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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임금님

요한복음 19: 23 ~ 24

김경진 목사

20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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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 23 ~ 24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속 임금님처럼 예수님이 벌거벗겨지셨습니다.>

어느 왕국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새 옷을 좋아하는 임금님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이 임금님 앞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가지고 옷을 지을 수 있는 두 재단사가 나타납니다. 황제가 기뻐하며 그들에게 가진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자,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면서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옷감은 멍청한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옷감입니다.” 여러분께서 너무나도 잘 아시는 안데르센의 동화, 『임금님의 새 옷』 (덴마크어: Kejserens nye Klæder, 영어: The Emperor’s New Clothes) 의 단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어로 된 제목을 따서 『벌거숭이 임금님』 혹은,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두 재단사가 말한 멍청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옷감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마치 그것이 보이는 마냥, 임금님 역시도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보이는 척을 하죠. 결국 임금님은 벌거벗은 상태로 길거리 행차에 나서게 됩니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도 처음에는 왕이 입은 옷과 옷감을 칭송하지만, 한 어린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소리치면서 그만 모두가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때서야 백성들이 폭소하게 되지만 왕은 체면 때문에 벌거벗은 채로 행진을 계속합니다. 이 이야기를 수난주간이 될 때마다 저는 종종 떠올리곤 합니다. 이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납니다. 겉모양을 위해서 끊임없이 새 옷을 입고 화려한 옷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재단사에게 속고, 허위의식에 가득 찬 신하들에 속고 마는 임금님..스스로에게 속아 망신당하고 마는 임금님 말입니다.
이 벌거벗은 임금님이 고난주간 때마다 생각나는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벌거벗은 임금님 때문입니다. 그분은 옷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새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습니다. 늘 평범한 옷, 가장 서민적이고 기본적인 옷만을 입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옷마저도 빼앗기고 맙니다. 병사들이 그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은 제비 뽑아 가지죠.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속옷까지도 빼앗긴 임금님. 바로 그분의 이야기가 수난주간 동안에 읽혀집니다.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임금님은 그의 탐욕과 위선 때문에 벌거벗겨졌지만, 성경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은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위하여 벌거숭이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인간 속에 숨겨진 허위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일 수 있겠지요. 탐욕을 부리는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군상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관점을 잃어버린 거짓된 어른들의 모습을 고발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 속 벌거벗은 예수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나타나시게 된 이 이야기 속에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벌거벗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맥락 속에서 벌거벗겨지신 예수님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넷으로 나누어 가졌다’는 기록입니다. 여기에 속옷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그 속옷은 서로 제비를 뽑아서 가져갑니다. 그렇다면 병사들이 예수의 속옷을 놓고 제비를 뽑아서 가져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속옷도 입지 못하신 채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예수님은 병사들에 의해서 벌거벗김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벌거벗김을 당하셔야만 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일차적인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죠. 당시 로마의 십자가형은 옷을 벗긴 채 사람을 매달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연히 벌거벗겨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자연스레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으셔야만 했겠는가?’ 이 질문은 종종 우리에게 큰 질문이 됩니다. 예수님의 재판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것이 언뜻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로마법에 따라 처형받으신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바 성전을 모독하셨다는 이유가 직접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스데반이 죽게 되는데, 그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예수님도 돌에 맞아서 죽으실 수 있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듯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으셨다면 그분의 구원 사역은 무효가 되었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지 못하셨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로마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맞으셔야만 했을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기게 하심으로써 치욕적인 모습으로 죽게 하셨을까요? 죽으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셨을 겁니다. 안락한 모습으로 또는 독약을 먹음으로써 조금은 편한 죽음을 맞이하실 수도 있으셨겠죠.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을 아주 고통스럽고 치욕스런 모습으로 죽게 만드셨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미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이 인용하는 시편 22편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벌거벗겨지심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바요, 고난당하는 인류와 연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 22:1~2)

그리고 6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6~8)

이어지는 16절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6~18)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22:19)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께서 오시기 수백 년도 전에 쓰인 이 글이 어쩌면 이렇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맞아 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다윗은 이미 영적으로 자신의 후대에 탄생할 고난당하는 구원자의 울부짖음을 그의 언어를 통해서 노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몸소 벌거벗겨지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이 곧 우리의 메시야이심을 확증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벌거벗겨지신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죠.
두 번째 이유는 조금 전 읽은 시편 22편의 또 다른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영적으로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처절하게 노래하는 동시에 너무나도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오고 오는 세대의 억울함을 대변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한을 풀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들, 누명을 쓰고 남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소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지주가 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하인의 아들이 잘못해서 지주의 개를 돌로 때렸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지주가 그 소년을 감금하고 이튿날 아침 소년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사냥개로 추격하게 하여 갈기갈기 찢어 죽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이반 까라마조푸가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놈의 조화이며 이와 같은 지옥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나는 용서하고 포용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로의 입장권을 하나님께 가장 공손히 돌려주려고 한다.”
이 세상에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게 만드는 처절한 억울함을 맛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시편 22편은 바로 이렇게 고통당하는 인간의 처절한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주님, 나를 멀리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나뿐인 나의 목숨을 개의 입에서 빼내어 주십시오.” 라고 외치는 억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2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여라. 야곱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이스라엘 자손아, 그를 경외하여라.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시 22:23~24 중, 새번역)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분명 희망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고통을 면제하여 주시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고통을 피해가도록 해 주시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우리의 경험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억울한 일이 없어지지도 않죠. 사람들에게 속옷까지 빼앗기는 억울한 일들은 여전히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어려움을, 우리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주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인간이 타락 이후 처음 대면한 현실은 증오와 살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잘못을 전가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인과 아벨에 이르러서는 형제가 형제를 증오하며 결국 동생이 들판에서 죽고 맙니다. 이후로도 인간의 역사에는 끊임없는 증오와 살인이 이어져 왔습니다. 어제도 우크라이나 어느 기차역이 미사일 공격을 받아서 300여 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얼마 전에는 러시아군이 키이우에서 철수하는 중에 우크라이나 부차 지역에서 민간인 410여 명이 러시아 점령군에 의해 고문, 강간, 학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3월 28일 영국 일간지 더 타임즈에 실린 인터뷰 내용입니다. 나탈리아(가명)라는 여인이 남편 안드레이와 4살짜리 올렉스와 함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지역에서 평화롭게 사는 중에 러시아 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남편 안드레이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심지어 아이를 볼모로 나탈리아를 성폭행하였다는 기사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끔찍한 일들이 오늘도 여전히 지구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를 당하고 벌거벗겨짐을 당했을까요? 일제 치하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 앞에서 벌거벗겨진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참혹하게 살해당한 독립군이 있었고 선량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벌거벗겨지는 참혹한 경험은 우리 인간들의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도 이와 같은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 같지만 죽임을 당하고 옷이 벗겨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 많아서 다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잡혀서 벌거벗겨지고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창 37:23~24)

사사기에 따르면 내기에 진 삼손이 옷 30벌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아스글론이라는 지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30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를 푼 사람들에게 옷을 가져다줍니다. 다시 말하면 옷을 얻기 위해서 사람 30명을 죽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삼손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지나칠 법도 하지만 사실 저에게는 아스글론에 살던 30명의 사람들이 아른거리곤 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인권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보상하실 것인가?’ 매번 질문이 들곤 하였습니다.
벗겨지고 살해당하는 이야기는 사사기 내내 이어집니다. 그중에서도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잔인하죠. 도망갔던 첩을 찾아 베들레헴까지 온 남편이 첩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 불량배들이 찾아와서 집에 들어온 사람들을 내어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편이 자신의 첩을 밖으로 내어 보냅니다. 결국 그 첩이 밤새 윤간을 당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최근 새벽 기도 시간에 읽어 가는 사무엘하에서도 다윗의 후궁들이 압살롬에 의해 벌거벗겨졌습니다. 다윗은 권력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벌거벗겼습니다. 암논은 자신의 누이 다말을 힘으로 벌거벗겼습니다. 이렇듯 벌거벗겨지는 인간의 역사는 오늘도 이 땅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국민 학교였는데 지금은 초등학교이지요. 초등학교 다닐 때 아이들 중에 바지를 몰래 내리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바지를 내리는 것이 뭐 그리 재미있는지, 바지가 내려진 아이가 충격을 받고 큰 고통 속에 방황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친구는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전학 가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는 장난 같은 그 일이 한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만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바지를 벗기는 작은 일에서부터 벌거벗겨지는 일들이 인간 역사에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질문해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왜 벌거벗겨지셨을까요? 이 땅에 억울하게 벌거벗겨지고 살해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총 앞에서 벌거벗겨지고, 어떤 이는 권력 앞에서 벌거벗겨지고, 어떤 이는 돈 앞에서 벌거벗겨졌습니다.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인간의 역사는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폭력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폭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힘에 의해서 수치를 경험하고 자존심의 사망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장의 공포감 속에서 살해되고 벌거벗겨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벌거벗겨지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또한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시며 고난 속에 함께해 주십니다.>

시편 22편으로 돌아가 봅시다. 성경이 권면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여라. 야곱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이스라엘 자손아, 그를 경외하여라.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 (시 22:23~24, 새번역)

우리 주님은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고통의 자리에 똑같이 함께 서 주십니다. 고통에 연대해 주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이해해 주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함께해 주십니다. 우리가 벌거벗겨지듯이 주님께서도 함께 벌거벗기심을 당해 주십니다. 부르짖는 사람을 향하여 함께 울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응답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시고자 자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벌거벗기셔서 달아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장 억울한 죽음, 가장 수치스런 죽음, 병사들이 모여서 옷을 나누고 속옷까지 제비 뽑는 참담한 억울함 속에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두신 것입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도 벌써 4년 차가 되어 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분의 삶에 조금씩 접근해 갈수록 삶 속에 숨겨진 그림자들을 보게 됩니다. 숨겨진 고통, 남에게 말 못할 아픔들이죠. 한두 분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분 한 분 성도 여러분이 가진 인생의 무게와 고통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로 그분들의 아픔을 제거해 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기도할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들고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똑같이 고통을 겪으시며 함께 벌거벗겨지심으로 수치를 당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와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종려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수난으로 나아가시는 예루살렘에서의 첫 걸음이 시작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시기 위하여 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 벌거벗겨지고, 수치를 당하고, 살해되는 경험을 한 우리들과 연대하시며 함께하시고자 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날이 곧 오늘 종려주일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마치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들어오시듯이 들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깊은 상처, 수치, 벌거벗겨진 모욕감, 천대받은 경험, 죽음에 대한 공포, 이곳까지 들어오셔서 우리의 깊은 문을 여시고 함께 벌거벗겨지시는 주님을 만나실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고 고통의 자리에 서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렇게 감히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4월 1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벌거벗은 임금님” (요 19:23-24)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92, 15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19:23-2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1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안데르센 동화에 벌거벗은 임금님은 인간 속에 숨겨진 허위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줍니다탐욕과 위선의 결과로 임금이 벌거벗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지요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도 아이러니하지만 벌거벗김을 당하셨습니다그럼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벌거벗게 되신 것입니까예수님께서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이야기 속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왕이신 예수님께서 벌거벗김을 당하신 것은 십자가 형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당시 십자가 처형은 옷을 벗긴 채로 매달았기에 예수님께서도 벌거벗김을 당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치욕적인 십자가형을 받으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기시고 가장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죽도록 놔두셨을까요이는 구약 말씀의 고난당하는 구원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하심이기도 했습니다.(시 22메시아시편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된 구원자 메시아임을 확실하게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또한 이것은 억울함 속에 고통당하고 수치를 받는 이들의 그 처절한 슬픔(시 22:23-24)을 대변하는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도 경험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통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살면서 억울한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여전히 세상에서는 내 속옷까지 빼앗는 처절하게 억울한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이것이 안타까운 인간의 현실입니다오늘도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무고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는 소식과 고문강간학살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역사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통과 당하고 치욕을 겪으며벌거벗김의 참혹한 경험을 당했는지 사실 너무도 많아서 다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성경에서도 요셉은 억울하게 형들에게 구덩이에 던져졌고그의 채색 옷이 찢기고 벌거벗김을 당했습니다사시기 말씀에 삼손은 내기에 져서 옷 30벌을 마련코자아무것도 모르는 아스글론 사람들을 쳐 죽여 이들이 벌거벗김을 당하는 사건을 보여줍니다다윗의 후궁들은 어떻습니까다윗의 아들압살롬에 의해 치욕스럽게 벌거벗겨지기도 했습니다벌거벗겨지는 인간의 이 처절한 역사는 끊임없이 이 땅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주님께서도 벌거벗겨지셨습니다왜 그러셨습니까이 땅에 살면서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벌거벗겨진 이들돈 앞에서완력과 힘으로 벌거벗겨진 자들의 편에 주님께서 서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고통 받는 자들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주님은 똑같이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주님은 절대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우리가 겪는 고통에 절대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그 증거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벌거벗기시어 달아 매셨습니다가장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병사들이 모여 속옷을 나누고속옷까지 제비뽑아 나누어 갖는 참담한 억울함 속에 예수님을 두셨습니다그리고 이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절대로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그것을 내가 증명하마나의 아들도 그 고통 가운데 두었단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결국 벌거벗겨지고수치와 치욕의 고통을 당하는 우리와 연대하시며함께 하기 위하여 성으로 들어오시는 그 주님을 맞는 날입니다오늘 이 주님이 우리 마음에 긴히 찾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우리 마음 깊숙이 있는 그 상처와 수치벌거벗겨진 모욕감천대받은 경험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이르기까지 그 깊은 삶의 문제들을 뚫고 들어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우리의 고통을 체휼하시는 주님께서 끝까지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 서 주실 것입니다.

나누기

1. 삶에서 수치와 고통 속에 있었던 적이 있으십니까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내게 찾아오셨습니까?

2. 예수님께서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신 것처럼 고통과 아픔에 처한 이들을 어떻게 돕고 함께 해주셨는지요?

 

마무리기도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종려주일우리를 위해 벌거벗김을 당하시고치욕과 수치를 당하고자 손수 성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합니다십자가 도상에서 벌거벗겨진 예수님 앞에 우리의 수치와 고통과 치욕의 꽁꽁 숨겨둔 그 모든 것들이 위로되게 하시고 우리의 함께 하시는 예수님 통해 항상 힘을 얻게 하옵소서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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