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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인간이라 하는가

전도서 9: 7 ~ 10

김경진 목사

2020.02.16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요즘은 흔히 사용되는 용어지만, 약 20년 전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단어를 제목으로 한 영화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바로 라는 영화입니다. ‘Artificial Intelligence’ 즉 ‘인공지능’이란 뜻입니다. 아마 많은 분이 보셨을 것입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한 박사가 새롭게 개발될 로봇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마음과 감성을 지닌 로봇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 장면이 바뀌면서 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 부부에게는 몹쓸 병에 걸려 냉동 인간 상태로 치료책을 기다리는 아들이 있습니다. 엄마는 냉동 상태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동화를 읽어주기도 하고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아이를 대신할 로봇 하나를 구입하여 집으로 옵니다. 생긴 모습이 냉동 상태인 아들을 똑 닮았습니다. 게다가 인간처럼 마음과 감정을 지닌 로봇입니다. 로봇의 이름은 데이빗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을 잘 주지 못하던 엄마가 아들 마틴의 모습을 닮은 로봇을 점차 좋아하게 되고 애정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엄마는 데이빗에게 피노키오 이야기도 들려주며 사랑스럽게 키워 갑니다. 사랑과 교감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치료약이 개발되어 냉동 상태로 누워 있던 진짜 아들 마틴이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똑같은 생김새의 두 아이가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아이 사이에 묘한 감정이 흐릅니다. 어느 날 인간 마틴이 로봇 데이빗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 싶으면 어머니가 잠자는 사이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던 데이빗이었기에, 그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로봇이 가족을 헤칠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로봇을 폐기 처분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엄마가 로봇을 버리기 위해 폐기장으로 가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로봇을 버리면 되는데, 차마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폐기 처분 회사에 로봇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그만 길가에 로봇을 내려놓습니다. 엄마는 로봇에게 돈을 쥐여 주며 잘 간직하라고 합니다. 로봇 데이빗은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엄마를 열심히 따라가지만, 차와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면서 결국 엄마와 헤어지고 맙니다.
엄마와 헤어진 뒤 데이빗은 자신이 엄마에게 버림받게 된 이유가 진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다 피노키오 이야기에서 들은 요정을 찾아가기로 결정합니다. 험난한 여정을 거쳐 뉴욕 맨해튼에서 요정의 형상을 봅니다. 그 형상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곤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2000년이란 시간이 흐릅니다. 아마 인간들은 모두 멸망한 것 같고, 외계인들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들이 로봇 인간을 발견하고는 에너지를 주입해 로봇이었던 데이빗을 살려냅니다. 외계인들은 그 안에 어떤 메모리가 들어있는지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는 사실까지 밝힙니다. 게다가 로봇을 도와주기로 결정합니다. “우리는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단다. 하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엄마의 머리카락으로 너의 엄마를 잠시 동안 만들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단 하루뿐이다. 하루 동안만 너의 엄마는 기억을 하게 될 것이고, 엄마가 다시 잠들게 되면 그때 엄마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약속대로 그들은 로봇 아이에게 2000년 전에 죽은 엄마를 살려내어 보내줍니다. 그리고 단 하루의 시간이 허락됩니다. 그렇게 데이빗은 엄마와 깊은 하루를 보냅니다. 목욕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동화도 읽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밤이 됩니다.
엄마는 말합니다. “왜 이리 졸리지?” 이제 잠이 들면 영원히 엄마와는 만날 수 없습니다. 엄마는 곧 죽게 될 것입니다. 데이빗은 엄마 옆에 눕습니다. 죽어가는 엄마 옆에서 자신도 잠이 들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데이빗은 여전히 배터리의 수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수십 년, 수백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엄마와 함께 눕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 아이는 한없이 한없이 엄마 옆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지 않았다.”
참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실 영화일 것입니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로봇의 절절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며 ‘죽는다는 게 얼마나 인간적인 것인가’ 하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인간은 죽는 존재구나. 죽는 것이 인간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유한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비슷한 영화가 하나 더 있었는데, 입니다. 200년 동안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곧 인공지능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비슷한 설정이 있습니다. 남자 로봇이 진짜 여자 인간을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참 깊이 사랑했는데, 그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릅니다. 여인은 나이가 들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로봇은 계속해서 살고 또 살아갑니다. 그러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손녀를 보게 되는데, 그녀가 이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너무 닮아 다시 사랑에 빠집니다. 이번만큼은 사랑하는 여인을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부착된 장치를 하나씩 빼낸 뒤, 대신 인간의 장기를 채워 넣습니다.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로봇의 머리에는 여전히 오래 기억되는 기억 장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인간이 되길 원하며, 머리의 모든 기능도 바꿉니다. 스스로 죽어가도록 프로그램을 만들고, 로봇임에도 하나씩 잊어버리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빠지기도 하며, 늙어가도록 설정합니다. 그렇게 로봇은 끊임없이 인간이 되고자 했습니다.
당시에 비슷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이 두 편이 인간이 되고자 한 로봇의 이야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영화를 많이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이 두 영화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 때문입니다.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도 있고, 무한한 정보를 저장할 수도 있고,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예견하면서, 또 그런 환경에서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질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이성과 과학이 주도하는 세계를 경험해 왔습니다. 과학과 의학은 멋진 미래를 약속해 주는 듯 보였습니다. 테크노피아의 세계,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를 열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계몽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경험했습니다. 100층짜리 빌딩도 건설할 수 있고, 우주선을 만들어 달로 쏘아 올릴 수 있는 인간을 보았습니다. 로봇을 만들 수도 있고, 모든 질병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인간의 모습은 그와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오늘날 인간을 정의하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의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인간이란 사랑하고, 인간이란 늙어가며, 인간이란 죽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무언가를 정의할 때, 비교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인간을 정의하려 할 때, 동물과 비교했습니다.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며, 이성적인 존재고,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이자 기억할 줄 아는 존재고, 학습 능력을 지니며,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더는 인간을 동물과 비교할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상상력이 필요한 이야기지만, 우리 주위의 수많은 컴퓨터와 로봇, 사이보그와 인간을 비교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기억을 많이 할 수 있다 해도 컴퓨터와 대결할 수는 없습니다. 컴퓨터 메모리는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정보를 기억하고 실행하지 않습니까? 지식의 전달, 문화의 창조, 모든 것을 로봇에게 빼앗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 미래의 시장도 로봇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빨래, 청소, 이 모든 것도 로봇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더는 인간을 로봇과 비교하여 정의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데이터는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될 테고, 인간을 도와줄 로봇은 도리어 인간이 살다가 죽고, 또 살다가 죽어가는 모든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로봇에 비교한다면 인간은 그저 몇십 년을 살다가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은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질병을 앓고, 때로는 사랑으로 몸살을 앓고,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전염병이 지나가면 맥없이 쓰러지는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앞서 로봇에 관한 영화들은 로봇이 인간의 무엇을 부러워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진정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도리어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인간의 ‘사랑’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기도 하는, 또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때로는 절망하고 희망하기도 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흙에서 나왔고, 그래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을 부러워한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지혜는 자족하는 삶에서 발견됩니다.>

수천 년 전 주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인간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 12:7~8, 새번역)

“무엇을 인간이라 하는가? 인간의 육체는 본래의 흙으로 돌아갈 뿐이며, 그 숨결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뿐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말합니다.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기쁨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 (전도서 8:15, 새번역)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해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100명을 찾아 연구 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이 조사에서 학자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100명을 철저히 인터뷰한 후, 모든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해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처음에는 무척 실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눈에 띄는 특별한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학교를 중퇴했고, 어떤 사람은 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를 만났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했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인생의 어느 시점에 성공했고,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결과가 보였다고 합니다. 100중 70명이 작은 도시 출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구 15,000명 이하의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비교적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일부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마무리하려던 중 매우 중요한 결론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100명 모두 즉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팀이 발견한 것은 100명 모두가 어떤 환경에서든지 좋은 것을 찾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Good Finder’였다는 말입니다. 자신 안에서 좋은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 이웃에게서 좋은 것을 보려는 사람, 어떤 환경에서도 좋은 모습을 찾아내려 한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만족할 만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더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전도서 9:7~9 중, 새번역)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인생을 살라는 권면입니다. 아내와 더불어, 또 남편과 더불어 즐겁게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은 “공부 좀 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좀 만들어라.”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시를 이루기 위해 큰 빌딩을 만들어 봐라.”라고 명령하신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신 내용이 아닙니다.
다리를 놓고, 빌딩을 세우고, 과학을 연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과 실천으로 과거보다 편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인간다운 것인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다움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워 가는 삶이 예술이 됩니다. >

우리가 결혼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아갑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배우며, 사랑을 전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집을 마련해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돈을 많이 벌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정작 우리가 그럴듯한 집을 마련하기 위해 온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열심히 나가 일하느라 서로가 함께할 시간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집에 들어와서는 짜증을 부릴 때가 많습니다. 사랑을 나누지 못한 채 집을 얻기 위해서만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다 집을 얻었는데, 그때는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나가고 두 사람만 썰렁하게 남습니다. 도리어 그 집을 지키느라 힘이 듭니다. 따듯한 가정을 이루어 보지도 못하고, 집만 덩그러니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하여 생활하는 분이 있습니까? 즐거운 결혼 생활을 하십시오. 깊이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육체적이 되십시오. 육감적이 되십시오. 즐겁게 결혼의 삶을 누리십시오. 독신으로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까? 홀로 살아가는 그 시간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것을 즐기십시오. 결혼했으나 아이가 없는 분이 있습니까? ‘왜 아이가 생기지 않는가’ 하고 초초한 삶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을 행복하게 여기며 즐기십시오. 그 복된 시간을 만끽하십시오. 아기가 생겨 복잡해지고 여러 힘든 일들이 생겼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기가 자라는 동안 보여주는 놀라운 애교에 만족하십시오. 그것으로 기뻐하십시오. 누리십시오. 그 시간도 잠시 주어질 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참으로 후회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걱정하고, 왜 그렇게 많이 생각하며 살았는지, 왜 그렇게 목적을 가지고 살았는지 말입니다. 돌이켜보니, 도리어 그때가 참 좋았다고 생각되는 날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정작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정말 행복하게 살리라. 행복하게 가정도 꾸리고, 즐겁게 아이들도 키우며 살리라.’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재라는 귀한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네게 주신 모든 날에 즐거움을 누려라.”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움입니다. 나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그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쾌락주의로 흐르거나 허무주의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절망과 허무 속에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0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 (전도서 9:10, 새번역)

전도자는 “어떤 일을 하든지”라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어도 좋습니다. 무슨 일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단, 그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결과를 이루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다만 힘을 다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즐겁게 그림을 그리며, 즐겁게 음악을 연주하듯이, 행복하게 내게 주신 몸을 움직이면서 춤을 추듯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현장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삶을 예술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축제의 날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시간을 즐거움이 가득 찬 현장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음껏 사랑하며 기쁨으로 넘치는 축제의 삶을 향유합시다.>

혹시 요즘 전염병 때문에 집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종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을 만끽해 보십시오. 즐겁게 지내보는 것입니다. 혹시 요즘 일이 없습니까? 그 시간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가족과 함께하며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축제로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현재를 예술로 만들어 가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마약이나 술에 의지해서 그 쾌락을 만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체와 시간으로 좋은 것들을 발견해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하루면 좋겠습니다. “수고했어.”라고 축복하면서, 내게 축하의 박수도 보내주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하루, 어떻습니까? 가족이 함께 모여 사랑을 나누는 날이 오늘이면 어떻겠습니까?
부모님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에게 정말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마음껏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아가길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까 봐 공부하라고 하고, 걱정이 되어 좋은 직장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까? 즉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내 아이가 마음껏 살아가는 것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마음껏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직업을 바꾸고 싶어 하는 한 젊은 청년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나름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직업 대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하고 물었더니, 파티 플래너(party planner)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금방 수긍이 되었습니다. ‘파티 플래너’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빛났기 때문입니다.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그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해 봐라. 즐겁게 해 봐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거야.”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인간이라고 합니까? 태어나고 병들고 어려움도 당하고 죽어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라고 합니다. 홍수에 해를 당하기도 하고, 지진에 땅이 함몰되기도 하고, 전염병에 쓰러지기도 하고, 병에서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인간, 그러나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인간. 그 존재를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고, 고통을 나누는 존재, 이 특별한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어떤 시간을 보내든지, 삶을 충일하게 경험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귀한 성도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What is Man?

Ecclesiastes 9: 7-10

A.I., Artificial Intelligence, is a 2017 movie directed by Stephen Spielberg. In the first scene, a doctor announces the creation of a new robot that can feel and love like humans.In the next scene, a couple appears. They are waiting for a miracle curefor their sick son who is placed under suspended animation. The mother often goes to the boy’s bedside to read him bedtime stories.

One day, the father brings home a robot boy to replace their son. It looks just like him, even capable of feeling emotions. They name it David, and start to raise him like their own. The couple’s lives are filled with happiness as they read him stories like Pinocchio. They love him and are loved by him.

Suddenly, a cure is developed and their real son, Martin, miraculously recovers. Now the couple has two sons living with them. A strange emotion builds between the two. One day Martin tells David, the robot child, to cut locks of mommy’s hair while she is sleeping if he wants to be loved. David is tricked into doing so, andsimilar incidents happen, forcing the couple to abandon David out of fear that he might hurt them.

The scene of David’s abandonment is heart-wrenching. Unable to bring herself to take David back to the robot company where he would be destroyed, mommy abandons him in a nearby park. David begs her not to go, clinging on to her and saying he’s sorry. Finally, he cannot catch up with her as she moves away in a car.

David thinks that he can win back mommy’s love if he becomes human. Recalling the story of Pinocchio, he decides to find the Blue Fairy who would turn him into a human. He finds a statue of the Blue Fairy in desolate Manhattan and repeatedly prays to become human.

Two thousand years later,humans have become extinct, and the earth is visited by aliens who revive David. They find out what David has been thinking all along and say, “We cannot make you human, but we can make your mommy come back to life with the lock of hair that you have. But only for a day.”

True to their promise, mommy is revived.Foronewhole perfectday, David reads fairytales with her, plays hide and seek, and takes a bath. It is a day of bliss. At the end of the day, mommy can’t keep her eyes open, and David knows that once she falls asleep, he would never see her again. So he lies down next to her. David will have to live on for hundreds of years more until his battery remains. But he stays there, beside his mommy, never waking up.

A.I. was a truly touching movie for me. In that decade there were many movies on robots. Bicentennial Man was another such movie. It is about a male robot who tries to make himself truly “human” by causing his body to age and eventually die out of his love for a human woman.

A.I. and Bicentennial Man are just two examples of how robots attempt to become human. Although I am not a critic or a big fan of cinema, I found myself deeply preoccupied with this question after seeing these movies: What is man?

As we predict an age where robots process unlimited amounts of data, live on forever, and even love and feel emotions, how can we define humans? The 19th and 20th centuries championed reason the “enlightened man.” Science and medicine seemed to promise a bright future for mankind. Man was put on the moon, and we built skyscrapers. But the 21st century seems to be promoting a completely different side of humans. Today, man is man for his physical attributes, such as ageing, dying, and his ability to love.

Comparison allows definition. While in the past man was defined in comparison to animals, now he is defined in comparison to robots and computers. Man can no longer be defined for his vast memory as computers process way more data than him. While data and robots live on for thousands of years, man is finite. Man loves, aches, and falls ill. He is so easily stricken by infectious diseases. The two movies above show that it is precisely this finite quality of man—his ability to love and inevitable physical decay—that robots desire. Created from dust, he will return to it.

Thousands of years ago, the Bible declared,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Meaningless! Meaningless!’ says the Teacher. ‘Everything is meaningless!’” (Ecclesiastes 12:7-8)

What is man? Man is a being that will return to dust, for it is where he came from. His spirit will return to God who gave it. This is man. It is paramount that we acknowledge this.

The Teacher declares in the eighth chapter of Ecclesiastes: “So I commend the enjoyment of life, because there is nothing better for a person under the sun than to eat and drink and be glad. Then joy will accompany them in their toil all the days of the life God has given them under the sun.” (Ecclesiastes 8:15)

There was a study in the U.S. on 100 people who had achieved social success and were satisfied with their life. Researchers tried to find a common denominator among them. Their initial finding was rather disappointing. There were no common traits. Some didn’t even graduate primary school, while others had doctor’s degrees. Some came from rich families, while others came from poor ones.

However researchers noticed one characteristic: 70 percent of them came from small towns with a population of less than 15,000. Later, a clearerdenominator was found: All of them were “good finders”, that is people who found good in all circumstances. So, researchers concluded that it is a person who finds good in himself, others, and all circumstances that leads a successful, happy life.

Therefore today’s passage teaches us: “Go, eat your food with gladness, and drink your wine with a joyful heart, for God has already approved what you do. Always be clothed in white, and always anoint your head with oil. Enjoy life with your wife, whom you love, all the days of this meaningless life that God has given you under the sun—all your meaningless days. For this is your lot in life and in your toilsome labor under the sun.”

It is teaching us to live with joy, to live happily with our husbands and wives. Nowhere in the Bible does it say to “study hard.” God didn’t command us humans to build bridges and skyscrapers. God did not demand these things. We build bridges and buildings and study science because we believe these activities define us. But do they really?

We marry. Two lovers meet and have children. The most critical factor in a marriage is love. Sharing and teaching love—this is what defines family.Who ever told a married couple that they needed a spacious house? A high income? God gave us a warm, loving home, but we don’t stay in it, too busy building careers and making money.

Are you married? Enjoy your marriage. Love deeply and express it. Become sensual, physical. Are you not married? Enjoy your solitude with God. Are you married but childless? Don’t fret about when the baby will come, but enjoy your time as a couple. Are you married and have children that create havoc in your lives? Enjoy it. Enjoy the sweetness of your child. It won’t last forever.

Looking back on my time as an overseas student in the States, I realize I worried too muchabout the future. I was also always too stressed about my studies. Now I realize that it was a blessed time. Time to study all I want, experience new cultures, and meet people…

God tells us today to enjoy all the days of our life. This is being truly human. Whatever your circumstance may be, find joy in it. That is life’s wisdom. Of course, this must not lead to hedonism or nihilism.

That is why the Teacher says in verse 10,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realm of the dead,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Ecclesiastes 9:10)

The Teacher tells us to do “whatever your hands finds to do.” It doesn’t matter what that is. Just do your best. It doesn’t tell us to achieve great results. Just do it with all your might. This is God’s loving command. Make a festival out of your life, just as an artist paints, plays music, and dances. You can’t force it. And the Bible is not saying that we should enjoy life with the help of alcohol or other pleasures. It is telling us to discover the good things in life with the time and body given to us by God.

Be generous to yourself today. Do what pleases you. Give yourself a treat. Spend a happy, loving day with you family.

What do parents really want for their children? Don’t you want them to enjoy life and live it was they wished? But don’t you pressure them to study, to go to cram schools “because” you think that for that kind of happy life they need money and a good job? I don’t want to ignore the process that gets us to the end. Yet, what I am trying to say is that if we reflect on the clear goal, we might become a little wiser.

God is like a parent. He wants us to live happily and joyfully in this word, and live our lives to the fullest.

What is man? Man is subject to diseases, difficulties, and death. That is man. Man may overcome floods and calamities and fight diseases, but when the time comes, he will return to dust. That is man. He loves and hurts.

God lovingly tells us today: “Go, eat your food with gladness, and drink your wine with a joyful heart, for God has already approved what you do. Always be clothed in white, and always anoint your head with oil. Enjoy life with your wife, whom you love, all the days of this meaningless life that God has given you under the sun—all your meaningless days. For this is your lot in life and in your toilsome labor under the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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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9: 7 ~ 10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요즘은 흔히 사용되는 용어지만, 약 20년 전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단어를 제목으로 한 영화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바로 라는 영화입니다. ‘Artificial Intelligence’ 즉 ‘인공지능’이란 뜻입니다. 아마 많은 분이 보셨을 것입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한 박사가 새롭게 개발될 로봇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마음과 감성을 지닌 로봇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 장면이 바뀌면서 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 부부에게는 몹쓸 병에 걸려 냉동 인간 상태로 치료책을 기다리는 아들이 있습니다. 엄마는 냉동 상태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동화를 읽어주기도 하고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아이를 대신할 로봇 하나를 구입하여 집으로 옵니다. 생긴 모습이 냉동 상태인 아들을 똑 닮았습니다. 게다가 인간처럼 마음과 감정을 지닌 로봇입니다. 로봇의 이름은 데이빗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을 잘 주지 못하던 엄마가 아들 마틴의 모습을 닮은 로봇을 점차 좋아하게 되고 애정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엄마는 데이빗에게 피노키오 이야기도 들려주며 사랑스럽게 키워 갑니다. 사랑과 교감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치료약이 개발되어 냉동 상태로 누워 있던 진짜 아들 마틴이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똑같은 생김새의 두 아이가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아이 사이에 묘한 감정이 흐릅니다. 어느 날 인간 마틴이 로봇 데이빗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 싶으면 어머니가 잠자는 사이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던 데이빗이었기에, 그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로봇이 가족을 헤칠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로봇을 폐기 처분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엄마가 로봇을 버리기 위해 폐기장으로 가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로봇을 버리면 되는데, 차마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폐기 처분 회사에 로봇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그만 길가에 로봇을 내려놓습니다. 엄마는 로봇에게 돈을 쥐여 주며 잘 간직하라고 합니다. 로봇 데이빗은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엄마를 열심히 따라가지만, 차와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면서 결국 엄마와 헤어지고 맙니다.
엄마와 헤어진 뒤 데이빗은 자신이 엄마에게 버림받게 된 이유가 진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다 피노키오 이야기에서 들은 요정을 찾아가기로 결정합니다. 험난한 여정을 거쳐 뉴욕 맨해튼에서 요정의 형상을 봅니다. 그 형상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곤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2000년이란 시간이 흐릅니다. 아마 인간들은 모두 멸망한 것 같고, 외계인들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들이 로봇 인간을 발견하고는 에너지를 주입해 로봇이었던 데이빗을 살려냅니다. 외계인들은 그 안에 어떤 메모리가 들어있는지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는 사실까지 밝힙니다. 게다가 로봇을 도와주기로 결정합니다. “우리는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단다. 하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엄마의 머리카락으로 너의 엄마를 잠시 동안 만들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단 하루뿐이다. 하루 동안만 너의 엄마는 기억을 하게 될 것이고, 엄마가 다시 잠들게 되면 그때 엄마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약속대로 그들은 로봇 아이에게 2000년 전에 죽은 엄마를 살려내어 보내줍니다. 그리고 단 하루의 시간이 허락됩니다. 그렇게 데이빗은 엄마와 깊은 하루를 보냅니다. 목욕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동화도 읽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밤이 됩니다.
엄마는 말합니다. “왜 이리 졸리지?” 이제 잠이 들면 영원히 엄마와는 만날 수 없습니다. 엄마는 곧 죽게 될 것입니다. 데이빗은 엄마 옆에 눕습니다. 죽어가는 엄마 옆에서 자신도 잠이 들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데이빗은 여전히 배터리의 수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수십 년, 수백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엄마와 함께 눕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 아이는 한없이 한없이 엄마 옆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지 않았다.”
참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실 영화일 것입니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로봇의 절절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며 ‘죽는다는 게 얼마나 인간적인 것인가’ 하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인간은 죽는 존재구나. 죽는 것이 인간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유한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비슷한 영화가 하나 더 있었는데, 입니다. 200년 동안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곧 인공지능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비슷한 설정이 있습니다. 남자 로봇이 진짜 여자 인간을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참 깊이 사랑했는데, 그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릅니다. 여인은 나이가 들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로봇은 계속해서 살고 또 살아갑니다. 그러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손녀를 보게 되는데, 그녀가 이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너무 닮아 다시 사랑에 빠집니다. 이번만큼은 사랑하는 여인을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부착된 장치를 하나씩 빼낸 뒤, 대신 인간의 장기를 채워 넣습니다.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로봇의 머리에는 여전히 오래 기억되는 기억 장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인간이 되길 원하며, 머리의 모든 기능도 바꿉니다. 스스로 죽어가도록 프로그램을 만들고, 로봇임에도 하나씩 잊어버리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빠지기도 하며, 늙어가도록 설정합니다. 그렇게 로봇은 끊임없이 인간이 되고자 했습니다.
당시에 비슷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이 두 편이 인간이 되고자 한 로봇의 이야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영화를 많이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이 두 영화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 때문입니다.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도 있고, 무한한 정보를 저장할 수도 있고,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예견하면서, 또 그런 환경에서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질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이성과 과학이 주도하는 세계를 경험해 왔습니다. 과학과 의학은 멋진 미래를 약속해 주는 듯 보였습니다. 테크노피아의 세계,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를 열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계몽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경험했습니다. 100층짜리 빌딩도 건설할 수 있고, 우주선을 만들어 달로 쏘아 올릴 수 있는 인간을 보았습니다. 로봇을 만들 수도 있고, 모든 질병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인간의 모습은 그와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오늘날 인간을 정의하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의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인간이란 사랑하고, 인간이란 늙어가며, 인간이란 죽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무언가를 정의할 때, 비교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인간을 정의하려 할 때, 동물과 비교했습니다.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며, 이성적인 존재고,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이자 기억할 줄 아는 존재고, 학습 능력을 지니며,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더는 인간을 동물과 비교할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상상력이 필요한 이야기지만, 우리 주위의 수많은 컴퓨터와 로봇, 사이보그와 인간을 비교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기억을 많이 할 수 있다 해도 컴퓨터와 대결할 수는 없습니다. 컴퓨터 메모리는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정보를 기억하고 실행하지 않습니까? 지식의 전달, 문화의 창조, 모든 것을 로봇에게 빼앗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 미래의 시장도 로봇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빨래, 청소, 이 모든 것도 로봇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더는 인간을 로봇과 비교하여 정의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데이터는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될 테고, 인간을 도와줄 로봇은 도리어 인간이 살다가 죽고, 또 살다가 죽어가는 모든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로봇에 비교한다면 인간은 그저 몇십 년을 살다가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은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질병을 앓고, 때로는 사랑으로 몸살을 앓고,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전염병이 지나가면 맥없이 쓰러지는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앞서 로봇에 관한 영화들은 로봇이 인간의 무엇을 부러워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진정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도리어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인간의 ‘사랑’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기도 하는, 또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때로는 절망하고 희망하기도 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흙에서 나왔고, 그래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을 부러워한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지혜는 자족하는 삶에서 발견됩니다.>

수천 년 전 주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인간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 12:7~8, 새번역)

“무엇을 인간이라 하는가? 인간의 육체는 본래의 흙으로 돌아갈 뿐이며, 그 숨결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뿐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말합니다.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기쁨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 (전도서 8:15, 새번역)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해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100명을 찾아 연구 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이 조사에서 학자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100명을 철저히 인터뷰한 후, 모든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해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처음에는 무척 실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눈에 띄는 특별한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학교를 중퇴했고, 어떤 사람은 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를 만났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했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인생의 어느 시점에 성공했고,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결과가 보였다고 합니다. 100중 70명이 작은 도시 출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구 15,000명 이하의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비교적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일부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마무리하려던 중 매우 중요한 결론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100명 모두 즉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팀이 발견한 것은 100명 모두가 어떤 환경에서든지 좋은 것을 찾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Good Finder’였다는 말입니다. 자신 안에서 좋은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 이웃에게서 좋은 것을 보려는 사람, 어떤 환경에서도 좋은 모습을 찾아내려 한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만족할 만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더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전도서 9:7~9 중, 새번역)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인생을 살라는 권면입니다. 아내와 더불어, 또 남편과 더불어 즐겁게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은 “공부 좀 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좀 만들어라.”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시를 이루기 위해 큰 빌딩을 만들어 봐라.”라고 명령하신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신 내용이 아닙니다.
다리를 놓고, 빌딩을 세우고, 과학을 연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과 실천으로 과거보다 편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인간다운 것인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다움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워 가는 삶이 예술이 됩니다. >

우리가 결혼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아갑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배우며, 사랑을 전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집을 마련해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돈을 많이 벌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정작 우리가 그럴듯한 집을 마련하기 위해 온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열심히 나가 일하느라 서로가 함께할 시간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집에 들어와서는 짜증을 부릴 때가 많습니다. 사랑을 나누지 못한 채 집을 얻기 위해서만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다 집을 얻었는데, 그때는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나가고 두 사람만 썰렁하게 남습니다. 도리어 그 집을 지키느라 힘이 듭니다. 따듯한 가정을 이루어 보지도 못하고, 집만 덩그러니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하여 생활하는 분이 있습니까? 즐거운 결혼 생활을 하십시오. 깊이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육체적이 되십시오. 육감적이 되십시오. 즐겁게 결혼의 삶을 누리십시오. 독신으로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까? 홀로 살아가는 그 시간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것을 즐기십시오. 결혼했으나 아이가 없는 분이 있습니까? ‘왜 아이가 생기지 않는가’ 하고 초초한 삶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을 행복하게 여기며 즐기십시오. 그 복된 시간을 만끽하십시오. 아기가 생겨 복잡해지고 여러 힘든 일들이 생겼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기가 자라는 동안 보여주는 놀라운 애교에 만족하십시오. 그것으로 기뻐하십시오. 누리십시오. 그 시간도 잠시 주어질 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참으로 후회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걱정하고, 왜 그렇게 많이 생각하며 살았는지, 왜 그렇게 목적을 가지고 살았는지 말입니다. 돌이켜보니, 도리어 그때가 참 좋았다고 생각되는 날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정작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정말 행복하게 살리라. 행복하게 가정도 꾸리고, 즐겁게 아이들도 키우며 살리라.’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재라는 귀한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네게 주신 모든 날에 즐거움을 누려라.”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움입니다. 나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그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쾌락주의로 흐르거나 허무주의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절망과 허무 속에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0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 (전도서 9:10, 새번역)

전도자는 “어떤 일을 하든지”라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어도 좋습니다. 무슨 일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단, 그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결과를 이루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다만 힘을 다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권면입니다.
즐겁게 그림을 그리며, 즐겁게 음악을 연주하듯이, 행복하게 내게 주신 몸을 움직이면서 춤을 추듯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현장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삶을 예술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축제의 날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시간을 즐거움이 가득 찬 현장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음껏 사랑하며 기쁨으로 넘치는 축제의 삶을 향유합시다.>

혹시 요즘 전염병 때문에 집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종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을 만끽해 보십시오. 즐겁게 지내보는 것입니다. 혹시 요즘 일이 없습니까? 그 시간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가족과 함께하며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축제로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현재를 예술로 만들어 가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마약이나 술에 의지해서 그 쾌락을 만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체와 시간으로 좋은 것들을 발견해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하루면 좋겠습니다. “수고했어.”라고 축복하면서, 내게 축하의 박수도 보내주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하루, 어떻습니까? 가족이 함께 모여 사랑을 나누는 날이 오늘이면 어떻겠습니까?
부모님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에게 정말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마음껏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아가길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까 봐 공부하라고 하고, 걱정이 되어 좋은 직장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까? 즉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내 아이가 마음껏 살아가는 것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마음껏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직업을 바꾸고 싶어 하는 한 젊은 청년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나름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직업 대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하고 물었더니, 파티 플래너(party planner)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금방 수긍이 되었습니다. ‘파티 플래너’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빛났기 때문입니다.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그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해 봐라. 즐겁게 해 봐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거야.”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인간이라고 합니까? 태어나고 병들고 어려움도 당하고 죽어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라고 합니다. 홍수에 해를 당하기도 하고, 지진에 땅이 함몰되기도 하고, 전염병에 쓰러지기도 하고, 병에서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인간, 그러나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인간. 그 존재를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고, 고통을 나누는 존재, 이 특별한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어떤 시간을 보내든지, 삶을 충일하게 경험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귀한 성도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0년 2월 1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무엇을 인간이라 하는가” (전 9:7-10)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9장, 42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전 9:7-1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1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간이 되고자하는 로봇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19-20세기를 거치면서 이성과 과학을 통해 테크노피아(Technopia)를 만들어왔습니다. 100층짜리 빌딩도 올리고, 우주선을 만들어 달로도 쏘아 올렸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21세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인간상은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인간은 그저 늙어가고 죽어가는 존재 일 뿐입니다. 그럼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앞서 말씀드린 사이보그 영화는 로봇들이 인간의 무엇을 부러워하는 지를 보여줌으로써 진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인간다움은 바로 ‘인간의 유한성, 인간의 사랑, 늙고 병들어 가고 죽기도 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런 인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 12:7-8 새번역).

   그럼 이런 유한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인가요? 오늘 본문 전도서 9장에서 전도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시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전 9:7-9 새번역).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가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결혼생활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즐거운 결혼생활을 하십시오. 깊이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육체적이, 육감적이 되십시오. 독신이신 분이 있습니까? 홀로 있는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이것을 즐기십시오. 결혼하셨으나 아이가 없는 분이 있습니까? 아기 주실 때까지 걱정하지 말고, 두 사람만이 있는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십시오. 아기가 생겨서 불편하게 되었다고, 걱정하는 분이 있습니까? 아기가 자라는 동안 보내주는 놀라운 애교를 보고 만족하십시오. 그 시간도 잠시 주어질 뿐입니다. 

   이것이 쾌락주의로 흐르거나, 허무주의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막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절망과 허무 속에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것, 즐겁게 음악을 연주하듯, 행복하게 나에게 주신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듯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시간을 축제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나에게 조금 너그러워 지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나, 그 안에서 삶을 누리는 인간, 그것이 인간다움일 것입니다. 

 나누기

 1.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까요? 질병과 고통에 노출된 유한한 인간을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까요?

 2. 왜 우리는 이런 유한함에 늘 불평만할까요? 내게 주신 최소한의 행복을 찾아내지 못할까요? 오늘 내 배우자, 자녀의 칭찬할 만한 점, 한 가지를 찾아내어 축복하면 어떨까요?

 마무리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유한한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즐거움으로 채우며,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시간들을 채워가길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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