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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찬가 :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뒤집기

누가복음 1:46~55

김지철 목사

2025.11.30

<다시 대림절을 맞이하며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는 자리를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시간이자 앞으로 영광 중에 오실 재림 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신앙은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신앙, 그리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신앙이 역동적인 힘을 얻습니다. 기억과 기다림이 없는 신앙은 삶의 모든 것들이 다시 나락으로 빠지며 무능한 모습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인물이 오늘 등장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어린 소녀 마리아로부터 시작하십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리에 이름 없는 10대 소녀, 가장 연약한 여인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면서 세상의 가치 체계를 역전시키십니다. 마리아의 노래 속에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역사가 무엇인지 담겨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자리는 비천함의 자리였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8)

여인의 마음속에 두 가지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비천하고 연약한 여인입니다. 나는 무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복을 받은 여인입니다.”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복 있는 사람을 연상해 보면, 경제적인 여유가 있거나 안정된 가정을 꾸미고 사회적 성공을 한 사람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 주는 복의 출발점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에서 축복의 역사가 새롭게 열린다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비천함은 개인적으로 보면 겸손함과도 연결되고,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하면 사회적, 경제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갈릴리의 가난한 10대 소녀이자, 로마 제국의 식민지 백성이며,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여인의 모습은 현대의 성공 스토리와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비천하고 무력한 자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하나님이 돌보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외면하기 쉬운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은 깊이 응시하시며 자기가 찾아오는 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하십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을 연상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아브라함)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7)

모든 것이 없는 것 같은 그때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가 비천하고 연약하며 무력해질 때가 있지만, 그때가 저주의 시간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백의 자리가 비천함의 자리입니다. 내 힘과 내 공로, 내 체면으로 꽉 찬 인생 속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한계성과 상처, 내가 경험한 실패들로 마음이 비워진 틈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듭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비천함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무것도 없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비천함을 부끄러움으로 감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드렸기에 그의 비천함은 축복의 자리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우리가 질그릇에 보화를 담았다고 선언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고후 4:7). 나는 비록 질그릇같이 깨지기 쉽지만, 내 안에는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비천한 소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품었기에 빛나는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비천함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전환시키는 새로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비천함 자체가 저절로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것을 누가 좋아할까요? 고통받는 것, 질병을 얻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자리, 무력한 자리가 어떻게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비천함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들어오시는 자리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자리로 내가 나아가야 합니다. 이 비천함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응답하느냐에 따라 비천함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함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신앙으로 나아갔을까요? 마리아의 위대함은 자기의 현실을 미워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은 데에 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다가왔을 때 사실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1)

이 말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마리아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축복일지, 저주일지, 실존적으로 엄청난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당시 율법으로 보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리아는 그냥 수용하지만은 않고 저항했습니다.
여러분, 가끔 우리에게 힘든 일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내 삶이 다 무너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질병 때문에 고통스럽게 탄식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속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저항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내 속에 왜 이런 어려움이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왜 이렇게 무너졌는지 하나님께 따지듯이, 마리아도 하나님 앞에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4)

상황은 아주 절망적입니다. 주위 시선이 이 이야기를 알면 아주 냉혹하게 자신을 대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마리아의 입술에서 이 상황을 전환하는 결정적인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 1:38)

<마리아의 고백 속에는 놀라운 신앙의 원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먼저 자기 정체성을 다시 확인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여종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모세가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대등한 표현입니다. 그 안에는 겸손함과 당당함이 복합된 자기 확인이 있습니다. 예수 믿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힐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정체성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됩니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은 삶의 위기를 벗어나게 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정체성을 놓치고 내가 누구인지를 잃으면, 예수를 믿기는 해도 그 믿음과 삶이 연결되지 못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위기를 맞은 마리아가 가장 먼저 한 일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아주 특별하고 대단합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여인은 말씀을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왔을 때, 그는 그 말씀을 받기를 수용했습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받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 마리아의 반응은 능동적 동의이자 적극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신앙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도약을 하려면 그 속에 나를 투여하는 강력한 도전적 의식이 필요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로 작정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한 후에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설명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신앙에는 이해와 설명을 통해 받아들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내가 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말씀이 나를 향한 하나님이 선한 뜻임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비록 다 깨닫지 못해도 ‘내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이런 복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하라 하시는지, 왜 이 일로 가라고 하시는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의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하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비천한 자에서 복 있는 자로 전환하는 경험을 합니다. 사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겉모습은 여전히 똑같고, 여전히 비천했습니다. 조건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인생의 주도권이 바뀌었습니다. 주도권이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여인에게 하나님의 복의 자리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그는 노래를 부릅니다. 어떤 것이 이 여인을 바꿨을까요?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해석의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행동부터 하지 않습니다. 마음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내 마음과 관점, 해석하는 눈이 바뀌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해석의 역전이 일어났을 때, 삶의 모든 것들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역전을 경험한 마리아의 노래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뒤집기’가 선포됩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내면이 바뀌자 그의 입술에서 새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감사의 고백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뒤집기’를 선포하는 노래로 바뀝니다. 생각의 혁명이 사회의 혁명을 노래하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무엇이 바뀌어졌을까요? 오늘 본문은 세 가지가 바뀌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지성, 생각의 역전’입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1)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뒤집어 놓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다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지성에 하나님께서 철퇴를 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자기 지성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지성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옳은 일, 선한 일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을 향해 달려가도 내가 주장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겸손하게 우리의 지성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하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성 속에 찾아오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지성의 역전이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고전 1:18, 23~24).
두 번째는 ‘권력의 역전’이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는 위에서 내려오고, 비천한 자는 다시 높임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권력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높이 올라가는 것, 더 많이 차지하는 것, 더 많은 사람 앞에 자랑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는 것이 세속적인 권력 추구의 지향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질서를 뒤집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권력을 연약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사건의 의미입니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45).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힘은 사람들을 살리고 위로하는 힘입니다. 사람들을 죄악에서부터 건져 내는 구원의 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고 높아지려는 권력들을 끌어내겠다고 하십니다. 역전의 하나님은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을 중심으로 오게 하고, 주변부에 있던 사람을 가운데로 이끄십니다. 복 있는 사람은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연약함에 동참하면서 남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경제의 역전’입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눅 1:53)

배고픈 자는 배부르고, 부자는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역설입니다. 부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 것으로 배부른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자기 것을 더 많이 모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자리가 그 안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체가 된 부자는 더 많이 소유하는 것에 자기 정체성을 둡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소유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자기의 정체성을 둡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산상 설교에서 한 말씀이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마 5:3).
마리아는 이제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자기 태 안에 계신 아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는 로마 황제나 헤롯 궁궐보다 자기 몸속에 자라고 있는 연약한 생명이 진짜 권세, 진짜 영광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며 마리아는 비천한 여인에서 복 있는 여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리아가 복 있는 자가 된 이유는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의 진정한 주인공은 마리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마리아의 찬가를 읽었습니다. 마리아 찬가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마리아가 아니고, 마리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력한 한 여인의 몸 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낮고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발가벗겨져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같이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 비천하고 죄가 많은 사람에게 ‘너도 하나님의 사람, 소중한 사람이다. 너도 값진 존재이며 세상에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복된 존재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연약하고 비천한 여인의 몸속에 오셔서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며 우리는 기다림의 신앙, 그리고 기억하는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갖고 있는 최고의 축복은 기다릴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이 자신에게 부딪혔을 때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저 또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소망했던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말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이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실패하고 부족할 때도 있고, 잘못된 길로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마리아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 누추함, 무력함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받아 주세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이 고백으로 대림절을 맞이하며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내 삶의 변화들을 경험하고 누리는 하나님의 귀한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Mary’s Song: The Holy Reversal of the Kingdom of God
(From the Humble to the Blessed)!

Luke 1:46-55 (46-48)

Today is the first Sunday of Advent. It’s a time to remember Jesus, who came 2,000 years ago, and also a season to wait for Jesus’ return. There was a woman who experienced the coming of Jesus into this world most intensely through her body. I want to share her story. Her name is Mary, the mother of Jesus.

God began a new history of salvation through a young girl, Mary. It was not through the emperor of the Roman Empire, nor through the powerful leaders or religious authorities of Jerusalem. It was through a nameless teenage girl from Galilee, the weakest of women. Through her, God created a new value system for the Kingdom of God. This created a new history of a holy reversal. Together, let’s listen to the heart of God hidden in the song sung by this woman, the Magnificat.

1. The humble state: the starting point of God’s story

Mary confesses about herself, “for he has been mindful of the humble state of his servant. From now on all generations will call me blessed,” (Luke 1:48 NIV) When we think of “the blessed,” we tend to think of economic wealth, stable families, and social success. However, the starting point of blessing in the Bible is entirely different. Amazingly, God starts His story from the lowliest and most humble state. Here, “humility” refers to a life at the bottom—socially and economically. A poor teenage girl from Galilee, a subject of the Roman Empire, a girl who gets pregnant before getting married. She is the farthest anyone can be from a “success story.” Yet, God came to her in this humble state. He was even “mindful” of it. People ignored her and turned away. But God says that He gazes deeply at and visits this humble state. Paul once expressed the God that Abraham, the father of faith, had experienced as follows: “the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into being things that were not.” (Romans 4:17 NIV)

Therefore, humility is not proof of a curse. It is the “empty space” where God can create anew. It is because in a life filled with one’s own strength, achievements, and reputation, there is hardly any room for God to enter. On the contrary, God’s grace seeps in through the gaps created by our limitations, wounds, and failures. Mary’s humility did not end in despair with the phrase “I am nothing.” She discovered “a place where God can work” in her nothingness. By not hiding her humility in shame, but rather offering it to God, her humble state became a place of blessing. Like treasure in jars of clay, the humble girl Mary became a shining daughter of God because she embraced God’s word. However,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humility itself does not automatically become a blessing. What matters is how we offer that humility to God. Mary confesses:

2. “May your word to me be fulfilled.”

How we interpret this humility and how we respond to God in our humble state is crucial. Mary’s greatness did not lie in beautifying or denying her reality. When the angel Gabriel approached her and spoke, she was afraid. “You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call him Jesus.” (Luke 1:31 NIV) Is this a blessing? Or a curse? Mary would have fallen into an enormous existential shock. For a virgin to have a child was a moral crime punishable by death according to the law at the time. Mary responded: “How will this be, […] since I am a virgin?” (Luke 1:34 NIV) She understood. Her situation was undoubtedly desperate, and people’s gazes were harsh. However, in that very situation, a decisive statement flowed from Mary’s lips: “I am the Lord’s servant. May your word to me be fulfilled.” (Luke 1:38 NIV) This confession was not resignation. She is not simply saying, “Since there is nothing I can do, let it be done.” It is a proactive agreement of, “If this is God’s word, I will obey.” It was a quiet but bold decision. A leap of faith occurred. Faith does not begin after our understanding is complete. Faith is the courage to choose trust in the midst of insufficient understanding. It is not because everything was explained. We obey God because we trust the God who speaks. This is when we transition from the humble to the blessed. Our reality is still humble. Of course, the conditions haven’t changed. However, the control over my life has shifted. I no longer struggle to control and protect myself. I entrust myself into the Lord’s hands. At that very moment, the Lord’s word comes to me as a power that redefines me. Thus, Mary no longer describes herself as just humble and lowly. She sings, “From now on all generations will call me blessed.” A reversal of interpretation—not a reversal of circumstances—happened. And that reversal of interpretation soon led to an actual reversal of history.

3. Mary’s Song

As Mary’s inner self changed, a new song burst forth from her lips (Luke 1:46-55). This hymn goes beyond personal gratitude; it proclaims “the holy reversal of the Kingdom of God.” It sings of a revolution in thought, relationship, and society.

“He has performed mighty deeds with his arm; he has scattered those who are proud in their inmost thoughts.” (Luke 1:51 NIV)

1) This is a reversal of intellect (thought). The proud are those who consider themselves wise. God has dispersed their thoughts. It is a strike against arrogant intellect that believes it can explain the world without God. They collapse before God’s wisdom. A blessed person of intellect is someone who humbly recognizes that “my thoughts are not always right.”

“He has brought down rulers from their thrones but has lifted up the humble.” (Luke 1:52 NIV)

2) This is a reversal of power. The mighty are brought down, and the lowly are lifted up. Human power always rises from the bottom to the top. However, God’s power descends (as Jesus came to serve). God chose as the center of history a weak girl from Galilee, rather than an emperor of Rome. He is the God of reversal, who brings the margins and the periphery to the center. The blessed person is the one who has the power to serve others, not the power to dominate others.

“He has filled the hungry with good things but has sent the rich away empty.” (Luke 1:53 NIV)

3) This is a reversal of economics. The hungry are filled, while the rich go away empty-handed. Here, the rich are those who are already full with their own possessions. Yet they cry out for more and suffer from a sense of deficiency. As a result, there is no room for God to enter. The rich place their identity in their possessions. But the poor find their identity in their relationship with God. This aligns with Jesus’ Sermon on the Mount: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God!” Mary now begins to see the world with new eyes. She looks at the world through the eyes of the baby Jesus within her. She sees that true power and glory lie not in the Roman Emperor or in Herod’s palace, but in the fragile life growing inside her. Her perspective of the world has changed completely. And that perspective is always opened through Jesus Christ. The reason Mary became a blessed person is simply this: Jesus, the Son of God, was within her.

In conclusion, the true protagonist of Mary’s Song, the Magnificat, is not Mary. It is Jesus Christ within her. The most glorious One came into the body of a woman. He lay in a lowly and humble manger in this world. He suffered and died naked on the Cross. But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nd overcame death. That is Jesus. We declare that Jesus is the very reversal of the Kingdom of God. I pray that such an amazing dramatic reversal may appear in our lives. What must we do?
1) Wait for Jesus. Stand before Him just as you are. Trust Him and wait for the time He has given you.
2) Invite Jesus into your heart. Confess like Mary, “May your word to me be fulfilled.”
3) Live a life of Immanuel with Jesus. Lay down your own perspective in each moment. See the world through Jesus’ eyes and treat and respect people with His heart. This is the blessing of those who believe in Jesus Christ.

The reversal of the Kingdom of God: Embrace Christ in your heart! Our humility transforms us into a blessed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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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6~55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다시 대림절을 맞이하며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는 자리를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시간이자 앞으로 영광 중에 오실 재림 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신앙은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신앙, 그리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신앙이 역동적인 힘을 얻습니다. 기억과 기다림이 없는 신앙은 삶의 모든 것들이 다시 나락으로 빠지며 무능한 모습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인물이 오늘 등장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어린 소녀 마리아로부터 시작하십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리에 이름 없는 10대 소녀, 가장 연약한 여인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면서 세상의 가치 체계를 역전시키십니다. 마리아의 노래 속에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역사가 무엇인지 담겨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자리는 비천함의 자리였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8)

여인의 마음속에 두 가지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비천하고 연약한 여인입니다. 나는 무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복을 받은 여인입니다.”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복 있는 사람을 연상해 보면, 경제적인 여유가 있거나 안정된 가정을 꾸미고 사회적 성공을 한 사람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 주는 복의 출발점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에서 축복의 역사가 새롭게 열린다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비천함은 개인적으로 보면 겸손함과도 연결되고,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하면 사회적, 경제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갈릴리의 가난한 10대 소녀이자, 로마 제국의 식민지 백성이며,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여인의 모습은 현대의 성공 스토리와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비천하고 무력한 자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하나님이 돌보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외면하기 쉬운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은 깊이 응시하시며 자기가 찾아오는 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하십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을 연상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아브라함)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7)

모든 것이 없는 것 같은 그때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가 비천하고 연약하며 무력해질 때가 있지만, 그때가 저주의 시간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백의 자리가 비천함의 자리입니다. 내 힘과 내 공로, 내 체면으로 꽉 찬 인생 속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한계성과 상처, 내가 경험한 실패들로 마음이 비워진 틈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듭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비천함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무것도 없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비천함을 부끄러움으로 감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드렸기에 그의 비천함은 축복의 자리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우리가 질그릇에 보화를 담았다고 선언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고후 4:7). 나는 비록 질그릇같이 깨지기 쉽지만, 내 안에는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비천한 소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품었기에 빛나는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비천함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전환시키는 새로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비천함 자체가 저절로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것을 누가 좋아할까요? 고통받는 것, 질병을 얻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자리, 무력한 자리가 어떻게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비천함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들어오시는 자리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자리로 내가 나아가야 합니다. 이 비천함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응답하느냐에 따라 비천함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함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신앙으로 나아갔을까요? 마리아의 위대함은 자기의 현실을 미워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은 데에 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다가왔을 때 사실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1)

이 말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마리아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축복일지, 저주일지, 실존적으로 엄청난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당시 율법으로 보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리아는 그냥 수용하지만은 않고 저항했습니다.
여러분, 가끔 우리에게 힘든 일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내 삶이 다 무너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질병 때문에 고통스럽게 탄식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속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저항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내 속에 왜 이런 어려움이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왜 이렇게 무너졌는지 하나님께 따지듯이, 마리아도 하나님 앞에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4)

상황은 아주 절망적입니다. 주위 시선이 이 이야기를 알면 아주 냉혹하게 자신을 대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마리아의 입술에서 이 상황을 전환하는 결정적인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 1:38)

<마리아의 고백 속에는 놀라운 신앙의 원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먼저 자기 정체성을 다시 확인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여종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모세가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대등한 표현입니다. 그 안에는 겸손함과 당당함이 복합된 자기 확인이 있습니다. 예수 믿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힐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정체성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됩니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은 삶의 위기를 벗어나게 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정체성을 놓치고 내가 누구인지를 잃으면, 예수를 믿기는 해도 그 믿음과 삶이 연결되지 못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위기를 맞은 마리아가 가장 먼저 한 일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아주 특별하고 대단합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여인은 말씀을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왔을 때, 그는 그 말씀을 받기를 수용했습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받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 마리아의 반응은 능동적 동의이자 적극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신앙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도약을 하려면 그 속에 나를 투여하는 강력한 도전적 의식이 필요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로 작정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한 후에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설명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신앙에는 이해와 설명을 통해 받아들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내가 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말씀이 나를 향한 하나님이 선한 뜻임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비록 다 깨닫지 못해도 ‘내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이런 복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하라 하시는지, 왜 이 일로 가라고 하시는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의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하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비천한 자에서 복 있는 자로 전환하는 경험을 합니다. 사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겉모습은 여전히 똑같고, 여전히 비천했습니다. 조건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인생의 주도권이 바뀌었습니다. 주도권이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여인에게 하나님의 복의 자리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그는 노래를 부릅니다. 어떤 것이 이 여인을 바꿨을까요?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해석의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행동부터 하지 않습니다. 마음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내 마음과 관점, 해석하는 눈이 바뀌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해석의 역전이 일어났을 때, 삶의 모든 것들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역전을 경험한 마리아의 노래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뒤집기’가 선포됩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내면이 바뀌자 그의 입술에서 새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감사의 고백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뒤집기’를 선포하는 노래로 바뀝니다. 생각의 혁명이 사회의 혁명을 노래하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무엇이 바뀌어졌을까요? 오늘 본문은 세 가지가 바뀌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지성, 생각의 역전’입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1)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뒤집어 놓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다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지성에 하나님께서 철퇴를 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자기 지성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지성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옳은 일, 선한 일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을 향해 달려가도 내가 주장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겸손하게 우리의 지성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하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성 속에 찾아오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지성의 역전이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고전 1:18, 23~24).
두 번째는 ‘권력의 역전’이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는 위에서 내려오고, 비천한 자는 다시 높임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권력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높이 올라가는 것, 더 많이 차지하는 것, 더 많은 사람 앞에 자랑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는 것이 세속적인 권력 추구의 지향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질서를 뒤집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권력을 연약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사건의 의미입니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45).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힘은 사람들을 살리고 위로하는 힘입니다. 사람들을 죄악에서부터 건져 내는 구원의 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고 높아지려는 권력들을 끌어내겠다고 하십니다. 역전의 하나님은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을 중심으로 오게 하고, 주변부에 있던 사람을 가운데로 이끄십니다. 복 있는 사람은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연약함에 동참하면서 남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경제의 역전’입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눅 1:53)

배고픈 자는 배부르고, 부자는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역설입니다. 부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 것으로 배부른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자기 것을 더 많이 모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자리가 그 안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체가 된 부자는 더 많이 소유하는 것에 자기 정체성을 둡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소유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자기의 정체성을 둡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산상 설교에서 한 말씀이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마 5:3).
마리아는 이제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자기 태 안에 계신 아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는 로마 황제나 헤롯 궁궐보다 자기 몸속에 자라고 있는 연약한 생명이 진짜 권세, 진짜 영광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며 마리아는 비천한 여인에서 복 있는 여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리아가 복 있는 자가 된 이유는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의 진정한 주인공은 마리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마리아의 찬가를 읽었습니다. 마리아 찬가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마리아가 아니고, 마리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력한 한 여인의 몸 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낮고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발가벗겨져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같이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 비천하고 죄가 많은 사람에게 ‘너도 하나님의 사람, 소중한 사람이다. 너도 값진 존재이며 세상에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복된 존재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연약하고 비천한 여인의 몸속에 오셔서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며 우리는 기다림의 신앙, 그리고 기억하는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갖고 있는 최고의 축복은 기다릴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이 자신에게 부딪혔을 때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저 또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소망했던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말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이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실패하고 부족할 때도 있고, 잘못된 길로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마리아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 누추함, 무력함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받아 주세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이 고백으로 대림절을 맞이하며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내 삶의 변화들을 경험하고 누리는 하나님의 귀한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리아 찬가 :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뒤집기” (눅1:46~55)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91, 438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 떠오르나요? 성경이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어떻게 다를까요?

 

<설교의 요약>

하나님께서는 로마 황제나 권력자가 아닌, 갈릴리의 이름 없는 10대 소녀 마리아로부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뒤집기”입니다.

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한 여종”이라 고백했습니다. 갈릴리의 가난한 십대 소녀, 로마 제국의 식민지 백성,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임신 소식을 들은 여인. 세상 기준으로는 성공과 거리가 먼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비천함의 자리를 돌보셨습니다. 비천함 자체가 복이 아니라, 그 비천함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 복이 됩니다.

천사가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말했을 때, 마리아는 두려웠습니다. 처녀가 임신한다는 것은 당시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마리아는 고백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비천했지만,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마리아의 내면이 바뀌자 새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찬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뒤집기를 선포합니다. 첫째, 지성의 뒤집기 –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겸손한 자를 세우십니다. 둘째, 권력의 뒤집기 –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십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셋째, 경제의 뒤집기 – 주린 자를 배불리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십니다. 부자는 소유에, 가난한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기 정체성을 두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찬가의 진정한 주인공은 마리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비천한 소녀의 몸에 오시고, 구유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비천한 자들아, 연약한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 삶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할 때, “비천한 사람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나누기>

1. 내 삶에서 감추고 싶은 비천함이나 연약함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2.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순종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연약하고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낮고 비천한 곳을 돌아보소서. 우리로 마리아처럼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역전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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