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마라에서 엘림까지

출애굽기 15: 22 ~ 27

김경진 목사

2019.10.20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단어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바로 ‘마라’라는 단어입니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라는 뜻입니다. 웅덩이가 있으나 물이 써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마라’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끌어 가시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또 그곳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합니다. 그들이 수르광야를 지나 사흘 만에 도착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마라입니다. 하지만 마라의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데,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끌어 가시는데, 왜 하필 쓴 물이 나는 마라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지리를 잘 모르셔서 그러셨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25절에,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셨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마라로 이끌어 가셨을까요?
한번 상상해 봅니다. 모래바람이 부는 뜨거운 사막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고, 모래바람만 날리는 광야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길을 만들어 놓았을 법은 하지만, 곧 모래바람으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주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밤낮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안심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습니다. 사흘이 지나는 동안 그들에게 물은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나름 준비해 온 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물통들이 비워집니다. 갈증이 납니다. 이미 물이 떨어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한 물을 쉽게 내어줄 리는 만무합니다.
‘사흘 길’이라는 표현도 눈에 들어옵니다. 성경에서 사흘은 대개 온전한 시간의 최소단위로 사용되곤 합니다. 즉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라는 것은 ‘이제 그들의 목마름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물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사흘을 걸었다면, 이미 인간의 한계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마을도 보이지 않고, 오아시스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 멀리서 나무가 있는 오아시스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방향도 그쪽입니다. 앞서가는 모세의 발걸음이 당당합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은 저 멀리 선 나무와 오아시스를 보며 감사와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멋지게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비록 매일매일 물을 공급받지는 못했지만, 가는 곳마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떨어질 이쯤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아시스를 보여주시는 건 당연하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게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이와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과연 그들 앞에 웅덩이가 나타났습니다. 물이 있습니다. 달려가 그 물을 실컷 들이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쓴 물입니다.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입니다.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급기야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 수 있단 말입니까? 무엇을 마시라는 말입니까?” 그들의 불평은 모세를 향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공포가 엄습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참으면 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목마름을 참고 기다리면 물을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물이 있다고 확신하고 도달한 이곳에 도리어 먹을 물이 없습니다. 먹을 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는 물도 쓴 물뿐이니 마실 수조차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처지였다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불평은 타당해 보입니다. 그들이 공포에 떠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단지 이 사건만 본다면 말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벌써 하나님의 전능성과 위대하심을 잊었습니다. >

그런데 이 사건을 조금 더 넓고 높은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오늘의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일삼고 있는 불평이 참으로 부끄럽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다름 아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이 보도됩니다.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며 쫓아오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일발의 상황입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드렸고, 팔을 벌려 홍해로 향했습니다.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모세가 팔을 내밀자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야말로 위대한 기적입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건넌 후 다시 모세가 손을 들자 홍해 물이 합류합니다. 이에 뒤쫓던 애굽 군사들이 홍해에서 몰살되고 맙니다. 바로 그 장면을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이어지는 출애굽기 15장에는 이 사건을 목격한 후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올리는 찬송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또 이후 19절부터는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하나님께 찬송하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그 내용이 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애굽기 15:21 중)

이스라엘 백성은 곧장 수르광야로 들어갑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대를 몰살시키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한 후 벅찬 가슴으로 찬송하며 수르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습니다. 사흘 뒤 도착한 곳이 마라입니다. 놀라운 기적,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한 자들이 사흘 동안 광야를 걷고, 마라에서 쓴 물을 만나자 이내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신다는 말입니까?”
야고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서 3:10)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사흘 전만 하더라도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린 그들입니다. 벅찬 감격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마라에서 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을 경험한 뒤 사흘간 사막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도달한 곳에서 쓴 물을 마시자, 그들이 하나님께 거칠게 항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벌써 홍해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잊고 말았습니다.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시고 그 길로 걷게 하신 하나님,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던 애굽 군대와 마병을 몰살시키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들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사흘 분의 믿음뿐이었습니다. >

마라의 사건이 있기 사흘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마라의 사건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본문 27절이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애굽기 15:27)

그들은 마라를 지나고 얼마 후 엘림이란 곳에 이릅니다. 그곳은 물이 넘치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들이 마라와 엘림의 위치를 신빙성 있게 알려줍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마라에서 엘림까지 거리는 약 17㎞입니다. 40리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마라에서 엘림까지 도보로 이동하면 약 하룻길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지도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스라엘의 행로를 상상해 봅시다. 광야를 거쳐 사흘 만에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쳐 있었고, 물이 모자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다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자, 그들의 공포는 놀라울 정도로 증폭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다음 날 그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엘림’이라 불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샘이 열두 개나 있고, 종려나무도 70그루가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커다란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나흘만 참았더라면, 아니 이때 하루만 더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흘만 참았더라면, 그들은 찬송에서 찬송으로 이어지는 노래를 부르며 기뻐 뛰었을 것입니다.
나흘 전에 그들은 홍해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애굽의 온 군대를 홍해에 잠기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도하면서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나흘 후에는 엘림에서 또다시 풍성한 물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흘만 참았더라면, 마라에서 불평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깊이 생각하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 사흘 분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나흘 분의 믿음만 있어도, 우리에게 부끄러운 불평과 고통스러운 외침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사흘 분밖에 되지 않는 믿음만 있기에,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닥을 드러내는 물통만 봐도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낸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입니다.
다시 성경을 봅니다. 하나님이 원래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시지 않았습니까?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나흘 길을 걸어 엘림에서 쉬도록 하시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이루는 과정에서 수르광야를 거쳐야 했고, 쓴 물을 내는 마라도 거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곳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곳에 장막을 치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음 목적지인 엘림으로 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꿔 주십니다. >

룻기 1장을 보면, 또 다른 마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자,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간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고부가 모두 남편을 잃습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두 아들도 잃고, 처량하게 이방 며느리만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여인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나오미’입니다. ‘기쁨’, ‘희락’이라는 뜻의 이름, 나오미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룻기 1:20~21)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나오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녀를 어떻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다시 그녀를 나오미, 즉 기쁨과 희락을 회복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보아스로 하여금 기업을 무르게 하시어, 며느리 룻을 통해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하시며, 마침내 다윗 왕의 계보에 속하는 복을 얻게 하십니다. 나오미가 말했던 괴로움의 정점, 바로 그 ‘마라’와 같은 순간은 결코 생의 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온전히 알지 못한 채 조급하게 보채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사흘 분의 믿음만 가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고 있지만, 하루만 더 가면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엘림으로 향하는 도중에 있을 뿐입니다. 과정일 뿐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마라라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각자 다를 것입니다. 카드빚에 허덕이는 안타까운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의 폭력, 또는 상사의 폭력이나 폭언에 힘없이 주저앉고 마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잘 풀리지 않고 모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을 놓치게 된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별일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라에 우리가 정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조금 더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조금만 더 가면 엘림이 있습니다. 엘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사흘 분의 물, 사흘 분의 믿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놀랍고 힘이 되는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우하시는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고 공포에 사로잡혀 불평하고 원망하던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벌을 내리지도 않으셨습니다. 모세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꺾게 하시곤 그것을 물에 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뭇가지를 넣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나뭇가지가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물이 변화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저 나뭇가지는 상징적인 도구이고, 하나님께서 그 순간 창조의 손으로 쓴 물을 단물로 바꿔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 원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포를 아시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한계를 아시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새 존재로 변화시키며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

한편 오늘 말씀을 읽어 가면서 조금 더 살펴볼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마라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이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애굽기 15:26)

놀라운 말씀을 하나님이 남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이곳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맥락 상 어울리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서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마라의 쓴 물을 먹은 사람들이 다 병에 걸렸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단물을 주시면서 그들을 치료하셨다는 의미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곳에서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쓴 물을 단물로 바꿔 주신 것으로 마무리 하면 되었을 텐데, 왜 그곳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며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 치료자가 되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이 말씀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합니까? 이 사건과 관련해 ‘이처럼 약재가 될 나무를 하나님이 이 땅에 많이 심어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면 나무와 약재를 캐고 다듬어 사용하고 있는 한방 의학의 성경적인 기초를 전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마치 드론을 띄워 이스라엘의 긴 여정, 홍해에서 시작해 엘림에 이르는 여정을 한눈에 들여다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따르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홍해 사건은 구원의 사건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함께 세례 받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인치시고 세례를 주신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수르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사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아니, 사실은 나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엘림은 나흘 후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일흔 그루와 열두 샘이 있는 곳, 풍부한 땅, 약속이 있는 그 땅은 나흘 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 길 밖에는 갈 처지가 못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 한계치에 ‘마라’라는 장소가 자리합니다. 쓴 물을 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의 한계를 아시고,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엘림에 이르기까지 거뜬히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물을 변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이제부터 인생을 살아가면서, 광야의 길을 걸어가면서, 한계에 부딪힐 일들이 많을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목마름을 호소하고, 죽음에 다다르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법도와 율례를 기억하여라. 너희가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순종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목마름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는 치료의 하나님이며, 쓴 것을 단 것으로 바꾸는 치료의 하나님이다. 나의 치료를 받고, 너는 여행을 계속하라. 곧 엘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너는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쓰러져서는 안 된다. 마라까지의 거리가 너의 한계인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여기까지 오기에도 힘들었다는 것을 내가 안다. 너의 목마름, 너의 공포를 내가 안다. 이제 이곳에서 너와 계약을 맺고자 한다. 네가 나를 따르고 순종하면, 그때마다 내가 너를 지켜 내리라. 너를 치료하리라. 너의 환경을 치료하리라. 나는 치료의 하나님이 되리라.”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열왕기상 19:7 중)

이에 엘리야가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의 힘에 의지해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호렙에 이르기까지, 엘림에 이르기까지 치료하시고, 먹이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라파, 주님은 치료의 하나님입니다.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주님을 저와 여러분 안으로 모셔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Between Marah and Elim
Exodus 15:19-27

In today’s scripture, the word “Marah” draws our attention. Marah means “bitterness” or “suffering.” Man could not live there because the water was bitter.

Exodus was a journey led by God. GodHimself led the Israelites with pillars of fire and cloud. But after crossing the Desert of Shur, the Israelites arrived at Marah after a three-day journey.The water there was bitter. Why did God lead them there? Did God lack knowledge of geography? I don’t think so. In verse 25 of today’s passage, it says that the Lord “put them to the test.” So, we can assume that God had an intention in leading them to Marah. What was it?

Imagine the Israelites crossing a hot, arid desert. All around them is sand, and all that is seen is the horizon. Fortunately, God Himself is leading them with pillars of fire and cloud, which makes them feel safe. But after three days they run out of water. The heat and thirst are unbearable. No one shares their water. There is no sign of life. No villages. No oases. Suddenly, they spot an oasis! God’s pillar of cloud leads them there. Even Moses marches confidently.

When the Israelites saw the oasis, they probably felt grateful and hopeful. ‘Yes, God is leading us! He may not lead us to water every day, but He is definitely with us!’ When they finally arrived at the spring of Marah, they would have rushed to take a drink. But, alas, the water was bitter.

How disappointed they were. They grumbled against Moses, saying, “What are we to drink?”Fear swept through them. What would you do if you were in their shoes? I think we would respond likewise. Thus, their grumbling, disappointment, and fear seem justified. Well, only if we narrow our focus to the events of today’s passage.

If we broaden our perspective, however, we will realize that the Israelites ought to be ashamed of their words and behavior at Marah. Do you know what happened right before the events at Marah? As you may all know, they crossed the Red Sea!With Pharaoh’s army and chariotsat their heels, they crossed the water as it parted miraculously. When Moses stretched out his arm, God made a way and the Israelites walked through the sea on dry land. And when Moses stretched out his arm again, the waters closed, hurling both horse and driver into the sea.

After this miracle, Moses starts to sing a song of praise in chapter 15 of Exodus. Then, Miriam, his sister and prophetess, sings a song, too, from verse 19. In Exodus 15:21 she sings, “Sing to the Lord,for he is highly exalted.Both horse and driverhe has hurled into the sea.”

Then the Israelites enter the Desert of Shur. After a three-day journey, they reach Marah. In just three days since the miracle at the Red Sea, they start to grumble about the bitter water: “What are we to drink?”

The Book of James says, “Out of the same mouth come praise and cursing. My brothers and sisters, this should not be.” (James 3:10) Indeed, we should not praise and curse with the same mouth. But this is what the Israelites did. They complained to God. They forgot the things that He had done for them. They forgot His power. In just three days, they had forgotten the greatness of God who parted the waters, made them walk through the sea on dry land, and hurled Pharaoh’s army into the raging waters. What do you think? Can you still defend the Israelites?

We looked at what happened before Marah. Now, let’s look at what happens after it. Read verse 27 of today’s passage: “Then they came to Elim, where there were twelve springs and seventy palm trees, and they camped there near the water.” This verse tells us that shortly after leaving Marah, the Israelites arrive at a lush place called Elim.

Today, the exact locations of Marah and Elim are unknown. But archaeologists surmise that the distance between the two places was about 17 kilometers, which, for the Israelites, was about a one-day journey. So, imagine their journey. After crossing the Red Sea, they travel for threedays through the desert until they reach Marah. Exhausted, theyare swept with fear after seeing that the water is bitter. But do you know what was waiting for them in just a day’s journey ahead? Lush Elim—where there were twelve springs and seventy palm trees. All this was just a day’s journey ahead.

However, their endurance only lasted three days. After three days they grumble and vent out against God at Marah. If only they had endured oneday more—that is, four days—they would have continued to praise God, as they did at the Red Sea. They wouldn’t have grumbled or trembled.

Perhaps man’s faith is such. It is so weak that it lasts only three days. If only we had a faith that lasted one day more… We would not make such shameful complaints againstGod. But, sadly, our faith is weak, for which I repent. We complain to God the moment we face hardship or taste bitter water.

Let’s go back to today’s scripture. From the very beginning, God had prepared everything for the Israelites’in their journey. He had planned for them to cross the Red Sea andreach Elim in four dayswhere they wouldrest. This was His plan. But, on their way, they had to cross the Desert of Shur and Marah where the water was bitter. But God intended these places to be stopovers, not the final destination. After passingthem by, they would reach Elim.

We complain to God because we constantly nag Him for things without a full knowledge of His plans and intentions. In other words, our complaints come from a lack of faith. Our faith lasts only three days.

God has prepared an oasis called Elim. We may now be at Marah, drinking bitter water, but in a day’s time we will reach Elim. Marah is just a stopover in our journey to Elim. For you, where is “Marah”? It may be a dark hour when you are struggling with debt. Or it may be a time of suffering due to an abusive spouse or boss. You may have lost everything because your business failed. You may have lost a loved one. You may be sick or have a disability. All these may be your “Marah”.

But God does not intend for us to stay at Marah. He wants us to march a little farther because Elim is only a day’s journey ahead. He has prepared Elim for us. The problem, however, is that we have water for only three days—that is, faith that lasts only three days.

But let me tell you something amazingly encouraging. What was God’s response to the Israelites when they grumbled at Marah? Did He scold them and beat them up? No. He told Moses to take a piece of wood and throw it into the water, making it fit to drink. It isn’t clear what the piece of wood signified exactly. It may have caused a chemical transformation or may be just a symbol for a miracle. The important thing is that our Lord is a kind God. Seeing our fear, He changes bitter water into sweet water, even though a big oasis is only a day’s journey ahead.

However, one thing perplexes us in today’s scripture. In verse 27 it says that the Lordissued a ruling and instruction for them and put them to the test. ThenGod says, “If you listen carefully to the Lordyour God and do what is right in his eyes, if you pay attention to his commands and keep all his decrees, I will not bring on you any of the diseases I brought on the Egyptians, for I am the Lord, who heals you.” (Exodus 15:26)

Why does God say this at this very moment? What is His intention? I can understand why He changed bitter water into sweet water. But I don’t quite get why He issued a ruling and said that He would heal us if we keep all His decrees.

To understand God’s intention, we must take a bird’s-eye view. God parted the Red Sea and redeemed the Israelites. He made them His. And they started their journey into the desert with God’s guidance. They had to walk four days in order to reach Elim, the promised place, where there was water and trees. But the Israelites could only walk for three days. This was man’s limit. So, God prepared a place called Marah. The water there was bitter. But since they would die of thirst, God changed the bitter water into clean water so that they would be able to reach Elim.

This is when He says, ‘In life’s arduous journey, in the wilderness, you will reach a limit. You will cry out to Meout of unbearable thirst. You will feel as if you are almost dying. Then, remember these decrees and commandments that I give you. If you obey them, I will be your God, who heals you. I will cast out death’s power that comes with unbearable thirst. And I, the God of healing, will make your water fit to drink. Be healed by Me and continue your journey for you will soon reach Elim.’

‘I know that your limit is Marah. I know that you have struggled to come this far. I know your thirst, your fears. Here, I wish to make a covenant with you. If you follow and obey Me, I will protect you. I will heal you. I will heal even your surroundings. I am God who heals.’

Elijah once prayed that he might die under a broom bush. God sent an angel and gave him some bread and water. The angel said, “Get up and eat, for the journey is too much for you.” So, Elijah got up, ate, and pulled up his strength and went the forty-day journey to Mount Horeb.

God heals us, feeds us, and raises us up until we reach Horeb and Elim. He is Jehovah Rapha, our Healer. In Him, we put our faith and trust.

btn_switch

출애굽기 15: 22 ~ 27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단어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바로 ‘마라’라는 단어입니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라는 뜻입니다. 웅덩이가 있으나 물이 써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마라’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끌어 가시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또 그곳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합니다. 그들이 수르광야를 지나 사흘 만에 도착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마라입니다. 하지만 마라의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데,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끌어 가시는데, 왜 하필 쓴 물이 나는 마라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지리를 잘 모르셔서 그러셨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25절에,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셨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마라로 이끌어 가셨을까요?
한번 상상해 봅니다. 모래바람이 부는 뜨거운 사막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고, 모래바람만 날리는 광야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길을 만들어 놓았을 법은 하지만, 곧 모래바람으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주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밤낮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안심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습니다. 사흘이 지나는 동안 그들에게 물은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나름 준비해 온 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물통들이 비워집니다. 갈증이 납니다. 이미 물이 떨어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한 물을 쉽게 내어줄 리는 만무합니다.
‘사흘 길’이라는 표현도 눈에 들어옵니다. 성경에서 사흘은 대개 온전한 시간의 최소단위로 사용되곤 합니다. 즉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라는 것은 ‘이제 그들의 목마름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물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사흘을 걸었다면, 이미 인간의 한계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마을도 보이지 않고, 오아시스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 멀리서 나무가 있는 오아시스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방향도 그쪽입니다. 앞서가는 모세의 발걸음이 당당합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은 저 멀리 선 나무와 오아시스를 보며 감사와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멋지게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비록 매일매일 물을 공급받지는 못했지만, 가는 곳마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떨어질 이쯤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아시스를 보여주시는 건 당연하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게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이와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과연 그들 앞에 웅덩이가 나타났습니다. 물이 있습니다. 달려가 그 물을 실컷 들이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쓴 물입니다.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입니다.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급기야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 수 있단 말입니까? 무엇을 마시라는 말입니까?” 그들의 불평은 모세를 향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공포가 엄습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참으면 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목마름을 참고 기다리면 물을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물이 있다고 확신하고 도달한 이곳에 도리어 먹을 물이 없습니다. 먹을 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는 물도 쓴 물뿐이니 마실 수조차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처지였다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불평은 타당해 보입니다. 그들이 공포에 떠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단지 이 사건만 본다면 말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벌써 하나님의 전능성과 위대하심을 잊었습니다. >

그런데 이 사건을 조금 더 넓고 높은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오늘의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일삼고 있는 불평이 참으로 부끄럽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다름 아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이 보도됩니다.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며 쫓아오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일발의 상황입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드렸고, 팔을 벌려 홍해로 향했습니다.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모세가 팔을 내밀자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야말로 위대한 기적입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건넌 후 다시 모세가 손을 들자 홍해 물이 합류합니다. 이에 뒤쫓던 애굽 군사들이 홍해에서 몰살되고 맙니다. 바로 그 장면을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이어지는 출애굽기 15장에는 이 사건을 목격한 후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올리는 찬송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또 이후 19절부터는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하나님께 찬송하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그 내용이 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애굽기 15:21 중)

이스라엘 백성은 곧장 수르광야로 들어갑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대를 몰살시키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한 후 벅찬 가슴으로 찬송하며 수르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습니다. 사흘 뒤 도착한 곳이 마라입니다. 놀라운 기적,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한 자들이 사흘 동안 광야를 걷고, 마라에서 쓴 물을 만나자 이내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신다는 말입니까?”
야고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서 3:10)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사흘 전만 하더라도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린 그들입니다. 벅찬 감격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마라에서 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을 경험한 뒤 사흘간 사막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도달한 곳에서 쓴 물을 마시자, 그들이 하나님께 거칠게 항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벌써 홍해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잊고 말았습니다.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시고 그 길로 걷게 하신 하나님,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던 애굽 군대와 마병을 몰살시키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들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사흘 분의 믿음뿐이었습니다. >

마라의 사건이 있기 사흘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마라의 사건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본문 27절이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애굽기 15:27)

그들은 마라를 지나고 얼마 후 엘림이란 곳에 이릅니다. 그곳은 물이 넘치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들이 마라와 엘림의 위치를 신빙성 있게 알려줍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마라에서 엘림까지 거리는 약 17㎞입니다. 40리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마라에서 엘림까지 도보로 이동하면 약 하룻길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지도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스라엘의 행로를 상상해 봅시다. 광야를 거쳐 사흘 만에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쳐 있었고, 물이 모자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다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자, 그들의 공포는 놀라울 정도로 증폭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다음 날 그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엘림’이라 불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샘이 열두 개나 있고, 종려나무도 70그루가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커다란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나흘만 참았더라면, 아니 이때 하루만 더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흘만 참았더라면, 그들은 찬송에서 찬송으로 이어지는 노래를 부르며 기뻐 뛰었을 것입니다.
나흘 전에 그들은 홍해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애굽의 온 군대를 홍해에 잠기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도하면서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나흘 후에는 엘림에서 또다시 풍성한 물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흘만 참았더라면, 마라에서 불평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깊이 생각하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 사흘 분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나흘 분의 믿음만 있어도, 우리에게 부끄러운 불평과 고통스러운 외침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사흘 분밖에 되지 않는 믿음만 있기에,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닥을 드러내는 물통만 봐도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낸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입니다.
다시 성경을 봅니다. 하나님이 원래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시지 않았습니까?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나흘 길을 걸어 엘림에서 쉬도록 하시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이루는 과정에서 수르광야를 거쳐야 했고, 쓴 물을 내는 마라도 거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곳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곳에 장막을 치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음 목적지인 엘림으로 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꿔 주십니다. >

룻기 1장을 보면, 또 다른 마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자,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간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고부가 모두 남편을 잃습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두 아들도 잃고, 처량하게 이방 며느리만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여인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나오미’입니다. ‘기쁨’, ‘희락’이라는 뜻의 이름, 나오미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룻기 1:20~21)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나오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녀를 어떻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다시 그녀를 나오미, 즉 기쁨과 희락을 회복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보아스로 하여금 기업을 무르게 하시어, 며느리 룻을 통해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하시며, 마침내 다윗 왕의 계보에 속하는 복을 얻게 하십니다. 나오미가 말했던 괴로움의 정점, 바로 그 ‘마라’와 같은 순간은 결코 생의 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온전히 알지 못한 채 조급하게 보채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사흘 분의 믿음만 가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고 있지만, 하루만 더 가면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엘림으로 향하는 도중에 있을 뿐입니다. 과정일 뿐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마라라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각자 다를 것입니다. 카드빚에 허덕이는 안타까운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의 폭력, 또는 상사의 폭력이나 폭언에 힘없이 주저앉고 마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잘 풀리지 않고 모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을 놓치게 된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별일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라에 우리가 정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조금 더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조금만 더 가면 엘림이 있습니다. 엘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사흘 분의 물, 사흘 분의 믿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놀랍고 힘이 되는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우하시는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고 공포에 사로잡혀 불평하고 원망하던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벌을 내리지도 않으셨습니다. 모세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꺾게 하시곤 그것을 물에 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뭇가지를 넣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나뭇가지가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물이 변화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저 나뭇가지는 상징적인 도구이고, 하나님께서 그 순간 창조의 손으로 쓴 물을 단물로 바꿔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 원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포를 아시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한계를 아시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새 존재로 변화시키며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

한편 오늘 말씀을 읽어 가면서 조금 더 살펴볼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마라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이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애굽기 15:26)

놀라운 말씀을 하나님이 남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이곳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맥락 상 어울리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서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마라의 쓴 물을 먹은 사람들이 다 병에 걸렸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단물을 주시면서 그들을 치료하셨다는 의미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곳에서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쓴 물을 단물로 바꿔 주신 것으로 마무리 하면 되었을 텐데, 왜 그곳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며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 치료자가 되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이 말씀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합니까? 이 사건과 관련해 ‘이처럼 약재가 될 나무를 하나님이 이 땅에 많이 심어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면 나무와 약재를 캐고 다듬어 사용하고 있는 한방 의학의 성경적인 기초를 전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마치 드론을 띄워 이스라엘의 긴 여정, 홍해에서 시작해 엘림에 이르는 여정을 한눈에 들여다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따르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홍해 사건은 구원의 사건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함께 세례 받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인치시고 세례를 주신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수르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사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아니, 사실은 나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엘림은 나흘 후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일흔 그루와 열두 샘이 있는 곳, 풍부한 땅, 약속이 있는 그 땅은 나흘 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 길 밖에는 갈 처지가 못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 한계치에 ‘마라’라는 장소가 자리합니다. 쓴 물을 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의 한계를 아시고,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엘림에 이르기까지 거뜬히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물을 변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이제부터 인생을 살아가면서, 광야의 길을 걸어가면서, 한계에 부딪힐 일들이 많을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목마름을 호소하고, 죽음에 다다르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법도와 율례를 기억하여라. 너희가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순종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목마름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는 치료의 하나님이며, 쓴 것을 단 것으로 바꾸는 치료의 하나님이다. 나의 치료를 받고, 너는 여행을 계속하라. 곧 엘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너는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쓰러져서는 안 된다. 마라까지의 거리가 너의 한계인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여기까지 오기에도 힘들었다는 것을 내가 안다. 너의 목마름, 너의 공포를 내가 안다. 이제 이곳에서 너와 계약을 맺고자 한다. 네가 나를 따르고 순종하면, 그때마다 내가 너를 지켜 내리라. 너를 치료하리라. 너의 환경을 치료하리라. 나는 치료의 하나님이 되리라.”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열왕기상 19:7 중)

이에 엘리야가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의 힘에 의지해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호렙에 이르기까지, 엘림에 이르기까지 치료하시고, 먹이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라파, 주님은 치료의 하나님입니다.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주님을 저와 여러분 안으로 모셔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2019년 10월 2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마라에서 엘림까지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36장, 37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출15:22-2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0월 2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마라는 “쓰다. 괴롭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르광야를 지나 사흘 만에 도착한 곳은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는 “마라”라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쓴 물을 내는 장소로 인도하셨을까?

설교의 요약

사흘이 흘렀습니다.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였다.”는 뜻은 이제 그들의 목마름이 최고조에 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 앞에 웅덩이가 드러났지만, 먹을 수 없었습니다. 홍해의 기적(출15장)을 경험하고 나서 사흘 동안 사막 길을 걸었지만, 마라에서 쓴 물을 한번 마시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거칠게 항의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에 마른땅을 만드시고 그 길로 걷게 하신 하나님, 애굽의 군대와 마병들을 몰살시키셨던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마라의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에 이르러 그곳에서 장막을 쳤습니다(27). 학자들에 의하면 마라에서 엘림까지는 약 17km정도로 대략 하룻길 정도라고 합니다. 하루만 참고 걸으면 샘이 열두 곳이나 있고, 종려나무가 70개나 있는 엘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나흘만 참았더라면 홍해에서 찬양하고, 엘림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사흘 분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합니다. 나흘 분의 믿음만 있어도 우리에게 부끄러운 불평과 고통스런 외침이 없을 수도 있을텐데…

하나님은 원래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수르광야를 거쳐는 가지만, 그곳이 결코 종착역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듯과 의도를 온전히 알지 못한 채 조급하게 보채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흘 분의 믿음만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마라라는 쓴 곳에서 쓴 물을 마시지만, 하루만 지나면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라에서 우리가 정착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루만 더 전진하면 엘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고 공포에 사로잡혀 불평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모세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서 그 물에 넣으라고 하셨고, 그 쓰던 마라의 물은 단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한계를 아시고,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백성들과 법도와 율례를 세우시고, 그것에 순종하고 따르면 내가 너희의 치료하는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출15:26)고 약속하십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목마름을 호소하고, 죽음에 다다르는 경험에 직면할 때에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순종하면 치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호렙에 이르기까지, 엘림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치료하시고, 먹이시고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라파, 주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누기

1. 우리 인생을 괴롭게 만드는 쓴 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셨습니까?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줄 방법이 있습니까?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마라와 같은 쓴 물을 마시는 자리에도 함께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엘림에 이르기까지, 호렙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우리를 치료하시고, 우리의 환경을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