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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살리라

베드로전서 1 : 23 ~ 25

김경진 목사

201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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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 : 23 ~ 25

23 ~ 25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사람의 말에는 힘과 창조적 능력이 있습니다.

“동쪽으로 이사를 가세요.”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절대 돈을 빌려 주지 마세요.” “ ‘ㅇ’ 자가 들어간 대학에 원서를 내면 떨어질 것입니다.” “올해는 사고 날 위험이 있으니 여행은 떠나지 마세요.”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연초 재미 삼아 찾아간 점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점집에 안 가셨겠지만, 만약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동쪽으로 이사 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마음 편히 서쪽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까요? 대학 원서를 넣으면서 ‘ㅇ’자가 들어간 대학에 쉽게 원서를 넣을 수 있을까요? 1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여행을 계획할 수 있을까요?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점을 친 이가 신기가 있거나 능력이 많아서라기보다는 그가 한 말에 나 자신이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일인데, 한 여자 청년이 저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울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상담했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었고, 결혼을 준비하는 중에 엄마가 사주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남자와 결혼하면 남자가 일찍 죽게 된다는 사주가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에 근심이 쌓였습니다. 그 말이 그만, 그 여자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제가 헤어져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남자를 살리기 위해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참 딱한 일이었습니다. 사주를 봐 준 이의 말 한 마디가 사랑하는 연인 사이도 갈라놓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교회 다니던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주의 위력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 자신도 적잖게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인간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단순히 진동수를 가진 파장이나 입자도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외국에 살고 있는 제 딸이 회사를 취직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당시에 조그만 차를 타고 다녔는데, 아마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딸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빠, 제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아빠 은퇴할 때 꼭 좋은 차를 사 드릴게요.” 그 말이 제 딸의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이야기가 제 귀를 통해 제 마음속에 들어와 박혔습니다. 거기에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약속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은퇴할 때가 많이 남았지만, ‘그날이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러 가서 성격 급한 사람이 “오늘은 내가 살게.”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정해진 미래가 됩니다. 다시 담을 수 없는 실재가 됩니다. 이처럼 말은 무언가를 실재화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아가 말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에게 하는 “사랑해요.”라는 한마디가 천국을 만듭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혹은 한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당신을 부숴 버릴 거야!”라는 말이 지옥을 만들기도 합니다. ‘된장녀’라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세상에 없던 된장녀가 탄생합니다. 또 ‘급식충’이란 말을 쓰는 순간, 우리의 10대들은 급식을 타먹는 벌레로 전락합니다. 이처럼 말이 시작되면 끊임없이 무언가가 창조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말의 세계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고, 삶을 압도하는 창조적 능력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말씀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말의 힘과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말의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말의 능력과 창조성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언급해 왔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즉 본래 말의 힘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임을 가르쳐 줍니다. 창세기 1장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실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창조적 힘이며 능력입니다. 태초부터 말씀이 계셨고, 그 안에 창조의 생명력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증언을 피상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여실히 공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이 무언가를 실재화 하고 창조해 낼 수 있다면, 완전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가히 모든 것을 가능케 하고 창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간의 삶의 유비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상상하고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말씀, 생명력 있는 말씀이 이 땅에 오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왜 말씀이 이 땅에 오셨을까요? 이 세상을 재창조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말씀이 이 땅에 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1~5)

참 말씀이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셨던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재창조하길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갖지 못한 생명을 가지고 오셔서 이 세상을 다시 생명으로 창조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빛으로 임하셔서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을 비추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은 빛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 이분이 우리의 생명이며, 이 땅에 오신 말씀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이 증언의 주인공 곧 말씀이자 생명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창조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참 말씀이자 생명인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기록돼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여기서 믿는 자와 영접하는 자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머리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 곧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게 됩니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갖지 못한 새로운 창조물이 우리 안에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구절에서 ‘권세’라는 말에 방점을 둡니다. 그래서 어떤 자격 요건을 획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려면 생물학적인 유비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새벽기도회 때도 말씀드린 내용인데,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여 여자가 남자의 생명의 씨앗을 받아들이면, 즉 영접하면 그 안에 순간적으로 생명이 잉태됩니다. 이 세상이 갖지 못한, 완전히 다른 의미의 생명이 만들어집니다. 생명의 씨앗을 영접하는 순간 여인의 몸속에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며, 이로써 자녀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이자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영접하면 생명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탄생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진리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는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우리의 인생 가운에 영원한 생명이 자리 잡아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성경과 교회는 육적인 탄생만이 아니라 영적인 탄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육적인 탄생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지만, 영적인 탄생은 이 땅에 생명과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 이 세상이 갖지 못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재창조의 사역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전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23~25)

육체의 창조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창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창조의 질서는 결코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우리의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의 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세계 가운데 들어오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그분의 생명력이 죽음을 정복하고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바로 그 생명, 세상이 갖지 못한 영원한 생명, 죽음을 이기는 능력의 생명, 부활의 생명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구원이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장 18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허락하기 위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입니까? 앞으로 여러 번 이 내용을 나누고자 하는데, 오늘은 먼저 한 가지 방법을 나누려고 합니다. 로마서 10장 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3)

뒤이어 14절부터는 믿지 않는 자가 어찌 부를 수 있고, 듣지 못하는 이가 어찌 믿을 수 있으며,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을 수 있겠냐는 반문이 이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전파하는 이로부터 말씀이 들려지고, 그 말씀을 듣는 자가 믿음을 갖게 되며, 그 믿음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거기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하며,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지난 새벽기도회 시간에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유비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그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 자신이 감옥에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감옥에서 살아야 될 시간이 1년은 더 남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간수장이 와서 감옥 문을 열고 이렇게 말합니다. “석방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아직 1년은 남았는데요. 나갈 때가 안 되었어요. 그 말은 가짜 같은데, 저는 그냥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간수장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감옥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참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생명인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길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열면 됩니다. 감옥에서 걸어 나가는 사람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미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너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문을 열면 내가 네게 들어가 너와 함께 먹고 살겠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인간인 우리에게 주신 말의 힘, 그 창조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해 주십시오.”라고 우리 입에서 말을 내뱉는 순간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의 창조가 일어나며, 하나님나라가 우리 안에 임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말씀의 생명력으로 영적인 삶의 풍성함을 경험합시다.

참 쉽고도 어려운 신앙의 신비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호령하는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랜만에 옛날 부흥사들에게 들었던 말씀을 듣는구나.’라고 향수에 젖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과거에 수많은 주의 사자들이 증언해 왔던 복음의 내용을 다시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변한 것은 없습니다. 표현의 양식과 설명의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바뀔 수 없는 진리가 복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옛날에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다 해 봤어요. 그때 열심히 주님의 이름도 부르고, 믿는다고 눈물도 흘렸어요. 그런데 별것 없던데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지만, 그 생명을 잘 유지하고 못하고 멈춰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씨 뿌리는 자’ 비유에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를 전하시며 무엇과 연결시켜 해석하셨습니까? ‘말씀’과 연결시키셨습니다. 본 내용이 기록된 마가복음 4장 15절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마가복음 4:15)

이는 말씀이 접촉되긴 했으나 우리 안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직 생명이 탄생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뒤이어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가복음 4:16~17)

말씀이 들어와 생명으로 자리를 잡으려고 하지만, 땅이 돌밭이어서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면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마가복음 4:18~19)

말씀이 들어와 자리는 잡았지만, 여러 염려와 유혹 때문에 말씀의 생명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지막에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에 대한 말씀도 전하십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마가복음 4:20)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사람 곧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말씀을 먹을 때 가능합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내 안에 영접할 때, 생명력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주리셨습니다. 그때 사탄이 다가와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했습니다. 육체를 위해 먹을 것을 만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저는 한동안 이 말씀에 큰 의미를 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깊이 묵상할수록 이 대답처럼 명쾌하고 분명한 말씀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우리를 살립니까? 먹는 것이 우리를 살립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먹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음식으로는 살리지 못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밥이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링거가 살리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우리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소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즉 우리가 사는 것은 말씀의 권능 안에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단 일회의 유한한 삶을 살아갑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듯이, 우리의 육신도 죽음의 세력 앞에서 힘을 잃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말씀이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키우고 성장시켜 나가길 원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주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2019년 한 해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육적인 삶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도 풍성해지는 소망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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