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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는 기도하라

사사기 6: 6 ~ 10

김경진 목사

2020.02.23

<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까? >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이 시간 주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이 예배당에서, 또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코로나19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각 처소에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시기가 얼른 지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온 성도가 함께 예배의 자리에서 예배드릴 날이 속히 오길 바랍니다.
이 시기에 많은 성도가 ‘더 기도해야 할 때구나.’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를 드리십니까? 선뜻 기도하려 하면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기도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수도사가 스승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사부님, 제가 최선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나름 금식도 했고,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나쁜 생각이 나지 않게 노력했고, 정결하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제 기도에서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무엇을 더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네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리지만 않았더라도, 정말 좋은 기도가 되었을 텐데…. 내가 알아버렸으니 너는 남이 모르게 기도하라는,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기도의 복을 어기고 말았구나.”
기도할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도 참 많습니다. 이 또한 잘못된 기도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잘못된 기도입니다. 했던 기도를 또 하고 또 하는 것,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믿음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금식한 티를 내며 하는 기도도 잘못된 기도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도 위선적인 기도, 잘못된 기도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이미 상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거나, 그래서 중단하게 되는 기도도 잘못된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 대로 기도할 때 끊임없이 기도하며,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의 안위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잘못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기도란 어떤 기도입니까?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임을 말씀을 통해 배워 왔습니다. 또 마태복음 21장을 통해 기도한 다음 확신하지 못한다면 잘못된 기도라고도 배워 왔습니다. 기도한 자는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함을 늘 마음에 새겨 오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기도가 잘못된 기도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성경 여러 곳에서 어떤 기도가 잘못된 기도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기도를 잘해야 할 텐데….’라는 마음과 더불어, 또 한편으로는 기도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기도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명확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마6:9 이하).”라고 이어지는 그 기도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우리 마음에는 늘 잘못된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또 올바른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떠오르곤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기도에 큰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기도에 대한 평을 잘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도를 잘하는지를 묻는다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기적으로,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또는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종종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게 많냐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 아니냐고, 그러니 하나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한 번 기도했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나오는 분들을 향해서는 그렇게 꼭 정성을 기울여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이냐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을 향해서는 간절히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하지 않냐고, 울부짖는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냐고 비평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방에서 기도해야 하지 않냐고 말합니다. 매일매일 기도하면, 공로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기도하면, 외식주의라고 비판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면, 간절함이 없는 기도라고 비판합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면, 감정에 도취되었다고 비판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더듬더듬 기도했는데, 중언부언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참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드리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바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기도하려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내가 과연 제대로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잘 기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의외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

그럼 이제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관심을 바꿔 보는 것입니다. 유창한 기도가 효력이 있을까요? 막힘 없는 기도가 효과가 있습니까? 신학적으로 완벽하고 흠 없는 기도가 언제나 응답을 받습니까?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기도가 언제나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도에 대해 매우 다른 두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드릴 수 있는가? 어떤 기도가 좋은 기도인가? 어떤 기도가 잘못된 기도인가?’를 가르쳐 주는 본문이 많습니다. 그러한 본문들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마치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 같이 안내하는 본문이 많이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에는 또 다른 본문이 등장합니다. ‘잘못 드린 기도 같은데, 이런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구나.’ 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런 기도가 잘못된 기도다.’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놀랍게도 잘못된 기도를 드린 사람에게도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사사기 9장을 보면, 요담의 저주가 나옵니다. 이 저주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선언입니다. 요담은 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저주의 말을 퍼부었습니다. 아버지와 가족들을 죽인 원수들을 향한 복수심과 분노에 차서 세겜 사람들의 멸망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요담의 저주가 실제로 임합니다. 전혀 평온하거나 온전하거나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퍼부어진 저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응답이 이루어졌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모르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장사 삼손입니다. 하나님께서 힘과 권능을 주셨는데, 그만 여자에게 마음이 팔려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이 멀고, 쇠사슬에 묶인 채로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삼손은 복수심에 차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 기도가 이렇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삼손의 기도는 하나였습니다.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잘못했다는 회개의 기도도 아닙니다. 그저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 왕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이 탐난 아합 왕이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라고 말합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포도원이기에, 나봇은 팔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내세웁니다.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했다.”라는 증언을 하게 하고는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나봇을 죽입니다. 그리곤 포도원을 차지합니다. 참으로 악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아합 왕에게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그에게 임할 저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합 왕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시늉을 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너희가 아합 왕이 겸손해진 것을 보았느냐? 그에게 내리려고 한 벌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리지 않겠다.”라고 결정하십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는데, 사실 아합 왕은 그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시늉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사건입니다.
이처럼 종종 성경에서는 잘못된 기도, 불손한 기도, 돼먹지 못한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 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도 일하십니다. >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기도’와 ‘응답’이란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사사기 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7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미디안 사람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애원합니다. 어떤 기도였겠습니까? 그들의 손에서 해방해 달라는 간구였을 것입니다. 6~7절이 그 내용을 전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사사기 6:6~7)

‘부르짖었다’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아마 회개의 기도를 했을지도 모르고, 살려 달라는 애원의 기도를 드렸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말씀해 주셨는데, “응답하겠다.”라는 말씀도 아니고, “구원하겠다.”라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만 하십니다. 그 내용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사사기 6:8~10)

이스라엘 민족이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하신 말씀은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도 없고, 약속의 말씀도 없습니다. 그저 책망의 말씀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나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라는 강한 질책의 말씀뿐입니다. 이 기도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구절이 바로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사사기 6: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선지자를 보내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책망하시는 장면이 묘사되는 중에 또 다른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보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누가 있습니까? 기드온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기드온이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타작 마당에서 추수하고 있지만, 이제 곧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출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구원을 요청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 “너희를 구원하여 주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책망의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토록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중에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웅장한 하나님의 계획과 놀라운 섭리를 발견합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아무런 응답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기도의 자리에서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의 소리만 들었더라도,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하였더라도, 기도는 여전히 희망을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게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무언가를 고백할 때, 부모님께서 “내가 너에게 그토록 이야기하지 않았니? 내가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니?”라고 책망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에는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자녀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렇게 활동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은 부모의 심정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

이제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성경 여러 곳에서 알려 주셨습니다. 또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잘 드려진 기도뿐만 아니라 제대로 드려진 기도가 아닐지라도 응답해 주신 하나님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한번 가정해 봅시다. 어떤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 집에 아들 둘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엄한 분입니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절을 가르칩니다. “너희가 무엇을 요청할 때는 먼저 잘 생각해야 한다. 분에 넘치지 않아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야 하고, 예의 있고 바르게 요청해야 한다. 부모인 내게도 요청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아이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부모님께 요청하려고 할 때 늘 깊이 생각합니다. 이것이 과연 정말 필요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고, 또 이 요청을 전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느 때 전하면 좋을지, 어떤 방식으로 전하면 부모님의 마음에 드실지 생각하면서 요청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다릅니다. 아빠, 엄마의 이야기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냥 떼를 씁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달라고 합니다. 무조건 사달라고 합니다. 내놓으라고 합니다. 마치 무슨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두 아이의 부모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첫째에 대해서는 마음이 놓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칭찬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달라는 것 모두 다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둘째는 어떻습니까? 막무가내인 아이를 보면서 교육을 위해 어쩌면 안 줄 수도 있겠지만, 아마 모든 것을 안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그 아이에게도 무언가를 주려고 할 것입니다.
핵심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넘치는 사랑,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요구하면 결코 주지 않을 것도 자식이기 때문에, 예의를 차리지 않는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살지 않는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따금 저는 비록 짧은 인생 그리고 목회의 길을 걸어왔지만, 정말 인격적으로 부족하고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누린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부적절한 인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욕심껏 기도했고, 욕심껏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는 의문이 생길 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참 부당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다.’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누군가는 기도하기에 인격이 모자랍니다. 우리가 보기에, 누군가의 기도는 도저히 응답받을 수 없을, 응답받아서는 안 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기도할 때, 또 ‘기도에 응답받는다’, ‘응답받지 못한다’라고 할 때, 종종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교육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아, 맞는 기도를 드렸나 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기도를 드렸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면, ‘아,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가르쳐 주시려나 보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교육하시려나 보다. 무엇이 교훈일까?’라고 정리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잘못될까 봐, 잘못된 길로 갈까 봐,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막으시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기도가 응답되고, 사랑 때문에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걱정에 싸여 있습니다. 손도 씻고, 마스크도 쓰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과 달리, 우리는 한 가지 더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바로 ‘기도’입니다. 혹시 ‘내가 기도하기에는 어려.’, ‘기도하기에는 잘못된 삶이 너무 많아. 그래서 아직은 기도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어려운 이 시기에 나라와 국민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가 우리의 능력입니다. 기도를 통해 이 나라를 섬기고, 이 백성을 섬기며, 우리 자신을 귀하게 보듬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Believers, Pray!

Judges6: 6-10

How do you pray? You shouldn’t babble since our Almighty God already knows what we need. You shouldn’t let others know that you are fasting. Jesus teaches that you shouldn’t pray like hypocrites who like to stand in a street corner and pray loudly. You should not give up praying out of despair, either. Jesus tells us in Matthew chapter 7 that we should knock and ask persistently. You shouldn’t worry about what to eat or what to wear when you pray because He already knows what we need. Therefore, we must seek His kingdom and righteousness first. This is the right prayer. We should not lack faith when we pray either, because in Matthew 21:22 it says that “if you believe, you will have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Therefore, praying the right way is critical. The Bible teaches us in many places what the right prayer is and what is not. Jesus even gavean exemplary model when the disciples asked Him to teach them how to pray: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e Lord’s Prayer teaches us how to pray the right prayer.

Thus, it seems prayingthe right way is extremely difficult. Sometimes we are afraid to pray because we don’t want to make the mistake of praying incorrectly.

John Wesley, the famous English theologian of the 18th century, was also concerned about the matter of praying the right way.When he was a student, he mentioned to his friends how hard it was to pray as God wanted for 30 minutes. To this, one of his friends replied, “Nonsense! We should be able to do it for at least 30 minutes.” Wesley then said, “My friend, if you can really do so—pray sincerely as God wants you to—for 30 minutes, I will give you my horse.” The bet started, and the friend started to pray. Minutes passed… 5… 10… 25. It was almost 30 minutes. But what would Wesley’s friend say at the 29th minute? “John, if I win this bet, can I have your bridle, too?” His mind was full of winning the bet all along! How hard it is to pray sincerely!

The more we pray and the more we learn about prayer, the harder it is to pray. If we pray daily by coming to early morning prayer services, we are criticized for seeking meritocracy. If we pray regularly, we are called hypocrites. If we pray quietly, we seem to lack passion and wholeheartedness. If we pray too hard or too loudly, we are seen as babbling. Praying is very difficult. Praying the right way is especially more so.

Because of our many thoughts and ideasabout prayer, praying becomes even more difficult. We sometimes put it off because we want to wait until we can pray the perfect prayer. We tend to be critical of other people’s prayers, while not praying ourselves.

Strangely, however, we find in the Bible that God even answers seemingly “wrong” prayers.Jotham’s prayer in Judges chapter 9 is one example. Jotham prays for the destruction of the citizens of Shechem out of anger and spite. Surprisingly, however, this curse is fulfilled. King Ahab’s prayer in 1 Kings chapter 21 is another example. Ahab is reprimanded by Elijah when he lets his wife, Jezebel, kill Naboth and obtains Naboth’s vineyard. At Elijah’s rebuke and curse, Ahab repents halfheartedly. But God delays punishment and says, “Have you noticed how Ahab has humbled himself before me? Because he has humbled himself, I will not bring this disaster in his day.”

This story makes us wonder:‘How could God accept Ahab’s false repentance? Does He really see the center of our hearts?’Yet, we can spot many such cases—in the Bible and in our lives, too. We see that insincere,improper prayers of ungodly men are answered. Why does the Bible go through lengths about the “dos and don’ts”of praying andintroduce stories of wrong prayers being answered at the same time?

Today’s passage from Judges chapter 6 is another such example. The Israelites did evil before God’s eyes. So, God handed them over to the Midianites for 7 years. But,in their suffering, the Israelites cried out to the Lord: “Midian so impoverished the Israelites that they cried out to the Lordfor help.When the Israelites cried out to the Lordbecause of Midian […].” (Judges 6:6-7)

When the Israelites cried out, God spoke. However, His words were not those of deliverance, but of rebuke: “He sent them a prophet, who said,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I brought you up out of Egypt, out of the land of slavery. I rescued you from the hand of the Egyptians. And I delivered you from the hand of all your oppressors; I drove them out before you and gave you their land. I said to you, ‘I am the Lordyour God; do not worship the gods of the Amorites, in whose land you live.’ But you have not listened to me.’” (Judges 6:8-10)

It appearstherefore their cries went unanswered. God rebuked the Israelites, without giving them any promises of deliverance. This seemed to be the end of their prayers.

Then, the story changes. Verse 11 says, “The angel of the Lordcame and sat down under the oak in Ophrah that belonged to Joash the Abiezrite, where his son Gideon was threshing wheat in a winepress to keep it from the Midianites.” (Judges 6:11)

I just love this verse. At first sight, it seems the pleas of the Israelites went unheard. God seems only to rebuke them. It seems their prayers had attained to nothing. But, what does God do? He sends an angel to sit on an oak in Ophrah, where Gideon is secretly threshing wheat in a winepress to avoid the Midianites. And this signaled the very beginning of God’s salvation work. By choosing Gideon, He started His work of delivering the Israelites. This was the very result of their cries, their prayers.

Idiscover an amazing, grand plan of God hiding in this scene. Even when it seems our prayers have gone unanswered, when we hear only words of rebuke from our Lord, when there is no promise, prayer gives birth to hope. It is because God has quietly started His work by sending His angel. Through prayer, God has started to intervene out there somewhere.

Then let’s go back to our initial question. Praying is hard. Praying correctly even harder. Yet, we see in the Bible many cases of improper, wrong prayers of ungodly men being answered. How can we reconcile this contradiction?

Let’s say we have two children. One is extremely well-behaved, while the other is completely out of hand. As a firm but loving parent, we teach them both to be polite and proper when they ask mommy and daddy for something. The first child listens well. He always tries so hard to be good, always asking nicely.But,the second child is different. He never listens to mommy or daddy, constantly putting on a tantrum.

As a parent, what would you do? You would have nothing to worry about for the first child. You are willing to praise him and answer all his requests. But what about the other child? You would be frustrated by his behavior, but would you deny all his requests? No. Out of your extravagant love for him, you would answer his pleas—at least some of them. So, the problem is love—the overflowing, extravagant love of the parent. Because you are his mom, his dad, you are willing to give your all, even if he behaves badly. It is because you love him.

In my short life, I have seen ill-behaving men with notorious reputations receive God’s blessings. And, in many of such cases, I found that even suchnotorious men with bad reputations were men of prayer. Although it seemed clear their prayers stemmed from desire, God was answering their prayers and blessing them, which puzzled me. But, in all this, I could feel the greatness and extravagance of God’s love.

To us, a person may seem ill-fitted for devout prayer. To us, he may be praying the wrong prayer. Yet, God is listening to him. He listens even to the prayers of the vile and ill-reputed.

Dear Church, why does He listen to these vile people? If He answers their prayers, would He not answer ours? If He answers the prayers of the greedy, would He not answer ours? If He accepts even insincere repentance, would He not accept our repentance? If He listens to prayers said out of spite and ignorance, would He not listen to our sincere prayers?

What does it matter if we pray incorrectly? If we are weak and lacking? If our prayers are not good enough?The soledetermining factor in whether our prayers are answered or notis God’s unlimited, extravagant love for us—notour ability to meet moral standards or form of prayer.

An outbreak of the COVID-19 has made the whole country deeply anxious. Personal hygiene, washing hands, and wearing masks areimportant. However, there is one thing believers can and must do: Pray. Believers pray. That is what we do. In this time of national crisis, let’s pray. In this difficult time, let’s pray for the Korean people. Prayer is our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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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6: 6 ~ 10

6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까? >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이 시간 주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이 예배당에서, 또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코로나19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각 처소에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시기가 얼른 지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온 성도가 함께 예배의 자리에서 예배드릴 날이 속히 오길 바랍니다.
이 시기에 많은 성도가 ‘더 기도해야 할 때구나.’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를 드리십니까? 선뜻 기도하려 하면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기도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수도사가 스승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사부님, 제가 최선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나름 금식도 했고,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나쁜 생각이 나지 않게 노력했고, 정결하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제 기도에서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무엇을 더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네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리지만 않았더라도, 정말 좋은 기도가 되었을 텐데…. 내가 알아버렸으니 너는 남이 모르게 기도하라는,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기도의 복을 어기고 말았구나.”
기도할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도 참 많습니다. 이 또한 잘못된 기도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잘못된 기도입니다. 했던 기도를 또 하고 또 하는 것,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믿음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금식한 티를 내며 하는 기도도 잘못된 기도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도 위선적인 기도, 잘못된 기도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이미 상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거나, 그래서 중단하게 되는 기도도 잘못된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 대로 기도할 때 끊임없이 기도하며,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의 안위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잘못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기도란 어떤 기도입니까?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임을 말씀을 통해 배워 왔습니다. 또 마태복음 21장을 통해 기도한 다음 확신하지 못한다면 잘못된 기도라고도 배워 왔습니다. 기도한 자는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함을 늘 마음에 새겨 오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기도가 잘못된 기도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성경 여러 곳에서 어떤 기도가 잘못된 기도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기도를 잘해야 할 텐데….’라는 마음과 더불어, 또 한편으로는 기도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기도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명확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마6:9 이하).”라고 이어지는 그 기도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우리 마음에는 늘 잘못된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또 올바른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떠오르곤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기도에 큰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기도에 대한 평을 잘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도를 잘하는지를 묻는다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기적으로,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또는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종종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게 많냐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 아니냐고, 그러니 하나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한 번 기도했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나오는 분들을 향해서는 그렇게 꼭 정성을 기울여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이냐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을 향해서는 간절히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하지 않냐고, 울부짖는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냐고 비평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방에서 기도해야 하지 않냐고 말합니다. 매일매일 기도하면, 공로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기도하면, 외식주의라고 비판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면, 간절함이 없는 기도라고 비판합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면, 감정에 도취되었다고 비판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더듬더듬 기도했는데, 중언부언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참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드리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바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기도하려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내가 과연 제대로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잘 기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의외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

그럼 이제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관심을 바꿔 보는 것입니다. 유창한 기도가 효력이 있을까요? 막힘 없는 기도가 효과가 있습니까? 신학적으로 완벽하고 흠 없는 기도가 언제나 응답을 받습니까?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기도가 언제나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도에 대해 매우 다른 두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드릴 수 있는가? 어떤 기도가 좋은 기도인가? 어떤 기도가 잘못된 기도인가?’를 가르쳐 주는 본문이 많습니다. 그러한 본문들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마치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 같이 안내하는 본문이 많이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에는 또 다른 본문이 등장합니다. ‘잘못 드린 기도 같은데, 이런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구나.’ 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런 기도가 잘못된 기도다.’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놀랍게도 잘못된 기도를 드린 사람에게도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사사기 9장을 보면, 요담의 저주가 나옵니다. 이 저주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선언입니다. 요담은 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저주의 말을 퍼부었습니다. 아버지와 가족들을 죽인 원수들을 향한 복수심과 분노에 차서 세겜 사람들의 멸망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요담의 저주가 실제로 임합니다. 전혀 평온하거나 온전하거나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퍼부어진 저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응답이 이루어졌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모르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장사 삼손입니다. 하나님께서 힘과 권능을 주셨는데, 그만 여자에게 마음이 팔려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이 멀고, 쇠사슬에 묶인 채로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삼손은 복수심에 차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 기도가 이렇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삼손의 기도는 하나였습니다.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잘못했다는 회개의 기도도 아닙니다. 그저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 왕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이 탐난 아합 왕이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라고 말합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포도원이기에, 나봇은 팔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내세웁니다.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했다.”라는 증언을 하게 하고는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나봇을 죽입니다. 그리곤 포도원을 차지합니다. 참으로 악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아합 왕에게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그에게 임할 저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합 왕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시늉을 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너희가 아합 왕이 겸손해진 것을 보았느냐? 그에게 내리려고 한 벌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리지 않겠다.”라고 결정하십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는데, 사실 아합 왕은 그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시늉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사건입니다.
이처럼 종종 성경에서는 잘못된 기도, 불손한 기도, 돼먹지 못한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 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도 일하십니다. >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기도’와 ‘응답’이란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사사기 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7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미디안 사람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애원합니다. 어떤 기도였겠습니까? 그들의 손에서 해방해 달라는 간구였을 것입니다. 6~7절이 그 내용을 전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사사기 6:6~7)

‘부르짖었다’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아마 회개의 기도를 했을지도 모르고, 살려 달라는 애원의 기도를 드렸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말씀해 주셨는데, “응답하겠다.”라는 말씀도 아니고, “구원하겠다.”라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만 하십니다. 그 내용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사사기 6:8~10)

이스라엘 민족이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하신 말씀은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도 없고, 약속의 말씀도 없습니다. 그저 책망의 말씀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나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라는 강한 질책의 말씀뿐입니다. 이 기도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구절이 바로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사사기 6: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선지자를 보내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책망하시는 장면이 묘사되는 중에 또 다른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보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누가 있습니까? 기드온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기드온이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타작 마당에서 추수하고 있지만, 이제 곧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출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구원을 요청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 “너희를 구원하여 주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책망의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토록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중에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웅장한 하나님의 계획과 놀라운 섭리를 발견합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아무런 응답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기도의 자리에서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의 소리만 들었더라도,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하였더라도, 기도는 여전히 희망을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게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무언가를 고백할 때, 부모님께서 “내가 너에게 그토록 이야기하지 않았니? 내가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니?”라고 책망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에는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자녀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렇게 활동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은 부모의 심정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

이제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성경 여러 곳에서 알려 주셨습니다. 또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잘 드려진 기도뿐만 아니라 제대로 드려진 기도가 아닐지라도 응답해 주신 하나님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한번 가정해 봅시다. 어떤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 집에 아들 둘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엄한 분입니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절을 가르칩니다. “너희가 무엇을 요청할 때는 먼저 잘 생각해야 한다. 분에 넘치지 않아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야 하고, 예의 있고 바르게 요청해야 한다. 부모인 내게도 요청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아이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부모님께 요청하려고 할 때 늘 깊이 생각합니다. 이것이 과연 정말 필요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고, 또 이 요청을 전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느 때 전하면 좋을지, 어떤 방식으로 전하면 부모님의 마음에 드실지 생각하면서 요청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다릅니다. 아빠, 엄마의 이야기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냥 떼를 씁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달라고 합니다. 무조건 사달라고 합니다. 내놓으라고 합니다. 마치 무슨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두 아이의 부모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첫째에 대해서는 마음이 놓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칭찬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달라는 것 모두 다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둘째는 어떻습니까? 막무가내인 아이를 보면서 교육을 위해 어쩌면 안 줄 수도 있겠지만, 아마 모든 것을 안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그 아이에게도 무언가를 주려고 할 것입니다.
핵심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넘치는 사랑,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요구하면 결코 주지 않을 것도 자식이기 때문에, 예의를 차리지 않는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살지 않는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따금 저는 비록 짧은 인생 그리고 목회의 길을 걸어왔지만, 정말 인격적으로 부족하고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누린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부적절한 인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욕심껏 기도했고, 욕심껏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는 의문이 생길 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참 부당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다.’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누군가는 기도하기에 인격이 모자랍니다. 우리가 보기에, 누군가의 기도는 도저히 응답받을 수 없을, 응답받아서는 안 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기도할 때, 또 ‘기도에 응답받는다’, ‘응답받지 못한다’라고 할 때, 종종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교육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아, 맞는 기도를 드렸나 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기도를 드렸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면, ‘아,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가르쳐 주시려나 보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교육하시려나 보다. 무엇이 교훈일까?’라고 정리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잘못될까 봐, 잘못된 길로 갈까 봐,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막으시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기도가 응답되고, 사랑 때문에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걱정에 싸여 있습니다. 손도 씻고, 마스크도 쓰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과 달리, 우리는 한 가지 더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바로 ‘기도’입니다. 혹시 ‘내가 기도하기에는 어려.’, ‘기도하기에는 잘못된 삶이 너무 많아. 그래서 아직은 기도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어려운 이 시기에 나라와 국민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가 우리의 능력입니다. 기도를 통해 이 나라를 섬기고, 이 백성을 섬기며, 우리 자신을 귀하게 보듬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년 2월 2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믿는 자는 기도하라” (삿 6:6-10)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71장, 36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삿 6:6-1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23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코로나 19’가 기승인 요즘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때에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우리는 여러 잘못된 기도의 예를 알고 있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 금식하는 티를 내면서 하는 기도, 낙담하여 중단한 기도, 걱정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유창한 기도는 효과가 있을까요? 막힘없는 기도, 신학적으로 흠이 없는 기도는 쉽게 응답 받을 수 있을까요? 

 설교의 요약

   성경을 보면 잘 못 드린 기도 같은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경우들이 여럿 있습니다. 삿 9장의 요담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그 기도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도했는데 이뤄졌습니다. 삿 16장에서 하나님은 여자에게 마음이 팔려 하나님의 일꾼이기를 포기한 삼손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원수를 갚게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을 보면, 잘 못 드린 기도 같은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삿 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7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에게 넘겨주셨습니다. 미디안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삿 6:6-7).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삿 6:8-10).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책망의 말씀만을 하셨지,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곧, 1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삿 6: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을 준비시키시고 이스라엘의 구원의 시작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기도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제대로 된 기도뿐 아니라 막된 사람들의 기도도 응답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기도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관점을 땡깡 놓는 자녀(기도자)가 아닌, 사랑 많으신 부모(하나님)로 옮기면 어떨까요?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비록 잘못된 자식의 요구라도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감염증이 기승인 요즘,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기도하는 자입니다. 어려울 때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능력입니다. 

   

 나누기

 1.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사랑의 하나님은 구원자 기드온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지금 내가 사랑의 하나님께 아뢸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요? 

 2. 코로나 감염증으로 위축된 이 땅과 민족을 위해 기도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어려움을 당할 때에 막힌 우리의 기도가 다시 우리의 입을 통하여 쏟아져 나오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감격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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