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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 사이
<예수님이 공동체와 교회를 세워 가는 제자들에게 바라는 자세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저는 “선한 사람이 됩시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제자가 될 것인가’, ‘어떻게 주님을 따를 것인가’를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는 것도 중요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주님의 귀한 일들을 감당해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랑과 용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자기 성찰이 있는 선한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이어서 ‘어떤 제자가 될 것인가’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주님을 따라가야 할까요? 그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으로 ‘포용력이 있는 제자가 되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의 전체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자리는 예수님이 한창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던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많은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파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두 번이나 반복적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바다를 꾸짖고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놀라운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았던 제자들은 아마 엄청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겠죠. 그리고 이 땅에서 무엇인가 큰 것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예수님은 수난 예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난 이야기가 제자들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단체나 조직이든지 무엇인가 잘되고 있을 때, 항상 두 가지 문제가 도출되곤 합니다. 첫 번째로는 ‘누가 큰가’ 하는 질문이 일어납니다. 조직이 잘되어 온 데에 누구의 공로가 더 큰가 하는 질문이 대두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께 더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는 제자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도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큰가에 대해 토론하고 다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무엇인가 잘되고 있을 때 드러나는 또 다른 현상은 ‘집단의 우월 의식’, 곧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예를 들면 가지고 한 집단이 가지고 있는 것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것을 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들이 누리던 권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커져 가는 집단에서 대개 드러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그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했던 제자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그는 바로 직전에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던 제자입니다.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변화하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모세,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았던 요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앞으로 일어날 일에 기대가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서 보니, 남아 있던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 한 명을 제대로 고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요한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귀신도 내쫓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어쩌면 나머지 제자들을 하찮게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자 중에서 누가 큰가’ 하는 변론이 일어났을 법도 합니다. 그런 요한이 이제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눅 9:49, 새번역)
이 말을 정리하면 “귀신을 내쫓는 일은 우리만 할 수 있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남용하며 귀신을 쫓고 있어서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즉, 라이센스가 없는 사람들, 제자도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마구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는 요한에게는 속으로 우쭐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잘했다’라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을 훈련하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까? 지혜로운 말씀으로 가르치고 예수님의 능력을 여러 모양으로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고,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는 권한과 능력도 주며 파송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의 어려운 훈련 과정을 지도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당연히 제자들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눅 9:50)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이 예수님을 오래 따라다니고 훈련을 받은 제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요한에게 당황스러운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열심히 훈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만 귀신 내쫓는 권한을 주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조금은 놀랍기도 한 이 말씀은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역사 속에서 어떤 훌륭한 선생님이나 지도자 뒤에 분파적인 성향을 가진 제자가 있는 것을 보곤 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의 사상은 매우 훌륭하고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만든 유교는 많은 분파와 끊임없는 논쟁 및 비판을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칼뱅의 신학과 사상은 폭도 넓고 포용적인 부분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칼뱅의 제자들로 알려진 칼뱅주의로 넘어가면 분파주의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어떤 선구자나 좋은 선생님들 밑에 있는 제자들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요한의 경우도 그런 경향을 보여 줍니다. ‘우리 제자들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마음이 그의 내면 가운데 가득합니다. 요한의 말 속에 이런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49b)
여기서 중요하게 볼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라는 단어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므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 편’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우리 제자들의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 집단을 중심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그룹에 속하지 않은 다른 이들을 허용할 마음이 없습니다. 배타적인 태도입니다. 우리 편인지, 우리에게 속해 있는지가 그들에게는 중요한 물음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고 있다는 진정한 의미보다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있는지가 그들에게 더 중요한 관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배제와 분파주의를 경계하고 포용의 마음을 가지기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귀신을 내쫓는 모든 이들에게 권력과 능력을 열어 놓으십니다. 그들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들만의 권한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포용의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분파적인 태도와 배타적인 모습은 우리가 기독교의 모습 속에서도 종종 발견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리라고 믿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내가 맞다고 주장하며 계속 분파와 교파가 나뉩니다. 때로는 나와 같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합니다.
기독교 안에는 여러 종파가 있죠. 개신교만 하더라도 장로교 외에도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만 보더라도 하나의 교단이 아닙니다. 예수교 장로회 또는 기독교 장로회 등 여러 이름의 장로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서 이 장로교 교단의 팻말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200여 개의 교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분파와 분열이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서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배타적인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은 실제적인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성도님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요즘 유튜브에서 어느 단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이 단체가 역사도 오랜 단체이고 훌륭한 단체라고 알았습니다. 이 단체를 계속 지원해도 될까요? 유튜브에서 어떤 이가 그곳 지원을 끊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 중에 이런저런 주장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분들이 꽤 많이 있어 보입니다.
어느 방송이 어떤 문제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지원을 끊어야 한다, 어느 신학대학이 어떤 이슈에 단호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 학교에 지원을 끊어야 한다고 강하게 연설하는 영상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단체는 혼합주의적인 신앙 노선을 가지고 있으니, 그 단체에 소속된 교회에 다닌다면 어서 속히 나오라고 선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매우 강한 분파주의적 성향입니다. 유튜브나 매체에서 사람들을 선동하죠.
이런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하나 좋은 단체나 좋은 교회도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옳고,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만 바른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전형적인 분파주의, 배타주의입니다. 이와 같은 배타주의 노선을 갖게 되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모을 수 있고 응집력과 강한 동력을 얻을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러한 배타주의는 결국 사회와 교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이것은 교회뿐 아니라 어느 영역이나 단체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신앙을 돕고, 함께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목회자로서 우리 성도님들이 그러한 목소리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배제해야 하는지, 포용해야 하는지는 목적어의 차이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일부 맞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잘못하는 점이 없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잘못한 것을 그냥 방관하거나 무조건 다 포용해서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우리는 포용해야 하고,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타협할 수 없을까요? 타협하거나 포용해서는 안 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포용과 배제를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을 찾기 위해서 오늘의 본문을 조금 더 깊이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제가 오래전부터 정반대의 예수님 말씀 하나가 생각나서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말씀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두 곳에 거의 똑같이 등장하는 이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 11:23; 마 12:30)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것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하는 것이라고 강한 비판을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 요한에게 하신 본문에 나오는 말씀과 분명히 반대되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봅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여기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다’는 것이 금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이 문장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모두 다 너희를 반대하는 자는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전혀 다른 내용의 말씀을 하시죠. 단호합니다. 배제의 말씀이 있습니다. 앞서 요한에게 하신 말씀은 포용하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배제의 말씀입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우리는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그 긴장을 해소하며 동시에 반드시 구별해야 할 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는 “나를 반대하는 자”(눅 11:23)라는 말씀을 하시죠. 그런데 또 다른 경우에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눅 9:50)라는 단어 표현을 쓰셨습니다. 두 문장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사용된 ‘대명사’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분명하게 배제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 ‘너희를 따르지 않는 자’라고 해서 모두 다 너희를 반대하는 자라고 생각하지는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배제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지만 ‘너희’, 제자의 그룹을 따르지 않는 것은 다양성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우리 편이 아니고, 모두 이단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조금 다르다고 모두 적그리스도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이단이요,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예배와 직제, 교회 운영이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모두 이단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와 조금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우리가 반대하는 신앙의 실천을 찬성한다고 모두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겉모습은 다양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구별하며 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론’과 ‘교회론’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론’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예수 소망, 예수 구원….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이와 다르게 주장하는 이들을 신앙적으로 포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론’으로 넘어가면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교회가 있고,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존중받아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교회들이 있고, 존재해 왔습니다. 동방정교회,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도, 성결교회 등 다양하게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다릅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우리가 보기에 일부 잘못된 신앙을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교회는 오류를 극복하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정화되어 갑니다.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교회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교회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도 존재합니다. 왕정이 있는 곳에서도 존재합니다. 심지어 이슬람, 힌두교,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가 국교로 있는 나라에서도 교회는 존재합니다. 때로 여건이 좋지 못해서 교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그곳에도 존재합니다. 때로는 오류가, 때로는 잘못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존재해 갑니다.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이 땅에 수천 년을 흘러 내려오고 있습니다. 온전한 교회가 과연 있겠습니까? 온전한 교단이 과연 있을까요? 끊임없이 우리는 오류를 경험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부딪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독일 통일의 시작점이 되었던 교회는 사회주의 안에 동독 공산주의 치하에 있었던 성 니콜라이 교회라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그들은 예배를 드리며 독일 통일의 염원을 담고 주님 앞에 기도했고, 1980년대부터 기도가 시작되고 10여 년이 흐른 후에 그들에게 놀라운 독일 통일의 역사가 주어졌습니다. 민주주의 치하에서만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일성은 교회의 일치와 하나 됨입니다. 예수님 가까이서 예수님의 훈련을 받고 귀신을 내쫓는 제자도 필요하겠지만, 멀리서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는 또 다른 사람도 필요합니다. 정식으로 신학을 훈련받고 목사로서 사역을 감당하는 성직자도 필요하지만, 예수님 이름의 능력으로 이 세상 어딘가에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는 평신도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성장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포용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깊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도 그러합니다. 나라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국론이 분열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이편과 저편을 나눕니다. 분열, 배타주의입니다. 이럴 때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저런 말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외치는 이유는 여러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편이 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와 제자는 통합하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이해시키며, 화해시키고 서로 사랑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직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포용과 배제 사이에서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구별하며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일에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지혜로 우리 한국 교회도 바르게 세워 가는 우리 소망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Between Exclusion and Inclusion
Luke 9:49-50
Today’s passage takes place when Jesus was highly popular among the people. After starting His public ministry, Jesus chose the Twelve, preached the truth about the Kingdom of God to manypeople, and performed amazing miracles. As I explained in last week’s sermon, Jesus gave His disciples a special training, during which they saw and came to know about the Lord’s wondrous power.
The disciples twice witnessed the incredible miracle of raising the dead and saw for themselves how Jesus commanded the waves and the sea to be calm; so after this, their pride and self-esteem would have been at an all-time high.
When they were so confident about their decision to follow Jesus and filled with an expectation that they would gain something great in this world, Jesus warned themabout His coming suffering, death, and resurrection; however, such words most likely fell on deaf ears.
When things are going well for a group or an organization, two problems always arise.
First, the issue of who is great. This question has to do with who contributed more to the group’s success. Or it may be a question aboutwho is more loved and trusted by the Lord.
So we can see in the passage immediately preceding today’s text that the disciples fight among themselves about who is greater.
Second, when a group is doing well, its members tend to have a group superiority or a group selfishness.
For example, they start claiming legitimacy about what they have, or exclude others from doing similar things. In a word, they do things so as not to share their power with others.
Today’s Scripture is precisely about that.
It starts like this:
“Master,” said John, (John 9:49 NIV)
The disciple’s name was John. Just before this passage, he had seen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on the mountain along with Peter and James. How would John have felt when he saw Jesus conversing with Moses and Elijah? Probably, he would have been filled with bursting excitementabout what would come.
But when he came down the mountain with Jesus, he sawthat the other disciples who had remained below the mountain couldn’t even heal a demon-possessed child. How frustrated he would been! Furthermore, he may even have looked down on them,comparing this incapable lot with himself.
Naturally, a debateon who is greater among the disciples would have arisen.
Now this John speaks to Jesus:
“Master,” said John, “we saw someone driv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stop him, because he is not one of us.”(Luke 9:49NIV)
To summarize, John is saying that casting out demons is something only the disciplescan do, but other people were doing it abusing Jesus’ name; so the disciples stopped them from doing it.
In short, the disciples were preventing people, who were not Jesus’ disciples and thereforedid not have a “license,” from using Jesus’ name at random.
John may have felt quite superior as he spoke these words to Jesus. Possibly, he expected Jesus to commend him. How hard had Jesus trained the disciples? John, who had gone through this arduous training, thought that the disciples’ actions were only right.
Yet Jesus gave an unexpected answer:
“Do not stop him,” Jesus said, “for whoever is not against you is for you.”(Luke 9:50NIV)
This was most certainly a perplexing answer to John who had thought casting out demons in Jesus’ name was a ministry reserved only for the disciples, that is, “we” who had followed Jesus for a long time.
Although Jesus had trained His disciples very hard, He did not wantonly them to have the privilege of casting out demons. After harsh training, it seems only fair to grant the disciples authority and power; yet Jesus was open to outsiders doing the job of driving out demons in His name.
These unexpected words of Jesus are precious because they reveal Jesus’ heart of inclusion.
Oftentimes, sectarianism is observed among the disciples of great teachers. For example, while Confucious’ thoughts were admirable, Confucianism established by his disciples produceda myriad of sects, causing endless disputes and criticisms. This also applies to the case of John Calvin, the reformer. Although his theology and thoughts were, in large part, inclusive and broad, Calvinism carried on by his followers was marked by sectarianism.
This is precisely what we see in John today. He thought, ‘Only we, only the disciples, can do this work. Others shouldn’t be allowed to do it.’
This attitude is well revealed in his words:
“and we tried to stop him, because he is not one of us”(Luke 9:49bNIV)
John does not say they forbade him because he didn’t follow Jesus. Instead, he says it was because he was “not one of us.” In other words, he is not on their side. Not in their group.
The disciples saw everything from the perspective of their group. Their group was the center of it all. And it seems they had no intention of allowing outsiders to be included. This is an exclusive attitude.
However, Jesus was open to anyone who cast out demons in His name; He was also willing to give them His power and authority. So He tells John not to stop them. He is telling His disciples to stop viewing their authority as something exclusive and to have a heart of inclusion.
In fact, sectarian attitudes and exclusion are often spotted in religion. Since religion is a belief about possessing the truth, its followers sometimes feel concession is impossible on certain matters. This leads to divisions into sects and denominations. Sometimes we criticizeand judge people of other religions.
Because of this exclusion, people of this world become disappointed in religions including Christianity.
While I have spoken generally till now, let me be more specific.
A member of our church cautiously asked me, “Pastor, I recently learned on YouTube that a certain group has issues. Is it okay to continue supporting it? The YouTuber I saw was against it.”
Among influential people these days, many are unsettling the hearts of Christians with their various claims.
They insist thatsupport for a certain Christian broadcasting group must be discontinued becauseof its silence oncertain issues. They incite viewers to protest against a certain seminary for its soft stance on certain issues. They stir up Christians to leave their church if it belongs to a certain group—because that group shows syncretism.
In short, they instigate people with their strong sectarian tendencies on YouTube and in other media.
If one were to follow their arguments, not one good group would be left and no church would be fit. Only they are right; only those who think like them possess the right faith. This is typical sectarianism and exclusion. Through exclusion these people can easily gather others with similar ideas; exclusion can also be cohesive and even motivating. But it sickens society and the church. This is true not only for the church but for all areas and all groups.
As your pastor assisting and walking with you in your faith journey, I hope we at Somang Church will not be tempted by such voices.
Then you may ask, “Couldn’t their claims be true? Wouldn’t it be wrong to just sit by wrongs and to unconditionally tolerate long-standing groups and churches?”
To what extent must we exerciseinclusion and at what point must we stop compromising and tolerating?
To make the distinction between inclusion and exclusion, let’sdelve further into today’s passage.
The truth is I was once deeply confused because of something Jesus said that is completely opposite to today’s text.
Those words appear identically in Luke and in Matthew:
“Whoever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whoever does not gather with me scatters.”(Luke 11:23 NIV) (Matthew 12:30 NIV)
This was spoken by the Lord when He heard people accusing Him of driving out demons by Beelzebul.
But the above words clearly go against Jesus’ words to John in today’s Scripture.
Now let’s look at today’s text again. John says, “We tried to stop him, because he is not one of us.” But Jesus replies, “Do not stop him,for whoever is not against you is for you.”
Yet, in other places in the Bible Jesus says otherwise:“Whoever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whoever does not gather with me scatters.” It appears Jesus is saying the complete opposite.
How can we reconcile the tension between the two?
Here we must note, and distinguish between,two expressions that allow us to discern the meaning of Jesus’ two seemingly contradictory words and reconcile the tension.
In one place, Jesus uses the expression“whoever is not with me,” while in another, the expression“whoever is not with you.”Two different pronouns—me and you—are used respectively in these two expressions.
Jesus clearly excludes those who are not with me, thosewho are not with Jesus, and sees them as His opposers.
However, He tells the disciples not to consider all those who do not follow you as your opposers.
In short, we are to exclude those who do not follow Jesus. But as for those who do not follow you, your group, or the disciples, diversity must be accepted.
We can’t say someone is heretical or anti-Christ, just because he/she does not follow us, or because his/her faith is a little different from ours. Whoever does not accept Jesus as Savior or does not follow Him is heretical. We can say this is anti-Christ and against Jesus.
But justbecause a group worships differently, has a different organization, manages the church differently, has differently political views, or supports a religious practice that we oppose, this does not make it anti-Christ or heretical.
It will be helpful to view this as the difference between Christology and ecclesiology.
We cannot compromise on Christology. Only Christ saves; He alone is our hope. We cannot religiously include those who claim otherwise.
However, ecclesiology is different. There are diverse forms of churches in the world; all of them are one in Christ. Their different attributesmust be acknowledgedand churches must respect one another.
There are diverse forms of churches in the world. There is the Eastern Orthodox Church, the Catholic Church, the Anglican Church, the Lutheran Church, the Presbyterian Church, the Baptist Church, the Full Gospel Church, and so on. Their forms of worship are different, some of which, from our point of view, seem to follow a wrong faith. But upon a deeper look and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we will find that many of these seemingly wrong practices are actually understandable.
Churches exist in free democracies, in monarchies, and even in socialist andcommunist states. They even exist in countries that follow Islam, Hinduism, or Buddhism as their state religion. Sometimes churches fail to revealthemselves properly, but they have persisted for thousands of years manifesting themselves in diverse forms. It is a well-known fact that the church that ignited the German reunification was none other than St. Nicholas Church in Leipzig, East Germany, which was ruled by communism.
Jesus’ words directed at the disciples in today’s Scripture are precisely about the unity and oneness of the church. Disciples who cast out demons in the name of Jesus alongside Jesus are needed; but also those who are far from Jesus and have not been trained by Him but who cast out demons solely by His name are needed. This is how the Kingdom of God is manifested and grows.
What must we not include? And what can be, andshould be, included? I hope we will ponder these questions deeply.
This goes for the problems of this country too. Public opinion is divided, and vociferous peopleare making arguments and dividing people into groups. At such times, I hope that we at Somang Church will not be enticed or misled by such talk and claims. The reason such people voice their opinions so loudly is because they want you on their side.
But we are,first and foremost, soldiers for Christ, disciples of Jesus. As His disciples, we have a duty to make this nation come together in reconciliation and love.
In between inclusion and exclusion, we need wisdom. May we at Somang Church distinguish between what is essential and secondary and commit ourselves to building up this nation properly. Furthermore, may we build up the Korean church with this wisdom.
누가복음 9:49~50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공동체와 교회를 세워 가는 제자들에게 바라는 자세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저는 “선한 사람이 됩시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제자가 될 것인가’, ‘어떻게 주님을 따를 것인가’를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는 것도 중요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주님의 귀한 일들을 감당해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랑과 용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자기 성찰이 있는 선한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이어서 ‘어떤 제자가 될 것인가’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주님을 따라가야 할까요? 그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으로 ‘포용력이 있는 제자가 되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의 전체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자리는 예수님이 한창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던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많은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파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두 번이나 반복적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바다를 꾸짖고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놀라운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았던 제자들은 아마 엄청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겠죠. 그리고 이 땅에서 무엇인가 큰 것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예수님은 수난 예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난 이야기가 제자들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단체나 조직이든지 무엇인가 잘되고 있을 때, 항상 두 가지 문제가 도출되곤 합니다. 첫 번째로는 ‘누가 큰가’ 하는 질문이 일어납니다. 조직이 잘되어 온 데에 누구의 공로가 더 큰가 하는 질문이 대두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께 더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는 제자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도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큰가에 대해 토론하고 다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무엇인가 잘되고 있을 때 드러나는 또 다른 현상은 ‘집단의 우월 의식’, 곧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예를 들면 가지고 한 집단이 가지고 있는 것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것을 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들이 누리던 권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커져 가는 집단에서 대개 드러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그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했던 제자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그는 바로 직전에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던 제자입니다.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변화하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모세,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았던 요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앞으로 일어날 일에 기대가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서 보니, 남아 있던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 한 명을 제대로 고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요한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귀신도 내쫓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어쩌면 나머지 제자들을 하찮게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자 중에서 누가 큰가’ 하는 변론이 일어났을 법도 합니다. 그런 요한이 이제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눅 9:49, 새번역)
이 말을 정리하면 “귀신을 내쫓는 일은 우리만 할 수 있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남용하며 귀신을 쫓고 있어서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즉, 라이센스가 없는 사람들, 제자도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마구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는 요한에게는 속으로 우쭐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잘했다’라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을 훈련하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까? 지혜로운 말씀으로 가르치고 예수님의 능력을 여러 모양으로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고,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는 권한과 능력도 주며 파송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의 어려운 훈련 과정을 지도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당연히 제자들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눅 9:50)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이 예수님을 오래 따라다니고 훈련을 받은 제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요한에게 당황스러운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열심히 훈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만 귀신 내쫓는 권한을 주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조금은 놀랍기도 한 이 말씀은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역사 속에서 어떤 훌륭한 선생님이나 지도자 뒤에 분파적인 성향을 가진 제자가 있는 것을 보곤 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의 사상은 매우 훌륭하고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만든 유교는 많은 분파와 끊임없는 논쟁 및 비판을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칼뱅의 신학과 사상은 폭도 넓고 포용적인 부분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칼뱅의 제자들로 알려진 칼뱅주의로 넘어가면 분파주의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어떤 선구자나 좋은 선생님들 밑에 있는 제자들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요한의 경우도 그런 경향을 보여 줍니다. ‘우리 제자들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마음이 그의 내면 가운데 가득합니다. 요한의 말 속에 이런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49b)
여기서 중요하게 볼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라는 단어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므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 편’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우리 제자들의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 집단을 중심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그룹에 속하지 않은 다른 이들을 허용할 마음이 없습니다. 배타적인 태도입니다. 우리 편인지, 우리에게 속해 있는지가 그들에게는 중요한 물음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고 있다는 진정한 의미보다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있는지가 그들에게 더 중요한 관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배제와 분파주의를 경계하고 포용의 마음을 가지기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귀신을 내쫓는 모든 이들에게 권력과 능력을 열어 놓으십니다. 그들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들만의 권한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포용의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분파적인 태도와 배타적인 모습은 우리가 기독교의 모습 속에서도 종종 발견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리라고 믿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내가 맞다고 주장하며 계속 분파와 교파가 나뉩니다. 때로는 나와 같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합니다.
기독교 안에는 여러 종파가 있죠. 개신교만 하더라도 장로교 외에도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만 보더라도 하나의 교단이 아닙니다. 예수교 장로회 또는 기독교 장로회 등 여러 이름의 장로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서 이 장로교 교단의 팻말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200여 개의 교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분파와 분열이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서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배타적인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은 실제적인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성도님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요즘 유튜브에서 어느 단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이 단체가 역사도 오랜 단체이고 훌륭한 단체라고 알았습니다. 이 단체를 계속 지원해도 될까요? 유튜브에서 어떤 이가 그곳 지원을 끊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 중에 이런저런 주장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분들이 꽤 많이 있어 보입니다.
어느 방송이 어떤 문제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지원을 끊어야 한다, 어느 신학대학이 어떤 이슈에 단호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 학교에 지원을 끊어야 한다고 강하게 연설하는 영상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단체는 혼합주의적인 신앙 노선을 가지고 있으니, 그 단체에 소속된 교회에 다닌다면 어서 속히 나오라고 선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매우 강한 분파주의적 성향입니다. 유튜브나 매체에서 사람들을 선동하죠.
이런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하나 좋은 단체나 좋은 교회도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옳고,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만 바른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전형적인 분파주의, 배타주의입니다. 이와 같은 배타주의 노선을 갖게 되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모을 수 있고 응집력과 강한 동력을 얻을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러한 배타주의는 결국 사회와 교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이것은 교회뿐 아니라 어느 영역이나 단체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신앙을 돕고, 함께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목회자로서 우리 성도님들이 그러한 목소리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배제해야 하는지, 포용해야 하는지는 목적어의 차이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일부 맞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잘못하는 점이 없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잘못한 것을 그냥 방관하거나 무조건 다 포용해서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우리는 포용해야 하고,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타협할 수 없을까요? 타협하거나 포용해서는 안 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포용과 배제를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을 찾기 위해서 오늘의 본문을 조금 더 깊이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제가 오래전부터 정반대의 예수님 말씀 하나가 생각나서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말씀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두 곳에 거의 똑같이 등장하는 이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 11:23; 마 12:30)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것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하는 것이라고 강한 비판을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 요한에게 하신 본문에 나오는 말씀과 분명히 반대되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봅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여기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다’는 것이 금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이 문장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모두 다 너희를 반대하는 자는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전혀 다른 내용의 말씀을 하시죠. 단호합니다. 배제의 말씀이 있습니다. 앞서 요한에게 하신 말씀은 포용하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배제의 말씀입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우리는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그 긴장을 해소하며 동시에 반드시 구별해야 할 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는 “나를 반대하는 자”(눅 11:23)라는 말씀을 하시죠. 그런데 또 다른 경우에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눅 9:50)라는 단어 표현을 쓰셨습니다. 두 문장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사용된 ‘대명사’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분명하게 배제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 ‘너희를 따르지 않는 자’라고 해서 모두 다 너희를 반대하는 자라고 생각하지는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배제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지만 ‘너희’, 제자의 그룹을 따르지 않는 것은 다양성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우리 편이 아니고, 모두 이단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조금 다르다고 모두 적그리스도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이단이요,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예배와 직제, 교회 운영이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모두 이단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와 조금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우리가 반대하는 신앙의 실천을 찬성한다고 모두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겉모습은 다양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구별하며 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론’과 ‘교회론’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론’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예수 소망, 예수 구원….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이와 다르게 주장하는 이들을 신앙적으로 포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론’으로 넘어가면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교회가 있고,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존중받아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교회들이 있고, 존재해 왔습니다. 동방정교회,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도, 성결교회 등 다양하게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다릅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우리가 보기에 일부 잘못된 신앙을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교회는 오류를 극복하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정화되어 갑니다.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교회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교회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도 존재합니다. 왕정이 있는 곳에서도 존재합니다. 심지어 이슬람, 힌두교,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가 국교로 있는 나라에서도 교회는 존재합니다. 때로 여건이 좋지 못해서 교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그곳에도 존재합니다. 때로는 오류가, 때로는 잘못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존재해 갑니다.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이 땅에 수천 년을 흘러 내려오고 있습니다. 온전한 교회가 과연 있겠습니까? 온전한 교단이 과연 있을까요? 끊임없이 우리는 오류를 경험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부딪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독일 통일의 시작점이 되었던 교회는 사회주의 안에 동독 공산주의 치하에 있었던 성 니콜라이 교회라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그들은 예배를 드리며 독일 통일의 염원을 담고 주님 앞에 기도했고, 1980년대부터 기도가 시작되고 10여 년이 흐른 후에 그들에게 놀라운 독일 통일의 역사가 주어졌습니다. 민주주의 치하에서만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일성은 교회의 일치와 하나 됨입니다. 예수님 가까이서 예수님의 훈련을 받고 귀신을 내쫓는 제자도 필요하겠지만, 멀리서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는 또 다른 사람도 필요합니다. 정식으로 신학을 훈련받고 목사로서 사역을 감당하는 성직자도 필요하지만, 예수님 이름의 능력으로 이 세상 어딘가에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는 평신도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성장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포용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깊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도 그러합니다. 나라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국론이 분열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이편과 저편을 나눕니다. 분열, 배타주의입니다. 이럴 때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저런 말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외치는 이유는 여러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편이 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와 제자는 통합하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이해시키며, 화해시키고 서로 사랑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직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포용과 배제 사이에서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구별하며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일에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지혜로 우리 한국 교회도 바르게 세워 가는 우리 소망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5년 2월 9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배제와 포용 사이” (눅9:49~50)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89장, 220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일상과 신앙생활 속에서 나와 생각이 다르면 배척하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나요? 교회가 건강하게 하나 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사람을 보고,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막았다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를 칭찬하실 것이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지적하시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제자들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더 넓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속한 곳의 전통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며, 다른 방식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쉽게 이단시하거나 비판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상황에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11: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오늘 말씀과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말씀의 차이는 ‘누구를 중심으로 판단하는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인 기준을 ‘예수님 자신’으로 두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반대하는 자이지만, 단순히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은 다양성의 영역인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모두 이단이 되고, 우리의 믿음과 조금 다르다고 모두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않고 따르지 않는 것은 이단이요 적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와 조금 다른 예배를 드린다고, 다르게 교회를 운영한다고,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모두가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독론과 교회론을 구별해야 합니다. 기독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구원이며, 이는 신앙의 본질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론의 영역은 다양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초기 교회에서부터 다양한 신앙의 실천 방식이 존재했습니다.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고, 심지어 성공회, 가톨릭, 동방정교회도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의 방식도 교단과 문화에 따라 다르고, 신앙의 표현도 다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교회의 일치와 하나됨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제자들도 필요하지만, 멀리서 훈련받지 못했음에도 같은 이름으로 역사하는 이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다양성을 통해 드러나고 성장해 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포용할 것인지, 무엇을 분별해야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론이 분열되고, 각자의 입장에서만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를 나누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분열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요, 제자로서 통합과 화해, 사랑을 실천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포용과 배제 사이에서 지혜롭게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하며, 한국 사회와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는 일에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우리가 교회 안에서와 세상 속에서 배타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신앙의 본질을 지키면서 다양한 교회의 모습과 신앙 방식을 존중하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마무리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주님은 무한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셨건만, 우리는 도리어 그 주님의 이름을 듣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핍박하였음을 회개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넓고 크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오늘날 우리 사회가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이때, 우리 성도들이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세상을 바르게 세우고, 나라를 건강하게 세우는 주님의 종들, 화해와 포용의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