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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을 말씀 속에서 찾아봅니다.>
2024년 12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1년을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다사다난’이란 말을 종종 쓰곤 하는데, 이제는 그보다 ‘정신없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계엄령이란 해프닝이 벌어졌고, 나라의 대통령이 세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최근에는 대통령 직무대행인 국무총리가 탄핵되고, 광화문과 시내 곳곳에서 서로 다른 주장의 시위가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이 드는 때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편히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생각과 편히 나뉘어서 가족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마치 나라가 두 동강 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습니다. 정치권과 국가의 지도자로부터 시작된 이 위기는 경제와 국가 위상에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수많은 장성들이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국방이 과연 안전하게 유지될까 하는 우려도 생깁니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조금 전, 뉴스를 보니 전남 무안 공항에 착륙하던 비행기의 사고 소식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이 단순히 정신없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에 큰 아픔과 상처가 남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위대한 대한민국에 흠뻑 취하지 않았습니까? K-pop 문화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줄 서 있었고, 우리나라를 더 잘 알기 위해 방문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지난 6월경에 발표된 뉴스매거진, 유에스 뉴스 앤 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는 대한민국을 2023년의 전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 6위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외적으로는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전쟁 상황 가운데서 대한민국은 강력한 무기를 빠르게 생산하는 국방력의 나라로 세계적인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외부적으로는 강력한 나라가 지금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 무너짐은 외부적인 공격에 의한 것이나 강대국의 침탈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내부의 분열과 혼란, 지도력의 부재로 인한 것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정말 절감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국방력을 강력하게 하고 경제력이나 국가의 위상을 높여도, 내부가 무너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떠한 위대한 나라, 대단한 기업과 가정도 내부가 튼튼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다시 깨닫게 됩니다.
로마 제국이 그러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제국이었는데, 그 나라가 왜 그렇게 소멸하였는지 역사가들은 지금도 의문이라고 합니다. 외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왜 망했을까요? 역사가들은 내부로부터의 문제를 원인으로 봅니다. 내부가 어려워지면서 결국 로마가 쇠망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외부의 세력이 있긴 했지만, “이민족 침략자들이 숨통을 끊어 놓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저 쇠락해진 몸에 최후의 일격을 날렸을 뿐”(Adrian Keith Goldsworthy, 1969~)이라고 진단합니다.
내부에 문제가 있으면 정말 어려워집니다. 가정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외부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온 식구가 똘똘 뭉쳐 이겨 나갑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합니다. 도리어 단합하며 힘을 냅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 사이에 틈과 분열이 생기면 아무리 부유하고 대단한 가정이라 할지라도 무너집니다. 이처럼 외부는 잘 지키는데, 그만 내부를 단속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이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2024년을 마무리하면서 성경 속의 한 교회를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외부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을 지켰지만, 내부의 적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교회입니다. 바로 버가모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외부에 수많은 위협이 있던 버가모 교회는 믿음을 지키며 주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 중 특별히 버가모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를 거명하셨는데, 버가모 교회는 세 번째로 거명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지도상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했습니다. 버가모 지역은 소아시아 지역의 루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에는 아시아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우상 숭배의 본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버가모는 의료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아마 직접 가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스클레피오스(의료의 신)의 신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정신 치료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구원자라는 별명을 가진 아스클레피오스를 신으로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 있던 곳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등의 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여러 곳에 즐비하게 건설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곳의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기에, 로마의 황제를 섬기는 신전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렇듯 버가모 지역에는 다양한 우상 숭배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이 지역을 거명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계 2:13a)
주님이 수많은 우상숭배가 있는 그곳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지명하십니다. 한편으로 버가모 지역은 교회를 향한 강력한 박해가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의 총독은 칼을 차고 다니며 기독교인들을 마음껏 처단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칼에 의해 무차별 학살을 당하던 곳이 버가모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그곳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음의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계 2:12)
칼을 들고 다니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던 버가모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더 날카로운 칼날을 가지고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 말씀에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계시는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버가모 교회의 상황으로 조금 더 들어가 봅니다. 주님께서는 우선 그들에게 한 가지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2:13b)
주님은 버가모 교회 사람들에게 엄청난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선 밝히십니다. 순교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박해가 있는 버가모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있던 성도들을 칭찬하십니다. 특별히 ‘안디바’의 이름을 거명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라는 순교자를 배출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해를 견디며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던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외부의 적을 막고 신앙의 핍박을 이겨 내며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킨 교회였습니다. 이 대단한 교회가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외부로부터는 믿음을 지킨 버가모 교회였으나 그들의 내부에는 책망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칭찬하신 후에 두어 가지 책망의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우선 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 2:14a)
발람의 교훈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쉽지는 않지만, 발람이라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람은 구약성경 민수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거짓 예언자입니다. 점쟁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지역을 통과할 때, 그들을 두려워 한 모압 왕 발락이 저주를 요청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발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 2:14b)
주님은 거짓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나름의 꾀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의 재물을 먹고 행음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슨한 도덕적·종교적 잣대를 갖게 함으로써 그들이 당시 사회적 관습과 타협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민수기 25장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무는 동안에, 백성들이 모압 사람의 딸들과 음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모압 사람의 딸들이 자기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에 이스라엘 백성을 초대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에 가서 먹고, 그 신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민수기 25:1~2, 새번역)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삽니다.
이어서 지적되는 또 다른 책망이 있습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계 2:15). 이것은 앞서 나온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도 있지만, 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에서 나온 하나의 방종 같은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시니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마음껏 살게 하는 가르침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죽기까지 주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박해를 견뎌 낸 성도들이 이런 문제에 걸려 넘어질 수 있었을까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던 성도들이 어떻게 거짓 교훈에는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 질문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이와 같은 위험이 항상 존재합니다. 오늘은 이것을 조금 더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내부의 문제는 진리로 둔갑한 다른 교훈을 받아들인 데에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책망받은 문제는 어떤 과정 속에서 일어난 것일까요? 한번 상상해 봅니다. 처음에는 버가모 교회 교인들이 모두 순교할 만큼의 신앙을 지켰는데, 시간이 흐르자 변질되어 다른 교훈에 빠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이 지나 일어나는 변질의 이야기가 버가모 교회의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순교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신앙을 지키지만, 내부적으로는 니골라 당과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 성경이 전하는 맥락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버가모 교회의 잘못된 신앙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다가 잘못된 신앙에 빠지게 되었는지 찾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본문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13절을 봅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2:13b)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크라테오’(κρατέω[krateó], to seize, hold, take hold of)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굳게 잡는다’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버가모 교회 사람들은 핍박을 받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죽음을 불사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개역개정 성경에는 한 번만 등장하는데,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두 번 더 등장합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4절)와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5절)라고 번역된 문장은 헬라어 ‘크라테오’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다른 교훈들을 그들이 ‘붙잡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최근에 번역된 새한글성경은 원어를 잘 살려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자리 잡고 사는지 안다. 그곳에는 사탄의 왕좌가 있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꽉 붙잡고’ 있다.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너한테 거슬리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거기 너에게 발람의 가르침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이 바로 너에게도 똑같이 니콜라우스당 사람들의 가르침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계 2:13~15. 새한글성경)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음의 위기에 처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외부에서 예수를 믿느냐고 물을 때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죽음까지 불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순교할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서 손에 꽉 붙잡고 사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사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손에 꼭 쥐거나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사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예수를 믿느냐”라고 물을 때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사는 것일까요?
버가모 교회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꼭 붙잡고 살았지만, 그 믿음의 확신 속에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 당이 주장하는 것을 함께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꽉 붙잡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말장난에 넘어가 그들의 추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건강한 신앙을 바란다면 말씀을 꼭 붙잡아야 했을 텐데, 이단적인 사람들의 말을 따르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꽉 잡는 것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사실 그런 가르침 중에는 미시적인 실천 방안 등 일부 받아들일 만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 믿음의 어떤 부분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진리로 둔갑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붙잡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묵상하며 성찰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칼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계 2:16)
말장난하는 이들, 입으로 미혹하는 사람들,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에 속아 헛된 말을 따르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입의 검으로 그들과 승부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짓된 입술을 주님의 입으로 처단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믿으면서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들이 여기저기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참 이단과 참 기독교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이단도 기독교인도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며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단적인 이들은 예수님을 꽉 붙잡는 일을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신앙에 다른 사람을 내세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는 것이라 미혹합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 같은 것들을 꽉 붙잡으라고 하면서 이것이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나라 사랑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애국입니까? 무엇이 나라 사랑이며 정의를 이루는 것입니까? 우리는 모두 애국자죠. 우리는 다 나라를 사랑할 마음이 있습니다. 정의를 이루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이것’이 애국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애국인 것처럼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교훈을 잡는 것만이 마치 정의를 이루는 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애국과 정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가르침 같은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선교도 그렇습니다. 선교에 열정을 가진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나 깨나 선교를 생각하며 그야말로 선교를 꽉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선교의 상황을 보면 ‘이것이 선교다’라고 미혹하는 사람들도 또한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빠져서 나름대로 내가 선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포장된 것에 그만 빠지고 말아 시간과 모든 것들을 낭비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처럼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 같은 것을 선교라고 잘못 생각해 붙잡으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2024년 마지막에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가정에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어서 상담해 보면 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며 거시적인 명분 방향성은 모두 뚜렷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다릅니다. 서로 생각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아내가 원하는 사랑, 남편이 원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둘이 나누어지고 깨어집니다. 사랑이라는 명분은 똑같으나 실제 실천 방안은 다릅니다.
과연 우리는 교회와 우리나라와 가족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어떤 생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거시적이고 큰 것을 가지고 착각하지 맙시다. 자칫하면 버가모 교회와 같은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해를 맞습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면서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봅시다. 나라를 위한 마음, 가정을 위한 마음, 그리고 교회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잘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님 앞에 묻고 또 묻는 마지막 주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Lessons From the Church of Pergamum
Revelation 2:12-17
Today is the last Sunday of 2024. This year was, and continues to be, eventful.
A martial law was announced and quickly lifted; the National Assembly impeached the president, the third time in Korea’s history; even the acting president, the prime minister, was impeached this week; and demonstrations are taking place in many parts of Seoul including Gwanghwamun. We are uncertain as ever as to where this country is headed.
Korea is going through extremely unstable times. We cannot even talk about the situationopenly. Opinions are clashing andhighly divided; it is as if the country has been sliced in two. Some are even worried that Korea might collapse the way things are going at this rate.
This crisis, which started in politics and the country’s leader,is also badly hurting Korea’s economy and status. In a situation where generals are being investigated and losing authority, we cannot but be concerned about our defense and security.
How did the Republic of Korea, our country that we had been so proud of, descend to such a state?
Just until recentlyKoreans were delirious over the nation’s achievements. K-pop and K-culture swept the world. Peoplearound the globe lined up to learn Korean. Young people around the world visited Korea to see its greatness.
Last June, U.S. News & World Reportannounced Korea the 6th most powerful country in the world. (U.S., China, Russian, Germany, the U.K., Korea, France, Japan…)
This is not all.
Korea was the envy of the world because of its strong military capability to manufacture high-tech weapons quickly, as many wars and conflicts continue across the globe, including the Russia-Ukraine war.
But now it feels as if this externally strong country is collapsing at once. It is not falling due to an external attack or an invasion from a powerful nation. It is collapsing because of internal division, domestic confusion, and absence of leadership.
Many countries, who previously envied us, are now drawing the line and have stopped trusting us.
What a crisis. I know you are all talking about it these days, so I won’t elaborate further.
But one thing I must stress is this. No matter how hard a country guards its gates, how strong its defense capability is, how strongits economy is, how high its status is, or how great it is, acountry cannot be sustained if there is an internal collapse. This applies to companies and families too.
This was what happened to the Roman Empire. Rome was one of the greatest civilizations in history. Towardsits end, Rome’s population was about 57 million. Considering that the global population at the time was about 200 million, Rome’s figure is staggering.
Rome produced and stored massive amounts of food in its vast, fertile lands. As a great military power, it possessed hundreds of thousands of standing soldiers and tens of thousands of reserves. Its science, technology, architecture, and engineering skills were extremely advanced and Roman law provided the basis for modern legal systems.
Hower, even this “eternal” empire that spanned Asia, Europe, and Africa fell in 476 AD.
Rome’s demise remains a mystery. Edward Gibbon, the English historian, writes in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0-1788) that the reason of Rome’s demise is from within. Adrian Keith Goldsworthy (1969-) also writes that the Roman Empire gradually fell into demise. He analyzes that although the barbarian invaders conquered Rome, all they did was to deal a final blow to an already weak body, Rome. The problem was within.
This is also true of the family. A family unites and overcomes difficulties when it faces external problems. Its members unite and display strength. But when problems arise within the family or among its members, it easily breaks down, no matter how wealthy or great it may be.
The Lord’s message to the Pergamum church can be understood along these lines. It tells us clearly how we must live in a crisis and what we must be aware of.
Today’s passagecontains Jesus’ message to the Pergamum church, one of the seven churches He speaks to in Revelation. Geographically, the Pergamumchurch was located in the northernmost region of Asia.
Pergamum,a major city in Lycia, Asia Minor, was also the capital of Asia at the time John was writing Revelation. It was a center of idol worship.
Furthermore, many flocked to theSanctuary of Asklepios (the Greek god of healing) located in Pergamum, known as a medical hub. People worshiped Asklepioswhose nickname was“savior.”There were alsomany temples dedicated to Greek gods such as Zeus, Athena, and Dionysus. There was even a temple that worshiped the Roman Emperor. Pergamum was a center of idolatry.
This is why Jesusreferred to Pergamum as the city “where Satan has his throne”:
“I know where you live—where Satan has his throne.”(Revelation 2:13a)
In Pergamum, where Satan has his throne, there was also a great persecution againstChristians. At the time, the governor of Pergamum, who carried a sword with him, is known to have had the power to punish or execute Christians at his will.
This is why Jesus’ words in Revelation 2:13 are striking:
“These are the words of him who has the sharp, double-edged sword.” (Revelation 2:12)
To the Christians in Pergamum living under a ruler whokilled Christians on the spot, our Lord describes Himself as the One who has a sharper sword. He tells them He is the One with the sharp, double-edged sword. These words would have made them picture Christ as the Judge.
Now, let’s study more deeply Jesus’ words to the Pergamum church. First, our Lord commends them for one thing:
“Yet you remain true to my name. You did not renounce your faith in me, not even in the days of Antipas, my faithful witness, who was put to death in your city—where Satan lives.”(Revelation 2:13b)
First, Jesus remembers a martyr in Pergamum. He praises the saints in Pergamum for being true to His name even under persecution.
In particular, He mentions the name of Antipas. Not only had thePergamum church produced a martyr, Antipas, but it had remained faithful toChrist’s name even under martyrdom.
The Pergamum church endured persecution. It fought off external attacks and kept its faith through martyrdom.
Yet Jesus says He has a few things against them. First, there were some who held to the teaching of Balaam:
“Nevertheless, I have a few things against you: There are some among you who hold to the teaching of Balaam.”(Revelation 2:14a)
Who is Balaam? Balaam, who appears in Numbers of the Old Testament, is the representation offalse prophets. He was a fortuneteller, a sorcerer, who prophesied. When the Israelites were passing through Moab on their way out of Egypt, Balak, king of Moab, asked Balaam to curse thembecause he felt threatened.
This is how Jesus describes the acts of Balaam:
“Balaam, who taught Balak to entice the Israelites to sin so that they ate food sacrificed to idols and committed sexual immorality.”(Revelation 2:14b)
In short, Balaam tempted the Israelites to compromise with the social practices of the time by adopting loose moral standards.
Numbers 25 describes this incident as follows:
“While Israel was staying in Shittim, the men began to indulge in sexual immorality with Moabite women, who invited them to the sacrifices to the gods. The people ate the sacrificed meal and bowed down before these gods.”(Numbers 25:1-2)
This incident aroused God’s wrath.
Second, the Pergamum churchis rebuked forallowing some to follow the teaching of the Nicolaitans. Scholars believe this teaching included self-indulgence that came from an overemphasis on Christian liberty.
The Nicolaitans taught that Christians would be forgiven no matter how great their sin was becauseGod’s love was infinite—so infinite that He gave His only Son. They claimed it was okay to sin because God forgives.
Jesus rebuked the Pergamum churchfor these twothings.
At first, it is difficult to grasp how the Christians in Pergamum could have committed such wrongs. How could thesefaithful Christians who even gave their life for the Lord slip in these areas? How could they have been so easily misled by false teaching when they had kept their faith even in the face of death? Herein lies the peril of faith.
While it is important to know which false teachings the Pergamum church fell for, it is more important to understand how they came to follow them.
We can discover this in a section of today’s passagewhich we must study carefully. Let’s look at verse 13 again:
“Yet you remain true to my name. You did not renounce your faith in me, not even in the days of Antipas, my faithful witness, who was put to death in your city—where Satan lives.”(Revelation 2:13b)
Here we must take note of the phrase“remain true to.”The original Greek for it is “krateó(κρατέω),” which means “to seize, hold, take hold of.”
The New Korean Revised Version translates this as something along the lines of “to hold firmly to the name of Jesus.” It is a good translation. The Christians in Pergamumsteadfastly held to the name of Jesus when they were being persecuted. In trials, suffering, and persecution, they firmly held to Christ’s name. They even died for Him. Their faith was precious and worthy of our Lord’s praise.
Although in the NKRV it appears “krateó (to hold to)” is used only once, it actually appears a total of three times in the Greek Bible.
In the Greek Bible, krateó is also used in the verses where Jesus says, “There are some among you who hold to the teaching of Balaam” and “you also have those who hold to the teaching of the Nicolaitans.”As mentioned,krateó means “to seize, hold, take hold of.”In other words, some Christians in Pergamum were seizing, or holding to, the teachings of Balaam and Nicolaitans.
This is whythe recently published New Korean Translation (NKT) translates the passage differently, using an expression more faithful to the original Greek. The NKT’s expression may be loosely translated into English as follows:
“I know where you live. You live where Satan’s throne is. However you firmly hold to my name. You have not abandoned your faith in me… Yet I have some things against you. There are some who firmly hold to the teaching of Balaam. Likewise, there are also some who firmly hold to the teaching of the Nicolaitans.”(Unofficial translation of NKT 2: 13-15)
Here we discover something interesting and important. The Christians in Pergamum had held firmly to the name of Jesus. They never thought of abandoning His name even under the threat of death. They were willing to die for Christ’s name.
But there was a problem. What does it mean to stay true to Jesus’ name? Do you write His name on a piece of paper and hold on to it? Or do you carve a cross and hold it?
The Christians in Pergamum did not deny Jesus. They tried to keep their faith.
Yet they believed that holding to Jesus’ name was to hold to Balaam’s teaching. They thought that by holding to the Nicolaitans’ teaching they were holding to Jesus’ name.
This was wrong. Holding to Jesus’ name does not mean to follow the teachings of Balaam or the Nicolaitans.
When we mistake adhering to certain teachings of people for holding to Jesus’ name, we are in a crisis. We are being deceived by half-truths. We become followers of people.
This is why Jesus says He will drawHis sword:
“I will soon come to you and will fight against them with the sword of my mouth.”(Revelation 2:16)
With the sword of His mouth Jesus will fight against those who speak half-truths, those who entice and deceive Christians with their sweet talk, people like Balaam and the Nicolaitans, and their followers who deceive others with empty words.
Jesus says He will punish false mouths.
Dear Church,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Christianity and heresies?
Even heresies firmly hold to the name of Jesus. They do not deny His name. But there is one difference. Heresies tempt and deceive others, claiming that this is the “true faith,” that this is to hold firmly to the name of Jesus. They mistake holding firmly to the “teachings of Balaam and the Nicolaitans” for holding firmly to the name of Jesus.
This applies to love of country too. What is patriotism? What is love for one’s country? We are all patriots.
But some deceive us, saying doing such and such is patriotism. By embellishing their ideas and teaching, they claim following them is patriotism. Many Koreans followthese teachings of “Balaam” and “the Nicolaitans” with the mistaken belief that they are being patriotic.
This applies to missions too. There are many Christians passionate about missions. Some even think aboutmissions even in their sleep. They firmly hold to missions.
However, some deceive us,saying, “This is missions.” They embellish their ideas, claiming their work is “true missions.” They speak as if their way is the only way to do missions.
Many Christians mistake such teachings of “Balaam and the Nicolaitans” for true missions, hold to these teachings, and even commit themselves to them.
We must think carefully. This is the wisdom that today’s Scripture imparts to us.
Of course, holding to Jesus’ name is entirely correct. We can even endure martyrdom for His name.
However,following the teachings of Balaam and the Nicolaitans is hardlyholding to Christ’s name. So how tragic it will be if some Christians hold to the former believing they are following Jesus, if theyare even willing to give their lives? This is the lesson we learnfrom the Pergamum church.
Dear Church, 2024 is now coming to a close. I hope we willbe able to reflecton our lives. What have we been holding to this past year? What faiths, beliefs, and values did we follow? Were they really worth following? Or were they only“teachings of Balaam and the Nicolaitans”?
As we wrap up the year, let us reflect on how we have truly lived before God. Have we, by any chance,slipped in some trivial area? Have we, by any chance, been caught up in macro ideas and causes, neglecting the micro truths? I hope you will reflect on yourselves today.
On thislast Sunday of 2024, may we reflect on whetherwe have missed the truth by listening to and being enticed by hearsay and false teaching.
요한계시록 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을 말씀 속에서 찾아봅니다.>
2024년 12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1년을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다사다난’이란 말을 종종 쓰곤 하는데, 이제는 그보다 ‘정신없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계엄령이란 해프닝이 벌어졌고, 나라의 대통령이 세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최근에는 대통령 직무대행인 국무총리가 탄핵되고, 광화문과 시내 곳곳에서 서로 다른 주장의 시위가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이 드는 때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편히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생각과 편히 나뉘어서 가족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마치 나라가 두 동강 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습니다. 정치권과 국가의 지도자로부터 시작된 이 위기는 경제와 국가 위상에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수많은 장성들이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국방이 과연 안전하게 유지될까 하는 우려도 생깁니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조금 전, 뉴스를 보니 전남 무안 공항에 착륙하던 비행기의 사고 소식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이 단순히 정신없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에 큰 아픔과 상처가 남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위대한 대한민국에 흠뻑 취하지 않았습니까? K-pop 문화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줄 서 있었고, 우리나라를 더 잘 알기 위해 방문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지난 6월경에 발표된 뉴스매거진, 유에스 뉴스 앤 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는 대한민국을 2023년의 전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 6위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외적으로는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전쟁 상황 가운데서 대한민국은 강력한 무기를 빠르게 생산하는 국방력의 나라로 세계적인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외부적으로는 강력한 나라가 지금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 무너짐은 외부적인 공격에 의한 것이나 강대국의 침탈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내부의 분열과 혼란, 지도력의 부재로 인한 것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정말 절감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국방력을 강력하게 하고 경제력이나 국가의 위상을 높여도, 내부가 무너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떠한 위대한 나라, 대단한 기업과 가정도 내부가 튼튼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다시 깨닫게 됩니다.
로마 제국이 그러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제국이었는데, 그 나라가 왜 그렇게 소멸하였는지 역사가들은 지금도 의문이라고 합니다. 외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왜 망했을까요? 역사가들은 내부로부터의 문제를 원인으로 봅니다. 내부가 어려워지면서 결국 로마가 쇠망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외부의 세력이 있긴 했지만, “이민족 침략자들이 숨통을 끊어 놓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저 쇠락해진 몸에 최후의 일격을 날렸을 뿐”(Adrian Keith Goldsworthy, 1969~)이라고 진단합니다.
내부에 문제가 있으면 정말 어려워집니다. 가정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외부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온 식구가 똘똘 뭉쳐 이겨 나갑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합니다. 도리어 단합하며 힘을 냅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 사이에 틈과 분열이 생기면 아무리 부유하고 대단한 가정이라 할지라도 무너집니다. 이처럼 외부는 잘 지키는데, 그만 내부를 단속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이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2024년을 마무리하면서 성경 속의 한 교회를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외부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을 지켰지만, 내부의 적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교회입니다. 바로 버가모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외부에 수많은 위협이 있던 버가모 교회는 믿음을 지키며 주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 중 특별히 버가모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를 거명하셨는데, 버가모 교회는 세 번째로 거명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지도상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했습니다. 버가모 지역은 소아시아 지역의 루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에는 아시아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우상 숭배의 본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버가모는 의료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아마 직접 가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스클레피오스(의료의 신)의 신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정신 치료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구원자라는 별명을 가진 아스클레피오스를 신으로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 있던 곳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등의 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여러 곳에 즐비하게 건설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곳의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기에, 로마의 황제를 섬기는 신전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렇듯 버가모 지역에는 다양한 우상 숭배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이 지역을 거명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계 2:13a)
주님이 수많은 우상숭배가 있는 그곳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지명하십니다. 한편으로 버가모 지역은 교회를 향한 강력한 박해가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의 총독은 칼을 차고 다니며 기독교인들을 마음껏 처단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칼에 의해 무차별 학살을 당하던 곳이 버가모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그곳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음의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계 2:12)
칼을 들고 다니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던 버가모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더 날카로운 칼날을 가지고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 말씀에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계시는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버가모 교회의 상황으로 조금 더 들어가 봅니다. 주님께서는 우선 그들에게 한 가지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2:13b)
주님은 버가모 교회 사람들에게 엄청난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선 밝히십니다. 순교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박해가 있는 버가모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있던 성도들을 칭찬하십니다. 특별히 ‘안디바’의 이름을 거명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라는 순교자를 배출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해를 견디며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던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외부의 적을 막고 신앙의 핍박을 이겨 내며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킨 교회였습니다. 이 대단한 교회가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외부로부터는 믿음을 지킨 버가모 교회였으나 그들의 내부에는 책망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칭찬하신 후에 두어 가지 책망의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우선 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 2:14a)
발람의 교훈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쉽지는 않지만, 발람이라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람은 구약성경 민수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거짓 예언자입니다. 점쟁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지역을 통과할 때, 그들을 두려워 한 모압 왕 발락이 저주를 요청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발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 2:14b)
주님은 거짓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나름의 꾀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의 재물을 먹고 행음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슨한 도덕적·종교적 잣대를 갖게 함으로써 그들이 당시 사회적 관습과 타협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민수기 25장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무는 동안에, 백성들이 모압 사람의 딸들과 음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모압 사람의 딸들이 자기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에 이스라엘 백성을 초대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에 가서 먹고, 그 신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민수기 25:1~2, 새번역)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삽니다.
이어서 지적되는 또 다른 책망이 있습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계 2:15). 이것은 앞서 나온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도 있지만, 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에서 나온 하나의 방종 같은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시니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마음껏 살게 하는 가르침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죽기까지 주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박해를 견뎌 낸 성도들이 이런 문제에 걸려 넘어질 수 있었을까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던 성도들이 어떻게 거짓 교훈에는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 질문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이와 같은 위험이 항상 존재합니다. 오늘은 이것을 조금 더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내부의 문제는 진리로 둔갑한 다른 교훈을 받아들인 데에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책망받은 문제는 어떤 과정 속에서 일어난 것일까요? 한번 상상해 봅니다. 처음에는 버가모 교회 교인들이 모두 순교할 만큼의 신앙을 지켰는데, 시간이 흐르자 변질되어 다른 교훈에 빠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이 지나 일어나는 변질의 이야기가 버가모 교회의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순교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신앙을 지키지만, 내부적으로는 니골라 당과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 성경이 전하는 맥락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버가모 교회의 잘못된 신앙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다가 잘못된 신앙에 빠지게 되었는지 찾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본문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13절을 봅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2:13b)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크라테오’(κρατέω[krateó], to seize, hold, take hold of)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굳게 잡는다’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버가모 교회 사람들은 핍박을 받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죽음을 불사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개역개정 성경에는 한 번만 등장하는데,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두 번 더 등장합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4절)와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5절)라고 번역된 문장은 헬라어 ‘크라테오’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다른 교훈들을 그들이 ‘붙잡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최근에 번역된 새한글성경은 원어를 잘 살려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자리 잡고 사는지 안다. 그곳에는 사탄의 왕좌가 있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꽉 붙잡고’ 있다.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너한테 거슬리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거기 너에게 발람의 가르침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이 바로 너에게도 똑같이 니콜라우스당 사람들의 가르침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계 2:13~15. 새한글성경)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음의 위기에 처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외부에서 예수를 믿느냐고 물을 때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죽음까지 불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순교할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서 손에 꽉 붙잡고 사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사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손에 꼭 쥐거나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사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예수를 믿느냐”라고 물을 때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사는 것일까요?
버가모 교회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꼭 붙잡고 살았지만, 그 믿음의 확신 속에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 당이 주장하는 것을 함께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꽉 붙잡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말장난에 넘어가 그들의 추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건강한 신앙을 바란다면 말씀을 꼭 붙잡아야 했을 텐데, 이단적인 사람들의 말을 따르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꽉 잡는 것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사실 그런 가르침 중에는 미시적인 실천 방안 등 일부 받아들일 만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 믿음의 어떤 부분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진리로 둔갑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붙잡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묵상하며 성찰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칼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계 2:16)
말장난하는 이들, 입으로 미혹하는 사람들,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에 속아 헛된 말을 따르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입의 검으로 그들과 승부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짓된 입술을 주님의 입으로 처단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믿으면서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들이 여기저기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참 이단과 참 기독교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이단도 기독교인도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며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단적인 이들은 예수님을 꽉 붙잡는 일을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신앙에 다른 사람을 내세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꽉 붙잡는 것이라 미혹합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 같은 것들을 꽉 붙잡으라고 하면서 이것이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나라 사랑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애국입니까? 무엇이 나라 사랑이며 정의를 이루는 것입니까? 우리는 모두 애국자죠. 우리는 다 나라를 사랑할 마음이 있습니다. 정의를 이루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이것’이 애국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애국인 것처럼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교훈을 잡는 것만이 마치 정의를 이루는 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애국과 정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가르침 같은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선교도 그렇습니다. 선교에 열정을 가진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나 깨나 선교를 생각하며 그야말로 선교를 꽉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선교의 상황을 보면 ‘이것이 선교다’라고 미혹하는 사람들도 또한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빠져서 나름대로 내가 선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포장된 것에 그만 빠지고 말아 시간과 모든 것들을 낭비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처럼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 같은 것을 선교라고 잘못 생각해 붙잡으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2024년 마지막에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가정에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어서 상담해 보면 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며 거시적인 명분 방향성은 모두 뚜렷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다릅니다. 서로 생각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아내가 원하는 사랑, 남편이 원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둘이 나누어지고 깨어집니다. 사랑이라는 명분은 똑같으나 실제 실천 방안은 다릅니다.
과연 우리는 교회와 우리나라와 가족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어떤 생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거시적이고 큰 것을 가지고 착각하지 맙시다. 자칫하면 버가모 교회와 같은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해를 맞습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면서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봅시다. 나라를 위한 마음, 가정을 위한 마음, 그리고 교회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잘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님 앞에 묻고 또 묻는 마지막 주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12월 29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버가모 교회의 교훈” (계 2장 12~17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80장, 301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요한계시록 2장 12~17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12월 2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12월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걱정과 염려가 많은 시간입니다. 내부의 분열과 혼란, 지도력의 부재를 겪으며 나라 전체적으로 위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신 내용 중에 특별히 버가모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아시아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교회였습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의 루시아에서 가장 중요했던 도시 중의 하나로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 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우상숭배의 본거지였습니다.
주님은 우선 그들에게 한 가지 칭찬을 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를 배출하였고, 박해를 받을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견뎌낸 교회가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느슨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당시의 사회적 관습과 타협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또 니골라당의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로부터 나온 방종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죽기까지 하였던 성도들이 이러한 문제에 걸려 넘어질 수 있었을까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던 성도들이 어떻게 거짓교훈에는 이렇듯 쉽게 빠져 들었을까요? 여기에 신앙의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어려운 고난과 박해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이 발람의 가르침을 붙잡는 것으로 잘못 생각했습니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붙잡는 것으로 오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을 어떤 누구의 가르침을 꽉 붙잡는 것으로 오해할 때 우리는 위기를 겪습니다. 굉장히 안타깝지만, 이 때 우리는 누군가의 말장난에 넘어가게 되고, 그들의 추종자가 되어 버립니다.
2024년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 한 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습니까? 내가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 신념, 가치,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런저런 가르침에 현혹되어 함께 어울리다 보니, 하나씩 허물어지고 진리를 놓친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 우리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 2024년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지난 한 해 경험했던 우리 신앙의 모습과 발자취에 대해 한 가지씩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있었나요?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2024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살아온 길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요? 주님의 이름을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헛된 이론이나, 생각, 주의, 가르침을 굳게 붙잡고 주님의 이름이라 착각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정작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을 행한 것은 아닌지 다시금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지혜를 주시고, 깨닫는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말씀과 지혜로 주님을 따라가는 진정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