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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목숨을 건 민족사랑

로마서 10: 1 ~ 4

김경진 목사

2021.02.28

<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하며,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다짐합니다. >

오늘 본문 말씀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바울 서신 중 가장 긴 서신이자 교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루터, 칼뱅 등 수많은 신학자들이 로마서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고, 주석하기를 원했던 말씀으로 손꼽힙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에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마서 15장 25절을 보면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다.’ 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즉 로마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이전에 기록된 책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방문이 57~58년 정도로 추정되기 때문에 로마서가 작성된 연대를 대략 56~57년 정도로 추측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함께 공부하신 분들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지도가 생각이 나실 듯합니다. 못 보신 분들이 계실 테니 잠시 보시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서 다소, 더베, 골로새, 에베소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곳 소아시아 지역에서 약 3년 동안 머물면서 바울이 전도 활동을 펼칩니다. 그리고는 에베소를 떠나기 직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고린도전서를 쓰고 이동합니다. 드로아를 거쳐 배를 타고 빌립보에 갑니다. 이어서 데살로니가를 통해 아덴으로 가게 되고, 마침내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고린도에서 약 3개월을 머물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로마서를 쓰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고린도에서 3개월을 머문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는데, 배를 타지 않고 온 방향대로 돌아가는 일정을 택합니다. 데살로니가, 빌립보를 통과한 후 다시 드로아에 옵니다. 이어서 앗소라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밀레도에 도착한 후에 두로와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일정이었습니다.
바울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예루살렘으로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합당하다면 가겠다는 하나의 가능성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작성할 때에는 상황이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확실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져갈 헌금과 함께 바울이 직접 방문하도록 권유했던 게 아닐까 짐작됩니다. 무엇보다 바울 스스로가 심경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예루살렘 행을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했을까요?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 에베소 장로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때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사도행전 20:22)

이어서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사도행전 20:23~25)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유언의 말을 남깁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방문이 위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바울은 많은 사람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면 안 된다는 조언을 계속해서 받습니다.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두로에 도착했을 때에 7일간 머물렀는데, 제자들이 바울에게 권면을 합니다. 그 내용을 사도행전 21장 4절이 전해 줍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사도행전 21:4)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두로에서 또다시 배를 타고 가이사랴에 도착했는데, 아가보라는 한 예언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꽁꽁 묶고는 말을 합니다. “이 띠의 주인이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바울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의 운명을 예견하듯 예언했습니다.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가이사랴의 많은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울은 결심을 꺾지 않습니다. 그가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행전 21:13)

바울은 죽음을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성령께서 박해와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끊임없이 알려 주고 계셨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 유대 민족을 향한 근심이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 행을 결단하게 했습니다. >

그렇다면 바울이 이토록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서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장인 9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서 9:1~3)

바울에게는 민족을 향한 근심이 있었습니다. 형제와 친척을 향한 큰 근심이었습니다. 로마서를 쓰면서 자신 안에 있는 민족을 향한 큰 안타까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원래 이방인을 전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며 전도 활동을 했고, 고린도에 머물면서 마게도니아 지역에서도 활발한 전도 활동을 펼쳤습니다. 바울 앞에는 로마와 스페인에 가서 복음 전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족이 있는 유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유대 민족에게 가서 무엇을 주려고 했을까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고자 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 줍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로마서 10:1)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것, 이것이 바울이 원한 한 가지였습니다. 주옥과도 같은 말씀인 로마서를 쓰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로마의 사람들에게는 전하면서 나의 민족, 우리 유대인,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전할 수 없단 말인가?’ 이와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어서 그가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0:2)

바울이 동족인 유대인을 향해 가진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바로 올바른 지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이며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과 함께 바른 지식을 가지며 살고 있다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의 지식은 바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단이었습니다.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진정한 깨달음을 가지고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리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참된 자유,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유는 유대인들과 정치적으로 결합해서 로마와 대항하거나,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싸우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유대 민족을 번성하게 해서 세계를 이끌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줄 헌금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돕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예루살렘 거민들의 병들을 고쳐 주려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원했던 이유는 자신이 깨달았던 진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어 주신 깨달음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세상이 어떻게 참다운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지고한 질문에 대한 답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귀한 보석과도 같은 진리, 이 지식을 유대인들이 누리면서 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 지혜로 민족이 구원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기 민족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귀한 지식, 참다운 지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서 10장 3절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10:3)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동족들이 범한 잘못을 진단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의’와 ‘율법의 의’를 날카롭게 비교합니다. 율법의 의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이 믿고 따르던 삶의 방식입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입니다. 즉 율법의 준수는 하나님의 백성의 당연한 의무이고 이를 통해 이 땅에 진정한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 믿음의 태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자 구원 받은 백성이 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확신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유대교의 중요한 믿음의 체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체계 안에 살던 바울이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합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온 맘을 다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의인이 없는 율법, 이 율법은 도리어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겉으로 보여 주는 모습을 통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 듯 허세를 부리고, 그것으로부터 존경을 누리는 외식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25)

이러한 자기 의, 율법의 의로는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바울이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었습니다.

< 유대인이 따른 율법의 의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분리시킬 뿐이었습니다. >

사실 바울은 율법에 충실한 자였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데 누구보다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율법을 지키고 죄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빛 가운데서 만납니다. 그리고는 뜻밖의 소리를 듣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물었을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율법을 지키던 그의 열심이 도리어 하나님을 박해하는 방향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진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던 바울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회심을 합니다.
율법의 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람 앞에서조차 온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의란 자신이 완전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서겠다는 태도입니다. 완전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정죄하며 살겠다는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옭아매고 정신을 피폐하게 하며 외식주의자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율법의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율법의 의를 잘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명분 아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의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의는 오고 오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개인의 모습에서 여전히 율법의 의가 작동합니다. 외식하며 치장하는 개인의 모습에서 율법의 의의 잔재를 보게 됩니다. 다른 이의 잘못을 드러내고 정죄하고 죽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율법의 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의 의는 여전히 작동합니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남녀의 차별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폭력을 종식시킨다는 명분, 부정축재를 근절한다는 명분, 부의 세습을 막는다는 명분, 그리고 정의와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율법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건전한 생활과 바른 삶을 독려하였듯이 정의롭고 바른 삶의 태도를 위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신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들이대면서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태도는 세상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결국은 그 안에서 모두가 죽는 양상이 되고 맙니다. SNS에 조금만 잘못된 글을 올려도 정죄의 댓글로 도배되는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분노가 있고, 살의가 존재할 뿐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해 줍니다. >

바울은 율법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민족에게 알려 주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인간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 참된 의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유일한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게 하심으로 구제해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은혜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희생으로 시작되고, 용서로부터 주어지며, 사랑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작동될 때 즉 용서가 살아날 때 이 사회에 희망이 움틉니다.
요즈음 진정한 사과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 용어조차도 잘못 사용한다면 정죄의 용어가 될 수 있음을 주의 깊게 보게 됩니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라고 하는 그 자리에서부터, “왜 나를 사랑하시는가?” 라는 물음에서부터 하나님의 의는 시작됩니다.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진리요, 복음이었습니다.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참다운 번영의 길, 복의 길이었습니다. 행복의 길이며, 참된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3·1절 102주년을 맞으며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102년 전, 만세를 부르며 우리 선조들이 원했던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니었겠습니까? 민족의 번영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분들은 이것을 위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만으로 완전한 번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의 의를 알아 용서를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그렇게 참된 진리에 이를 수 있을 때에만 이 나라는 진정 살 만한 나라, 참된 자유가 있는 나라, 번영하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의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나라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예상하면서도 동족하게 바른 지식을 전하며 민족의 살 길을 제시했던 바울처럼, 그리고 102년 전에 분연히 일어나 만세를 부르며 민족의 살 길을 찾아 나선 신앙의 선배들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민족을 살리는 길을 찾아내고 그분의 의를 세상에 전하는 주님의 귀한 전사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이 사회는 참으로 적의와 살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민족이 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서로 싸우는 상황 속에서, 이념과 이념이 대립하고 이득과 이득이 싸우는 상황 속에서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의 의? 정죄의 의? 이것을 가지고는 이 민족을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 희생을 통하여서만이 이 나라에 희망이 있고, 이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에 우리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망의 온 성도가 하나님의 의를 가득 펼쳐 내는 주님의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Paul Who Risked His Life For His People

Romans 10:1-4

Today’s Scripture is from Romans. Written by Paul, Romans is known as the best book to explain the Christian doctrine and gospel. It is also the longest and most significantletter among Paul’s writings. The book touched many great Christians, including Augustine, Luther, and Calvin,who loved to read and comment on it.

Romans is known to have been written during Paul’s third missionary journey. Scholars presumeit was written around AD 56-57. This period is deduced from Paul’s mention of his plans to visit Jerusalem to serve Christians in need. (Romans 15:25) From this we can tell that Romans was written before Paul’s visit to Jerusalem.

Those of you attending morning prayer services will immediately picture a map of Paul’s journey in your head. Shall we look at the map of Paul’s third missionary journey now?

In his third missionary trip, Paul starts from Antioch, stops by Galatia and Phrygia in the north, and then goes to Ephesus where he preaches the gospel for 3 years. Next, he goes south to Corinth, where he stays for 3 months, and in Macedonia he collects offerings for the needy Christians in Jerusalem. Scholars guess that it was during his stay in Corinth that Paul wrote Romans. That is why Romans mentions the collecting of offerings for the saints in Jerusalem and Paul’s plan to visit the city in detail.

After writing Romans, Paul appears to have returned to Troas via Thessalonica and Philippi by sea, and in Assos he boarded another ship that would finally bring him to Jerusalem, stopping by Tyre, Caesarea, and many other islands and ports along the way.

At the time of writing Corinthians, however, it seems Paul had not decided whether he would visit Jerusalem. In 1 Corinthians chapter 16, Paul writes that he may visit the city if it is the right thing to do. But, not long after, in writing Romans, he clearly states in chapter 15 that he will visit Jerusalem.

This change means that, first, the churches in Macedonia and Corinth thatcollected the offeringsfor Jerusalem wanted Paul to go to the city himself. Second, it signals a change in Paul’s heart, that is, a determination to go to Jerusalem himself.

Why this change of heart? Paul knew that his tripto Jerusalem would be far from easy. Ahead of his journey,he said to the elders of Ephesus in Miletus, a port city near Ephesus: “And now, compelled by the Spirit, I am going to Jerusalem, not knowing what will happen to me there.” (Acts 20:22)

Paul was well aware of the dangers facing him in Jerusalem. Nevertheless, he desired to go. He says, “I only know that in every city the Holy Spirit warns me that prison and hardships are facing me.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my only aim is to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od news of God’s grace.Now I know that none of you among whom I have gone about preaching the kingdom will ever see me again.” (Acts 20:23-25)

As if declaring a will, he says he is sure to face great tribulations in Jerusalem and bids his final farewell to the elders in Ephesus. He knew only too well of the perils facing him in Jerusalem. The Spirit had clearly revealed them to him.

Yet, Paul did not give up. When he was writing Corinthians, he had initially planned to sendsome brothers appointed by the church in Corinthto deliver the offering to the churches in Jerusalem, but later he decided to go himself.

Many other witnesses and prophets also reaffirmed Paul’s forecast on severe tribulations in Jerusalem. According to Acts, some disciples came to Paul inTyre, where he stayed for week, to dissuade him from going: “We sought out the disciples there and stayed with them seven days. Through the Spirit they urged Paul not to go on to Jerusalem.” (Acts 21: 4)

When Paul arrived in Caesarea, the prophet Agabus,after tying his hands and feet with Paul’s belt, prophesied that the Jews in Jerusalem would tie Paul up and hand him over to the Gentiles.Yet, Paul was not deterred. Even when the Christians in Caesarea and close friends urged him not to go, his will remained unshaken. He says, “Why are you weeping and breaking my heart? I am ready not only to be bound, but also to die in Jerusalem for the name of the Lord Jesus.”(Acts 21:13)

Paul’s determination and desire to go to Jerusalem were ironclad. Although the Spirit continuously told him of the persecution and tribulations awaiting him there, he did not succumb. He finally went to Jerusalem.

Then why did Paul want to visit Jerusalem so badly? Even when the Spirit warned him of all the trials and persecutions awaiting him, why did he go?

The reason is found in today’s passage from Romans and especially in the preceding chapter: “I speak the truth in Christ—I am not lying, my conscience confirms it through the Holy Spirit— I have great sorrow and unceasing anguish in my heart. For I could wish that I myself were cursed and cut off from Christ for the sake of my people, those of my own race,”
(Romans 9:1-3)

Paul had a great sorrow for his people. It was an unceasing anguish for his brothers and kin. He would have had this grief in his heart as he was writing Romans. It was this sorrow that made him go to Jerusalem.

Paul had originally been called as an apostle for the Gentiles. Therefore, he did not have to go to Jerusalem. He would have been fully doing his duty by preaching to the Gentiles. Nevertheless, he was determined to go to his fellow Jews in Jerusalem.

Then what did Paul want to give to his people, his brethren, and his kin? Today’s passage tells us the answer: “Brothers and sisters, my heart’s desire and prayer to God for the Israelites is that they may be saved.” (Romans 10:1)Paul wanted one thing: that his people would be saved. He goes on to say, “For I can testify about them that they are zealous for God, but their zeal is not based on knowledge.” (Romans 10: 2)

Paul was right to feel sorrow for his fellow Jews. It was wisdom, true knowledge, and understanding that made him feel so. The Jews, believing they were God’s people, thought they possessed the “true knowledge,” but this was not so.

Paul wanted his kin to have the true understanding and the true freedom. That is, he wanted the Israelites to have genuine happiness in the truth.

The reason why he risked even his life in visiting Jerusalem was not because he wanted to unite politically with the Jews or to rise up against the Romans or to fight for Israel’s independence. He did not go to Jerusalem to make his people prosper and become world leaders.

He went not because of the need to help Christians in need, although he did carry the offering for them with him. If this were his sole purpose, he would not have made the journey himself. Neither did he go to heal the sick with his gift of healing and cure Israel of all its diseases.

He went, risking his very life, because of the truth he realized. It was God’s grace. How does man obtain true freedom? How can this world move toward true happiness? He went to Jerusalem because he received answers from God about these questions. Paul wanted his people to know and enjoy this precious truth. He wanted every one of his people to be saved through this wisdom.

Then what was the true knowledge that Paul wanted his people to know?“Since they did not know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sought to establish their own, they did not submit to God’s righteousness.” (Romans 10: 3)Paul, moved by the Spirit, came to distinguish God’s righteousness from the righteousness of the Law, as he was writing Romans.

What is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the Law? This was what the Jews had been following till then. They believed that by observing the Law they became God’s people and were saved. Abiding by the Law was the natural duty of God’s people, and by this obedience to the Law true happiness would come on earth.

The Israelites believed that by observing the Law and sacrificing in the temple they became God’s people, the happiest people, and a saved people. This was their longstanding belief, a pillar of the Jewish faith.

But Paul came to realize something. Although the Jews claimed to observe the Law, in truth, it was impossible for them to keep it completely. No one kept the Law wholeheartedly. Rather, the Jews were judging and killing people with the Law. Furthermore, they were only going through the motions of keeping the Law to be respected by others—like hypocrites. Therefore, the righteousness of the law is only self-righteousness.

Jesus had already rebuked the Pharisees and teachers of the Law about this: “Woe to you, teachers of the law and Pharisees, you hypocrites! You clean the outside of the cup and dish, but inside they are full of greed and self-indulgence.” (Matthew 23:25)

Paul realized that man cannot reach true happiness through this self-righteousness, the righteousness of the Law. This realization came when he met Jesus on his way to Damascus. He was going there to arrest followers of Christ.

Till then, he was faithful the to the Law. He was passionate about judging those who violated it. However, he met the risen Lord on a journey meant to keep the Law and condemn its violators. And he heard something completely unexpected:“Why do you persecute me?” At these words, Paul, who had been opposing the truth, stopped dead. And repented.

Why can’t the Law’s righteousness save us? It is because humans are incapable of fully keeping the Law. Who on earth can be blameless and perfect before men, let alone God?

The righteousness of the Law signifiesan attitude determined to be perfect before God, and, therefore, results in condemning and judging all those who fail to live a perfect life. Such an attitude only gnaws at one’s soul, turning him into a hypocrite. Socially, such an attitude condemns and kills people.

The crucifixion of Jesus illustrates this righteousness of the Law. In the name of “keeping the Law”, the Jews crucified our Lord who was without sin. Under the pretext of “being on God’s side,” they murdered the Son of God. This is the righteousness of the Law.

Such a righteousness repeats itself in history. It is seen even today. We see this in people who want to be perfectionists, in hypocrites who adorn themselves, in people who blatantly criticize, judge, and murder others.

We see this righteousness of the Law at work under diverse pretexts—in the pursuit of just causes of “setting history straight,” “fighting sexual discrimination”, “eradicating violence”, “fighting corruption”, “preventing hereditary succession of wealth”, and “upholding justice and equity.”

Of course, it is necessary to adequately control wrong behavior and promote justice and uprightness, as the Law did to the Israelites. But a ruthless application of the Law and attempting to kill others with it will not create a happy world. It will only result in people killing each other and everyone’s death.

If we are living in a society where even just a minor blunder on SNS incites pages and pages of criticism and condemnation, we are not living in a happy world. It may appear to bea justice-seeking society, but, underneath, there is only fury and murderous intent.

Paul wanted his people to know about God’s righteousness, not the Law’s righteousness. God’s righteousness comes from a righteousness given to us through Jesus Christ, despite our sins and weaknesses.

Man cannot keep the Law with his own strength. Knowing this, God sent Jesus Christ, His Only Son, to bear the punishment for us and to save us from the punishment of sin. God’s righteousness comes from believing this. In other words, it is grace. It is not what I have accomplished, but what God has freely given us.

God’s righteousness is grace. Therefore, it is sacrifice, forgiveness, love, and acceptance. It is to accept others despite their weaknesses, and to forgivedespite the fact we are sinners.

When forgiveness is restored, a society has hope. These days, the term “genuine apology” is used a lot. But this word may be used as another instrument of judgement. When people demand a “genuine apology”, it often means to kneel before them, that is, complete surrender. It means that they will blatantly expose a sin or a wrongdoing. Only then will they consider forgiveness.

However, forgiveness lies elsewhere. It starts from Christ’s cross. It must start from a realization that sings,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t must then move to a forgiving phase where one thinks, ‘Therefore, I do not condemn you!’

This was the truth that Paul so desperately wanted to deliver to his people out of his love for them. This is the true way to happiness and true wisdom. Tomorrow we celebrate Korea’s 102nd Liberation Day. What did our fathers of faith so desperately want? True freedom. That was what they desired.

That freedom didn’t just arrive after the Republic of Korea got its name. A free democracy was not the perfect guarantor of that freedom, either. Only when every Korean reaches the truth, forgiving and accepting one another and uniting in love, will this nation become a truly free land fit for living.

Even when he knew that he would be persecuted and killed, Paul wanted his people to know the truth and be saved. One hundred and two years ago, our ancestors of faith also rose up and tried to save this nation, crying “Long live the Republic of Korea!” Today, God is seeking such men of faith. God is looking for Christians like Paul who are determined to save the souls of their fellowKoreans in their walk of life, risking even their lives to show them the true way t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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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 1 ~ 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하며,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다짐합니다. >

오늘 본문 말씀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바울 서신 중 가장 긴 서신이자 교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루터, 칼뱅 등 수많은 신학자들이 로마서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고, 주석하기를 원했던 말씀으로 손꼽힙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에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마서 15장 25절을 보면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다.’ 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즉 로마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이전에 기록된 책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방문이 57~58년 정도로 추정되기 때문에 로마서가 작성된 연대를 대략 56~57년 정도로 추측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함께 공부하신 분들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지도가 생각이 나실 듯합니다. 못 보신 분들이 계실 테니 잠시 보시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서 다소, 더베, 골로새, 에베소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곳 소아시아 지역에서 약 3년 동안 머물면서 바울이 전도 활동을 펼칩니다. 그리고는 에베소를 떠나기 직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고린도전서를 쓰고 이동합니다. 드로아를 거쳐 배를 타고 빌립보에 갑니다. 이어서 데살로니가를 통해 아덴으로 가게 되고, 마침내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고린도에서 약 3개월을 머물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로마서를 쓰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고린도에서 3개월을 머문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는데, 배를 타지 않고 온 방향대로 돌아가는 일정을 택합니다. 데살로니가, 빌립보를 통과한 후 다시 드로아에 옵니다. 이어서 앗소라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밀레도에 도착한 후에 두로와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일정이었습니다.
바울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예루살렘으로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합당하다면 가겠다는 하나의 가능성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작성할 때에는 상황이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확실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져갈 헌금과 함께 바울이 직접 방문하도록 권유했던 게 아닐까 짐작됩니다. 무엇보다 바울 스스로가 심경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예루살렘 행을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했을까요?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 에베소 장로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때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사도행전 20:22)

이어서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사도행전 20:23~25)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유언의 말을 남깁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방문이 위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바울은 많은 사람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면 안 된다는 조언을 계속해서 받습니다.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두로에 도착했을 때에 7일간 머물렀는데, 제자들이 바울에게 권면을 합니다. 그 내용을 사도행전 21장 4절이 전해 줍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사도행전 21:4)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두로에서 또다시 배를 타고 가이사랴에 도착했는데, 아가보라는 한 예언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꽁꽁 묶고는 말을 합니다. “이 띠의 주인이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바울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의 운명을 예견하듯 예언했습니다.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가이사랴의 많은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울은 결심을 꺾지 않습니다. 그가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행전 21:13)

바울은 죽음을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성령께서 박해와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끊임없이 알려 주고 계셨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 유대 민족을 향한 근심이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 행을 결단하게 했습니다. >

그렇다면 바울이 이토록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서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장인 9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서 9:1~3)

바울에게는 민족을 향한 근심이 있었습니다. 형제와 친척을 향한 큰 근심이었습니다. 로마서를 쓰면서 자신 안에 있는 민족을 향한 큰 안타까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원래 이방인을 전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며 전도 활동을 했고, 고린도에 머물면서 마게도니아 지역에서도 활발한 전도 활동을 펼쳤습니다. 바울 앞에는 로마와 스페인에 가서 복음 전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족이 있는 유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유대 민족에게 가서 무엇을 주려고 했을까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고자 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 줍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로마서 10:1)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것, 이것이 바울이 원한 한 가지였습니다. 주옥과도 같은 말씀인 로마서를 쓰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로마의 사람들에게는 전하면서 나의 민족, 우리 유대인,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전할 수 없단 말인가?’ 이와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어서 그가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0:2)

바울이 동족인 유대인을 향해 가진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바로 올바른 지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이며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과 함께 바른 지식을 가지며 살고 있다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의 지식은 바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단이었습니다.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진정한 깨달음을 가지고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리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참된 자유,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유는 유대인들과 정치적으로 결합해서 로마와 대항하거나,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싸우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유대 민족을 번성하게 해서 세계를 이끌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줄 헌금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돕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예루살렘 거민들의 병들을 고쳐 주려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원했던 이유는 자신이 깨달았던 진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어 주신 깨달음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세상이 어떻게 참다운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지고한 질문에 대한 답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귀한 보석과도 같은 진리, 이 지식을 유대인들이 누리면서 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 지혜로 민족이 구원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기 민족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귀한 지식, 참다운 지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서 10장 3절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10:3)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동족들이 범한 잘못을 진단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의’와 ‘율법의 의’를 날카롭게 비교합니다. 율법의 의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이 믿고 따르던 삶의 방식입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입니다. 즉 율법의 준수는 하나님의 백성의 당연한 의무이고 이를 통해 이 땅에 진정한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 믿음의 태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자 구원 받은 백성이 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확신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유대교의 중요한 믿음의 체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체계 안에 살던 바울이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합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온 맘을 다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의인이 없는 율법, 이 율법은 도리어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겉으로 보여 주는 모습을 통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 듯 허세를 부리고, 그것으로부터 존경을 누리는 외식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25)

이러한 자기 의, 율법의 의로는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바울이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었습니다.

< 유대인이 따른 율법의 의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분리시킬 뿐이었습니다. >

사실 바울은 율법에 충실한 자였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데 누구보다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율법을 지키고 죄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빛 가운데서 만납니다. 그리고는 뜻밖의 소리를 듣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물었을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율법을 지키던 그의 열심이 도리어 하나님을 박해하는 방향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진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던 바울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회심을 합니다.
율법의 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람 앞에서조차 온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의란 자신이 완전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서겠다는 태도입니다. 완전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정죄하며 살겠다는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옭아매고 정신을 피폐하게 하며 외식주의자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율법의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율법의 의를 잘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명분 아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의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의는 오고 오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개인의 모습에서 여전히 율법의 의가 작동합니다. 외식하며 치장하는 개인의 모습에서 율법의 의의 잔재를 보게 됩니다. 다른 이의 잘못을 드러내고 정죄하고 죽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율법의 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의 의는 여전히 작동합니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남녀의 차별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폭력을 종식시킨다는 명분, 부정축재를 근절한다는 명분, 부의 세습을 막는다는 명분, 그리고 정의와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율법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건전한 생활과 바른 삶을 독려하였듯이 정의롭고 바른 삶의 태도를 위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신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들이대면서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태도는 세상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결국은 그 안에서 모두가 죽는 양상이 되고 맙니다. SNS에 조금만 잘못된 글을 올려도 정죄의 댓글로 도배되는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분노가 있고, 살의가 존재할 뿐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해 줍니다. >

바울은 율법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민족에게 알려 주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인간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 참된 의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유일한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게 하심으로 구제해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은혜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희생으로 시작되고, 용서로부터 주어지며, 사랑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작동될 때 즉 용서가 살아날 때 이 사회에 희망이 움틉니다.
요즈음 진정한 사과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 용어조차도 잘못 사용한다면 정죄의 용어가 될 수 있음을 주의 깊게 보게 됩니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라고 하는 그 자리에서부터, “왜 나를 사랑하시는가?” 라는 물음에서부터 하나님의 의는 시작됩니다.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진리요, 복음이었습니다.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참다운 번영의 길, 복의 길이었습니다. 행복의 길이며, 참된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3·1절 102주년을 맞으며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102년 전, 만세를 부르며 우리 선조들이 원했던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니었겠습니까? 민족의 번영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분들은 이것을 위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만으로 완전한 번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의 의를 알아 용서를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그렇게 참된 진리에 이를 수 있을 때에만 이 나라는 진정 살 만한 나라, 참된 자유가 있는 나라, 번영하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의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나라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예상하면서도 동족하게 바른 지식을 전하며 민족의 살 길을 제시했던 바울처럼, 그리고 102년 전에 분연히 일어나 만세를 부르며 민족의 살 길을 찾아 나선 신앙의 선배들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민족을 살리는 길을 찾아내고 그분의 의를 세상에 전하는 주님의 귀한 전사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이 사회는 참으로 적의와 살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민족이 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서로 싸우는 상황 속에서, 이념과 이념이 대립하고 이득과 이득이 싸우는 상황 속에서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의 의? 정죄의 의? 이것을 가지고는 이 민족을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 희생을 통하여서만이 이 나라에 희망이 있고, 이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에 우리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망의 온 성도가 하나님의 의를 가득 펼쳐 내는 주님의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1년 2월 2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바울의 목숨을 건 민족사랑” (롬 10:1~4)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94, 58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롬 10:1~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2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하던 마지막 즈음에 예루살렘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합니다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에 박해와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성령께서 끊임없이 알려주셨고, ‘아가보라는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알게 하셨습니다그럼에도 바울은 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그토록 가고자 했을까요?

설교의 요약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굳이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그러나 바울에겐 민족을 향한 큰 근심과 애틋함이 있었습니다동족인 유대인들이 선민의식 속에 옳지 못한 진리를 붙드는 것에 관한 근심과 애틋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동족들이 참 진리를 깨닫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원했습니다그 진리는 자신이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은 하나님의 의와 율법의 의에 관한 구분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준수하고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거룩한 백성구원받는 백성이 된다고 믿었지만 바울은 한 가지를 더 알았습니다그건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실제로 어느 누구도 온전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도리어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기의 의’, ‘율법의 의로 누군가를 경멸하고 정죄와 외식을 보이는 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명분 아래 작동하고 있습니다바울도 말하지만 정의롭고 바른 삶의 태도를 권장하기 위하여 바르지 않은 삶의 모습들을 적절히 다스리는 것은 분명 필요합니다그러나 율법을 들이대면서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정죄하며 분노와 살의가 가득한 모습은 자기의 의율법의 의가 작동하는 옳지 못한 진리를 향한 달음질일 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켜낼 수 없고결코 행복한 세상을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알려주셨습니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신 희생이고, ‘용서이며 사랑이고 받아들임입니다부족함에도 받아들여 주는 것이고죄인임에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것과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노라는 결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용서가 살아날 때 사회는 희망이 생깁니다이것이 바로 바울이 민족을 사랑하며 꼭 전하고 싶었던 참 진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삼일절’ 102주년을 맞고 있습니다믿음의 선배들이 그토록 원했던 참된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온 백성이 용서하고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참 진리에 이를 때에만 가능합니다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알면서도 동족에게 바른 지식을 전하며 민족의 살 길을 제시한 바울과 102년 전 분연히 일어나 민족의 살길을 찾아 나선 신앙의 선배들처럼오늘 삶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그 사랑과 받아들임의 참된 하나님의 의’, 민족의 진정한 살 길을 제시하는 바울과 같은 사람을 주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나누기

1. 나라와 민족을 향한 애틋함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 되기를 고대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2. 내 안에 율법의 의가 작동한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입니까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데 사용되고자오늘 내가 은혜를

구하며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마무리기도

    사랑의 하나님바울이 죽음을 각오하며 전했던 참 진리를 우리로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율법의 의’, 정죄의 코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부터 흐르는 사랑과 용서의 태도로 대한민국을 행복한 나라와 민족으로 만드는 일에 우리가 사용되게 하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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