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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 : 17 ~ 30
17 ~ 30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뒤에야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예수님과 더불어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그리고 군중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죽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 돌문을 옮겨 놓게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신 장면은 요한복음 11장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말씀에는 여러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중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그 내용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과 나사로 사이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마리아 그리고 마르다 사이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고, 감정이 섞인 대화가 오고갑니다. 여러분과 함께 그 본문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11장 첫 절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베다니에 한 병자가 있는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입니다. 이 나사로는 예수님이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마리아와 마르다도 예수님이 아끼던 자매들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어 앓고 있을 때 예수께 사람을 보내 속히 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이 곧장 달려오시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중한 상태라는 소식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말씀만 남기시곤 그곳에 남아 있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1장 6~7절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한복음 11:6~7)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꿈쩍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주님은 “여기서 이틀 더 머물자.”라고 하시며, 나사로가 있던 곳으로 발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이틀이 지나고서야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시며, 그제야 움직이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것도 베다니로 가자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예수님은 마치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을 때입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가 오리쯤 되었다는 성경의 증언을 확인할 때, 대략 2~3km 남짓한 거리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충분히 빠른 시간 내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늦추어 베다니에 도착하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멀리 멀리 돌아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왜 이토록 예수님은 늦장을 부리셨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곧장 베다니로 달려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기대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웬일인지 그 기대를 이루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께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천히 마을로 들어오실 때,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을 어귀로 나갑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묘사하는 구절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요한복음 11:20)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리아는 왜 예수께 나아가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에게 나아가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단서를 예수께 토로하는 마르다의 원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마르다와 같은 마음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 나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한복음 11:21)
예수님에게 실망한 게 분명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거예요!”라고 원망 섞인 토로를 쏟아낸 마르다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왜 그리도 우리가 간절히 원하던 시간에 함께하지 않으셨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주님은 왜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찾던 장소에 없으셨습니까?’라는 한탄입니다. 주님께 마음이 상했습니다.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묻어나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애타게 찾았는데,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는데, 얼마든지 빨리 오실 수도 있었는데 왜 이제야 오냐는 하소연입니다.
제가 목회했던 교회에서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한 성도가 그만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온통 그분의 소식으로 교인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의 믿음을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모든 교우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했습니다. 목사님도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자리에 초청했습니다. 기도 체인을 만들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온 교우가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급기야 철야기도까지 참여하며 환우를 위해 한마음과 한뜻으로 기도했습니다. 목사님의 열정적인 기도가 교우들에게 감동이 되었고, 병에 걸린 형제도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위에 믿지 않던 사람들도 그 형제가 나으면 자신도 하나님을 믿겠노라며 교회 주위를 서성거렸습니다. 점차 주님이 그 형제를 고쳐주실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병세도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교우들도 환호했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하나님이 완치해 주시리라는 마음으로 기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몸에서 이상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무균실에 들어가 며칠을 연명하던 중, 그만 그 형제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형제를 잃은 후 교회는 온통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의 영적인 위상도 떨어졌습니다. 사람들도 만약 하나님이 그 형제를 살려주셨다면 아마 열 명은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온 교우가 실망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그 형제를 살려주셨다면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텐데…. 교회도 부흥하고 많은 사람들도 구원을 얻고, 믿음도 성장하고, 교회가 하나가 되었을 텐데…. 왜 하필 이때 그를 데려가셨을까? 모든 게 다 좋아 보였는데 왜 그러셨을까?’ 많은 교우가 의문을 품으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니 제가 부임했을 때도 교우들에게 “기도합시다.”라고 하면, 몇몇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기도에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신 다음부터 저는 기도를 끊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던 이들 중, 그 일 이후 교회를 떠난 이들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때 능력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을까요? 그때 한 번만 능력을 베풀어 주셨더라도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었던 찰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 단단히 삐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지만 응답 받지 못하고 그저 방치하신 것만 같은 주님에 대한 배신감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었기에 실망감은 더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번만큼은 해결해 주실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적어도 하나님이 개입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래야 모든 게 예상대로 맞아 떨어지는데, 아무런 응답도 해 주지 않으신 주님 때문에 실망과 좌절감에 빠진 분들이 많습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한두 살쯤 되었을 때, 아빠가 퇴근하는 모습을 아파트 난간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너무 반가워 아빠를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그만 난간을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를 붙잡고 부모는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며칠 동안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부부는 그날 이후 주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으로 마음이 가득 차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셨다면 이리 되지는 않았겠죠! 그러니 저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이 그 속에 가득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외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통스러운 절규처럼 말입니다.
시련을 대처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방식이 갈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왜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9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한복음 11:39 중)
내가 그토록 기도한 문제는 이미 끝났습니다. 모든 게 종결되었습니다. 거기서 냄새까지 납니다.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이 오신다 한들 무엇이 변화되겠습니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왜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가만히 계신 것입니까? 왜 다른 곳에 머물다 이제야 오시는 것입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돌아보지 않으신 그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절망의 순간에 마르다와 미라아의 반응이 조금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똑같이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이라는 절망감은 있었지만, 그 태도가 사뭇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마치 신앙의 모범생과 같은 모습으로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희망을 두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2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한복음 11:22)
마르다는 예수님이 여전히 무언가를 하실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사로를 그 자리에서 살려내실 것이라는 무모한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께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기대만큼은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신앙의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11:23)
그때 마르다는 나름의 신학적 지식을 갖고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1:24 중)
즉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나사로를 살려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날이 이를 때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죽은 자도 살리는 생명이다.” 이렇게 자신이 생명의 근원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한복음 11:27 중)
공관복음서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으로 나타난 이 고백이, 요한복음에서는 마르다의 고백으로 소개됩니다. 나아가 마르다는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살려 내라고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에게만 집중합니다. 무엇을 해 주시느냐, 해 주시지 않느냐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그녀입니다. 주님이 누구신가에 집중합니다. 상황이나 예수님의 특별한 사역에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는 그것만을 바라봅니다.”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실망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에게 나와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여전히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신앙의 모범생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앙의 열등생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마리아’입니다. 적어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그녀는 분명 열등한 신앙의 자리에 서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와 달랐습니다. 이 시련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나가지 않습니다. 집안에 그저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방안에 갇혀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깊은 원망과 실망감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나사로는 무덤이라는 좁은 공간에 죽은 채로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잃은 마리아 역시 또 다른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집안이란 작은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밖으로 나서지 않습니다. 마치 그녀는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 나는 예수님이 싫어요. 왜 내 오라비를 죽도록 방치하셨어요? 나는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거예요. 여기서 더는 나가고 싶지도 않아요. 예수님도 싫고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냥 여기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마을 어귀에서 마르다를 부르십니다.
이때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돌아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요한복음 11:28)
마리아는 실망감 때문에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떠나간 사람처럼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으셨다고 증언합니다. 마리아를 부르고 계시는 예수님이 보입니까? 마리아를 어떻게 부르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실망하고 절망한 마리아, 그래서 더는 예수님을 찾지 않는 마리아, 방안에 갇혀 있는 그 마리아를 향해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빛에서 이러한 음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야, 나오라. 그 절망의 방에서 나오라. 불신의 방에서 나오라. 실망의 방에서 나오라. 마리아야 나오너라.”
마르다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리아는 그제야 급히 예수께 나아갑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표현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요한복음 11:30)
마리아가 마을 어귀로 나올 때까지 예수님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더 다가가시면 더 빨리 만났을 텐데 주님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를 부르신 후에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장면이 어떻게 보입니까? 저는 이 모습이 예수님이 돌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신 후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던 모습과 연관되어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라고 명령하신 다음 그를 기다리셨던 것처럼, 지금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해 “마리아야, 나오라.”라고 하신 뒤 그녀가 당신 앞에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고 계실까요? 예수님은 죽은 오라비로 인해 상처받은 마리아가 스스로 만든 실망 무덤에서 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절망의 자리, 낙망의 자리, 고립의 자리에서 그녀가 벗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아가 마리아가 예수께 나왔을 때, 그녀는 마르다와 똑같은 안타까움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32절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한복음 11:32)
마리아는 지금 마르다와 똑같이 주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마르다처럼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원망과 안타까움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그녀의 마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하러 나온 마리아를 맞아주시며, 울고 있는 그녀를 위로하십니다. 그녀를 나무라거나 믿음이 적다고 지적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의 믿음을 테스트하지도 않으셨고, 도리어 그녀와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5)
마리아는 마르다처럼 신앙고백 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저 슬퍼하며 주님을 원망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물 흘리며 하염없이 슬퍼하던 그녀를 주님이 보듬으십니다. 그녀와 함께 우시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립니다. 11장 37절입니다.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한복음 11:37)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세상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을 들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 그때 계셨더라면….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더라면….”이라고 말하며 아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엄마 뱃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이 멎었습니다. 죽은 아이를 몸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던 어머니, 너무 일찍 떠나버린 딸로 인해 지금까지 슬퍼하며 고통 받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들이 첫 출근한 날, 셀렌 마음을 안고 출근한 아들이 기쁘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바로 그날 사고를 당해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을 붙잡고 울고 또 운 어머니. 아들은 이미 세상에 없지만 어머니의 마음에서 아들을 떠나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와 아버지는 방안에 갇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원망의 방, 절망의 방 속에서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나오너라.”
요한계시록 8장에 보면, 일곱 째 인을 뗄 때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정체되었던 기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기도, 올라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갈 때 우레와 번개, 지진이 일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으면 그러했겠습니까? 하나님께 올려드리지 않았던 그 음성이 얼마나 많았으면 우레와 지진과 같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를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1:25~26 중)
주님께서 우리를 살펴주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 삐쳐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에 대한 실망, 좌절, 원망으로 그분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지금도 저 멀리 마을 어귀에서 마리아를 부르고 계십니다. “마리아야, 나오라.”
혹시 내가 만든 불신의 방에 갇혀 있는 분은 없습니까? 절망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 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이제 그 방에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멀리하고 떠난 분이 있다면 다시 주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나사로와 같이 죽은 자를 향해 부르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향해서도 부르십니다. 주님의 이 초청에 겸허히 나아가는 모든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