 계속해서 주행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악한 사람이란 뻔뻔하게 불법 주차를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악한 사람은 아무 데나 침을 뱉고 다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악인에 관한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기준에서 악인이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을 가리킵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 악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요?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주님이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구원을 허락한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주님이 배고프고 목말랐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의 본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작은 자를 환대하며 대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선한 자라고 칭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동시에 그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을 바라볼 때 혼란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나는 목마른 자를 환대했는가? 배고프고 연약한 사람을 모른 척하지 않았는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는가?’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어느 때는 모른 체하며 지나간 적도 많습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느라 급급하기도 했습니다. 항상 탐욕을 부린 것은 아니지만, 탐욕이 발동을 부릴 때가 있었습니다. 내 삶을 사느라 바빠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못한 적도 많습니다. 그동안의 나를 정밀하게 분석해 본다면, 정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악인이기도 하고 선인이기도 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분 앞에서 나는 선인입니까, 악인입니까? 또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에는 악인에 대한 규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인을 규정하시는지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사무엘하 23:6 중)

새번역으로도 읽어 보겠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아무도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는 것,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사무엘하 23:6~7 중, 새번역)

악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가시덤불과 같아서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어서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고 강력히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악한 사람이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많은 학생을 만났습니다. 훌륭한 제자들도 많았고, 추억도 많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학생을 가르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 어떤 제자가 좋은 제자입니까? 또 어떤 제자가 나쁜 제자입니까? 제 경우에 나쁜 학생은 이런 학생들이었습니다. 자기주장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가르치는 내용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는 학생입니다. 그런 학생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르쳐 주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에 사로잡혀 변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학생이 가르치기 가장 어렵고 힘든 학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은 관점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어오지 않으려는 사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벗어나려고만 하는 사람이 악인일 것입니다. 한때 다윗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밧세바라는 여인을 아내로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교만했고, 때로는 정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놀랍습니다. 사무엘하 23장 3~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리는 왕은, 구름이 끼지 않은 아침에 떠오르는 맑은 아침 햇살과 같다고 하시고, 비가 온 뒤에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빛과도 같다고 하셨다. 진실로 나의 왕실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아니한가? (사무엘하 23:3~5 중, 새번역)

<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삶이 선한 삶입니다. >

다윗의 삶을 돌아볼 때, 그는 때로 실수하고 잘못을 저질렀으나 늘 하나님 손안에 머물려고 했습니다.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죽게 했을 때도 하나님의 곁에 있으려고 했습니다. 나단을 통해 하나님이 그를 책망하셨을 때, 그는 철저히 회개하며 통곡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스릴 수 있는 자리, 하나님께서 만지실 수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머물며 삶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던 다윗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시편을 지었습니다. 시편을 통해 그의 고백과 감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는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죄악을 철저히 고백하며 통곡했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통회했습니다. 주님 앞에 간절히 소원을 아뢰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간구했습니다. 때로는 울부짖었고, 때로는 회개했으며, 때로는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다윗의 삶입니다. 그렇게 항상 주님의 손안에 있길 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다윗의 복이자 은혜 얻는 삶의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회퍼 목사님이 ‘Wer bin Ich(나는 누구인가)’라는 글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오늘은 이것이다가 내일은 저것인가?
아니면 모두 다인가?

(중략)

나는 누구인가?
이 혹독한 질문이 나를 비웃는다.
오, 하나님!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고백입니다. 나아가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남깁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본회퍼 목사님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사람들은 아무도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는 것,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사무엘하 23:6~7 중, 새번역)

2020년 12월 2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누가 악한 사람인가” (삼하 23:1-7)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93장, 40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삼하 23:1-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2월 2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 본문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에 대해서 평가한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선한 왕입니까, 아니면 악한 왕입니까? 연말을 맞는 우리는 오늘,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나는 선하게 살아왔는가, 아니면 악하게 살아왔는가?’ 

 설교의 요약

    우리는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상대적으로 악하다는 개념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악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람이 항상 악한 것이 아니고 또한 선한 사람이 항상 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우리도 어떤 경우에는 선한 일을 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악한 일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한 사람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선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사람들은 아무도 손으로 움켜 쥘 수 없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는 것,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삼하 23:6, 새번역). 하나님은 다윗의 입을 통해 ‘악인은 움켜쥘 수 없는 가시덤불과 같은 사람’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던 사람입니다. 인구를 계수함으로 자신의 불안함을 채우고 의를 드러내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죄를 범한 다윗이었지만, 다윗은 늘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움켜쥘 수 있도록 자신을 드렸던 사람입니다. 나단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책망 앞에서 통곡하며 회개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잡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다스릴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선한 사람이고 복된 사람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의 ‘나는 누구인가’의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오늘은 이것이다가 내일은 저것인가?

아니면 모두 다인가?

(중략)

나는 누구인가? 이 혹독한 질문이 나를 비웃는다.

오, 하나님!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누기

 1. 올 한해, 하나님께서 나를 손에 잡으시도록 내어드린 사건이나 경험이 있으셨나요?

 2.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까칠하게 만드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올 한해, 하나님께서 손 댈 수 없는 존재로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돌아봅니다. 주님, 부족하고 염치없사오나 나를 받아 주시고, 다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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