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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주님을 만나니 얼굴을 붉혔도다

요한복음 2: 1~11

박경수 목사

2023.07.16

<본문이 기록된 요한복음은 흔히 영적 복음서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들 소위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관점과 내용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공관복음서는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70년 전후에 기록되었지만, 요한복음은 훨씬 후대인 9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둘째로, 공관복음서가 주로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남쪽 예루살렘 지역에서의 사역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유월절을 한 번 지킨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유월절을 세 번 지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요한복음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주로 보여 준다면, 요한복음은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역사서인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교리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 믿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읽으면 좋은 책으로 요한복음을 추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과 행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요한복음을 “영적 복음서”라고 불렀습니다.

2세기 교회 지도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요한은 표면적인 사실들은 이미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제자들의 권고와 성령님의 신적인 감동을 받아서 하나의 영적인 복음서를 썼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여러 상징적인 단어로 표현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따라서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요한복음서는 더욱 ‘영적인 눈’으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할 깊이 있는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이 읽으면 가장 좋은 책이자 동시에 오래 믿은 사람이 읽으면 제일 좋은 책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이래저래 우리는 요한복음을 잘 읽어야 할 처지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입니다. 200여 년 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강의실에 종교학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시험 문제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기적의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였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답안지를 메우느라 여념이 없는데, 한 학생은 시험 시간 내내 멍하니 햇빛 비치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감독을 하던 교수가 학생에게 ‘왜 답안을 작성하지 않나?’ 말했습니다. 그 학생은 ‘저는 별로 쓸 말이 없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종료종이 울리기 직전 그 학생이 답안지에 한 줄의 문장을 휘갈겨 쓰고는 제출했습니다. 그의 답안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물이 그 창조주를 보고 얼굴을 붉혔도다.”(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론 그 청년은 만점을 받았습니다. 바로 영국 낭만파 시인 조지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의 일화입니다. 사실 이 문장은 바이런의 독창적 문구가 아닙니다. 17세기 영국 시인 리처드 크래쇼(Richard Crashaw, 1613-1649)의 라틴어 시를 영어로 적은 것일 뿐입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줍은 물이 주님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

 

<요한복음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베푸신 표적을 첫 번째로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요한복음의 본문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입니다. 요한은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하면 참 좋은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성극을 한다고 할 때 필요한 등장인물이 누구일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의 어머니(1절), 예수와 제자들(2절), 하인들(5절), 연회장(8절), 신랑(9절),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10절)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연은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조연을 꼽으라면 누가 되겠습니까? 대사가 있는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3절, 5절)와 연회장(10절)입니다. 연회장의 경우 대사가 한 번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역할은 못됩니다. 오히려 대사는 없지만 연회장보다 중요한 조연이 있다면 하인들일 것입니다. 하인들의 경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말을 듣고 예수의 말에 따라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떠서 갖다 주는 역할이 전체에 걸쳐서 있습니다. 신랑이나 제자들이나 손님들은 다분히 엑스트라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 성극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예수님, 마리아, 하인들입니다. 이들에 초점을 맞추어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나의 어느 혼인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일주일씩 계속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많이 준비한다고 해도 음식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잔치 중에 포도주가 동나는 것은 대단한 결례일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신랑 측이 소송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의 문제를 걱정한 것으로 보아서, 또 예수와 제자들도 잔치에 초청을 받은 것으로 보아서, 신랑이 마리아와 예수와 제자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자기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단지 자신의 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평생 유념하고 살았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아들이 아닙니까? 태몽에 천사와 성령의 지시를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마리아는 천사들이 목자들을 통해 전해 준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눅 2:19)라고 성경은 전해 주고 있습니다.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아이를 잃어버려 찾으려고 다시 성전까지 돌아갔을 때 그곳에서 교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던 아들이 했던 말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는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그 말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1)고 한 것처럼, 마리아는 분명치는 않지만 자신의 아들이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 앞으로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성극을 지도하는 연출자는 이 장면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표정과 대사에 마리아의 마음이 잘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문제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신앙은 오늘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 앞으로 우리의 문제와 짐을 가지고 나와 아뢰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약속은 주님이 지키실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저런 일로 마음에 힘든 짐을 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그 짐을 가져와 모두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기적을 체험하는 첫 걸음은 문제를 주님 앞에 가져와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온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듯 느껴집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 이 구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자여” 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정서상 영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글 번역상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 “귀나이”(γύναι)는 결코 불손하거나 저속한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귀부인을 부르는 존칭입니다. 어머니라는 주관적 단어 대신에 ‘귀나이’라는 객관적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예수께서 단지 마리아의 육신적 아들이기보다는 모든 인류의 구세주요 왕이심을 표현하는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19장 26절에서 마리아에게 이 단어를 한 번 더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을 향해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요한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혈연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함을 이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평생 모셨습니다. 지금도 요한이 목회했던 에베소에 가면 마리아가 머무른 집이라고 알려진 장소가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을 향해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고 말합니다. 절대 순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인들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어떻게 했습니까? 항아리마다 “아귀까지” 가득 채웠습니다(7절). 떠서 갖다 주라 하신즉 어떻게 했습니까? 주저했습니까?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라고 따지고 항의했습니까? 성경은 그들이 “갖다 주었더니”(8절)라고 말합니다. 그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순종이야말로 기적을 만드는 마지막 걸음입니다.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돌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 철옹성과 같았던 여리고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나병환자 나아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소경이었던 자의 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을 채우고 떠서 갖다 주라는 말씀에 하인들이 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음은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라도 순종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지식과 생각까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시기를 원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5절의 말씀은 제가 좋아하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새번역) 나의 판단과 이론과 지식과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적은 참으로 감출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마리아를 따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하인들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기쁨을 느꼈을까요? 신랑입니까, 연회장입니까, 손님들입니까, 제자들입니까? 저는 하인들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이 기적의 비밀을 알지 못했지만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철저히 순종했던 하인들은 억누를 수 없는 비밀스런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찬송가 442장(저 장미꽃 위에 이슬) 후렴부의 고백,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라는 고백처럼 주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감동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을 만난 이 체험은 저와 여러분을 신명나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러 표적 중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서에는 7가지의 표적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은 더 많이 있지만 요한이 7가지만을 요한복음에 기록한 것은 이 7가지 표적이 각각 깊은 의미를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은 “영적 복음서”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겉으로만 관찰하면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요한은 이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여러분은 이 본문을 통해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시겠습니까?

많은 로마가톨릭 신학자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마리아의 중재 역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봐라, 마리아가 부탁하니까 예수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예수님이 아들로서 어떻게 어머니 말을 거역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응답받는 빠른 방법인 것처럼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개신교 신학자들은 4절에서 보는 것처럼 마리아는 오히려 무안만 당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리아의 역할을 축소시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왔을 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3,35) 말씀하신 것을 들어서 마리아의 역할을 약화시킵니다.

저는 양쪽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중재 역할을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전혀 중요한 주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면박을 주었다는 것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 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고 곡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요 말씀에 대한 왜곡입니다. 혹시라도 오늘의 본문을 읽고서 “야! 은혜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마시라고 직접 만드셨군요. 이제야 마음 놓고 술을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제대로 본문을 읽은 것일까요?

그러면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 시대가 왔으니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의 시대가 가고 은혜의 시대가, 하나님의 나라가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물이 포도주로 ‘질적인 변화’를 한 것처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사람이 진실한 사람으로, 가시가 있던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으로, 상처를 주던 사람이 위로하는 사람으로, 맹물처럼 아무 맛도 없던 사람이 포도주처럼 맛있는 사람으로 변해야 할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직도 가시와 독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을 입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런 맛도 향기도 없이 무덤덤하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주님 안에서 오히려 위로와 평안을 주는 사람, 맛나고 향기 나는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가시 많고 모나고 맛없는 우리를 능히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 나는 극상품 포도주와 같은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되 풍성히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아귀까지 가득” 채워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맛 나는 포도주와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되 풍성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제 속에 오셔서 저를 주님이 원하시는 맛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되 풍성한 사람으로, 그리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맛과 향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당신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하는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자신의 문제를 기꺼이 들고 온 마리아처럼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무거운 짐과 마음을 가지고 나옵시다. 주님이 우리를 쉬게 하실 것입니다. 끝까지 절대 순종한 하인들처럼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합시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실 때 거칠고 맛없는 우리 성품을 부드럽고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풍성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질적인 변화의 기적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소망교회 안에서 날마다 경험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

 

John 2:1-11

 

In terms ofperspective and contents, the Gospel of John that we read today is different from the Synoptic Gospels, that is, Matthew, Mark, and Luke. First, while latter are known to have been written around AD 70 when Jerusalem was destroyed by the Roman army, the former appears to have been written much later aroundAD 90. Second, while the Synoptic Gospels mostly focus on Jesus’ ministry in Galilee in the north, the Gospel of John describes Jesus’ ministry in the south, that is, Jerusalem. Third, while the Synoptic Gospels record just one Passover observed by Jesus, the Gospel of Johnrecords a total of three observations. So based on John,the duration of Jesus’ public ministry is believed to be three years. Fourth, while the Synoptic Gospels mostly state Jesus’ life and teachings, John deals heavily with matters related to doctrine and theology. Therefore, John is at the same time a historical book and a book on the Christian doctrine. Accordingly, it is frequently recommended to new believers as the first biblical book to read. Lastly, while the Synoptic Gospels describe Jesus’ life, acts, and teachings matter-of-factly, John reveals their spiritual meaning. That is why from an early age John has been called “the Spiritual Gospel.” Clement of Alexandria, a church leader of the 2nd century, said, “But John, the last of all, seeing that what was corporeal was set forth in the Gospels, on the entreaty of his intimate friends, and inspired by the Spirit, composed a spiritual Gospel.”For example, we see that in John Jesus describes Himself using various symbolic words, including: “I am the bread of life” (6:35); “I am the light of the world”(8:12); “I am the gate for the sheep” (10:7); “I am the good shepherd” (10:11);“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11:25);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14:6); and “I am the true vine” (15:1). Therefore, although all books in the Bible must be read with a “spiritual eye,” this is all the more important when it comes to John. In this sense, John may be the last biblical book Christians must read. In this sense, John is the best book for beginners and longtime believers alike. In many regards, it is a book that must be read well.

 

An anecdote comes to mind when I read today’s passage. You may have heard of it. Two hundred years ago in Cambridge University, students were taking a test in religious studies. The question was to write about the spiritual meaning of Jesus’ miracle that turned water into wine. While all the other students were busy writing long essays, one student just sat in his seat staring out the window into the sunlight. When the proctor asked, “Why haven’t you written a single word?”, he answered, “I don’t have much to say.” But at the last minute he scribbled a single sentence: “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Of course that young man got a perfect score. He was none other than the young Lord Byron (George Gordon Byron, 1788-1824), the English Romantic poet. But this line is actually not an original one. It was an English translation of a 17th century Latin poem by Richard Crashaw (1613-1649). The original verse goes like this: “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 which means,“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

 

Today’s passage from John is about Jesus turning water into wine at a wedding feast in Cana. The author John writes that this was Jesus’ first miracle. I believe today’s text would make a great play. If we were to make a biblical play out of it, who would be the characters? They would include Jesus’ mother Mary (verse 1), Jesus and His disciples (verse 2), the servants (verse 5), the master of the banquet (verse 8), the bridegroom (verse 9), and the wedding guests (verse 10). The main actor would of course be Jesus. And who would be the important supporting actors and actresses? The one withlines would be Mary (verses 3 and 5) and the master of the banquet (verse 10). Although the latter has a line, he is not that important. Actually, it is the servants who play a critical supporting role, even though they do not say anything. Throughout the whole play they play quite a prominent role, as they listen to Mary’s words, listen to Jesus,and follow His orders by filling the jars with water and serving them. You could say the bridegroom, the disciples, and the guests are extras. Therefore the main characters of this play would be Jesus, Mary, and the servants. Let’s study today’s text focusing on them.

 

At a wedding feast in Cana the wine ran out. Since Jewish weddings typically lasted for a week, the food could run out even with a lot of preparations. However, if the wine ran out, this was a serious breach of etiquette for which the bridegroom could even get sued. From the fact that Mary was worried about the lack of wine and that Jesus and the disciples were invited to the wedding, the bridegroom appears to have been a close acquaintance of Mary, Jesus, and the disciples.

 

Although Jesus was her son, all her life Mary wasconscious of the fact that He was not just her son. Didn’t she conceive Him as a virgin? Didn’t an angel appear to her in a dream and reveal to her the command of the Spirit? The Bible records that when the shepherds told Mary what the angelshad said to them, she “treasured up all these things and pondered them in her heart.”(Luke 2:19)Also, when Mary found her twelve-year-old son debating with the teachers of the law in the temple in Jerusalem after losing him, she took to heart what he said to her: “Why were you searching for me? 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 Although everyone else did not understand what this meant and didn’t give itmuch thought, Mary had a vague idea that her son may be the Messiah—“But his mother treasu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Luke 2:49) So when the wine ran out at the wedding in Cana, she brought the problem to Him. The director of this play would have to pay extra attention to this scene where Mary approaches Jesus so as to reveal her heart through her expression and words.

 

Believing in Jesus is about taking our problems to Him—just as Mary did. This is faith.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Matthew 11:28) Faith is to take our problems and burdens to our Lord who invites us—we who are weary and burdened—to come to Him. This is what we should do. Then our Lord will keep His promise of giving us rest. Are there those among you who are burdened by various matters in life? I hope that you will be able to bring those burdens to the Lord and lay them before Him. And remember His promise: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The first step to experiencing a miracle is to bring your problems to Christ and to tell Him about it.

 

But when Mary brought her problem to Jesus and told Him about the wine, His response was not so kind, or so it seems: “Woman, why do you involve me? My hour has not yet come.” (verse 4) This verse is one of those hard-to-interpret verses in the Bible. Koreans, in particular, would feel uncomfortable about Jesus calling His mother “woman.” But we must bear in mind that our discomfort comes merely from a translation issue. The original Greek word for woman, “gynai (γύναι),” is hardly a disrespectful or lowly appellation but rather a respectful name for calling a noble woman. Furthermore, by calling His mother gynai instead of mother, a rather subjective appellation, perhaps Jesus wanted to convey that He was not just Mary’s biological son but the Savior and King of mankind. In John19:2, we see the use of thisappellationagain. Before Jesus dies on the Cross, He says to Mary, “Woman, here is your son.” Then to John He says, “Here is your mother.” Jesus is saying that now Mary is John’s mother. This means that a spiritual relationship is more important than a biological one forged by blood. John actually cared for Mary like his own mother until he died. Even today in Ephesus, where John is known to have ministered, there is a place known as the “House of the Virgin Mary.

 

But regardless of Jesus’ response to her, Mary tells the servants, “Do whatever he tells you.”In other words, she is telling them to show absolute obedience to Jesus—to do “whatever” he tells them to do. And look at the servants who appear in this scene. What do they do when Jesus tells them to fill the jars with water? They fill them “to the brim.” (verse 7) And how do they respond when He tells them to draw some out and take it to guests? Do they hesitate? Do they protest, saying it’s crazy? The Bible says, “They did so.” (verse 8) They did as Jesus told them to. Obedience is the final step that leads to a miracle.

 

What happened to the impenetrable city of Jericho when the Israelites obeyed God’s word to circle it seven times? What happened to Naaman, a leper, when he obeyed the word to dip himself in the Jordan River seven times? What happened to the blind man when he obeyed the word to wash his eyes in the Pool of Siloam? What happened when the servants obeyed Jesus’ word to fill the jars with water, draw from it, and take it to the guests? Faith is the power that even obeys things our commonsense cannot accept. I pray that our common sense, our knowledge, and even our thoughts will be made obedient to the word of God.

 

Corinthians 10:4-5 is one of my favorite verses in the Bible:“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We must not allow our judgement, theories, knowledge, or thoughts tocome before the word of God. When we do this, we will experience miracles. Those miracles will give us an unconcealable joy. Among all the characters in today’s story, who would have felt the greatest joy? The bridegroom?The master of the banquet?The guests?Or the disciples? Ithink it would have been the servants. When all the others had no clue about the secret of Jesus’ miracle, the servants knew: “The master of the banquet tasted the water that had been turned into wine. He did not realize where it had come from, though the servants who had drawn the water knew.” (verse 9) The servants who completely obeyed Jesus experienced a bursting, secret joy. Like the lyrics of the hymn “I Come to the Garden Alone,”“And the joy we share as we tarry there, None other has ever known,” the servants experienced a secret joy shared between just them and the Lord. Dear Church, do you have a secret joy that only you and Jesus share? Do you have a deep passion that surges from the bottom of your heart? Our experience of encountering Jesus will fill you and me with an overwhelming joy.

 

Today’s text introduces one of the many signs described in the Gospel of John. In John seven miracles appear. Although the Lord performed more than seven miracles, John records just seven of them because each of the seven has a profound significance. As I mentioned, the Gospel of John is known as the “Spiritual Gospel.” Therefore, if we just read today’s text from the surface, we will not be able to fully understand its meaning. Why did John record this story? What meaning do you find in this passage?

 

Many Roman Catholic theologians argue on the role of Mary as a mediator. They say that even Jesus had no choice but to listen to Mary when she asked Him a favor, insisting it is impossible for Jesus to disobey His mother. Accordingly, they talk as if praying to Mary is the quick way to get answers to our prayers. In response to this, Protestant theologians diminish her role, stressing the fact that in verse 4 Mary was only embarrassed by Jesus. They also try to weaken the role of Mary by citing the verse where Jesus says to His mother and brother who have come to Him, “Who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Whoever does God’s will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Mark 3:33,35)I think both views are wrong. It is because whether Mary plays the role of a mediator is not at all important in today’s passage. Also, the interpretation that Jesus put Mary down is wrong. All these theologians are doing is to use and twist the text to their own liking to prop up their stance, which is wrong and a distortion of the Word. If someone reads today’s text and says, “Oh! I received so much grace. Jesus made wine Himself for us to drink. Now I can drink without worrying,” would you say that person read it properly?

 

Then what is the message of the passage? It is a command to “become a new person, for a new age has come.” Now that Jesus Christ has come, the age of the Law is gone and the age of grace, the kingdom of God has come. Therefore, we too must put off our old self and put on a new self, just as the water in Cana underwent a “qualitative change.” We must be born again. Deceitful men must become honest; intractable men gentle; proud men humble; hurtful men must now give comfort; men who were bland like water must become tasteful like wine. Then what are we like? Are we only hurting others with our thorns and poison? Are we bland, scentless, and tasteless? From now on I hope that we will become men and womenwho give peace and comfort to others, people of God who taste and smell wonderful. We must believe that our Lord is able to turn us who are thorny, difficult, and unsavory into the finest “wines” that are smooth and savory.

 

Another point to be thankful for is that Jesus turns an abundant amount of water into wine. Today’s passage states that the jars were filled “to the brim” and Jesus changed them. John 10:10 says,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Likewise, Jesus not only saves us but gives us an abundant life. I truly hope that you and I will experience the Lord’s grace that not only changes us into savory “wines” but fills our lives with abundance. Let this be our prayer: “Lord, here I am. Come inside me and change me into the person that You want me to be, that savory person You want me to be; but also bless me with abundance so that I will be able to share my scent and flavor with all those around me.”

 

Let us go to Jesus and lay our heavy hearts and burdens before Him whenever we are in difficulty and trials—just as Mary gladly came to Jesus with her problem. Our Lord will give us rest. Let us trust and obey our Lord—like the servants who obeyed Him completely to the end. He will give us an inexpressible joy. When we serve Jesus, He will change our unsavory and rough character into a gentle and savory one like the finest wine—and He will do this abundantly. I bless you in the name of our Lord that you and I and Somang Church will daily experience this miracle of qualitative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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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 1~11

1~11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본문이 기록된 요한복음은 흔히 영적 복음서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들 소위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관점과 내용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공관복음서는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70년 전후에 기록되었지만, 요한복음은 훨씬 후대인 9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둘째로, 공관복음서가 주로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남쪽 예루살렘 지역에서의 사역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유월절을 한 번 지킨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유월절을 세 번 지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요한복음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주로 보여 준다면, 요한복음은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역사서인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교리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 믿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읽으면 좋은 책으로 요한복음을 추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과 행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요한복음을 “영적 복음서”라고 불렀습니다.

2세기 교회 지도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요한은 표면적인 사실들은 이미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제자들의 권고와 성령님의 신적인 감동을 받아서 하나의 영적인 복음서를 썼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여러 상징적인 단어로 표현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따라서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요한복음서는 더욱 ‘영적인 눈’으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할 깊이 있는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이 읽으면 가장 좋은 책이자 동시에 오래 믿은 사람이 읽으면 제일 좋은 책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이래저래 우리는 요한복음을 잘 읽어야 할 처지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입니다. 200여 년 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강의실에 종교학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시험 문제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기적의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였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답안지를 메우느라 여념이 없는데, 한 학생은 시험 시간 내내 멍하니 햇빛 비치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감독을 하던 교수가 학생에게 ‘왜 답안을 작성하지 않나?’ 말했습니다. 그 학생은 ‘저는 별로 쓸 말이 없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종료종이 울리기 직전 그 학생이 답안지에 한 줄의 문장을 휘갈겨 쓰고는 제출했습니다. 그의 답안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물이 그 창조주를 보고 얼굴을 붉혔도다.”(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론 그 청년은 만점을 받았습니다. 바로 영국 낭만파 시인 조지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의 일화입니다. 사실 이 문장은 바이런의 독창적 문구가 아닙니다. 17세기 영국 시인 리처드 크래쇼(Richard Crashaw, 1613-1649)의 라틴어 시를 영어로 적은 것일 뿐입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줍은 물이 주님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

 

<요한복음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베푸신 표적을 첫 번째로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요한복음의 본문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입니다. 요한은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하면 참 좋은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성극을 한다고 할 때 필요한 등장인물이 누구일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의 어머니(1절), 예수와 제자들(2절), 하인들(5절), 연회장(8절), 신랑(9절),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10절)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연은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조연을 꼽으라면 누가 되겠습니까? 대사가 있는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3절, 5절)와 연회장(10절)입니다. 연회장의 경우 대사가 한 번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역할은 못됩니다. 오히려 대사는 없지만 연회장보다 중요한 조연이 있다면 하인들일 것입니다. 하인들의 경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말을 듣고 예수의 말에 따라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떠서 갖다 주는 역할이 전체에 걸쳐서 있습니다. 신랑이나 제자들이나 손님들은 다분히 엑스트라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 성극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예수님, 마리아, 하인들입니다. 이들에 초점을 맞추어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나의 어느 혼인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일주일씩 계속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많이 준비한다고 해도 음식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잔치 중에 포도주가 동나는 것은 대단한 결례일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신랑 측이 소송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의 문제를 걱정한 것으로 보아서, 또 예수와 제자들도 잔치에 초청을 받은 것으로 보아서, 신랑이 마리아와 예수와 제자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자기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단지 자신의 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평생 유념하고 살았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아들이 아닙니까? 태몽에 천사와 성령의 지시를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마리아는 천사들이 목자들을 통해 전해 준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눅 2:19)라고 성경은 전해 주고 있습니다.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아이를 잃어버려 찾으려고 다시 성전까지 돌아갔을 때 그곳에서 교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던 아들이 했던 말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는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그 말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1)고 한 것처럼, 마리아는 분명치는 않지만 자신의 아들이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 앞으로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성극을 지도하는 연출자는 이 장면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표정과 대사에 마리아의 마음이 잘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문제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신앙은 오늘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 앞으로 우리의 문제와 짐을 가지고 나와 아뢰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약속은 주님이 지키실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저런 일로 마음에 힘든 짐을 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그 짐을 가져와 모두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기적을 체험하는 첫 걸음은 문제를 주님 앞에 가져와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온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듯 느껴집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 이 구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자여” 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정서상 영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글 번역상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 “귀나이”(γύναι)는 결코 불손하거나 저속한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귀부인을 부르는 존칭입니다. 어머니라는 주관적 단어 대신에 ‘귀나이’라는 객관적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예수께서 단지 마리아의 육신적 아들이기보다는 모든 인류의 구세주요 왕이심을 표현하는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19장 26절에서 마리아에게 이 단어를 한 번 더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을 향해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요한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혈연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함을 이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평생 모셨습니다. 지금도 요한이 목회했던 에베소에 가면 마리아가 머무른 집이라고 알려진 장소가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을 향해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고 말합니다. 절대 순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인들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어떻게 했습니까? 항아리마다 “아귀까지” 가득 채웠습니다(7절). 떠서 갖다 주라 하신즉 어떻게 했습니까? 주저했습니까?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라고 따지고 항의했습니까? 성경은 그들이 “갖다 주었더니”(8절)라고 말합니다. 그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순종이야말로 기적을 만드는 마지막 걸음입니다.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돌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 철옹성과 같았던 여리고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나병환자 나아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소경이었던 자의 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을 채우고 떠서 갖다 주라는 말씀에 하인들이 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음은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라도 순종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지식과 생각까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시기를 원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5절의 말씀은 제가 좋아하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새번역) 나의 판단과 이론과 지식과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적은 참으로 감출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마리아를 따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하인들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기쁨을 느꼈을까요? 신랑입니까, 연회장입니까, 손님들입니까, 제자들입니까? 저는 하인들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이 기적의 비밀을 알지 못했지만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철저히 순종했던 하인들은 억누를 수 없는 비밀스런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찬송가 442장(저 장미꽃 위에 이슬) 후렴부의 고백,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라는 고백처럼 주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감동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을 만난 이 체험은 저와 여러분을 신명나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러 표적 중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서에는 7가지의 표적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은 더 많이 있지만 요한이 7가지만을 요한복음에 기록한 것은 이 7가지 표적이 각각 깊은 의미를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은 “영적 복음서”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겉으로만 관찰하면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요한은 이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여러분은 이 본문을 통해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시겠습니까?

많은 로마가톨릭 신학자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마리아의 중재 역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봐라, 마리아가 부탁하니까 예수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예수님이 아들로서 어떻게 어머니 말을 거역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응답받는 빠른 방법인 것처럼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개신교 신학자들은 4절에서 보는 것처럼 마리아는 오히려 무안만 당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리아의 역할을 축소시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왔을 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3,35) 말씀하신 것을 들어서 마리아의 역할을 약화시킵니다.

저는 양쪽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중재 역할을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전혀 중요한 주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면박을 주었다는 것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 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고 곡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요 말씀에 대한 왜곡입니다. 혹시라도 오늘의 본문을 읽고서 “야! 은혜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마시라고 직접 만드셨군요. 이제야 마음 놓고 술을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제대로 본문을 읽은 것일까요?

그러면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 시대가 왔으니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의 시대가 가고 은혜의 시대가, 하나님의 나라가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물이 포도주로 ‘질적인 변화’를 한 것처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사람이 진실한 사람으로, 가시가 있던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으로, 상처를 주던 사람이 위로하는 사람으로, 맹물처럼 아무 맛도 없던 사람이 포도주처럼 맛있는 사람으로 변해야 할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직도 가시와 독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을 입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런 맛도 향기도 없이 무덤덤하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주님 안에서 오히려 위로와 평안을 주는 사람, 맛나고 향기 나는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가시 많고 모나고 맛없는 우리를 능히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 나는 극상품 포도주와 같은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되 풍성히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아귀까지 가득” 채워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맛 나는 포도주와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되 풍성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제 속에 오셔서 저를 주님이 원하시는 맛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되 풍성한 사람으로, 그리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맛과 향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당신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하는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자신의 문제를 기꺼이 들고 온 마리아처럼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무거운 짐과 마음을 가지고 나옵시다. 주님이 우리를 쉬게 하실 것입니다. 끝까지 절대 순종한 하인들처럼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합시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실 때 거칠고 맛없는 우리 성품을 부드럽고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풍성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질적인 변화의 기적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소망교회 안에서 날마다 경험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3716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물이 주님을 만나니 얼굴을 붉혔도다 (2:1-11)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44장, 44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요 2:1-11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7월 1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200년 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종교학 시험으로 이런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기적의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 다른 학생들은 답을 쓰느라 여념이 없는데 한 학생은 시험 내내 가만히 있다가, 종료 직전에 단 한줄의 문장을 써서 제출했습니다. 그가 쓴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물이 그 창조주를 보고 얼굴을 붉혔도다.”(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이 문장을 쓴 학생은 바로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바이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약 100년 전에 영국의 시인 리처드 크래쇼도 비슷한 내용의 라틴어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수줍은 물이 주님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buit)

 

설교의 요약

가나의 어느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잔치 중에 포도주가 동나는 것은 대단한 결례였고, 자칫하면 신랑 측이 소송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자신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단지 평범한 아들이 나이었음을 평생 유념하고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성령에 의해 예수를 잉태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고,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이 문제를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부르시는 주님 앞으로 우리의 문제와 짐을 가지고 나와 아뢰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마친 후, 하인들을 향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말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절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각 항아리마다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떠서 잔치에 갖다주라는 명령을 듣고, 말씀 그대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순종이야말로 기적을 만드는 마지막 걸음입니다.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돌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철옹성 같았던 여리고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음은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라도 순종하는 힘입니다.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새 시대가 왔으니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의 시대가 가고 은혜의 시대,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 그러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질적인 변화를 한 것처럼, 우리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거짓된 사람이 진실한 사람으로, 가시가 있던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으로, 맹물처럼 아무 맛도 없던 사람이 포도주처럼 맛있는 사람으로 변해야 할 것을 말해줍니다.

 

나누기

  1. 내가 주님께 가지고 나갈 문제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2. 나의 생각과 지식, 상식을 넘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에는 무엇이 있나요?

 

마무리 기도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제 속에 오셔서 저를 주님이 원하시는 맛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되 풍성한 사람으로, 그리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맛과 향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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