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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길은 참된 위로를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장로교 교리 문답서 중의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현재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의지합니다. 재산이 많은 것을 힘으로 생각합니다. 은행 통장에 들어 있는 잔고를 보면서 마음이 뿌듯한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이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위로를 얻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땅이나 아름답고 멋진 외모가 위로가 되는 사람도 있겠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직업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식, 명예 같은 것들이 자랑거리와 위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식들을 보면서 위로를 얻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보다 자식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을 큰 위로로 여기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옛날입니다마는 제가 미국에서 잠시 목회할 때 이민으로 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는 꽤나 좋은 직장에 다니거나 영향력 있는 일을 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세탁소를 운영하거나 궂은일을 어렵게 감당하는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또 지방에서 군수를 하다가 미국에 와서는 청소부 일을 하는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비록 자신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자식들이 이 땅에서 잘 뻗어 나가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그분들에게 큰 위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분도 꽤 있습니다. 폭식을 하거나 술과 담배, 심지어 약물이나 마약 같은 것들을 탐닉하면서 그것이 주는 잠시의 기쁨으로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또 성적인 쾌락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이 주는 잠시의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주는 위로가 너무나도 일시적이고 순간적이기 때문이죠. 그 짧은 순간의 위로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인생을 허비하고 망가뜨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이 한 가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과 더불어서 직업이나 가족도 위로가 될 수도 있겠고요. 또 어떤 경우에는 시기에 따라서 어렸을 때는 외모가 위로가 되다가 나이가 들면서는 재산이, 그 이후에는 자식이 위로가 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가 아닌 다양한 위로를 찾아가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한 가지만을 꼽아라”라는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때마다 다르기도 하고 절대 하나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많은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술과 약물, 성적인 쾌락이나 짧은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깝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편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 중에 그래도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덕목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것은 얼마나 오래 가는 것일까요? 10년이나 20년, 30년 정도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인생 전체에 큰 위로가 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인생 안에서만 위로가 되는 것일 뿐이죠. 우리는 모두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위로를 찾으며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간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위로가 되던 것으로부터 배반이나 배신을 경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직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그것을 위로 삼고 살았던 부모님이 훗날 자녀에게 버림이나 홀대를 받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키웠는데 이럴 수 있는가 후회하지만, 자식으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을 때 얻는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것도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죠. 그러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더 많은 마음을 쓰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 대답을 찾아 참된 안식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 떠나는 여행이 신앙생활이 아닐까 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물론 새벽 기도에 나오는 것도 포함되겠죠. 그리고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헌금 생활로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중요하겠죠. 교회 학교 교사나 찬양대 대원, 여전도회·남선교회 등 여러 제직으로 활동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신앙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유한하고 복잡하며 모순덩어리에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참된 위로와 안식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잠깐 피었다 지는 들꽃과 같은 사람에게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참된 위로와 안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것을 먼저 점검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 하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은 많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고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시편 103편 15~16절 말씀입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 103:15~16)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생은 그저 한 번 들판에서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다. 참으로 짧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면 모든 것들이 다 평등해집니다. 잘 생겼던 사람이나 못생겼던 사람이나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비슷한 수준이 됩니다. 젊었을 때는 아름다움과 못남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60세, 70세, 80세가 되어 가다 보면 얼굴이 비슷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젊은 분들 중에서 못 생겨서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그러면 평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재산이 많은 분들은 그 재산이 힘과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재산이 골칫덩어리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고 상황을 어렵게 하는 단초가 될 때가 있죠. 위로를 주던 것이 도리어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또 나이가 들면 많은 것을 잘 먹던 분들도 비슷한 것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물에 밥을 말아서 먹거나 국에 말아서 조금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는 시간이 우리에게 도래합니다. 지금은 명품이나 멋진 옷을 입고 자랑하지만 어느 시간이 되면 집 밖에 제대로 나가지 못해 그저 잠옷을 입고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평범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다지 그렇게 길지도 않습니다. 인생은 참으로 짧습니다. 그 짧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무엇에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외모도 아니고, 가진 것도 아니요, 먹는 것도 아닙니다. 죽어서나 살아서나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103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1~2)
시편의 기도자는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외칩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해 주신 모든 일들을 하나씩 나열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주신 선물과 같은 일들을 종합하면서 기도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그저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잠시 있다 사라지는 존재인 우리들에게 무엇이 큰 위로가 될까요? 한 가지 위로가 있습니다.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이 긍휼과 인자한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유한한 인생의 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의 풀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들에 핀 그 꽃을 하나님은 처음부터 보고 계셨고, 사라지는 과정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까지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시편의 기도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3~14)
단지 먼지일 뿐이며 티끌로 돌아갈 존재일 뿐인데, 그것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체질과 성분까지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신다는 선언이며 믿음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잊히지 않는다.’, ‘나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만을 참된 위로로 삼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 신앙의 기초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서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까? 세상의 권력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고, 사망의 권세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예수님께서도 걸어가셨습니다. 죽어 가는 길, 그저 들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처럼 사라지는 인생의 길을 예수님께서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도 33세라고 하는 짧은 인생에 모든 것들을 경험하시고 죽음에 내던져지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티끌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그 모든 것들을 휘어잡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하나님은 죽었던 예수를 다시 살려 내심으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처하셨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에 휩싸여 있을 때, 죽음이 그를 감싸고 생명이 끝났을 때, 이제 다 끝났다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죽음 이후의 예수님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살려 내심으로 부활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이후의 삶까지도 보고 계시고 주목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믿음으로 우리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치유를 위한 안수 기도회를 수요일에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는 7월 마지막 수요일에 다시 한번 치유를 위한 안수 기도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많은 분들이 안수 기도에 참여하고 싶어 하셔서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지난 월요일 9시부터 선착순으로 받았는데 1시간이 조금 지나자마자 100명의 안수 기도를 받으실 분들이 마감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신청한 분들은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되는 아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저는 마음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고, 이토록 간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제 마음이 울컥하고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죠. 훌륭한 분들도 참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아프고 어려움에 처한 분들도 상당히 많이 만나게 됩니다. 죽음 앞에 놓여 있는 분들, 사경을 헤매는 분들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악한 모함을 받고 힘들어하는 분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처한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어려움과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이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위로를 받을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목회를 하면서 늘 그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죽음 앞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그래도 위로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우리를 보고 계신다.’라는 이 고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나 누리는 것에만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위로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처럼 위로를 얻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재산과 건강으로 위로를 받죠. 자식으로도 위로를 받고 여러 가지 다른 것들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죠.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온전한 위로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의 삶의 태도를 성경은 ‘경외’라는 말로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03편 17~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7~18)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이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위로이심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받는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경외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경외라는 말을 번역하면 ‘두려워한다’, ‘무서워한다’라는 말로 우선적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경외라는 말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이 되지만, 보다 더 분명한 정확한 경외라는 말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대상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레위기 19장 3절에 있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립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레 19:3)
여기에 사용되는 단어 역시 하나님께 ‘경외한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여러분, 부모를 경외하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느껴지십니까? ‘부모를 무서워하라, 부모를 두려워하고 겁내라’라는 말로 해석할 수 없겠죠. 이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님의 존재를 존경하고 공경하며, 사랑하고 부모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라는 뜻이죠. 그리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것이 경외라는 말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영원히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어 나가는 삶.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라는 이 말을 조금 더 풀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경외’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어 있어서 그것을 모두 종합적으로 말씀드리기에는 이 자리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들을 몇 개 읽어 보려고 합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4)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32)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5:17)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레 25:36)
너는 그[종]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레 25:43)
흥미로운 말씀들이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영원히 돌보신다는 믿음을 위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이 삶은 이웃을 속이지 않고 노인을 공경하며, 장애인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고 이자를 형제들에게서 받지 아니하며, 종을 엄하게 부리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신앙이며, 바로 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내가 죽어서까지도 사랑하신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죽어서나 살아서나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만약 그 위로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우리 소망의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편 103:15~18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신앙의 길은 참된 위로를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장로교 교리 문답서 중의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현재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의지합니다. 재산이 많은 것을 힘으로 생각합니다. 은행 통장에 들어 있는 잔고를 보면서 마음이 뿌듯한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이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위로를 얻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땅이나 아름답고 멋진 외모가 위로가 되는 사람도 있겠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직업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식, 명예 같은 것들이 자랑거리와 위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식들을 보면서 위로를 얻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보다 자식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을 큰 위로로 여기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옛날입니다마는 제가 미국에서 잠시 목회할 때 이민으로 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는 꽤나 좋은 직장에 다니거나 영향력 있는 일을 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세탁소를 운영하거나 궂은일을 어렵게 감당하는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또 지방에서 군수를 하다가 미국에 와서는 청소부 일을 하는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비록 자신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자식들이 이 땅에서 잘 뻗어 나가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그분들에게 큰 위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분도 꽤 있습니다. 폭식을 하거나 술과 담배, 심지어 약물이나 마약 같은 것들을 탐닉하면서 그것이 주는 잠시의 기쁨으로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또 성적인 쾌락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이 주는 잠시의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주는 위로가 너무나도 일시적이고 순간적이기 때문이죠. 그 짧은 순간의 위로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인생을 허비하고 망가뜨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이 한 가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과 더불어서 직업이나 가족도 위로가 될 수도 있겠고요. 또 어떤 경우에는 시기에 따라서 어렸을 때는 외모가 위로가 되다가 나이가 들면서는 재산이, 그 이후에는 자식이 위로가 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가 아닌 다양한 위로를 찾아가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한 가지만을 꼽아라”라는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때마다 다르기도 하고 절대 하나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많은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술과 약물, 성적인 쾌락이나 짧은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깝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편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 중에 그래도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덕목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것은 얼마나 오래 가는 것일까요? 10년이나 20년, 30년 정도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인생 전체에 큰 위로가 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인생 안에서만 위로가 되는 것일 뿐이죠. 우리는 모두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위로를 찾으며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간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위로가 되던 것으로부터 배반이나 배신을 경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직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그것을 위로 삼고 살았던 부모님이 훗날 자녀에게 버림이나 홀대를 받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키웠는데 이럴 수 있는가 후회하지만, 자식으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을 때 얻는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것도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죠. 그러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더 많은 마음을 쓰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 대답을 찾아 참된 안식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 떠나는 여행이 신앙생활이 아닐까 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물론 새벽 기도에 나오는 것도 포함되겠죠. 그리고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헌금 생활로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중요하겠죠. 교회 학교 교사나 찬양대 대원, 여전도회·남선교회 등 여러 제직으로 활동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신앙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유한하고 복잡하며 모순덩어리에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참된 위로와 안식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잠깐 피었다 지는 들꽃과 같은 사람에게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참된 위로와 안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것을 먼저 점검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 하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은 많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고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시편 103편 15~16절 말씀입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 103:15~16)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생은 그저 한 번 들판에서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다. 참으로 짧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면 모든 것들이 다 평등해집니다. 잘 생겼던 사람이나 못생겼던 사람이나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비슷한 수준이 됩니다. 젊었을 때는 아름다움과 못남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60세, 70세, 80세가 되어 가다 보면 얼굴이 비슷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젊은 분들 중에서 못 생겨서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그러면 평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재산이 많은 분들은 그 재산이 힘과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재산이 골칫덩어리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고 상황을 어렵게 하는 단초가 될 때가 있죠. 위로를 주던 것이 도리어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또 나이가 들면 많은 것을 잘 먹던 분들도 비슷한 것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물에 밥을 말아서 먹거나 국에 말아서 조금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는 시간이 우리에게 도래합니다. 지금은 명품이나 멋진 옷을 입고 자랑하지만 어느 시간이 되면 집 밖에 제대로 나가지 못해 그저 잠옷을 입고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평범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다지 그렇게 길지도 않습니다. 인생은 참으로 짧습니다. 그 짧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무엇에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외모도 아니고, 가진 것도 아니요, 먹는 것도 아닙니다. 죽어서나 살아서나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103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1~2)
시편의 기도자는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외칩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해 주신 모든 일들을 하나씩 나열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주신 선물과 같은 일들을 종합하면서 기도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그저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잠시 있다 사라지는 존재인 우리들에게 무엇이 큰 위로가 될까요? 한 가지 위로가 있습니다.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이 긍휼과 인자한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유한한 인생의 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의 풀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들에 핀 그 꽃을 하나님은 처음부터 보고 계셨고, 사라지는 과정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까지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시편의 기도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3~14)
단지 먼지일 뿐이며 티끌로 돌아갈 존재일 뿐인데, 그것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체질과 성분까지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신다는 선언이며 믿음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잊히지 않는다.’, ‘나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만을 참된 위로로 삼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 신앙의 기초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서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까? 세상의 권력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고, 사망의 권세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예수님께서도 걸어가셨습니다. 죽어 가는 길, 그저 들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처럼 사라지는 인생의 길을 예수님께서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도 33세라고 하는 짧은 인생에 모든 것들을 경험하시고 죽음에 내던져지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티끌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그 모든 것들을 휘어잡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하나님은 죽었던 예수를 다시 살려 내심으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처하셨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에 휩싸여 있을 때, 죽음이 그를 감싸고 생명이 끝났을 때, 이제 다 끝났다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죽음 이후의 예수님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살려 내심으로 부활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이후의 삶까지도 보고 계시고 주목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믿음으로 우리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치유를 위한 안수 기도회를 수요일에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는 7월 마지막 수요일에 다시 한번 치유를 위한 안수 기도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많은 분들이 안수 기도에 참여하고 싶어 하셔서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지난 월요일 9시부터 선착순으로 받았는데 1시간이 조금 지나자마자 100명의 안수 기도를 받으실 분들이 마감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신청한 분들은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되는 아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저는 마음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고, 이토록 간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제 마음이 울컥하고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죠. 훌륭한 분들도 참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아프고 어려움에 처한 분들도 상당히 많이 만나게 됩니다. 죽음 앞에 놓여 있는 분들, 사경을 헤매는 분들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악한 모함을 받고 힘들어하는 분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처한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어려움과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이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위로를 받을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목회를 하면서 늘 그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죽음 앞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그래도 위로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우리를 보고 계신다.’라는 이 고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나 누리는 것에만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위로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처럼 위로를 얻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재산과 건강으로 위로를 받죠. 자식으로도 위로를 받고 여러 가지 다른 것들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죠.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온전한 위로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의 삶의 태도를 성경은 ‘경외’라는 말로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03편 17~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7~18)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이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위로이심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받는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경외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경외라는 말을 번역하면 ‘두려워한다’, ‘무서워한다’라는 말로 우선적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경외라는 말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이 되지만, 보다 더 분명한 정확한 경외라는 말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대상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레위기 19장 3절에 있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립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레 19:3)
여기에 사용되는 단어 역시 하나님께 ‘경외한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여러분, 부모를 경외하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느껴지십니까? ‘부모를 무서워하라, 부모를 두려워하고 겁내라’라는 말로 해석할 수 없겠죠. 이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님의 존재를 존경하고 공경하며, 사랑하고 부모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라는 뜻이죠. 그리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것이 경외라는 말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영원히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어 나가는 삶.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라는 이 말을 조금 더 풀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경외’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어 있어서 그것을 모두 종합적으로 말씀드리기에는 이 자리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들을 몇 개 읽어 보려고 합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4)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32)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5:17)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레 25:36)
너는 그[종]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레 25:43)
흥미로운 말씀들이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영원히 돌보신다는 믿음을 위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이 삶은 이웃을 속이지 않고 노인을 공경하며, 장애인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고 이자를 형제들에게서 받지 아니하며, 종을 엄하게 부리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신앙이며, 바로 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내가 죽어서까지도 사랑하신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죽어서나 살아서나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만약 그 위로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우리 소망의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7월 14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두려운 마음, 신앙의 길” (시 103장 15~18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90장, 44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시 103장 15~18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7월 1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살아 있는 현재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는 어떤 것인가요?
설교의 요약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위로하는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들판의 꽃처럼 그렇게 잠시 꽃을 피우고 사라지는 우리에게 무슨 큰 위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한 가지 진정한 위로가 있는데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부활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잊지 않으신다. 내가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며 신앙의 길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태도를 성경은 ‘경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고 경험하는 사람, 즉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외, 즉 두려움은 무서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겁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영원히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영원히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분의 사랑을 늘 인식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삶은 이웃을 속이지 않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장애인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고, 이자를 형제들에게 받지 않으며, 종을 엄하게 부리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은혜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인의 삶의 태도를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죽어서나 살아서나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분명하게 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나누기
-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위로를 경험했던 적이 있나요? 그리고 그 영적인 위로가 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나요? 서로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기 위해 구체적으로 결단하고 실천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마무리 기도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잠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살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주님, 죽어서나 살아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감당하며, 소망을 가지고 이 짧은 인생의 길을 기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