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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마태복음 11: 2 ~ 6

김경진 목사

2019.12.15

< 세례 요한은 예수께도 인정받은 위인이었습니다. >

오늘 본문은 성경의 흐름 가운데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내용입니다. 고뇌하는 세례 요한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세례 요한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인간 세례 요한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비치는 세례 요한은 너무 완벽하고 빈틈없는 위인, 신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세례 요한의 이러한 모습이 소개된 것이 참 좋습니다. 솔직한 인간 요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오늘 본문 외에 다른 본문들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다른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완전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과 맞물려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기 6개월 전, 세례 요한은 천사의 예언과 함께 엘리사벳에게 잉태됩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소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때 제자들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라고 하는데, 예수께서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엘리야와 관련해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7:11~13)

이렇듯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위대한 인물이 세례 요한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때로는 금식하면서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라며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했습니다. 이를 마태복음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뤄진 성취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3:3)

세례 요한이 살아간 삶을 보면,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종말을 피하라 하더냐?”(마3:7)라고 외친 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마치 독설가의 연설 같은 말들을 서슴없이 외쳤습니다. 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은 당시 왕이었던 헤롯을 향해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헤롯 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맞이한 데 대해 세례 요한은 옳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 일로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혔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내용을 마태복음 14장 3절 이후의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마태복음 14:3~4)

이렇게 당당하며 투사 같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이 세례 요한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굽힘 없는 당당함과 충성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 신앙의 위인 세례 요한도 예수께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고 충성스러운 세례 요한도 한 번쯤은 의심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정말 예수라는 분에게 모든 것을 걸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서두에 나타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태복음 11:2~3)

마치 불신앙처럼 보입니다. 흔들리는 갈대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묻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이러한 의문과 의심을 어떻게 갖게 된 걸까요? 본문을 보면, 그가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마태복음 11:2~3 중)

세례 요한은 지금 예수께서 하시는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습니다. 그럼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의 어떤 말과 행동에 대해 들었을까요?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태복음에서 찾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앞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과 예수님에게 세례 베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4장에서는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시고, 사탄에게 시험받으십니다. 공생애를 준비하시는 모습입니다. 그쯤 세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힙니다.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이 내용이 마태복음 4장에 나타납니다. 이어지는 5장부터 7장의 내용은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세 장에 걸쳐 소개되고 있습니다. 8장부터의 내용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고치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 귀신을 내쫓으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이적을 감당하십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며,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 사이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론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시던 중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 전해졌을 때, 요한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의심이 들었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예수가 맞는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세례 요한이 기대한 메시아는 의와 불의를 가르는 심판자였습니다. >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세례 요한이 기대하는 메시아 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며 다음과 같은 선포를 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0~12)

세례 요한이 어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기다린 예수는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며,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시는 분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이런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들려오길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좋다. 이제 예수께서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실 것이다.’ 아마 이런 기대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죽음이 임박해 옴을 느끼면서도, 승리의 소식이 다가오길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님의 승전 소식과 더불어 자신도 감옥에서 나가는 해피 엔딩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노하지 말라는 말씀이었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으며,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이었고, 구제를 은밀히 행하라는 말씀이었으며, 금식으로 기도하되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될 영적인 전투와 심판을 내심 기대했던 세례 요한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닌 화평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온전하고 바르게, 비판하지 않고, 화평을 추구하며, 노하지 말고, 은밀하게 구제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땅하게 여겨질 리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하시는 일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심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해야 할 마당에, 알곡과 쭉정이를 나눠야 할 이 마당에 병자를 고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태복음 11:3 중)

이 물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듭니다. 저도 종종 세례 요한과 같은 의문으로, 주님께 저 자신의 불신앙과 의심을 드러낼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정말 주님 맞습니까? 내가 믿어야 할 분이 주님이 맞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까? 당신,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우리의 기대와 다른 주님일지라도, 주님께만 완전한 희망이 있습니다. >

뒤늦게 신학 공부를 시작한 전도사님 가정에 어린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너무 귀여운 아들입니다. 돌이 지났을 무렵, 전도사님은 아이를 보려고 집으로 달려갑니다. 높은 아파트에서 아이는 아빠가 달려오는 모습을 봅니다. 아빠를 만나겠다고 그만 난간을 넘습니다.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아들을 붙잡고, 전도사님은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삶을 다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 내가 믿을 분이 맞습니까? 평생 의지할 분이 맞습니까?”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올게요.” 하며 나간 지 30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하철에서 불이 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얼마 후 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옵니다. 아이를 붙잡고 있는 부모님에게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믿어야 하는 분이 맞습니까? 정말 평생 의지할 수 있는 분이 맞습니까?”
나름대로 바르게 살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름 많은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모함을 당하고, 거짓 증언으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은 아실 텐데….’ 하는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시라면 피할 길도 열어 주실 것 같은데, 주님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내 하나님, 정말 내 하나님이 맞으십니까? 내가 평생 당신을 의지해도 되는 것입니까?”
사실, 살면서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당황하게 되고, 혼란스러워지며, 고통스러운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마치 불신앙에 가까워지는 듯 우리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위대한 세례 요한도 그러했다는 점입니다. 그도 회의했고, 의심했으며, 주님께 의심을 표출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었을 때, 그 또한 선뜻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세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11:4~6)

우리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들은 대로 고침 받은 사람들, 살아난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도 이것을 모르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미 살펴보았지만,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의문을 갖고 주님께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다시 정확하게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뒤 정말 귀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11:6 중)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결코 실족시킬 수 없는 이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 ‘예수님’, 이 이름은 세상 어느 누구게나 희망이 됩니다. 비록 억울하게 사형장에서 죽게 되는 일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은 신실한 희망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아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예수 그 귀하신 이름은 여전히 소망이요, 희망입니다. 병든 자에게도, 죽어가는 자에게도, 눈먼 자에게도, 심지어 죽은 자들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신실한 이름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자 무리를 향해 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 또한 놀랍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태복음 11:7~11)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해 나갔던 무리를 향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물으시며 “너희가 보러 나갔던 분이 바로 선지자다. 그분이 하나님의 일을 이룬 분이시다.”라고 높여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을 높이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향해 주시는 또 다른 의미가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향해 “네가 무엇을 하려고 광야로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였느냐?”라고 물으시는 듯합니다. “네가 광야에서 나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느냐? 너 나름대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 내지 않았느냐?”라고 도리어 반문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다시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

이어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준비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그리고 그 천국에서 요한이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라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여신 분입니다. 천국을 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요즘 새벽마다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며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변치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로마 지역에 살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면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떠나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예수님에게서 실족했던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히브리서는 예수님만을 믿으라고, 그 믿음이 변치 않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 그 신앙에서 떠나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에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3 중)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 흔들리는 갈대였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광야에 나갔더냐?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왔더냐? 목사가 어떤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드리는지 구경하려고 나왔느냐? 교회가 어떤 일을 하는지 판단하고 점검하려고 나왔느냐? 자신의 야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나왔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교회에 나왔더냐? 참 선지자, 온전하신 주님을 뵈려 함이 아니었더냐? 예수를 만나려 함이 아니었더냐? 나를 만나려 함이 아니더냐?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예수님의 이름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실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이 겪지 않는 힘든 일을 경험하게 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은 여전히 우리에게 귀한 이름입니다. 심지어 사형장에서조차, 아들을 잃은 고통의 자리에서조차,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이름, 믿을 만한 유일한 이름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11:6 중)

What Did You Go Out To See?

Matthew 11:2-6

Today’s passage tells of anintriguing story. We see John the Baptist deep in thought, revealing his vulnerable human nature. Without this passage, John would have been remembered as a perfect man of faith. But I actually prefer this honest description of him.

In other records of John in the Bible, he is described as a precious and perfect man, indispensable to God’s work of salvation. As you may well know, his birth coincides with that of Jesus. Conceived six months prior to our Lord, John prepares the way for Jesus and faithfully takes on his calling as “the one calling in the wilderness.”

Jesus praised John saying,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When Jesus was transfigured in Matthew chapter 17, the disciples suggested building three shelters there—one for Jesus,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At this suggestion, Jesus said something very interesting about John: “Jesus replied, ‘To be sure, Elijah comes and will restore all things.But I tell you,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have done to him everything they wished. In the same way the Son of Man is going to suffer at their hands.’Then the disciples understood that he was talking to them about John the Baptist.” (Matthew 17:11-13)

As such, Jesus acknowledged John as Elijah.John was a great man. According to Matthew, John wore clothing made of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ate locust and wild honey. He preached a message of repentance and gave baptisms on the Jordan River. Matthew interprets the work of John as the fulfillment of Isaiah’s prophecy: “This is he who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Isaiah:‘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for the Lord,make straight paths for him.’ ” (Matthew 3:3)

John was also bold and confident in speaking out against the Pharisees, Sadducees, and even Herod the tetrarch. When Herod married Herodias, his brother’s wife, John reprimanded him directly. In fact, this led to his imprisonment and death: “Now Herod had arrested John and bound him and put him in prison because of Herodias, his brother Philip’s wife, for John had been saying to him: ‘It is not lawful for you to have her.’” (Matthew 14:3-4)

But it appears that even this bold and faithful man had a shadow of doubt. In prison, he had questions on whether Jesus was someone forwhom he could risk everything: “When John, who was in prison, heard about the deeds of the Messiah, he sent his disciples to ask him,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Matthew 11:2-3) These words seem to reflect impiety. John’s faith seems to be swaying like a reed.

Then why did John start to have such questions or doubts? Today’s passage tells us that he sent his disciples to Jesus when he “heard about the deeds of the Messiah.” What did he hear about Jesus when he was in prison? The answer can be found in Matthew.

Matthew chapter 3 describes John preaching a message of repentance in the wilderness and baptizing Jesus. In chapter 4, Jesus is tempted by Satan after 40 days of fasting. This is when John gets imprisoned. After his imprisonment, Jesus starts preaching the gospel in Galilee and other places. From chapter 5 to chapter 7, He teaches the Beatitudes. From chapter 8 Jesus heals the sick, including lepers and Peter’s mother-in-law, casts out evil spirits, and calms the wind and sea. He also heals a paralyzed man, cures the woman with an issue of blood, and restores the sight of the blind. During this time, Jesus calls his disciples and teaches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However, when John heard about what Jesus was doing, he became skeptical. ‘Is this really the man, the Messiah, I was waiting for?’ He was worried. Why?

Matthew chapter 3 tells us about John’s expectations for Jesus, the one who comes after him. This was John’s cry in the wilderness: “The ax is already at the root of the trees, and every tree that does not produce good fruit will be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comes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Matthew 3:10-12)

These verses reveal what John was looking for in Jesus. The Jesus that John had awaited was a Jesus who would clear the threshing floor with a winnowing fork, a Jesus who would gather the wheat and burn up the chaff with fire. In prison, John probably would have awaited such stories about Jesus. ‘I’d gladly die because Jesus will do His work now. He will judge all things and separate the wheat and the chaff.’ As John neared death, he may have waited expectantly for news of Jesus’ victory. Perhaps he even dreamed of becoming free.

However, such victorious news didn’t arrive. The stories about Jesus only contradicted John’s expectations. Jesus was talking about how blessed the poor in spirit and the peacemakers were. He was teaching people not to be angry, not to criticize, not to fight the wicked, not to be hypocrites, and to give to the needy in secret. John found this difficult to accept since he was expecting spiritual warfare and judgement when Jesus started His ministry. John was waiting for judgement, but Jesus healed the sick. That is why he sent his disciples to ask Jesus,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I think this question strikes a chord deep in our hearts. The question resonates in my heart, too, since I also reveal my own disbelief and doubts to Jesus sometimes. ‘Is it really You, Lord? Are You really the One I should believe in? If so, why do these incomprehensible things happen?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A junior pastor who committed himself to the Lord and went to seminary late in his life had a baby boy. It was God’s gift to his family. Not long after the baby’s first birthday, the pastor rushed home early to see his child. When the boy saw his dad rushing toward him, he leaned over the rail of the apartment. In his joy, he climbed over it, falling from high above. With the boy’s cold body in his arms, the pastor wept, crying out the Lord. ‘Lord, Lord! I gave You my life. Are You really the One I should believe in?’

In our lives, we see God working in ways that completely contradict our expectations. At such moments, we are confused, frustrated, and painfully doubtful. We become impious and deeply confused. But what is comforting is that even someone as great as John the Baptist experienced the same. He also doubted and questioned Jesus. When he found out that Jesus was not what he had expected, he didn’t accept Jesus wholeheartedly or depend on Him completely. He asked,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But what was our Lord’s reply to John?

Jesus replied, “Go back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ear and see:The blind receive sight, the lame walk, those who have leprosy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good news is proclaimed to the poor.Blessed is anyone who does not stumble on account of me.” (Matthew 11:4-6)

Was John unaware of Jesus’ ministry in prison? No. He knew. But he had become skeptical. Jesus told John’s disciples to go to John and tell him, again, about His ministry. Jesus also said these precious words: “Blessed is anyone who does not stumble on account of me.”

The name Jesus can never make anyone stumble. Jesus said so Himself: “Blessed is anyone who does not stumble on account of me.” Jesus’ namegives hope to all who hear it. Even if a man is wrongfully executed, His name provides hope and faith. Even when things don’t go the way we had expected, this precious name is our hope. To the sick, the dying, the blind, and even the dead, the name of Jesus is a faithful one. Jesus was doing these things and He wanted John to know it.

When John’s disciples went away, Jesus talked about John, which is amazing:

As John’s disciples were leaving, Jesus began to speak to the crowd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wilderness to see? A reed swayed by the wind?If no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man dressed in fine clothes? No, those who wear fine clothes are in kings’ palaces.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tell you, and more than a prophet.This is the one about whom it is written:‘I will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who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Truly I tell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whoever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Matthew 11:7-11)

Jesus did not rebuke John. Instead He praised him, saying that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He refers to John as “Elijah” whom the prophetic books of the Old Testament had prophesied about.

At the same time, however, Jesus’ words in Matthew 11:7-11 contains a dual meaning toward John. Jesus seems to be questioning John, ‘Why did you go out to the wilderness? What did you expect to see? A reed swayed by the wind? Did you not go out to the wilderness to prepare the way for Me?’ Jesus words also repeat His earlier message to John: “Blessed is anyone who does not stumble on account of me.”

ThenJesus goes on to say that God’s kingdom—prepared by John and completed by Him—is already here on earth. Jesus says,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subjected to violence, and violent people have been raiding it.” (Matthew 11:12) And He says that in this kingdom, whoever is least is greater than John.

Jesus opened up the way to the kingdom of God. These days, we are meditating Hebrews in our early morning prayer service. Hebrews places a strong emphasis on Jesus Christ. Hebrews was written decades after the death of Jesus. Under extreme persecution, Christian Jews were going back to their former Jewish beliefs. They were not satisfied with Christ alone. They were stumbling. So, God gave them Hebrews, a book filled with His voice telling them not to abandon their faith. This is what He tells us in chapter 1:“But in these last days he has spoken to us by his Son, whom he appointed heir of all things, and through whom also he made the universe.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Hebrews 1:2-3)

Today, our Lord is speaking to us: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wilderness to see? A reed swayed by the wind?If no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man dressed in fine clothes? […] 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 Blessed is anyone who does not stumble on account of me.”

What did you come to see at church? Did you come to see what the pastor would preach and how he would pray? Did you come to see, examine, and judge the works of the church? Did you come to achieve your own ambitions and dreams? 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Did you not come to see the true prophet, the perfect Lord? Did you not come to see Jesus Christ? Did you not come to see Me? Blessed is anyone who does not stumble on account of me.

Dear brothers and sisters, our hope is in the name of Jesus Christ. His name is faithful to us even when we are wronged. Even if we are to go through difficult times that others do not face, His name will still be precious to us. His name is faithful even to the man wrongfully executed and the man who lost his son. The name of Jesus is the only trustworthy and faithful name. I hope we can risk all that we havefor this precious name and, through Jesus, become God’s “violent people” raiding the kingdom of God.

God speaks to us: “Blessed is anyone who does not stumble on account of me.” (Matthew 11:6)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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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 2 ~ 6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세례 요한은 예수께도 인정받은 위인이었습니다. >

오늘 본문은 성경의 흐름 가운데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내용입니다. 고뇌하는 세례 요한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세례 요한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인간 세례 요한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비치는 세례 요한은 너무 완벽하고 빈틈없는 위인, 신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세례 요한의 이러한 모습이 소개된 것이 참 좋습니다. 솔직한 인간 요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오늘 본문 외에 다른 본문들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다른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완전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과 맞물려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기 6개월 전, 세례 요한은 천사의 예언과 함께 엘리사벳에게 잉태됩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소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때 제자들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라고 하는데, 예수께서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엘리야와 관련해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7:11~13)

이렇듯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위대한 인물이 세례 요한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때로는 금식하면서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라며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했습니다. 이를 마태복음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뤄진 성취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3:3)

세례 요한이 살아간 삶을 보면,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종말을 피하라 하더냐?”(마3:7)라고 외친 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마치 독설가의 연설 같은 말들을 서슴없이 외쳤습니다. 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은 당시 왕이었던 헤롯을 향해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헤롯 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맞이한 데 대해 세례 요한은 옳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 일로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혔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내용을 마태복음 14장 3절 이후의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마태복음 14:3~4)

이렇게 당당하며 투사 같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이 세례 요한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굽힘 없는 당당함과 충성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 신앙의 위인 세례 요한도 예수께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고 충성스러운 세례 요한도 한 번쯤은 의심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정말 예수라는 분에게 모든 것을 걸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서두에 나타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태복음 11:2~3)

마치 불신앙처럼 보입니다. 흔들리는 갈대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묻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이러한 의문과 의심을 어떻게 갖게 된 걸까요? 본문을 보면, 그가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마태복음 11:2~3 중)

세례 요한은 지금 예수께서 하시는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습니다. 그럼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의 어떤 말과 행동에 대해 들었을까요?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태복음에서 찾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앞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과 예수님에게 세례 베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4장에서는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시고, 사탄에게 시험받으십니다. 공생애를 준비하시는 모습입니다. 그쯤 세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힙니다.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이 내용이 마태복음 4장에 나타납니다. 이어지는 5장부터 7장의 내용은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세 장에 걸쳐 소개되고 있습니다. 8장부터의 내용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고치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 귀신을 내쫓으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이적을 감당하십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며,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 사이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론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시던 중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 전해졌을 때, 요한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의심이 들었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예수가 맞는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세례 요한이 기대한 메시아는 의와 불의를 가르는 심판자였습니다. >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세례 요한이 기대하는 메시아 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며 다음과 같은 선포를 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0~12)

세례 요한이 어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기다린 예수는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며,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시는 분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이런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들려오길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좋다. 이제 예수께서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실 것이다.’ 아마 이런 기대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죽음이 임박해 옴을 느끼면서도, 승리의 소식이 다가오길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님의 승전 소식과 더불어 자신도 감옥에서 나가는 해피 엔딩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노하지 말라는 말씀이었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으며,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이었고, 구제를 은밀히 행하라는 말씀이었으며, 금식으로 기도하되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될 영적인 전투와 심판을 내심 기대했던 세례 요한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닌 화평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온전하고 바르게, 비판하지 않고, 화평을 추구하며, 노하지 말고, 은밀하게 구제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땅하게 여겨질 리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하시는 일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심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해야 할 마당에, 알곡과 쭉정이를 나눠야 할 이 마당에 병자를 고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태복음 11:3 중)

이 물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듭니다. 저도 종종 세례 요한과 같은 의문으로, 주님께 저 자신의 불신앙과 의심을 드러낼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정말 주님 맞습니까? 내가 믿어야 할 분이 주님이 맞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까? 당신,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우리의 기대와 다른 주님일지라도, 주님께만 완전한 희망이 있습니다. >

뒤늦게 신학 공부를 시작한 전도사님 가정에 어린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너무 귀여운 아들입니다. 돌이 지났을 무렵, 전도사님은 아이를 보려고 집으로 달려갑니다. 높은 아파트에서 아이는 아빠가 달려오는 모습을 봅니다. 아빠를 만나겠다고 그만 난간을 넘습니다.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아들을 붙잡고, 전도사님은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삶을 다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 내가 믿을 분이 맞습니까? 평생 의지할 분이 맞습니까?”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올게요.” 하며 나간 지 30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하철에서 불이 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얼마 후 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옵니다. 아이를 붙잡고 있는 부모님에게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믿어야 하는 분이 맞습니까? 정말 평생 의지할 수 있는 분이 맞습니까?”
나름대로 바르게 살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름 많은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모함을 당하고, 거짓 증언으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은 아실 텐데….’ 하는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시라면 피할 길도 열어 주실 것 같은데, 주님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내 하나님, 정말 내 하나님이 맞으십니까? 내가 평생 당신을 의지해도 되는 것입니까?”
사실, 살면서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당황하게 되고, 혼란스러워지며, 고통스러운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마치 불신앙에 가까워지는 듯 우리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위대한 세례 요한도 그러했다는 점입니다. 그도 회의했고, 의심했으며, 주님께 의심을 표출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었을 때, 그 또한 선뜻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세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11:4~6)

우리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들은 대로 고침 받은 사람들, 살아난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도 이것을 모르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미 살펴보았지만,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의문을 갖고 주님께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다시 정확하게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뒤 정말 귀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11:6 중)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결코 실족시킬 수 없는 이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 ‘예수님’, 이 이름은 세상 어느 누구게나 희망이 됩니다. 비록 억울하게 사형장에서 죽게 되는 일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은 신실한 희망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아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예수 그 귀하신 이름은 여전히 소망이요, 희망입니다. 병든 자에게도, 죽어가는 자에게도, 눈먼 자에게도, 심지어 죽은 자들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신실한 이름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자 무리를 향해 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 또한 놀랍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태복음 11:7~11)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해 나갔던 무리를 향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물으시며 “너희가 보러 나갔던 분이 바로 선지자다. 그분이 하나님의 일을 이룬 분이시다.”라고 높여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을 높이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향해 주시는 또 다른 의미가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향해 “네가 무엇을 하려고 광야로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였느냐?”라고 물으시는 듯합니다. “네가 광야에서 나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느냐? 너 나름대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 내지 않았느냐?”라고 도리어 반문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다시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

이어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준비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그리고 그 천국에서 요한이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라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여신 분입니다. 천국을 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요즘 새벽마다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며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변치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로마 지역에 살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면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떠나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예수님에게서 실족했던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히브리서는 예수님만을 믿으라고, 그 믿음이 변치 않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 그 신앙에서 떠나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에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3 중)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 흔들리는 갈대였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광야에 나갔더냐?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왔더냐? 목사가 어떤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드리는지 구경하려고 나왔느냐? 교회가 어떤 일을 하는지 판단하고 점검하려고 나왔느냐? 자신의 야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나왔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교회에 나왔더냐? 참 선지자, 온전하신 주님을 뵈려 함이 아니었더냐? 예수를 만나려 함이 아니었더냐? 나를 만나려 함이 아니더냐?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예수님의 이름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실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이 겪지 않는 힘든 일을 경험하게 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은 여전히 우리에게 귀한 이름입니다. 심지어 사형장에서조차, 아들을 잃은 고통의 자리에서조차,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이름, 믿을 만한 유일한 이름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11:6 중)

2019년 12월 1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0장, 45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11:2-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2월 1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셨고, 변화산 위에서는 엘리야로 인정해 주셨으며,(마17:11-13)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마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종말을 피하라고 하였더랴?”라고 외쳤으며, 헤롯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해서 옳지 않도록 말함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마14:3-4) 이처럼 당당하고 충성스러운 세례요한도 한 가지 의심이 있었습니다.

설교의 요약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2-3)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들었지만, 그가 기다리는 예수가 맞는가?하는 걱정, 의문(의시)을 품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고,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그리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시는 그러한 분(마3:10-12)”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 들은 대로, 고침을 받는 사람들, 살아나는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여 지는 그 복음에 대하여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11:4-6)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를 결코 실족시킬 수 없는 이름입니다. 예수 그 귀하신 이름은 우리에게 소망이요, 여전히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여신 분이시며, 천국을 여신 분이십니다. 예수의 이름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예수님의 이름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실한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이름, 믿을 만한 유일하신 이름이십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천국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

나누기

1. 여러분의 이름에 담긴 뜻과 의미는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절망과 아픔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나의 마음은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만이 소망이요 희망입니다. 그 이름으로 승리하도록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하늘로 통하고,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요, 만유의 주인 되신 그 이름,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에게 주시는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이 이름만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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