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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 교회를 둘러싸고 여러 비판적인 평가가 따릅니다.>
어느 날 평화방송을 통해서 가톨릭의 사제 서품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장로교로 말하자면 사제 서품식은 목사 안수식, 임직식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예배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가톨릭의 사제 서품식을 보면서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식이 보여 주는 장엄함 때문이었는데요. 특히나 예식 가운데 사제가 바짝 엎드리어 서품을 받는 장면은 하이라이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는 모든 분들이 바닥에 엎드리고, 손과 머리 사이에는 그가 평생에 입을 제의가 놓입니다. 이 장면은 정말이지 보는 사람마다 큰 감동을 안겨 줍니다.
저의 눈길을 끌었던 또 다른 것은, 사제들을 향한 강복 선언이었습니다. 기도는 굉장히 길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성부이신 하나님께서 사제로 서품을 받는 그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이어진 후에 “성령이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함께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후로 이어지는 기도문을 들으면서 제 마음에 들었던 부러움이 살짝 사라지기도 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 성 미가엘 천사, 베드로, 바울과 같은 여러 사도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 니콜라우스, 성 안토니우스와 같은 성인들의 이름도 계속 거명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저는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강복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성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강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사제의 직분이 수많은 사도들, 성인들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개신교인인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에서 벗어나 바른 신앙을 외쳤던 종교 개혁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우리가 바른 신앙 안에 서 있는지를 다시금 점검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종교 개혁 50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과연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안타깝기도 하고, 두려움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중세 시대 교회와 많이 닮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종종 듣곤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른 신앙에 서 있습니까? 교회사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중세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타락의 시대, 변질의 시대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예배학자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중세는 암흑기라기보다는 성장기 혹은 발전기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 시대야말로 예배의 순서가 다양화되고, 화려해진 시기였습니다. 대부분의 가톨릭 미사의 순서와 내용이 이 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또 중세 시대처럼 목회적 프로그램이 많은 시기도 드물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당 안에서는 개인적인 미사가 매일 있었고요. 가족 중 아픈 사람을 위한 미사, 사업을 위한 미사도 드려졌습니다. 심지어 결혼할 대상을 찾는 미사도 드려졌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때 영혼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미사, 소위 ‘영혼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미사’가 드려지기도 했습니다. 도둑을 잡기 위한 미사도 있었고요. 도난당한 물건을 찾기 위한 미사도 드려졌다는 기록이 함께합니다.
신도들의 깊은 영성을 유지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많았습니다. 매일 아침 드리는 조도, 낮에 드리는 중도, 저녁에 드리는 만도로서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도들에게 권장되었습니다. 성지 순례와 같은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고행을 위한 프로그램, 면죄부와 같은 헌금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수도원이 건립되었고, 그곳에 들어가서 수도하는 수도사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멋지고 화려한 예배당이 대부분 지어졌죠. 성 베드로 성당이나 노트르담 성당과 같이 유럽에 가시면 보게 되는 화려한 성전 대부분이 중세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건한 교인일수록 매번 미사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고행에도 참여하고, 성진을 짓는 데도 헌신했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 역시 중세 시대에 태어난 인물입니다. 중세 교회가 가르치던 고행과 수행을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루터와 관련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로마를 방문한 1510년의 이야기는 참 유명합니다.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라테란 성당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곳에 싸클라 상타(Scala Sancta)라고 불리우는 28개 계단으로 된 ‘빌라도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 계셨던 바로 그 계단을 뜯어다가 성당에 들여놓은 것입니다. 중세 교회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이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오를 때마다 연옥에서 받을 형벌이 감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루터 역시 그 계단을 올라갑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28개 계단을 다 올라가지만 마음에는 아무런 평안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때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Bainton, Here I Stand, pp.46-51). 유명한 그의 말입니다.
<중세 교회와 달리 초대 교회는 구원의 확신으로 가득했습니다.>
자, 그런데 왜 후대의 사람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평가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적어도 종교 개혁가들은 중세 교회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보다는 절망과 신앙의 왜곡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후세 역사가들은 중세 교회의 문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영적 불안감에 휩싸여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정작 교회는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목회적 프로그램을 공급해 주기는 하였지만 그런 것들이 영적인 불안감을 해소시키기보다는 도리어 증폭시켰고,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중세 교회가 거대한 외모를 자랑할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교인들은 피곤하고 확신 없는 종교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그들 안에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참된 자유가 선포되지 못하였고,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중세 교회와는 참으로 달랐습니다.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건물에 모일 수도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만들 수도 없었고요. 정교화된 예배 순서를 갖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분명했습니다. 카타콤이라는 지하 공동 무덤에 모여서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려야 했지만 시신이 묻힌 그곳에서 도리어 예수의 부활을 외치며 환호했고, 부활 신앙을 더욱 확실하게 다지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신앙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움이 아니었고 박해와 고난은 순교의 대열에 참여할 영광스런 기회가 되었습니다. 가난도, 고통도 더 이상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중세 교회를 닮았다는 비판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본다면 일리 있는 비판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새벽기도회가 있고요. 부흥사경회도 드립니다. 주간의 많은 예배, 심방 예배, 성지 순례, 선교지 방문, 각종 기도원에서는 신유 은사 집회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마시면 좋다는 생수가 기도원에서 판매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생활이 우리를 해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목마르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늘 예배드리고 봉사하면서도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바른 신앙 안에 서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 중에서 서두 부분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수고를 격려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살전 1:2~3,6~7 새번역)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칭찬받는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을까요?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서 사람들을 교육해서일까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였을까요? 좋은 예배당이 있어서였을까요? 좋은 선생님을 구하였기 때문일까요? 데살로니가 교회와 관련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사도행전을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습니다. 사역을 많이 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방문한 곳이었습니다. 빌립보를 거쳐서 데살로니가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베뢰아에서 아테네로 움직이는 일정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방문 이야기는 사도행전 17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곳에서 박해가 일어났고,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잡아 가두게 됩니다. 결국 야손이 보석금을 내주어 데살로니가를 도망가듯 빠져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경험한 데살로니가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곳에서 소식이 들려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이 주변 지역에 자자하게 번져 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전한 복음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살전 1:4~5 중)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의 능력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큰 확신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복음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확신으로 변하였고, 능력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일은 별로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확신 곧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진정 자유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 속에서 우리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며 능력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이 곧 복음이요,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도 복음이며,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는 것도 복음이고, 영원한 희망으로 인도하는 것도 복음입니다. 저는 이곳에 모인 소망의 모든 성도님과 온라인, 방송 채널을 통해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경험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교회의 예배당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목회적인 프로그램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기 위한 돕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진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표현하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살리고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짜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두렵고 떨게 만드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중요한 한 가지 단서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매여 있다’는 전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매여 있으십니까? 아마 그것이 무엇인지는 개인적으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심에 매여 살아가기도 하고, 걱정에 매여 살아가기도 하고 또는 자녀의 문제, 미래에 대한 염려에 매여 살아가기도 합니다. 병에 걸릴 것을 걱정하기도 하죠. 가난해질 것을 근심하며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매임으로부터 풀어 주는 것이 곧 진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각자가 매여 있는 것이 다 다른 것 같지만 근원으로 돌아가 보면 ‘죽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병을 두려워합니다. 죽을 것을 두려워하죠.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도 거슬러 올라가면 고생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죽게 될 것을 걱정합니다. 결국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에는 사망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이 죽음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죄로부터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단절을 극복하고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 관계를 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음의 사슬을 풀어 주셨고, 죽음의 권세를 깨트려 주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망에 매여 있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명상이나 나름대로의 수행으로 죽음의 문제는 극복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참된 해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의 것으로 만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마침내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확신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 슬픈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주간 저의 집에는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장모님께서 하나님의 품으로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생전에 부고를 내지 말라, 빈소를 차리지 말라, 문상을 받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기 때문에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환송받는 것보다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이 훨씬 더 기쁘다는 유지를 받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바로 그날, 마지막 거친 호흡을 내쉴 때 곁에서 저는 함께해 드리며 임종 기도와 함께 격려의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때 장모님의 얼굴이 참으로 환히 밝아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치 마지막 지점에서 피니쉬를 하는 것 같은, 정말이지 웃으면서 마지막을 달려가시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 주셔서 제가 얼마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다음 날 아침 새벽 기도 본문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제가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복음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 해방!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내세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감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실패 속에서도, 좌절 속에서도, 병중에서도 그 모든 것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속에 모든 염려와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의 선포가 우리가 누리는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바른 신앙이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고백을 읽어 드립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The Power of The Gospel
1 Thessalonians 1:2-7
I once watched an ordination ceremony of priests on Catholic Peace Broadcasting.As someone with an interest in liturgical studies, I watched it with a tinge of envy.I felt a bit envious because the ceremony was so dignified. It was truly solemn.
The Catholic ordination of priests may be compared to the Protestant ordination of pastors, elders, and deacons. The highlight of the former is the part where the priestsliterally prostrate themselves. Tens of ordinands stretch themselves, face down, on the floor covered with white cloth before the altar. Their hands are laidunder their foreheads, holding in between the vestment they will wear for the rest of their lives. The sight of so many priests prostrating themselves in such a magnificent space was truly powerful, almost bringing tears to my eyes.
I was particularly drawn to the long prayer that was recited as theordinands lay prostrated. The prayer, blessing the newly ordained priests, lasted 15-20 minutes. Its contents were roughly as follows: First, may God the Father bless the ordinands. May Jesus the Son bless them too. Then the supplicant asked the Holy Spirit to bless them. Then he asked the Trinity God to bless them again. It was fine to this point.
But in the next part I confirmed a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 Catholic Church andthe Protestant Church.
The next part of the prayer was this. First, may Holy Mary bless them. Then the supplicant called the names of many angels such as St. Michael, asking for their blessing. Then he called the names of each of the apostles, including John, Paul, and Peter, asking for their blessing. Then countless names of Catholic saints were invoked, including St. Nicholas, St. Anthony, and others, to ask for their blessing over the ordinands.
Listening to that prayer, I felt the enduring difference between Catholicism and Protestantism. Wasn’t it enough to pray to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that is, the Holy Trinity? Why did other names have to be called upon to ask for their blessings?
Of course, such a rite may be observed to show that a priest’s duty is linked to the work of the apostles, angels, and saints; yetit might result in giving glory to the saints, the apostles, or Mary, instead ofGod.
Today is Reformation Sunday. It is a day to remember the Reformation, a movement that sought to depart from the corruption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follow the right faith. It is also a day to review ourselves to see if we are following that right faith. However, after 506 years since the Reformation, can we confidently say today that we are following the right faith? This question makes us afraid. Todaymany criticize the Protestant Church andKorean churches, sayingthat their plight is no different from that of the Catholic Church in the Middle Ages.
So are we keeping the right faith today? If things need to be corrected, what are those?
In spite of the term “Dark Ages,” the Middles Ages was, in a sense, a period of development and progress in terms of liturgy. In particular, the order of liturgy developed to the highest degree, boasting an unparalleledextravagance and diversity. The order and contents of the Catholic mass were established mostly in this period.
No other periodsaw as many,or diverse, pastoral programs as the Middle Ages. For example, there were private masses every day in the church. These were for special needs such as sick family members, business, finding a spouse and so on. Such masses developed to includeeven masses for relieving the soul’s pain at death, catching thieves, retrieving lost goods, and so on.
The medieval church also had many programs to help believers maintain a deep spirituality. It encouraged believers to give daily prayers in the morning, in the mid-afternoon, and in the evening, respectively called lauds, nones, and vespers. There were also programs like pilgrimages to the Holy Land. There were also various practices such as penance and offerings, includingindulgences.
Countless monasteries were built in the Middle Ages and many monks entered them to practice asceticism. Furthermore, magnificent cathedrals were built. Many grand and extravagant cathedrals were completed in various parts of Europe, such as St. Peter’s Basilica and the Notre Dame Cathedral, and the churchserved as the landmark of every village.
Come to think of it, no other period saw a greater diversity of pastoral programs than the Middle Ages. Medieval Christians could participate in diverse church activities and felt a holy fear every time they attended mass at their imposing cathedrals. The holier one was, the more devoted he/she would have been in attending mass, practicing penance, building cathedrals, and buying indulgences.
Martin Luther who began the Protestant Reformation was born in such a period. He tried to keep his faith by repeatedly practicing penance and asceticism in accordance with the teachings of the medieval church. You may have heard this famous anecdote about his life.
Luther visits Rome around 1510. There he climbs, on his hands and knees, the Scala Sancta (“holy stairs” in Latin), which are a set of 28 steps called the “the Stairs of Pilate” situated near the Basilica of Saint John Lateran. According to the Church in the Middle Ages, one’s punishment in purgatory could be reduced by climbing these steps reciting the Lord’s Prayer on each step. Although Luther ascended them kissing each one of the 28 steps, he felt no peace. At the top he is said to have murmured, “Who knows whether this is true?”(Bainton, Here I Stand, pp.46-51).
Yet posterity havecalled this extravagant period the “Dark Ages” or the “Age of Corruption.” Why was it a dark and corrupt age? There areseveral reasons why it is seen as a “Dark Age” for the church.
Reformers saw a despair and a distortion of faith, instead of a hope,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What was the problem? What was distorted?
Posterior historians summarize the problems of the medieval church as follows:
The problem of the medieval church was one. It failed to convey the essence of the Gospel in response to the spiritual anxiety felt by the people. The many programs and activities of the church only added to people’s confusion, rather than easetheir spiritual apprehension; they made people become obsessed with the notion that one must do more for his/her salvation.
The medieval church may have succeeded in boasting a magnificent appearance by such ways, butChristians,its very members,gradually lost spiritual conviction and were forced to lead a religious life of exhaustion and insecurity.
In short, the church in the Middle Ages had diverse religious activities, but Christians felt no true joy of freedom and truth. This is why it is called the “Dark Ages.”
The Early Church was different, however. It was full of conviction. To escape persecution, early Christians even gathered in catacombs, underground tombs, for worship. There they cried out in joy that Jesus was risen, truly risen. They did not fear death; persecution and trials were only a glorious opportunity to participate in martyrdom.
Today many people point out that churches, especially the Protestant Church and the Korean Church, resemble the Catholic Church of the Middle Ages. The reasonsfor their claimvary. But if we look at what is happening in faith life and church activities today, this criticism seems quite valid.
Today Korean churches have early morning prayer services. They have revivals. There are many services during the week. There are services during pastoral visits. Christians go on pilgrimages to the Holy Land and mission trips; they also attend various healing services held in prayer houses. In the past,some prayer houses even sold water, saying it was good and curative.
But all these activities do not quench our spiritual thirst; instead, we are more thirsty. We feel that we are still incomplete, that we have not reached the final stage. We always feel lacking; there is no true freedom in us.
What is the problem?
Today’s Scripture is the introductory passage of Paul’s letter to the church in Thessalonica. Paul does not spare praise for the Thessalonians, encouraging their hard work and thanking God for them:
“We always thank God for all of you, mentioning you in our prayers.We continually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You became imitators of us and of the Lord; in spite of severe suffering, you welcomed the message with the joy given by the Holy Spirit.And so you became a model to all the believers in Macedonia and Achaia.(1 Thessalonians 1:2-3, 6-7)
How did the church in Thessalonica become such a praised, model church? By training its members for a long time through hard efforts?Through good programs, good teachers, and good training?
Although we cannot know the entire circumstances of the church in Thessalonica, according to Acts, it seems Paul did not stay long there; neither did he do a lot of ministry.
As you know, Paul visited Thessalonica during his second mission trip. His itinerary was Philippi, Thessalonica, Berea, and finally Athens in that order. His visit to Thessalonica is mentioned in Acts 17.
But what happened in Thessalonica? Paul was there for only 3 weeks. After this visit, there was a persecution against the church, and the Jews started to arrest Christians in Thessalonica. Jason eventually had to flee Thessalonica after posting bond. That’s it.
But the news about the church in Thessalonica after these incidents are truly beautiful. These beautiful rumors spread to many neighboring regions.
How did this happen?
This is what Paul says about the Gospel he preached to the Thessalonians:
“For we know, brothers loved by God, that he has chosen you,because our gospel came to you not simply with words, but also with power,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deep conviction.” (1 Thessalonians 1:4-5)
Paul is saying that the church in Thessalonica is growing throughthe power of the Gospel and through the great conviction given them by the Holy Spirit. He is confessing it is not a program or an activitythat isgrowing the church; it is the Gospel that builds and grows the church.
Paul merely left the Gospel with the Christians in Thessalonica. But throug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theGospelproduced in them a deep conviction and a great power.
In Paul’s letter to the church in Thessalonica we realize the greatness and power of the Gospel. It is the Gospel that saves us, liberates us, and gives us true freedom, leading us to an everlasting hope.
It is my hope that every member of Somang Church and everyone listening to this message online or on TV will experience the power of the Gospel. May you receive true freedom and liberty through the Gospel.
The Gospel that Apostle Paul delivered to the Thessalonians in Acts 17 is this: “Jesus is the Christ; He suffered and died, but was raised from the dead.”
These simple words save and liberate us.
Our Lord said: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John 8:32)
Our Lord said that He and His words are the truth, that these will set us free.
Truth frees us. It saves and liberates us. Truth does not bind or confine us. It does not make us tremble in fear.
Some religions and teachings say that true freedom can be gained through meditation or training. But no hard work or training will ever get us to true freedom. It is because man is bound to something. Death proves this.
Man trembles before death. His existence will surely disappear upon death. Death is so close to us; but we have no means to overcome it. No meditation or training will ever defeat it. The Bible teaches that death came from man’s sin after his separation from God. The reason man is not free is because he has become separated from the eternal God.
To resolve this problem, we must solve the problem of separation. Only then can we overcome death and reach true freedom.
This problem of separation cannot be solved by man’smere imagination, thoughts, or meditation. To solve this problem, Jesus, the Son of God, had to come to earth and die on the Cross for man; this is how man wasreconnected to God.
Paul says:
“Therefore, there is now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Romans 8:1-2)
Yes. To believe in Christ means to accept the things God has done for us and to take them to our hearts. It is this faith that saves us. This faith will finally set us free.
The power of the Gospel works through the Spirit. Furthermore, it gives us conviction. It is my deepest hope that every member of our church will be full of this power of the Gospel. I hope that Somang Church will be full ofit.
Therefore, let us take to heart Paul’s confession: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because it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Romans 1:16-17)
데살로니가전서 1: 2~7
2~7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중세 시대 교회를 둘러싸고 여러 비판적인 평가가 따릅니다.>
어느 날 평화방송을 통해서 가톨릭의 사제 서품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장로교로 말하자면 사제 서품식은 목사 안수식, 임직식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예배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가톨릭의 사제 서품식을 보면서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식이 보여 주는 장엄함 때문이었는데요. 특히나 예식 가운데 사제가 바짝 엎드리어 서품을 받는 장면은 하이라이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는 모든 분들이 바닥에 엎드리고, 손과 머리 사이에는 그가 평생에 입을 제의가 놓입니다. 이 장면은 정말이지 보는 사람마다 큰 감동을 안겨 줍니다.
저의 눈길을 끌었던 또 다른 것은, 사제들을 향한 강복 선언이었습니다. 기도는 굉장히 길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성부이신 하나님께서 사제로 서품을 받는 그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이어진 후에 “성령이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함께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후로 이어지는 기도문을 들으면서 제 마음에 들었던 부러움이 살짝 사라지기도 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 성 미가엘 천사, 베드로, 바울과 같은 여러 사도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 니콜라우스, 성 안토니우스와 같은 성인들의 이름도 계속 거명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저는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강복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성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강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사제의 직분이 수많은 사도들, 성인들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개신교인인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에서 벗어나 바른 신앙을 외쳤던 종교 개혁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우리가 바른 신앙 안에 서 있는지를 다시금 점검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종교 개혁 50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과연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안타깝기도 하고, 두려움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중세 시대 교회와 많이 닮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종종 듣곤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른 신앙에 서 있습니까? 교회사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중세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타락의 시대, 변질의 시대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예배학자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중세는 암흑기라기보다는 성장기 혹은 발전기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 시대야말로 예배의 순서가 다양화되고, 화려해진 시기였습니다. 대부분의 가톨릭 미사의 순서와 내용이 이 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또 중세 시대처럼 목회적 프로그램이 많은 시기도 드물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당 안에서는 개인적인 미사가 매일 있었고요. 가족 중 아픈 사람을 위한 미사, 사업을 위한 미사도 드려졌습니다. 심지어 결혼할 대상을 찾는 미사도 드려졌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때 영혼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미사, 소위 ‘영혼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미사’가 드려지기도 했습니다. 도둑을 잡기 위한 미사도 있었고요. 도난당한 물건을 찾기 위한 미사도 드려졌다는 기록이 함께합니다.
신도들의 깊은 영성을 유지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많았습니다. 매일 아침 드리는 조도, 낮에 드리는 중도, 저녁에 드리는 만도로서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도들에게 권장되었습니다. 성지 순례와 같은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고행을 위한 프로그램, 면죄부와 같은 헌금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수도원이 건립되었고, 그곳에 들어가서 수도하는 수도사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멋지고 화려한 예배당이 대부분 지어졌죠. 성 베드로 성당이나 노트르담 성당과 같이 유럽에 가시면 보게 되는 화려한 성전 대부분이 중세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건한 교인일수록 매번 미사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고행에도 참여하고, 성진을 짓는 데도 헌신했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 역시 중세 시대에 태어난 인물입니다. 중세 교회가 가르치던 고행과 수행을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루터와 관련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로마를 방문한 1510년의 이야기는 참 유명합니다.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라테란 성당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곳에 싸클라 상타(Scala Sancta)라고 불리우는 28개 계단으로 된 ‘빌라도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 계셨던 바로 그 계단을 뜯어다가 성당에 들여놓은 것입니다. 중세 교회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이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오를 때마다 연옥에서 받을 형벌이 감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루터 역시 그 계단을 올라갑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28개 계단을 다 올라가지만 마음에는 아무런 평안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때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Bainton, Here I Stand, pp.46-51). 유명한 그의 말입니다.
<중세 교회와 달리 초대 교회는 구원의 확신으로 가득했습니다.>
자, 그런데 왜 후대의 사람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평가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적어도 종교 개혁가들은 중세 교회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보다는 절망과 신앙의 왜곡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후세 역사가들은 중세 교회의 문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영적 불안감에 휩싸여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정작 교회는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목회적 프로그램을 공급해 주기는 하였지만 그런 것들이 영적인 불안감을 해소시키기보다는 도리어 증폭시켰고,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중세 교회가 거대한 외모를 자랑할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교인들은 피곤하고 확신 없는 종교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그들 안에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참된 자유가 선포되지 못하였고,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중세 교회와는 참으로 달랐습니다.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건물에 모일 수도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만들 수도 없었고요. 정교화된 예배 순서를 갖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분명했습니다. 카타콤이라는 지하 공동 무덤에 모여서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려야 했지만 시신이 묻힌 그곳에서 도리어 예수의 부활을 외치며 환호했고, 부활 신앙을 더욱 확실하게 다지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신앙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움이 아니었고 박해와 고난은 순교의 대열에 참여할 영광스런 기회가 되었습니다. 가난도, 고통도 더 이상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중세 교회를 닮았다는 비판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본다면 일리 있는 비판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새벽기도회가 있고요. 부흥사경회도 드립니다. 주간의 많은 예배, 심방 예배, 성지 순례, 선교지 방문, 각종 기도원에서는 신유 은사 집회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마시면 좋다는 생수가 기도원에서 판매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생활이 우리를 해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목마르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늘 예배드리고 봉사하면서도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바른 신앙 안에 서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 중에서 서두 부분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수고를 격려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살전 1:2~3,6~7 새번역)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칭찬받는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을까요?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서 사람들을 교육해서일까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였을까요? 좋은 예배당이 있어서였을까요? 좋은 선생님을 구하였기 때문일까요? 데살로니가 교회와 관련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사도행전을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습니다. 사역을 많이 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방문한 곳이었습니다. 빌립보를 거쳐서 데살로니가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베뢰아에서 아테네로 움직이는 일정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방문 이야기는 사도행전 17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곳에서 박해가 일어났고,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잡아 가두게 됩니다. 결국 야손이 보석금을 내주어 데살로니가를 도망가듯 빠져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경험한 데살로니가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곳에서 소식이 들려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이 주변 지역에 자자하게 번져 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전한 복음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살전 1:4~5 중)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의 능력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큰 확신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복음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확신으로 변하였고, 능력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일은 별로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확신 곧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진정 자유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 속에서 우리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며 능력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이 곧 복음이요,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도 복음이며,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는 것도 복음이고, 영원한 희망으로 인도하는 것도 복음입니다. 저는 이곳에 모인 소망의 모든 성도님과 온라인, 방송 채널을 통해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경험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교회의 예배당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목회적인 프로그램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기 위한 돕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진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표현하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살리고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짜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두렵고 떨게 만드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중요한 한 가지 단서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매여 있다’는 전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매여 있으십니까? 아마 그것이 무엇인지는 개인적으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심에 매여 살아가기도 하고, 걱정에 매여 살아가기도 하고 또는 자녀의 문제, 미래에 대한 염려에 매여 살아가기도 합니다. 병에 걸릴 것을 걱정하기도 하죠. 가난해질 것을 근심하며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매임으로부터 풀어 주는 것이 곧 진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각자가 매여 있는 것이 다 다른 것 같지만 근원으로 돌아가 보면 ‘죽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병을 두려워합니다. 죽을 것을 두려워하죠.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도 거슬러 올라가면 고생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죽게 될 것을 걱정합니다. 결국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에는 사망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이 죽음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죄로부터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단절을 극복하고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 관계를 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음의 사슬을 풀어 주셨고, 죽음의 권세를 깨트려 주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망에 매여 있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명상이나 나름대로의 수행으로 죽음의 문제는 극복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참된 해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의 것으로 만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마침내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확신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 슬픈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주간 저의 집에는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장모님께서 하나님의 품으로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생전에 부고를 내지 말라, 빈소를 차리지 말라, 문상을 받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기 때문에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환송받는 것보다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이 훨씬 더 기쁘다는 유지를 받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바로 그날, 마지막 거친 호흡을 내쉴 때 곁에서 저는 함께해 드리며 임종 기도와 함께 격려의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때 장모님의 얼굴이 참으로 환히 밝아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치 마지막 지점에서 피니쉬를 하는 것 같은, 정말이지 웃으면서 마지막을 달려가시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 주셔서 제가 얼마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다음 날 아침 새벽 기도 본문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제가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복음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 해방!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내세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감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실패 속에서도, 좌절 속에서도, 병중에서도 그 모든 것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속에 모든 염려와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의 선포가 우리가 누리는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바른 신앙이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고백을 읽어 드립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2023년 10월 29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복음의 능력” (살전 1장 2~7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93장, 545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살전 1:2~7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10월 2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은(10/29 주일)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에서 벗어나, 바른 신앙으로 출발한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그 바른 신앙의 길을 다시 점검하는 날입니다. 종교개혁 506주년이 되는 오늘, 과연 우리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바른 신앙에 여전히 서 있는지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설교의 요약
종교개혁가들이 보는 중세교회의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그 당시 교회가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영적인 불안감에 대해 복음의 핵심을 잘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중세교회는 다양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가진 영적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보다는 계속되는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했습니다. 중세교회는 거대한 외모를 자랑했지만, 교회 구성원인 교인들은 영적인 자신감에서 멀어져 가고, 피곤하고 확신 없는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카타콤이라는 지하 공동무덤에서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정말 부활하셨습니다.”를 외치면서 환호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었고, 박해와 고난은 도리어 순교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칭찬 받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겨우 3주간 머물렀고, 많은 사역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그저 복음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 복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확신으로 나타났고 능력으로 드러났습니다. 복음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살리고, 해방케 하며, 참된 자유를 주었습니다. 복음은 그들을 영원한 희망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허락하는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가 매어있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매어 있음을 확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고, 죽음 앞에서 소멸될 운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 단절의 문제를 풀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죽음을 넘어 참된 자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죽음의 단절을 넘어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이 가득한 소망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사람에게 혹은 다른 무엇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우리를 살리며, 우리에게 참다운 해방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임을 고백합니다. 늘 사소한 것에 매여 살며, 비본질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참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해방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