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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시며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칭하십니다. >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보셨습니다.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 희생제물로 사용될 비둘기를 파는 자들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쫓으시고, 그들의 상을 엎으시며, 그들의 의자를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곤 “내 집 곧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며 강하게 질타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우리도 성전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곤 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의 모습과 이 현상을 보며 분노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당시 성전에는 희생제물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대로라면,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또 당시 성전에서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화폐만을 사용했기에 로마 화폐나 다른 화폐들은 필히 환전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성전 안에 환전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질책하시며 내쫓으신 것입니다.
심지어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들을 다 성전에서 쫓아내셨다는 기록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인들이 제물을 판매하거나 화폐를 환전하는 일을 성전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판단하셨습니다. 나아가 성전이 성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성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흐름에서 살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성전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예수님에게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즉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언뜻 드는 생각은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므로 그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사는 또 다른 차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는 늘 제사가 드려집니다. 그러니 그 제사가 잘 드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말씀 그대로 당시 성전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하는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때를 따라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므로 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이러한 전통적인 성전의 모습만 생각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라는 질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하시며, 성전에 대한 불충분성을 늘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의 성전에 대해 예수님은 완전한 신뢰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늘 성전의 불완전성을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 성전 정화 사건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
그렇다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어떤 성전의 모습을 원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마가복음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다란 점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의 앞과 뒤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성전 정화 사건이 무화과나무 이야기와 이어지고 있을까? 그것도 왜 둘러싸여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생기는 지점입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마가복음 11장 12~14절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마가복음 11:12~14)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나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시던 길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멀리 서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를 보시고는 그 앞에 다가서셨습니다.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하고 보았는데,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화를 발하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다고 증언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매가 없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 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황당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사실 이 이야기 뒤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보다 이 사건이 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해석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매우 감정적이고, 성급하며, 생각이 짧은 분처럼 보입니다. 무화과의 철도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예민하며, 감정적인 분이라면, 어떻게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만히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렇게 감정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상황은 아주 특별한 상황이요, 예수님이 특별한 목적 아래 화를 내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곤 저주하시며 이제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분명 화가 나 계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십니다. 역시 그곳에서도 성전에서 사람들을 쫓아내십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계속 감정 상태가 불안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화를 내시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화를 내시는 모습이 마가복음 11장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성전 뜰에서 상을 둘러 엎고, 의자를 던져 버리는 예수님의 모습.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소리 지르면서 노를 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게다가 때도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않았다고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어떤 이들은 그 모습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예수님이 하실 법한 행동이라고는 상상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이렇게 화를 내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필 이 대목에서 이토록 화를 발하셨을까요? 무엇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이 예수님의 특별한 뜻이 의도된, 즉 그분의 특별한 의미가 담긴 행위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 두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관한 교훈을 더해 주십니다. >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적 열매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신 예수님의 상징 행위였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것도 성전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예수님이 바로 그 장면을 통해 무언가를 말씀하고자 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에게 열매가 없다.”라는 말씀을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큰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어지는 내용이 장사꾼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한 모습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의 모습을 보시며 장사꾼들, 환전하는 이들을 내쫓으시며 예수님은 또다시 노를 발하십니다. 그때도 역시 큰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흐름에서 본다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성전 정화 사건의 앞뒤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무화과나무를 보셨고, 그 나무의 열매 없음에 노를 발하며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후 성전으로 올라가시어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튿날 내려오시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 있는 것을 보십니다. 말라 죽어 있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0~24)
뒷이야기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다음날 아침 예수님 일행과 베드로가 마을을 지나가다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전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하신 저주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어쩌면 신기하다는 듯이 예수님께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 그리곤 뒤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이 말씀의 의미를 맥락을 따라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그렇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4)
실로 엄청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어렴풋이 예수님이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지 앞뒤의 흐름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는 열매 없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요,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 주시려는 예수님의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와 관련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건의 끝이 기도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이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에서도, 무화과나무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막11:17)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이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성전 정화 사건을 둘러싸도록 배치된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구조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지금까지의 내용을 기초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저주대로 마른 것을 보시며, 이를 확인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매우 중요한 권면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새번역으로 해당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가복음 11:23~24, 새번역)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에 아주 평범하면서도 귀중한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믿음의 내용을 묻는다면, 우리는 신앙의 내용으로 사도신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언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대로 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산더러 ‘바다에 빠져라.’라고 말하고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때로 정교하고 보다 잘 정리된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신학도 필요하고, 신학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투박하지만 확실하고 단순한 믿음의 생각도 필요합니다. 언젠가 설교를 통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말씀도 나눌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때 저는 예수님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고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고쳐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믿음의 과정을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믿음과 성화와 같은 다양한 단계들을 이야기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한 가지는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 믿음의 정수요 신앙의 본질인 기도를 통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합시다. >
오늘 본문의 사건은 굉장히 치밀하게 의도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이미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이 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모습을 제자들로 하여금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모양만 있는 성전, 화려한 예전만 있는 성전, 변질된 성전의 모습입니다. 그곳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 열매를 예수님은 ‘기도’로 귀결시키십니다. 나아가 기도의 부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부재임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과연 성전에 기도가 없었겠습니까? 매일같이 기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요, 능력 없는 기도였습니다. 능력이 사라진 성전,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모양뿐인 제사, 힘없는 기도의 능력, 능력 없는 신앙, 능력 없는 예배자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죽은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제물이나 바치며 중얼거리는 정도의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힘입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신앙의 원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코 죽은 행위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족장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를 보면 그들은 항상 기도했고, 그래서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역동적이었고, 그들의 기도는 힘이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하듯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응답을 받아 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성전 시대가 되어 가면서 그들의 기도는 힘을 잃어 갔습니다. 성전에서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으로 기도 시간은 정해졌고, 기도 시간은 많아졌지만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능력 없는 성전을 책망하십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능력 없는 우리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2:19 중)
“이 성전을 헐라. 모양만 있는, 그저 제사만 드려지고 있는 성전, 그 성전을 헐어버려라. 능력 없는 기도만 이어지는 그런 성전을 헐어버리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바른 성전을 일으켜 세우겠다.” 능력 있는 성전, 기도가 통하는 성전, 하나님과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성전을 만들어 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한복음 14:13~14)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기도하여, 그 기도가 응답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응답을 다시 경험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또다시 기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구하고 받아 누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제 명절이 다가옵니다. 아마 신앙의 가정들은 예배를 드리겠지요. 그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한 가지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많은 가정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도를 조금 더 분명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란 어떤 가정입니까? 모든 식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가정이, 온 식구들이 나름대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가정을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기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가정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응답 받고, 응답 받은 것 때문에 감사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또다시 기도하고, 또다시 응답 받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온 가정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응답 받는 역동적인 신앙의 가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Why the Fig Tree Withered
Mark 11:15-18, 23-24
Today’s Scripture is about Jesus cleansing the temple. When Jesus reached the temple courts in Jerusalem, He overturned the tables of money changers and dove merchants. He scolded them for making God’s house a den of robbers. This incident becamea critical reason behind His crucifixion. Thus, it was a very significant event in Jesus’ life.
According to the Gospel of John, which describes Jesus’ anger in more detail, Jesus made a whip out of cords when he cleared the temple courts. At the time, merchantssold animal offerings in the temple courts to those who were not able to bring their own. Jesus thought that such acts and money-changing were a distortion of temple worship. He wanted the temple to be restored to what God intended it to be.
Then, what is the essence of temple worship? Prayer. As seen in today’s passage, Jesus said,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 But what exactly does this mean? What was Jesus’ vision for the temple? To answer these questions, we must look at the context of today’s passage. Interestingly, the story of Jesus cleansing the temple is sandwiched between the stories of the fig tree. Why does Jesus talk about the fig tree before and after cleansing the temple? Let’s study today’s passage from this perspective.
First, let’s read Mark chapter 11 verses 12 to 14, which comes right before today’s passage: “The next day as they were leaving Bethany, Jesus was hungry. Seeing in the distance a fig tree in leaf, he went to find out if it had any fruit. When he reached it, he found nothing but leaves, because it was not the season for figs. Then he said to the tree, ‘May no one ever eat fruit from you again.’ And his disciples heard him say it.” (Mark 11:12-14)
This story is hard to understand—even more so than the cleansing of the temple. Jesus appears quick-tempered, rash, and emotional. How can we expect fruit from a tree, when it is not the season for it? How can we trust someone who seems so sensitive, rash, and emotional? And Jesus was rarely rash or emotional. Yet, He was angry at the fig tree for not bearing fruit and cursed it,and fiercely scoldedthe merchants in the temple, driving them out. Imagine Jesus cursing a tree and throwing tables and chairs about. He was never this angry.
Then why was He angry? First, I believe that the fruitless fig tree was an intentional and meaningful act on the part of Jesus. The fig tree symbolized Israel. So, by showing a barren fig tree, Jesus was saying that Israel was fruitless. Jesus was angry at this. It broke his heart. Then, upon seeing the temple full of merchants, He became angry again. It broke His heart that the temple had lost its true meaning and role.
To summarize, the story of Jesus cleansing the temple is surrounded by the story of the fruitless fig tree. Jesus cursed the tree before going up to the temple, where he rebuked the merchants. And after He came down from the temple, He saw that the fig tree had withered.
Then, why did Jesus create the incident of the fig tree? What was His intention and message behind it? Clearly, He wanted us to see and feel something important. But how is it related to the cleansing of the temple?Let’s look at verses 20 to 24:
In the morning, as they went along, they saw the fig tree withered from the roots. Peter remembered and said to Jesus, “Rabbi, look! The fig tree you cursed has withered!” “Have faith in God,”Jesus answered. “Truly I tell you, if anyone says to this mountain, ‘Go, throw yourself into the sea,’ and does not doubt in their heart but believes that what they say will happen, it will be done for them.Therefore, I tell you,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believe that you have received it, and it will be yours. (Mark 11:20-24)
To sum up, after cleansing the temple, Jesus and the disciples spotted the fig tree again which had withered. Peter remembered Jesus’ curse, and told Him that it had withered. Jesus, however, said something unexpected: “Have faith in God.” He also said if one did not doubt what they said would happen, it would be done to them. This means that Jesus did not doubt that the fig tree would wither after he cursed it. He continued to say something astounding: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believe that you have received it, and it will be yours.”
It now seems a little bit clearer why Jesus cursed the fig tree. He did it to warn the fruitless Israelites and to teach a lesson to His disciples about the power of prayer. If you remember Jesus’ words after cleansing the temple—“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you will be able to make this connection. The important link between the fig tree incident and the cleansing of the temple is none other than “prayer.” This word comes up in both incidents. That is why the fig tree storyis located before and behindthe cleansing of the temple. It is, indeed, a very interesting structure.
Let’s summarize what we have learned so far. When Jesus saw that the fig tree had withered according to His curse, He taught a critical lesson to His disciples: “Have faith in God.” Then Heclarified what it meant to believe in God: “I tell you the truth, you can say to this mountain, ‘May you be lifted up and thrown into the sea,’ and it will happen. But you must really believe it will happen and have no doubt in your heart. I tell you, you can pray for anything, and if you believe that you’ve received it, it will be yours.” (Mark 11:23-24 NLT)
Dear Church, a simple but precious truth lies in these words. What does it mean to believe in God? Philosophy and theology may answer this question. The Apostle’s Creed and the Westminster Catechism also are confessions that lay out our set of beliefs. However, today’s passage in Markprovides us with amost clear and succinct answer: To believe in God means to believe that we have received what we have prayed for in God. It is to believe that a mountain will be thrown into the sea if we say it shall.
Sometimes we need a well-organized set of beliefs. That is why we need theology. But, at other times, all we need is a firm and simple faith—although it may seem unrefined. Today, I ask you this question: “What does it mean to believe in God?” And the simple answer is this: “To pray to God and to believe that your prayers will be answered.”
The cleansing of the temple was a calculated move on the part of Jesus. He meant to deliver a message about the essence of temple worship. To do so, He chose a fig tree as a teaching tool. He cursed it. He let the disciples see how it really withered.
What was Jesus trying to tell us? Temple worship had become distorted. It looked good only on the surface. There was no fruit. The temple did not produce the fruitthat God was looking for—which was “prayer.”A lack of prayer meant a lack of faith in God.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
Surely, people prayed in the temple. However, these prayers were only superficial and powerless. A temple with no power, casual worship, and powerless prayer. Jesus was rebuking these.
Prayer is not a lifeless act. It is not just bringing a sacrifice and mumbling to God. It is a powerful act. It is power itself. It is the very force behind miracles and amazing changes. Abraham, Isaac, Jacob, and Moses all prayed and received unimaginable blessings from God. Their prayers were dynamic and powerful. Their prayers were close conversations with God. And they were blessed with answers.
However, after the temple was built and the people of God began to worship there, prayers gradually lost their power. The people of God prayed in the temple, regularly—three times a day. Daily prayers were observed. Prayer times were set. More time was given to prayer. But the power of prayer had disappeared.
Prayer is powerful. It can make things happen and change the world. Jesus rebuked the temple for losing this power. Now, He is rebuking us for losing this power. Jesus said, “Destroy this temple, and I will raise it again in three days.” (John 2:19) He also said, “And I will do whatever you ask in my name, so that the Father may be glorified in the Son.You may ask me for anything in my name, and I will do it.” (John 14:13-14)
Dear Church, I say this to you again. Have faith in God! What does it mean to have faith in God? It is to tell God about what we are going through—that is, to pray—and to receive His answer. We must experience this. Our Lord promised to do whatever we ask for in His name. Faith is to boldly ask Jesus in His name and receive His answers.
Soon it will be Chuseok. Many of you will have family worship. I hope thatit will not be just a casual prayer orservice. I pray that you will all build dynamic families of faith that pray with faith to Our Lord and receive answers from Him. Our Lord speaks to us now: “Have faith in God. Therefore, I tell you,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believe that you have received it, and it will be yours.”
마가복음 11: 15 ~ 18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시며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칭하십니다. >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보셨습니다.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 희생제물로 사용될 비둘기를 파는 자들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쫓으시고, 그들의 상을 엎으시며, 그들의 의자를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곤 “내 집 곧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며 강하게 질타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우리도 성전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곤 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의 모습과 이 현상을 보며 분노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당시 성전에는 희생제물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대로라면,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또 당시 성전에서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화폐만을 사용했기에 로마 화폐나 다른 화폐들은 필히 환전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성전 안에 환전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질책하시며 내쫓으신 것입니다.
심지어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들을 다 성전에서 쫓아내셨다는 기록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인들이 제물을 판매하거나 화폐를 환전하는 일을 성전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판단하셨습니다. 나아가 성전이 성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성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흐름에서 살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성전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예수님에게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즉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언뜻 드는 생각은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므로 그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사는 또 다른 차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는 늘 제사가 드려집니다. 그러니 그 제사가 잘 드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말씀 그대로 당시 성전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하는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때를 따라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므로 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이러한 전통적인 성전의 모습만 생각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라는 질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하시며, 성전에 대한 불충분성을 늘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의 성전에 대해 예수님은 완전한 신뢰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늘 성전의 불완전성을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 성전 정화 사건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
그렇다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어떤 성전의 모습을 원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마가복음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다란 점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의 앞과 뒤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성전 정화 사건이 무화과나무 이야기와 이어지고 있을까? 그것도 왜 둘러싸여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생기는 지점입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마가복음 11장 12~14절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마가복음 11:12~14)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나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시던 길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멀리 서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를 보시고는 그 앞에 다가서셨습니다.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하고 보았는데,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화를 발하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다고 증언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매가 없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 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황당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사실 이 이야기 뒤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보다 이 사건이 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해석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매우 감정적이고, 성급하며, 생각이 짧은 분처럼 보입니다. 무화과의 철도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예민하며, 감정적인 분이라면, 어떻게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만히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렇게 감정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상황은 아주 특별한 상황이요, 예수님이 특별한 목적 아래 화를 내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곤 저주하시며 이제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분명 화가 나 계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십니다. 역시 그곳에서도 성전에서 사람들을 쫓아내십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계속 감정 상태가 불안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화를 내시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화를 내시는 모습이 마가복음 11장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성전 뜰에서 상을 둘러 엎고, 의자를 던져 버리는 예수님의 모습.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소리 지르면서 노를 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게다가 때도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않았다고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어떤 이들은 그 모습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예수님이 하실 법한 행동이라고는 상상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이렇게 화를 내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필 이 대목에서 이토록 화를 발하셨을까요? 무엇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이 예수님의 특별한 뜻이 의도된, 즉 그분의 특별한 의미가 담긴 행위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 두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관한 교훈을 더해 주십니다. >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적 열매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신 예수님의 상징 행위였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것도 성전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예수님이 바로 그 장면을 통해 무언가를 말씀하고자 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에게 열매가 없다.”라는 말씀을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큰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어지는 내용이 장사꾼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한 모습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의 모습을 보시며 장사꾼들, 환전하는 이들을 내쫓으시며 예수님은 또다시 노를 발하십니다. 그때도 역시 큰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흐름에서 본다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성전 정화 사건의 앞뒤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무화과나무를 보셨고, 그 나무의 열매 없음에 노를 발하며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후 성전으로 올라가시어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튿날 내려오시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 있는 것을 보십니다. 말라 죽어 있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0~24)
뒷이야기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다음날 아침 예수님 일행과 베드로가 마을을 지나가다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전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하신 저주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어쩌면 신기하다는 듯이 예수님께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 그리곤 뒤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
이 말씀의 의미를 맥락을 따라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그렇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4)
실로 엄청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어렴풋이 예수님이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지 앞뒤의 흐름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는 열매 없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요,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 주시려는 예수님의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와 관련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건의 끝이 기도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이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에서도, 무화과나무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막11:17)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이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성전 정화 사건을 둘러싸도록 배치된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구조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지금까지의 내용을 기초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저주대로 마른 것을 보시며, 이를 확인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매우 중요한 권면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새번역으로 해당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가복음 11:23~24, 새번역)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에 아주 평범하면서도 귀중한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믿음의 내용을 묻는다면, 우리는 신앙의 내용으로 사도신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언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대로 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산더러 ‘바다에 빠져라.’라고 말하고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때로 정교하고 보다 잘 정리된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신학도 필요하고, 신학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투박하지만 확실하고 단순한 믿음의 생각도 필요합니다. 언젠가 설교를 통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말씀도 나눌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때 저는 예수님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고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고쳐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믿음의 과정을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믿음과 성화와 같은 다양한 단계들을 이야기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한 가지는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 믿음의 정수요 신앙의 본질인 기도를 통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합시다. >
오늘 본문의 사건은 굉장히 치밀하게 의도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이미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이 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모습을 제자들로 하여금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모양만 있는 성전, 화려한 예전만 있는 성전, 변질된 성전의 모습입니다. 그곳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 열매를 예수님은 ‘기도’로 귀결시키십니다. 나아가 기도의 부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부재임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과연 성전에 기도가 없었겠습니까? 매일같이 기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요, 능력 없는 기도였습니다. 능력이 사라진 성전,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모양뿐인 제사, 힘없는 기도의 능력, 능력 없는 신앙, 능력 없는 예배자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죽은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제물이나 바치며 중얼거리는 정도의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힘입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신앙의 원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코 죽은 행위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족장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를 보면 그들은 항상 기도했고, 그래서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역동적이었고, 그들의 기도는 힘이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하듯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응답을 받아 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성전 시대가 되어 가면서 그들의 기도는 힘을 잃어 갔습니다. 성전에서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으로 기도 시간은 정해졌고, 기도 시간은 많아졌지만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능력 없는 성전을 책망하십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능력 없는 우리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2:19 중)
“이 성전을 헐라. 모양만 있는, 그저 제사만 드려지고 있는 성전, 그 성전을 헐어버려라. 능력 없는 기도만 이어지는 그런 성전을 헐어버리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바른 성전을 일으켜 세우겠다.” 능력 있는 성전, 기도가 통하는 성전, 하나님과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성전을 만들어 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한복음 14:13~14)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기도하여, 그 기도가 응답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응답을 다시 경험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또다시 기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구하고 받아 누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제 명절이 다가옵니다. 아마 신앙의 가정들은 예배를 드리겠지요. 그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한 가지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많은 가정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도를 조금 더 분명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란 어떤 가정입니까? 모든 식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가정이, 온 식구들이 나름대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가정을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기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가정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응답 받고, 응답 받은 것 때문에 감사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또다시 기도하고, 또다시 응답 받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온 가정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응답 받는 역동적인 신앙의 가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019년 9월 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무화과나무가 마른 이유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03장, 36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막11:15-18, 23-2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어떠한 성전의 모습을 원하신 것일까?
설교의 요약
마가복음에 따르면 성전정화 사건의 앞과 뒤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의 철도 아닌데, 그 나무에게 가서 열매를 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저주를 하시면서 화를 내셨고, 이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셔서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사람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화가 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 이스라엘에게 열매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사꾼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 역시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화가 나셨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결국 무화가나무의 저주는 열매 없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요, 동시에 제자들을 향하여서는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사건과 성전정화 사건 사이에는 한 가지 단어가 공유되고 있는데,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성전정화의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흥미로운 구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자신이 저주하신 대로 마른 것을 보시면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의 말씀 속에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하고 그것이 이루어 질 줄 믿는 것이다.”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려고 무화과나무를 선택하셨고, 그것을 저주하시고 말라 비틀어 져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셨을까? 모양만 있는 성전, 화려한 예전만 있는 성전, 변질된 성전의 모습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 = 기도>가 없으며, 그 기도의 부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부재임을 알려 주십니다. 물론 성전에 기도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성전에서의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요 능력이 없는 기도였습니다. 능력이 사라진 성전,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모양뿐인 제사, 힘이 없는 기도, 능력이 없는 신앙인들과 예배자들…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사건을 일으키며 세상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능력 없는 성전을 책망하셨고, 능력 없는 우리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일상적인 기도 혹은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가정으로 기도하고 기도가 응답되는 역동적인 신앙의 가정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오늘 나의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기도제목과 응답에 관한 내용들을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것이 이루어 질 줄로 믿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하나님께 기도하니 않았던 것들을 회개합니다. 믿음은 기도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참다운 주님의 자녀들,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