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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는 살리라

요한복음 3: 14~16

김경진 목사

2023.03.05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거듭남에 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따로 떼어서 외우고 계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마음속에 두면서 소망을 얻는 분들도 계실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니고데모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이 말씀을 어떤 관점으로 니고데모에게 주셨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거하실 때 일입니다. 유월절 기간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니고데모라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또 유대인 지도자였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변호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로 보아 산헤드린 공의회에 소속된 율법학자처럼 보입니다. 제법 부유한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 나이는 들었던 걸로 추측됩니다. 그런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주님을 조용히 만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요 3:2a)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여” 하고 부르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을 어느 정도 간파한 듯 보입니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 3장 2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2b)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표적을 일으키시는 모습을 잘 살펴본 후에 ‘저분은 특별한 분이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밤에 찾아와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곳에서 한 가지 특별한 용어가 사용되는데,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특별하게 보내신 선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율법학자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들을 대표해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인사말을 듣고 곧바로 반응하시기보다, 그가 마음에 품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쏟아놓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고 가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하여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생님입니다.’라고 인사하는데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로 대답하고 계십니다. 언뜻 보기엔 엉뚱한 대답을 들려주시는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니고데모는 거듭나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두 번째로 주님께 질문합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 3:4)

 

거듭남에 대한 이해를 보다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5~8)

 

예수님의 대답은 보다 더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니고데모, 너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그러니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9)

 

이 대목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던 걸로 보입니다. ‘영으로 태어난다? 어떻게 영으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책망의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이어서 길게 대답하십니다. 그 말씀 중 일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그리고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거듭남의 비밀은 예수님만이 진리를 증언하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구절을 기점으로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사라집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갔는지조차 자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이후 요한복음 마지막에 가서야 니고데모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예수님이 모함당하고 계실 때, 예수님을 변호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예수님을 장사할 때, 니고데모가 또 한 번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 있다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나아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처럼 슬쩍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대화의 말미에는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3장 16절이 위치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 단어에 주의해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3장에 나오는데 니고데모가 예수님께로 와서 인사하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요 3:2 중)

 

여기서 ‘아나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이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 줄 알게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여 드린 세 번째 질문,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에 대해서 예수님은 도리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반박하십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내가 당신을 알아보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압니다.” 고백하면서 접근하자 예수님이 물으시지요. “네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이런 것도 모르느냐?” 한마디로 니고데모가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이며, 피상적인 것이며, 일차적인 것이었는지를 반격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앎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본문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연구하고 살펴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다가 그분이 보여 주시는 표적을 보면서 범상치 않으신 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물론 이 앎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더욱더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니고데모의 앎과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뿐입니다. 우리의 앎으로는 온전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예수님, 그리고 온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 주는 듯 성경은 니고데모의 이야기 앞과 뒤에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기록된 바로 앞부분인 요한복음 2장 24절입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 2:24~25)

 

예수님께서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요한복음 3장이 이어집니다. 원어로는 “그리고 지금 여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니고데모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선생인 줄 내가 압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까? 누가 알고 있는 것이며, 누가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인사말을 하자마자 마음속에 품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해 주십니다. “네가 마음에 품은 것을 내가 이미 꿰뚫고 있다. 네가 지금 가지고 온 그 질문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마치 그것을 증명하시는 듯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어서 니고데모와 예수님간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 또다시 ‘안다’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것도 알지 못하느냐?”라고 니고데모를 향해 책망하시죠. 다시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1)

 

즉 주님만이 진정으로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든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말하지만 정말 알고 있는 존재는 바로 나다. 정말 알고 있는 자는 나 예수 그리스도이다.”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다’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흥미로운 흐름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본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고, 진리를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자신이 연구한 것 하나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추었지만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랍비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이르렀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안다’라는 단어를 넘어서 ‘믿는다’라는 단어로 이동하십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알고 찾고 연구하여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씀을 듣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왜 말씀을 믿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맞는 말씀, 정확히 아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놋뱀을 든 모세의 이야기를 상기시키십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불뱀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모두가 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탄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용서하시며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세우도록 명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아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다시 떠올리시면서 이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살리라는 말씀을 듣고, 광야에서 쓰러져 죽어 가던 사람들은 이런저런 고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 말이 정말 사실인지 고민하다가 놋뱀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놋뱀을 바라보면 산다는 말씀 한마디를 단순하게 믿고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살아납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상황을 판단하며 결정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한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홀로 자격이 있으신 계시자로서의 예수님, 진정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분의 말씀에 스스로를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하시며, 본 것을 말하고 아는 것을 말하는 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유일한 인도자이며, 영생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기로 결단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무엇이 들린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들려 올려지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자, 그렇다면 광야에 높이 들린 놋뱀을 보는 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이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믿음이라면,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겠습니까? 강대상 앞에 놓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겠습니까? 무엇이 과연 믿음이겠습니까?

다시 거듭남의 주제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함은 세례를 가리키시는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가 예수님의 시대에는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믿음의 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옛날에 부흥사 목사님들이 말씀을 한참 전하시다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일어서곤 하였습니다. 앞자리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일들도 종종 일어났죠. 신앙생활 하시면서 한 두 번은 경험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헌신의 행위입니다. 마치 놋뱀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부흥사 목사님들의 콜링이 있었다면,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십일 간의 세례 준비 기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절 아침이 되면 모든 것을 버리고 물속으로 들어가 옛 자아가 죽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성경은 알려 줍니다. 그래서 세례가 중요하고, 지금도 우리가 중요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세례받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주님께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놋뱀을 들고 이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물론 대부분 우리 모두는 세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무엇입니까? 그저 얼떨결에 머리에 물을 묻힌 종교적인 의식, 종교적인 행위입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알려 주는 징표입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그 마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종종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시는 분들 중에서 아무리 연구하고 생각해도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을 잘 알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연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규명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나는 내가 본 것을 증언하고 나는 아는 것을 증언한다.”는 이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올라타서 주님의 말씀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다를 넘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아는 것을 통해서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단계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 모두가 신앙을 누리며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인용하겠습니다.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7,26-27)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The One Who Believes Will Live

 

John 3:12-16

 

 

A man named Nicodemus visits Jesus while He was staying in Jerusalem during what it appears to be the Passover. Nicodemus was a Pharisee and a leader of the Jews. From the fact that he addressed the Sanhedrin, it appears he was a teacher of the law in the Sanhedrin. It appears also that he was wealthy and considerable aged.

 

Nicodemus comes to Jesus during the night. It is likely that he wanted to have a discreet conversation with Jesus without people noticing. First, he calls Jesus “Rabbi”:

 

“Rabbi, we know that you are a teacher who has come from God.” (John 3:2a)

 

Nicodemus not only calls Jesus “Rabbi” but also acknowledges that He is a teacher who has come from God. Nicodemus seems to have understood at least a little about Jesus’ divine origin. He determined that Jesus was not just any Rabbi, but a teacher sent especially by God.

 

The reason for his assessment is given in John 3:2b:

 

“For no one could perform the signs you are doing if God were not with him.” (John 3:2b)

 

One particular word in John 3:2 must be noted: “we.” This implies that quite a number of people shared Nicodemus’ view of Jesus. A considerable number of teachers of the law shared his assessment.

 

It seems Nicodemus wanted to have a discreet conversation with Jesus on behalf ofthis group of people. Furthermore it appears that he wanted to receive a true teaching from Jesus throughhis interaction with Him.

 

However, after hearing his greeting, Jesus does not respond directly to that greeting, but instead answers a question that had truly been in his heart:

 

“Jesus replied, ‘Very truly I tell you,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they are born again.’” (John 3:3)

 

This scene reminds us of a Zen riddle. But Jesus’ answer above is the very answer to the very question that Nicodemus had harbored in his heart: “What must I do to gain eternal life, to enter the kingdom of God?” In other words, Jesus is teaching Nicodemus that in order to enter the kingdom of God he must be reborn.

 

At Jesus’ answer, Nicodemus poses his second question:

 

“‘How can someone be born when they are old?’ Nicodemus asked. ‘Surely they cannot enter a second time into their mother’s womb to be born!’” (John 3:4)

 

Nicodemus asks this question to accurately understand the meaning of being born again. It was a natural, inevitable question.

 

Jesus answers:

 

“Jesus answered, ‘Very truly I tell you, no one can enter the kingdom of God unless they are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Flesh gives birth to flesh, but the Spirit gives birth to spirit. You should not be surprised at my saying, You must be born again. The wind blows wherever it pleases. You hear its sound, but you canno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it is with everyone born of the Spirit.’” (John 3:5-8)

 

Jesus says one must be born “of water and the Spirit.”What this means is that“being born again” means being born spiritually, not physically.

 

Then Nicodemus poses his third question:

 

“‘How could this be?’ Nicodemus asked.” (John 3:9)

 

It seems Nicodemusfound it difficult to understand this part. To be born of the Spirit? How can one be born of the Spirit? After some words of rebuke, Jesus elaborates on this matter. Today’s Scripture is part of this explanation.

 

Jesus says that just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in the wilderness, the Son of Man must also be lifted up. This is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shall have eternal life.

 

Then Jesus proclaims the verse we all love so much—John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John 3:16)

 

Then Nicodemus disappears. We cannot precisely know what he was thinking as he left Jesus, but considering the last scene of John where he defends Jesus before the Sanhedrin and prepares Jesus’ body for burial after His death, we may assume that he followed Jesus discreetly as a member of the Sanhedrin while Jesus was alive and later, after His death, confirmed his identity as a disciple.

 

If the Book of John had not written about what Nicodemus later became and did, the man who came knocking on Jesus’ door and vanished shortly after in John 4 may have been forever misunderstood as a Pharisee who met Jesus but failed toreach the truth.

 

The conversation between Nicodemus and Jesus, which may easily be glossed over, is in fact filled with famous lines and sentences revealing the true nature of Christianity. And at the end of it, we find John 3:16, the verse we know so well.

 

Today’s text teaches us by contrasting Nicodemus’ perspective in seeking Jesus and Jesus’ teaching on what makes a Christian.

 

For a more meaningful study of the text, I want to examine one particular word: “to know.”

 

The first time this word is used in John 3 is when Nicodemus first greets Jesus:

 

“Rabbi, we know that you are a teacher who has come from God.” (John 3:2)

 

Having witnessed Jesus’ miracles, Nicodemus knew that He had come from God.

 

But Jesus rebukes Nicodemus who speaks so confidently about his knowledge: “You are Israel’s teacher, and do you not understand these things?” This was Jesus’ rebuke when Nicodemus asked, “How could this be?”

 

In short, countering Nicodemus claim that he “knows,” Jesus is in effect saying, “You say you ‘know’ but don’t you know even this?”Jesus is pointing out to him how miniscule, superficial, and one-dimensional his knowledge actually is.

 

In today’s passage, Nicodemus is depicted as a man who pursues knowledge. We may say that he visited Jesus with the aim of studying, examining, and contemplating who Jesus is, wanting to know what He could do for him.

 

Nicodemus scrutinized Jesus’ acts. He examined the miracles and signs He performed. He came looking for Jesus because he thought He was a teacher sent by God.

 

To know, to gain knowledge is of course not a bad thing.It would be even better if one comes to believe in Christ through that knowledge.

 

But Nicodemus’ knowledge was only weak and lacking. With our knowledge, it is hard to understand God, Jesus, God’s plan for salvation, and His providence that are perfect and whole.

 

As if to reveal this truth to us, the Bible uses the word “to know” repeatedlyin relation to Jesus in the passages that come before and after story of Nicodemus. The following, John 2:24, is a verse that precedes today’s passage:

 

“But Jesus would not entrust himself to them, for he knew all people. He did not need any testimony about mankind, for he knew what was in each person.”(John 2:24-25)

 

The above verse is saying that Jesus knows each person. He knows all that is in each person’s heart.

 

Then comes chapter 3. In the original Greek New Testament, the first sentence of chapter 3 goes something like this: “Now among the Pharisees there was a man named Nicodemus.”

 

The story of Jesus, who knows everything and sees through everyone’s hearts, continues in the form of a story revolving around Nicodemus.

 

Isn’t this fascinating? Jesus knows everything about us and sees through everyone’s hearts; and here Nicodemus comes along and says, “Rabbi, I know. I know that you are a teacher sent by God. How did I know? Through your performance of miracles. I am right, aren’t I? You are a Rabbi, aren’t you?”

 

Who is the one that knows and sees accurately? As soon as Nicodemus said his greetings, Jesus answers the question that he had in his heart. Who then is the one who knows?

 

The verb “to know” also appears in Jesus’ last words to Nicodemus. After rebuking him for not understanding theses things even as Israel’s teacher, Jesus says:

 

“Very truly I tell you, we speak of what we know, and we testify to what we have seen, but still you people do not accept our testimony.” (John 3:11)

 

In short, Jesus is saying that He speaks about what He truly knows. He is saying, “You speak even though you do not know things clearly, but I will speak of what I know.” He is saying that the One who speaks of what He truly knows is none other than Jesus.

 

This is a fascinating unwinding of events concerning the word “to know.”

 

The One who truly knows all things is our Lord. He is the One who speaks of what He has seen and the One who testifies to the truth. But Nicodemus comes to Jesus with the things he has studied. Nicodemus was right to a certain extent. However his knowledge is limited to his understanding of Jesus as a Rabbi sent by God. He does not“really” know who Jesus is. He does not know that He is the Son of God, that the human race will be saved through Him.

 

Now Jesus goes beyond the word “to know” and shifts to another word—“to believe.”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nak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that everyone who believes may have eternal life in him.”(John 3:14-15)

 

Our Lord is talking about hearing the Word, believing it, and acting upon it—instead of coming to Him by knowing, seeking, and studying. Why is it important to believe in and act upon the Word? Because Jesus has given it to us, the true Word that He knows clearly.

 

To illustrate His point, Jesus recalls the story of Moses who lifted up the bronze serpent in the wilderness, recorded in Numbers 21.

 

When God sent poisonous snakes among the Israelites for complaining against Him, Moses put a bronze snake on the top of a pole as ordered by God. God proclaimed that anyone who looks at it would live. Indeed those who did lived.

 

Jesus is saying that this is faith.

 

After hearing Moses’ words proclaiming that anyone who looks at the snake will live, some might have thought, ‘How could this be?’ Yet others may have thought, ‘Why did God send poisonous snakes among all the Israelites, including even the ones who did not complain?’

 

However, it does not matter what they thought or how they perceived, diagnosed, or analyzed the situation. The one who believed and obeyed the word of God given through Moses would live. The one who did not look at the snake would die.

 

This is faith.

 

What does it mean here “to believe”? It means to surrender to the word of Jesus, the One who truly knows everything and the self-qualified Revealer of truth. It means to wholly entrust ourselves to Jesus, our only Guide to salvation and the Father and the sole Mediator to eternal life. This is faith.

 

Our Lord, who confidently says, “we speak of what we know, and we testify to what we have seen,” says: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nak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that everyone who believes may have eternal life in him.” (John 3:14-15)

 

The one who looks at Me will live. The 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The Lord is saying that the one who listens to My word and acts will live—not the one who studies Me.

 

The door of this salvation is wide open. It is hard to believe because it soundstoo easy.

 

But our Lord says: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Let’s go back to Jesus’ words on being born again. After teaching Nicodemus that one must be born again,Jesus explains that this is a spiritual rebirth, that is, to be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This is clearly related to baptism. What act of faith in Jesus’ time could we say is parallel to the act of looking at the bronze snake in the Old Testament? The answer would be to be born of water and the Spirit—in other words, to advance toward a baptism of faith.

 

In the past, revivalists would often shout, “Those who wish to believe in Christ, stand up now! Come up to the pulpit. You shall be saved by faith!” Such actions are a precious commitment and may be compared to looking at the bronze snake. However, since the words of Jesus, Christianity has believed that baptism is the very act of turning to the Lord.

 

We are in the Lent season. During these forty days set apart for preparing for baptism, Christians reflected on and examined themselves. And finally on Easter morning, they left behind everything, entered the water, killed their old selves, and became united with Jesus. And they received a new name and became a new creation. We believe this is “to be born again of water and the Spirit.” This is why baptism is so important. It is why we observe it.

 

If any of you have not been baptized yet, I encourage you to come to the Lord.God, who proclaimed that whoever looks at the snake would live, wants us to be reborn of water and the Spirit.

 

Sometimes I come across people who have studied Jesus a great dealbut say they find it hard to believe in Him. Our knowledge and our thoughts often get in the way of believing in Christ. Believing, not knowing, is what matters. We believe not because we “know,” but because we “believe” in Jesus’ words and follow them. This is the faith that our Lord desires from us.

 

A faith that goes beyond “knowing” and advances toward “believing.” It is my hope that we will all live as Gods’ children, possessing this true salvation that comes not from knowledge but from faith.

 

Finally, let me quote God’s Word spoken to us through Apostle Paul:

 

“Understand, then, that those who have faith are children of Abraham. […] So in Christ Jesus you are all children of God through faith, for all of you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clothed yourselves with Christ.” (Galatians 3:7,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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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 14~16

14~16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거듭남에 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따로 떼어서 외우고 계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마음속에 두면서 소망을 얻는 분들도 계실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니고데모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이 말씀을 어떤 관점으로 니고데모에게 주셨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거하실 때 일입니다. 유월절 기간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니고데모라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또 유대인 지도자였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변호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로 보아 산헤드린 공의회에 소속된 율법학자처럼 보입니다. 제법 부유한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 나이는 들었던 걸로 추측됩니다. 그런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주님을 조용히 만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요 3:2a)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여” 하고 부르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을 어느 정도 간파한 듯 보입니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 3장 2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2b)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표적을 일으키시는 모습을 잘 살펴본 후에 ‘저분은 특별한 분이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밤에 찾아와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곳에서 한 가지 특별한 용어가 사용되는데,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특별하게 보내신 선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율법학자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들을 대표해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인사말을 듣고 곧바로 반응하시기보다, 그가 마음에 품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쏟아놓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고 가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하여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생님입니다.’라고 인사하는데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로 대답하고 계십니다. 언뜻 보기엔 엉뚱한 대답을 들려주시는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니고데모는 거듭나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두 번째로 주님께 질문합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 3:4)

 

거듭남에 대한 이해를 보다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5~8)

 

예수님의 대답은 보다 더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니고데모, 너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그러니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9)

 

이 대목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던 걸로 보입니다. ‘영으로 태어난다? 어떻게 영으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책망의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이어서 길게 대답하십니다. 그 말씀 중 일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그리고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거듭남의 비밀은 예수님만이 진리를 증언하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구절을 기점으로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사라집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갔는지조차 자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이후 요한복음 마지막에 가서야 니고데모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예수님이 모함당하고 계실 때, 예수님을 변호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예수님을 장사할 때, 니고데모가 또 한 번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 있다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나아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처럼 슬쩍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대화의 말미에는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3장 16절이 위치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 단어에 주의해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3장에 나오는데 니고데모가 예수님께로 와서 인사하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요 3:2 중)

 

여기서 ‘아나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이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 줄 알게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여 드린 세 번째 질문,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에 대해서 예수님은 도리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반박하십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내가 당신을 알아보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압니다.” 고백하면서 접근하자 예수님이 물으시지요. “네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이런 것도 모르느냐?” 한마디로 니고데모가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이며, 피상적인 것이며, 일차적인 것이었는지를 반격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앎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본문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연구하고 살펴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다가 그분이 보여 주시는 표적을 보면서 범상치 않으신 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물론 이 앎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더욱더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니고데모의 앎과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뿐입니다. 우리의 앎으로는 온전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예수님, 그리고 온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 주는 듯 성경은 니고데모의 이야기 앞과 뒤에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기록된 바로 앞부분인 요한복음 2장 24절입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 2:24~25)

 

예수님께서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요한복음 3장이 이어집니다. 원어로는 “그리고 지금 여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니고데모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선생인 줄 내가 압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까? 누가 알고 있는 것이며, 누가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인사말을 하자마자 마음속에 품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해 주십니다. “네가 마음에 품은 것을 내가 이미 꿰뚫고 있다. 네가 지금 가지고 온 그 질문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마치 그것을 증명하시는 듯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어서 니고데모와 예수님간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 또다시 ‘안다’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것도 알지 못하느냐?”라고 니고데모를 향해 책망하시죠. 다시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1)

 

즉 주님만이 진정으로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든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말하지만 정말 알고 있는 존재는 바로 나다. 정말 알고 있는 자는 나 예수 그리스도이다.”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다’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흥미로운 흐름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본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고, 진리를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자신이 연구한 것 하나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추었지만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랍비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이르렀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안다’라는 단어를 넘어서 ‘믿는다’라는 단어로 이동하십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알고 찾고 연구하여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씀을 듣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왜 말씀을 믿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맞는 말씀, 정확히 아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놋뱀을 든 모세의 이야기를 상기시키십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불뱀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모두가 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탄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용서하시며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세우도록 명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아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다시 떠올리시면서 이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살리라는 말씀을 듣고, 광야에서 쓰러져 죽어 가던 사람들은 이런저런 고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 말이 정말 사실인지 고민하다가 놋뱀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놋뱀을 바라보면 산다는 말씀 한마디를 단순하게 믿고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살아납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상황을 판단하며 결정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한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홀로 자격이 있으신 계시자로서의 예수님, 진정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분의 말씀에 스스로를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하시며, 본 것을 말하고 아는 것을 말하는 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유일한 인도자이며, 영생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기로 결단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무엇이 들린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들려 올려지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자, 그렇다면 광야에 높이 들린 놋뱀을 보는 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이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믿음이라면,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겠습니까? 강대상 앞에 놓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겠습니까? 무엇이 과연 믿음이겠습니까?

다시 거듭남의 주제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함은 세례를 가리키시는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가 예수님의 시대에는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믿음의 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옛날에 부흥사 목사님들이 말씀을 한참 전하시다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일어서곤 하였습니다. 앞자리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일들도 종종 일어났죠. 신앙생활 하시면서 한 두 번은 경험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헌신의 행위입니다. 마치 놋뱀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부흥사 목사님들의 콜링이 있었다면,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십일 간의 세례 준비 기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절 아침이 되면 모든 것을 버리고 물속으로 들어가 옛 자아가 죽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성경은 알려 줍니다. 그래서 세례가 중요하고, 지금도 우리가 중요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세례받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주님께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놋뱀을 들고 이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물론 대부분 우리 모두는 세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무엇입니까? 그저 얼떨결에 머리에 물을 묻힌 종교적인 의식, 종교적인 행위입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알려 주는 징표입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그 마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종종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시는 분들 중에서 아무리 연구하고 생각해도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을 잘 알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연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규명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나는 내가 본 것을 증언하고 나는 아는 것을 증언한다.”는 이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올라타서 주님의 말씀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다를 넘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아는 것을 통해서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단계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 모두가 신앙을 누리며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인용하겠습니다.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7,26-27)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2023년 3월 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믿는 자는 살리라” (요 3:14-1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28장, 29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3장 14-1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남은 이처럼 세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순절 40일의 기간을 거듭남의 기간으로, 세례 준비기간으로 보내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의 요약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연구하고 살피고 그분이 어떤 분이실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면밀히 살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맞는 것 같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어서, 그는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랍비라는 사실을 아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정말로 누구인지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만민이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진정 모든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찾아 연구하여 나아갈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대 위의 놋뱀을 바라보면 살리라 했을 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고, 또 불평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불뱀에 물리게 하셨을까요?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상황을 파악했고 진단했고 연구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살 것이요, 놋뱀을 보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연구하는 자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을 믿고 행동하는 자가 산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홀로 자격 있는 계시자로써의 예수님, 진정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분의 말씀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구원과 아버지께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유일한 인도자이시며 영생의 유일한 중재자인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믿음의 길로, 거듭남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나누기

  1.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안다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요?
  2.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기 원하오니,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여 주옵소서.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는 기쁨을 우리 모두가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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