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바울이 본 인간의 영적 실상

로마서 7: 21~25

김경진 목사

2022.10.23

<사람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과 타인을 평가합니다.>

 

큰 단지로 구성된 아파트에 사는 한 사람이 자기 위에도, 아래에도, 또 옆에도 사람이 사는 현실이 많이 답답했는지 창문을 열고 크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자 저 옆 동네에서 한 어린아이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그러자 다른 동에서 어떤 여인이 말합니다. “나는 성형인이다!” 예, 웃자고 만든 이야기 같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살기가 너무 바쁜지라 이렇게 고상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 즉 함께 사업하거나, 관계를 맺거나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 사람은 누구지? 누구일까?’ 하는 질문은 우리 안에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죠.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만남을 이어 가면서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말투나 행동 양식을 보면서 나름대로 평가합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식별해 냅니다. 기억력 한편에서 ‘그 사람은 누구누구다.’라고 인식하기도 합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어느 병원에서 일하는, 소망교회 집사, 혹은 이제 고3 아들을 둔 엄마, 또는 참 예의바른 사람 누구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제가 속초에 가게 되면 들리는 식당이 있습니다. 태원석 목사님의 소개로 함께 가게 된 식당인데,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후로 종종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태원석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예약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목사님이 교회를 사임하게 되셔서 제가 직접 전화를 걸었더니 저를 기억하지는 못하셨습니다. 제가 식당에 가고 나서야 알아보셨던 것 같아요. “아, 그전에 오신 분하고는 같이 안 오셨네요.” 그러시길래 “예, 이제는 같이 오기가 힘들어서 제가 전화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말씀드렸더니 단골 명단에 적어 두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전화번호를 적으시고 그 앞에다가 무엇인가 입력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입력하세요?” 물었더니 “제 나름대로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입력하셨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어서 “전에 같이 온 분은 어떻게 입력하셨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강남 태 실장으로 입력해 두었습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에 ‘나름대로 기억하시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누군가를 만나면 어르신들이 하시는 질문이 있었죠. 이름이 무엇이니? 부모님은 뭐하시니? 고향은 어디니? 학교는 어디 다녔니?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시며 그 사람을 파악하는 일들이 있어 왔습니다. 자녀들이 배우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제일 먼저 던지는 질문들이 있지 않습니까? 직업은 뭔지,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고향은 어딘지, 형제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 이런 질문을 통해서 사람을 파악해 가고 나름대로 판단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질문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아요. 제가 가끔 저의 아이들에게 친구들에 대해서 물으면 싫어하더라고요. 도리어 요즘 젊은이들은 MBTI를 가지고 서로를 알아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이미 구세대가 되셨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MBTI는 외향형(E)-내향형(I), 감각형(S)-직관형(N), 사고형(T)-감정형(F), 판단형(J)-인식형(P)에 따라 16가지 성격을 조합해서 성격 유형을 판단하는 검사입니다. 예를 들어서 “당신의 MBTI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저는 “ISTJ예요.” 라든가 “ENTP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에 따라서 사람을 대우하는 경우를 보게 되죠. 그만큼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많이 지혜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성격 유형보다는 혈액형으로 분류를 했습니다. A, B, O, AB형으로 분류해서 나름대로 판단했던 것에 비하면 요즘 사람들은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때로 소유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다른 사람에게 인식되는 나는 참 나인가? 아니면 내 안에 숨어진 내가 진짜 나인가? 과연 MBTI로 식별되는 성격 유형이 정말 나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박노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분의 시 중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앞부분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남는가

박노해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부자들에게 돈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성직자에게 직위를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지식인에게 명성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빼버리고 남은 그것이 바로 그다 … (중략)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

 

깊이 생각하게 되는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그게 바로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에서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는 경우입니다. 일종의 착시 현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가 가진 것을 놓치고 잃어버리게 되면 나 자신도 잃어버린 셈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허무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묻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모든 것을 다 거는 부모가 있습니다. 물론 아이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신이 될 때 안타까운 불행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유학을 가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빈 둥지에 슬픔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내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착각입니다. 가진 것과 나라는 존재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큰 부를 이루었다고 한번 상상해 봅시다. 우리는 그 돈을 가진 어떤 사람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편안한 삶을 살 뿐입니다. 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돈은 돈이고 나는 나입니다. 그런데 돈과 나를 하나로 묶어서 마치 돈이 있는 내가 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 돈으로 교만해지기도 하고, 돈이 없어지면 의기소침해지기도 합니다. 실패한 인간처럼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와 돈은 따로 구별해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작은 직함 혹은 지식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명예가 생기고 지식이 많아지는 것은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나는 아닙니다.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할 필요도,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잃었다가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을 넘어선 자리에 도리어 진정한 내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진 것이 나라는 착시로부터 벗어나 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리어 가진 것을 상대화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자, 그렇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뺀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명언이죠. 이 문장은 그가 만든 게 아니라고 합니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기둥에 이미 적혀 있는 글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갔던 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가 발견한 자신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주술가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사람들을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명연설가와 같은 대단한 직함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도 정작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죠. 결국 안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서 그 마음이 확실해집니다. ‘정말 아무도 모르는구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구나. 이것을 아는 내가 진짜 지혜구나. 아무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 자체가 참 지혜구나.’라는 지식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를 빼고 나면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재산, 건강, 직업, 학벌, 자녀, 전부 빼고 나면 과연 지금처럼 살 수 있습니까? 그 후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소유가 아닌 영적 실체로서의 자신을 진단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보여 주신 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유대인이자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 가말리에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난 대단한 종교인이자 지식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빠져나간 자신의 모습,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직시합니다. 그가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7:24a)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롬 7:24a, 새번역)

 

왜 이렇게 고백했을까요? 그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거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1~23)

 

그는 자신 안의 꿈틀거리는 두 힘을 봅니다. 하나는 악을 사랑하고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선을 향하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이었습니다. 이 두 마음이 서로 싸우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면서 죄의 법이 선하게 살려는 자신을 얽어매는 본래적 실체를 목도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절망이었습니다. 악함으로 치닫는 모습이 결국 사망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절규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b)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가들이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고 또 수없이 고발해 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여러 문학 작품,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에서 인간의 뒤틀리고 부조리한 모습을 고발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규정할 수 없는 더러운 혼합물과 같은 존재, 두껍고 끈적끈적한 존재입니다. 하나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선이 드러나고 착한 사람 같지만, 또 다른 때에는 악이 등장하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본회퍼 목사님 같은 훌륭한 분도 옥중에서 ‘Wer bin Ich?’ ‘나는 누구인가?’라는 글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그 글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과연 나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지를 고민합니다. 그가 글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적습니다.

 

..

나는 누구인가? 이편인가 저편인가?

오늘은 이편이었다 내일이면 저편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다…

내가 누구이든, 그분은 아시리라.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월, 나치의 수용소 감방 안에서 Dietrich Bonhoeffer-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도리어 악이 우리 자신을 사로잡는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것이 바울이 본 자신의 영적 실체였습니다. 악과 사망에 옭아매여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인간! 그러므로 그가 소리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바울은 영적 실체로서의 자신을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발견합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a)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망의 현실을 타개할 희망을 봅니다. 모순덩어리이고, 온통 끈적끈적하고, 선과 악이 섞인 혼합물과 같은 우리를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사실, 바로 이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첨예하게 구분합니다. 율법은 스스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에게서 그런 능력을 보지 못합니다. 인간이야말로 모순덩어리이며 선과 악이 혼재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선해질 수 없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일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롬 8:31~33a)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도, 구별해 낼 능력도 없는 우리. 그런 모순덩어리 같은 더러운 우리를 하나님이 안아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입니다. 내 재산이 아닙니다. 내 헌금도 아닙니다. 내 헌신이나 봉사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더럽고 냄새나는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앞으로 더 나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내 앞의, 내 옆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멋진 차를 타고 다니는, 대단한 명함을 들고 다니는 사람입니까? 사실 그도 나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악과 선이 공존하며 끊임없이 벗어나길 원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그래서 이해할 수 없고, 경박하지만 때로는 멋지고 대단합니다.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 그루센카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까라마조프가의 아버지 표도르와 맏아들 드미트리를 동시에 유혹하면서 부자 노인의 첩으로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자신도 누군가에게 양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막 사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양파 한 뿌리’는 어려운 사람에게 줄 줄 아는 인간, 참 어떻게 표현해야 하겠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글에서 이런 사람도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암시합니다. 조시마 장로 같은 존경받는 사람도 양파 한 뿌리를 전해서 하늘나라에 왔다는 꿈을 그 여자가 꾸게 됩니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잘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이 경멸스럽고 악한 사람입니까? 사실은 나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 안에 있는, 양파 한 뿌리를 줄 수 있는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나 우리 모두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서로 사랑하는 일 뿐입니다.

The Spiritual Reality of Man According to Paul

 

 

Romans 7:21-25

 

A man living in a large apartment complex was so frustrated with life that he shouted out the window, “Who am I?” A little boy answered, “I am a man of nature!” Then a woman quietly whispered, “I am woman of plastic surgery.” It’s a story made up for laughs, but itgives us food for thought.

 

Who am I? This is a deep-seated question in the hearts of all men.

 

Some may say they are simply too busy for such philosophical questions. If you are one of them, bear in mind that almost everyone you meet, including business partners and people you come across daily, harbor this question in their hearts.

 

We wonder, ‘Who is that person?’ as we hand out and receive business cards and make introductions. We constantly assess people based on how they talk and act. Through such observations we judge and remember the people we meet.

 

For example, there is the man who works for a conglomerate, the woman who works at a hospital, the deacon of Somang Church, the mom whose son is taking the CSAT this year, the polite person, and so on. This is how we identify and perceive people.

 

Whenever I go to Sokcho, I go to this restaurant. Pastor Tae Won-seok first took me there, but I keep going because it became one of my favorite spots. When Pastor Tae was still with us, he used to make reservations for me. But after he left Somang Church, I had to make reservations myself. So I did and visited the place. The owner, recognizing me, said, “Hello. You didn’t come with your usual company.” I told him, “You’re right. I may come without him in the future, so please remember me, too.” He answered, “Of course. You’ll be on our loyal customers list!” I asked out of curiosity, “How do you remember all your customers, even without knowing their names?” He explained that he had his own way of remembering people. When he saved their phone numbers, he gave each person his/her own nickname. So I asked, “What is the nickname you gave for my friend?” He answered, “Oh, he is Director Tae of Gangnam.” I didn’t ask what my nickname was.

 

In the past, Koreans asked a series of questions when they first met someone. What is your name? What do your parents do? Where are you from? Which school did you graduate? They would identify and remember a person through these questions.

 

When your adult child comes to you saying he/she has found someone to marry, you start bombarding him/her with questions. The first string of questions usually consists of what he/she does, what his/her parents do, where his/her hometown is, where he/she lives, and how many siblings he/she has.

 

However, young people these days don’t like being asked these questions. The younger generation these days ask each other their personality type according to the Myers-Briggs Type Indicator (MBTI). If you don’t know what this is, you probably belong to the older generation. The MBTIis a personality test that classifies people into 16 personality types, based on the individual’s preferred quality in each of these four categories: introversion (I) or extraversion (E), sensing (S) or intuition (N), thinking (T) or feeling (F), judging (J) or perceiving (P). For example, your type could be ISTJ or ENTP.Young people like using this tool in understanding people and making friends.

 

WhileKoreans used to ask blood typesto get to know someone better in the past, these days the MBTI has become an immensely popular psychological tool in getting to know and identifying other people.

 

I have circumvented a bit. I have talked about how weconstantly identify, analyze, and judge other peopleas we build relationships.

 

Then let’s go back to our original question. Who am I? The person that others think I am—is this the real me? If not, then who am I? Does the title or position on my name card define me? Does my MBTI type tell me who I am? Which of these is the real me?

 

Let me quote fromone of Park No-hae’spoems, “What is left?”:

 

Strip a politician of his power—what is left?

Strip a rich man of his money—what is left?

Strip a minister of his title—what is left?

Strip an intellectual of his honor—what is left?

What remains is that person.

(Park, “What is left?”)

 

This is part of another poem written by Park:

 

Therefore, again,

Take my soul away from me.

Take love away from me.

Take justice away from me.

If I am still alive after all this,

If I continue to live as if nothing had happened,

Then, who am I?

Who am I?

(Park, “So do not perish”)

 

Park’s poems make us think.

 

Who am I? People delude themselves: they think their possessions define them. Taking stock of their possessions, they think what they have is who they are. Finally when all their possessions are gone, the futility of life hits them. Theyare faced with the ultimate question: “Who am I?”

 

People do not ask themselves this question because they have the delusion that what they have is who they are.

 

When a mangains a high social status—he has a chauffeur, he has a great title, and people greet him everywhere—he thinks he has become someone important. He thinks highly of himself, believes he is right about everything, and thinks he is someone special. But after retirement and losing his title, he finally realizes he is nobody. It was his title that gave him friends and his power that attracted people. When everything is gone, he finally asks, “Who am I?”

 

Some parents dedicate their whole lives to raising their kids. Their children become their all. There are moms and dads who think the sole meaning of their lifeis their kids. But when their kids go off to study abroad or get married, they are left with an empty nest. Finally they ask, “Who am I?”

 

Yes, this is how we are. We think what we have is who we are, but this is only a delusion.We must make the clear distinction between what we have and who we are.

 

Let’s say a man made a lot of money and became extremely rich. It just means he has a lot of money. That’s all.His life is more comfortable than that of other people. That’s all. Having a lot of money does not change who you are. Money is just money. You are you. But if you become proud with money, or become depressed or feel like a failure without it, then you are mistaken. Money does not define who you are. Take away what you have, and you will find your true self.

 

Some people brag about a small title as they hand out their name cards. Some boast about the little knowledge they have. Some find security in popularity.We may, of course, feel a certain amount of happiness and gratitude from such things, but they can never define who we are. There is no need to be disappointed or depressed even if we don’t have such things; neither must we become proud because of them.

 

The truth is, the more we have the harder it is to find our true self. The more we have the harder we must try to discover who we are—because our possessions delude us.Therefore, when we have more, we must become more humble and try harder to relativize what we have in order to accurately judge ourselves.

 

Then, if we subtract all that I have from myself, who am I? How can I define my existence? Socrates once said, “Know thyself.” In fact, Socrates did not coin this maxim himself. It is a statement inscribed on one of the temples in Delphi. But Socrates, as a philosopher, earnestlyprobed into this maxim. Finally, he reached this conclusion about who he is: “I know that I know nothing.”

 

Socrates is said to have questioned himself if he really was the wisest person, after hearing from an oracle that he was the wisest man on earth. Since he could not find the answer, he asked other great men, but they, too, had no answers, which made him conclude nobody knew anything. Furthermore, he realized that what made him the wisest person on earth was that he recognized his own ignorance.

 

If everything is taken away from me, then what is left of me? Would I be able to live as I am living now if my wealth, health, job, educational background, children, parents, and everything else that I possess are taken away from me? What is left of me after subtracting all these?

 

Will I finally confess that I know nothing? Will I finally come to know that I am nothing?

 

In today’s Scripture God reveals to Paul who he is. That is, Paul comes to see himself for who he really is. Who is Paul? He was a Jew with a Roman citizenship, an esteemed religious leader taught by the great Gamaliel, and a great intellectual. But in today’s passage Paul views himself after stripping himself of all these credentials. He finally sees his spiritual reality. He says:

 

“What a wretched man I am!” (Romans 7:24a NIV)

 

“On, what a miserable person I am!” (Romans 7:24a NLT)

 

Why does Paul say he is a miserable person?

 

He also states:

 

“So I find this law at work: Although I want to do good, evil is right there with me. For in my inner being I delight in God’s law; but I see another law at work in me,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a prisoner of the law of sin at work within me.” (Romans 7:21-23 NIV)

 

Who am I? I see two forces working within me. The one loves evil and wants to do evil, and the other pursues good and wants to do good; these two forces are waging war within myself. I want to do good, but the law of sin and evil binds me.

 

This is the reason for Paul’s despair. He despairs because the evil imprisoning him will eventually drive him to death.

 

Therefore Paul cries: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that is subject to death?” (Romans 7:24b NIV)

 

Countless novelists, poets, and philosophers understood this reality of man and discussed it in their works.

 

For example, Dostoevsky exposedthe distorted and absurd reality of man in his novels, including “Crime and Punishment” and “The Brothers Karamazov.” To him, man was an impure, thick, and stickymixture that was impossible to define with a single concept.

 

Even Dietrich Bonhoeffer, the great German theologian and pastor whom we know well, asked who he was in his cell. In his poem “Wer bin Ich?” (“Who am I?”),written in June 1944 while he was imprisoned by the Nazis, he asks if he is the confident and resolute man that others say he is, or if he is a contemptable, fretting weakling. Yet in the last few lines of this poem he writes:

 

Who am I? This or the other?

Am I one person today and another tomorrow?

Am I both at once? […]

Who am I? These lonely questions mock me.

Whoever I am, You know me, I am yours, O God.

(Bonhoeffer, “Who am I?”)

 

Who am I? Good and evil coexist in me, and my spiritual reality is that I am a prisoner of evil. This is who I am. I am eventually headed for death.

 

This was the spiritual reality that Paul saw in man.

 

Paul understood that man cannot possibly break free from the snares of death on his own. Thus Paul cries:

 

“What a wretched man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that is subject to death?”(Romans 7:24)

 

Yet Paul finds a ray of hope. He confesses in the next verse:

 

“Thanks be to God, who delivers m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Romans 7:25a)

 

Paul discovers that in Christ there is a power that can deliver him from his despair.

 

Furthermore, he realizes that God loves man—the very man who is a complete paradox, a thick and dirty mixture of good and evil. This is the gospel of Paul.

 

Paul draws a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 law and the gospel. The law is man trying to gain his own salvation. It represents a paradigm that believes man can deliver himself. But Paul realizes that man does not have that ability. Man is a complete paradox, a mixture of good and evil. In fact, in him evil overpowers good. Man cannot become good on his own; nor can he approach God on his own.

 

The reason God sent Jesus Christ to earth was to show His extravagant love for man. Through Jesus Christ God opened up the only way to salvation. Therefore, Paul confesses:

 

“What, then, shall we say in response to these things?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He who did not spare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how will he not also, along with him, graciously give us all things? Who will bring any charge against those whom God has chosen?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 (Romans 8:31-33a, 38-39)

 

God’s love enfolds us completely. We do not even have the ability to discern good from evil; the two constantly fight against each other within us; and we can never stand before God by choosing good on our own. Yet God embraces and loves us—we who are impure and full of self-contradictions.

 

This is the gospel and the grace of God. Therefore, we sing,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Yes, God saved a wretch like me. He delivered me. It is not our wealth, our offerings, our dedication, or our service that saves us. We are saved because of His love that embraces even foul-smelling wretches like us.

 

Dear brothers and sisters, let us take a step further and ask this question: Who is the person next to me, or the person in front of me? Is he/she defined by the luxury car or title he/she has?

 

No. That person is also a person like me.

 

He/she is a person, like me, who desperatelywants to break free from self-contradiction, that is, a state where good and evil coexist within—but he/she is unable to. Accordingly, he/she is sometimes incomprehensible, sometimes shallow, and sometimes great. At times he/she is a sinful man/woman, but at other times good.

 

There is a female character called Grushenka in “The Brothers Karamazov.” A mistress of a rich man, she tries to seduce both Fyodor Karamazov and his son Dimitri. But she says she once gave an onion to an old beggar. Although she lived a life of sin, she knew how to share an onion with a person in need. How should we describe such a woman? Was she good or evil?

 

Dostoevsky insinuates that even such a person can enter the kingdom of God. I think he is right. Indeed, this is the gospel.

 

Dear brothers and sisters, is the person next to you a contemptuous, evil, and vile person? Even if he/she is, you must be able to see in him/her a heart that gives an onion to someone in need. You must also be able to seeour Lord Jesus who came to redeem that sinful person. This is why our Lord always stressed that we love one another. To love one another. That is the only thing we can do.

btn_switch

로마서 7: 21~25

21~25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람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과 타인을 평가합니다.>

 

큰 단지로 구성된 아파트에 사는 한 사람이 자기 위에도, 아래에도, 또 옆에도 사람이 사는 현실이 많이 답답했는지 창문을 열고 크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자 저 옆 동네에서 한 어린아이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그러자 다른 동에서 어떤 여인이 말합니다. “나는 성형인이다!” 예, 웃자고 만든 이야기 같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살기가 너무 바쁜지라 이렇게 고상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 즉 함께 사업하거나, 관계를 맺거나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 사람은 누구지? 누구일까?’ 하는 질문은 우리 안에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죠.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만남을 이어 가면서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말투나 행동 양식을 보면서 나름대로 평가합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식별해 냅니다. 기억력 한편에서 ‘그 사람은 누구누구다.’라고 인식하기도 합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어느 병원에서 일하는, 소망교회 집사, 혹은 이제 고3 아들을 둔 엄마, 또는 참 예의바른 사람 누구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제가 속초에 가게 되면 들리는 식당이 있습니다. 태원석 목사님의 소개로 함께 가게 된 식당인데,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후로 종종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태원석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예약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목사님이 교회를 사임하게 되셔서 제가 직접 전화를 걸었더니 저를 기억하지는 못하셨습니다. 제가 식당에 가고 나서야 알아보셨던 것 같아요. “아, 그전에 오신 분하고는 같이 안 오셨네요.” 그러시길래 “예, 이제는 같이 오기가 힘들어서 제가 전화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말씀드렸더니 단골 명단에 적어 두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전화번호를 적으시고 그 앞에다가 무엇인가 입력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입력하세요?” 물었더니 “제 나름대로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입력하셨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어서 “전에 같이 온 분은 어떻게 입력하셨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강남 태 실장으로 입력해 두었습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에 ‘나름대로 기억하시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누군가를 만나면 어르신들이 하시는 질문이 있었죠. 이름이 무엇이니? 부모님은 뭐하시니? 고향은 어디니? 학교는 어디 다녔니?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시며 그 사람을 파악하는 일들이 있어 왔습니다. 자녀들이 배우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제일 먼저 던지는 질문들이 있지 않습니까? 직업은 뭔지,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고향은 어딘지, 형제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 이런 질문을 통해서 사람을 파악해 가고 나름대로 판단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질문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아요. 제가 가끔 저의 아이들에게 친구들에 대해서 물으면 싫어하더라고요. 도리어 요즘 젊은이들은 MBTI를 가지고 서로를 알아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이미 구세대가 되셨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MBTI는 외향형(E)-내향형(I), 감각형(S)-직관형(N), 사고형(T)-감정형(F), 판단형(J)-인식형(P)에 따라 16가지 성격을 조합해서 성격 유형을 판단하는 검사입니다. 예를 들어서 “당신의 MBTI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저는 “ISTJ예요.” 라든가 “ENTP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에 따라서 사람을 대우하는 경우를 보게 되죠. 그만큼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많이 지혜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성격 유형보다는 혈액형으로 분류를 했습니다. A, B, O, AB형으로 분류해서 나름대로 판단했던 것에 비하면 요즘 사람들은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때로 소유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다른 사람에게 인식되는 나는 참 나인가? 아니면 내 안에 숨어진 내가 진짜 나인가? 과연 MBTI로 식별되는 성격 유형이 정말 나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박노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분의 시 중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앞부분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남는가

박노해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부자들에게 돈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성직자에게 직위를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지식인에게 명성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빼버리고 남은 그것이 바로 그다 … (중략)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

 

깊이 생각하게 되는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그게 바로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에서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는 경우입니다. 일종의 착시 현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가 가진 것을 놓치고 잃어버리게 되면 나 자신도 잃어버린 셈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허무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묻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모든 것을 다 거는 부모가 있습니다. 물론 아이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신이 될 때 안타까운 불행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유학을 가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빈 둥지에 슬픔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내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착각입니다. 가진 것과 나라는 존재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큰 부를 이루었다고 한번 상상해 봅시다. 우리는 그 돈을 가진 어떤 사람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편안한 삶을 살 뿐입니다. 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돈은 돈이고 나는 나입니다. 그런데 돈과 나를 하나로 묶어서 마치 돈이 있는 내가 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 돈으로 교만해지기도 하고, 돈이 없어지면 의기소침해지기도 합니다. 실패한 인간처럼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와 돈은 따로 구별해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작은 직함 혹은 지식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명예가 생기고 지식이 많아지는 것은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나는 아닙니다.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할 필요도,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잃었다가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을 넘어선 자리에 도리어 진정한 내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진 것이 나라는 착시로부터 벗어나 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리어 가진 것을 상대화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자, 그렇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뺀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명언이죠. 이 문장은 그가 만든 게 아니라고 합니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기둥에 이미 적혀 있는 글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갔던 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가 발견한 자신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주술가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사람들을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명연설가와 같은 대단한 직함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도 정작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죠. 결국 안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서 그 마음이 확실해집니다. ‘정말 아무도 모르는구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구나. 이것을 아는 내가 진짜 지혜구나. 아무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 자체가 참 지혜구나.’라는 지식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를 빼고 나면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재산, 건강, 직업, 학벌, 자녀, 전부 빼고 나면 과연 지금처럼 살 수 있습니까? 그 후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소유가 아닌 영적 실체로서의 자신을 진단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보여 주신 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유대인이자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 가말리에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난 대단한 종교인이자 지식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빠져나간 자신의 모습,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직시합니다. 그가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7:24a)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롬 7:24a, 새번역)

 

왜 이렇게 고백했을까요? 그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거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1~23)

 

그는 자신 안의 꿈틀거리는 두 힘을 봅니다. 하나는 악을 사랑하고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선을 향하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이었습니다. 이 두 마음이 서로 싸우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면서 죄의 법이 선하게 살려는 자신을 얽어매는 본래적 실체를 목도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절망이었습니다. 악함으로 치닫는 모습이 결국 사망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절규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b)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가들이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고 또 수없이 고발해 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여러 문학 작품,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에서 인간의 뒤틀리고 부조리한 모습을 고발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규정할 수 없는 더러운 혼합물과 같은 존재, 두껍고 끈적끈적한 존재입니다. 하나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선이 드러나고 착한 사람 같지만, 또 다른 때에는 악이 등장하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본회퍼 목사님 같은 훌륭한 분도 옥중에서 ‘Wer bin Ich?’ ‘나는 누구인가?’라는 글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그 글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과연 나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지를 고민합니다. 그가 글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적습니다.

 

..

나는 누구인가? 이편인가 저편인가?

오늘은 이편이었다 내일이면 저편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다…

내가 누구이든, 그분은 아시리라.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월, 나치의 수용소 감방 안에서 Dietrich Bonhoeffer-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도리어 악이 우리 자신을 사로잡는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것이 바울이 본 자신의 영적 실체였습니다. 악과 사망에 옭아매여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인간! 그러므로 그가 소리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바울은 영적 실체로서의 자신을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발견합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a)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망의 현실을 타개할 희망을 봅니다. 모순덩어리이고, 온통 끈적끈적하고, 선과 악이 섞인 혼합물과 같은 우리를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사실, 바로 이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첨예하게 구분합니다. 율법은 스스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에게서 그런 능력을 보지 못합니다. 인간이야말로 모순덩어리이며 선과 악이 혼재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선해질 수 없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일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롬 8:31~33a)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도, 구별해 낼 능력도 없는 우리. 그런 모순덩어리 같은 더러운 우리를 하나님이 안아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입니다. 내 재산이 아닙니다. 내 헌금도 아닙니다. 내 헌신이나 봉사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더럽고 냄새나는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앞으로 더 나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내 앞의, 내 옆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멋진 차를 타고 다니는, 대단한 명함을 들고 다니는 사람입니까? 사실 그도 나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악과 선이 공존하며 끊임없이 벗어나길 원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그래서 이해할 수 없고, 경박하지만 때로는 멋지고 대단합니다.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 그루센카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까라마조프가의 아버지 표도르와 맏아들 드미트리를 동시에 유혹하면서 부자 노인의 첩으로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자신도 누군가에게 양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막 사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양파 한 뿌리’는 어려운 사람에게 줄 줄 아는 인간, 참 어떻게 표현해야 하겠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글에서 이런 사람도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암시합니다. 조시마 장로 같은 존경받는 사람도 양파 한 뿌리를 전해서 하늘나라에 왔다는 꿈을 그 여자가 꾸게 됩니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잘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이 경멸스럽고 악한 사람입니까? 사실은 나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 안에 있는, 양파 한 뿌리를 줄 수 있는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나 우리 모두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서로 사랑하는 일 뿐입니다.

2022년 10월 2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바울이 본 인간의 영적실상” (롬 7:21-25)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⑵ 찬송가 310, 54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롬 7:21-25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0월 23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질문입니다보통 사람들은 내가 가진 것이 바로 나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가진 것을 빼어야 그곳에 바로 내가 있습니다많은 것을 가졌다면 더 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상대화하는 노력을 해야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모든 것을 빼고 나면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면 내겐 정작 무엇이 남을까요?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나는 누구인가?”를 보고 있습니다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유대인이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대단한 종교인이자 지식인이었습니다그런데 지금 그는 이 모든 것이 빠져 나간 자신의 모습영적 상태를 보면서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상반부왜 바울은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라고 말합니까바울은 악을 사랑하고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과 선을 향하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이 서로 싸우고 있는 현실그리고 죄의 법과 악이 선하게 살려는 자신을 사로잡는 모습을 보노라”(롬 7:21-23)고 말합니다그러면서 바울은 절규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 7:24 하반부바울이 본 인간의 영적 실체는 스스로 악과 사망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의 인간이었습니다.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도 옥중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나는 과연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가?”를 고민하며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이편인가저편인가오늘은 이편이었다내일이면 저편인가동시에 둘 다인가나는 누구인가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다내가 누구이든그분은 아시리라하나님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나치의 수용소 감방에서디트리히 본 회퍼)

바울은 또 다시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상반부바울은 인간은 모순 덩어리이며선과 악이 혼재되어 그 안에서 악이 선을 사로잡는 형국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현실을 타개한 힘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복음이 무엇입니까바로 나 같은 사람을 살리신모순 덩어리인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그 사람도 바로 나와 똑같은 사람입니다선과 악의 공존으로 신음하고 끊임없이 그곳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스스로 힘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옆의 사람을 볼 때 이처럼 오염된 인간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다면 서로 사랑하는 일 뿐입니다이는 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나누기

1.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고 나면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재산건강학벌자녀부모 이런 것들을 모두 빼도 나는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요?

2. 나 자신그리고 옆 사람을 볼 때 오염된 인간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복음의 빚진 자로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하겠습니까?

마무리기도

사랑의 하나님우리는 늘 실패하는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를 보내어 받아주시고 품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합니다나를 용납하신 그 사랑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 앞에 순종으로 화답할 믿음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