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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3:5~8

김경진 목사

2026.03.01

<하나님은 모세의 절망과 황폐함의 끝자락에서 그를 지켜보며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출애굽기 3장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는 한 사람과 그를 한순간도 잊지 않으신 하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호렙’이라는 곳에 서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호렙’은 ‘황폐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모세가 ‘쓸모없는 땅’, ‘버려진 땅’이라고 불리는 곳에 서 있습니다. 왕궁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살인자가 되어 도망쳐 나온 지 4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여든입니다. 80이 다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사업을 하지 못하고 장인의 양 떼를 돌보는 상황입니다. 그의 인생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80세가 되어 호렙에 선 모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모세는 시편 90편을 이때 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9~10)

 

모세가 직접 했던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80이라는 나이에 ‘황폐함’이라는 곳에 서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제 자기 인생에서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강건하면 80인 인생인데, 그의 나이는 이미 80에 이르렀습니다. 그저 장인의 양 떼를 치는 존재로 그의 삶은 저물어 가는 듯합니다. 그의 인생은 이렇게 황폐함으로 끝나고 마는 것일까요?

그런데 호렙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데,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이 붙었으면 당연히 타서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불에 타고 있습니다.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출 3:2b~3)

 

황폐라는 이름을 가진 호렙산에서 불타고 있던 나무는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불타고 있습니다. 모세는 호기심을 가지고 가까이 갑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출 3:4)

 

하나님은 모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왔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와 관련된 내용을 생략하고 있지만, 모세에게는 엄청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인생도 보고 계시는가? 인생을 마감할 80의 나이까지 초라한 삶을 살아온 나를 주님이 기억하시는가? 아마도 이 순간이 그에게는 큰 감동과 감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모든 삶을 보고 계셨고, 그의 모든 것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황폐’라는 이름의 장소에서 모세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서 있을 수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 그리고 우리나라와 오늘 우리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

 

어떻게 황폐라는 이름을 가진 땅이 하나님에게는 거룩한 땅이 될 수 있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황폐해진 땅,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땅에 지금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이 불붙은 떨기나무입니다. 불이 붙었다면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아직도 살아서 불타고 있습니다. 소멸하지 않고, 도리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기세입니다.

이 황폐한 호렙에서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여러 가지로 묵상이 가능합니다. 저는 이 나무를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이 나무 앞에 서 있는 모세가 아닐까요? 이미 80이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황폐해져서 이제는 소멸해야 하지만, 아직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십니다. 또한 모세는 새로운 일을 맡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이 황폐한 땅에서 불붙어 있으면서도 생존하고 있는 떨기나무는 애굽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닐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황폐한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압제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끊어지지 않았고, 소멸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불붙어 있습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이 불붙은 떨기나무는 107년 전, 나라 없는 설움 속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우리 선조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때 우리나라의 상황을 호렙에 있는 모세와 비교해서 보면 이러한 것들이 떠오릅니다. 불타서 없어지게 될 민족,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 속에 있는 백성들, 다 끝난 것 같은 황폐한 곳이 되어버린 조선 땅,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의 신음. 그럼에도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여전히 소멸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나무가 우리 민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오늘날 고통의 현장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사라질 것만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우리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중에도 절망한 채 황폐라는 이름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타는 떨기나무에는 아직도 불이 붙어 있습니다. 타고 있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그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황폐한 땅 호렙에서 불붙은 나무의 운명은 곧 쓰러지고 없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여전히 불타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러하고, 애굽에서 탄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합니다. 또한 1919년 태극기를 들고 나섰던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삶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아시며, 우리의 믿음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출 3:7,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세 가지 중요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보았고’, ‘들었고’,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에서 하나님이 우리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보았다’라는 표현을 ‘라오 라이티’(רָאֹ֥ה רָאִ֛יתִי[Raoh Raiti])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라아’(רָאָה[raah])가 두 번 반복 사용되는 형태입니다. 강조의 표현으로서, 다시 말하면 ‘보고 또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고 계셨고, 보아 오신 모습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채찍에 맞고 있을 때 터져 나오는 핏방울을 보고 또 보셨고, 자식을 나일강에 던져야 했던 어머니의 피눈물을 보고 또 보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들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들으셨을까요? 우리의 세련된 기도와 잘 정돈된 논리적인 기도를 들으셨을까요? 아니면 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으셨을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출 3:7, 새번역)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체아카(צַעֲקָה[tseaqah]), 곧 비명(a shriek)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비명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잘 정돈된 착한 사람들의 기도만을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행동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나서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벗어나 버려지고 내쳐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비명까지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보고 들으신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단어에 사용된 히브리어 ‘야다’(יָדַע[Yada])는 지식으로서의 앎을 뜻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깊이 알듯, 어머니가 자식의 아픈 부위를 만지며 느끼듯,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짓밟혔는지를 자신의 가슴으로 직접 느끼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고, 듣고, 알고 계셨다면 왜 모세는 40여 년 동안 광야에서 버려진 것처럼 살아야만 했을까요?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종살이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그때도 보고, 듣고 계시지 않으셨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오늘의 본문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알려 줍니다. 오늘의 본문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출 3:4a)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호렙산에 불꽃을 피워 두고 모세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며 방황하던 시간은 사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신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었을까요? 40년 전부터, 혹은 35년 전부터 불을 붙이고 기다리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황폐해진 땅이라 이름 붙은 곳에서 모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힘을 모두 빼고 의지의 신을 벗으며 오직 하나님의 불꽃만을 바라보고 돌이켜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40년의 시간은 잊힌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공하며 만들어 가셨던 기간이었고,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셨던 은밀한 보호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인생이 광야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아서 두려워하는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관심을 두기 훨씬 전부터 이미 마중 나와 계십니다. 황폐해진 땅이라는 이름 앞에 불꽃을 피워 놓고 주님의 임재를 보여 주시면서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작은 반응 하나만을 원하시며 숨죽이고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심으로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듯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결국 8절의 위대한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출 3:8a)

 

그리고 이 결단은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내기 위하여 모세를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대신해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한 사건이 떠오릅니다. 먼 훗날, 주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성육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모든 고통을 함께 체험하시고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보고, 듣고, 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죽어 가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의 아들이 인간의 고통을 직접 보고, 그들의 비명을 듣고, 그들의 두려움과 절망을 알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사실 이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모르시겠습니까? 꼭 내려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만 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주님이 우리의 고난을 잘 아신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바라만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건지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고통의 진창 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신비를 ‘체휼’(體恤)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체휼은 몸 체(體) 자에 긍휼히 여길 휼(恤) 자를 사용합니다. 몸(體)으로 우리 아픔을 긍휼(恤)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히 4:15a, 개역한글)

헬라어로는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ize)로 공감한다, 연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우리가 겪는 배고픔을 직접 느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당하는 배신의 아픔을 직접 경험하셨으며,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의 공포를 십자가 위에서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은 그 사실을 더 설득력 있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결국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순절에 묵상해야 할 주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아플 때 나의 아픔을 함께 알아주시고, 내가 울 때 함께 내 옆에서 울고 계십니다. “주님은 아신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 속에는 “내가 네 고통을 나의 몸으로 다 겪어 보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다”라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 체휼의 사랑을 보여 주는 여러 장면이 나옵니다. 그중에 나인성의 사건이 있습니다. 주님은 성문으로 나오던 한 장례예식과 마주치십니다. 그 중심에는 독자를 잃어버리고 무너져 내린 한 과부가 있습니다. 그는 남편도 잃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잃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3)

 

“안타깝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표현에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함께 느끼셨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네 슬픔을 이미 내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이 짐을 함께 지겠다”라는 주님의 위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관에 직접 손을 대십니다. 율법으로 부정해지는 일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절망 중에 울고 있는 나인성 과부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여인의 절망을 자신의 것으로 체휼하시고, 죽음의 슬픔을 생명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와 함께하시며 불붙은 떨기나무 앞의 모세와 같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경 속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은혜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도 유구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38년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라고 호소하며 절망 속에 누워 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민족 역시 그랬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일제의 압제 아래 신음하며 “누가 우리를 구원해 줄까” 탄식하던 환자와 같았습니다.

107년 전 오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우리 선조들의 만세 소리는 세력을 자랑하는 움직임이나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민족의 거대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들,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소리를 높였습니다. 당시 인구의 2%도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이 독립선언서 서명자의 절반을 차지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채찍을 맞으며 차가운 감옥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애굽의 하나님이 조선을 보고 계시고, 이 민족의 고통을 알고 계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주님께서 조선을 체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비록 제암리교회가 불타고 성도들이 순교당하는 참혹한 현실이 일어났지만, 그들은 도리어 그곳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 정치의 불안, 분열된 국론, 경제적 위기, 국가 정체성의 위기, 그리고 불안한 다음 세대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하나님, 이 민족을 안 보고 계십니까? 언제까지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냥 놓아두실 것입니까?” 이와 같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보고 있고, 듣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너희 백성의 고통을 치유하고 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구국 기도는 결코 허공에서 흩어지는 메아리가 아닙니다. 107년 전, 이름 없는 성도들이 차가운 교회 바닥에 엎드려 흘렸던 눈물은 헛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들고 나갔던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의 외침은 결코 허공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당장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중에도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라를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와 외침을 단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셨고, 마침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해방의 새 역사를 써 주셨습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 중에는 무겁고 큰 짐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워서 신음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기억해 줄까? ‘호렙’이라는 이름처럼 ‘황폐’라는 명패를 들고 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자리에 서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자리에 불붙는 떨기나무를 두시고 타지 않는 나무를 보여 주시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우리는 타지 않았고, 아직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황폐해지지 않았고, 주님께서는 그곳에 생명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결국 호렙은 거룩한 땅이 됩니다.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나 하고 생각하십니까? 황폐라는 이름의 땅이 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더욱 힘써 기도합시다. 사순절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신 주님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로 가셔서 우리가 당할 죽음의 공포를 직접 경험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사순절은 그 주님의 길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나를 위해 고난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주님은 나의 고통을 아시고 공감하시며 함께 아파하십니다.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떤 고난 속에 있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여러분의 사순절과 3·1절 기념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he God Who Sees, Hears, and Knows

 

Exodus 3:5-8

 

Today’s Scripture from Exodus chapter 3 records a dramatic encounter between a man standing at the end of despair and a God who never once forgot him.

 

Moses is now standing on Mount Horeb. The Hebrew word “Horeb” means “desolate.” A useless, forsaken land.

 

There stands Moses. Forty years have passed since he left the splendor of the palace and fled as a murderer. He is now eighty years old. Though eighty, he still tends his father-in-law’s sheep, not his own. His life has by no means been one of success.

 

Moses standing on Mount Horeb at eighty—what must he have felt? Perhaps Moses was composing Psalm 90 at this time:

 

“All our days pass away under your wrath; we finish our years with a moan. Our days may come to seventy years, or eighty, if our strength endures; yet the best of them are but trouble and sorrow, for they quickly pass, and we fly away.” (Psalm 90:9–10 NIV)

 

Moses at eighty, standing on Horeb, the place of desolation, must have felt he could do nothing more. If a vigorous life is eighty years, he had reached that age already. Would his life truly end in such desolation? Would it conclude like this?

 

But when he reached Horeb, something caught his eye.

 

A bush was burning with fire, yet the bush did not perish. Normally, when fire consumes a bush it burns up and disappears, but this bush continued to burn without perishing.

 

“Moses saw that though the bush was on fire it did not burn up. So Moses thought, ‘I will go over and see this strange sight—why the bush does not burn up.’” (Exodus 3:2b–3 NIV)

 

On this mountain of desolation, a bush was burning yet was not consumed; it continued to burn without becoming desolate.

 

Moses approached the bush with curiosity, and the Scripture tells us that God was watching him at that moment:

 

“When the Lord saw that he had gone over to look, God called to him from within the bush, ‘Moses! Moses!’ And Moses said, ‘Here I am.’” (Exodus 3:4 NIV)

 

God saw Moses drawing near, and when he came closer God called his name. How must Moses have felt when his name was spoken? The passage does not record his feelings or reaction, but it must have been overwhelming for him.

 

That God knew him, knew his name… That He would notice someone so desolate as he was… To be recognized after living such a shabby life until the age of eighty when life was coming to an end… How could God know me? Such thoughts likely filled him with great emotion and awe.

 

God had watched and known every part of Moses’s life. And He had been waiting for him on Mount Horeb. Then God spoke to Moses:

 

“‘Do not come any closer,’ God said. ‘Take off your sandals, for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 ground.’” (Exodus 3:5 NIV)

 

Surprisingly, God calls the mountain named “Desolation” holy.

 

Why does God call it “holy ground”? How can this place whose name means “desolate, abandoned” be holy ground? There is only one reason: God was there. In that scene of desolation, that abandoned place no one cares for, God was present.

 

The burning bush itself displays this astonishing paradox.

 

If something is burning, it should be consumed. It is normal for fire to destroy what it burns. Yet the bush lived. It had not perished. It did not disappear.

 

What does this bush symbolize? As I meditated, I came to some realizations. Perhaps the bush is Moses himself standing before it: though desolate and seemingly destined to perish, he had not been consumed—life remained, because God was with him.

 

Or perhaps the burning bush symbolizes the Israelites in Egypt: suffering under oppression yet still holding on to hope.

 

Or perhaps it is our ancestors who desperately cried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107 years ago. The Korean people had lost their country and were on the verge of perishing in history. Yet we still stand—like the burning bush.

 

Or perhaps the burning bush represents us today living in pain with no hope, thinking we will only fade away and perish. Yet we are not consumed. We are crying, burning, and suffering, but we do not perish.

 

On Mount Horeb, a doomed, desolate wasteland, one burning bush should have been consumed; yet it still blazed. That bush represents Moses, the Israelites suffering in Egypt, our ancestors who fought for independence in 1919, and ourselves living today.

 

Standing before the burning bush, God said to Moses:

 

“And the Lord said: ‘I have surely seen the oppression of My people who are in Egypt, and have heard their cry because of their taskmasters, for I know their sorrows.’” (Exodus 3:7 NKJV)

 

Here God uses three important verbs: I have “seen,” I have “heard,” and I “know.”

 

From these expressions we will learn how God relates to our lives.

 

God clearly says, “I have surely seen the oppression of My people.” God is a God who sees.

 

This means God is not looking elsewhere, preoccupied with His own affairs or hobbies. God fixes His attention on us. He fixed His gaze on Moses and on Israel.

 

In the original Hebrew text “have seen” is raoh raiti,( רָאִ֛יתִי רָאֹ֥ה). This is a doubled form of raah (רָאָה, to see), which emphasizes repeated seeing. It is also in the perfect form, indicating continuous observation up to now.

 

God did not watch from afar through a telescope. He didn’t just sit back and watch on CCTV. He watched the drops of blood when the Israelites were whipped, and He looked unflinchingly at the tear-filled eyes of mothers forced to throw their children into the Nile.

 

God also says He heard.

 

What does God hear? Does He listen only to eloquent prayers? To well-phrased, logical petitions? Or does He listen only to the wishes of those who live morally upright lives? The Lord says:

 

“[I] have heard their cry because of their taskmasters.”

 

What did He hear? In Hebrew it is tseaqah (צַעֲקָה), which means “a shriek.” He says He heard the people’s shrieks and wailing. Our God does not listen only to the eloquent, logical prayers of righteous people. He hears cries, wailing, and shrieks; and He acts.

 

When Hagar was driven away and about to die in the wilderness of Beersheba with Ishmael, it was God who heard their cries. The Lord heard the screams of the abandoned and the oppressed, and He drew near to them.

 

God is more sensitive to the groans that burst out from the depths of suffering than to prayers wrapped in religious language. He receives our sighs that have no words as prayer. Are you weeping? Are you groaning? The Lord hears.

 

Having seen and heard, God therefore says He clearly knows their suffering.

 

Here yada (יָדַע), the Hebrew verb used for “know,” does not merely refer to intellectual knowledge. It is experiential knowing—like a husband and wife intimately knowing one another, or a mother feeling her child’s hurt. God did not catalog Israel’s suffering as data; He felt with His own heart how their hearts trembled and how their souls were trampled. God is not a mere observer of suffering but a participant.

 

This raises a question: If God saw, heard, and knew all this, why was He silent during Moses’ forty years in the wilderness? Another question: Where was God during Israel’s four hundred years of bondage in Egypt?

 

Today’s passage provides an interesting perspective on these questions. Let’s look at verse 4:

 

“When the Lord saw that he had gone over to look, God called to him from within the bush, ‘Moses! Moses!’” (Exodus 3:4a NIV)

 

As we observed, God had already kindled the fire on Horeb and was waiting for Moses. All the time Moses spent tending sheep and wandering was actually the pathway God had prepared to take him to the “sanctuary” where Moses would encounter God.

 

God was watching for the moment Moses would abandon worldly powers, lay down his will, fix his gaze on God’s flame alone, and return to Him. The forty years were not wasted years but a secret time of protection during which God delicately molded Moses into a man of God.

 

Does your life feel like a wilderness now? Are you afraid because God seems silent? Remember this: God went out to meet you long before you turned your attention to Him. He is watching quietly for that small response when we turn our eyes to Him.

 

Now let’s delve a little deeper.

 

The ministry of God who sees, hears, and knows culminates in the great decision recorded in verse 8: “So I have come down to deliver them out of the hand of the Egyptians.” (Exodus 3:8a NIV) And this resolution led to Israel’s Exodus through Moses.

 

I have come down… to deliver them…

 

Does this sentence bring a certain event to mind? It is Jesus Christ — the One who took on human flesh, dwelt among us, shared in all our sufferings, and went even to the place of death.

 

The God who says “I have seen, I have heard, and I know” sent His Son to this world. He came to see human suffering with His own eyes, to hear their cries, and to know their fear and despair.

 

God did not merely look from His heavenly throne. He did not merely issue commands. To rescue us, He personally took on human flesh and came down into the mire of suffering.

 

The author of Hebrews explains this mystery with the word “empathize.”

 

What is “to empathize”? The Korean word for it is chae-hyul (체휼, 體恤), a combination of the Chinese character for body (體) and the character for compassion (恤). It means God feels our pain with His body with compassion.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empathize with our weaknesses,” (Hebrews 4:15a NIV)

 

In Greek “to empathize” is sympatheō (συμπαθέω), which means “to sympathize, to have compassion.”

 

The Lord who sits on high does not analyze our suffering as numbers or data. He came in human flesh to the low places of this earth; He felt our hunger, experienced the pain of betrayal that we endure, and passed through the terror of death on the Cross.

 

The God who sees, hears, and knows finally came down in the same flesh as us to “sympathize” with us. This is the summit of the Lord’s love we should meditate on during Lent.

 

When I hurt, the Lord suffers with me; when I weep, the Lord weeps beside me. This short phrase “I know” is the strongest promise: “I have fully experienced your pain in My own body, therefore I can help you.”

 

The most dramatic scene of this sympathetic love occurred in the town of Nain. The Lord met a funeral procession leaving the city gate. At its center was a widow devastated by the loss of her only son. The Scripture testifies: “When the Lord saw her, He had compassion on her and said to her, ‘Do not weep.’” (Luke 7:13 NKJV)

 

The Lord did not simply say, “How sad.” The Bible says He “had compassion” on her. Here the expression “to have compassion” means to feel an excruciating pain like that of having one’s intestines torn. Thus Jesus’ “Do not weep” was not a mere comforting phrase. It was a proclamation of sympathy: “I have already felt your sorrow in My body; now I will take this burden upon Myself.”

 

Then the Lord stopped the funeral procession and touched the casket with His own hand. According to the law this made Him ceremonially unclean, yet He could not pass by the weeping widow of Nain in her despair. He took her despair as His own and turned death’s sorrow into the joy of life.

 

This grace of the God who sees, hears, and knows is not just a story in the Bible. It flows throughout our nation’s history as well.

 

John 5 records a man who had lain by the pool of Bethesda for 38 years, despairing that no one would help him. Likewise, the Korean people groaned under 36 years of Japanese oppression, like a patient sighing, “Who will save me?”

 

One hundred seven years ago today, when our ancestors poured into the streets and shouted,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they were not uttering a mere political slogan. It was a great cry to heaven from our people. Why did Christians, who took up less than 2% of the population at the time, make up half the signers of the 1919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take to the streets risking their lives? How could they shout,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while being flogged and collapsing on cold prison floors?

 

It was because they believed. They believed that the God who led the Israelites out of Egypt saw Korea’s suffering, heard their cry for independence, and sympathized with the sorrow of the Korean people. Even amid horrific trials like the Jeamni Massacre, during which Jeamni Church was burned and saints martyred, our ancestors of faith saw God working in the flames of the burning bush. God did not let even one of their prayers fall to the ground, and at last granted the amazing gift of liberation to this land.

 

Dear friends, the turmoil in Korean society and the pressures weighing on your personal lives are not the end. Just as the glory of resurrection comes after the suffering of Lent, our Lord who experienced our pain in His own body is working for us even now.

 

We are living in anxious times, worrying about our nation’s future. We are witnessing the danger of war, political instability, polarized public opinion, economic crisis, a crisis of national identity, and an uncertain future for the next generation. Many of you will be praying with groans, “God, do you see this nation? How long will you only listen to our suffering?”

 

But God speaks to us clearly through today’s passage:

 

“Do not worry. Surely I am watching. I have seen the tears you shed for the nation, I have heard them, and I know (empathize with) the pain of this people more than anyone.”

 

Dear Church, the prayers we offer for our country are by no means echoes scattered into the void.

 

Remember this. One hundred seven years ago, the tears shed by nameless believers on cold church floors were not in vain, and the Taegeukgi they carried and the cries of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did not vanish into emptiness. Our faithful ancestors entrusted this nation to the God who sees, hears, and knows, even in the pitch-dark night when independence seemed nowhere in sight. God did not let a single one of their prayers or cries fall to the ground, and finally He came down to this land and wrote a new history of liberation.

 

Perhaps many among us today carry heavy, burdensome loads. Many groan under the weight, living in despair and pain. ‘Who will even remember me?’

 

Are there any here who, like the place called Horeb, wear the label “desolate,” have the nameplate “garbage,” and stand in a place where everything seems hopeless?

 

Remember the Lord who calls us from the burning bush—a bush on fire yet unconsumed. We are not all burned up yet; we still have hope. Because God is present, Horeb—though called “desolate”—becomes holy ground.

 

Do you wonder how this country came to be in such a state? Even if the land is named “desolate,” let us remember that the Lord who calls us from the burning bush is still present. He has seen our suffering, he has heard us, and he knows our despair.

 

Indeed Jesus came to earth to know us better, to see our pain more clearly, and to hear our cries more deeply. He came to this world and experienced all the suffering and death that humans endure. That Lord is my Lord, our Lord.

 

What is Lent? It is the season in which we remember the Lord who drew near to us and bore our suffering. It is a time to give thanks as we recall the way of the Cross, the way of death taken by our Lord, the path that our Lord took to experience firsthand the terror of death that we might face.

 

The Lord who came down to suffer for me knows my pain; He empathizes, He sympathizes, and He grieves with me. God sees my place of suffering, hears our lamentations, and knows our suffering and despair.

 

This Lord is my Lord. This Lord is my God, my Jesus. Let us not despair. Whatever trials you may face, God’s people have hope. We have hope even beyond the threshold of death.

 

With this faith, may we at Somang Church pray for this country, for our people, for our families, and for our church, laboring and advancing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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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5~8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은 모세의 절망과 황폐함의 끝자락에서 그를 지켜보며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출애굽기 3장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는 한 사람과 그를 한순간도 잊지 않으신 하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호렙’이라는 곳에 서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호렙’은 ‘황폐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모세가 ‘쓸모없는 땅’, ‘버려진 땅’이라고 불리는 곳에 서 있습니다. 왕궁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살인자가 되어 도망쳐 나온 지 4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여든입니다. 80이 다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사업을 하지 못하고 장인의 양 떼를 돌보는 상황입니다. 그의 인생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80세가 되어 호렙에 선 모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모세는 시편 90편을 이때 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9~10)

 

모세가 직접 했던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80이라는 나이에 ‘황폐함’이라는 곳에 서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제 자기 인생에서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강건하면 80인 인생인데, 그의 나이는 이미 80에 이르렀습니다. 그저 장인의 양 떼를 치는 존재로 그의 삶은 저물어 가는 듯합니다. 그의 인생은 이렇게 황폐함으로 끝나고 마는 것일까요?

그런데 호렙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데,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이 붙었으면 당연히 타서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불에 타고 있습니다.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출 3:2b~3)

 

황폐라는 이름을 가진 호렙산에서 불타고 있던 나무는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불타고 있습니다. 모세는 호기심을 가지고 가까이 갑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출 3:4)

 

하나님은 모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왔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와 관련된 내용을 생략하고 있지만, 모세에게는 엄청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인생도 보고 계시는가? 인생을 마감할 80의 나이까지 초라한 삶을 살아온 나를 주님이 기억하시는가? 아마도 이 순간이 그에게는 큰 감동과 감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모든 삶을 보고 계셨고, 그의 모든 것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황폐’라는 이름의 장소에서 모세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서 있을 수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 그리고 우리나라와 오늘 우리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

 

어떻게 황폐라는 이름을 가진 땅이 하나님에게는 거룩한 땅이 될 수 있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황폐해진 땅,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땅에 지금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이 불붙은 떨기나무입니다. 불이 붙었다면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아직도 살아서 불타고 있습니다. 소멸하지 않고, 도리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기세입니다.

이 황폐한 호렙에서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여러 가지로 묵상이 가능합니다. 저는 이 나무를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이 나무 앞에 서 있는 모세가 아닐까요? 이미 80이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황폐해져서 이제는 소멸해야 하지만, 아직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십니다. 또한 모세는 새로운 일을 맡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이 황폐한 땅에서 불붙어 있으면서도 생존하고 있는 떨기나무는 애굽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닐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황폐한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압제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끊어지지 않았고, 소멸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불붙어 있습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이 불붙은 떨기나무는 107년 전, 나라 없는 설움 속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우리 선조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때 우리나라의 상황을 호렙에 있는 모세와 비교해서 보면 이러한 것들이 떠오릅니다. 불타서 없어지게 될 민족,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 속에 있는 백성들, 다 끝난 것 같은 황폐한 곳이 되어버린 조선 땅,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의 신음. 그럼에도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여전히 소멸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나무가 우리 민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오늘날 고통의 현장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사라질 것만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우리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중에도 절망한 채 황폐라는 이름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타는 떨기나무에는 아직도 불이 붙어 있습니다. 타고 있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그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황폐한 땅 호렙에서 불붙은 나무의 운명은 곧 쓰러지고 없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여전히 불타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러하고, 애굽에서 탄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합니다. 또한 1919년 태극기를 들고 나섰던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삶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아시며, 우리의 믿음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출 3:7,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세 가지 중요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보았고’, ‘들었고’,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에서 하나님이 우리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보았다’라는 표현을 ‘라오 라이티’(רָאֹ֥ה רָאִ֛יתִי[Raoh Raiti])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라아’(רָאָה[raah])가 두 번 반복 사용되는 형태입니다. 강조의 표현으로서, 다시 말하면 ‘보고 또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고 계셨고, 보아 오신 모습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채찍에 맞고 있을 때 터져 나오는 핏방울을 보고 또 보셨고, 자식을 나일강에 던져야 했던 어머니의 피눈물을 보고 또 보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들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들으셨을까요? 우리의 세련된 기도와 잘 정돈된 논리적인 기도를 들으셨을까요? 아니면 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으셨을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출 3:7, 새번역)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체아카(צַעֲקָה[tseaqah]), 곧 비명(a shriek)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비명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잘 정돈된 착한 사람들의 기도만을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행동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나서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벗어나 버려지고 내쳐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비명까지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보고 들으신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단어에 사용된 히브리어 ‘야다’(יָדַע[Yada])는 지식으로서의 앎을 뜻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깊이 알듯, 어머니가 자식의 아픈 부위를 만지며 느끼듯,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짓밟혔는지를 자신의 가슴으로 직접 느끼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고, 듣고, 알고 계셨다면 왜 모세는 40여 년 동안 광야에서 버려진 것처럼 살아야만 했을까요?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종살이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그때도 보고, 듣고 계시지 않으셨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오늘의 본문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알려 줍니다. 오늘의 본문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출 3:4a)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호렙산에 불꽃을 피워 두고 모세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며 방황하던 시간은 사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신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었을까요? 40년 전부터, 혹은 35년 전부터 불을 붙이고 기다리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황폐해진 땅이라 이름 붙은 곳에서 모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힘을 모두 빼고 의지의 신을 벗으며 오직 하나님의 불꽃만을 바라보고 돌이켜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40년의 시간은 잊힌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공하며 만들어 가셨던 기간이었고,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셨던 은밀한 보호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인생이 광야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아서 두려워하는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관심을 두기 훨씬 전부터 이미 마중 나와 계십니다. 황폐해진 땅이라는 이름 앞에 불꽃을 피워 놓고 주님의 임재를 보여 주시면서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작은 반응 하나만을 원하시며 숨죽이고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심으로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듯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결국 8절의 위대한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출 3:8a)

 

그리고 이 결단은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내기 위하여 모세를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대신해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한 사건이 떠오릅니다. 먼 훗날, 주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성육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모든 고통을 함께 체험하시고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보고, 듣고, 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죽어 가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의 아들이 인간의 고통을 직접 보고, 그들의 비명을 듣고, 그들의 두려움과 절망을 알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사실 이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모르시겠습니까? 꼭 내려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만 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주님이 우리의 고난을 잘 아신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바라만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건지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고통의 진창 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신비를 ‘체휼’(體恤)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체휼은 몸 체(體) 자에 긍휼히 여길 휼(恤) 자를 사용합니다. 몸(體)으로 우리 아픔을 긍휼(恤)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히 4:15a, 개역한글)

헬라어로는 ‘쉼파데오’(συμπαθέω, sympathize)로 공감한다, 연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우리가 겪는 배고픔을 직접 느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당하는 배신의 아픔을 직접 경험하셨으며,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의 공포를 십자가 위에서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은 그 사실을 더 설득력 있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결국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순절에 묵상해야 할 주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아플 때 나의 아픔을 함께 알아주시고, 내가 울 때 함께 내 옆에서 울고 계십니다. “주님은 아신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 속에는 “내가 네 고통을 나의 몸으로 다 겪어 보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다”라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 체휼의 사랑을 보여 주는 여러 장면이 나옵니다. 그중에 나인성의 사건이 있습니다. 주님은 성문으로 나오던 한 장례예식과 마주치십니다. 그 중심에는 독자를 잃어버리고 무너져 내린 한 과부가 있습니다. 그는 남편도 잃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잃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3)

 

“안타깝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표현에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함께 느끼셨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네 슬픔을 이미 내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이 짐을 함께 지겠다”라는 주님의 위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관에 직접 손을 대십니다. 율법으로 부정해지는 일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절망 중에 울고 있는 나인성 과부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여인의 절망을 자신의 것으로 체휼하시고, 죽음의 슬픔을 생명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와 함께하시며 불붙은 떨기나무 앞의 모세와 같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경 속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은혜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도 유구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38년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라고 호소하며 절망 속에 누워 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민족 역시 그랬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일제의 압제 아래 신음하며 “누가 우리를 구원해 줄까” 탄식하던 환자와 같았습니다.

107년 전 오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우리 선조들의 만세 소리는 세력을 자랑하는 움직임이나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민족의 거대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들,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소리를 높였습니다. 당시 인구의 2%도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이 독립선언서 서명자의 절반을 차지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채찍을 맞으며 차가운 감옥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애굽의 하나님이 조선을 보고 계시고, 이 민족의 고통을 알고 계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주님께서 조선을 체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비록 제암리교회가 불타고 성도들이 순교당하는 참혹한 현실이 일어났지만, 그들은 도리어 그곳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 정치의 불안, 분열된 국론, 경제적 위기, 국가 정체성의 위기, 그리고 불안한 다음 세대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하나님, 이 민족을 안 보고 계십니까? 언제까지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냥 놓아두실 것입니까?” 이와 같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보고 있고, 듣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너희 백성의 고통을 치유하고 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구국 기도는 결코 허공에서 흩어지는 메아리가 아닙니다. 107년 전, 이름 없는 성도들이 차가운 교회 바닥에 엎드려 흘렸던 눈물은 헛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들고 나갔던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의 외침은 결코 허공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당장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중에도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라를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와 외침을 단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셨고, 마침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해방의 새 역사를 써 주셨습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 중에는 무겁고 큰 짐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워서 신음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기억해 줄까? ‘호렙’이라는 이름처럼 ‘황폐’라는 명패를 들고 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자리에 서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자리에 불붙는 떨기나무를 두시고 타지 않는 나무를 보여 주시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우리는 타지 않았고, 아직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황폐해지지 않았고, 주님께서는 그곳에 생명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결국 호렙은 거룩한 땅이 됩니다.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나 하고 생각하십니까? 황폐라는 이름의 땅이 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더욱 힘써 기도합시다. 사순절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신 주님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로 가셔서 우리가 당할 죽음의 공포를 직접 경험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사순절은 그 주님의 길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나를 위해 고난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주님은 나의 고통을 아시고 공감하시며 함께 아파하십니다.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떤 고난 속에 있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여러분의 사순절과 3·1절 기념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 (출3:5~8)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37, 550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 같아 불안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80세가 된 모세는 호렙산에 서 있습니다. 호렙은 ‘황폐하다’는 뜻입니다. 왕궁을 떠나 도망친 지 40년, 여전히 장인의 양떼를 돌보는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이 불붙는 떨기나무는 모세 자신이자, 애굽의 이스라엘이며, 107년 전 독립만세를 외쳤던 우리 선조들이고, 오늘 고통 속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황폐한 땅이 거룩한 땅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선언하십니다. 첫째, 보셨습니다. “보고 또 보았다”는 강조로, 채찍에 맞아 터지는 핏방울과 어머니들의 피눈물을 직시하셨습니다. 둘째, 들으셨습니다. 비명소리, 울부짖음, 신음을 들으셨습니다. 셋째, 아십니다.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직접 느끼는 체험적 앎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관찰자’가 아니라 ‘동참자’이십니다. 모세의 40년은 잊혀진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공하시던 은밀한 보호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라는 하나님의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우리의 배고픔, 배신, 죽음을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이 ‘체휼’입니다. 몸으로 우리 아픔을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107년 전 오늘, 기독교인들이 거리로 나서며 출애굽의 하나님이 조선의 고통을 보고, 듣고, 체휼하심을 믿었습니다. 순교와 핍박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단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해방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이 민족을 보고 계십니까?”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정녕 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황폐한 호렙도 하나님이 계시면 거룩한 땅입니다. 불붙는 떨기나무는 아직 타지 않았습니다. 사순절은 우리 고통을 체휼하신 주님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누기>

1. 사순절을 맞아, 우리의 고통을 체휼하시려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주님께 맡겨드릴 것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보고 듣고 아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우리는 사순절의 깊은 묵상 가운데 우리 곁으로 내려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나인 성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관에 손을 대셨던 주님, 38년 된 병자의 고독을 아시고 먼저 찾아가셨던 그 주님이, 오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이 자리에 나온 우리 성도들을 만나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사회와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을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107년 전 이 민족의 절규를 들으시고 회복의 길을 여셨던 것처럼, 오늘날 갈등과 위기 속에 있는 이 나라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육체의 질병으로, 마음의 상처로 신음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내가 네 고통을 알고, 내가 너를 도우러 내려왔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가 절망의 신을 벗고, 소망의 주님을 의지하며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보고 듣고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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