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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물에 잠길 때

여호수아 3: 14 ~ 17

김경진 목사

2019.05.19

< 하나님은 우리가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

장례식장에서 자주 부르는 찬양 중에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구절의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가 606장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이란 찬송인데요. 1절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믿음만 가지고 가겠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신 찬송일 것입니다. 예전 찬송가에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라고 첫 구절이 시작됩니다. 아마 따라 부를 수 있는 분들도 꽤 많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가능한 이 찬송을 부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특히 장례식에서 이 찬송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찬송가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요단강’이란 표현 때문입니다. 원래 이 찬송의 원곡이 영어로 되어 있는데, 영어 찬송가에는 ‘요단강’이란 표현이 없습니다. 실제 원어 가사를 번역하면 ‘아름다운 강가’로 풀이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생명의 강’을 의미합니다. 즉 요단강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본 찬송이 들어와 번역할 때, 이 강을 요단강으로 잘못 번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교인들 중에는 요단강을 건너면 천국을 가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찬송가 오역으로 발생된 일입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을 ‘세상을 떠난다’, ‘죽는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잘못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후 번역된 장례와 관련된 찬송가들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489장 찬송의 가사도 다음과 같습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 예루살렘 새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이 찬송가의 본래 표현도 ‘저 요단강’이 아니라 ‘저 생명의 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명의 강’으로 불러야 할 가사를 ‘요단강’으로 잘못 불러온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봐도, 요단강을 건너는 것과 죽음이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출애굽 역사 속에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은 매우 진취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기 위해 강을 건너는 그 지점에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즉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약속의 땅을 얻는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약속의 땅을 죽어서 갈 천국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과 죽음이 연관성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구약 성경이 지시하는 관점과는 부합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앞서 말한 것처럼 찬송가의 오역으로 인해 발생된 결과라고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한국 교회 정황에서는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에 관한 중요한 관점을 놓쳐 왔습니다. 단순히 죽음 이후의 땅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는다’는 굉장히 중요한 관점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는 내세적인 방향으로는 많은 관심을 가졌으나, 현세적이며 진취적인 관점을 잃고 말았습니다. 진취적으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을 쟁취하는 관점이 약해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언급하는 가나안 땅은 실재하는 땅입니다. 가나안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가나안과 헷, 아모리,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풍요로운 땅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생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셔서 바로 그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 땅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요, 요단강 역시 이 세상에 있는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통에서 이끌어내시며, 그들을 새로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은 바로 이곳, 이 땅에 현존합니다.

< 주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청년들을 기대합니다. >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저는 청년주일을 맞이하며 청년들에게 이런 바람을 가져 봅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담대히 요단강을 건너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너라는 말씀은, 본래 의미대로 ‘약속의 땅을 밟아 나가는 진취적인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고, 그 땅을 밟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과 함께 그 땅을 밟아 나가는 청년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포르투갈에 로까(ROCA)라고 하는 곶이 있습니다. 툭 튀어나온 땅의 맨 마지막 지역입니다. 이 까보 다 로까(CABO DA ROCA)라고 하는 곶은 서경으로 9도 30분에 위치하는데, 서구 유럽에서는 가장 최서단에 있는 땅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큰 비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온데 아 테라 세 아카바 이오마르 코메사(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ça)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where the land ends and the sea begins).”
이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여기저기 살 곳을 헤매고 다니다 어느 날 그 언덕에 다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로까’라는 그 언덕에서 이 비석문을 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이 문장이 어떻게 보일까요? 어떤 이들에게 이 문장은 ‘아, 여기가 끝이구나. 더 이상 땅이 없구나. 이제는 바다구나.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여기가 끝이다.’라고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아, 여기구나! 드디어 바다가 시작되는구나! 얼마나 설레는가! 큰 바다가 우리를 부르는구나! 저 바다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비문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 끝났구나. 더 이상 없구나.’ 좌절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 바다가 시작되는구나! 설렌다! 저 바다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라고 호기심을 안고, 기쁨과 기대감을 갖고 바라보는, 바다 너머 있는 땅을 향해 나아가기를 갈구하는 진취적인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와 같은 사람은 그곳에서부터 바다를 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는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고 이어졌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

저는 청년들이 바다 앞에서 좌절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바다는 한편으로는 죽음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고통일 수도 있으며, 많은 장애일 수도, 혼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바다 앞에 서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때 바다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여기가 끝이라고 말하지 않고, 바다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꿈꾸는 청년들이면 좋겠습니다.
진취적인 청년들은 그 앞에서 배를 만들 것입니다. 배를 바다에 띄워 노를 젓고 또 다른 땅,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아마 진취적인 세상 사람들, 적극적인 젊은이들은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가능하면 큰 배를 만들려고 할 것이고, 가장 좋은 배를 만들려고 할 것이며, 가장 안전한 배를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노를 만들고, 키를 만들어 항해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노를 저으며 항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와 동일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바다 앞에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도 하나님이 주신 땅이요, 이 세상도 하나님의 축복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다 앞에 서 있습니다. 동시에 약속의 땅이 바다 건너에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배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큰 배를 만드는 데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큰 배를 만들거나 노를 저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바다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을 따르길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차이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차이를, 성경은 두 번이나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 바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바다 앞에서 고통스럽게 절규하고 있을 때, 애굽에서는 군대들이 쳐들어오고 있을 때, 넘실거리는 홍해 앞에서 그들은 좌절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애굽기 14:21)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 하나님께서 목표를 삼아주신 방향으로 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다를 넘는 방식인 것입니다.

<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입니다. >

저는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할 때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른 땅’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마른 땅으로 건넜다’라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조금은 의심이 생기곤 했습니다. 사실 물이 갈라졌다는 말씀조차 믿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믿기 어려웠던 것은 ‘마른 땅’입니다. 물이 갈라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갈라진다 할지라도 마른 땅일 수는 없다. 아마 그 땅은 진흙 밭이었을 것이다. 진흙탕이 맞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늘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오래전 상영된 <십계>라는 영화를 보면, 그 장면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도 감독은 진흙탕으로 갈라진 홍해를 묘사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의 대행진, 그 땅은 마른 땅이 아니었습니다. 진흙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건넜다고 증언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마다 ‘진흙이 훨씬 더 현실감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본문을 바꿀 수 있다면, 이 부분을 가장 먼저 바꿀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세기를 읽다가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천지 창조 과정에서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셨으며,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 일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셨고, 바다의 물과 강의 물을 나누셨으며, 땅 아래의 물과 땅 위의 물을 나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그곳에 경계를 세우시고, 물들이 섞이지 않도록 경계를 유지하고 계시는 모습을 창조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물의 경계를 나누시고 붙잡고 계신 이유는,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이 그 안에서 참 생명을 누리고 번성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물의 경계를 한 번에 흩으신 사건이 창세기에 소개됩니다. 창세기 7장 이후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당시 하나님은 붙잡고 계셨던 물의 모든 경계를 한 번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창세기의 홍수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40주야 동안 비만 내렸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깊은 샘들이 터졌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붙잡아 두신 물의 경계를 일순간 놓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읽어가면서 ‘아, 하나님은 물의 경계를 잡고 계시는 분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홍해 사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물로 가득 차 있던 홍해를 둘로 가르셨습니다. 이 또한 물의 경계를 나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물의 모든 경계를 나누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들이 양쪽으로 비켜섰을 것입니다. 땅 아래 있던 수분조차 물의 경계를 따라 옮겨졌음이 분명합니다. 이로써 땅바닥에는 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들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가라고 하셨으니, 수분이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인 까닭입니다. 마른 땅을 건너갔다는 것이 정말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할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

하나님은 우리 앞에 놓인 넘치는 물, 홍해의 물을 가르고 마른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4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 뒤 오늘 본문의 말씀, 요단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다시 소개됩니다. 이곳에서도 매우 중심이 되는 단어는 ‘마른 땅’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그 지역에 있던 민족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여호수아 5장 1절은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여호수아 5:1)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랐던 건, 요단강을 건넜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건, 그들이 ‘마른 땅’을 밟고 그 길을 건너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라버린 땅, 바로 그 땅을 밟고 왔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단강을 홍해와 비교한다면, 정말 작은 사건으로 보일 것입니다. 요단강은 그다지 크지 않은 강입니다. 얼마든지 수량이 적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불어나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는 물의 양이 상당했고 넘치기까지 했습니다. 위기로 다가올 수 있을 만큼, 인명 피해를 낼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양의 물이 넘실거렸고, 세찬 물살이 위협해 왔습니다. 예레미야 12장 5절을 보면, 그와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 12:5)

요단강이 넘칠 때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요단강이 넘치는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넘을 때, ‘물이 넘치는 시기’에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40년을 기다려 왔는데, 안전하게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물이 마를 즈음 넘으면 좋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이 세차게 넘치고 있었고, 많은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을 그때, 하나님은 강을 건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는 물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의 세기도 하나님께는 상관없으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로 작정하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다 분명히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이 많을 때, 세찬 물이 내려오고 있을 때, 험한 물이 내려오고 있을 때, 요단강을 건너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바다와 넘치는 물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넘실거리는 물 앞에서 인생의 고뇌를 느끼기도 하고, 자신감을 잃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큰물이 흘러갈 때마다 ‘나는 과연 저 물을 건널 수 있을까? 인생의 고비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걱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넘치는 물이 흘러 내려올 때,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 듣는 신앙에서 경험하는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이, 오늘날 청년들에게 참으로 많은 도전과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 나갈 우리 청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세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머물던 시기에 태어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즉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하지 못했던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다만 귀로만 홍해 사건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선조들이 마른 땅으로 건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 그랬구나. 대단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상상으로 믿음을 가졌던 이들입니다.
바로 그들이 이제 마지막으로 요단 앞에 섭니다. 그들에게 강을 건너거나 홍해를 건넌 경험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가르시는 경험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선조로부터 전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게도 그 경험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대를 세워 서게 하시고, 제사장들을 세워 법궤를 앞세우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물의 양은 대단했고 세차게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법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속에 잠겼을 때도 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발이 물가에 들어가고 조금 있자 서서히 물이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강이 ‘마른 땅’이 되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과 다음세대가 ‘듣는 신앙’을 넘어 ‘경험하는 신앙’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사건을 듣고 배웠다면, 이제는 요단강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신앙의 깊은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다음세대에 이와 같은 신앙의 경험이 전수되기를 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청년들이 지금까지 선조들과 어른들이 지켜온 신앙의 경험을 배우고, 경험하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어른들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났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홍해 사건과 요단강 사건이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홍해 사건은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땅이 드러난 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길을 건넌 사건입니다. 즉 마른 땅을 확인한 후 건넌 사건입니다. 반면 요단강 사건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을 그치게 하시고 마른 땅을 드러내신 다음 요단강을 건너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고, 그것도 거세게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다행인 건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서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믿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들의 발이 물에 잠겼을 때 드디어 물아 멈췄습니다. 그리고 마른 땅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보다 진보된 신앙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선조들은 마른 땅이 열린 것을 보고 지나갔다면, 그들의 후손은 아직 그 땅이 열린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진보된 믿음으로 그 강을 건너길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보다 더 깊은 믿음, 보다 더 모험적인 신앙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과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이 앞서고 회중들은 뒤에 있었습니다. 즉 회중들로서는 마른 땅이 열린 것을 본 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은 ‘이제는 제사장이 앞서는 것도 아니고, 길이 먼저 열리는 것도 아니고, 넘실거리는 물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발을 내밀어 보는 것,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넘실거리는 파도 앞에 발을 내디딜 때, 어쩌면 무릎까지 차오를 때까지도 물은 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하나님이 물을 그치게 하시고, 물의 장벽을 만드시며, 물의 경계를 세우시고, 마른 땅을 드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약속하신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땅에서 우리에게 주길 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들과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요단강을 담대히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멋지게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죽는 요단강이 아니라 사는 요단강,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멋진 축복의 땅으로 나아가는 그 요단강을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청년들 모두가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약속의 땅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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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3: 14 ~ 17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 하나님은 우리가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

장례식장에서 자주 부르는 찬양 중에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구절의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가 606장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이란 찬송인데요. 1절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믿음만 가지고 가겠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신 찬송일 것입니다. 예전 찬송가에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라고 첫 구절이 시작됩니다. 아마 따라 부를 수 있는 분들도 꽤 많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가능한 이 찬송을 부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특히 장례식에서 이 찬송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찬송가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요단강’이란 표현 때문입니다. 원래 이 찬송의 원곡이 영어로 되어 있는데, 영어 찬송가에는 ‘요단강’이란 표현이 없습니다. 실제 원어 가사를 번역하면 ‘아름다운 강가’로 풀이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생명의 강’을 의미합니다. 즉 요단강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본 찬송이 들어와 번역할 때, 이 강을 요단강으로 잘못 번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교인들 중에는 요단강을 건너면 천국을 가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찬송가 오역으로 발생된 일입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을 ‘세상을 떠난다’, ‘죽는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잘못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후 번역된 장례와 관련된 찬송가들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489장 찬송의 가사도 다음과 같습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 예루살렘 새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이 찬송가의 본래 표현도 ‘저 요단강’이 아니라 ‘저 생명의 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명의 강’으로 불러야 할 가사를 ‘요단강’으로 잘못 불러온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봐도, 요단강을 건너는 것과 죽음이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출애굽 역사 속에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은 매우 진취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기 위해 강을 건너는 그 지점에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즉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약속의 땅을 얻는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약속의 땅을 죽어서 갈 천국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과 죽음이 연관성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구약 성경이 지시하는 관점과는 부합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앞서 말한 것처럼 찬송가의 오역으로 인해 발생된 결과라고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한국 교회 정황에서는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에 관한 중요한 관점을 놓쳐 왔습니다. 단순히 죽음 이후의 땅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는다’는 굉장히 중요한 관점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는 내세적인 방향으로는 많은 관심을 가졌으나, 현세적이며 진취적인 관점을 잃고 말았습니다. 진취적으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을 쟁취하는 관점이 약해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언급하는 가나안 땅은 실재하는 땅입니다. 가나안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가나안과 헷, 아모리,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풍요로운 땅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생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셔서 바로 그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 땅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요, 요단강 역시 이 세상에 있는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통에서 이끌어내시며, 그들을 새로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은 바로 이곳, 이 땅에 현존합니다.

< 주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청년들을 기대합니다. >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저는 청년주일을 맞이하며 청년들에게 이런 바람을 가져 봅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담대히 요단강을 건너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너라는 말씀은, 본래 의미대로 ‘약속의 땅을 밟아 나가는 진취적인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고, 그 땅을 밟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과 함께 그 땅을 밟아 나가는 청년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포르투갈에 로까(ROCA)라고 하는 곶이 있습니다. 툭 튀어나온 땅의 맨 마지막 지역입니다. 이 까보 다 로까(CABO DA ROCA)라고 하는 곶은 서경으로 9도 30분에 위치하는데, 서구 유럽에서는 가장 최서단에 있는 땅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큰 비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온데 아 테라 세 아카바 이오마르 코메사(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ça)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where the land ends and the sea begins).”
이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여기저기 살 곳을 헤매고 다니다 어느 날 그 언덕에 다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로까’라는 그 언덕에서 이 비석문을 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이 문장이 어떻게 보일까요? 어떤 이들에게 이 문장은 ‘아, 여기가 끝이구나. 더 이상 땅이 없구나. 이제는 바다구나.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여기가 끝이다.’라고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아, 여기구나! 드디어 바다가 시작되는구나! 얼마나 설레는가! 큰 바다가 우리를 부르는구나! 저 바다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비문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 끝났구나. 더 이상 없구나.’ 좌절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 바다가 시작되는구나! 설렌다! 저 바다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라고 호기심을 안고, 기쁨과 기대감을 갖고 바라보는, 바다 너머 있는 땅을 향해 나아가기를 갈구하는 진취적인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와 같은 사람은 그곳에서부터 바다를 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는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고 이어졌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

저는 청년들이 바다 앞에서 좌절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바다는 한편으로는 죽음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고통일 수도 있으며, 많은 장애일 수도, 혼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바다 앞에 서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때 바다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여기가 끝이라고 말하지 않고, 바다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꿈꾸는 청년들이면 좋겠습니다.
진취적인 청년들은 그 앞에서 배를 만들 것입니다. 배를 바다에 띄워 노를 젓고 또 다른 땅,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아마 진취적인 세상 사람들, 적극적인 젊은이들은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가능하면 큰 배를 만들려고 할 것이고, 가장 좋은 배를 만들려고 할 것이며, 가장 안전한 배를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노를 만들고, 키를 만들어 항해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노를 저으며 항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와 동일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바다 앞에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도 하나님이 주신 땅이요, 이 세상도 하나님의 축복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다 앞에 서 있습니다. 동시에 약속의 땅이 바다 건너에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배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큰 배를 만드는 데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큰 배를 만들거나 노를 저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바다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을 따르길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차이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차이를, 성경은 두 번이나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 바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바다 앞에서 고통스럽게 절규하고 있을 때, 애굽에서는 군대들이 쳐들어오고 있을 때, 넘실거리는 홍해 앞에서 그들은 좌절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애굽기 14:21)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 하나님께서 목표를 삼아주신 방향으로 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다를 넘는 방식인 것입니다.

<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입니다. >

저는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할 때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른 땅’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마른 땅으로 건넜다’라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조금은 의심이 생기곤 했습니다. 사실 물이 갈라졌다는 말씀조차 믿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믿기 어려웠던 것은 ‘마른 땅’입니다. 물이 갈라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갈라진다 할지라도 마른 땅일 수는 없다. 아마 그 땅은 진흙 밭이었을 것이다. 진흙탕이 맞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늘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오래전 상영된 <십계>라는 영화를 보면, 그 장면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도 감독은 진흙탕으로 갈라진 홍해를 묘사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의 대행진, 그 땅은 마른 땅이 아니었습니다. 진흙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건넜다고 증언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마다 ‘진흙이 훨씬 더 현실감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본문을 바꿀 수 있다면, 이 부분을 가장 먼저 바꿀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세기를 읽다가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천지 창조 과정에서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셨으며,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 일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셨고, 바다의 물과 강의 물을 나누셨으며, 땅 아래의 물과 땅 위의 물을 나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그곳에 경계를 세우시고, 물들이 섞이지 않도록 경계를 유지하고 계시는 모습을 창조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물의 경계를 나누시고 붙잡고 계신 이유는,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이 그 안에서 참 생명을 누리고 번성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물의 경계를 한 번에 흩으신 사건이 창세기에 소개됩니다. 창세기 7장 이후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당시 하나님은 붙잡고 계셨던 물의 모든 경계를 한 번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창세기의 홍수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40주야 동안 비만 내렸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깊은 샘들이 터졌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붙잡아 두신 물의 경계를 일순간 놓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읽어가면서 ‘아, 하나님은 물의 경계를 잡고 계시는 분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홍해 사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물로 가득 차 있던 홍해를 둘로 가르셨습니다. 이 또한 물의 경계를 나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물의 모든 경계를 나누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들이 양쪽으로 비켜섰을 것입니다. 땅 아래 있던 수분조차 물의 경계를 따라 옮겨졌음이 분명합니다. 이로써 땅바닥에는 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들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가라고 하셨으니, 수분이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인 까닭입니다. 마른 땅을 건너갔다는 것이 정말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할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

하나님은 우리 앞에 놓인 넘치는 물, 홍해의 물을 가르고 마른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4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 뒤 오늘 본문의 말씀, 요단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다시 소개됩니다. 이곳에서도 매우 중심이 되는 단어는 ‘마른 땅’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그 지역에 있던 민족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여호수아 5장 1절은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여호수아 5:1)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랐던 건, 요단강을 건넜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건, 그들이 ‘마른 땅’을 밟고 그 길을 건너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라버린 땅, 바로 그 땅을 밟고 왔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단강을 홍해와 비교한다면, 정말 작은 사건으로 보일 것입니다. 요단강은 그다지 크지 않은 강입니다. 얼마든지 수량이 적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불어나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는 물의 양이 상당했고 넘치기까지 했습니다. 위기로 다가올 수 있을 만큼, 인명 피해를 낼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양의 물이 넘실거렸고, 세찬 물살이 위협해 왔습니다. 예레미야 12장 5절을 보면, 그와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 12:5)

요단강이 넘칠 때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요단강이 넘치는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넘을 때, ‘물이 넘치는 시기’에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40년을 기다려 왔는데, 안전하게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물이 마를 즈음 넘으면 좋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이 세차게 넘치고 있었고, 많은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을 그때, 하나님은 강을 건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는 물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의 세기도 하나님께는 상관없으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로 작정하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다 분명히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이 많을 때, 세찬 물이 내려오고 있을 때, 험한 물이 내려오고 있을 때, 요단강을 건너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바다와 넘치는 물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넘실거리는 물 앞에서 인생의 고뇌를 느끼기도 하고, 자신감을 잃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큰물이 흘러갈 때마다 ‘나는 과연 저 물을 건널 수 있을까? 인생의 고비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걱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넘치는 물이 흘러 내려올 때,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 듣는 신앙에서 경험하는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이, 오늘날 청년들에게 참으로 많은 도전과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 나갈 우리 청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세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머물던 시기에 태어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즉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하지 못했던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다만 귀로만 홍해 사건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선조들이 마른 땅으로 건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 그랬구나. 대단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상상으로 믿음을 가졌던 이들입니다.
바로 그들이 이제 마지막으로 요단 앞에 섭니다. 그들에게 강을 건너거나 홍해를 건넌 경험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가르시는 경험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선조로부터 전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게도 그 경험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대를 세워 서게 하시고, 제사장들을 세워 법궤를 앞세우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물의 양은 대단했고 세차게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법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속에 잠겼을 때도 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발이 물가에 들어가고 조금 있자 서서히 물이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강이 ‘마른 땅’이 되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과 다음세대가 ‘듣는 신앙’을 넘어 ‘경험하는 신앙’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사건을 듣고 배웠다면, 이제는 요단강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신앙의 깊은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다음세대에 이와 같은 신앙의 경험이 전수되기를 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청년들이 지금까지 선조들과 어른들이 지켜온 신앙의 경험을 배우고, 경험하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어른들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났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홍해 사건과 요단강 사건이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홍해 사건은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땅이 드러난 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길을 건넌 사건입니다. 즉 마른 땅을 확인한 후 건넌 사건입니다. 반면 요단강 사건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을 그치게 하시고 마른 땅을 드러내신 다음 요단강을 건너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고, 그것도 거세게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다행인 건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서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믿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들의 발이 물에 잠겼을 때 드디어 물아 멈췄습니다. 그리고 마른 땅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보다 진보된 신앙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선조들은 마른 땅이 열린 것을 보고 지나갔다면, 그들의 후손은 아직 그 땅이 열린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진보된 믿음으로 그 강을 건너길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보다 더 깊은 믿음, 보다 더 모험적인 신앙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과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이 앞서고 회중들은 뒤에 있었습니다. 즉 회중들로서는 마른 땅이 열린 것을 본 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은 ‘이제는 제사장이 앞서는 것도 아니고, 길이 먼저 열리는 것도 아니고, 넘실거리는 물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발을 내밀어 보는 것,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넘실거리는 파도 앞에 발을 내디딜 때, 어쩌면 무릎까지 차오를 때까지도 물은 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하나님이 물을 그치게 하시고, 물의 장벽을 만드시며, 물의 경계를 세우시고, 마른 땅을 드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약속하신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땅에서 우리에게 주길 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들과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요단강을 담대히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멋지게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죽는 요단강이 아니라 사는 요단강,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멋진 축복의 땅으로 나아가는 그 요단강을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청년들 모두가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약속의 땅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2019년 5월 1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발이 물에 잠길 때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62장, 54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수3:14-1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5월 1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성경에는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과 ‘죽는다.’는 말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 속에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강을 건너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요, 요단강 역시 이 세상에 있는 땅입니다.

설교의 요약

청년주일을 맞으면서 청년들이 요단강을 많이 건넜으면 좋겠습니다. 본래 의미대로 “약속의 땅을 밟아 나가는 진취적인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바라보고, 그 땅을 밟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그 땅을 밟아 나가는 그런 경험들이 있는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입니다.

포르투갈에 로까(CABO DA ROCA)는 서구 유럽에서 가장 최서단에 있는 땅입니다. 그곳의 비석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땅이 끝났다. 더 이상 없다.”고 좌절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청년들이 “아, 바다가 시작되는구나!”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바다 앞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그 길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우리 앞에 놓은 넘치는 물, 홍해의 물을 가르시고 마른 땅으로 인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다시 한 번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기 때문이 아니라, 마른 땅을 밟고 그 길을 건너왔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수5:1).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넘을 때 바로 물이 넘치는 시기에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물의 많음과 적음이 관련 없으시며,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작정하신다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홍해의 사건과 요단강의 사건이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홍해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 홍해의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요단강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든 물들을 다 그치게 하시고, 요단강을 이스라엘이 건너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믿음을 가지고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을 때, 물은 멈췄습니다. 그리고 마른 땅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조들은 홍해의 마른 땅이 열린 것을 보고 지나갔다면, 그들의 후손들은 제사장을 따라 요단강이 아직 열리지는 않았지만 믿음으로 그 강을 건넜습니다. 보다 더 깊은 믿음, 보다 더 모험적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 그리고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약속된 땅을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죽는 요단강이 아니라 사는 요단강,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멋진 축복의 땅을 밟아내는 그 요단강을 건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누기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내가 경험한 신앙의 기적이 있다면,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범람하는 강물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언약궤를 멘 제사장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강물 속으로 담대하게 들어갔습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까?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담대히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약속의 땅을 밟으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대대로 이어지길 소원합니다. 젊은이들이 활기찬 신앙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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